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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국인의 이중성과 모순된 양면의 공존에 대한 성찰 | 인문,사회 2008-03-3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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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선부론 先富論

던컨 휴잇 저/김민주,송희령 공역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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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간 중국사회에 깊숙이 체화된 서양인의 시각에서 기술된 중국인, 중국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이에 따른 면면이다. 영국 BBC방송 중국특파원인 저자의 1980년대 중반 중국 유학시절에서 2000년 중반인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개방에 따른 급격한 서구 물질문명의 유입이 이들의 삶과 사회구조 전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들의 자세와 의식의 변화, 이에 대한 공산당의 시장경제와 서구 문화에 대한 수용태도 등이 일화(逸話)와 전문가들의 견해를 곁들여 흥미로우면서 진지한 탐구를 하고 있다.

저자의 시선에서 국가의 철저한 통제와 규제 속에 오랫동안 세계와 단절되어있던 중국인과 중국사회에 대한 애틋한 연민을 느낄 수 있다. 저자의 이러한 감성이 중국인들과 그들의 사회 구석구석에 대한 보다 진실한 이해에 가까이하게 하였으리라는 공감이 형성된다. 따라서 중국인과 그 사회의 이중성이라는 모순된 양면의 공존이라는 통찰이 더욱 논리적으로 형성된다.

이 저술이 오늘의 한국, 바로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가치는 공산주의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유지하고 있는 중국정부와 개혁과 개발이라는 명분하에 시장경제체제의 도입으로 부(富)의 가치를 숭배하기에 이른 중국인과 중국사회의 조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여야 하는가이다.

어제 간“식당 건물이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전화를 걸어야 하는 도시는 베이징밖에 없다”할 정도의 극단적인 개발과 변화를 표현하는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라는, 중국의 도시개발은 왕조가 바뀌고 두 번의 혁명, 외세의 침입에도 살아남았던 고택이 도시재개발이라는 문제에서는 힘없이 사라져버리는 현실이 오늘의 중국임을 보여주고 있다. 개발의 논리에 문화유적과 옛것,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뿌리 채 뽑아 버리는 중국인들의 의식에서 오늘의 한국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현대화 되고 높이 솟은 빌딩의 숲이 곧 부유함을 상징하는 그들의 인식과 우리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음을 보게 되고, 이러한 개발지상주의의 그늘 뒤에 가려진 사회적 문제를 직시하게 한다.

“과학적 사회주의와 자신의 환경을 인간의 의지로 지배해야 한다는 공산주의 전통적 믿음”과 “모든 것을 다 파괴하고 재창조 할 수 있다”는 힘의 과시로 보여 지는 이러한 도시재개발행위는 과거를 모두 지워버리고 중국적이라는 어떠한 것도 남기지 않는 그네들의 의식을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예이다. 여기에 바로‘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이 자리하고 있다. 즉, 전통가옥을 허물어 새롭게 건물을 짓는 일이 많은 사람에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대대로 거주해오던 집에서 쫓겨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공동주택으로 이주해야 하는 사람들의 불만과 갈등, 그리고 새로운 도시빈민의 잉태, 지방 관리들과 개발업자들과의 결탁을 통한 부패의 만연, 새로운 부자의 탄생과 같은 부조리의 탄생, 역사적 유물의 상실등 문화적 손실, 환경의 무차별적 파괴로 인한 도심환경의 악화 등 무수한 문제만을 남겨놓고 있음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이제 중국인과 중국사회 모두는 부를 향해서만 내닫고 있다. 부자가 되는 것이 그들의 지상목표이고 과제일 뿐이다. 소개되고 있는 한 일화에서 세계적인 DIY가구회사인‘이케아’가 중국에 첫 매장을 열었을 때 그 현란하고 세련된 디자인 가구를 보기위해 장사진을 이룬 중국의 중산층들을 묘사하고 있다. 오늘의 그들은 남의 눈을 의식하며,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물질에 취해있다. 일곱 살 된 중산층의 여자아이는 영어를 배우고, 영어 이름을 가지고 자신들의 위상을 내보이려고 한다. 그 여자아이의 이름은 바로‘이케아’란다. 실소를 머금다가 흠칫 다시금 놀라게 된다. 바로 우리들의 천박한 부유층의 모습과 어찌 이리 닮았을까?

먼저 부자가 되어 가난한 이웃과 국가에 그 부를 나누어 흥륭한 국가를 만들자는‘선부론’의 기치 하에 선전(深川), 상하이(上海)등 대도시 중심의 집중적 개발과 성장은 노동력의 급격한 수요를 요구하고, 가난한 성(省)의 농민들은 도시로, 도시로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이주한다. 그러나 도시민과 농촌에서 이주한 도시민은 철저하게 차별화되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사회복지체계에서도 외면당하고 있으며, 생계의 유지조차 곤란한 최저생계비조차 확보되지 않는 세계에 처해 있음을 본다. 더구나 생활고는 가족들의 분산을 촉발하고 이들의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교육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공산주의 이념과 지극히 모순된 양상을 낳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 양극화는 중국 공산당 정부에 커다란 부담이 되고 있어, 최근에는 가난한 지역의 농촌사회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원과 기초교육에 대한 무상지원 등의 정책으로 사회의 불균형을 시정하려는 노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부패한 지방 관리들의 착복과 농민들에 대한 무차별적 세금, 각종 부과금의 징수들로 농촌사회의 시름은 해결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21세기 오늘에 이르러 중국은 세계 제조업의 총산지 처럼 되어있다. 또한, 베이징, 상하이, 선전 등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대형 건물들이 빼곡 찬 도시전경은 가히 그 급격한 성장에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부를 쫓아 20여년간을 치달은 오늘의 중국사회가 그들의 성장이면에 켜켜이 쌓인 어두운 그늘을 해결하고 8억 인구의 농민과 1억에 이르는 도시이주민들의 텅빈 가슴을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것일까?

중국인들은 1950,60년대의 암울한 문화혁명기로 인한 전통의 단절과 공산주의의 계획경제로 차단되었던 세계에서 1980년대부터 불어 닥친 개방경제사회 속에서 그들의 사상적 의식의 틀은 완전히 소실되어 버렸으며,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문화와 문명에 내 맡겨져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중국인, 중국사회, 여기에 공산주의를 굳건히 유지하려는 중국공산당정부와의 슬기로운 지혜를 이웃국가의 국민으로서 조심스럽게 기대하게 된다. 이 저술에는 한국 댄스그룹 NRG, HOT에 열광하는 10대의 중국소녀들, 한국드라마에 공감하는 중국사회를 통해 그들의 무분별해 보이는 스펀지 같은 외국문화에 대한 흡수 능력의 무한함 뒤에 도사리는 미래의 준비를 읽을 수도 있으며, 중국 현대 미술과 문학의 발전과 부침, 물질적 도취에 따른 예술의 정체, 이들 문화예술에 대한 중국정부의“영혼 오염 퇴치 캠페인”과 같은 공산당 사고의 독점 등 그들의 체제 의식을 다양한 측면에서 엿볼 수도 있다.

저자는 중국“정부 당국이 개방을 수용하기는 하지만 정치 분야의 개방은 전혀 수용 할 의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지적한다. 즉, 다당제와 같은 다양한 민의 수렴이나 국민, 사회의 의견이 공산당체제에 유입될 가능성이란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공산당,“오늘날 정부의 모든 고위 관리들이 정도만 다를 뿐 모두 부패에 연루되어 있다고 짐작하고 있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개인적 부의 축적과 개인주의에 몰입되어 있음을 보는 것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부와 달리 중국인들의 사고에서도 유사한 모순된 의식을 보게 된다. 한 예로 농촌마을위원회의 위원선거에서 오래된 단층집에 사는 사람보다는 몇 층짜리 건물에서 사는 사람을 뽑겠다는 그래서 잘사는 그 사람이 자신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라고 믿는 신념이 있다. 반면, “우리는 매일 매일 죽도록 일하는데 그렇게 근사한 옷을 왜 사 입을 수 없을까요? 세상이 정말 공평치 않아요.”하는 그들의 감정에는 부에 대한 동경만 일치 할 뿐 존경과 증오의 이중적인 잣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장, 한 단락, 한 줄의 문장에서 지금 중국인들, 아니 대도시민과 농촌 민, 이주 도시민들의 실상과 의식, 7,000만명에 달하는 공산당원의 의식, 80년대 이후 출생자인 5세대(신세대)들의 사회가 도래하는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그들 사회와 그들에 대처하여 어떠한 준비가 있어야 할지 생각케 하는 훌륭한 지침서로서 버릴 것이 없다. 그들의 선부론은 과연 연착륙할 것인가? 이들의 성공과 실패, 화합과 갈등은 이제 우리들에게 직접적인 이해의 문제가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중국적 특성 가진 사회주의”의 성공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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逸話性 野史도 역사적 소명의식 제고되어야 | 나의 리뷰 2008-03-26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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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사 전
김경수 저 | 수막새 | 2007년 12월

 

- 조선왕조사 傳을 읽고 

 

일화(逸話)성 이야기를 근간으로 하는 역사기술의 형식이 읽어내기에는 수월할지 모르겠으나 사료로서의 진중한 신뢰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필자가 머리말에서 언급한 민족의 자긍심을 제고키 위한 집필의 목적은 실제 본문 어디에서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조선 태조에서 순조에 이르는 역대 왕들의 집권의 시련이나 그들의 인간적 면모를 서술하는데 있지도 않으며, 각 시대마다의 국내외 정치 또는 경제에 초점을 두고 있지도 않다. 또한 민중의 삶이나 사상의 조류에 있지도 않다.

이 책이 역사서로서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 출처를 본문에 기호라도 표기하여 색인에서 찾아볼 수 있어야 함에도, 필자의 편의적 의지에 따라 책 말미에 참고문헌만 나열되어 있다. 필자가 기술한 각개의 역사적 기술이 어떠한 사료나 누구의 문헌을 기초로 했는지 아예 검색이 차단되어있다. 이러한 의문은 지극히 당연한 이유에 있다. 곡해가 있다면 어디에 근거하고 있어 그러했는지 밝혀야 하는 것이 바로 역사를 기술하는 자의 도덕성이고 연구자세라 생각된다. 일본의 의도된 식민사관에 의했는지, 조선 후기 성리학적 지배질서에 따른 이데올로기성 오류로 인한 것인지, 새로운 사료, 유물등의 발굴에도 불구하고 폐기된 과거자료에 따라 발생 하였는지, 구전으로 인한 단순 실수인지를 독자들이 알아야 한다.

많은 내용에서 이해 할 수 없는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 사료에 필자가 서술한 내용이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서인들의 그야말로 조잡하고 왜곡의 극치를 이룬 실록이 편찬되는등(선조 수정실록) 역사로서의 가치 손상이 한심의 작태를 넘어섰던 시절, 10만양병설의 근거 없음은 이제 대부분의 사학자들로부터 지적된 내용임에도 과거의 근거 없는 설을 그대로 기술하는가 하면, 조일전쟁(임진년 일본의 침략)이 발발하자 천박한 임금 선조의 도망과 이에 야합한 서인들의 각색된 언어를 빌려 백성이 경복궁을 불태웠다고 근거 없는 이야기를 그대로 기술하고 있기도 하다.

인류의 속성이 그러하듯이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 역사란 가공 윤색되기 마련이어서 역사 기술(記述)에서 균형된 시각을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료들의 사실성에 대한 보다 정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며, 자칫 이들만이 역사적 진실인 듯 기술할 경우 그 곡해의 책임은 누구일지 자못 의심스러울 수 있다.

사료의 출처, 근거를 제시하는 필자의 보다 친절한 서술과,  균형성, 진실성, 전문성에 입각한 저술로 보완되어 대중을 위한 진정한 역사서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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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범한 열정의 이 젊은이는 라파엘로인가? | 인문,사회 2008-03-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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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라파엘로와 아름다운 은행가

데이비드 앨런 브라운,제인 반 님멘 공저/김현경 역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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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품에 문외한인자가 그것도 르네상스라는 5세기 전인 16세기 화가 라파엘로를 접하는 것은 실로 일대 모험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작품에 대한 기억이라곤 그 어느 것도 존재치 않은 상태에서 초상화 한 점이 커다랗게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미술사를 펼쳐든 것은 순전한 호기심과 오기라고 할까?

금발의 생소한 젊은 남자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 채 화폭에서 정면을 주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이 어떻다는 말인가? 1510년경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그려진 한 점의 그림이 오늘 미국의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있기까지의 500년에 걸친 여정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수많은 걸출한 미술사가들, 화가, 감식가, 큐레이터, 심지어 해부학자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진위 논란, 그림 속 젊은 남자의 실체에 대한 엇갈린 주장들, 작품의 이동 경로등이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다.

라파엘로가 누구인가? 그의 작품을 보면 알아 볼 수 있겠는가? 이젠 단연코 작품이 가지고 있는 회화로서의 의미와 역사성을 이해하고 첫눈에 알아볼 수 있다.(진위성의 감식여부는 별개의 문제) 이 저술 속에 소개되는 수 없이 등장하는 모사본, 복제판화, 그리고 이 초상화에 영감을 받은 걸작들로 인해‘젊은 남자의 초상’으로 거의 세뇌(洗腦)되어 버릴 정도이니 말이다.

이 초상화의 인물은 누구인가? 피렌체의 젊은 은행가《빈도 알토비티》인가, 아니면 라파엘로 자신의 자화상인가, 인물의 모호성은 바사리(이탈리아 예술사가, 화가)의 『예술가의 전기』(1550년)에서 기술된 이 그림의 애매한 표현에서 시작된다. “그가 젊었을 때‘빈도 알토비티’를 위해 그의 초상화로 그렸으며, 그 그림이 가장 대단하게 여겨진다.”

라파엘로가 자화상을 빈도알토비티에게 그려 주었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빈도알토비티의 초상화를 라파엘로가 그려주었다는 이야기인가? 이는 1740년경에 이르러 바티칸의 교황 소장품 관리자인 보타리(이탈리아 성직자, 미술사가)에 의해 《우르비노 출신의 라파엘로》로 단정되기도 한다. 그림의 인물에 대한 실체의 끊임없는 논란이 빚어내는 수세기간의 에피소드는 소설을 능가하는 재미를 가져다준다.

1804년 앵그르(프랑스 화가)의 자화상이 라파엘로의 젊은 남자의 초상(빈도 알토비티)의 이미지를 답습하고 있음과 “땅으로 하강한 신”이라 칭송할 정도로 그가 라파엘로에 얼마나 열광하고 있었는지 이해하게 된다. 인물의 시선과 손의 처리, 작품의 구도에 이르기까지, 그리곤 라파엘로와 그의 연인 포르나리나의 그림에서 표현되는 라파엘로의 모습은 《빈도 알토비티》를 그대로 차용 하고 있다. 여전히 초상화의 인물은 라파엘로임을 당연시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의 초상화가 수세기간 초상화의 정형성으로 인정받고 라파엘로를 추종하는 많은 화가들로부터 그의 이미지로 차용되고 있었음은 오늘의 관점에선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이탈리아 피렌체의 알토비티 가문이 거의 300년간을 소유하고 있던 이 그림이 자신들 조상의 초상이 아닌 라파엘로의 자화상이라는 주장은 소유의 당위성이 해제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1809년 바이에른의 왕자 루트비히 황태자에게 헐값에 넘겨진다. 그리곤 뮌헨의 미술관에 이후 129년간 독일인들에 의해 보관되고, 라파엘로의 무덤을 발굴하여 그의 두개골을 측정하는 등의 법석을 떤 후 초상화는 이탈리아의 은행가 젊은 빈도 알토비티의 초상화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급기야 라파엘로의 작품이 아닌 라파엘로 유파의 그림이라고 까지 격하되기에 이르고, 영국의 화상(畵商) 애그뉴에 의해 영국 한 고성의 경매를 통해 단돈 600달러에 구입한 16세기 독일의 화가 그뤼네발트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한 성직자의 초상화와 교환되는 어처구니없는 거래가 성사되기까지 한다. 그리곤 미국의 미술품 수집가 크레스가 구입하여 미국국립미술관에 기증되어 오늘에 이른다.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의 초상화 한 점이 500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는 동안 미술사에 끼친 그 영향력과 파장은 정말 끔직 할 정도로 파란만장하다. 다양한 해석과 작품의 거래에서 야기되는 사실(史實)은 국제암거래의 은밀한 사건을 보듯 긴장감 넘치기도 한다. 21세기의 오늘 우리는 이러한 긴장감이나 진위의 논란을 잊은 채 라파엘로의 걸작에 부담 없이 반응하기만 하면 된다. 비범한 연민의 표정을 지은 피렌체의 젊은 은행가가 열정적일 만큼 호소력 있는 입이 열려 기분 좋은 목소리와 감각적인 단어를 내놓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될 뿐...

이제 회화에 접근하는 아주 작은 이해를 시작 한 듯하다. 훌륭한 걸작들이 옛 귀족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이 함께 호흡하고 느낄 수 있는 시대에 있다. 금발의 구레나룻과 녹색의 시선이 던지는 한 점의 그림에 앵그르의 강박, 페티시, 출몰로 관련되는 신앙적 열정이 전이 되어 옴을 느낀다. 멋진 인문학적 예술사 한편이 회화의 매혹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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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과 위악, 그리고 뒤틀린 사회적 욕망의 그늘... | 소설,시 2008-03-22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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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형태적, 물질적 가치기준에 따르면 사회의 선망적인 시선을 받고 있는 그런 안정적 삶을 영위하는 여성, 베로니카의 시선을 시종 쫒아가야 한다. 화자(話者)의 언어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인내를 요구 할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디테일한 여성 심리의 서술을 따르다 보면 이내 활자 속에 고정된 자신의 시선으로 당황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야기는 그녀(베로니카)와 25년만에 급작스럽게 그녀의 일상에 뛰어든 거구(巨軀)의 친구 레베카로 인한 감추어 두었던 내면의 드러남을 통해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삶의 균열에 대한 관찰이라 할 수 있다.

레베카의 뜻하지 않은 25년 만의 추궁, 우정과 순수함을 파괴한 사건에 대해 해명, 베로니카는 그녀의 기억에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되짚으며 감추어두었던 내면에 곤혹스러워 한다. 사회가 내세우는 가치기준 - 고래 같은 몸집을 뒤뚱이는 뚱보 레베카에 대한 학창시절 친구들의 비아냥거림과 따돌림의 집단적 목소리 - 에 적합지 않은 자들이란 뒤틀린 현대인의 욕망에 말하지 않음, 동조하지 않았음으로 위악의 군집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하는 위선이 부상한다.

베로니카는 자신을 이렇게 합리화한다.“사람은 누구나 몸속에 반복되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함께하는 내적인 악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속해있는 악이자 우리에게 한정된 악으로, 적어도 우리는 그게 그렇게 심각한 악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게 바로 우리라는 것을.”

위악보다 무서운 방관의 위선, 단지 오늘의 탐욕스런 외형적 가치에 적합지 않다는 이유로 우리들이 무심히 저질러대는 왜곡된 횡포로 인한 억압과 학대, 이로 인한 받아들여지지 않는 보편성에서 제외된 삶의 비애가 사회에 어떻게 뿌리내리고 있는지 고발하고 있다.

유력일간지의 국제부 기자인 베로니카, 여전히 탄력과 뛰어난 미모는 뭇 사내들의 끈적한 시선을 붙잡는다. 남편과 사랑스런 아들, 평온하고 안정되어 보이는 그녀의 가정은 사회가 내세우는 욕망기준에 지극히 돋보일 정도의 멋진 외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육욕을 채워줄 정부 패트릭까지, 그녀의 삶은 페미니스트들의 표현으로 치면 잘나가는 삶이다. 작가의 시선은 극단적인 두 여성을 대비시킴으로서 현대사회가 내세우는 가치기준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그 비난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싶었던 듯하다. 또한, 이러한 비판적 서술과정에서 인간 모두가 어쩌지 못하는 본질적 외로움, 고독, 모순적 자기연민을 틈틈이 비추고 있다.

묙조에 드러누워 배 위에 남아있는 정부의 정액을 쓸어내며 흐믓한 평화를 느끼는 여성, 다수의 형편없는 왜곡의 뒤에 숨어 동조하는 모순적 자기안위와 같은 점점 모호해지는 도덕성의 경계, 위악과 위선의 흐리멍텅한 다양한 변수들, 이러한 이야기들이 군더더기 하나 없는 정갈한 문장으로 단장된 작품이란 느낌이다.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에게 책 출간을 알릴 방도를 찾아보았다. 이 글은 그녀를 위한 것이다.”라는 책의 서언과“날 용서해 줘”에 이르는 마지막 구절은 작가의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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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친구의 애인에게 끌리는가? | My Story 2008-03-1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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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지평을 감성의 세계에서 이성의 세계로 이끌어낸다는 필자의 취지만큼이나 진부하다. 사랑의 시장교환가치, 다윈주의적 해석, 가설과 실험을 통한 의도적인 행위의 연계등은 굳이 이러한 장황한 설명이 필요 할까할만큼 지루하다. 사랑에 대한 백과사전식 정의와 나열등은 이미 많은 심리학 관련 서적에 소개된 중복된 내용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수없이 보아왔던 동일한 심리학적 실험과 사례뿐 아니라 '사랑'에 대한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들 역시 이미 반복되어 소개된 내용들로 새로움이 없을뿐 아니라 서술에 있어서도 두서없이 필자의 수집된 자료의 열거로만 보인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의 자학적행위의 근인, 새로운 애인을 찾아나서는 인간의 자구적 노력으로서의 건강유지 전략,남자는 사랑이 아니라 여자를 얻는데 주력하고 착각하는 것이라는 단정, 첫눈에 반하는 행위의 이면에 본능,충동,욕망,매혹과 같이 이성으로 저항할수 없는 행동에 대한 책임회피의 의식등 주제의식에 총합성을 이루지 못하고 저마다 따로이 사랑의 형태에 대한 산만한 이야기가 서술되고 있다. 또한 우리사회에 만연한 '사랑의 과잉평가'가 진정한 사랑의 속성을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이상적인 상대를 만나기를 꿈꾸기 보다는 이상화 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기를 꿈꾸는 것이라고 이상형에 대한 상상을 깨기도 한다.

우리는 왜 친구의 애인에게 끌리는가? 자신의 가치를 조금더 높이 평가 받으려고?, 보다 낳은 사회적 능력이나 관능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건강한 육체의 보전을 위한 자연스런 행동? 동일 사회계층에 대한 검증된 동료의 이성에 대한 합리적인 접근? 이모두 옳바르며 그릇되기도 하다. 책은 이러한 내용들을 장황하고도 산만하게 뒤죽박죽 열거하고 있을뿐이다. 정교하고 치밀하게 구성된 사랑의 심리학으로서는 결여되어있고 재미와 자극을 기대하는 이야기로서의 서사는 취약하다. 다소 답답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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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6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