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블로그 | 랜덤블로그 쪽지
필리아는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
http://blog.yes24.com/kuju
리스트
태그 & 테마링 | 방명록
필리아
童而習之,白紛如也 Thinking!
파워 문화 블로그

PowerCultureBlog with YES24 Since 2010

2·4기 책

프로필 쪽지 친구추가
9월 스타지수 : 별4,227
댓글알리미 비글 : 사용함
전체보기
기본 카테고리
나의 리뷰
Wish List
My Story
My Favorites
나의 리뷰
소설,시
에세이,평론
인문,사회
자연과학
나의 메모
기본 카테고리
태그
책임없는자유 새로운가치 지역연고주의 기회주의 21세기공화주의와공동선한국 최대행복 js밀 매킨타이어 폭력의거시물리학 폭력의미시물리학
2009 / 10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월별보기
나의 친구
나의 친구들
최근 댓글
필리아님~ 좋은 리뷰 .. 
좋은 리뷰 잘 읽고 갑.. 
글 속에 필리아님이 .. 
우수 리뷰어 선정되신.. 
왕관 달려있네요. 잘 .. 
새로운 글

2009-10 의 전체보기
사랑과 관능의 미학, 그 매혹적 걸작들... | My Favorites 2009-10-30 15:11
http://blog.yes24.com/document/1687042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내밀히 숨겨진 심연의 존재와의 만남...


파격적이고 격렬하고, 적나라한, 그래서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출판이 금지되거나 고소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등 시련을 겪었던 작품들, 또한 성의 묘사에만 초점을 맞춘 왜곡된 시선으로 소외되었던 작품들을 소개해 본다. 혼외정사의 표현은 풍속을 해친다고 검찰에 기소되었던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오늘날의 독자들은 어, 왜 기소되었다는 거지? 하고 기이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만큼 풍속과 성 규제의 경계는 모호한 측면이 도사리고 있다. 막상 해당 작품을 접하고 보면, 탁월한 시대정신이나 인간 존재에 대한 진지한 탐구, 눈부신 생명력, 삶에 내밀히 숨겨진 찬연한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걸작들임에 외려 당혹스럽기 조차 하다.

 

사람이 몸과 마음으로 느낀 격정적이고 관능적 사랑을 사회윤리의 모독이니, 성 풍속의 문란이니 하는 잣대를 갖다 대는 것이야말로 문학작품, 예술에 대한 ‘도덕적’테러리즘이 아닐까?

D.H.로렌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헨리 밀러, 존업 다이크(브라질)의 작품은 모두 출판부터 세상을 들끓게 했던 작품들이다. 그리고 나의 서평에서 “발가벗겨진 인간 본성을 통해 억압된 인민의 존엄성에 대한 발악적 외침이라고 하고 싶다.” 까지 한 ‘옌렌커’의 작품이나, 소설보다는 영화 『밀애』로 알려진, ‘전경린’의 『내 생애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이 보여주는 내면에 지닌 혼란스러운 자아의 발견과 일탈에 대한 매혹의 기록들은 아름답기조차 하며, 사랑과 성을 모티브로 하는 이들 작품들에서 우리는 뛰어난 인간분석과 통찰을 발견하게 된다.

 

상처 입은 마음과 훼손된 꿈으로 활력을 잃은 오늘의 우리 현대인들에게 멋진 전율과 찬란한 불꽃을 제공해 줄 것이다. 가을 단풍으로 자연이 오색으로 물드는 만추의 계절, 우리가 짐짓 모른 체 눈감아버린 마음 저 깊은 곳에 있는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헨리와 준
아나이스 닌 저/홍성영 역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05월

 

베드타임 아이스
양억관 역/야마다 에이미 저 | 민음사 | 2008년 07월

 

채털리 부인의 연인 1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저 | 민음사 | 2003년 09월

 

Brazil
존 업다이크 저 | Ballantine Books | 1996년 08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옌롄커 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04월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전경린 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저 | 민음사 | 2000년 11월

 

북회귀선
정영문 역 | 문학세계사 | 2004년 12월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2) 트랙백(0)
이 포스트를 | 추천 1        
무지를 고백하고 오류를 수정하는 열린 사고 | 자연과학 2009-10-26 13:20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1678263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과학을 배반하는 과학

에른스트 페터 피셔 저/전대호 역
해나무 | 2009년 08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독일의 과학사가인‘에른스트 피셔’의 인류에게 어떠한 형식으로든 영향을 끼치고 있는 과학적 발견과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고 있는 일종의 과학시론(時論)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디벨트>라는 독일 신문에 연재된 글들이라는 점에서 대중을 향한 글쓰기이고, 따라서 다분히 계몽적이고 과학에 대한 친화력을 염두에 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크게 3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잘못된 상식에 대한 정정, 문화적, 종교적 일상에 침투해 있는 과학이론의 비판, 그리고 교양으로서 인지하여야 할 과학의 의미를 다룸으로서 20세기 이후 자칫‘불안을 조장’하는 과학, 악마의 학문으로 소외되는 과학을 지양(止揚)하고, 진정한 인류를 위한 진보로서의 과학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저술의 논조는 빛의 본성에 대한‘궁극적 무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하듯이 다분히 회의적이고 겸양의 미덕을 보이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양자역학을 기조로 하는 물리학 기반의‘불확정성’의 관념에 철저한 주관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첫 장인“상식과는 다른 과학을 포착한다.”는 제목처럼 이 저술에서 우리는 우리가 진리 또는 옳다고 알고 있는 것들이 무수히 전복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페니실린을 발견했다는‘플레밍’은 실제 어떠한 것도 발견한 적이 없었다는 진실이나, 아인슈타인의 학업성적이 열등했다는 엉터리 소문도 그의 탁월한 성적표를 오독한 사람과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자기위로 의식이 결합한 거짓이었다는 가벼운 전복에서부터 빛과 색깔의 관계에서 붉은 색과 파란색에 갖는 선입견이 실제의 온도를 반대로 인식하는 오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즉 과학이 인간을 모욕했다는 몰지각에 대한 반론, 분광학으로 인한 우주 물질의 규명, 혁신은 기존의 필요를 충족시킨다는 명제의 거짓까지 역사적, 사상적 사유의 전복에까지 이른다.


한편, “현실 속의 과학 비판”이라는 둘째 장은, 그의 균형적, 중도적으로 보이는 시각이 오히려 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내용들이라 할 수 있는데, “지식이 증가하면 미래에 일어날 일을 더 잘 말할 수 있게 된다.”는 미래학의 엉터리 지식을 힐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대니얼 데닛’이 ‘가망 없는 관념’이라 표현한 ‘신(God)'의 묘사와 영혼은“뉴런들의 집단”일 뿐이라 한 인터뷰 글을 인용하면서, “오히려 가망 없는 관념은 바로 그 생각”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또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창조론자인 ‘데니스 노블’의 반론에 기대어, “갇힌 유전자”라 조롱하는가 하면, 『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을 엉뚱하게도 “가설의 신”이란 자신의 논리로 둔갑시켜 이 가설의 신이 유의미한 말인가. 하고 힐난한다.

그리곤 “종교와 과학은 싸우는 상대가 아니라 인간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벌이는 두 활동으로서 서로 의지해야 한다.”고 모호한 여운을 남긴다.


특히 미래학이란 실체는 사실 사라졌으나, 무슨 무슨 전문가라는 표현으로 이름만을 바꾼 채 행세하는 소위 전문가 300명에게 던진 “인터넷의 미래와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예견해달라고 한 주문”의 설문 결과가 “원숭이들도 할 수 있을 만한 순전한 추측”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조소 섞인 비난에서부터, “멍청한 전문가들이 우리 앞에서 발언할 기회를 가장 많이 얻는다. 고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사람은 미래를 망친다.”는 혹평은 서늘하기까지 하다.

이에 더해 미국의 생명윤리학자라는 ‘조너선 모레노’의 검증되지 않은 약물로 인간의 각성 실험을 자행하는 행위에서 “윤리학자와 군인이 나란히 앉아 있으면 더 폭력적인 사람은 윤리학자”라고 오늘의 과학 현주소를 고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칸트 안에 머물러 있다면 칸트를 알 수 없다.” 오히려 한 걸음 물러나 주위에서 바라보아야 함을 지적하면서, 또한 “이해되었다고 여겨지는 사안에 대하여 적어도 한 번 그 반대를 생각하라.”하는, 과학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조언은 이 저술의 중요한 저작 의도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표현을 서구인의 시각이 아닌 ‘아메리카 원주민’의 시각에서 표현한다면, 다시 말해서 반대로 표현한다면 어떤 표현이 될까? “콜럼버스를 처음 발견한 아메리카인은 불길한 발견을 했다.” 이처럼 어떤 사안을 그 반대로 보았을 경우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도 있을 것이다.


끝으로 “교양으로서의 과학”은 오늘의 과학은 진보적이긴 하지만 인간적이지 못하다는 반성을 담고 있다. 근대과학을 출발시킨 서구의 이상은 본원적으로 통일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해왔다고 자성하면서, 법칙의 개념에 경도된 과학의 지향점을, 열린 대화, 확정 된 것이 없다는 동양의 사상과의 접목으로 웅변한다. 여기서 교양에 대한 그의 강론은 독특하고도 탁월한 관점을 제공한다.“사람이 교양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치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교양 있는 놈이 사람이냐 아니냐죠. 어떤 교양이 인간성을 동반할까? 어떤 교양이 도덕을 담보할까?”하는 질문은 분명 오늘의 과학, 그리고 현대인들에게 유의미한 질문이 된다. “교양이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과 결합될 때, 교양은 사람을 도덕적으로 만든다.”고 한다.


사기를 치는 과학연구자들, 그리고 의사(疑似)과학, 오류를 반복하는 매스미디어, 등등 과학을 배반하는 가짜 과학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서이다. 과학적 지혜가 아닌, ‘상식’의 바탕에 놓인 어리석음과 일상에서 만족스럽게 작동하는 믿음에 들어 맞추려는 오류와 무지를 벗어나야 한다. 또한 연구의 질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용기 있게 이야기하는 과학 비평가가 일천한 우리의 과학현장은 더 없이 과학과 소원하다. 이러한 현실이‘황우석’류의 기만적인 현상을 낳게 한다. 과학과 대중을 가깝게 하는, 보다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하는, 그래서 이 저술은 그 질적 비판과 관심을 통해 실존하는 인간의 삶을 개선하자는 전제를 가졌던 인간 중심의 과학에 대한 충분하고도 진지한 사유의 시간을 갖게 해준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1        
기분 좋게 기술된 녹색 삶의 정취 | 에세이,평론 2009-10-23 13:20
http://blog.yes24.com/document/1672971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굿바이, 스바루

덕 파인 저/김선형 역
사계절 | 2009년 09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뉴욕의 도시생활에 익숙한 서른여섯 살 청년(?)이 미국 남부 뉴멕시코 사막지대에서 친환경적 녹색 삶을 일구어 나가는 좌충우돌 진솔한 생태 적응기이다.  짐짓 체하지 않는 이 젊은이의 미숙함과 실수, 그야말로 삶의 진정함이 배어있는 상처투성이의 체험에서 배우는 살아있는 생태 모험담은 슬며시 미소 짓게 하는 친근함이 있다.

이론과 목소리 높여 외치는 그 어떤 생태계의 보존과 복원, 탄소 저감과 온난화에 대한 위기의 언어보다 더욱 깊은 공감과 참여에 대한 희구를 불러일으킨다. 아마 우리네 같은 도시 촌놈이 접하게 될 그 자연과의 친화를 위한 일상이 동네 친구와의 허물없이 전달해주는 영웅담처럼 펼쳐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2년간의 기자 생활을 같이 해온 무고장의 내구력 강한 그의 애마, 일본산 SUV 스바루를 떠나보내는 에피소드에서 시작되는, 그의 독립적인 녹색 삶을 살아가기 위한 착수부터 사뭇 진지하고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유쾌하게 풀어 헤친다.

디지털 시대를 누리며 생활하는 오늘의 우리들이 녹색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이를 입증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게 되었다는 저자의 당찬 의욕이 어느덧 기름이 덕지덕지 묻은 우리네의 마음 저 깊은 곳에 숨겨진 꿈을 다시금 끄집어내게 한다.

우유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의 미래 조달원으로서 구입한 한 쌍의 염소를 자신의 새로운 집, ‘펑키 뷰트 목장’으로 데리고 오는 그 우여곡절과 병든 나탈리(암 염소)의 긴급 치료과정은 그의 탄소 줄이기 첫 작업이 순탄치 않은 고난의 서막임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이 짜증스러울 만한 일련의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고, 서서히 녹색의 환경에 일체화 되어가는 기쁨을 보는 것은 저자 ‘덕 파인’의 글재주 일 터이다.

수천 KM를 날아온 수입 과일과 곡물, 축산품등이 사용한 엄청난 탄소덩어리를 실제의 삶에서 줄이고, 궁극에는 하나하나 친환경의 녹색산물로 대체해 나가는 일화들에서 겪게 되는 숫한 어려움과 난제들에도 불구하고 즐거움이 연속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가 이웃 생태주의자 ‘허비’에게서 발견한 “낙관주의와 훌륭한 유머감각”을 그에게서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일 터이다.


화석연료를 뿜어내는 자동차 대신에 폐식용유로 굴러가는 디젤트럭의 구입과 개조, 그리고 식용유를 구하러 다니는 모습에서 천진스런 순결함을 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보탠다. 그리곤 수탉 한 마리와 여덟 마리의 암탉을 치고, 매일 수확하는 달걀들, 몰래 습격하는 코요테의 습격으로 비명에 가는 그의 영양원인 닭들에 대한 비가(悲歌)^^, 지하에서 끌어올린 식수 탱크가 넘쳐흘러 만들어진 물웅덩이로 인한 사막의 방울뱀 공포, 골프공만한 우박이 망쳐 논 농장, 그리고 잡초와의 시름, 야생 동물들과 서식지와 생존에 걸친 싸움, 그리고 화해를 밑거름으로 자연화 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이 내내 정겹기만 하다.


어느덧 자동차를 탈 일이 없어지고, 자급자족하는 생활에 이른 ‘덕 파인’과 그의 사랑스런 연인 ‘미셸’, 그리고 그들의 곁을 뛰어다니는 견공 세이디, 이젠 가족을 늘렸을 염소 나탈리에게서 젖을 짜내는 평화로운 전경이 눈에 그려진다. “자애로운 사기꾼 대자연”을 마주하면서 일궈나가는 녹색의 삶을 위한 걸음마다 농부가 된 ‘덕 파인’의 징징대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하면, 염소의 매애애 소리, 닭들의 회치는 소리, 그리고 코에 꽃가루를 묻힌 채로 집에 들어오는 반려자 미셸의 달빛 향기가 느껴진다.


녹색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정말 해야 할 일들이 무척이나 많다는 느낌이다, 또한 훨씬 참여적인 작업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피카소 작품을 사는 <월튼네 가족>”같은 위선적인 자연의 삶이 아니라 실천하는 자연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부터 ‘7 세대 이후를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 아닌가하고 묻는다.  친환경적 삶을 영유하는 일을 다음 세대가 반드시 숙고하고 이해하게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저자의 펑키 뷰트 목장에서의 작은 목소리가 진중한 진실의 언어가 되어 우리에게 들려온다.

신나서 들려주는 흥겨움 넘치는 자연에서의 먹고사는 모험담이 시정(詩情)이 뚝뚝 묻어나는 글로 우리들을 자연의 매력에 흠뻑 도취하게 만든다. 지속 가능한 녹색 삶의 정취가 기분 좋게 기술되어 있는 빼어난 녹색환경 걸작 에세이이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2)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2        
지성환기,감성충족! 크라임 스릴러 걸작! | 소설,시 2009-10-20 17:08
http://blog.yes24.com/document/1667662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앉은 자리에서 쉼 없이 내처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흡입력이 강한 작품이다. 욕망에 가려진 음울한 현실세계와 심리적 외상으로 이중적 정체성에 시달리는 인간 군상들의 두려움과 고통이 빚어내는 선과 악의 실체에 대한 연민의 시선이 아닐까.

탐욕과 악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인공도시, ‘뉴아일랜드’, 그리고 퇴락과 소외의 지역이 된 침니랜드라는 대조되는 세계, 트라우마의 탁월한 메타포,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스릴과 서스펜스가 조화를 이루어 지성의 환기와 감성을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크라임 스릴러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이들 두 세계의 물리적 공간을 구분하는 것은 좁은 해협이지만, 상시적으로 뿌옇게 드리운 안개 또한 서로를 분리하는 장치가 된다. 욕망과 이면의 추함, 그 사악함을 가려주는 천혜의 은폐물(隱蔽物)로서 완벽한 상징성을 확보한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두 얼굴을 지녔어요. 어둠속에서 죄를 짓고 사람을 죽이지만 안개가 사라지면 해협의 물결처럼 아름답게 보이죠. ~ 어떤 것이 진짜 모습일까요?”이처럼 선(善)과 악(惡)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주인공 ‘매코이’의 상태와 상치(相値)되어 정신적 분열을 앓고 있는 현대사회 모습의 다른 표현처럼 느껴진다.

마주하기 두려운 고통의 기억에 시달리는 매코이를 보면서, 문득 이러한 생각에 이른다.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아픔이 나의 몸을 누비면, 극한의 고통이 정신을 짓누르면,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아마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통증이라면 정신 줄을 내 놓고 기절해 버릴 것이다. 기절도 할 수 없는 지속되는 아픔일 경우에는? 그럼 그 고통을 받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다른 사람이 받는 것이라고 내 인격을 분리할 수 있다면 분리해 버릴 것이다. 그 고통을 받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녀석이라고.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며, 이러한 순간 인간이 필사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대응전략이 될 것이다.

과거의 아픔과 자기와의 관계를 송두리째 거부하는 사람, 그래서 아픔이 주체와 연결되지 못한 채 주체가 될 만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만들어 내야만 했던 그 사람에게 우린 악인이라 할 수 있을까? 안개 속에 가려진 두 얼굴, 아니 그 분열 된 초상은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지 않을까? 연쇄살인을 정당화하고, 살인범을 변론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또한 현대인들 모두를 몰아 댈 생각도 없다. 그러나 고통을 가한 주체에서 우리들과 우리들 사회의 책임을 배제할 수 있을까? 유별나게 특별한 놈이 저지른 정신질환적 범죄일 뿐이라고.

사실 이 작품은 이러한 곤혹스런 주제의식에 사로잡힐 만큼 느슨하지 않다. 시간적, 공간적 변화가 엄청난 속도감을 느끼게 한다. 게다가 심리분석관 ‘라일라’의 배치는 감성적 배려와 사건 전개의 세밀함 등에 관계하면서 보다 집중적인 게임으로 유도한다. 또한 작품 초입부터 퍼즐이 게재된 신문과 같은 암시, 매코이의 고양이‘애들레이드’, 왼손잡이에 대한 편견을 넌지시 던져 복선여부를 혼동하게하거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진행은 어느덧 나를, 뇌의 부신피질에서 마구 분비되는 에피네프린으로 교감신경이 극도로 흥분되어 백 미터를 전력 질주한 선수처럼 헐떡이게 할 정도이다.

작품의 배경인 두 세계와 이중 정체성에 시달리는 개인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궁극으로 지향되어야 할 타자에 대한 연민, 신뢰, 사랑의 지고한 덕목이란 주제를 유연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장르적 요소를 통한 재미의 배가로 한국문학에서 장르와 주류의 경계에선 새로운 장을 개척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진정 소설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갈채를 보내고 싶다. 『바람의 화원』에 이은‘이정명’의 또 하나의 역작(力作)이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3        
문화처럼 종교를 만들어내는 일본인들... | 인문,사회 2009-10-19 12:42
http://blog.yes24.com/document/1664318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일본정신

이찬수 저
모시는사람들 | 2009년 09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일본의 정신, 일본인들의 성향, 기질, 습속 등에 관한 저작들은 그네들의 경제력만큼이나 수도 없이 즐비하다. 그러나 대중적 저술로서 일본의 종교에 관해 말한 책은 거의 없지 않을까싶다. 이 저술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저자의 말처럼 “다양한 문화의 총체”로서, 그리고 “문화 전반을 내다보게 해주는 가장 큰 창문”으로서의 종교를 통해 오늘의 일본, 일본인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이나 사회집단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려면 그들의 삶에 스며들어 있는 종교적 관습만큼 유용한 것도 없을 것이다. 특히나 일본의 거리를 거닐다보면 도처에서 신사(神社)와 사찰을 발견케 되는데,일상적 삶 속에 깊이 침투해 있는 이러한 모습은 더욱이나 그네들의 정신적 근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종교적이라는 이러한 외부의 시각에 동의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단다. 현대 일본인은‘의식적’인 차원에서는 전반적으로 종교 현상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 많은 신사와 사찰은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집집마다 예외 없이 설치되어있는 불단(佛壇:부츠단)이나 신붕(神棚;가미다나)위의 위패는 무엇일까? 소위 이러한 일본인들의 행위는 종교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즉 오랜 전통적 문화로서 이해되는 것이지, 종교의식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결국 종교가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인은 종교가 없다기보다는“구체적 현실을 향유”하려는 것이 일본식 종교라는 관점으로 보아야 함을 지적한다. 즉 현세 중심적인 일본인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굳이 초월적인 존재와 현실 밖의 것을 추구하는 행위로서의 의식화 된 종교에는 거북해하지만 일상의 풍요를 긍정하고 정당화 해주는 근거로서 현세주의적인 일종의 구원문화로서 수용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라는 의식이 없이도 자연스럽게 문화화한 종교적 관례를 따르고 수용하는 모습에서 일본의 속마음은 상당히 종교적이다.”라고 하고 있지만, 이러한 것을 종교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인지 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한편 일본인의 무의식적 심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본 정신의 뿌리인 신도(神道)의 정수를 파악해야 한다고 하면서, 정령숭배에 기원을 둔 신도의 배경과 인간의 욕망이 구체화 된 것으로서의 신(神;가미)의 의미, 메이지(明治)시대 국민결속과 부국강병의 국가공식 통치이념화 과정을 설명한다. 또한 일종의 주술적 정토신앙에 불과하여 자체적인 완결성을 지니지 못하는 까닭에 늘 다른 것의 도움을 받고서야 자기 정체성을 의식하게 되는 불완전한 세계로서의 신도와 불교의 영향을 통해 비로소 형식을 갖추게 되는 경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주술적이고 종교 혼합적인 양상은 조상신과 윤리를 결합하여 표현되고 있는 유교적 제례의식과 불교의 관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불단 안에 위패를 모시는 행위가 이러한 예인데, 이처럼 생활방식은 전형적으로 유교적 세계관을 반영하면서 불교라는 조직을 통해서 계승시키는 현상은 그네들에게 종교라는 것은 단지 인간의 희망 내지는 욕망을 투사하여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것 이상이 아님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결국 그네들의 신도라는 것은 유교와 불교, 그리고 주술적 정령신앙이 혼합된 구복(求福)적 문화의 형태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그네들의 의식으로부터 일본에서 외래 종교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외래적인 것은 새롭지만 무질서하며, 자신들의 오래된 전근대가 오히려‘질서적’것이라는 자긍심과 전통에 얹어진 가지에 불과하다는 잡거(雜居)적 사상에서 연원한다. 즉 서양종교도 하나의 문화형상이라는 차원에서 누리면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일본인에 비해 마치 자신의 전통은 극복되어야 하는 전근대적인 것으로 치부하여 말살해버리고 국적도 없는 표피적 문화에 허우적대는 한국인의 양태는 크게 대비되어 비친다.


물론 사상적 뿌리가 취약하고 물질적이고 극히 속세적인 종교관이라는 비판도 가능하지만, 그네들의 근대화시기인 메이지 시대의 “정신은 일본 전통을 지키면서 물질문명은 서양에서 배운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나, 대화혼(大和魂)이라는 그네들의 조화의 미덕이라는 정신에서 개성보다는 집단의 조화를 중시하는 시스템 사회의 긍정을 발견 할 수도 있다. 이에 비해 전체를 구성하는 나사나 톱니바퀴가 빠져 삐걱거리고, 저마다 제소리에 열중하는 한국사회, 세계가 주목하는 기이한 현상인 한국의 그리스도교, 전통은 폐기하고 정신은 오간데 없이 물신주의에 허덕이는 양태는 어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기까지도 하다.


“갓난아이가 저도 모른 채 부모의 품에 안겨 신사의 신들에게 신고 되고, 성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교 교회나 교회식으로 꾸민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리며, 죽어서는 불교 사찰에 묻히는” 일본인들의 일상과 종교의 경계가 허물어진 모습이 낯설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토속신앙을 정체성으로 하여 외래문화와 조화를 도모하며, 독특한 정신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그네들만의 사상적 토대는 우리에게 일본인을 이해하고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데 유익한 기틀을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다양한 삽화와 그네들의 역사, 종교사, 오늘의 신종교와 신신종교까지 다양한 현상이 수록되어 오늘의 일본인들의 정신적 지향도 예견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일본 정신의 또 다른 측면에서의 유용한 해석이랄 수 있겠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2        
1 2 3
진행중인 이벤트
트랙백이 달린 글
내용이 없습니다.
스크랩이 많은 글
[서평단 모집]『사랑 광기..
해석에 대하여
[서평단 모집]『반지성주..
법의 무지
많이 본 글
오늘 52 | 전체 421975
2007-01-16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