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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New Year! 예스24 블로거님들~ | My Story 2011-12-31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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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의 귀는 아무리 낮은 소리라도 다 알아듣는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2012년 우리 모두 낮은데 있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따뜻한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사랑으로 홍조를 띤 행복한 모습들이시기를....

 

또한, “운명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당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도발하고 호소하고

유혹하는 사람의 은밀한 욕망 앞에 몸을 기울이는 사물들의 지능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지요?

운명의 문을 활짝 열고 멋진 삶의 길이 펼쳐지시기를 기원합니다~~

 

- 필리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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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초인’, 필립 말로우에 다시금 매혹된다! | 소설,시 2011-12-28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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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기나긴 이별

레이몬드 챈들러 저/이경식 역
동서문화사 | 2003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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챈들러가 빚어낸 불세출의 인물, ‘필립 말로우’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소설의 품격을 이미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언어나 행동에는 세상의 무수한 사실 그대로가 장식이나 위선 없이 담겨져 있다는 느낌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표현 중에“한계를 넘어서면 어떤 위험도 다를 바 없다.”라는 문장은 세상을 대하는 신념을 엿보게 한다. 선악과 같은 이분법적 잣대로 획일화하여 구별하거나, 신분, 재산, 지위, 과거의 내력 등으로 인간을 판단하지 않으며, 하나의 존재자 그 자체로서에 대한 연민으로 인간을 대하는 말로우의 철학적 개성은 요즘 세상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매력이다. 사교성과는 조금 먼, 강한 신념이 오만으로 인식되어 적의를 불러일으키는, 그러나 인간에 대한 배려와 정감, 의리를 간직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술집 주차장에 만취하여 버려진 남자조차 외면하지 못하는 탐정이다. 이렇게 우연히 알게 된 남자에 대한 호감은 두 사람을 일종의 우정, 인간적 신뢰로 연결한다. 남자가 대재벌의 방탕한 둘째 딸의 남편임을 알게 되지만 그늘진 모습에서 순탄치 못한 결혼생활과 불안을 인지한다. 어느 날, 권총을 든 채 새벽녘에 찾아 온 남자로부터 아내가 살해되었다는 고백을 듣고 그의 도피를 돕게 된다. 물론 그 남자가 그의 아내를 살해한 범인이 아니라는 확고한 믿음에서이다. 이것이 소설의 발단이다. 성적으로 문란한 재벌가의 딸이 피살되고, 그녀의 남편이 도주한 사건. 치정(癡情) 사건의 전형적 외형을 하고 있지만, 그 심층에 접근 할수록 그리 너주레하다거나 천박하지 아닌 것이 된다.

 

들이닥친 형사들에게 다짜고짜로 얻어맞고, 경찰에 연행되어 다시금 폭력을 당하지만 말로우란 인물은 입을 다물어버린다. 살인 종범이라는 억지 이유로 유치장에 구금되지만, 도피를 도왔던 남자가 자살하였기에 사건이 종료되었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석방된다. 즉, 아내를 죽이고 도망친 남편, 즉 살인자인 용의자가 죽었으니 수사가 더 이상 진행될 이유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소설의 외연은 확장되기 시작한다. 치정으로 인한 단순 살인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조속하게 덮어버리려는 힘, 그리고 그러한 힘에 기꺼이 공조하는 비루한 공권력처럼 혐오스런 인간의 오염된 사회질서, 법과 제도 등 문명이라는 그럴듯한 어휘에 은폐된 인간들의 위선적 심리에 메스를 갖다 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법률은 정의가 아닐세, 대단히 불완전한 기구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단추를 잘 누르고 거기에 운까지 따른다면 정의가 튀어나올 때도 있겠지. 법률이란 그런 거야.”이 말에는 사회질서에 대한 강한 불신도 있지만 그보다는 삶의 초탈, 보다 높은 삶의 지혜와 진실의 통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이러한 형태의 일견 냉소적이랄 수도 있겠지만 나름 심화된 사회학적 비판의식을 끼워 넣고 있는데, 이러한 덤 같은 문장들이 사건의 진실로 접근하는 통로이자 중대한 단서로 작용하고 있다는 발견에 이르면 ‘챈들러’의 명성이 결코 허명이 아님을 인정하게 되기도 한다.

 

재벌이 자신의 치부를 조속히 은폐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고 폭력을 주사한 것인가? 다시 말해 금권이 공권에 외압을 가한 것일까? 아니면 재화에 대한 탐욕에 눈 먼 경찰, 검찰 등이 스스로 시녀가 되어 재벌의 무릎에 앉아 아양을 떨어댈 요량으로 알아서 기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서 법의 정의로운 집행이란 정말 공허하고 무력한 얘기가 되고 만다. 단지 돈이냐, 권력이냐만 문제가 되는 세상에서 일반 시민의 법률적 정의에 대한 기대는 정말 가소로운 것이 되고 만다. 어쩌면 이 소설의 재미를 이끌고 있는 스토리는 이렇게 몇 글자 안 되는 소비물질주의, 기회주의적 관료주의, 정경유착이나 금권정치, 쾌락과 이기주의에 몰입하는 상류계층의 타락한 정신 등 비판을 위한 수사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게 할 정도로 진지하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화를 방해하려는 듯 불쑥 정신적 고통으로 알콜 중독에 시달리는 유명작가와 그의 아내인 미모의 여성이 등장하고, 마침내 실종된 남편을 찾아달라는 탐정의뢰를 받기까지 한다. 엄청난 광휘와 지성을 발산하는 미모의 여인에 대한 숨길 수 없는 호감도 한몫해서 실종된 작가를 찾아내지만 이 과정에서 피살된 재벌의 딸과 작가의 관계, 작가의 아내와 자살한 남자와의 관계에 대한 진실에 접근하게 된다. 그리곤 유명작가와 그의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듯한 말로우의 인간적 갈등, 그 속에서 꿈틀대는 숨겨진 비밀들, 도피를 도왔음에도 자살한 남자의 사건이 무관해 보였던 이들 부부의 은폐된 사실에 접근 할수록 주변의 위협이 더해지면서 작품의 몰입을 견인하기도 한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러한 이야기의 개입이 복선이나 반전을 위한 내용의 구조적 필연이자, 이야기에 감각적 재미를 덧대기 위한 절대적 요소라고 이해하게 되지만 요즘의 미스터리 작품들이 갖춘 속도감이나 구조적 긴밀성과 같은 정교함에 비추어 그 유기적 연결이 느슨하거나 괴리된 느낌을 갖게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거창한 비판적 시선의 개입과 마침내 드러난 사건의 원인이 결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과 사회와 제도와 같은 문명의 자기 비판적 성찰을 도입하여 자칫 경박하고 미천할 수 있는 장르문학의 내용적 한계를 극복하고 현대인의 심리적 해부나 인간성 회복과 같은, 게다가 범죄를 개인적 문제로서가 아니라 물질의 풍요 등 현대의 욕망이 수반하는 더러운 댓가로 해석하는 것 등은 필립 말로우라는‘고독한 초인’으로서의 매력에 더해져 작품의 격을 올려놓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현대 미스터리 소설의 발전사에 리얼리즘의 이정표를 제시한 귀중한 문학적 위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대표작인 『깊은 잠(The Bog Sleep)』과 함께 읽어 볼만한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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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 고통을 느낀다, 쉿! 정신 착란 주의! | 소설,시 2011-12-23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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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벽은 속삭인다

타티아나 드 로즈네 저/권윤진 역
비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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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역사적으로 민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장소를 오늘날 발견하기란 수월치 않은 일이다. 참지 못하고 흔적을 아예 지워버리는 일을 선택하곤 하기 때문인데, “공간들이란 희미하게나마 그곳에 머물렀던 이들의 흔적을 간직”한다는 경외의 발로일 것이다.

이러한 공간의 기억이 모티브가 되어 한 여인의 의식을 완벽하게 허물어뜨리는 여정을 쫓는 것이 이 소설이다. 아마 이 작업이 후일 유태인 처형에 동조한‘벨디브(유태인 강제수용 벨로드롬 경기장) 사건’을 소재로 한 『사라의 열쇠』 집필로 연결되었던 모양이다. “돌이 인간의 불행을 빨아들이고”, “벽이 고통을 느낀다고 믿었던” 것처럼 특정 공간을 만들어내는 벽, 집, 건물 등에 스며들어 있는 과거 사람들의 감정을 예민하게 불러내고 그 고통을 위로하려는 의지의 투영이었을 것이다.

 

마흔 살의 이혼녀,‘파스칼린 말롱’은 새 출발을 다짐하며 자기만의 거주공간을 마련한다. 첫 눈에 자신의 이러한 상황과 기분에 걸 맞는 집의 입주는 부푼 기대와 충일한 만족감으로 가득하게 한다. 그러나 이사하는 날, 현기증과 구토 증세, 오한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지만, 사무실에 출근하면 이 증세는 말끔히 사라진다. 왠지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는 것이 두렵기만 한데, 이 집에서 일곱 명의 여성을 살해한 연쇄살인 사건의 첫 번째 여성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사람들은 어디서나 죽고 있으며, 그 장소의 예외가 어디 있겠느냐고 자위하지만 구토와 어지럼증, 악몽은 점점 심화되기만 한다.

“어떤 장소에서 무의식적으로 느껴지는 강렬한 느낌”, 이 낯설고 거북한 기운, 그녀는 사건의 기록을 검색하곤 피살자가 열여덟 앳된 여성임을 알게 되고, 나머지 여섯 명의 연쇄살인 희생자가 된 여성들 또한 열다섯, 열일곱의 어린 여자들이었음에 살인자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 피살자들에 대한 연민이란 양가적 감정에 시달린다. 죽은 이들의 피살 현장을 한 곳씩 찾아 장미 한 송이에 애틋함을 담아 두고 오는 발길을 반복한다. 그 공간들에 그네들의 응어리진 고통이 숨 쉬고 있다는 믿음으로.

이 괴이한 장소에 대한 연민의 집착은 그녀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데, 회사에 손실을 가하는 결정적인 업무실수의 반복으로 나타나고, 소개받은 남자와의 섹스는 그의 목을 졸라댐으로써 피폐화되어가는 정신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이것은 자신의 죽은 아이, ‘엘레나’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여인으로서의 고통스런 기억이 잠재의식 속에서 피살된 일곱 명의 여성들에 투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후 육개월 만에 죽어간 아이에 대한 애통함은 이혼의 상처로 더 깊숙한 의식에 자리하고, 전 남편의 새로운 여자의 불룩한 배는 절망의 극한으로 치달아 정신착란의 상태에 이르게 한다. 깊은 상실감에 허우적거릴 때 위로 받기는커녕 무관심과 배신이 돌아오고, 공간에 스민 영혼의 교감이란 비의적 감수성을 지닌 여인으로서는 감당 할 수 없는 정신의 무게이다. 마침내 이 착란적 고통을 해결하려는 듯이 달려가는 장소는 섬뜩하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녀가 찾아간 그 장소적 공간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공간적 장소가 간직하고 있는 감정과 기억들이란 모티브는 자연스레 인간의 정신, 그 내적 심리의 반영으로 연결된다. 내 손길과 시선이 익숙하게 묻어있는 가구들, 그리고 내 몸처럼 안락한 느낌을 주는 나의 집처럼, 사랑의 기억과 같이 떠오르는 마로니에 공원과 가로수가 있던 붉은 벽돌의 카페처럼, 담과 벽들, 집과 건물들은 어떤 감정의 흔적들을 분명 담고 있다. 아니 내 내면의 정신작용이 그 감정의 흔적들을 입히고 불러내는 것일지도.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정서와 치밀한 심리적 묘사를 담아 슬픔과 그리움, 원망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알 수 없는 기운에 매료되게 하는 이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새 우리도 소름끼치는 착란의 세계에 들어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음침한데 아름답고, 불안한데 명쾌한 낯선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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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인격을 만나는 영혼의 즐거움! | 소설,시 2011-12-23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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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저/마이클 매커디 판화/김경온 역
두레 | 2005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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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려주는 소설”을 쓰고자 했다는‘장 지오노’의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는 행동주의 정신이 고결하게 배어있는 영혼의 글이라 해야 할까?

지극히 짧은 소설이지만 내 마음에 전해오는 메시지들, 감동은 어떠한 장황한 대서사시 이상이다.

 

소설은 세계 대전(1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10년에 화자(話者)의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지역의 황량한 고산지대여행 중 만나게 된 양을 치는 남자와의 인연에서 시작된다.

매일 도토리 100개를 누구의 땅인지 관심조차 없이 아주 정성스럽게 심는 남자, 그래서 3년간 10만개를 심었고, 2만 그루의 싹이 나오고, 그 중 1만 그루가 생존하여 성장할 것이라는 애기를 전해 듣는다. 이후 전쟁 참전 후 잊고 있었던 도토리를 심던 남자를 기억하곤 10년 만에 찾았을 때 물조차 말라버렸던 황무지는 폭이 10킬로미터가 넘는 떡갈나무 삼림으로 변해있음을 발견한다.

 

“아무런 기술적 장비도 없이, 오직 한 사람의 영혼과 손에서 나온” 실천이 만들어 낸 자연의 멋진 변화. 자신과 관계된 일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을 마음에 두고 미래를 상상해보던 청년에게는 처음 보는 경이였을 것이다. 메마르고 너무도 황량해서 한정되고 제한 된 자원을 가지고 되풀이되는 경쟁에 좌절하고 무너져 버리던 고산지대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메마른 영혼 속에 푸른 잎을 피워 낼 내일의 도토리”를, 그 어떠한 경쟁적 속도도 숭배하지 않고 자기를 희생하며 일하는‘엘제아르 부피’란 남자에게는 이미 고매한 인격이란 수식도 어설프기만 하다. 아름다운 혼을 가진 사람, 철저한 고독 속에 홀로 일한 남자, 확실한 자신만의 열정, 선을 행하기 위해서 인내해야했던 무수한 절망과의 싸움이 짐작되어 절로 그 정신의 고결함에 겸허해 진다.

 

노인이 되었음에도 나무를 심는 평생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던 1935년, 정부는 6~7미터의 나무로 빽빽한 삼리지대가 된 그곳을 ‘천연 숲’이라 부르며 시찰에 나선다. 천연의 숲이라니! 한 남자의 고결한 정신과 노동의 산물임을 알지 못하는 세상의 왜곡된 정신세계가 수치스러워지는 대목이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라는 인간들의 가공할 탐욕이 부딪히는 동안에도 노인은‘자연에 대립하는 인간’이 아니라‘자연 속의 인간’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간다. 아마 산의 웅장함과 고요함이 선사하는 우주와의 일체감에서 정말의 건강과 번영의 빛을 만나고 있지 않았을까?

한정된 자원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하다못해 앉는 자리의 위치를 놓고서도 경쟁하고, “선한 일을 놓고, 악한 일을 놓고, 그리고 선과 악이 뒤섞인 것들을 놓고 서로 다투”는, 정신이 실종된 오늘의 우리들에게 참다운 행복을 생각하는 시간을 준다.

 

우린 스스로들“‘인간이 인간에게 늑대(Home homini lupus)’ 인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 자연을 통제하려는 오만을 여전히 고수하고, 물질이 뿜어내는 광기로부터 소외될까하여 줄달음치는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는, 제로게임일 수밖에 없는 잔혹한 경쟁은 이젠 멈추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비와 눈이 숲 속으로 스며들어 옛날에 말라 버렸던 샘들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자연의 생명력처럼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태양 아래 서 있을 때”임을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 책의 정신과 미덕은 작품의 첫 페이지에 밝힌 작가의 글처럼 ‘고결한 인격의 만남’이 주는 감동, 잃어버린 우리들의 인간성 회복에 대한 거대한 영감들, 게다가 강렬하고 풍성한 시적 서정성의 완벽한 하모니가 전해주는 정신의 숭고한 무엇, 그것의 지향인 인간의 희망과 행복의 부활을 꿈꾸게 하는 것일 터이다. 감동이 꽤 오래 마음에 남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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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소설 속 '메데이아(Medea)'는 어떻게 그려져 있을까? | My Story 2011-12-21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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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이아(Medea)’는 어떤 여인인가!


'Medea'는  메데이아, 혹은 메디아라 표기하는데 2500년 전 그리스인들이 어떻게 발음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게 익숙한 ‘메데이아’로 부르기로 하자. 이 여인을 새삼스레 말하려는 것은 기원전 431년 그리스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Euripides)'가 『Medea』를 그네들의 전설과는 다소 변형된 여성상, 즉 자신의 자식들을 죽인 잔혹한 엄마, 연적을 살해한 복수의 화신으로 묘사한 이래 마치 여성을 바라보는 시대정신을 반영이라도 한 듯 수없이 차용되어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받은 몇 안 되는 여인이라는 점 때문이랄 수 있다.


에우리피데스가 메데이아를 자신의 비극작품으로 쓰기 이전부터 이 여인에 대한 전설은 여러 형태로 전해져 왔던 듯하다. 그 가장 중심에 놓인 사건은 역시 자식들을 누가 죽였는가 하는 문제인데, 기원전 8세기 서사시인‘에우메로스’의 「메데이아」에 의하면 헤라 여신의 신전에 숨겼다가 잘못되어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며, 주석에는 바로 그 자식들을 죽인 자들은 코린토스의 아낙네들이라는 설과, 메데이아가 죽음에 이르게 한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의 친족들이 헤라신전에 숨겨진 아이들을 죽이곤 메데이아가 죽였다고 소문을 퍼뜨렸다는 설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전설이 다시 400여년후인 기원전 431년에 에우리피데스에 의해 메데이아를 자신의 자식들을 직접 죽인 여인으로 변형 시킨 것인데, 이는 작품 내용에서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이자 종속물로서 수동적 삶만을 강요당해야 하는 시대에 대한 강력한 저항 정신의 극단적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공연히 영리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원한을 사고, 쓸모없는 인간이라 욕을 먹고, 오히려 반대로 다루기 힘든 여자라는 말을 듣기까지 한다.” 그러면서 “제가 그렇게 똑똑한가요?”라고 코린토스의 아낙네들에게 반문하는 장면은 이러한 점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울분을 토하는 메데이아는 당연히 동정을 받아야 할 대상이다. 숙부‘펠리아스’왕의 교활함에 속아 ‘아르고 호’를 타고 양털을 찾으러 ‘코르키스’로 원정한‘이아손’을 코르키스의 왕녀인 ‘메데이아’가 위험에서 구원해주고 임무를 완수하도록 돕는다. 그리곤 두 사람은 혼인하여 이아손의 고향 ‘이올코스’로 돌아가 펠리아스를 처단한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에게는 아내이기 전에 생명의 구원자이며, 그를 명예의 반석위에 올려놓은 인생의 귀중한 조력자이다. 그럼에도 코린토스로 옮겨온 이아손은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의 외동딸과 혼인하기 위해 메데이아와 자식들을 방치하고, 마침내는 크레온으로부터 일방적인 추방과 처형의 위협을 받게까지 한다. 메데이아가 느낀 배신의 참혹한 심경은 여염집 여인네들의 분노 이상이었을 것이다.


배신한 남편 이아손의 변명 또한 걸작인데, 아내와 자식들의 삶을 보다 윤택하고 확고한 미래의 기반을 얻기 위해 선택한 원대한 방편임에도 속 좁은 여인네인 메데이아가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과 크레온 왕과 딸에게 반목하는 것은 잘 못된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메데이아라는 여인은 순순히 쫓겨날 여성이 아니다. 코린토스 아낙네들의 코러스가 울려 퍼지는데,


“ 여자야말로 세상에 찬양 받고,

영예 받는 몸이 되리라.

약한 이름은 여자를 떠나리라.”


남성적 권위에 일방적으로 눌리기만 하는 강요된 여성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폴론의 신탁을 받고 돌아오는 판티온 왕의 아들인‘아이게우스’에게 그의 소원인 자식을 얻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통해 자신의 보호를 언약 받는다.(도피처를 마련함) 그리곤 치밀한 책략을 통해 이아손에 대한 처절한 복수를 실행한다. 자신은 추방명령에 따라 떠날 것이며, 다만 아이들만은 거두어 줄 것을 사정하고, 아이들을 통해 죽음의 독이 묻은 비단옷과 황금관을 이아손의 새로운 아내가 될 공주에게 선물로 보낸다. 이로써 메데이아의 연적인 크레온 왕의 딸이 죽고, 딸을 안고 애통해하던 왕마저 독으로 사망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아손의 자식이자 자신의 자식인 아이들을 도륙한다. 배신한 남자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처절하고 참혹한 복수를 하는 것이다. ‘암 표범’, 메사나 해협의 사나운 여괴‘스킬라’라고 불러도 부족할 만큼 잔인한 앙 갚음을 하고 고통과 좌절에 신음하는 이아손을 조롱하며 도주한다.


이것이 에우리피데스가 그린 당대의 여인상이다. 결코 남성중심의 권력에 지배되는 피동적 여성이 아니라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상이다. 이러하니 당대의 그리스 지배계급이 이 작품을 좋아했을 리는 만무하다. 비판과 비난이 쏟아지고 외면당했음은 불 본 듯이 뻔하다. 그의 사후인 기원전 4세기부터 비로소 조명 받기 시작했으니 천재, 시대를 앞선 자는 동시대의 공감을 받기가 수월치 않았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그리곤 피상적으로 ‘자식을 살해한 잔혹한 여인상’, 혹은 ‘복수의 화신’이라는 표피적인 이미지만이 차용되어 회화나 문학, 철학에 인용되어 왔다.

그런데 21세기 오늘, 메데이아는 또 다른 여인으로 새롭게 해석되고 새로운 여인으로 변형되어 시대를 상징하는 여성상을 발산하고 있다.


‘카를로스 발마세다’와 ‘테스 게리첸’의 소설에 나타난 ‘메데이아’


‘카를로스 발마세다’와‘테스 게리첸’, 두 작가가 그려 낸 그들의 작품 속‘메데이아’는 21세기의 여인들이다. 바로 오늘을 사는 여성, 이 시대의 여성들 초상이다. 그래서 두 작가가 부여한 메데이아의 매력은 예사롭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발마세다의 『서른살, 최고의 날』과 게리첸의 『악녀의 유물』이 그것인데, 전자의 메데이아는 잠든 우리의 모든 감각적 세포들을 깨어나게 할 만큼 강렬한 열정, 관능적 사랑의 고고학을 대변하는가 하면, 후자의 메데이아는 강인한 여성상, 철저하리만큼 자식에 대한 보호본능으로 뭉쳐진 헌신적인 모성애를 보여준다.


『서른살, 최고의 날』에서 메데이아의 화신은 문학 전공의 대학 강사인‘파울리나’라는 여성이다. 이 여성은 “사랑은 육화된 열정”이라고 정의하며 철저하게 자신의 욕망에 진솔하다. 그래서 사랑과 육체의 불가분성을 주장하며, 육체에 대한 욕망의 속성을 탐색한다. 육체를 잃어버린 사랑이란 이미 사랑이 아니며, 따라서 여자를 배신하는 것. 즉 떠나는 것은 생명을 담보로 한 무지가 되어버린다. 그녀의 사랑을 배신한 남자와 단지 그 남자의 새로운 연인이 된 여자는 그녀에게서 육체를 빼앗아간 무지 때문에 응징당해야 하는 것이 된다. 메데이아는 바로 사랑의 배신이 가져올 귀결이다. 복수!


반면에『악녀의 유물』에서는 이름이 그대로 차용된다. ‘메데이아 소머’, 여성을 단지 욕망의 도구, 영원히 소유하기 위해 살해하여 미라로 보관하는 사이코패스 남자를 피해, 자신의 딸을 지켜내려는 강인한 어머니이다. 막강한 권력과 잔혹한 악인으로 상징되는 남성의 권력, 기성의 지배 권력에 강하게 맞서는 의지와 행동의 실천을 보이는 헌신적인 모성애로 뭉쳐진 여인이다. 그러함에도 역시 인간으로서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낼 줄 아닌 여인이기도 하다.

이처럼 오늘의 여성은 자신의 성적 진실이 남성에 의해 억압되고 은폐되어야 하는 은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생물학적 동질성만큼이나 동등한 것이기에 드러내고 결핍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두 작품의 종결이‘복수’라는 에우리피데스 메데이아의 플롯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은 수천 년의 시간이 흘러도 바뀔 수 없는 보편적 진리라는 것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여성의 물신화, 다시 말해서 쾌락을 위한 대상화를 무심히 반복하는 남성적 권위의 몰지각과 파렴치에 대한 경종이다. 여자도 똑같이 인간의 신체를 대상화 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바로 죽음, 생명을 빼앗는 복수를 통해 물질화시켜 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야 잔혹하기까지 하지만 남자들의 여자들에 대한 전통적인 젠더(gender)가 부여하는 성의 차별화된 기능, 역할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25세기 전에 영리하다고 원한을 사고, 똑똑하니 다루기 힘든 여자라고 학대받던 메데이아는 오늘에 없다. 더 이상 그녀들은 한탄하지 않는다. 적극적이고 거침없이 자기의 욕망을 주장하며, 분노할 줄 알고 복수하는 존재이다. 기원전 431년의 메데이아가 기원후 2011년의 메데이아로 여러 문학 작품들에 환생하는 것은 여전히 몽매하고 각성되지 않은 남자들에 대한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메데이아, 그녀는 우리들의 딸이고 어머니이며 연인이다. 어찌 사랑스럽고 매혹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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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6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