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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된 인류, 他者의 진정한 이해에서 시작된다... | 인문,사회 2009-02-26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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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블랙 라이크 미

존 하워드 그리핀 저/하윤숙 역
살림출판사 | 2009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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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적, 문화적 차이에 대한 우리들의 편협한 인식에 대한 직관적이고 영적인, 그리고 실체적인 경험론을 통한 시선의 전환을 제시하고 있다.

불과 50년 전인 1959년 저자‘존 하워드 그리핀’이 사는 미국사회는 뿌리 깊은 인종차별주의로 흑인들, 유색인종은 백인의 식당도, 화장실도, 식수도 같이 이용 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21세기 오늘 백인주류의 미국사회는 흑인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물론 이러한 인종차별적 요인이 말끔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인간으로서의 권위와 존엄성에 대한 평등성의 인식은 실로 엄청난 전환을 맞이한 것은 사실이다.

‘블랙 라이크 미(Black like me)’는 미국 남부 텍사스주 댈라스의 백인 주류 사회에서 성장한 저자로서 백인과 흑인의 분리에 대한 당연시했던 시각이 프랑스 유학을 통해 흑백의 공존에 직면한 인종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리고 2차 대전 중 유태인에 대한 인종말살정책, 전쟁에서 입은 실명의 상처로 맹인으로서 산 10년의 삶 등 소수자들에 대한 사회적 몰이해와 차별인식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된 ‘인종차별’의 실질을 들여다본 실천적 체험기록이라 하겠다.

피부 착색수술과 약물을 통해 흑인으로의 인종전환이란 인격적 모험을 통해 백인의 시선으로서가 아닌 소수자인 흑인 본연의 시선으로 인종차별을 바라보는 당사자 체험의 발걸음을 옮긴다. 어리석은 질문이긴 하지만 왜 이러한 행동을 해야만 했는가에 대해 저자는 “그 속(흑인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경험을 공유한다면 순수하게 이성적인 차원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답변하고 있다.

“자신의 제한된 문화적 기준이라는 한정된 틀 안에서 판단하고, 정형화된 틀에 박힌 사고 속에 갇혀” 사고하고 말하는 백인이 아니라 타자(otherness)로 소외되고 무수한 제약과 기회의 상실이란 고착된 불공평함에 놓인 흑인이 되어 그들로서 바라보는 진정한 소통과 이해에서 인종차별이란 본원적 문제의 해결에 다가서고 있다.

단지 피부색만 바뀌었을 뿐, 인격, 학력, 지식, 품위 등 이러한 내적 특성은 그대로인 저자에 대해 백인들이 보이는 그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표정, 노골적인 천대,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고 하는 흑인에 대한 편견을 마주한다. 가까운 식당과 먹을 물이 있는 가게가 있으나 들어갈 수 없다. 흑인이 이용 할 수 있는 화장실을 찾아 다른 도시로 이동해야 한다. 백인 여성을 처다 보아서도 안 되며, 극장 포스터 속 백인을 바라보고 있어도 안 된다. 백인 거주 지역에 발을 들여놓거나, 거리에 멈추어 앉아있으면 백인의 경고와 협박이 날아든다.

모든 기회를 차단당하고 억압받는 환경에 놓인 흑인들의 참혹한 환경을 백인들은 열등한 인종이기에 흑인들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고 백안시한다. 백인들은 흑인들이 “가슴을 짓누르는 우울 때문에 이를 떨쳐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시끄러운 소음이나 포도주, 섹스, 폭식으로 감각을 무디게 해 잠재울 수밖에 없다는 걸 그들도 알까? 웃음소리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웃음소리는 흐느낌으로 바뀌고 , 흐느껴 울면 깨닫는 게 있고, 깨달으면 절망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이해하려 하고 있을까? 하는 저자의 통찰은 타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사랑을 보여준다.

흑인으로서 남부 미시시피, 앨라바마 등지에서 백인으로부터 받는 위협은 거의 인간으로서 살아 갈 수 없을 정도의 공포를 느끼게 한다. “마음은 늘 먹을 것과 물 생각이었다. 너무도 오랜 시간을 그저 기다리거나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데 쓰다 보니 그 밖의 다른 많은 것은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는 당시의 기록은 그 두려움이 가히 어느 정도였는지를 실감케 한다.

“불완전하면서도 경직된 일반화를 근거로 벌어지는 이런 비극적 현상 속에 우리가 다른 집단에게 갖는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적대감은 오늘에도 만연하여 있다. 작게는 한국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편견과 질시, 그리고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아랍민족에 대한 서구의 적대감 등 타자에 대한 비틀어진 망상이 마땅히 받아야 할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해치고 있다.

이 저술이 쓰여진 50년 전의 미국과 세계의 인종적 편견이 오늘의 시선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하는 다수자의 소수자에 대한, 힘 있는 자의 힘없는 자에 대한, 타 문화에 대한 지각없는 행위가 만들어내는 어떠한 것도 폭력과 공포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으며, 모든 인류가 하나의 통합된 개념으로서 진심어린 대화를 나누기 위해 “타자(他者)가 없다는 것, 타자란 중요한 본질적 측면에서 바로 우리자신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고상한 가면 뒤에 민족주의나 종교의 가면 뒤에 몸을 숨기고 타자를 비난하는 자들의 혐오가 우리사회에서부터라도 사라지기를 기대해 본다.

“시력을 잃은 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잃은 게 없다는 점을 이해하라. 그의 지성도, 취향도, 감수성도, 이상도, 존중받을 권리도, 그 어느 것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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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문학의 변론서(?), 아니 연서(戀書)이다! | 에세이,평론 2009-02-2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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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손민호의 문학터치 2.0

손민호 저
민음사 | 2009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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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문학의 근간을 이루는 30인의 작가와 그들 작품에 대한 변론(辯論)서라 할까? 이들 수록된 작가의 선정에 대한 저자의 언급도 언급이겠거니와 그가 선호하는 작가들임에는 틀림없다. 특히나 이 저작물이 작품 비평이나, 문단에 대한 논평을 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소개되는 작가들에 대한 인품이나, 일화, 그리고 작품의 지향점 내지는 대중적 이해를 지원하는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어, 한국문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자극하는데 열중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이러한 이 저작물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관심밖에 머물러 있던 작가와 작품들에 대해 이해를 불러일으키는데 분명히 성공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문단 내에서의 소소한 소음 등이나, 그네들의 리그에서 벌어지는 촌극, 작가들의 성향이나, 드러나지 않았던 작품 이면의 이야기들이 해당 작품들에 대한 충분한 관심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저작자가 구분한 일련의 작가군에 대한 소개 역시 독자들에게 매 작가들마다의 이해를 선명하게 하여 작품의 취향에 따른 작가와 작품의 선택에 대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으며, 부분적이긴 하지만 발표된 작품들에 대한 담론식 소감이 쉬이 접근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독자들에게 친밀감을 높여주기도 한다. 또한, 한국문학의 다양성 결여와 소재의 빈곤, 상상력 부재, 과거와 사상적 편견 등이란 선입견으로 무장된 독자들을 향해 우리에겐 박민규, 백가흠도, 김민정도, 편혜영도 있고, 김연수, 천명관, 류나도 있다. 그리고 엇박자 악동 김중혁도, 카프카를 닮은 한유주도 있다고 자랑하는 듯싶다.

더구나 소설이나 산문시장에 편중된 독서시장에 권혁웅, 황병승, 이장욱, 김선우, 김민정 등 시인들과 그네들의 작품세계에 대한 소개는 대중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가져올 수 있을 만큼 신선하고, 수월하게, 이해의 정곡을 안내하며 자리매김한다.

이들 작가들에 대해 세기말의 워밍업을 통해 21세기에 대거 출몰한 새로운 종(種)이라고 까지 너스레를 떠는 저자의 주장은 우리문학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흠씬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 문학의 저변을 견고하게 하여주고 즐거운 변주를 만들어가는 이들 작가들의 진면목을 바로 그들 또래의 감성으로 경쾌하게 풀어내고 있어 한걸음 물러나 비딱한 시선으로 들여다보려했던 마음을 어느 순간 잊어버리게 한다.

저자 손민호의 21세기를 견인하는 젊은 작가들에 대한 건드림은 한국문학에 무심했던 많은 대중들을 새로운 독자층으로 매혹하는데 분명 일조할 것이다. 가볍게 그러나 진심으로 읽게 된다. 우리문학, 우리들의 작가에 대한 애정이 도처에 뚝뚝 흘러난다. 손민호의 어떤 강권도 없었는데 나는 바로 달려나가 구입해서 읽어야 할 작가와 도서목록을 정리한다. 우선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달로’, 그리고 박민규를 다시 읽어야겠다. 이 괴짜(?)들의 세상과 같이 흘러보고 싶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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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거듭나기를 위한 ‘자아 죽이기(egocide)’ | 인문,사회 2009-02-23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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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우울증 거듭나기

데이비드 로젠 저/이도희 역
학지사 | 2009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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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인생주기는 인생에서 최소한 세 번은 상징적인 죽음과 새로운 삶을 경험할 기회를 위기 시점들을 통해 제공해 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의 모습이 엄청난 스트레스와 절망적으로 다가올 때 부정적 자아를 소멸시키고 삶의 의욕과, 희망에 찬 자신으로 변화, 성장 시킨다는 것은 말처럼 쉽게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작금(昨今)과 같은 비인격화 시대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 희망과 자기애(自己愛)의 자양분을 찾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수시로 찾아오는 침잠하는 회색의 찌푸린 감정이 점차 삶에서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하고, 그 멜랑콜리(melancholy)가 불쑥 자살을 생각케 하기도 한다.

우울증 그리고 자살에 이르는 사람들, 그들의 공통된 핵심감정은 “외로움, 소외감, 우울, 거절, 무가치감 그리고 절망감”이었음을 보고하고 있다. 금문교(Golden Gate Bridge)에서 뛰어내린 자살자들 중 생존한 자들의 자살행동 이후의 생활을 통해 그들이 완전히 새롭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은 이 저술의 탄생을 만든 주요 동인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들 생존자로부터 ‘자아죽이기(egocide)라 부르는 것, 즉 고통과 고통을 주는 지배적인 자아상 또는 자아 정체성을 놓아 주는 것’이 ‘진정한 자기(real self)'를 확립하기위한 중대한 단계임을 깨닫는다. 그들은 한결같이 “빛이 잠에서 깨어난 듯이 나의 마음이 열렸다.”고 증언한다.

그들의 자살행위는 “과거의 부정적인 자아 정체성을 죽였으며”, “내면의 죽음과 생명력 그리고 부정적 자아와 자기사이에 있는 분열을 초월했음”을 위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이 저술은 우울증과 자살의 충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정신과 신체의 죽음이 아닌 상징적인 죽음, 즉 자아(거짓자아)를 죽임으로서 이를 극복할 수 있음을 ‘융(Carl Gustav Jung)’의 정신분석이론에 기초하고, 치료사례의 예증을 통해 가능성을 설명하고 있다.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적, 실존적/영적 요인으로 구분하여 우울증의 그 본질적 이해와 의미의 탐색으로부터, 융 학파의 자살에 대한 관점을 이론적 이해는 물론 자살의 위험성을 예측하는 인자의 인식, 그리고 그 치유에 이르는 일련의 실증사례를 통해, “우울증과 자살을 대신 할 수 있는 상징적인 죽음과 새로운 인생을 포함하는 어려운 여정인 자아 죽이기와 거듭나기라는 대안적인 길”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이 저술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4인의 심리치료 상담 례는 ‘절망감을 느끼는 길목’에서 방황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희망을 불어 넣을 수 있는지, “내면의 치료와 원형을 불러일으키는” 긴박하고 중요한 치료과정의 면면을 공감할 수 있게 하여주고 있다.

치료환자들이 그린 그림을 통해, 그 상징이 갖는 의미로부터, 우리들의 이성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고취시키고 동기화하는 설명은 근본적으로 과거의 지배적인 자아정체성의 상징적인 죽음과 새로 만들어진 자아-자기 정체성의 출현을 포함하는 정신의 전체성을 조명하고 조절하는 탁월한 치유수단으로 돋보인다.

치료자와 환자가 함께하는 지난한 심리 상담과 치료과정을 쫒으면서 “인내와 사랑을 통한 치료가 가장 좋은 약 중의 하나”임을 느끼게 되고, “희망의 힘”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또한, 우리들의 좌절, 실패는 우리들 자신의 전체 자아가 아니고 오직 한 부분만이 상처를 입은 것임을 인정하고 배울 수 있다. 이 저술이 나에게 특별한 이유는 중년에 찾아온 상실감과 불안감, 그리고 심화되는 부정적 페르소나와 자아상을 버리거나 상징적으로 죽이는 자아죽이기를 하고 거듭나기를 배우는 정말 귀중한 계기가 되었음에 있다. 우울함과 외로움, 사기의 상실이란 개인의 정신, 의지, 용기의 붕괴를 극복하고 새로운 자아상을 찾아내는 희망의 불씨를 당기는 삶의 진정한 조언서가 되었다 할 수 있겠다.

다소 전문적인 용어와 내용으로 인해 공감하기에 어려운 저술일 수 있겠으나, 차분히 몇 가지 핵심이 되는 용어를 정리하고,‘페르소나(persona), 자아상, 자아, 개인적 그림자, 아니무스(animus;혼), 아니마(anima;영), 그리고 원형적 자아에 이르는 ’융의 정신구조‘를 설명하는 장(章)부터 읽어나가면 인생의 ’위험한 소용돌이’가 이는 강물에 허우적댈 때 정말 유용한 심리 상담서가 될 것이다. 저자의 체험과 도판(圖版)이 수록된 치료단계의 설명은 독자의 이해를 제고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한다. 삶에 의미를 찾지 못하고, 좌절하거나, 상실감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니 고독한 우리 사람들 모두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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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아가페란 이런것이구나! 아름답다... | 소설,시 2009-02-20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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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없었다면 “나의 삶은 물이 말라버린 개울”이었을거라는‘조지’의 말처럼 한 사람에게 삶의 의미이자 존재의 의미가 되어버린 사랑이야기이다. 블리자드가 몰아치고 끝없이 이어지는 드넓은 캐나다의 설원과 호수, 침엽수가 빼곡히 둘러쳐진 산악과 계곡, 연어와 송어가 물위로 솟구치는 정경, 그 가운데 남녀의 행복에 찬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사랑이라는 인류 최고의 미덕이 소크라테스식 실천적 사랑의 모습으로 조지와 나스타샤, 두 사람의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 아가페의 철학적 정의를 그대로 담고 있는 사랑이 그려지고 있다. 아마도 이 사랑이야기로 인해 이 작품을 소설이라 수용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사랑에 흠뻑 취해 소설문학으로서의 많은 실패요소들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그들의 애절한 사랑의 감동에 머물게 될 정도로 얼얼한 작품이다.

그럼에도 다분히 가치지향적인 작가의 장황하고 다소 유치한 사유의 열거들 - 황금의 영혼을 가졌으나 지상의 찬사가 삶을 평이하게 해버린 동료 교수이자 친구인 그렉에게서, 물질주의자 유태인 매튜에 대해서, 독일과 일본의 사죄의식의 그 판이함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해서, 미국의 깡패자본주의에 대해서, 서구의 몰락에 대해서, 한국 교민사회의 이 문화와의 괴리에 대해서, 미국 유학과 유학생의 부조리에 대해서, 무지에 대해서, 진짜 창녀에 대해서 등등 - 인 작가의 삶의 철학과 인간, 세상에 대한 시선이 등장인물들의 소설적 흐름과 무관하게 장황한 사변적 주장으로 서사위에 붕 떠올라, 서로 융합하지 못하는 거북함을 느끼게 한다.

이렇듯 작품은 작가 자신의 지식과 가치관 전반을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통해 그 전달의 폭을 확대코자 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작품을 보면 그 성격이 좀 더 명료해진다. 해외유학을 비롯한 이민자들의 타국에서의 삶의 모습과 현실을 조명하고, 아울러 문화, 사회, 경제, 정치 등 세상의 시사적 비평을 소설이란 구조를 빌어 보다 용이하게 대중에 표현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결국 소설문학을 사적으로 오용한 것이라는 의구심을 피하기 어려운 저작(著作)이다.

특히, 소설속 사건이나 특정 이야기의 말미에 억지스럽게 자신의 사유를 강요하는 연결은 소설적 구성과 괴리되어 때론 철학에세이고, 미학강론이기도 하며, 시사평론이자, 회고록에 근접하가도 한다.

물론 서사의 커다란 틀인 나스타샤와의 사랑 이야기는 조지가 나스타샤를 표현하는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는 고결함과 품위이다.”처럼 고귀한 품격을 보여준다. 결국 “차가움과 뜨거움이 같다는 걸 몰랐어. 포기와 열망이 같다는 것을.”하는 조지의 지고한 사랑이 “사랑에는 분별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건 사실이야. 그렇지만 사랑이 분별과 배려에 희생되어서는 안 돼. 분별과 지혜는 사랑 옆에 있는 거야. 사랑위에 있는 어떤 것은 아니야. 조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봐.”하는 나스타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비련으로 종결되는 이야기에서 감동의 미학을 선물받기도 한다.

작품 중후반부의 부분적으로 뛰어난 서사에도 불구하고 지리한 작가의 가치관 진술은 현명한 독자들을 지치게 함에는 틀림없다. 이와 같이 생뚱맞은 사족들은 작가의 부질없는 과욕이 빚어낸 것이거나, 소설의 외피를 쓴 전기로서 의도하였기에 야기된 것이리라. 나스타샤와 조지의 만남과 사랑의 전개, 그리고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낚시장면, 그렉과 매튜와의 우정만으로도 멋진 아가페는 그려졌으리라. 아름다운 이야기이면서 한편으로 아쉬움을 떨칠 수 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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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류를 위한 사랑의 전범(典範) | 인문,사회 2009-02-10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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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사랑, 그 위대한 악법

크리스토퍼 필립스 저/이세진 역
예담 | 2009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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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사랑을 “인간 정신이 이룰 수 있는 가장 신성한 비상(飛上)”이라 했던가? 세상에 널브러진 증오, 시기, 갈등, 편견, 차별, 외면, 기아, 죽음, 상실, 전쟁, 그리고 몰락이란 이 부정적 감성의 찌꺼기들이 나 개인, 가족, 지역사회, 인류의 평등과 공감, 공존의 삶을 여전히 해치고 있다.

“모든 영혼의 깊은 곳까지 내려가는 법을 아는 사람”, 소크라테스의 ‘사랑’에 대한 신념과 의지, 실천적 행동을 기저로 한 철학카페, ‘소크라테스 카페’는 지구촌 모든 인류의 진정한 ‘아고라’가 되고, 견해와 경험, 관심이 다른 이들이 모여 타자들의 삶을 배우고 사랑을 실천하는 터전이다. 이 저술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실천도량으로서 오늘의 세계에 요구되는 가치를 실천철학의 확장된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에로스, 스토르게, 크세니아, 필리아,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 아가페에 이르는 사랑의 해석은 철학적 사유(思惟)가 우리들의 현실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스며들어 삶의 양식이 되며, 실현되는 것인가를 철학적 사유를 통한 그 근원의 고찰, 즉흥적이고 다양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보통사람들의 스스럼없는 진지한 대화, 그리고 오늘의 세계로부터 조명하는 사랑의 의미를 성찰한다.


성적 에로티시즘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에로스(Eros)'에 대한 우리의 단편적 이해를 창조성, 실험, 발견을 자극하고 고무하는 관능적 욕망 그 자체의 고귀함과 고결성을, “우리의 시야를 열어 인간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 혹은 차원을 보여주는 그 무엇을 생성하는”아름 다운 지혜로 이끈다. 성적 욕망은 저열한 것인가? 하는 질문은 자유롭게 저마다의 사유를 이야기하는 이웃들의 견해에서 “성적 열정을 창조적으로 표현하고 발산 할 수 있는 사회건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할 수 잇는 가장 아름다움 것은 지혜”라는 관념으로의 발전에 이르는 과정으로 이어지고, “성공의 닮음(semblance)만을 기약하는”현대인의 위험스런 삶의 추구에 대한 경종의 개념으로까지 확산시킨다.


성적열정이 적절하게 흐르지 못하고 삶의 중심에 머문다면 “문화 및 문명의 건설에 투신할 여력과 의욕을 잃게 되고 사회는 병들게 된다.”는 고대 아테네사회의 몰락을 통해 오늘 우리세계에 펼쳐지는 욕망의 왜곡을 경계하기도 한다. 이렇듯 이 저술은 《향연》에서 찬란하게 빚어졌던 ‘에로스’의 관념을 오늘의 확장된 세상의 가치에 접목하여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듯이 가족에 대한 사랑(Storge), 이방인에 대한 사랑(Xenia), 친구에 대한 사랑(Philia), 헌신적인 사랑(Agape)이 관념론적 사랑론에 머물지 않고 도덕성, 인류애, 공동체의 사랑, 삶의 내면을 향해 외치는 본연의 목소리로서의 인류의 절대적 실천가치로서 연결하고 있다.


“가족의 사랑이 사라지면서 자기자신, 지역사회, 타인에 대한 사랑도 사라졌다.”는 가족사랑의 실천적 의미는 “혁명의 최대 동력은 사랑”이라는 ‘체 게바라’의 언어에서 힘을 받아 세상의 자비로움은 집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일깨운다. 또한 낯선 이들에 대한 사랑인 ‘크세니아’로부터는 아메리카 인디언인 ‘수’족의 “모든 인류는 인종을 불문하고 영혼의 정수(wakan tanka)를 이루는 일부”라는 믿음에서 이방인이란 진정 존재하는 개념인가? 하고 묻는다.


종교의 갈등, 민족주의의 편협함, 이기적 자원전쟁, 계급간의 갈등이 어느때보다 첨예해진 오늘에서 ‘이타적 이기심’, 동정심 이전에 겸손함을 배우는 자세에서 크세니아의 정신은 더욱 빛을 발한다.

그러나 선진국에게 빈곤에 신음하는 제3세계 국가들의 경제성장을 돕기 위해 국민총생산의 0.7%를 할애하도록 요구하는 UN결의를 지키는 국가는 텐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스웨덴 4개국에 불과하고 세계경제대국인 미국은 고작 0.08%에 불과한 현실은 “배려는 인간실존의 기본적인 상태”라는 독일철학자‘마르틴 하이데거’의 언어를 무색케 한다. 상처와 좌절에 신음하는 이웃에 내미는 연민과 동정심에 고통이 수반될 수는 있으나, 이는 개인의 자아와 사회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 즉 이타적 이기심의 발휘를 필요로 하는 바로 사랑의 본원적 실행으로서의 의미를 확장한다.


인간은 왜 집단을 구성하고 살게 되었는가? “개인이 자신답게 살게 하는 것, 최대한의 잠재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사회조직의 일차적 목표. 그것을 위해 공동체의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곧 공감어린 애정 ‘팔리아’의 벗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지식과 기술과 가치의 전달을 나누고, “타자들의 삶을  배우고 광범위하고 다양한 인간 체험을 들려주는” 더욱 밝고 희망찬 토대를 만들게 하는 유대가 될 것임을 제시하기도 한다. “영리하고 열심히 일하지만 뒤처지는 저소득 계층 학생들은 막대한 국가 재원의 손실을 의미한다.”는 차갑고 어두운 곳, 세상의 시선에서 외면된 이웃과 주변에 눈을 돌리면 우리가 보태야 할 사랑의 시선을 필요로 하는 곳이 무진장임을 알게 된다. “의문을 통해 고찰하는 삶”,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온정을 갖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사랑 아니겠는가!  그리고 지속적으로 타자의 “가장 내밀한 소망과 욕구와 욕망을 알아내기 위해 지대한 노력을 쏟고서야” 비로소 우린 온전한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을 세상에 흩뿌릴 수 있지 않을까? 아가페를 위하여... “의미 없는 고통이 있는 세상”일지라도 사랑은 인간정신의 가장 위대한 가치가 아닌가!


전 생애를 바쳐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지혜에 대한 사랑을 심화시키려 했던 사람, 운명을 향한 사랑을 알기에 운명을 창조했고 운명에 자신의 의지를 행사했으며, 운명을 사랑했던 낭만주의자, 아르테(Arete;탁월성)와 명예와 연민이라는 가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던, 그래서 그 가치들이 계속 살아남을 수 있게 하였던 사람. 소크라테스의 사랑이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전범(典範)이 되는 것은 초록빛 초원과 맑은 물이 흐르는 평화의 대지 위를 뛰놀 우리들의 후손, 인류의 미래를 위한 정말의 가치이기 때문이리라. 읽고, 읽고 또 읽을 만 한 살아 숨 쉬는 진정한 윤리교과서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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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6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