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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문학 식견을 한 뼘만큼 성장시키는 풍자소설 | 소설,시 2010-05-3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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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정교한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추리문학에 대한 12편의 작품사례를 통해 추리를 구성하는 트릭등 기법을 독자들에게 전해주려는 교범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일종의 옴니버스형식을 빈 열두 가지 사건 이야기로 연결된 이 작품 그대로도 어지간한 추리소설의 맛을 보유하고 있어, 표제가 지닌 고유한 의미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한 꼭지 한 꼭지마다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추리기법들을 달리하여 그 뻔하고 부실하며 억지스러운 틀에 박힌 소재와 트릭들의 결함과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데 열중한다. 툭하면 등장하는 사방이 막혀있는 밀실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 쉽게 살인자를 지목할 수 있는데도 피살자는 항상 알 수 없는 의문기호나 문자로 된 다잉-메시지(dying message)를 남기거나, 의미를 규명하는데 왠지 미흡해 보임에도 사체를 토막 낸다거나, 전래동요나 신화 등의 상징성을 답습하는'마더구스(mother goose)'식 사건전개와 같이 진부하고 졸렬한 작품들의 실상을 낱낱이 해체하고 조롱해댄다.


이 조롱과 비판은 추리문학의 질적 저하에 대한 독자의 무심함과 무지를 논박하고자 하는데 있음은 분명하지만 작가는 바로 이러한 웃지못할 트릭의 세계와 어이없는 반전 등 그 실체를 사례분석서처럼 독자에게 보여주어 궁극적으로 독자의 작품성 평가에 대한 기대치를 제고하고 그 결과 추리문학의 전반적인 질적 향상을 꾀하고자 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처럼 자신의 알몸을 모두 드러내는 작가의 행동은 어찌 보면 작가와 독자사이에 놓여있던 보이지 않는 장벽을 허물어뜨려 보다 밀착된 소통을 하겠다는 의지로 해석할 수 도 있을 듯하다.


작품은 탐정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치고 정통의 수사 권력인 경찰이 들러리를 서지 않는 작품이 없다고 비실대는 웃음을 지으며 이번만큼은 자신이 주역으로 활동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며‘오가와 반조’라는 지방경찰청 경감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호기로운 등장에도 명탐정‘덴카이치 다이고로’가 나타나면 사건의 해결은 탐정의 몫으로 넘어간다. 모든 과학적 수사기법과 장비, 탁월한 수사역량을 소지한 인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경찰이 매양 헛다리만 짚어대는 모습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독자들과 안이한 집필을 해대는 작가들에게 쓴 소리를 뱉어내는 것의 다름 아니다. 아니 지금까지 무수하게 발표한 자신의 작품들과 자신의 작가적 의지를 스스로 반성하고 채찍질하려는 대 독자 선언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 새로운 형태의 미스터리 탐정 소설은 그 개별의 옴니버스 하나하나에 톡 쏘는 재미와 알아 들어줘야 할 작가의 명료한 방향이 있어 읽어 나갈수록 그 축적되는 메시지로 인하여 작품의 진중한 무게를 느끼게 하는 독특한 맛이 있는 작품집이다. 그래서인지‘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향 후 발표작품의 면모는 독자에게 예리한 칼날을 벼리고 벼르게 한다. 어쨌거나 이 작품이 둔감하게 보아 넘겼던 추리문학에 대한 식견을 한 차원 올려 준 것 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추리문학 속에 담긴 알지 못하던 요소들에 눈을 뜨게 된 덕에 아마 더욱 짙은맛을 음미하게 될 것 같기만 하다. 허어~ 추리소설을 읽고 의미 있는 작품이라 평해도 말이 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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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즘과 죽음의 심연을 이해한다! | 인문,사회 2010-05-29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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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조르주 바타이유

바타이유 저/유기환 역
살림출판사 | 2006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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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푸코, 보드리야르 등 현대사상을 대표하는 이들의 뿌리를 이야기하다보면 거기에는 항상 ‘조르주 바타이유’가 있다할 정도로 그의 전복적 사유, 과잉의 탐구, 소비의 사회학 등 그의 사유는 “현대사상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성(性)과 성담론, 그리고 소비의 경제학에서 그를 배제하고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영향은 오늘에도 뿌리 깊다.

최근 발표된 노인의 소녀에 대한 갈망을 주제로 한 국내의 소설작품은 거의 노골적으로 바타이유의‘에로티즘’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할 정도로 그의 성과 죽음에 대한 성찰은 성적 욕망에 대한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과시적 소비사회인 오늘에 있어 보드리야르, 부르디외로 이어지는 인간과 세계의 존재조건을 과잉 에너지의 비생산적소비로 파악한 일반경제학은 인간 생명체의 근본적 본질을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로 무한히 활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 오늘의 우리들이 접하는 많은 저작들에서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는 중에도 바타이유를 직간접적으로 만나고 있다 할 수 있다. 

이 저술은 바로 이러한 바타이유의 사상을 그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수월하게 해석하고 그의 본격적인 접근을 위한 친절한 길동무가 되어주고 있다. 그의 사상적 기반에 어떠한 형식으로든 영향을 끼친 출생과 불우한 성장의 환경에서부터, 니체로부터의 영감이나 투우장 죽음의 목격처럼 사상적 근간이 된 계기, 그리고 문학작품을 포함한 저작의 세계를 통해 핵심 사상이자 저술인 『저주의 몫』과 『에로티즘』에 대한 명쾌한 이해를 돕는다. 특히, “시공을 초월한 고전”이라 칭송을 받는 이 두 저작의 보다 심층적인 이해를 위하여 사유의 원천이 되었던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나, 바타이유 자신의 저술인『내적 체험』,『에로스의 눈물』등 관련 저술들의 설명까지 더해져 바타이유에 대한 완벽한 길라잡이로서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바타이유 사유의 출발점은‘에너지 과잉’이라는 표현으로 대변된다고 할 수 있는데, “지구는 대가없이 무한히 주어진 태양열 때문에 늘 에너지의 과잉에 시달리고 있으며, 바로 이 에너지 과잉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면 폭발, 즉 재앙에 직면”할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즉 “가계경제에서는 에너지의 부족, 즉 빈곤이 발생할 수 있지만, 전체경제, 예컨대 세계경제에서는 언제나 에너지의 과잉 즉 잉여가 발생”해서, “적절히 이 잉여를 해소하지 못할 경우 전쟁”이라는 파괴적 행위가 발발한다는 관점이다.

이를 위해서 바타이유는‘비생산적소비’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사치, 종교예식, 기념물 건조, 전쟁, 축제, 스포츠, 장례, 예술, 도박, 섹스”와 같은 “소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소비”는 과잉 에너지를 해소하는 유용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예로서 고대사회의 증여교환 체계는 과잉에너지를 해소하는 더 할 수 없이 현명한 방법이었다는 것이며, 이를 위해 북미 인디언의‘포틀래치’와 같은 독특한 증여메커니즘을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비생산적소비의 예로서“값비싼 장신구, 넘치는 음식물, 피의 희생과 같은 엄청난 부의 소비를 요구했던” 고대 아즈텍인들의‘희생제의(犧牲祭儀)’는 신성한 소비, 비생산적 소비, 과잉에너지의 효율적 소비라고 해석하고 있다.

결국“전쟁이란 비극적 해결책을 피하기 위해 인간이 생각한 것이 바로‘비생산적 소비(데팡스: depense)’”라는 것으로, 전체의 관점에서 항상 잉여의 문제로 야기되는 폭력을 해소하기 위한 지혜로운 소비였다는 것이며, 인간사회의 경제적 관점은 자원의 부족을 메우기 위한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과잉에너지의 소비를 위한 문제였다는 통찰이다. 바로 증여교환이나 희생제의와 같이 인간은 과잉에너지를 가장 사치스럽게, 가장 집약적으로, 가장 과시적으로 소비하여 문제를 해결하였으나, 오늘의 사회는 생산과 성장, 그리고 부의 축재(蓄財)에 매진하여 성장이 한계에 부딪치자 역사상 가장 사치스러운 비생산적 소비라 할 수 있는 양차대전이란 비극적 파괴의 수단에 이르렀다고 진단한다.

이를 오늘의 사회에서 해석한다면 비등한 과잉의 에너지가 야기할 상상하기 싫은 공멸이 아니라 비생산적소비로서의 증여인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 사회복지의 강화, 다양한 기부 등이 이루어져야 함의 당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바타이유는 자연스럽게 비생산적소비의 원형으로서“자연의 기본적인 사치인‘먹기’,‘성(性)’,‘죽음’”이라는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즉 조건없는 소비로서 에너지를 열광적으로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성행위나, 빈자리를 만들어주는 죽음은 가장 탁월한 비생산적소비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소비의 경제학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저작 『저주의 몫』이 말하는 에너지 과잉의 소비론에서 『에로티즘』이라는 사회인류학으로 이어진다. 그는 에로티즘이 탄생한 최초의 조건을 밝히고 있는데, 2만 년 전의 동굴벽화인 라스코 동굴의 내장이 흘러내리며 죽어가는 황소와 발기한 성기를 한 인간의 죽음이 그려진‘우물’그림에서 성과 죽음과 종교의 일치를 읽어낸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경외감, 그리고 죽음에 대한 관능의 모습, 공포라는 죽음의 외연이 만들어낸 종교적 감수성이다.
공포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라는 죽음의 관능을 인식한 최초의 인류는 섹스에 목적의식을 갖게되었고 그것은 바로 즉각적 쾌감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시발로 하여 에로티즘의 역사에 대한 성찰은 죽음의 인식으로부터 살해의 금지와 같은 금기를 낳고 궁극에는 금기위반을 둘러싼 욕망의 메커니즘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에로티즘이란 진정 무엇이란 말인가? 라는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바타이유는 인간은 서로 교통하고 싶어 하나 본질적으로 두 개체는 거리를 좁힐 수 없는 불연속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연속적 존재들의 삶에 모종의 연속성이 구현되는 기막힌 시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생식의 시간으로서, 이로 인해 정자와 난자라는 두 개체가 하나로 결합하여 새로운 불연속적 존재를 탄생시키고 둘은 소멸한다는 것으로 곧 성행위는 죽음의 다른 이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적 표현으로서 알몸이 지니는 의미를 해석하게 되는데“알몸은 존재의 불연속성, 즉 폐쇄성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며 알몸과 알몸이 결합하는 한 순간 자아의 경계가 사라지며, 이순간이 바로 존재의 연속성이 구현되는 순간”, 즉 신성성에 이르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이에 더해 금기와 금기의 위반이라는 개념이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는데, 인간사회가 설정한 금기의 대상은 폭력으로서 죽음과 성(性)은 본질적으로 폭력에 연관된다는 점이다. 즉“성의 외양은 그것이 아무리 황홀할 것이라 할지라도 폭력성을 띤다.”는 것이며, “성행위는 정상 상태의 상대방이 보유하고 있던 폐쇄적 존재 구조를 파괴하는 것으로 이때 필연적으로 숨을 멎게 하는 파열이 발생하며, 뒤이어 존재의 와해 속에서 황홀한 연속성이 구현된다.”는 것이다. 결국 폭력은 무서운 동시에 황홀한 것이며,
말을 바꾸면 생명의 절정인 에로티즘을 통해 인간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의 심연을 맛보는 것의 다름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이처럼 에로티즘은 신성성의 현현임에도 오늘날의 에로티즘에 그늘이 드리워지게 된 것은 비생산적소비의 전형인 에로티즘이 노동이라는 생산과 성장, 축재라는 사회에서 제한되고 죄악시되는 왜곡된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한편, 성(性)금기의 위반을 조직적으로 수행한 전형적 예로서 결혼이나, 신성성을 가졌던 고대의 매춘에서 오늘의 매춘에 이르는 금기위반의 관념을 통한 성찰은 매혹적인 담론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바타이유가 말하는 에로티즘이란 애초에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기에 모순과 역설에 빠지지만, 중요한 것은 그 모순과 역설을 인간은 삶의 본질로 여긴다는 사실을 발견케 된다. 아마 “모순과 역설은 에로티즘의 본성 앞에서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연속성의 열락을 희망하고 때로는 불연속성의 고독을 희망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혜롭게도 또는 음험하게도 모순되는 두 항의 양립을 모색”하는 발칙한 존재 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금기를 완전히 와해시키지 않으면서 순간순간의 위반의 관능을 만끽”하고, “
죽지 않으면서 죽음 저편의 세계로 살짝 넘어갔다 오는 길, 그리하여 욕망도 살리고 우리도 살리는 길”, 바로 에로티즘의 길을 숙명적으로 걷는 것일 것이다.

조르주 바타이유에 대한 이 해박한 입문서이자 탁월한 두 저작의 해설에서“욕망이란 결국 금기의 위반이 맺는 역설의 윤무(輪舞)이며, 인간이란 근원적으로 생산의 이성보다 소비의 욕망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임을” 이해하게 되는 정말 엄청난 사유의 대 전복을 경험케 된다.
“도대체 욕망이 선악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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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책 속 한 문장 댓글 달기 이벤트 | My Favorites 2010-05-26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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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마지막 날들]속 가장 인상적인 한 문장을 댓글로 달아주세요

 

참여하신 분 중 다섯 분께 젊은 프랑스 작가 니콜라 파르그의 소설 [난 네뒤에 있었어]와 [멋진배역] 중에서 1권을 보내드립니다.

 

참여방법 : 이 포스트를 포스팅하시고, 댓글로 책 속 자신만의 한 문장을 달아주세요.(2010.5월26일~6월14일까지)

 

도서선물 : 우리 시대 젊은 프랑스 작가 니콜라 파르그의 소설 중 1권을 선택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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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겨운 낭패감만 무성한 실험텍스트 | 소설,시 2010-05-2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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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소설을 대하고 궁지에 몰려보기는 난생 처음이다. 생각의 일관된 흐름을 만들어내는 문장이 흐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구절들의 수없는 반복으로 읽기를 방해하여 짜증이 몰려오게 하는가하면, 단지 소리로 밖에 표현 할 길 없는 글자의 나열이 그저 하나의 집합체로 문양처럼 써 있다. 아니 글자가 그려져 있다고 해야 하나.

다만 틈틈이“우리의 삶은 시작도 끝도 없는 서사의 쪼가리다.”와 같은 문장을 통해 글쓰기에 대한 회의적 관념을 드러내는 정도로 작가의 의도를 추측케 하는 불친절이 있을 뿐이다.

순화된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사용어휘들을 팽개치고 굳이 추하고 오염되었으며, 선뜻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는 참혹한 사체의 모습을 통해서만 삶의, 글쓰기의, 인간본질의, 인간의 습속을 말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게다. 설혹 우리가 늘 소통하는 문자의 진실성에 믿음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작자가 선택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할지라도 지나치게 그로테스크한 단어 찾기에 혈안이 되어 더럽고 냄새나고 혐오감을 주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서술과 단어만을 늘어놓아야 세상을 향해 외칠 수 있는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부패하고 썩어 흐물거리는 토막 난 사체와 피고름 냄새를 진동케 하고, 어머니를‘미파’(미친노파)니, ‘뭐’니 하며‘소쉬르’식 구조언어학의 랑그와 파르를 어색하게 들이밀 이유도 없다. 이미 세상은 작자가 이러한 텍스트 실험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썩고 더럽고 추하지 않은가. 아마 신표현주의나 추함의 형상화 이론을 실천해보겠다는 치기어린 열정 이상이 아니지 않을까.

왜 독창적인 언어예술에 대한 열의를 이러한 시들어가는 문학이론에 소비해 버리는지 모를 일이다. “불가해한 현실을 설명하려고 할수록 설명의 한계와 역부족의 현실이 더 불가해하게 물들이고 지배하고 억눌렀다.”고 이유를 달고 있으나, 과연 그렇다면 어디에서 삶과 그 실체의 진정성과 의미를 찾겠다는 것인가?

숨김없이 남김없이 언어의 얼굴을 드러냈다는 말은 그렇다면 자기모순 아닌가. 역겹고 뒤틀리고 불온한 단어들만이 진실인가? 그렇게 편협한 전위는 정말 웃기는 얘기 아닌가. 점점 궁핍해져만 가는 오늘의 정신들이 그려내는 이 시궁창 같은 미혹의 시대는 급속하게 쓸려가 버리고 말 것이다. 이러함이 진정 소설의 본래 모습이라는 주장이나 문학과의 전쟁이라는 수사는 사실 구역질나는 허영과 과시에 불과할 것이다. “인생의 진리의 한 장면을 몸소 체험했다.”는 이 어수룩한 문장처럼 이 소설 아닌 소설은 낭패스럽기 그지없다. 불필요할 정도의 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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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이 예정된 남자의 감동적‘자기찾기’여정 | 소설,시 2010-05-24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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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우리가 언제 삶에서 소멸될지 대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그 죽음의 날을 알게 된다면 우린 남은 삶의 시간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소멸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수 있을까? 초연하고 당당하게? 아님 죽음의 두려움과 외로움에 고통스러워할까?
마흔여덟의 남자. 이사부장이란 직위를 가진 중견 직장인. 어느 날 남아있는 삶의 시간이 6개월이라는 폐암 진단을 받아든 남자,‘후지야마’는 남은 생을 병원에 갇힌 채 받아야하는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진정한‘자기찾기’를 위한 적극적인 삶의 시간을 마련코자 한다.

“지금까지 내가‘~ 해야만’한다. 라고 여겨온 것들이 커다란 소리를 내고 와르르 무너지는 듯 했다.”라는 심경의 표현처럼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 삶에서 많은 것들이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 때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간신히 매달릴 수 있는 나뭇조각은 과연 어떠한 것일 수 있을까? 주인공은 유서를 남기고 싶은 사람들의 목록을 만들고 자신의 인생에 관련된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만나 이별을 고하는 의식을 수행한다. 자신의 해결되지 못했던 감정을 확인하고 그럼으로써 자기의 실존을 확인하는 과정. 석연찮은 이별의 앙금을 남겼던 여자, 사소한 말다툼으로 모른 체 했던 죽마고우, 냉정한 기업사회에서 탐욕에 멀어 낭떠러지로 몰았던 사람, 젊음의 치기 속에서 상처를 주었던 여성 등 그네들에게 죽음을 알리고 비로소 진실을 발견하는 시간은 더없이 삶을 정화(淨化)시켜주는 시간이 된다.

다분히 통속적인 멜로 드라마적 스토리 구성을 하고 있는 이 소설은 사실 끊임없이 눈물샘을 자극하는데,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고통스러운 이별의 감정, 소멸을 기다리는 자의 감성의 기복과 그 여정에 드러나는 인간의 원초적인 심리와 최후의 떨림이 보여주는 그 진실의 무게가 시종 묵직하게 가슴을 짓누르는 듯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후지야마는 자신의 방벽을 세우지 않고 진솔한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상대로 아내가 아닌 여자를 말하고 있다. “그녀 앞에서만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남자가 될 수 있다.”는 심정은 가슴 아픈 말이다. 죽음을 앞두고 진행되는 모든 의식들이 이 여성,‘에쓰코’와 함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인데 아마 죽는 자가 남아있는 자로부터 용서 받을 수 없는 짊어져야 할 짐인가에 대한 중대한 윤리적 질문이 되고 있다 할 수 있다.

사회에 첫 걸음을 내 딛어야 하는 아들에게 세상의 소소한 조언들을 해 줄 수 없게 된 아비로써, 그리고 어엿한 숙녀가 될 딸아이에게 아빠와의 따뜻한 추억을 더 이상 남겨줄 수 없게 된 아비로써, 아내에게 이 모든 책임을 남기고 떠나는 자의 미안함과 한 여인으로서의 아내에 대한 고백과 사죄와 참회, 부탁, 그리고 고마움의 사연들이 가슴 뭉클하게 작품 전체를 장식하고 있어, 죽음을 준비하는 자를 엄습하는 슬픔의 파상공격 못지않게 읽는 이의 콧속도 마비되고 눈물의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식들과 아내, 형제, 연인, 동료들에게 삶과의 이별에 초연한 자세를 보이는 주인공이지만, “죽는 건 무섭지 않지만 잊혀지는 게 무섭더군”하는 고백이나, “내가 정말로 두려운 건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처럼 세상으로부터 잊혀지는 존재라는 점이 고통의 중심에 있음을 헤아리게 되고, 바닷가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겨져 소멸의 순간을 기다리는 밤에 불을 켜둔 채 잠을 자야만 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선 자의 불안의 근원에서 인간의 숙명적 실체를 보곤 수다스러웠던 입을 굳게 다물게 된다.

이 작품에서 내겐 잊을 수 없는 두 개의 장면이 있다. 그 하나는 주인공과 장인의 마지막 이별의 대화인데,

“아버님 인생은 행복하셨나요?"
“전 그저 그랬습니다.”
“그것도 좋지 않은가?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되네, 이제 그만 편해지게...”
“고맙습니다.”

이 장면은 삶을 이별하는 이의 통증이 이면에 잔뜩 담겨있는 것 만 같아 거의 마음에 새겨질 정도가 되고, 큰형과의 대화에서는 이처럼 진정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감동과 경외로 겸허한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 “인간은 누구나 완만한 자살을 하고 있다.”는 말처럼 우린 소멸을 향한 시간을 달려가는 존재이다. 죽음의 선고 일에서 삶의 빛이 끊기는 순간에 이르는 한 남자의 여정에서 삶이란 비록 그저 그러함이지만 그 실존의 기억만큼 생생한 우리네 일상의 모든 것들에 깃든 소중한 가치를 새로이 발견하는 기회가 된다. 인생의 존귀함을 다시금 확인하는 감동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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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6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