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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2006-10-05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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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가되니 집을 관리할 시간이 잘 나지 않아

 

앞으로는 아빠의 집인 http://sonaki.pe.kr에 전세로 들어갑니다.

 

소나기홈-왼쪽에 있는 메뉴의 [★채카나]로 오세요.

 

계속 좋은 책 많이 읽고 소개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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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라마누잔을 생각하면서 | ↘『ⓓⓡⓔⓐⓜ★』 2006-06-03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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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라마누잔을 생각하면서』

󰠨

󰠨

󰠨  - 가끔씩 이런 생각이 들었다.

󰠨

󰠨

󰠨    “세상이 날 버렸다면, 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라는 말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수학자

󰠨

󰠨

󰠨    라는 것을 말이다.

󰠨

󰠨

󰠨    갈루아, 튜링 등의 수학자들을 보면 결국에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외면받게 되지만 그들의 수학

󰠨

󰠨

󰠨    적 지식으로 만든 새로운 수학세계는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은가.

󰠨

󰠨

󰠨    라마누잔 역시 카스트에서도 높은 브라만 계급이지만 가난하였고 우리나라 조선 후기와 같은 인

󰠨

󰠨

󰠨    도에서 수학이라는 학문을 연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현실로 만들었다.

󰠨

󰠨

󰠨    라마누잔은 불행한 인도 생활 대신 영국에서 자유로운 수학 연구를 택하게 된다. 그리고 왜 그

󰠨

󰠨

󰠨    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바뀐 기후와 식생활 때문에 위궤양, 암, 결핵, 패혈증 등의 병을 앓았

󰠨

󰠨

󰠨    음에도 휴식을 취하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 연구에 매달릴 뿐이었다.

󰠨

󰠨

󰠨    밝게 빛났다가 사라진 뒤 다시 빛나게 되는 천재 수학자들의 단명을 예측한 까닭일까...

󰠨

󰠨

󰠨    죽기전에 조금이라도 더 수학 연구를 하겠다는 그 의지. 그 10분의 1이라도 닮고 싶은 것이 솔

󰠨    

󰠨    

󰠨    직한 마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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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 2006-05-31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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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탈리 골드버그/권진욱 옮김/ 한문화

- 창의력의 비밀은 글을 첨가하는 것이 아닌 덜어내는 데 있다.

-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하고, 글을 쓰게 하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게 하라.

- 작가는 지식을 나누어 주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기 위해 글을 쓴다.

- 글쓰기 위해서는 세상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수용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집중력을 가져야 한다.

-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자신이 경험한 인생에 대한 확신을 키워나가야 한다.

※ 유언장, 건축에 비유, 제한된 시간에 글쓰기 하기(생각 집중)

-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자기 마음의 본질적인 외침 - 써라, 그리고 자신을 믿어라 자신의 요구가 무엇인지 배우라 - 첫 생각을 놓치지 말라

- 눈물을 넘어 진실을 파고들라

- 글쓰기 원칙

① 제한된 시간에 글쓰기 : 쓴 글을 읽기 위해 손을 멈추지 말라.

② 고치려고 하지 말라.

③ 철자법, 구두점 등 문법에 얽매이지 말라

④ 마음 가는대로 내버려 두어라

⑤ 생각하려 들지 말라, 논리적 사고는 버려라

⑥ 더 깊은 핏줄로 자꾸 파고들라

- 진짜 마음이 보고 느끼는 것을 쓰도록 하라.

- 첫 생각은 무엇인가? 첫 생각은 ego 또는 우리를 통제하려고 드는 논리적인 메카니즘에 얽매이지 않는 생각이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로 가득하다) 첫 생각에 굉장한 에너지가 들어있다. 처음생각을 파고들어라.

- 멈추지 말고 써라 - 달리기와 마찬가지로 글은 많이 쓰면 쓸수록 실력이 향상된다.

일기쓰기

- 글을 쓰는 것은 경험의 산물이 재생산되는 것이다.

- 우리 모두는 저마다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신화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 떠오른 글감을 메모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 글감노트 작성하고 활용하는 법

① 창 밖 풍경에 대해 겁내고 말고 용기 있게 무작정 멈추지 말고 계속 적어가라

②ꡐ기억이 난다ꡑ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보자 아주 작고 사소한 기억이라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모두 적어본다. 그러다가 중요한 기억이나 선명한 기억이 떠오르면 바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적어 내려간다. 멈추지 말라 계속 적어라.

③ 긍정, 부정, 중립의 관점에서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골라 아주 사랑하는 것처럼 글을 써보라.

④ 분흥색만 생각하며 15분 동안 산책한 후 관찰한 경험에 대해 15분 동안 적어보라 ⑤ 오늘 아침 자신의 모습 적기(식사, 기분, 본 것) 묘사

⑥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장소 시각화

⑦ 떠남에 대하여 (이혼, 외출, 전학, 실종, 친구 죽음)

⑧ 어린 시절 최초 기억

⑨ 사랑했던 사람

⑩ 살고 있는 도시

⑪ 조부모 묘사하기

⑫ 솔직하고 상세하게 접근하기

- 수영하기, 별, 무서웠던 일, 최초 성경험, 자연의 위대함을 깨달았던 체험, 영향을 준책이나 글, 육체의 한계와 극복, 존경하는 분

⑬ 시를 읽고 마음에 드는 부분 이어서 글쓰기

⑭ 동물이라 가정하고 글쓰기

- 직접 체험만이 체험의 전부가 아니다.

- 당신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 글쓰기는 훈련이다. - 문학작품 해석보다 작품 자체 속으로 몰입해야 한다.

- 작가와 작품은 별개다. 작품은 ꡐ순간ꡑ의 작가의 표출된 것이다. -

 은유를 위한 은유를 하지 말라. 평소 사고방식에서 한발 물러나서 머릿속을 지나가는 생각들을 기록해 보라. 은유의 세계는 안개 낀 저녁에 가로등이 켜진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처럼 모든 사물의 경계가 사라지게 된다.

- 글을 쓸 때는 모든 것을 풀어주라, 아주 쉬운 말로 단순하게 시작하고 당신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도록 애써라.

- 사람은 자기 내면의 세계를 표출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지니고 있다.

- 작가는 결국 자신의 강박관념에 대해 쓰게 되어 있다. 자주 출물해서 괴롭히는 것, 절대 잊을 수 없는 것, 자신의 육체가 풀려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이야기로 엮는다. 강박증의 변두리에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 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

- 변경된 상황에다 당신이 실제로 알고 있거나 보았던 것을 세밀하게 묘사해서 이식을 하다면, 그 글에 뛰어난 생동감이 생기며 개연성과 진실성이 배어나게 된다.

- 세부 묘사는 글쓰기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라. 덧없이 지나가 버리는 세상의 모든 순간과 사물들을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주는 것 그것이 작가의 일부다.

- 작가가 쓰는 글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재료로 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소중한 존재들이며,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하다.

- 삶의 모든 세부 사항들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다정하게 접촉한다.

- 경험에 당신 마음에서 나오는 열과 에너지를 첨가해야 한다. 아버지는 그냥 단순한 아버지가 아니다. 바로 당신만의 아버지여야 한다. 하나의 숨쉬는 생명체로 창조해야 한다.

- 자신을 둘러싼 것에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라

- 세부 묘사야말로 글쓰기의 기본요소이자 단위다. 세부 묘사가 빠진 추상적인 글쓰기에서 허점이 발견된다. 분명히 아주 웅장한 생각과 열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쓴 글이자만 누구도 읽어주지 않는다. 세부묘사를 사용하면 자신이 느끼는 환희나 슬픔을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 작가는 모든 것을 다시 곱씹을 두 번째 인생이다.

- 명작들을 읽고 또 읽어 당신 몸을 그들의 운율에 맞춰 춤추게 만들어야 한다.

- 글쓰기 90%는 듣기에 달려 있다. 집중하면 내면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 청취 훈련을 자신의 현실과 주변의 현실을 반영하는 아주 선명한 거울이 된다.

- 좋은 작가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 많이 일고. 열심히 들어주고 많이 쓰는 것, 그리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 글쓰는 목표가 무엇인지 알고 그 목표에 집중해 매달려야 한다.

- 사람에게는 꿈을 채워 나가는 기본적인 연장인 ꡐ글쓰기ꡑ가 있다.

- 나는 개를 본다. →내가 개를 보고 있는 동안 개도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문장 구조에서 벗어나 사유한다.

-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 독자들에게 당신의 감정을 강요하지 말고, 상황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감정의 모습을 그냥 보여주자는 말이다.

- 이야기에 글쓴이의 숨결을 불어넣어야 한다. 하고자 하는 말을 글쓴이의 방식으로 보여주면 된다.

- 평범한 진술만큼 정확한 표현이 없을 때도 있다. 사진을 들여다 보듯 하나하나 선명하고 분명한 어휘를 써야 한다.

- 이야기에 대해서 적지 말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라

- 사물의 이름을 불러주어 그 사물의 고유성을 만들어 주라 : 창가의 꽃 - 창가의 나팔꽃 - 생각이 아니라 사물 속으로 파고들라.

-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고, 한 송이의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ꡐ윌리엄 블레이크ꡑꡐ순수의 전도ꡑ - 글쓰기 속에 몰입하는 것이 좋다. 언제나 세상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한 몰입이어야 한다. - 평범과 비범은 공존한다.

- 모든 사물을 올바로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주 깊이 들어가야 한다.

- 사람은 혼자가 아니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

- 일상생활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도 작가들은 새로운 글감을 찾아낸다.

- 글쓰기는 시작할 때부터 좋은 것이며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어야 한다.

- 이야기 모임을 만들어라.

◎ꡐ네 멋대로 써라ꡑ데릭젝슨/ 김정훈 옮김 삼인출판

- 글쓰기 지도 원칙 : 자기 자신을 발건하도록 돕는 것

- 칭찬으로 가르치되 사소한 거짓말을 하지 말라.

- 삶은 글쓰기의 바탕

- 진짜 공부는 오직 자기가 찾아내고 자기걸로 만드는 공부뿐이다.

- 나를 비평하기 - 글에서 다른 사람 비평하기

- 첫문단에는 독자의 목을 움켜잡아라. 둘째 문단은 그의 숨통까지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러가. 그리고 마지막 단락에서는 그를 벽에다 눌러 놓아라

- 글쓰기 규칙

① 읽는 사람 자루하게 만들지 말라

- 재미, 흥미

② 내용이 읽을 가치가 있어야 한다.

③ 모든사물,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 영화 서스펜스(액션, 유머, 서스펜스 + 가르침)

- 교육이란 개체의 포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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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thinking... | ↘『ⓓⓡⓔⓐⓜ★』 2006-05-20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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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유산(한스 크리스티안 후프/북스토리) | 기본 카테고리 2006-05-20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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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황제의 유산

한스 크리스티앙 후프 저/오영훈 역
북스토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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Ł ø ş ŧ 역사 속에서 사라진 승자와 패자┌-Ð 프란시스 드레이크 경 - 여왕의 해적(1) 스페인의 비밀  콜럼버스가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래 채 반 세기 밖에 지나지 않는 동안 많은 변화가 생겼다. 풍부한 지하자원과 노동인력 등을 고루 갖추어 가히 부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아메리카를 스페인 혼자서 독점하게 된 것이었다. 루터교나 개신교들을 경멸하는 정통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은 로마의 교황으로부터 아메리카를 독점할 수 있다는 칙령을 받아낸다. 개신교 국가였던 영국 역시 이 칙령 때문에 스페인의 엄청난 부의 근원지인 아메리카를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돈이 바로 앞에 있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영국인이었던 홉킨스는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팔아넘기는 노예장사를 시작한다. 이 장사는 수입이 아주 짭짤했는데 스페인의 전함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아주 조심하면서 다녀야 했다. 바로 이 홉킨스와 인척간이었던 드레이크는 그 아래에서 선장의 지휘에 까지 올랐다. 그런데 수월히 스페인의 눈을 피해 다니던 이들에게 대단히 안 좋은 사건이 일어난다. 멕시코 만에서 큰 폭풍우를 만난 이들은 모든 배들과 인력들을 잃지 않으려면 가까운 항구로 피해야만 했다. 그러나 모두 스페인의 항구들 뿐. 다행히 영국과 스페인은 아직까지 적대 국가는 아니었고 형식상 동맹 국가였다. 물론 일이 꼬이면 잘 못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결국 일은 꼬이고 만다. 스페인 전함의 사령관이 영국 배들을 상대로 선제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이 치열한 포격전에 스페인과 영국 배들 모두 피해를 많이 입어서 수 척이 침몰했다. 결국 일부 영국인들은 붙잡혀서 끔찍한 일을 당하였는데 드레이크는 도중에 상황을 알아차리고 도망을 간다. 이 일로 홉킨스와는 사이가 벌어졌는데 드레이크는 자신의 배, ‘황금 사슴호’를 가지고 파란만장한 해적 일생을 시작하게 된다.(2) 수수께끼 해적 근거지  이제 확실히 적이 된 스페인이 장악하다 못해 눌러 앉아버린 카리브 해 일대에서 해적질을 하려면 확실한 근거지가 필요했다. 드레이크는 결국 아주 이상적인 근거지를 발견해낸다. 가까운 스페인 근거지에서 수 백 km떨어져 있는 곳에 항구로 적합한 곳이 있었는데 그 항구에서 아주 조금만 밀림 속으로 들어가면 과일도 있고 물도 있으며 살기 적합한 곳이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근대까지도 게릴라들의 은신처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근거지를 마련한 드레이크는 본격적인 해적질을 시작한다. 드레이크의 본선은 ‘황금 사슴호’였는데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길이는 30m, 폭은 6m밖에 안되는 아주 작은 배였다. 그러나 이 배는 해적의 생명인 속도를 한껏 살릴 수 있도록 설계되어있었고 최첨단 대포들도 잔뜩 실어져 있었기에 가히 최고의 전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드레이크는 호위선이 없는 운송선을 공격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보통 해적들이 넘치는 카리브 해였기 때문에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 스페인 근거지를 습격한 일을 계기로 드레이크는 유명한 해적이 된다.(3) 불의의 습격  드레이크는 부하들과 아주 대담한 공격 작전을 편다. 근처의 한 스페인 거점을 털기로 한 것이다. 그 곳은 성수기에는 활기에 넘치고 붐비는 곳이고 비수기에는 아메리카 각지에서 모여든 물품들을 모아두는 곳이었다. 드레이크는 그 곳을 지키는 스페인 함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작은 보트를 타고 잠입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들키게 된다. 이쯤 되면 능력 있는 대장도 후퇴를 명령하기 마련인데 드레이크는 무모하게도 창고로 돌진을 명령한다. 창고까지 돌진한 드레이크와 그의 부하들. 그러나 드레이크는 스페인 군과의 총격전에서 다리를 관통당하고 만다. 드레이크 없이는 돌아갈 수 없는 부하들이었기에 부하들은 드레이크를 호휘하며 후퇴한다. 사실 이 창고에는 마침 별다른 것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잠입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별 얻을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스페인 군을 뚫고 중심부까지 용감히 돌격한 이 해적 대장에 주목하게 된다.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 이유를 드레이크는 곧 알아챈다. 바로 그는 스페인 군 안의 사정에 어두웠던 것이다. 그는 스페인 군 안에 스파이를 심어놓아야 했다. 그의 눈에 걸려든 것이 인디언들. 스페인 군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인디언들은 선뜻 드레이크에게 많은 정보를 갖다 주기 시작하고 음식 같은 것도 지원해준다.(4) 여왕의 해적  그 때까지만 해도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스페인의 필립 2세와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드레이크를 공식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람 좋고 말재주 뛰어나며 모든 면모가 훌륭했던 드레이크를 만나보고는 곧 후원을 시작한다. 이 사실에 매우 분노한 필립 2세는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당시 최고의 함대인 무적함대를 출격시킨다. 사실 필립 2세는 드레이크에게 많은 피해를 당하고 있었기에 그 분노는 더 컸다. 드레이크가 운송 중인 보물들을 육지에서 약탈하기도 하고 스페인으로 가는 운송선을 나포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의 직위를 받은 드레이크 경의 지휘아래에 있던 영국 함대의 작전에 말려든 무적함대는 모두 패배하고 만다. 해적 습관을 버리지 못한 드레이크에게 군함까지 약탈당한 스페인은 기력을 잃고 만다.(5) 승리와 종말  스페인 쪽에서 잡으려고 그렇게 안달이었던 드레이크 경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잡히지 않는다. 불패무적의 신화를 창조한 이순신과는 또 다른 모습의 선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드레이크는 늙어가면서 점점 그 판단력이 흐려졌는지 많은 실책을 범하기도 하고 바로 옆에 지나가는 운송선을 몰라보기까지 한다. 결국 다시 손을 잡은 홉킨스가 죽은 뒤 곧 카리브 해의 열병에 걸려 파란만장한 삶을 마친다. 그의 시체는 부하들에 의하여 그가 누비던 카리브 해 어딘가에 버려지게 된다.
//김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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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유산(한스 크리스티안 후프/북스토리) | ↘『독서후기』 2006-05-20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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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황제의 유산

한스 크리스티앙 후프 저/오영훈 역
북스토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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Ł ø ş ŧ 역사 속에서 사라진 승자와 패자

┌-Ð 프란시스 드레이크 경 - 여왕의 해적
(1) 스페인의 비밀
  콜럼버스가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래 채 반 세기 밖에 지나지 않는 동안 많은 변화가 생겼다. 풍부한 지하자원과 노동인력 등을 고루 갖추어 가히 부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아메리카를 스페인 혼자서 독점하게 된 것이었다. 루터교나 개신교들을 경멸하는 정통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은 로마의 교황으로부터 아메리카를 독점할 수 있다는 칙령을 받아낸다. 개신교 국가였던 영국 역시 이 칙령 때문에 스페인의 엄청난 부의 근원지인 아메리카를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돈이 바로 앞에 있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영국인이었던 홉킨스는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팔아넘기는 노예장사를 시작한다. 이 장사는 수입이 아주 짭짤했는데 스페인의 전함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아주 조심하면서 다녀야 했다. 바로 이 홉킨스와 인척간이었던 드레이크는 그 아래에서 선장의 지휘에 까지 올랐다. 그런데 수월히 스페인의 눈을 피해 다니던 이들에게 대단히 안 좋은 사건이 일어난다. 멕시코 만에서 큰 폭풍우를 만난 이들은 모든 배들과 인력들을 잃지 않으려면 가까운 항구로 피해야만 했다. 그러나 모두 스페인의 항구들 뿐. 다행히 영국과 스페인은 아직까지 적대 국가는 아니었고 형식상 동맹 국가였다. 물론 일이 꼬이면 잘 못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결국 일은 꼬이고 만다. 스페인 전함의 사령관이 영국 배들을 상대로 선제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이 치열한 포격전에 스페인과 영국 배들 모두 피해를 많이 입어서 수 척이 침몰했다. 결국 일부 영국인들은 붙잡혀서 끔찍한 일을 당하였는데 드레이크는 도중에 상황을 알아차리고 도망을 간다. 이 일로 홉킨스와는 사이가 벌어졌는데 드레이크는 자신의 배, ‘황금 사슴호’를 가지고 파란만장한 해적 일생을 시작하게 된다.

(2) 수수께끼 해적 근거지
  이제 확실히 적이 된 스페인이 장악하다 못해 눌러 앉아버린 카리브 해 일대에서 해적질을 하려면 확실한 근거지가 필요했다. 드레이크는 결국 아주 이상적인 근거지를 발견해낸다. 가까운 스페인 근거지에서 수 백 km떨어져 있는 곳에 항구로 적합한 곳이 있었는데 그 항구에서 아주 조금만 밀림 속으로 들어가면 과일도 있고 물도 있으며 살기 적합한 곳이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근대까지도 게릴라들의 은신처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근거지를 마련한 드레이크는 본격적인 해적질을 시작한다. 드레이크의 본선은 ‘황금 사슴호’였는데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길이는 30m, 폭은 6m밖에 안되는 아주 작은 배였다. 그러나 이 배는 해적의 생명인 속도를 한껏 살릴 수 있도록 설계되어있었고 최첨단 대포들도 잔뜩 실어져 있었기에 가히 최고의 전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드레이크는 호위선이 없는 운송선을 공격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보통 해적들이 넘치는 카리브 해였기 때문에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 스페인 근거지를 습격한 일을 계기로 드레이크는 유명한 해적이 된다.

(3) 불의의 습격
  드레이크는 부하들과 아주 대담한 공격 작전을 편다. 근처의 한 스페인 거점을 털기로 한 것이다. 그 곳은 성수기에는 활기에 넘치고 붐비는 곳이고 비수기에는 아메리카 각지에서 모여든 물품들을 모아두는 곳이었다. 드레이크는 그 곳을 지키는 스페인 함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작은 보트를 타고 잠입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들키게 된다. 이쯤 되면 능력 있는 대장도 후퇴를 명령하기 마련인데 드레이크는 무모하게도 창고로 돌진을 명령한다. 창고까지 돌진한 드레이크와 그의 부하들. 그러나 드레이크는 스페인 군과의 총격전에서 다리를 관통당하고 만다. 드레이크 없이는 돌아갈 수 없는 부하들이었기에 부하들은 드레이크를 호휘하며 후퇴한다. 사실 이 창고에는 마침 별다른 것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잠입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별 얻을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스페인 군을 뚫고 중심부까지 용감히 돌격한 이 해적 대장에 주목하게 된다.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 이유를 드레이크는 곧 알아챈다. 바로 그는 스페인 군 안의 사정에 어두웠던 것이다. 그는 스페인 군 안에 스파이를 심어놓아야 했다. 그의 눈에 걸려든 것이 인디언들. 스페인 군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인디언들은 선뜻 드레이크에게 많은 정보를 갖다 주기 시작하고 음식 같은 것도 지원해준다.

(4) 여왕의 해적
  그 때까지만 해도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스페인의 필립 2세와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드레이크를 공식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람 좋고 말재주 뛰어나며 모든 면모가 훌륭했던 드레이크를 만나보고는 곧 후원을 시작한다. 이 사실에 매우 분노한 필립 2세는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당시 최고의 함대인 무적함대를 출격시킨다. 사실 필립 2세는 드레이크에게 많은 피해를 당하고 있었기에 그 분노는 더 컸다. 드레이크가 운송 중인 보물들을 육지에서 약탈하기도 하고 스페인으로 가는 운송선을 나포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의 직위를 받은 드레이크 경의 지휘아래에 있던 영국 함대의 작전에 말려든 무적함대는 모두 패배하고 만다. 해적 습관을 버리지 못한 드레이크에게 군함까지 약탈당한 스페인은 기력을 잃고 만다.

(5) 승리와 종말
  스페인 쪽에서 잡으려고 그렇게 안달이었던 드레이크 경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잡히지 않는다. 불패무적의 신화를 창조한 이순신과는 또 다른 모습의 선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드레이크는 늙어가면서 점점 그 판단력이 흐려졌는지 많은 실책을 범하기도 하고 바로 옆에 지나가는 운송선을 몰라보기까지 한다. 결국 다시 손을 잡은 홉킨스가 죽은 뒤 곧 카리브 해의 열병에 걸려 파란만장한 삶을 마친다. 그의 시체는 부하들에 의하여 그가 누비던 카리브 해 어딘가에 버려지게 된다.

//김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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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1-4(KBS 역사스페셜/효형출판) | ↘『독서후기』 2006-05-20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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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역사 스페셜 세트

KBS 역사 스페셜 원저
효형출판 | 2004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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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1

동북아 패권 다툼, 고구려․수나라 전쟁
―▶ 수양제가 고구려를 치려던 까닭은?
   중국을 통일했지만 진시황제의 진나라처럼 채 100년도 유지를 못한 수나라. 수나라의 멸망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건에는 고구려 침략과 대운하 건설이 있다. 수나라의 양제는 양자강과 황하를 잇는 1600km의 대운하를 건설하여 여러모로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그에 따른 백성들의 원성이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대운하야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해도 되지만 왜 고구려를 침략한 것일까? 더욱이 수나라가 중국통일을 하는데 50만 명의 군사를 쓴 반면 고구려 침략에는 수륙군 모두 합쳐 100만 명의 훨씬 넘는 대군을 사용한다. 고구려가 조공을 받치지도 않고 고개를 숙이지도 않는 등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쉽사리 이해가 가지는 않는 부분이다.
―▶ 천하의 중심은 어디인가
   고구려는 5세기에 중국이 많은 혼란한 상황을 틈타 북경 근처까지 진출한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백제에게서 항복을 받아내고 신라에 군대를 주둔시킨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개토대왕의 비문에는 태왕, 사해, 천손 등의 표현을 쓴다. 천손 등의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고구려는 천하의 중심일 정도로 강성했던 것이다. 그런데 수나라가 서쪽의 천하의 중심이 된 상황에서 천하의 중심은 수나라와 고구려로 나누어 질 수밖에 없었다.
―▶ 문명대전
   고구려와 수나라가 공존할 당시 몽골 쪽에는 돌궐이 자리 잡고 있었고 중국 서쪽에는 그 유명한 사마르칸트가 무역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돌궐 지방에 세워진 비문에는 고구려 사신이 다녀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사마르칸트의 벽화에는 고구려 사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 먼 거리까지 고구려의 손길이 뻗쳤던 것이다. 더욱이 고구려는 중개무역 등으로 많은 이문을 남기고 있었기에 새로 등장한 수나라의 입장으로서는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 수나라의 신무기들
   청나라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많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중국(물론 지금은 그 반대이다.). 당시 수나라도 고구려보다 더 많은 신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신무기는 총 5개로 엘리베이터처럼 움직이면서 적을 살피는 소차, 투석기라고 할 수 있는 발석차, 성문을 부수기에 아주 효과적인 당차, 성벽 밑을 파고들어갈 수 있도록 방어해주는 전호피차, 사다리를 효과적으로 올려주는 운제가 있다. 수나라의 배들도 고구려의 것들보다 거대했다. 그러나 이 모든 신무기들도 고구려의 성 앞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 난공불락의 고구려 성
   북방의 산지 땅이 많고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던 고구려이기에 북쪽에는 많은 산성들이 있었다. 죽 늘어선 산성들은 만리장성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는데 이 효과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입 때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특히 당나라의 태종이 이끄는 대군을 맞아 요동성은 길게 항전하였으며 작은 산성이었던 안시성은 당나라의 군대를 패퇴시키기도 하였다. 수나라의 침입 때에도 고구려의 성들은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그런데 고구려 성들은 왜 난공불락이라 불릴 정도로 튼튼했던 것일까? 고구려의 성들에는 공통점이 2가지 있었다. 치라는 것이 있었는데 성벽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튀어나오는 부분이었다. 이 부분을 이용해 고구려 군사들은 3면에서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성벽에는 옹성을 쌓아서 적들이 쉽게 성문을 공격할 수 없었다.
―▶ 전쟁이 끝난 뒤
   모두가 알듯이 전쟁이 끝나자 국력이 쇠퇴한 수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그러나 승리한 고구려도 치명상을 입고 점점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후에 고구려는 당 태종의 침략을 간신히 막아낸 이후 연개소문의 집권 아래에 잠깐 빛을 보기도 하였지만 결국 멸망하고 만다.


 

역사스페셜 2

1. 가야인도 성형수술을 했다.
―▶ 가야무덤의 인골
   경남 김해시 예안리의 한 농촌 구석에서는 그동안 간간히 가야 시대 유물들이 발견되곤 했다. 그래서 대대적인 발굴을 해보자 의외로 많은 가야 시대 유물들과 함께 190여 개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가야 시대 인골들 중에 이상한 두개골이 몇 개 있었다. 아주 특이한 형태여서 가야 시대 두개골과도 다르 지금까지 한 번도 연구되지 않은 형태였다. 얼굴 폭이 넓고 미간에서 정수리까지의 길이가 훨씬 짧은 두개골로 대단히 특이했다. 이 두개골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변한 것일까? 그 이유는 아주 뜻밖이었다. 성형수술…….
―▶ 가야여인의 성형수술, 편두
   중국의 전족 풍습은 조금의 관심만 있다면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어렸을 때부터 발을 헝겊 등으로 꽉 감싸서 발이 커지게 하지 않으면 그것이 미(美)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이 전족 풍습은 여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용도로도 악용되었다. 그런데 중국여인들이 전족을 했다면 우리나라의 가야여인들은 편두를 했다. 고전 판 성형수술인 편두는 무엇일까? 사람이 갓난아기일 때는 신체의 모든 부분이 약하고 쉽게 변형된다. 가야인들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한 것인데 편두에는 2가지 방법이 있었다. 한 가지는 잘 움직이지 않는 갓난아기의 이마 위에 커다란 돌을 올려놓아 이마 두개골이 머리 위쪽으로 휘어지게 한 것이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머리 양 쪽에 단단한 것을 댄 뒤 끈으로 묶어서 고정 시켜 놓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정말 가야인들이 원하던 모양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잘 못하면 두개골이 얇아져서 뚫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풍습이었다.
―▶ 인골을 통해 본 가야인의 삶
   가야인들의 인골 속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골반 뼈도 출토되었다. 이를 통하여 남자, 여자 뼈를 가려내었는데 다른 뼈들과 추정해 본 결과 가야인의 평균 키는 1900년 대 보다 좀 더 컸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과는 달리 신생아들의 사망률이 높았던 만큼 무덤 속에는 옹관묘에 아기들의 뼈가 들어있기도 하였다. 그런데 인골들은 우리에게 더 많은 정보를 준다. 가야인들은 얼마나 이빨을 많이 사용했는지 30대가 되어도 이빨의 3분의 2가 닳아 없어졌고 대부분 옥니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어떤 가야인은 축농증이 얼마나 심했던지 그 고름이 입 천장을 뚫은 흔적이 보이기도 하였다.


2. 연개소문, 독재자인가 영웅인가?
―▶ 중국인들이 두려워했던 연개소문.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는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대결에서 설인귀가 이기는 경극이 유행했었다고 한다. 이 경극에서 연개소문은 엄청난 덩치에 칼을 5개나 차고 무시무시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장군으로 묘사되었었는데 연개소문이 설인귀에게 진 것은 모욕이라며 북한이 경극 중단 요구를 해서 결국 경극은 중단 됐다고 한다.
 경극에서 묘사된 연개소문의 무서운 생김새에서 보듯이 옛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했다. 비록 신라를 적으로 만들면서 나당 동맹을 맺게 한 장본인이지만 적어도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당나라 군대에게 매번 패배를 안겼다.
―▶ 645년, 연개소문과 당 태종.
   중국 대륙을 통일한 당나라는 북방의 돌궐과 고구려에게 많은 위협을 느꼈다. 특히 고구려는 그 힘이 아직도 막강해서 더욱 위협을 느낀 듯싶다. 결국 당나라는 고구려에게 신라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라며 시비를 걸게 된다. 사실 당나라가 요구한다고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쟁 때 뒤를 친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출 리가 없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당연히 말도 안 된다는 답신을 보내었고 당 태종은 육, 수군을 모두 동원하여 총 공세를 시작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 태종은 요동성을 간신히 점령한 뒤 요동성과 주변의 작은 성들에게 60만 석의 군량미를 획득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 태종은 작은 산성이었던 안시성에서 발이 묶인 뒤 결국 대패를 당하고 퇴각하고 만다. 퇴각하는 당 태종의 이유는 군량미가 부족하다는 이유. 60만 석이나 되는 군량미를 그 단시간 안에 소비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아마 고구려가 다시 그 군량미를 빼앗았거나 부풀려진 전과 일 수도 있다.
―▶ 당군은 왜 요하 하구로 퇴각했나?
   당군의 퇴각기록을 보면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당 태종은 눈에 화살을 맞아 큰 부상을 당한 상태(이 부상은 실제가 아니고 무용담일 확률이 더 높다.)이고 당시 겨울만 되면 늪으로 변하던 요하 하구에서의 원활한 후퇴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늪을 건너기 위해 사투하면서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간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왜 당군은 가장 최악의 길인 요하 하구로 퇴각한 것일까? 그만큼 당군은 급박했던 것이었다. 원래 10만의 수군이 군량미를 날라야 하는데 고구려의 비사성에 기지를 둔 고구려 수군에게 막혀서 보급로가 끊긴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구려의 반격은 실로 거세였다. 당 태종이 본국 깊숙한 곳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쉬고 옷을 갈아입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 연개소문은 대당 강경론자였다.
   당나라가 개국할 당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 장수왕 -> 문자명왕으로 이어지는 전성기에서 점점 쇠퇴하고 있었다. 남쪽의 많은 영토는 신라에게 빼앗긴 상태였고 온달 장군의 남쪽 영토 수복 시도가 실패하면서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북쪽에서는 돌궐이 힘을 키웠고 중원에서는 당나라가 새로운 패자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자 영류왕은 당나라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당나라의 요구는 거의 다 들어주었고 수나라를 패퇴시킨 것을 기념하던 건축물까지 부수게 된다. 이런 행위가 너무나 마음에 안 들던 대당 강경론자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살해하게 된다. 그리고 보장왕을 왕에 추대하고 자신은 당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 연개소문은 만리장성을 넘었나?
   만리장성 너머에는 고려관이라는 옛 지명을 가진 곳이 있다. 이곳은 고구려 군대의 기지로 추정되었는데 그렇다면 연개소문의 당 태종 추격군은 만리장성까지 넘은 것일까? 이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만리장성이 비록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것이지만 한 쪽이 함락되면 만리장성 전체가 적의 수중에 넘어가기 때문에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이에 반해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곳곳에 위치한 산성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10개 성 중 1개 성은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었다.).
―▶ 연개소문 이후의 고구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는 당나라의 침입이 매번 실패하였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사망하게 된다. 이때부터 고구려에는 패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연개소문의 세 아들들이 서로 대막리지 자리를 두고 다투다가 결국 형제 일부가 당나라로 건너가 버린 것이었다. 결국 연개소문의 한 아들의 안내로 평양성까지 진격한 나․당 연합군. 대막리지가 된 연개소문의 둘째아들 남건은 보장왕이 투항한 뒤로도 계속 항전을 계속했지만 결국 포로가 되고 만다. 연개소문의 통치 아래 묻혀 있던 고구려의 내부 갈등이 결국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이다.

역사스페셜 3

1. 고려 말 왜구는 정예부대였다.
―▶ 왜구 장수의 무장 수준
   왜구가 극성이기 시작한 고려 말에 일어난 황산대첩에는 특이한 왜구 장수가 등장한다. 바로 중무장을 한 채 고려군을 휘졌고 다니던 소년 장군. 이 ‘아기발도’라는 왜구 소년 장수 때문에 당시 고려군에는 이성계 등 유능한 장군들이 있었음에도 쉽게 승기를 잡지는 못했다. 이성계는 화살을 아기발도의 가슴팍에 명중시키기도 하였으나 아기발도의 철갑옷에 맞고 튀어져 나왔다. 다른 장군들이나 부하들이 날린 화살도 같은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 때 이성계가 신기에 가까운 활 솜씨로 아기발도의 투구 끈을 맞춘다. 그 때문에 투구가 벗겨지자 그 순간을 틈타 부하가 화살을 날려 아기발도를 죽이게 된다. 비록 아기발도를 처치하기는 했지만 그 중무장을 보아 왜구가 단순한 해적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왜구의 전투 능력과 규모
   왜구의 주요 침탈 지역은 남해안 지역과 서해안의 금강 하굿둑(하구둑이 아님.) 주변이었다. 특히 금강 쪽으로 500척이 넘는 선단으로 침입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 500척이라는 숫자만 보아도 왜구의 숫자가 상상이 될 것이다. 조선시대의 전 수군 배들을 합쳐도 수백 척이라는 숫자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 왜구들은 진주 쪽으로 침입을 하였는데 왜구의 보병 숫자는 진주에서 5000명 정도였고 기병도 1600명 정도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더욱이 상륙할 때 일어난 대, 소규모 전투에서 죽은 왜구들까지 합하면 넉넉히 1만이라고 할 수 있으니 사단 정도의 군사력은 되었을 것이다. 설마 이 많은 왜구들이 모두 해적은 아니지 않겠는가? isn't it??
―▶ 전략․전술을 통해 본 왜구의 실체
   고려 말 진포에서 패배를 당한 왜구들의 잔당들 중 70명은 무등산의 험준한 규봉암에서 농성전을 한다. 규봉암은 3면이 절벽이고 입구는 단 하나이기 때문에 이 잔당들은 그 지형을 살려서 방어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충청남도 홍산에서 연승을 하던 왜구가 험준한 산 지형을 이용해 방어하여 최영 장군이 화살까지 맞아가면서 간신히 승리를 이끌어 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왜구들은 유인작전까지 구사한다. 이것으로 보아 왜구는 군사 훈련을 받은 정예 군사들이었다.
―▶ 왜구가 노린 것
   우리가 대부분 알고 있듯이 왜구들은 주로 식량을 얻기 위해 침입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진짜로 왜구들의 초기 침입 취지는 식량 약탈이었는데 고려의 문화재들이 일본에서 비싼 값에 팔리자 문화재까지 약탈해 가는 도둑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고려의 문화재들이 우리나라릿?다른 나라에 더 많은 안타까운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
―▶ 왜구 침략의 시대적 배경
   가마쿠라 막부의 후기에 천황 자리를 놓고 두 세력이 맞붙게 된다. 그런데 수가 더 많던 쇼니 군이 기구치 군에게 기습을 당하여 패배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 많은 수의 부하들을 휘하에 두고 있던 쇼니 군은 재기를 위해 군량미 등이 필요하게 된다. 당시 대마도는 이 쇼니의 아래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대마도도 식량을 고려에서 약탈해 오는 현실이었기에 쇼니의 군대는 군량미를 위해 고려를 침탈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사스페셜 4

『평양성, 난공불락의 비결』
-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은 당대 최고의 철옹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고구려 역사상 한 번도 밖에서의 공격에 함락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망할 때 평양성이 함락된 이유는 당나라와 밀통한 한 중이 성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① : 평양성은 당대 세계 최대였다.
- 오래 전의 성이기에 완벽하게 보존 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평양성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더욱이 성의 동쪽과 서쪽은 대동강과 보통강을 자연 해자로 삼았고 북쪽은 금수산의 험준한 절벽으로 방어했으며 성벽이 무려 16km나 되는 평양성이다. 더욱이 처음에는 성벽에 성벽보다 더 높은 높이로 흙을 쌓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는 토성인데 안은 돌로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북성, 내성, 중성, 외성으로 나누어서 한 곳이 함락되더라도 나머지 성들이 방어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결국 중간 중간의 성벽 길이를 겉 성벽 16km에 더하면 중국의 장안성 보다 긴 23km가 된다.
② : 글자를 새긴 성돌의 비밀
- 이 고구려의 평양성은 분명 최고의 성이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역사서에는 단 두 줄의 기록 밖에 없다. 시작 년도와 공사를 마친 년도였는데 놀랍게도 완성하는데 42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평양성의 축조과정은 역사서가 아닌 돌에서 찾을 수 있다. 평양성을 쌓을 때 그 구간을 나누어 구간 마다 책임자를 두었기 때문에 구간마다 돌에 여러 가지 내용이 새겨져 있다.
③ : 왜 화려한 안학궁을 버리고 평양성으로 옮겼을까?
- 대제국이었던 고구려의 첫 수도는 지금의 집안에 있는 국내성이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장수왕은 남진정책을 취하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게 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직 평양성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고 천혜의 요새이며 커다란 식수용 유원지까지 있는 대성산성과 화려한 안학궁 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장수왕은 평소에 평지의 안학궁에서 머무르다가 전시가 되면 대성산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점점 다른 나라들이 힘을 키워가고 북쪽으로는 돌궐이, 남쪽으로는 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가 침입해 와서 고구려는 좀 더 강력한 도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김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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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5-7(KBS 역사스페셜/효형출판) | ↘『독서후기』 2006-05-20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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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5

『조선왕조 기피인물 1호 허균.』

- 허균은 동인들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허엽의 아들이다. 당대 세력가의 아들이었고 그의 누이인 허난설헌과 다른 형제들이 모두 뛰어난 문장가였고 재능이 많았기에 출세할 기회는 많았다. 그러나 허균은 얼마 되지 않는 벼슬 기간 동안 무려 6번이나 파직되고 복직되기를 반복하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 이유는 다음처럼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 : 기생과 놀아나는 경박한 인물이다?
- 허균이 여러 벼슬자리를 거치면서 파직의 이유가 된 가장 많은 사유는 바로 기생들과 많이 어울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 황진이나 계월 등과 같이(KBS 불멸의 이순신에도 문장과 시에 뛰어난 기생이 나온다.)문장과 시에 뛰어난 기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허균은 기생들과 같이 지내며 글을 주고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 것이 조정에서는 일에 태만하고 기생들과 어울리기만 한다고 전해졌기 때문에 파직의 사유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허균은 기생들과 놀기만 하는 경박한 한량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② : 천한 불교와 천주교를 신봉하는 이단이다?
- 당시 유교를 국교로 삼던 조선은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와 다른 나라에서 들어오던 천주교를 이단교로 정해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승려들과 절은 모두 외진 곳에 있어야 했고 심지어 승려들은 한성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천주교도 조상을 섬기는 방식이 전혀 달랐기 때문에 조선 말기까지도 박해를 받아야했다. 그런데 허균은 이 모든 유교 법도를 무시하고 불교 인사들과 천주교를 가까이 하게 된다. 불교를 대표하는 사명당이나 다른 고승들과 가까이 어울렸으며 청나라에 사신 수행으로 갈 때마다 많은 돈을 들여 책을 엄청 많이 샀는데 이 책들이 모두 천주교에 관한 책들이었다. 이 사실을 조선 사대부들이 좋게 볼 리가 없었다. 사명당 같은 승려들이 임진왜란을 끝내는데 많은 공을 세웠지만 말이다.
③ : 서자들의 후견인이다?
- 조선 사회에서 서자들은 천민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영의정의 서자라도 결코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다. 조선이 서자들을 이렇듯 학대하기 시작한 계기는 태종이 정도전을 죽이면서 부터이다. 서로의 신념이 다르던 이 두 사람 중 태종은 정도전을 죽이게 되었고 정도전이 서자라는 이유로 그 때부터 서자들을 소외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성군이라고 일컫는 성종도 서자들의 탈출구를 모두 막아버렸고 임진왜란 때 잠깐 서자들이 벼슬을 하기도 하였으나 그것도 전쟁 중 만이었다. 하지만 서자들 중 정말 뛰어난 사람도 있다고 생각한 허균은 여러 서자들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이 사실 때문에 칠서사건 때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칠서사건의 주동자들인 서자들이 허균을 입에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균이 서자들을 가까이 한 것 역시 그에게는 독약이 되었다.
④ : 이씨 왕조를 뒤엎으려 했다?
- 허균은 벼슬길에 나가기 위해 당대 세력가이던 이이첨에게 벼슬자리를 부탁하게 된다. 광해군이 세자이던 시절 이이첨과 허균은 광해군과 아주 친했기 때문에 이 세 사람은 서로 잘 될 것도 같았다. 그러나 이이첨은 친구 허균을 사지에 몰아넣을 만큼 잔인한 사람이었다. 이이첨은 허균이 이씨 왕조를 뒤엎어버리고 서자들의 나라를 세우려고 했다는 이유로 역모 죄를 씌운다. 허균은 결국 이 역모 죄로 인하여 능지처참당하고 그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만다. 오죽하면 동인의 우두머리인 허엽의 비가 두 동강으로 부러졌겠는가? 사실 허균이 서자들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지만 정말 역모를 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천재시인 최치원은 조기 유학생이었다.』
- 고려 초기을 다룬 역사책이나 드라마들을 보면 최 씨를 가진 사람들 중에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유명한 최 씨들은 대부분 신라시대 때부터 내려온 사람들로 신라 말기에도 최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특히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쓴 격문으로 아주 유명했고 신라로 돌아와 왕에게 간언을 하다가 쫓겨난 최치원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① : 최치원은 조기 유학생이었다.
- 요즘에는 초등학생들도 영어를 배우기 위해 많이 유학을 떠나고 있고 중․고등학생들도 캐나다, 뉴질랜드 등으로 유학을 가고 있다. 그래?조기 유학에 대한 부정적 견해들이 많은데 신라시대에도 조기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다고 한다. 명문가들의 아들들은 대부분 바닷길 수 천리를 가야하고 다시 육로로 수 천리를 가야하는 당나라 수도로 유학을 많이 떠났다고 한다. 최치원의 경우 12살 무렵에 그 먼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다른 명문가 자식들도 이 나이 쯤 떠났다고 하니 조기 유학 열풍은 오늘날의 이야기만은 아닌 듯하다.
② : 최치원의 유학생활
- 신라는 매소성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조선 같이 제후국이 아닌 자유국가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면 영광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나라로 유학 간 명문가 자식들은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하는 부담을 갖게 되었다. 최치원의 경우 아버지가 10년 안에 당나라에서 장원급제를 해야 돌아올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10년의 시간이나 준 것을 보아 경쟁률이 굉장히 치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최치원은 10년은 커녕 8년도 되지 않아 장원급제를 하게 된다. 그리고 최치원의 글은 점점 당나라에서도 유명해 지기 시작한다.
③ : 중국을 감동시킨 격황소문
- 최치원 하면 생각나는 것이 바로 격황소문이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황소의 난이 일어나서 곳곳이 전화로 얼룩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토벌대 장군 휘하로 전쟁터에 간 최치원은 한 격문을 지어서 황소에게 보내게 된다. 그런데 이 격문을 읽은 황소가 기절을 했을 뿐더러 크게 놀랐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최치원이 글을 잘 써도 반란의 영수가 기절까지 했을까? 당시 당나라에서는 글을 고사성어처럼 함축된 의미로 지었기 때문에 좋은 글을 짓기가 어려웠었다고 한다. 그런 실정에서 아주 일품의 격문을 지었으니 황소가 기절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④ : 최치원은 신라 개혁을 꿈꿨다.
- 황소의 난 이 후 최치원은 당나라 내에서 아주 유명해졌고 벼슬도 계속 높아졌기 때문에 당나라에서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최치원은 갑자기 신라로 귀환을 하게 된다. 굳이 고향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었을까? 당시 신라는 말기에 접어들었고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에 최치원은 자신의 국가를 살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최치원은 귀국한 뒤 환영을 받고 곧바로 개혁안을 짜서 왕에게 받혔지만 안타깝게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더욱이 귀국하면서 받았던 벼슬까지 빼앗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역사스페셜 6

1. 일본의 신라 침공, 발해가 막다.
▷▶ 요즘 들어 ‘통일신라’라고 부르는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고 부르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엄연히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진짜로 한반도 북쪽의 요동, 만주는 물론 저 멀리 지금의 러시아 영토까지 넓은 땅을 지배했던 발해는 통일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신라 입장에서는 멸망시켰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위쪽에 버티고 있으니 언짢고 발해 입장에서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가 밑에 있으니 언짢을 것이라고 대부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 두 나라의 국경에서는 많은 충돌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사실 발해와 신라는 그렇게 나쁜 관계는 아니었으며 충돌도 별로 없었고 발해와 신라를 잇는 큰 길도 이미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단서가 나타났다. 바로 신라를 침입하려 한 일본을 발해가 막아준 것이다.
 우리들은 일본의 도읍이 나라였을 때, 보통 나라시대라고 한다. 이때의 인물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이토 히로부미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천황의 바로 다음 위치였으며 큰 권력을 휘둘렀으며 더욱이 자신들의 문화가 삼국에서 온 것을 간과해 버리고 한반도를 침략하려 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다이묘들을 다른 나라에 집중 시키려고 신라 정벌 계획을 세운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결정적으로 발해에 협공을 요청한다. 당시 발해와 일본은 아주 가까운 사이여서 협공이 이루어지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발해는 그 협공 제안을 거절한다. 결국 힘을 잃어버린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다른 경쟁자들에게 패해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신라 정벌 계획도 취소되었다.
 사실 일본이 신라 정벌 계획을 계속 진행했더라도 곧 패했을 것이다. 일본의 군사들은 한반도에서 큰 활약을 펼치지 못했고 이 계획을 알아차린 신라가 마지노선을 구축해 놓았기 때문에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2. 신라는 당군을 어떻게 이겼나? - 매소성 전투의 비밀
▷▶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통일을 한 신라는 또 하나의 큰 산을 만나게 된다. 연합을 하였던 당나라가 신라까지 멸망시키고 삼국을 정벌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더욱이 당시 당나라의 군사력은 세계 최강이었다. 여기서 잠깐! 왜 당나라 군사력이 최강일까? 바로 당나라의 주력 군사는 기병이었기 때문이다. 기병은 말 위에서 싸우고 말은 시속 60km로 달리기 때문에 혼자서 많은 보병들을 헤치울 수 있는 이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런 기병으로 이루어진 군대 수만 명이 매소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신라는 이 군대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공격에 나섰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신라는 당나라 군사들을 모두 무찔렀고 한반도에서 당나라 군사를 모두 몰아내었다. 일당백의 기병 수만 명을 적은 군사로 무찌른 그 비결은 무엇인가? 바로 장창병과 노를 갖고 있는 궁수들이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기병 군대를 프로방스의 장창부대가 무찔러 버린 사건이 있었다. 길이가 3m 쯤 되는 긴 창을 앞으로 세우고 있으면 기병들은 뚫고 들어올 수 없었고 달려들자니 죽을 테고 달려들지 않자니 뒤에서 화살들이 쏟아지고 이렇게 전멸당한 것이다. 더욱이 신라의 장창병 뒤에 있던 궁수들은 노라는 물건을 사용했다. 이 노는 신라의 비밀 병기로 중국의 무기를 개량한 것이었다. 정확하고 빠른 노에 당할 기병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신라는 장창병, 노를 갖은 궁수로 단판승을 내어버린 것이다.

역사스페셜 7

1. 순장, 과연 생매장이었나?
―▶무엇이 순장 묘인가?
  큰 힘을 가진 권력자가 죽으면 그 길을 같이 가줄 부인이나 노예, 포로들을 산채로 묻는 다고 알고 있는 순장. 고대에 관습이었던 순장 묘들은 지금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경상북도 경산시 임당동 벌판에는 수십 기의 대형 고분들이 있고 그 안에서 많은 유골들이 발견되었다. 더욱이 이곳에서 순장 묘에는 부곽과 주곽이 있어서 신분에 따라 묻힌 곳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발견된 순장 묘들 중에 가장 큰 것으로 꼽히는 가야의 44호분의 경우에는 최고 지배자 급의 고분이라고 한다. 이 고분에는 무려 36명 이상이 순장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그 당시 장례의식이 정말 거대했을 것이다.
―▶순장자들, 어떻게 죽었나?
  우리는 지금까지 묘에 묻히는 순장자들이 모두 산채로 묻혔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순장을 끔찍해 하는 것이다. 현대의 생매장이나 다름없는 것을 수십 명에게 적용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순장자들의 유골들을 조사하자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몇 명의 순장자들의 두개골을 자세히 관찰하자 크게 골절되어 손상된 부분이 있었다. 이 부분을 정밀감식 해보자 둔기에 맞아서 크게 두개골이 파손될 정도로 치명상을 입은 것이었다. 더욱이 어떤 순장자들은 꿇어앉은 채 있기도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순장자들은 분명히 묻히기 전에 살해당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순장됐나?
  순장자들의 종류는 노예나 전쟁포로 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다르다고 한다. 물론 노예나 전쟁포로들이 묻히기는 했지만 순장자를 모시던 하인들이나 시녀들도 같이 묻힌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첩들도 묻히기도 한다. 이런 것들을 모아 죽은 사람의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같이 순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순장이 폐지된 뒤
  끔찍한 고대 관습인 순장은 신라 지증왕 때 처음으로 금지되게 된다. 왜 지증왕은 고대 관습인 순장을 금지 시켰을까? 당시 지증왕은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마립간 같은 칭호를 버리고 왕의 칭호를 쓴 임금이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신라를 개혁하였고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런 일들을 하려면 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런데 고대에는 지금처럼 인구가 많지 않아서 여러 부족한 점들이 많았다. 이렇게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한 사람이 죽을 때마다 수십 명을 같이 죽인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결국 지증왕은 순장을 폐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2. 0.3밀리미터(mm)의 예술, 감은사 사리함
―▶ 감은사 동탑 사리함, 1천 3백 년의 잠에서 깨어나다.
   유명한 사찰들을 보면 대부분 사리탑 안에 사리함이 있기 마련이다. 불국사에서도 발견이 되었고 그 유명했던 황룡사의 사리함도 발견되었다. 그런데 가장 거대했던 황룡사의 사리함은 별로 특이한 문양이 없었으며 불국사의 사리함도 화려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감은사 동탑을 해체하던 중 대단한 사리함을 발견하게 된다. 진흙이 잔뜩 묻은 감은사 동탑의 사리함은 정말 대단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겉 외함의 사천왕상 또한 멋졌지만 그 안 내함의 장식세공은 뛰어난 신라의 기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0.3밀리미터의 예술
   요즘에 진짜 모기의 침에 엄청 작은 인형을 제작하여 올려놓기도 하고 몇 센티미터도 안 되는 모형 배의 0.5mm도 안 되는 돛대 끝 위에 체스판을 만들기도 하는 마이크로 미술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 감은사 동탑 사리함 내함의 장식들은 정말 대단히 작고 섬세한 물건들이다. 쌀알 크기 만한 풍탁이 있을뿐더러 사리병은 성냥 길이만 하고 그 뚜껑은 100원 동전의 반 크기였다. 더욱이 이 장식들을 1백 배율로 촬영하면 여러 개 금 알갱이들이 보인다. 이 금 알갱이들은 손수 제작하여 붙힌 것이었는데 이 알갱이의 크기는 0.3mm밖에 되지 않았다. 현대 기술로도 똑같이 재현하려면 시행착오가 많이 생기는데 그 옛날 어떻게 이런 섬세한 것들을 만들 수 있었는지 감탄스럽기만 하다.

//김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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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사이언스(이정모/휘슬러) | ↘『독서후기』 2006-05-20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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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바이블 사이언스

이정모 저
휘슬러 | 2003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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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큰 벌로 대홍수를 내려 노아와 노아의 방주에 탄 그의 가족, 동물들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노아에게 특별히 하느님이 그 재앙을 가르쳐 주어 노아의 방주가 탄생할 수 있었는데 세상을 하나도 남김없이 집어삼킬 정도의 홍수가 가능한 것일까? 에베레스트 산같이 수 천m 되는 산들의 봉우리만 보일 정도로 상상할 수 없는 홍수를 만든 물은 다 어디서 온 것일까? 비록 아주 먼 옛날 대홍수가 일어났었다는 연구결과가 있지만 노아의 방주 이야기처럼 심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그 대홍수를 성경에서 조금 과장 표현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수 천km에 이르는 지구 속을 뚫고 들어가면 그 가운데에 엄청난 양의 물이 있을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직접 들어가지는 못해도 다른 여러 첨단장치로 추측을 해보자면 무려 지금 바다 물의 양 * 5배의 양이라고 한다. 진짜로 이 지구 내부 물의 양이 바다 물의 5배라면 노아의 방주가 이야기가 조금은 억지(?)설명될 수 있다. 이야기에 따르면 비가 40일 동안 연이어서 쏟아졌고 엄청난 양의 물이 다 빠져서 땅이 들어날 때까지 150일이 넘었다고 한다. 혹시 지구 속의 물이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 나오는 대 홍수의 물이 아닐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2. 성경에 따르면 처음에 우주가 만들어지기도 전에는 시간도, 공간도 다른 아무 것도 없이 오직 하느님만이 있었다고 한다. 하느님은 처음으로 빛을 만들었고 다른 여러 가지를 창조해내어 한 달은 커녕 15일도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을 창조해내셨다고 한다. 물론 우주도 하느님이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좀 더 과학적인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우주의 탄생은 2가지 학설로 나뉘게 되었다. 처음에는 우주가 처음부터 아주 오래전 세상이 생겼을 때부터 지금같이 존재했었다는 학설이 유력했다. 하지만 점점 허블 등의 과학자들이 우주를 관찰하고 미국의 NASA에서 우주의 온도 분포도를 나타낸 지도를 발표하면서 러시아의 한 과학자는 우주가 큰 폭발로 생겨났다는 새로운 주장을 하게 되었다. 이 학설은 지동설과 같이 비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기정사실화 되어있다.
 빅뱅(Big Bang)이론에 대해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이 있다면 빅뱅이론을 반대하던 한 과학자가 TV토론에서 무슨 터무니없는 학설이냐며 빅뱅이라는 말로 비난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반대자에게서 나온 빅뱅이 그 학설의 본제목이 되어 버린 것이다.

3. 성경에서 여호수와를 따라 가나안에 도착한 유대인들은 난공불락의 요새를 함락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요새는 전설적으로도 함락될 수 없는 대단한 요새였다. 하지만 여호수와는 함락하고 만다. 바로 공명을 이용해서...
 며칠이고 성벽주위를 돌던 여호수와와 유대인들은 어느 날 아주 큰 목소리로 다 함께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 그 소리가 동시에 울리면서 공명이 발생해 성벽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이 공명이 성벽을 부쉈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지만 다리를 무너뜨렸다는 역사적 증거는 있다. 영국군이 같이 발을 맞추며 다리를 건너는데 그 발이 내는 음파들이 어떤 특정 음파로 합쳐지면서 큰 힘이 발휘되어 다리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김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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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저
휘슬러 | 2003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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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큰 벌로 대홍수를 내려 노아와 노아의 방주에 탄 그의 가족, 동물들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노아에게 특별히 하느님이 그 재앙을 가르쳐 주어 노아의 방주가 탄생할 수 있었는데 세상을 하나도 남김없이 집어삼킬 정도의 홍수가 가능한 것일까? 에베레스트 산같이 수 천m 되는 산들의 봉우리만 보일 정도로 상상할 수 없는 홍수를 만든 물은 다 어디서 온 것일까? 비록 아주 먼 옛날 대홍수가 일어났었다는 연구결과가 있지만 노아의 방주 이야기처럼 심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그 대홍수를 성경에서 조금 과장 표현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수 천km에 이르는 지구 속을 뚫고 들어가면 그 가운데에 엄청난 양의 물이 있을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직접 들어가지는 못해도 다른 여러 첨단장치로 추측을 해보자면 무려 지금 바다 물의 양 * 5배의 양이라고 한다. 진짜로 이 지구 내부 물의 양이 바다 물의 5배라면 노아의 방주가 이야기가 조금은 억지(?)설명될 수 있다. 이야기에 따르면 비가 40일 동안 연이어서 쏟아졌고 엄청난 양의 물이 다 빠져서 땅이 들어날 때까지 150일이 넘었다고 한다. 혹시 지구 속의 물이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 나오는 대 홍수의 물이 아닐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2. 성경에 따르면 처음에 우주가 만들어지기도 전에는 시간도, 공간도 다른 아무 것도 없이 오직 하느님만이 있었다고 한다. 하느님은 처음으로 빛을 만들었고 다른 여러 가지를 창조해내어 한 달은 커녕 15일도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을 창조해내셨다고 한다. 물론 우주도 하느님이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좀 더 과학적인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우주의 탄생은 2가지 학설로 나뉘게 되었다. 처음에는 우주가 처음부터 아주 오래전 세상이 생겼을 때부터 지금같이 존재했었다는 학설이 유력했다. 하지만 점점 허블 등의 과학자들이 우주를 관찰하고 미국의 NASA에서 우주의 온도 분포도를 나타낸 지도를 발표하면서 러시아의 한 과학자는 우주가 큰 폭발로 생겨났다는 새로운 주장을 하게 되었다. 이 학설은 지동설과 같이 비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기정사실화 되어있다. 빅뱅(Big Bang)이론에 대해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이 있다면 빅뱅이론을 반대하던 한 과학자가 TV토론에서 무슨 터무니없는 학설이냐며 빅뱅이라는 말로 비난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반대자에게서 나온 빅뱅이 그 학설의 본제목이 되어 버린 것이다.3. 성경에서 여호수와를 따라 가나안에 도착한 유대인들은 난공불락의 요새를 함락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요새는 전설적으로도 함락될 수 없는 대단한 요새였다. 하지만 여호수와는 함락하고 만다. 바로 공명을 이용해서... 며칠이고 성벽주위를 돌던 여호수와와 유대인들은 어느 날 아주 큰 목소리로 다 함께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 그 소리가 동시에 울리면서 공명이 발생해 성벽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이 공명이 성벽을 부쉈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지만 다리를 무너뜨렸다는 역사적 증거는 있다. 영국군이 같이 발을 맞추며 다리를 건너는데 그 발이 내는 음파들이 어떤 특정 음파로 합쳐지면서 큰 힘이 발휘되어 다리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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