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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하고 비판하고 대안까지 제시해온 수많은 집단지성의 힘 | 기본 카테고리 2022-08-31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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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법률가들

김두식 저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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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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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문제인가,

법률가들이 문제인가,

설마(아니면) 둘 다인가.

 

이렇게 우울한 승소판결 소식은 처음이 아닐까 한다. 18년 지연된 정의…….

피의자들이 신나게 파티를 하거나 판결 담당자들에게 공로금을 하사할 판이다, 무려 18년이나 끌어줘서. 다 죽을 동안 질질 끌어줘서. 그럴 능력이나 남아 있다면, 그야말로 '사법부의 통렬한 반성'이 필요한 승소이다. 소송 제기 2000년, 2007년 원고 패소 판결, 2012년 2심 같은 판단, 2013년 파기환송심에서 미쓰비시 책임 인정……. 추악한 '양승태 대법원'이 박근혜 청와대의 요구로 선고를 지연시킨 전황이 최근 사법농단 수사에서 드러났다.

 

어느 나라 사법부이고 어느 나라 판사들인지.

더 격렬하게 궁금해 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궁금하다.

 

그에 더해 현재 일본 전범 기업을 상대로 한 손배 소송 10여건이 서울과 광주 등의 1,2심 법원에 계류 중이다. 제발 해당 법원들은 재판을 서두르라!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법원을 되새기라. 사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예방이 아니라면,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려온 피해자들의 눈물을 그치게 하는 판결이 아닌가.

 

다시, 현행법이 가진 법적 한계가 문제인가,

아니면 법률가들의 문제인가,

(정말) 둘 다 인가.

 

영국 유학 경험을 이유로 영어 과외를 신청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거절 이유를 무시하고 거절하기 힘든 이유를 들어 끝까지 관철하는 이들이 있었다. 소심한 '복수?'로 나는 늘 [세계인권선언]과 [대한민국헌법]을 함께 읽었다.

 

그런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한 번도 깨닫지 못했는데, 우리나라 헌법의 기본권 조항에는 모두 주어가 있는 점이 '특이한 일'이라고 한다. 다른 나라들에는 딱히 주어가 없거나 간혹 있어도 '모든 사람'이라 한다. 예를 들어 간단히 비교해보면, "예술과 학문, 연구와 강의는 자유이다(독일 헌법).",  "학문의 자유는, 그것을 보장한다(일본 헌법)",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대한민국헌법)", 즉, 대한민국에서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보장받으려면 국민이어야 한다.''

 

씁쓸하게도, 이런 구조는 일본이 1945년 패전 전까지 쓰던 메이지헌법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헌법 조항마다 '주어' '일본 신민'이라고 일일이 주어를 넣었다 한다.

 

대한민국 헌정사도 어쨌든 70년을 넘었고, 헌법재판소 개소년차가 30년이라 한다. 우리도 크게 어색하지 않게 위헌, 합헌이란 언급을 하며, 헌법에 따른 두 번의 대통령 탄핵절차의 경험이 있다.

 

그렇다고 헌법이 정치 세력들이 상대 정파 제압의 수단으로 동원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간혹 터무니없는 이론이 자의적으로 창조되거나 근거 없는 외국 판례가 판결에 사용되기도 한다고 한다. 그 사이에서 갈등이 불붙여질 것은 뻔한 일이며, 사법부는 대통령보다 더한 철밥통, 탄핵 없는 종신직을 보장받는 불합리한 국가가 대한민국이다.

 

인정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대한민국 헌법과 재판이 평균에 뒤떨어지는 이유는 역시나 제한된 역사적 경험일 것이다. 스스로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고민 없이 이식 모방되었고, 그런 이유로 어디를 고쳐야 하는 건지 파악도 못하는 것이 실상이다. 우리의 노골적이고 천박한 종교는 오랫동안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달성했다는 지나친 근자감이었고, 21세기에도 대통령을 탄핵할 이유가 넘치고, 판결은 거래의 대상인 부패한 나라다.

 

그렇다면, 법에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법률가들의 실상은 완결 무결한가.

 

종교와 이익집단들의 천국, 여러 마피아 조직들이 상성하는 대한민국의 현실 상 법률가들이 소위 법조계란 이름으로 그런 세력 하나쯤 형성해 두지 않았을리 만무하다.

 

만약, 이런저런 속 터지는 사법농단을 똑똑하게 이해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헌법의 풍경], [불멸의 신성가족] 등의 책을 통해 대한민국 법조계 분석의 끝을 놓지 않았던 김두식 교수의 3년 넘는 치밀한 조사 끝에 채워진 [법률가들]이란 책을 지나쳐선 안 된다.

 

해방 직후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임용 시험에 따른 권력 관계, 개개인의 이력, 사회적 숨은 맥락, 각종 이권 사건들의 분석 등을 통해, 현대에 선출되지 않는 권력으로 자리 잡은 사법부가 어째서 이런 몰골인지, 아니 애초부터 이들이 어떻게 선출되지 않고도 권력을 취했는지, 등을 통해 당시의 풍경들 뿐 아니라 오늘날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아주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1부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고등시험 사법과 합격자들

1장 독립운동가 집안의 아들, 친일검사가 되다

2장 친일과 반일 사이에서-1937년의 다른 합격자 강중인, 조평재, 오승근, 양원일

 

2부 이류에서 일류로 편입된 사람들-변호사시험 출신들

1장 허헌, 순수한 변호사 출신의 뿌리를 찾아서

2장 독학자의 등용문, 조선변호사시험 출신들

 

3부 벼락처럼 찾아온 해방, 새로운 기회의 시대

1장 한민당과 통역관의 시대-해방과 조선인 ‘자격자’의 판검사 임용

2장 저절로 굴러 들어온 별을 잡은 사람들, 그 별을 놓친 사람들

 

4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1장 서막-김계조와 법조계의 마지막 봄

2장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전개

3장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관여한 판검사들

4장 본정경찰서의 고문기술자들과 극우청년단체

 

5부 ‘법조프락치’ 사건

1장 ‘법조프락치’ 사건의 서막-여순반란, 국회프락치, 그리고 적색 사법관

2장 1차 ‘법조프락치’ 사건과 김영재

3장 2차 ‘법조프락치’ 사건과 이정남, 이홍규

 

6부 한국전쟁이라는 쓰나미

1장 우왕좌왕 각자도생, 우익 법률가들

2장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좌익으로 몰린 법률가들

 

7부 1980년대까지 이어지는 ‘이법회’의 문제

1장 법조계 역사의 유령, 이법회를 찾아서

2장 유태흥과 홍남순, 같은 뿌리 다른 인생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의 성명이 나는 낯설었다. 만약 당신도 이들이 낯설다면 이 책을 읽어 보기 바란다. 절대 읽히지 않을 종류의 숨 막히게 고루하고 딱딱한 문장들이라 짐작된다면, 그것은 기우이다. 정말 잘 읽힌다. 심지어 흥미진진, 재미지다. 책 읽기를 싫어하는 친구조차 재밌다고 하는 기적적 발화를 토해냈다.

 

그리고...... 결국 현재가 과거사를 고스란히 이어받을 도리밖에 없다면, 적어도 알고서 이어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기울어진 운동장의 토대, 갖가지 허상과 이데올로기들, 유의미와 거짓 윤리의식들, 그리고 다시 현실......

 

현실 속에서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눈 밝게 현실을 관찰하고 비판하고 대안까지 제시해온 수많은 집단지성의 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길 위에도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부디 이 충실한 이 연구를 외면하지 말고, 나와 관계없다 섣부른 결론을 내지 말고, 과거를 통해 현재 뿌리 깊고 깊게도 막힌 법조계 문제의 원인을 알아보고 좀 더 구체적인 희망을 함께 키워나갈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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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속에서 그렇게 아름답게 보인 것은 | 기본 카테고리 2022-08-31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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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아름다움의 선

앨런 홀링허스트 저/전승희 역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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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의 빛 속에서 그렇게 아름답게 보인 것은 그 길모퉁이만이 아니라, 그것이 길모퉁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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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상반기 한국소설의 키워드는 '페미니즘'과 '퀴어'라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충격적이었던, 아직도 너무나 생생하고 잔인하게 떠오르는 강남역 살인사건이 2016년, 어느덧 2년 전이었고, 문화예술계의 추악한 성폭력 고발과, 미투 운동으로 이어진 흐름 속에서,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이 억눌려 있던 상황을 공개적으로 발화하기 시작하면서, 해당 작품들의 양적 증가와 더불어 질적인 변화도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심은 단지 문단 내 현상만이 아니라, 예술계, 더 중요하게는 사회 전반적으로 중요한 의제가 되는 중이다. 이런 관심들이 어떤 가치들을 가지고 무엇을 바꿔나가고 있으며, 그 방향이 어딘지를 짚어 보려면 일단 여러 경로로 접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 '유행이니 일단 따라하고 본다'는 식이 아니라, 하나의 장르가 되도록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는 소설가들이 가능한 많이 전면에 등장하기를 바란다.

 

이전의 다른 문학 작품들 속에서 간접적으로 소환되거나 다른 가치 - 연대, 유대 -로 소환되었던 퀴어 소재가, 이제껏 그래왔든, 욕정뒤범벅, 사랑지상주의가 아니라, 당사자들의 삶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드러내 주었으면 한다.


그것은 글 쓰는 작가들에게도 독자들에게도 글쓰기 자체의 실험일 수도 있겠지만, 수용하는 감수성을 훈련하는 데에도 실험적인 경험이 될 듯하다. 국내 작가들로 박상영, 김봉곤 등이 있지만, 퀴어에 낯설고 거부감이 강한 경우, 거리감이 좀 있는 [아름다움의 선] 작품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680면이 넘은 대작이고, 영국식의 화법 - 질문 하나를 하는데도 온갖 예의와 미사여구를 붙이는 - 과 대처시대 영국의 역사에 대해 지식이 있는 경우, 접근성이 더 용이한 점이 분명하긴 하지만 말이다.

 

제1부 사랑의 화음(1983)
제2부 “자네는 누구에게 속하는 아름다움을 누리나?”(1986)

제3부 거리의 끝(1987)

 

일반적인 전체 감상은 이 작품이 굳이 맨부커 수상작이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전개 또한 1부의 장황한 묘사를 제외하면 속도감이 꽤 있다. 보수당, 대처주의, 동성애, 상류층의 실생활, 옥스포드 계급, 에이즈, 이민자, 중산층, 그리고 런던이라는 복잡하고 어지러운 조합을 세련되게 엮어내는 문장이 보여주는 저자의 힘 또한 굉장하다.

 

소수자로 분류되었을 뿐, 그 삶과 사랑이 다른 이들과 뭐가 그리 다르겠는가! 정도의 수용 능력만 있다면, 흥미롭고 등장인물들의 고군분투, 슬픔, 한계 등에 충분히 공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진실로 자신이 '아는 것'만 쓰는 작가의 진정성에 공감할 수 있다면, 대충 조사하고 건조하게 써내려간 작품들보다 생생하고 생동감이 더 하다. 매우 상세하고 현실적인 표현들이 도처에 자리한다. 거부감이 있던 독자라도 읽는 사이에, 개인과 사회의 무의미한 편견과 발화가 몹시 우스꽝스러운 것 이상이 아니라는 공감이 들 것이다.

 

결국 살아간다는 것 다 비슷비슷하지 않은가.

 

무분별한 판타지도 흥미꺼리도 아닌 충분히 의미 있고 멋진 소설이다.

 

한여름 밤의 아름다운 꿈처럼 육성으로 흘러나오는 감탄이 자연스러울 만큼 정말이지 아름다운 작품이다.

............................

 

때로 토비는 정원으로 가서 서둘러 셔츠를 벗어던지고 간이의자에 늘어져 『텔레그래프』의 스포츠 면을 읽기도 했다. 그는 다른 이들이 조정선수인 자신의 건장한 몸매에 감탄하는 것을 즐겼고, 그 사실을 익히 아는 닉은 발코니에서 그를 바라보거나 약간 숨가쁜 느낌으로 그에게 내려갔다. 윗도리를 벗어던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미(美)가 쉽게 베풀 수 있는 자선행위가 아닌가.
15-16면

 

여름은 모든 곳의 창문이 열리는 계절이라서 밤은 그림자로 이루어진 것만큼이나 소리로도 이루어진 것만 같았다. 나무의 바스락 소리, 잠들지 않는 차들의 부르릉 소리, 먼 곳의 자동차 경적과 브레이크를 밟을 때 나는 끼익 소리, 목소리들, 희미한 외침들, 주파수가 달라 토막토막 들리는 음악.
33-34면

 

바윅 출신의 작은 사내 닉 게스트, 흔해빠진 부모의 흔해빠진 아들인 그가 밤에 노팅힐의 정원에서 낯선 사람과 섹스하고 있다. 리오의 말이 맞았다. 너무 나쁜 짓이었고, 그런 만큼 자신이 한 짓 중에 최고였다.
63면

 

닉은 그 아파트의 허세 가득한 모습에 혼자 미소를 지었지만, 이곳 역시 자신이 공유할 수 있는 부에 대한 환상이자 사랑하는 남자의 주거지였으므로 페든가에서 그랬듯 약간 서글프고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부자들이 스스로를 위해 꾸민 편안과 편리, 그 사물들의 세계를 자신은 조심스레 들여다보며 잘 받아들인다고 그는 생각했다.
274면

 

요새는 일종의 사회적 역중력이 형성되고 있잖아.
사람들이 다들 위층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고.
336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변하는 자동차의 모습이란, 처음에는 견고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진 가능성들, 꿈의 빛과 날카로운 최면의 향기를 지닌 꿈의 대리자였다가 서서히 예상 밖의 괴팍함과 까다로움을 드러내고, 하나의 유행과 다른 유행 사이에서 창피스러운 물건으로 화해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588면

 

닉이 그를 만나기 전에 얼마나 많은 상상을 했는지, 그와의 첫 키스와 그의 몸에서 느낀 첫 감촉이 그때껏 머릿속에서만 살았던 청년 닉에게 얼마나 압도적인 경험이었는지 리오는 알지 못했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것이 그의 매력이자 아름다운 면이었다. 그러나 닉에 관한 한 그는 일종의 천재였다.
567-568면

 

"그 순간의 빛 속에서 그렇게 아름답게 보인 것은 그 길모퉁이만이 아니라,

그것이 길모퉁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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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올라갈 옥상이 있었으면 | 기본 카테고리 2022-08-3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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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저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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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서 만나, 시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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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에게 "옥상에서 만나요"라고 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것은 두려움일까,

설렘일까.

 

그 사람이 늘 우리에게 다정하게 손을 흔드는,

"선한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 주고 싶다"고 인터뷰하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현실의 온갖 고통을 겪는 이들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그러면서도 감사하게도 유머를 잃지 않는,

정세랑 작가라면,

나는 분명 기쁘게 뛰어 올라갈 것이다.

 

다들 맛있다니까 그렇겠지, 정도의 기대로 주문한 단품 요리가,

기대 이상으로 맛있어서 도저히 멈추지 못하고 다 먹어 치운 뒤의 기분이랄까,

이 단편이 그러했다.

 

강렬하고 재미있고 따뜻하고 때로는 쨍하게 마음을 찔러대는.

이렇게 재미있으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그야말로 생생하지만 논픽션이 아닌 작품을 쓰는 능력이란!

마치 "내가 (단편의 모든 장점을 지닌) 소설이다"라고 외치는 듯 한 작품이다.

소설집의 다른 단편들도 반드시 구해 읽어야한다는 의지가 훨훨 타오른다.

 

멸망, 절망에서 희망으로, 내 인생에서 모두의 인생으로 나아가는,

적정한 따스함을 가지고 다친 마음들을 어루만져 주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범죄와 폭력의 우리 현실에서 끊임없이 필요한 이야기.

그리고 정세랑 작가의 의지.

 

하...... 이젠 위협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과거의 내 감수성과 직장경험이,

별다르게 자극적인 사건묘사가 아닌 데도 너무도 생생해져서 마음이 다시 먹먹했다.

운이 좋은 누군가는 공감하지 못할 것이나,

나는 정말 많은 이들이 동일하거나 유사한 경험들에 고통스러웠고,

여러 형태의 자기 파괴와 자해의 상상, 생각, 혹은 실행을 경험했으리라 서글프게 말해본다.

 

문득......

 

나도 올라갈 옥상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옥상에서 만날 시스터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나에게도 [비서]를 쥐어준다면 좋겠다

는 오래되고도 새로운 바람이 일었다.

 

..........................................

 

당장 등을 떠미는 강렬한 욕구는 아니었어.

그보다 언제나 잔잔한 듯 느껴지지만 천천히 작은 눈금을 타오르는 위험 같은 것이었지.

방 안에 쌓이는 유해가스나 매년 높아지는 해수면처럼.

충동도 없이 무심하게 언젠가는 정말 점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불안마저도 둔하고 먼 것이었어.

3-4면

 

사무실에서 일한 시간보다 룸살롱에서 접대한 시간이 훨씬 길었던 것 같아.

망할 접대 문화......

나는 네오 황제처럼 온 강남의 룸살롱을 불태우고 싶었어......

여튼 나도, 부서 사람들도, 회사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었어.

우리가 업계의 누구도 손대지 못해 더러운 관행이지만 계속되는 일을 하며 돈만 까먹을 뿐,

생산적인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는 걸.

6면

 

비명을 지르고 싶은데 지를 수 없으니 머리를 잘랐던 것 같아.

그런 머리에 칼 같은 바지 정장을 입고, 나도 너희와 다르지 않으니 온당히 대해달라고 몸부림치며 요구했던 거지......

모든 게 점점 나빠지고 있었고, 나를 남자들과 똑같이 대해주는 건 룸살롱의 도우미 분들뿐이었지.

내가 자리를 뜨면 도우미 분들에게 험하게 할 것 같아서,

나는 독하게 독하게 마지막까지 남아 있곤 했어.

8-9면

 

언니들이 아니었으면 난 정말 뛰어내리고 말았을 거야......

세 사람은 마치 운명의 마녀들처럼, 다정하게 머리를 안쪽으로 기울이고 엉킨 실 같은 매일매일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함께 고민해주었어.

8면

 

하지만 아냐, 정말로 아냐, 나는 간절하고 신중했어.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었어.

그때까지의 인생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친근하게 팔을 잡는 척하며 손등으로 가슴을 건드리는,

아무렇지 않게 무릎을 치는 척하며 허벅지 안쪽으로 손가락을 돌리는 변태 아저씨들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변화를 원했어. 탈출을 원했어. 계급 상승을 원했어.

그 모든 것의 잡이 결혼이 아닌 줄 알면서도.

18-19면

 

남편을 소환하려다가 멸망의 사도를 소환해낸 여자라니.

한심하기도 했지.

사랑에 대한 염원이 아니라 똥 같은 회사에 대한 원망을 담아 빌었던 게 문제였을까?

도피 결혼에 대한 전근대적 저주였을지도 몰라.

하지만 따지고 보면 백퍼센트 도피 아닌 결혼이 어딨겠어?

여자들에겐 언제나 도망치고 싶은 대상이 있는걸.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도.

복받치게 억울했지.

24-25면

 

모친상을 당한 회사 동료,

힘들게 이혼한 친척언니,

유전병 증세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친구 오빠,

빚이 많은 아는 동생,

유학을 포기한 대학원생,

교통사고를 당한 운동선수,

대입 삼수생,

공무원 시험 오수생,

뇌종양 수술 후 후각을 잃은 요리사,

재활에 실패한 무용가,

험악한 이웃과 마찰을 겪은 캣맘,

일베로 가득한 교실의 여중생,

임용이 안된 만년 강사,

만년 아이돌 연습생,

도박 중독자,

텔레마케터,

환경운동가,

부인과 사별한 교감 선생님,

수해를 맞닥뜨린 농민,

혹사당하는 청년 인턴,

아토피가 심한 헤어디자이너,

이민에 실패해 돌아온 이민자,

대필 작가,

교도소 교도관,

구제역 돼지 생매장 직후의 관련인들,

각종 학대에서 겨우 벗어난 사람들,

무명밴드 베이시스트,

심각한 식이장애 환자,

20년 넘게 키운 앵무새가 죽은 사람,

진보 정치인의 부인,

극우 국회의원의 딸......

34-35면

 

이제 내가 있는 옥상은 뛰어내려도 살아남을 수 있는 높이야.

더는 뛰어내리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너는, 내 후임으로 왔다는 너는, 아마도 그 옥상에 자주 가겠지.

내가 너에 대해 이상한 책임감을 느끼는게 왜인지는 모르겠어.

분명히 말할께. 연민은 아냐. 연민은 재수없잖아.

그저 [규중조녀비서]를 받을 사람이 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뿐이야.

너는 분명 울테고, 운다면 비가 들지 않는 가장 안쪽의 에어컨 환풍기 위에 앉아 울겠지.

41면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모든 사랑 이야기는 사실 절망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그러니 부디 발견해줘.

나와 내 언니들의 이야기를.'너의 운명적 사랑을.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기이한 수단을.

옥상에서 만나, 시스터.

4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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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다양한 정신들로 채우는 것은 민트와 친구들의 의무 | 기본 카테고리 2022-08-30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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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민트의 세계

듀나 저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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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민트 갱은 하나의 재미있는 미래를 제시해 주었어요. 그리고 전 그 미래가 마음에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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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FICTION, SF는 '픽션'을 '공상'으로 변역하면서 언제나 2류 창작물로 취급받아왔다. 물론 세간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언제나 나의 애정은 SF와 추리에 머물렀으니, 늘 무척이나 궁금하고 선망하는 작가 '듀나'의 6년 만의 장편소설[민트의 세계]가 추리 미스터리, 누아르 스릴러, 블랙코미디의 면모를 띈"SF 미스터리"작이라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과연 한 권의 소설에 이 모든 장르적 재미가 결집될 수 있을까…….란 소심한 의심이 든 것은 사실이다.)

 

표지마저 어여쁜 이 책을 받아든 흥분을 뒤로 하고 가만 생각해보면, 이 책이 내가 글로 읽는 첫 번째 대한민국 SF 추리소설이다.

 

구성으로 들어가 보면 역시! '초능력' 소재가 사용될 때 흔한 것이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이 '초능력'을 얻게 되는 분투와 음모 등이 잘 사용되는데,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아니 전 인류가 이미 초능력을 갖고 있다!ㅎㅎ 그리고 주인공이 이미 죽었다! 남은 것은 주인공의 손가락……. 이를 신원확인해서 경찰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사건의 진실을 추리하는 형식이다.

 

참, 배경은 2049년 대한민국이다. 나로서는 2049년보다 대한민국에서의 SF가 더 상상이 잘 안되는데, 작가의 마치 아랑곳없이 속도전을 펼치듯 기대 이상으로 독창적이고 괴상한 2049년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십분 활용한다.

 

노예화시킨 염동력 자들을 소모품처럼 앞세워 싸움을 벌이고 그 뒤에 선 벌컨과 정신감응자 친구들이 한 명씩 우리 측 염동력 자들의 정신을 공략할 생각인 거다. 일차 목표는 손발 질이고 최종 목표는 세뇌를 통한 노예화다. 207면

 

2049년에도 시민들이 정부와 거대기업의 탄압에 시달리는 구성은 살짝 많이 우울하기도 했지만, 무려 '인천'에서 봉기가 일어나고 그 주역이 10들이라는 점이 마치 독립운동시대사가 소환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물론 싸움의 형식은 '만세운동'이 아니라 초능력 팩을 구성한 갱들의 초능력 대결이다.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어야 할 아이들이 SBI 연구소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정체불명의 괴물들을 날려 보냈다.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어야 할 아이들이 대기업과 군대와 세상에 맞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자기네들이 그럴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140면

 

가히 10대들의 대탈주극이다. 정신감응력, 염동력, 치유력, 비행술, 발화능력, 자폭능력……. 등등을 가진 채, 집을 나와 자립한 청소년들의 해방구 찾기!

 

그 중에서도 우리의 주인공 '민트'는 모두가 두려워할 만한 최고급 정신감응력을 지닌 소녀로, 초능력자 중에서도 영재들만 다닐 수 있는 LK 특수학교에서 탈출한 반항아다. 민트는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지닌 ‘케페우스’, ‘지연’, ‘믹서’, ‘징크스’를 규합해 초능력 엘리트 팩 ‘민트 갱’을 결성한다.

 

"선배가 땅바닥에 붙어 나에 대해 뭐라고 떠들어 대든 난 오늘 불꽃처럼 빛나며 날아오를 거야." 323면

 

‘놀아 볼래?’

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민트는 거의 무용처럼 우아한 동작으로 팔을 들어 가장 키가 큰 남자를 가리켰다. 그 순간 꺽다리가 몸이 둘로 접히더니 스프링처럼 튕겨 올라 문이 뜯겨 나간 교회 지하실로 나가떨어졌다. 염동력자의 실력 과시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꺽다리를 날린 건 나머지 네 사람의 염력이었다. 민트의 조종이 너무나도 은밀했기 때문에 그들은 두목을 교회에 처박은 것이 자기네들이라는 사실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85면

 

사실 이 쯤에서 나는 인터넷 게임을 전혀 하지 않았던 내 과거와 무지를 조금은 후회한다. 뭔가 최신 버전 게임 같은 명칭들과 분위기가 전개되는데, 그런 경험이 있었다면 몰두하기가 더욱 좋았을 거란 막연한 시샘이 들었기 때문이다.

 

구성에 있어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보통 작가가 소설의 등장인물들을 하나하나 고심하여 창조하고, 이름을 부여하고, 능력을 부여하고, 역할을 맡기며 애지중지할 것이란 나의 통념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마치 인터넷 프로필이 나열되는 것과 유사한 속도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한다. 신선하면서도 아찔한 구성이다.

 

심지어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인물이 한 챕터를 다 채워버리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화자로 등장해서 사건을 진행시킨다.

 

어쩌면 현실에서도 이와 같이 주변부 인물들과 불확실한 화자들과 조각난 단편들이 커다란 사건을 맞춰나가는 모든 부분들이고, 이를 퍼즐 조각처럼 하나하나 발견하여 맞추는 것을 즐길 수 있는 독자라면 아마 이런 구성에 큰 기쁨을 느낄 것으로 확신한다.

 

“정말 예뻐.”

등 뒤에서 아이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짜증이 난 그는 뒤로 확 돌았다가 기가 팍 죽어 버렸다. 아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네 명의 다른 사람들이 아이의 뒤에 서 있었다. 모두 비정상적으로 눈이 컸고 눈동자는 회색이었다. 두 명은 여자, 두 명은 남자. 모두 집단 율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같은 리듬으로 몸을 흔들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이 웅얼거리는 합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정말 예쁘다, 정말 예쁘다, 정말로 예뻐…….” 195~196면

 

물론 퍼즐 조각 맞추기만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결말부로 향해 가다보면 그야말로 짜릿하고 다소 충격적인 반전을 만날 수 있다.

 

나 자신을 포함해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하지만 그래봤자 우린 모두 우연의 파도 위에 생긴 거품일 뿐이다.

거대한 야망을 품은 가볍고 하찮은 거품들. 229면

 

영혼 생산 공장.

언젠가 누군가 이런 걸 만들어 낼 줄 알았지.

개념 자체는 신기하지도 않았다.

단지 이날이 이렇게까지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적어도 능력과 에너지의 정체가 밝혀진 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265면

 

적어도 내가 경험한 거의 모든 SF 작품들은 미래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작가들의 작품들이었다. 현재 우리가 저지르는 수많은 어리석음으로 인한 자연스런 예언의 형태로 대부분은 암울한 미래에 대한 묵시록이나 무거운 경고를 담고 있었다. 물론 우울하고 희망이 없으니 다 죽자~라고 끝맺는 작품은 없다. 그 속에서 경고와 반성을 통해 뭔가 절실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메시지를 잘 듣고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그 의미가 즐거움일 지 우울함일지 그저 놀라움일지는 독자의 몫이겠다.

 

“적어도 민트 갱은 하나의 재미있는 미래를 제시해 주었어요.

그리고 전 그 미래가 마음에 들었어요.

제가 결코 누리지 못할 지루하고 안정적인 삶 다음으로.” 295면

 

스스로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면서 번성하게 돕는 것,

그를 통해 우주를 다양한 정신들로 채우는 것은 민트와 친구들의 의무였다. 331면

 

마지막으로 새 세계가 도래하기까지 불안하고 초췌한 상태에서도 구 세계를 유지해나간 어른들에게, 누구는 어리석다 할 지 몰라도 내일을 예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아이를 낳고 학교에 보내고, 여전히 밥을 데워먹고 지하철을 타고 9시까지 출근을 하고 또 퇴근하는 모든 어른들, 매일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책임지는 어른들에게 같은 세대로서 진심으로 응원과 애정을 보낸다. 그래서 아이들은 꿈을 꿀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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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지 않아도 모두 아름다운 빨강 | 기본 카테고리 2022-08-30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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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똑같은 빨강은 없다

김경서 저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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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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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소방차 그리기 사생대회에 참가했다가,
소방차의 녹슨 부분도 제대로 그려냈다는 이유로 상을 받았다.

그래서였는지, 그 후 내 그림은 좀 더 실사답게, 좀 더 정밀하게로 자리 잡았고,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점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한층 더 연마되었다.

 

전생의 일 같긴 하지만 생각해보니 중, 고등학교 내내 미술부였고, 교과서와 그리기 지침들에 한해서는 범생이었던 시간이 길었는데, 결국 고등학교에서는 그림 한가운데 큰 나무를 그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화면을 분할한다거나, 붓이 아닌 스펀지나 칼로 그려본다거나 하는 일탈이 심화되었다.

 

당연히 대학은 '미술'과 관련된 분야로 가지 않았고, 그 단절이 꽤나 길어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엉뚱하게도 영국 유학 중이던 학교의 미술실에서 였다. 말없이 열심히 새 물감과 재료를 채워주던 담당 직원이 지금도 고맙고, '과학전공'인 내가 열심히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리던 것에 대한 주의언급없이 가끔 그림을 보러 와주던 학우들과 지도교수들이 그립다. 그 중 한 명이 내게 허락도 없이 내 그림을 엽서 크기로 잘라 연말연시 엽서로 모두에게 돌리자던 제안, 그리고 그 제안이 받아 들여졌던 경험은 뭐라 말할 수 없이 폭력적이지만 통쾌하고 강렬하고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런 것이 아닐까, 미술, 예술, 혹은 문화라는 것은!

취향껏 솔직하게, 집중해서, 표현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이야기해 보는 것.

취미 이상이 되면 단순히 마음을 담아 그렸어요! 이상이 되어야 하지만,
그래도 '상품'과는 달리, 최소 얼마에 팔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작품을 시작하는 것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직 미술교사이자 미술 평론과 기획을 하는 미술 비평가의 글이다. 중,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도 수차례 집필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상당한 분량의 미술 지식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무척 재미있다. 이런 미술선생님에게 배우는 후학들에게 슬쩍 시샘이 일 정도이다.

 

지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더구나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예술사 전반, 다른 문화지식도 필요할 것이다. "음악을 듣고 우는 사람에 비해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현저히 적다"라는 것은 사실이다. 확실히 그림은, 미술은 이해와 감상과 비평에 더 많은 '지식'을 요구한다.

 

오랜만에 범생이 흉내를 내며 책을  읽을 수 있어서 기뻤다. 또한 '선생님'이 자신의 후학들이 문화 예술을 제대로 향유하고 존중하면서 성장하도록 마음을 다해 길을 안내하고 앞을 밝혀 주려는 그런 의도가 잘 느껴져서 감동이 있다. 책의 화자가 중학생이라는 점이 가볍지만은 않은 이 책의 내용을 더욱 친근하고 쉽고 재미있게 풀어나가는데 일조한다.

 

확실히 이 책이 미술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길 중 하나라는 것에 이의가 없다.

미술이 고루한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것이라면, 액자 속에 담기 역사가 아니라 현재 우리 삶에 녹아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미술을 온전히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에도 좋은 지침서이다.

 

예술이 정말 문화의 꽃이라면, 행복한 삶을 위해 반드시 예술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시작을 이 책으로 삼는 것은 전혀 나쁜 선택이 아니다.

 

선생님이 강조하는 원칙은 단 한 가지뿐이다.

'솔직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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