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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해해주는 오직 그녀만을 위하여... | 소설,시 2011-04-26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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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에 누군가 있음에도 외로움이 착 달라붙는 쓸쓸함도 있지만, 다만 같은 지붕아래 나를 이해하는 유일한 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평온한 고독감도 있다. “고요한 배타성”, “쾌적한 고독”, 바로 이러한 상태가 유지되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된 것은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 적대적으로만 바뀌어가는 그 어떤 힘에 대한 무의식적 거부감이 아닐까?

작품에 마냥 취해 나 또한 감미로운 현기증과 몽롱한 분열의 상태에서 한동안 빠져나오기가 싫어진다. 사람이 그립고 사랑이 아쉽지만 정작 사람들의 무리에 휩싸이는 것만은 피하고 싶은 그런 마음, 이기적인가? 화해하라고? 불온하지만 세상의 불온함이 가득 든‘작은 상자’를 열어보면 고통스러우니 바쁜 도시생활에 휩쓸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그래야 살 수 있다고?...소설은 그래서 거침없이 나가는 주류의 세상을 파괴하고, 물건들이 사라지는 새로운 시공(時空), 새로운 삶의 체계와 세상, 그 윤곽과 형태를 찾아간다.


더없이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는‘랜슬롯’이란 사내, 그 수동은 세상에의 순종이 아니라 방심이라고, 살짝 세상 밖에 속해 있었다고 하는 남자다. 욕망이란 것이 유실된 삶, 그래서 타인에 대한 평화로운 방심에 익숙한 사람, 그러나 삶의 우연이란 그렇게 무력하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어서, 알 수 없는 생명력이 자신의 고독한 영역에 깊숙이 쳐들어와 고요함을 붕괴시키기도 한다. 하이힐! 이 물체 고유의 관능성이 느닷없이 그에게 떨어지는 순간, 그의 삶은 살아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 매혹적인 물건의 소유자, ‘이리나’, 세상에 대한 분노, 연민, “줄곧 세상의 끝으로 가서 멸종 위기의 동물을 찍어야”하는 여자, “육체가 별도로 존재하는 정서적인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여인과의 결합은 정말이지 삶이란 이렇듯 모순 같으면서 조화인 것이라 말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여자, 그러나 이 자유분방하고 세상의 어둠을 파헤치고 그래서 제거하는, 기성의 불온함을 걷어내고 다시 시작되도록 하려는 여인을 이해하는 과정, 아니 그러함에도 사랑하도록 하는 여인의 존재는 무엇일까?

권력을 가진 위험한 집단, 혐오의 대상들을 처단하고자 했던 여자, 세상의 분노를 착실히 지워버리려 했던 여자, 섹스는 그저 상대에게 예의를 표시하기 위한 행위에 불과한 듯 한 여자, 그 여자의 옛 남자들로부터 전해 듣는 그녀의 모습들로 인한 남자의 고통, 커져만 가는 의혹과 질투, 그 모호한 감정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래서 이 모순되는 감정 속에서 몸부림치는 남자의 상처는 안타깝기만 하다.


세상, 산다는 것이란 그 본성이 본디 당혹스러운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 당혹감이란‘대상’으로부터 피어나는 건 아닐까? 소설의 남자처럼“자신과 사물들의 적대감을 혼동”했다고, 그래서 비로소 이 세상 그 누구도, 무엇도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 수 없음을 음미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오늘도 파렴치한 이들, 사악한 이들, 잔인한 이들이 벌인 온통 우울한 아침 뉴스로 시작한다. “무질서가 지배하는 헛것 같은 장소”인 이 겹겹의 혼돈이 장악하는 세상의 진실을 사소한 일상으로 덮어두면, 또는 회피하고 자신의 내면의 둥지만을 감싸 안으면 평화는 오는 것인가? 춥고 음산한 벽지와 시끌벅적한 도시도 아닌 어떤 도시의 외곽지대를 정착지로서 만족해하는 남자의 돌아왔다는 이성(理性)은 왠지 낯설다. 내 마음의 고동을, 밤의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그것이 위안이고 평화라는 말일까? 그럼에도 사랑하는 여인의 부재(不在)에 대한 강박적 집념, 그 지독한 감정의 내면 일기를 좇으면서 거듭 이 모순된 감성이 내 것만 같은 느낌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 여자의 대항과 돌발이라는 분노의 근본과 행동에 동조하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핏줄 속에 파닥거리는 화해에 대한 욕망이” 우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는 그 말이 더욱 진실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이해해 주었던 세상에 유일했던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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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부분은 없다! 그리고 보는 것은 인위적 인식일 뿐이다... | 자연과학 2011-04-23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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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

후쿠오카 신이치 저/김소연 역
은행나무 | 2011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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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생명현상의 본질인 세포와 그 화학물질의 차원까지, 그리고 회화예술과 철학적 사유를 통한 은유의 세계를 형상화하여 그야말로 경외감 가득한 세상에 대한 이해를 유쾌하고 지적인 산책길로 안내한다. 분자생물학, 생리학의 시시콜콜한 실험과정으로부터, 때론 베니스와 로스앤젤레스의 미술관으로부터, 대학의 생물실험연구소의 일화로부터, 편의점 삼각 김밥 포장지에 명기된 함유물질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과연 진실인가, 아니 어느 한 부분에 불과한 것, 일부를 보고 전체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바로 생명의 안전한 유지를 위해 만들어낸 인위적인 환상은 아닌지를 사색한다.


저자가 안내하는 사유의 여정은 화려한‘게티 미술관’에 걸린‘비토레 카르바초’의 작품, <라군에서의 사냥(Hunting on the Lagoon)>과 이태리 베네치아의 차타레 강변과 인쿠라빌라(Incurabill)라는 수로에 얽힌, 한 일본 작가의‘비토레 카르바초’작품 <코르티잔>의 감상과 얽혀 낭만적 골목길에서 멈추어 서게 한다. 그러나 마냥 두 걸작품에 대한 소회에 머무는 것은 아니고, 미국과 이태리라는 각기 다른 나라의 미술관에 걸린 작품이 전체를 이루는 거대한 한 작품의 부분임을 알게 되면서 소위 미술평론가들이라는 전문가들이 떠들어대던 그 호사스런 해석이 초라하게 되었으니 인간의 앎이란 것의 실체란 것이 그리 내세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분자생물학자인 만큼 미세한 분자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법, 그래서 우리 비전공자들이 이해하기 수월한 예를 든 것이 곧 김밥이다. 편의점에 놓인 김밥의 유효기간, 납품돼서 진열대에 놓여 판매되는 시간동안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위해 첨가되는 물질에‘소브르산’이란 것이 있는 모양인데, 임상실험결과 인체에 유해하지 않기에 사용되고 있단다. 이러한 실험이란 것이 인간의 생체에 진정 무해한 것인지는 사실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것임에도 부분적일 밖에 없는, 고작 인간이 이해 할 수 있는 분석에 의존하여 판단을 내린다. 사람의 대장에는 사람을 구성하는 세포보다 많은 장내 세균이 있고 이 세균이 정장작용을 도우며 공생하고 있다. 소브르산이란 일종의 방부제는 미생물의 번식에 장애를 일으켜 그 증식을 억제하여 부패의 속도를 지연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인데, 사람의 장기 내에서 사람의 생명활동을 지원하는 세균들은 무차별적으로 이 소브르산에 노출되고 마는 것이니 결국 간접적으로 인간의 신체에 유해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란 얘기가 된다. 과연 인간이 안다고 자부하는 것이 신뢰 할 수 있는 앎, 진정 아는 것이기나 할까?


이 저술의 현미경 배율을 예로하지 않더라도 카메라의 배율을 갑자기 높여 대상물을 가까이 끌어당기면 그 화면을 가득 메우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즉 그 물체가 전체의 어느 부분인지, 그 화면의 우측에는 좌측에는 위에는, 아래에는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도리가 없게 된다. 이 확대된 대상물은 본래의 세계 속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우린 전체도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주변의 전경은 어떤지도 알지 못한다. 부분을 정밀하게 아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일게다.

이와 관련해서 아주 재미있는 예가 소개되고 있는데, ‘지도 의존형’ 인간과 ‘지도 무시형’인간의 행동 양식으로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인간은 정작 누구일까 하면 지도 의존형이란 것이다. 전체를 조감하고 목적지의 그 방향과 위치를 찾으려는 행위가 감만 가지고 자신의 전후좌우와 관계성만 가지고 찾는 지도 무시형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양식에 익숙한 것이 바로 우리들의 세포가 타자를 인식하는 시스템인데, 세포는 결코 자신이 인간의 신체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체와 부분이라는 관계성이 전혀 필요 없다는 것으로, 오직 주변과의 관계성에만 의지하여 모든 세계를 구축하는 분산적 행동을 하여 완벽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를 상보성이라 하는데, 생명의 신비, 자연, 우주의 섭리, 그 자체가 경외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러한 정상적 세포의 행동,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증식과 억제의 균형을 유지하는 세포와 달리 어느 순간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무한 증식하는 세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암세포이다. 마치 그 행동이 인간 사회에 만연한 탐욕스런 속성의 그 파괴성과 닮은 꼴 같기만 해서 우리 눈의 해상력이 0.01밀리미터의 식별까지만 가능하기에 망정이지 해상력이 더 뛰어났다면 끔찍했을 것 같기만 하다는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눈의 해상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딱 이만큼만 보이도록 진화한 것은 기막히게 균형적인 것 같기만 하다. 그래서 조금은 겸손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두 아는 것이 결코 유익한 것만은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이 낭비적이고 몽매한 암세포의 얘기는 코넬대(大)의 한 연구실험의 일화로 이어지는데, 이 암세포의 증식과 분열을 조장하는 원인을 밝혀내면 암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열의다. 이러한 인간의 갈망은 한 대학원생 연구자의 강박과 지도교수의 보고자하는 기대감이 결합하여 실험을 조작하여 가설을 입증하는 쾌거를 창조하는 것인데, 결국은 과학계의 대 스캔들로 과학의 깊은 불신만 낳았을 뿐이라니 그‘앎’에 대한 과욕이 실질을 보지 못하게 하였으니 안타까운 얘기이도 하다.

이처럼 흥미로운 분자생물의 세계와 여러 에피소드들은 사람의 눈이 보는 것, 사람의 인식이 발견하는 것이 실상이 아니라는 것의 보기들이다. 우리들, 그리고 우리사회의 지배적 사고는 부분으로 나누어서 정밀하게 이해하고나면, 또한 이들 부분들을 모으면 올바른 전체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데 기초하고 있다.  연속을 분절하고 경계를 강조하여 선명하게 하고 그리고 부족한 것들은 보충해서 보면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세상을 도식화하고 단순화하는 것이 곧 앎이라고.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눈, 세포의 행동양식, 밤하늘의 별빛, 누군가가 나를 보는 시선, 아미노산과 같은 분자생물의 메커니즘을 통해서 앎의 본질을 확인하게 된다. 실제로 보는 것은 망상, 인공적인 인식에 불과한 것임을. 세상에 부분이란 것은 없다. 어찌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쪼갤 수 없는 것을 인위적으로 쪼개면 그 본성, 본질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 또한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을 모두 집합하면 우리가 된다. 허나 그 세포 어디에 ‘내’가 존재하는 것인가? 삶과 죽음의 경계란 존재 할 수 있는 것인가? 그 경계의 순간이란 것이 정의 될 수 있는 것인가?

생명의 본질, 안다는 것의 본질, 그것은 물질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에너지와 정보가 유발하는 효과, 그 흐름에 있다는 통찰력은 아마 이 저술의 차원을 저 높이 올려놓는다 할 정도로 거룩하게 인식된다. 명확한 구분은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린 모두 볼 수 없으며, 결코 모두 알 수도 없다. 우린 아는 것이 없다. 더욱 겸허해져야 할 터이다. 지금보다 더욱 더....그것이 바로 공부해야 하는 이유라는 저자의 말을 다시 되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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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탁한 머릿속과 삶의 공간을 말끔히 비워주는 지혜의 書 | 에세이,평론 2011-04-18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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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잡동사니로부터의 자유

브룩스 팔머 저/허수진 역
초록물고기 | 2011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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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여기저기에 처박힌 그야말로 잡동사니, 아니 쓰레기 같은 것들을 치우는데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보자는 지극히 단순한 의도로 집어든 책이다. 그러나 이게 그리 단순한 잡동사니,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당혹스러움에 직면하게 된다. 잡동사니는 우리의 내면,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모습이 외부에 표출된 모습, 행동양식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 당돌한 주장에 다소의 저항감을 가지고, 솔직히 말하자면 어떤 방어심리를 가지고 읽어나갔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무슨 필요한 물건 좀 소유하고 있기로서니, 그리고 거의 완벽할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하고 사는 나 같은 부류에게는 결코 소용에 닿는 말은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말이다.


물론 오늘의 물질사회가 지니는 속성, 그 영역에서 생존하는 존재이기에 물질의 소유에 전혀 무감하다거나 완전한 무소유를 지향하는 성자가 아닌 한 물질의 적정한 소유와 필요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물질 그 자체의 소유에 혈안이 된, 또한 물질을 팔아대기 위해 무진장 쏟아내는 무차별적이고 무분별한 광고의 환상과 거짓에 기만당하는 정도는 아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각종 물건들을 도처에 쌓아둬서 사용치 않고“쓰레기 사탑, 무용지물 타워, 엉망진창 신전, 뒤죽박죽 언덕을” 만들고 있거나 틈틈이 창고나 이 방 저 방에 처박아 둔 것도 아니니 나는 잡동사니와의 전쟁을 선포할 수준과는 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부심, 방어체계가 읽어 나갈수록 허물어진다. 내 마음 속 진정한 것을 들여다보게 하는데,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어떤 내면적 잡동사니가 혹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또한 그것이 지금 책상서랍, 기타 수납공간, 아니 책장, 장롱, 창고, 차 트렁크 등에서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그것들이 집안 곳곳, 방에서 거실에서 서재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빈 공간을 잠식하는데도 내 잠재된 의식의 어느 곳에서 합리화하고 변명하며 방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데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저작은 물질의 소유를 지향하는 현대 자본주의적 행동양식의 통념이 얼마나 인간의 본성과 삶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는지, 그래서 사람들을 피폐한 물질주의 환경에 희생시키고 있는지를, 그래서 그 물질들의 더미에 싸여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인생의 의미를 오직 물질 축적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의 헛되고 일시적일 밖에 없는 그 한시적 마취상태, 불행의 악순환을 단순하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물건이 행복과 안정의 보증수표나 되는 양” 온통 물질에 취해있고 사방에서 경제, 정치, 문화적 논리를 들이대면서 부추긴다. 그런데 정작 그 물건들이 우리들의 인생에 어떤 가치를 부여해주기는 하는 것일까? 타인의 시선이 만든 늪에 빠져 허우적대며, 고작 과시하려하지만 자기 인생에 바쁜 인간들이 남의 과시에 눈 돌릴 틈은 없다. 그리고 그 물건의 소유가 과연 행복을 지속시켜 주는가하면 손에 넣는 순간, 아니 집에 들여놓는 순간 진부해지고 매력을 상실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딘가에 처박아둔다. 다시금 공허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 자신의 행복이라는 감정에 보상을 하기 위해 물질을 손에 넣지만 이 역시 해결되지 않는 욕망의 허기짐에 대한 확인 이상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왜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비싼 값을 치러서, 고급 브랜드라서, 소유 그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라서, 추억과 사연, 체취가 묻어있는 것이라서, 이 정체모를 욕망의 기운 탓에 처분을 겁낸다. 더구나 아무리“하찮은 것이라도 소유 자체가 의미 있다”고, 그것이 미덕이라고 터무니없는 환상을 배워왔으니 사실 개인의 의식을 탓할 것도 못 된다. 그렇다고 계속 쌓아두고 처박아서 방치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잡동사니가 되고 만 것들을 처분하여야만 하는 것일까? 처분하지 않으면 무슨 문제가 되는 것일까? 버린다는 참 의미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어떤 뜻이 내재하는 것일까?

혹, 그 잡동사니에는 무언가 감추고 싶은 두렵고 나약한 감정이 내밀하게 포장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내 현재와 미래를 막아서는 어떤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자문하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내면을 허약하고 취약하게 만드는 뿌리들을 이루는 것은 무엇일까? 그 마음의 잡동사니들, 강박관념, 혼동, 분열, 서툰 언어, 불면증, 우유부단, 방향상실,,.이러한 것들. 바로 가혹한 목표치, 타인으로부터 배워 모방한 이상적이라고 여겨지는 가치의 충족, 부정적인 언어들, 미래에 대한 불확실과 그 근심과 걱정들이 물 위에 떠 있는 부표처럼 계속해서 누르고 있어야 집어넣을 수 있는 그 엄청난 힘을 요구하듯이 끊임없이 물건의 형태로 탈출하게 하고 우리의 관심을 일시적으로 딴 데로 돌리게 하는 것 아닐까? 이것이 내면의 본질적 감정을 회피하고 진정의 가치를 찾지 못하게 하는 것일 게다. 인생에 조건을 다는 이러한 가치들이 잡동사니일 뿐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결코 미래에, 이상에, 남의 시선에 묶여 현재를 만끽하지 못하고 진실을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승선을 통과할 때까지 절대 행복해질 수 없”어 스스로를 위장하는 물건에 집착한다.

결국 치워버려야 할 잡동사니들, 진정 내 눈길을 애원하며, 주목을 끄는 물건이 아닌 것들, 지금의 내 인생에 결코 없으면 안 되는 그런 것이 아닌 것들은 잡동사니이다. 즉, “회피하고 싶은 내면적 감정이나 가치에서 우리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며, 표면적 생활공간에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잡동사니이니, 우리의 내면을 옥죄며, 인생에 장애를 걸쳐놓는 이것들을 치워버려야 하는 당위성은 정말 중대한 것이 된다. 그러니 깔끔하게 정리된 내 책상과 서재와 방과 창고가 잡동사니가 아닌 것이 아니며, 더구나 그곳에 도사리고 있는 무수한 과거의 유물들이 내가 은폐하고 있는 내면임을 마주하게 되면서 이제라도 내던져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치쌓인 책 더미들, 잠자고 있는 무수한 사진들, 사용하게 될 까닭이 없는 서류뭉치들, 옷가지들, 전자제품들... 이젠 치워야 할 것 같다. 그것들이 내게 무엇인지 알게 된 이상, 본질을 뒤덮고 있는 감정의 껍질을 벗겨내야 할 터이다. 더 이상 내게 벌을 줄 필요도, 고통에 담금질을 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 말이다. 물건은 내가 아니다. 결코 나 일 수 없는, 신성한 바로 나의 현존을 위해서,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지니는 의미를 만끽하기 위해서라도... 그럼에도 사실 막상 수집한 내 소유의 물건들을 처분하려면, 물질의 집착을 버리려면 심리적 저항이 일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정말 예상치 못한 막강한 방어기제가 작용하는 것을 느낀다. 그 실체를 진중하게 살펴보면 그 속에 해결되어야 할 내면의 잡동사니가 보인다. 그 내면의 잡동사니가 불러 모은 외면의 잡동사니는 한결 버리기 쉬워진다.

진정한 삶의 가치, 내면을 일깨워주는, 물질로부터, 소유로부터의 탈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는 고마운 저작이다. 내 마음의 잡동사니들이여 안녕, 물질들이여 안녕~ 소박하고 단순한 인생이 삶을 얼마나 명쾌하고 행복하게 해주는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뒤바꿔주는 지혜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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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중년의 지적이고 도발적인 내밀한 삶의 일기 | 소설,시 2011-04-14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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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되지 않은 수학의 난제 중 난제,  1과 그 자신으로만 나누어떨어지는 소수의 패턴 함수인 일명 제타함수 “ζ(s)는 s=x+iy에 대해서 생각할 때 x>1/2로 0은 없다.” 라는‘리만 가설’은 신비로움, 경이로움과 어떤 미지세계로 들어가는 은밀한 암호코드 같기만 하다.  리만의 이 가설은 물질세계의 정확한 묘사 도구임이 판명되어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원리를 발견하는 직접적 영향이 되기도 하였으니 150년 전의 천재 수학자의 직관력은 마치 신의 영역에 도달한, 아니 우주의 경계를 본 사람이 아닐까하는 상상까지 하게 한다.


리만가설은‘소수’의 일정한 성질을 파악하려는 것이고, 이를 설명하려다보면‘복소수’, 실수 사이에 숨어있지만 존재하는 수가 아닌 '허수i'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는 너무 추상적인 수가 되어 우리들이 직관하기에는 어려움을 겪는 수이다보니, 현실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없는 이 개념에 대해 무심할 밖에 없기도 하다. 아마 이 소설의 매력은 언뜻 이 알 수 없고 이해하기 용이하지 않은 세계의 비밀스런 그 무엇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라 할 수 있을까? 왠지 우리의 원초적인 그 무엇, 삶에 본질적으로 숨어있는 어떤 것에 대한 비밀 같은 것, 그런 것 말이다.


소설의 구조 또한 은밀하기 짝이 없다. 실종된 수학교수의 컴퓨터 파일에 기록된 내밀한 일기와 작업일지를 훔쳐보는 것 같은 구성이다. 내용 또한 일탈의 열정과 환상, 관능적 향기가 배어있어 그 은밀함을 증폭시키다보니 자못 냉철한 이성만을 요구하는 건조하고 지루한 수학과 수학자의 자취를 좆는 이야기를 저항 없이 따라가게 된다. 비범하기를 희망했지만 어느덧 마흔 세 살의 중년이 된 평범한 수학교수는 자기 성취와 인생의 확신 과정으로서 19세기 독일의 천재 수학자, ‘리만’에 대한 평전 집필에 착수한다. 그러나 인문학적 글쓰기에 서툰 그는 작문수업에 참가하고, 남아있는 기록과 자료가 별반 없는 온통 비밀에 싸인 고독했던 리만의 삶과 수학적 성과를 극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고심한다. 이러한 고뇌는 단순히‘리만 평전’을 잘 써내는 것 이상의 무엇이다.


절대적인 추상적인 수인 음수 -1 은 같은 음수인 -1을 곱하면 미지의 세계에서 보이는 세계에 그 실체인 실수 1을 드러낸다. 그러나 허수i는 결코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존재할 뿐. 수학교수는 이 미지(未知)의 세계에 동화되고 어쩌면 함몰되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허수의 세계로. 그래서 현실의 세계와 저 알지 못하는 세계의 경계를 허물고 그 복소수의 세계, 일탈된 심연의 그 어느 세계를 유영하는 것이다. 작문수업에서 알게 된 여인‘잉빌드’는 이러한 그의 삶과 평전작업에 완벽한 동반자가 되어준다. 20년을 함께한 아내와 나눌 수 없었던 자신의 내면에 담긴 목소리를 단 한차례의 만남에서 들려줄 수 있었고 또한 귀담아 들어주며 스스럼없이 자기 의견을 건네는 여인에게 편안함과 위안을 느끼는 것이다. 이 느낌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열정으로 커가고 두 사람은 더욱 농밀(濃密)한 관계로 공고해지는데, 소위 “제곱해서 -1이 되는 허근i 처럼, 양과 음으로 형성된 우리의 인식 가능한 시스템의 경계를 벗어난 불안한 영혼”이란 개념과 어울리면서 잉빌드와의 관계는 과연 현실이며 현실세계의 실체적 상황인지에 대해 의문이 피어나기도 한다.


중년의 지극히 평범한 가장,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 곧 성년이 될 아이, 그리고 작은 몸짓만으로도 상대의 상태를 알게 되는 그런 아내를 둔 남자, 사회적으로는 어떤 성취의 결과를 수확하고 짐짓 안정되고 존경받는 명예를 향해 이동해야 하는 그런 나이여야 한다는 현대사회의 압박감은 이 수학교수를 결코 피해가지 않은 것이다. 그 심리적 동요와 번민들, 공허함과 뒤에 따르는 불안함은 가난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 짓눌린 괴팅겐의 천재 수학자 리만의 고독한 인생과 겹쳐 시간적, 공간적 인식의 경계를 허물어 버렸을 것이다. 그는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자기 힘으로 나누어야 하는 가엾은 수, 소수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또한 복소수에서 자신을 따라다니는 위험하고도 불길한 존재로서의 죽음, 저 피안의 세계도 보았을 것이다. 아니 수학을 제외하고는 그 풍경을 묘사하지 못하는 4차원 세계, 그 휘어진 공간, 이도 아니면 잉빌드와 헤어진 역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자신들의 또다른 형상, 즉 평행 우주의 세계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이 소설은 중년의 현실적 번민과 고통이라는 심리적 갈등을 통해 그 안에 잠재하고 있는 욕망과 일탈의 다양한 모습들을 조명하는가하면,‘베른하르트 리만’이란 천재 수학자의 삶의 기록을 기반으로 그의 수학자로서의 성장에 영향을 끼친 가우스,  베버, 디리클레 같은 대 수학자들과의 에피소드들, 그리고 리만의 가설을 담고 있는 당시에는 관심을 모으지 못했던 <주어진 수보다 작은 소수의 개수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 얽힌 사연등 마치 평전의 듬성듬성한 초록을 보는 것 같은 느낌까지 두 가지 맛을 전해준다. “환상은 미지의 크기에서 오는 것”이라는 이 다의(多義)적 구절처럼 수학적 성취를 향해 내 달렸던 한 천재수학자의 그것이 제시한 가설의 세상이나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갈망은 어쩜 환상, 이성이 도달 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수학교수가 그의 작업파일에 기록하였듯이 “내 생각, 양심, 그리고 모든 죄가 흘러내렸다.”고 되뇔 만큼 설혹 그에게는 믿음에 반하여 일어나는 모든 일이 죄악일지언정 복소수의 세계, 차원이 다른 세계의 허구, 상상의 세계가 간절히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절반에 이른 자의 자기 삶의 증명을 위한 아주 도발적이고 지적인 도전 이야기가 되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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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현대인의 감각, 섹슈얼리티! | 소설,시 2011-04-08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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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플랫폼

미셸 우엘벡 저/김윤진 역
문학동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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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미셸 우엘벡’이 초지일관하는 인간사회에 대한 이상향이 있다. 그는 새로운 경쟁과 그칠 줄 모르는 물욕이라고는 없는 새로운 인종, 신인류가 꾸려가는 평화와 자유가 넘치는 미래세계를 희구하는『소립자』같은 작품에 이르기도 했으니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오늘의 인간사회에 지닌 회의와 역겨움의 정도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역시 오늘의 서구물질사회가 안고 있는, 나아가 서구화를 맹목으로 지향하는 한국과 같은 사회가 받들고 있는 합리적 이성주의라는 것, 그리고 사람의 의견, 취향 같은 비물질적 요소를 포함한 삶의 모든 방식들에 완벽한 표준화를 보장해준 돈에 대한 열정, 그래서 냉정해지고, 지나치게 개인의 존재와 권리에 집착하며, 정확한 규칙과 선행적 합의 같은 것을 강요하고, 그에 열중하며, 마침내 경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한없이 비안간적이고 잔인해지는 오늘의 사회를, 그 치부들을 거침없이 조롱하고 비웃어댄다.


이런 연유에서 그의 소설은 오늘의 인간들이 위선 속에 은폐시킨 것들을 여과 없이 꺼내들고 마음껏 떠들어댄다. 인종에 대한 속내, 자신의 종교에 대한 편협성, 성적 취향 등까지 마구 쏟아낸다. 나 개인이 싫어하고 짜증나고 폭력적이며, 이기적인 것들을 왜 말 할 수 없다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이는 오늘의 권위적 담론이 덮고 있는 억압의 기만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 누군가인 타자에게 강요하거나 선동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이는 냉정한 합리성이라는 척도로만 세상을 재단하고, 그래서 이를 거대한 규범으로 만들어 모든 인간을 그 틀 안에 가두어두려는 사회의 암묵적 통념과 가치관, 윤리의식을 깨부수고자 하는 적극적인 저항 수단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 소설 『플랫폼』에는 극사실적이고 과감한 성적묘사가 주제를 연결하는 문장이라 할 정도로 빈번하게 그러면서도 평범하게 이야기의 중심 틀을 구성하고 있다. 이를 실현하는 이들은 주인공인 문화부 공무원인 ‘미셸’, 그리고 여행사와 호텔 간부인 ‘발레리’인데, 두 사람의 감각적인 사랑의 이야기는 바로 인간의 진정한 행복, 세상이 가야할 길을 상징함과 동시에 무언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현대사회의 속성과 절묘하게 대비되는 요소로 이 작품에서 비켜나갈 수 없는 핵심장치이다.

살갗이 직접 부딪히는 섹슈얼리티, 그러나 점점 이를 회피하는 현대인들의 정신작용과 행동양식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기도 하며, 인간의 즐거움, 행복을 위해서 남아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본질적인 것이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현대의 도시인들이 “이제 무엇이건 교환하고 싶은 욕망도 안 느끼고”, 또한 멘탈리티(mentality)에 맞지도 않게 된 것은 더 이상 타인을 즐겁게 해주는 것, 자신을 기꺼이 타인을 위해 내어 놓는 것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데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건 나르시시즘, 개인성의 강화된 느낌에 침몰되어가는 자본주의 물질사회, 끝도 없이 멈추는 것은 곧 종말이라는 삭막한 형식에서 어쩔 수 없이 출현하는 현상이다. 그러다보니 “제각기 유일한 자기만의 감각들에 흠뻑 빠져 자기 살갗 속에 갇혀”지내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세상을 보는 오늘의 사람들의 방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타인과 일체화될 가능성을 상실한 인간들의 행동방식은 고통을 찾고 잔혹해진다. 200여 년 전 꼭‘사드’가 한 말처럼 되어버렸는데, 혹여 우엘벡의 작품이 21세기 판 사드의 계보에 잇닿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 할 줄 모르는 현대인들, 서로의 살갗을 부딪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 그저 유혹하고 과시하는 자기도취에 허우적대는 사람들, 그래서 사디스트들인 현대인들은 SM처럼 “모두가 장갑을 끼고 도구를 사용”하며, “결코 살과 살이 맞닿는 일도, 키스나 가벼운 스침, 애무도 없”는 “정확히 섹슈얼리티에 반하는” 행동 양식을 창안했을 것이다. 정확한 규칙과 선행적 합의가 되어 있는 순전히 지적인 세계의 역겨움 속으로. 그래서 이러한 피부 접촉이 없는 이상한 변태행위에 역겨워하는 나는 진정 성적이고 동물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기에 정상인 것이니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르겠다.


사교적이지도 못하고 그저 권태로운 삶에 체념하고 살아가는 미셸을 스스로에게 회의적인 모습이 좋아 사랑에 빠지는 발레리는 완벽한 섹슈얼리티를 지향하는 인물들이다. 판에 박힌 관료 생활에 익숙한 미셸과는 달리 발레리는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소위 잘나가는 워킹우먼이다. 그러나 그녀의 선량한 성품과 타인의 즐거움을 우선 배려하는 태도는 일종의 냉정한 현실주의에 종속된 요즘의 여성들과 다르기만 하다. 따라서 그녀는 섹슈얼리티의 근본을 상실한 SM을 싫어하는 지극히 성적이며 동물적인 감성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현대인들이 망각하고 잃어버린 것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이 두 사람의 사랑에 얼굴이 홧홧 달아오른다. 적도의 태양이 작열하는 쿠바의 푸른 바닷가, 그리고 태국의 매혹 넘치는 클럽 등에서 벌어지는 정사는 그 자체 그대로가 살아있음에 대한 기쁨이요 행복을 확인하는 유일한 것이 된다. 물론 인간의 행복에 대해 지나치게 극단적인 결론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행복감에 젖어들게 하는 것이 오늘의 세상에서 다른 무엇이 있는가를 진실 되게 고민해보면 그 답변은 그리 쓸만한 게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반증될 것이다.


사실 부분마다에서 비틀린 우엘벡의 시선이 제어되지 않은 채 극단을 치닫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다. 서구 백인들의 동남아, 아프리카, 중남미지역서 벌이는 성적탐닉을 위한 만연한 관광이 마치 서구사회의 현대화가 만들어낸 건조하고 개인화된 세계를 벗어나 보다 인간적인 제3세계의 순진한 관능을 찾는 보상심리라고 합리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 더해 이슬람에 대해서는 “일신론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비인간적이고 잔인해집니다. 이슬람은 모든 종교들 가운데 가장 철저한 일신론을 강요”하고 있다면서, 혐오감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더구나 미셸의 연인, 발레리를 이슬람 테러범들의 총격으로 사망하게 하여 그 증오심을 확인하기까지 한다. 어쨌든 그의 주장처럼 내 생각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냐,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냐! 식의 항변은 사상의 자유라는 기본권의 발휘정도로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개인의 행복을 도저히 보장 할 수 없는 불투명한 세상, 지금 우리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점점 더 자주 의심이 생겨나는 것에 대한 그 근원을 드러내고 대안을 찾는 진심의 여정을 담고 있으니 말이다. 물적 과시에 몰입하고 있는 현대인들, 근본주의적 교조적인 종교와 정치사상이 뿜어내는 광기, 이것에 휘둘려 성과 종족보존의 본능마저 이탈케 하는 현대사회는 과연 지속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그녀의 육체가 내 몸 아래에서 전율하는 것이 느껴졌을 때 나는 종종 모든 악이 소멸된, 전적으로 차원이 다른 의식세계에 다가선 느낌이 들었다. (中略) 유보된 순간, 평안과 격동을 조장하는 신이 된 것 같은...”.... “이 몇 개월간의 추억을 떠올려보면 내가 행복했음을 증명할 수 있다.”,“내가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 나머지를 이해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섹슈얼리티를 문학으로, 그리고 사회비평으로 마침내 철학으로 인도하는 그러면서 아름답고 눈부신 사랑이 있는 그런 정말 기묘한 걸작이다. 우엘벡은 결코 그의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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