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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몸처럼 아파야 진짜 ‘꿈’이라고요.” | 소설,시 2012-08-27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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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리틀 시카고

정한아 저
문학동네 | 2012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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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몸처럼 아파야 진짜 ‘꿈’이라고요.”

 

꿈을 가슴에 가득 품고 있는 열두 살 소녀의 시리지만 빛 같은 이야기다. 또한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쇠락(衰落)하는 기지촌의 시퍼런 멍의 기록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알지 못하는 삶의 이야기, 단지 심심할 때만 동물원 구경하듯 바라보는 시선 밖의 이야기다. 어설프게 타인의 고통을 말하는 위선을 부끄럽게 하는 이야기이며, 슬프고 가난한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소외된 골목이자, 공동묘지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온통 향긋한 장미꽃 향기가 “말 할 수 없는 감정들을 밝히 비추어주는” 빛처럼 흘러넘치는 정말의 이야기다. 그리고 소녀의 마음 속 거인을 품고 싶어질 만큼 사랑이 풍성한 이야기다!

 

소설의 프롤로그에는 “매일매일 유실”을 경험하고 있다는 조숙한 열일곱 살 소녀가 보이지만, 이내 시간은 소용돌이쳐 열두 살 소녀 ‘선희’의 시선이 자리 잡고, 이전을 앞둔 기지촌 골목의 풍경이 ‘모래 그림’처럼, 아니 지워지지 않고 허물어지 않을 기록이 되어 아릿하게 지면을 채운다. 마을에 미군부대가 들어온 직후부터 생긴 공동묘지에는 미군들에게 꽃을 파는 여인들, 그녀들과 그녀들이 낳은 아이들의 고통과 죽음이 지나온 시간만큼 켜켜이 쌓여 있다. 모래로 그린 그림 같은 삶, 매일매일 허물어지는 삶, 텅 빈 가슴을 부여잡고 죽을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 같은 삶들로 가득 채워진 골목, 그래서 그 허기를 메우기 위해 열두 살 소녀가 찾아드는 숲 속 공동묘지는 “자다 깨어 엄마!”하듯이 단단히 쥐고 싶은 그것이다.

 

“꽃의 스크럼 - 장미 묘목”

 

미군 기지의 이전(移轉)과 함께 골목의 클럽들과 상점들은 하나둘씩 떠나고, 마을의 풍경은 더욱 을씨년스러워진다. 세상의 시선은 비로소 골목을 찾아든다. 심심한 대중의 관음증을 채우기 위해 카메라 무리를 이룬 방송사 촬영팀이 들어와 ‘죽은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만들고, 더 이상 살(flesh)을 팔지 못해 꽃을 팔아 하루하루 먹고사는 할머니들에게 “지금 기분이 어떠냐고” 마이크를 들이댄다. 어린애도 묻지 않을 몰염치한 말들을.

그래서 꿈꾸는 사람인 ‘체 게바라’가 그려진 셔츠를 입은 촬영팀에게 열두 살 소녀가 묻는다. “아저씨는 우리 골목 때문에 숨도 못 쉬게 마음이 아픈가요?” , “자기 몸처럼 아파야 진짜 꿈이라고요.”하고 말이다. 호기심, 관음증, 고작 일회성 연민으로 자신들의 외면을 위로하는 그런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어린애다운 항변일 것이다. 위선들, 수치를 모르는 뻔뻔함들...

 

공동묘지는 미군 기지가 떠나고 난 터의 골프장 건설을 위한 연결 도로로 파헤쳐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엄마와 그리고 죽은 여자들과 그녀들의 아이들이 묻힌 곳, “납작한 거북이 등”같은 세상의 끄트머리에서 우르르 떨어져 죽은 약한 자들이 자리한 쉼터의 약탈을 막기 위해 소녀는 장미 묘목을 심기 시작한다.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흙을 덮고 물을 길러 나르는 열두 살 아이의 고된 노동은 그 어떤 것보다 성(聖)스럽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세상의 폭력을 무위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 아닐까?

 

공동묘지를 빙 둘러 사방에 장미꽃이 빽빽하게 둘러쳐진 곳, 눈꽃 같은“하얀 장미꽃들이 향기로운 화관”을 쓰고 있는 풍경은 슬프고 가난한 자들의 무덤이 아니라 ‘천국’ 그것이었을 게다. 열일곱 살이 되어 펼쳐보려 했던 엄마의 일기에 담긴 간절하고 따뜻한 사랑의 언어들은 에필로그가 되어 시간을 다시 옮겨놓는다. “다른 사람들을 온 마음으로 가엾게 여기는 사람!”, “온 숲에 ‘무조건적으로’ 다 내리는 비 같은 사랑”이 읽는 이의 마음을 촉촉이 적신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는 것이 시인의 마음 아니런가.  빛과 같은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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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의 발견, 번식할 수 없는 계급을 탄생시키는 세상 | 인문,사회 2012-08-20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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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노동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저/최희봉 역
부키 | 2012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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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신문의 경제섹션은 우리사회에서 저소득층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50%를 넘어섰다는 내용을 머릿기사로 장식했다. 급속하게 중산층 의식마저 하락하고 가난의 대중화로 치닫고 있다는 얘기다. 실로 정치 권력자에게 주어진 5년이란 시간은 무서운 것이다. 이렇게 고도로 양극화되고 빈곤을 촉진하는 탐욕스런 세력은 본 적이 없었다. 지금 한국은 빈곤의 보편화를 강력하게 추진 중인 듯하다. 극소수의 거부와 대다수의 빈민이라는 두 국민 정책이 이제 그 결실을 드러내고 있다. 현 정권은 성공했다. 아마 상위 1%만 모이는 그네들의 파티에선 연일 칭송이 잦을 것이다. 수고했습니다! 라고.

 

정권을 잡자마자 재벌 감세와 규제 완화부터 시작하고, 서민들의 소득세 감면 항목들을 삭제하거나 부과기준을 상향 조정함으로써 부자들을 위한 감세로 인해 부족해진 세수를 서민의 얄팍한 급여로 충당할 정도로 사악했다. 재벌을 살찌우면 샤워효과로 그 부의 상당부분이 아래로 흘러내려갈 것이라고 이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이래 이런 예는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는 것은 그 뻔뻔함의 정도를 짐작케 하기에 충분하다. 부자는 더욱 부를 늘려가기만 했을 뿐, 국민 대다수는 점점 가난해졌다. 실질 소득은 급격하게 감소하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다.

 

땀을 뻘뻘 흘려 열심히 일해도 갈수록 먹고살기 아주 힘겨울 정도가 되고 있다. 육체와 정신적 손상으로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을 하면 할수록 가난해지는 이상한 구조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들에게“사회계약을 구성하는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말의 다름 아님이다. 사회에 대한 신뢰가 손상되기 시작했다면 과연 그 사회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할까? 잘못된 구조, 권력이 왜곡시켜버린 경제구조를 신속하게 교정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자각하고 직시하기는 하는 것일까? 나도 언젠가는 저 1%에 들어 갈 수 있을 거야, 그래서 이 망상을 자극하는, 바보 상자들이 쏟아내는 미혹에 걸려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난을 인정하지 못하게 한다. 우민화를 위한 각종 미디어 정책들 역시 성공적이다. 재벌들에게 이 정권은 이처럼 정말 갚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도움을 준 것이다. 그 결과는 가난은 대중화되고 빈곤은 만성적이 되어감에도 마치 이것이 없는 것처럼 이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형태가 된다. 그렇다고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이와 같이 그 고유의 시각적 특성 때문에 경제적 우위에 있는 자들의 눈에 빈민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한다. 당연한 말이다. 계층의 구별 짓기가 이젠 완전 정착단계에 들어서 서로 마주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의 눈앞에 서는 빈민들의 옷차림새는 실제와는 다른 것이기에 더더욱 알 수 없는 것이다. 상상력 부족의 시대! 마치 빈민들이 사라지고 있는 듯한 이 역설적인 현상은 ‘빈곤의 발견’을 더더욱 위장한다.

그러다보니‘게으르고 의존적이며 자식만 주렁주렁한 자들이 실업급여 창구를 메운다’는 어느 시장만능의 자유주의 신봉자가 하는 돼먹지 못한 말처럼 빈곤을 터무니없이 왜곡하고 몰염치에 이르는 양태까지 보이는 것일 게다.

 

“사람이 더 열심히 일해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더 가난해지고 빚만 늘어나는 구조”는 좀체 생각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저임금 노동에 참여해보라. 체험해 보라. 책은 바로 노동 현장, 만성적인 빈곤으로부터 헤어 날 수 없게 구조화된 저임금 노동 시장의 생생한 체험의 기록이다. 과연 게을러서 가난하고, 의존적이어서 빈곤해질 수밖에 없다는 보수 자유주의자들의 헛소리가 혹여 조금이라도 진실인지를 말이다.

아마 자유주의 신봉자가 뱉어낸 가증스런 그 말은 한 가정집에 청소용역을 할 때 주인 여자가 하는“정말 운동이 되죠?”라고 청소부에게 하는 말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 청소가 운동이겠는가 말이다. “완전 비대칭적이고 무자비하게 반복적이어서 근육과 뼈를 망가뜨리는” 중노동이 어찌 운동일 수 있겠는가? 몰지각과 중산층의 이 뻔뻔한 상상력은 오늘 우리들의 도덕적 인식능력이 얼마나 마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일례일 것이다.

 

책을 빌려 이 무지하고 탐욕으로 그득한 신자유주의 신봉자의 악질적 발언의 진위를 들여다보자. 한 몸을 의탁할 싸구려 주택의 보증금, 월세를 내기에도 빠듯한 시간당 임금으로 교통비, 공과금, 식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육신이 부서지고 골병이 들 정도로 노동을 해내도 가능할까 말까이다. 청소부로 웨이트리스로, 대형 할인점의 의류 점원으로, 노인병원의 조무사로 종횡하고, 이 하찮은 저임금 직업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모욕과 수모를 견뎌내야 하는가를 목격하는 것은 고통이란 단어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빈곤 속의 삶의 시작 조건은 모든 것을 결정” 할 정도로 그것을 탈피하는 것은 가능치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왜 그럴까? 먹고 살기 위한 기초 생활자금에도 모자라는 것이기에 그렇다. 저축? 웃기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을 자식만 주렁주렁 낳는 무책임한 사람들로 묘사한 신자유주의 꼴통의 말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지쳐 쓰러진 노동자가 무슨 재주로 자식들을 갖는다는 말인가? 자기 몸 하나도 간수하기 힘든데 말이다. 오히려 부자, 중산층들의 여유있는 삶에서나 가능한 얘기이다. 세 자녀에 대한 각종 정부 지원금과 육아 지원제도는 서민의 복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부자들을 위한 정책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빈민들은 아이를 낳을 기력도, 낳아 기를 능력도, 더구나 세 자녀씩이나 낳는다는 것은 그들 삶의 현실에서는 요원한 사치일 뿐일테니 말이다.

 

저자의 표현처럼 가난한 여성들은‘번식녀 계급’에 포함되지 못하는 것이다. 빈민은 더 이상 자녀를 생산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경제적 장막이 쳐져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일까?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게으른 것도 아니요, 자녀를 무책임하게 생산하는 자들도 아니며, 의존과는 멀어도 한참이나 먼 사람들이다. 그들의 세계는 통증이 지배하고 정말의 피땀으로 점철되어 있을 뿐이다. 대체 알량한 실업급여를 기다리는 서민들과 실직자, 저임금 노동자를 무엇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인가!

신자유주의 찬사로 가득한 보수주의자의 황당한 서적들과 마주칠 때면 화장실 변기를 닦아 “대장균이 듬뿍 묻어있는 헝겊으로 부엌 싱크대를 그냥 한 번 쓱 닦아주기만” 하면 되는데 하고 소심한 생각에 머무는 청소부‘바버라’의 상상을 그대로 이 승냥이들의 낯짝에 문질러 주고 싶은 심정이 든다.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이란 생활임금에 턱없이 모자란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항변에 “아니오, 임금은 계속 오르고 있다”고 반론한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 탁상공론은 최하위층 임금이 얼마나 하찮게 오르고 있는지를 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더구나 서민들의 실제 경험과 공식적 지표로 정의되는 빈곤이 불일치하는 것은 가계경비를 산출하는 부적절한 방식에 있음에 주의를 가지지 않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식비를 근거로 산출하는 구시대적 집계 방식 같은 것들....

부서져라 일하고 끊임없이 직업을 찾아 헤매며, 파김치가 된 몸으로 하루 두 개의 직업을 오가도 살기 힘든 임금 구조는 노동의 가치 운운하는 세력들의 허위만을 입증 할 뿐이다. ‘노동의 배신’을 만들어내는 이 같은 사회가 지속 가능한 세상이 될 수 있겠는가?

 

워킹푸어가 사라지는 세상, 진정 노동이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이상주의자의 헛된 꿈에 불과 한 것일까? 저임금 노동현장에 뛰어 들어 그 배신의 속살을 비로소 발견하고 분개한 여성 저널리스트의 이 고발은 보이지 않는 가난, 빈곤을 명료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저자의 비장한 마지막 문구, “넘어진 사람을 발로 차지 않겠다”는 다짐은 그 어떤 너절한 언어보다 엄중하게 우리들의 사회에 각성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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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패자를 노래하는가? | 인문,사회 2012-08-13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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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항우 강의

왕리췬 저/홍순도,홍광훈 공역
김영사 | 2012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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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성어를 말하면 의례히 초패왕‘항우’의 쓸쓸한 죽음을 연상케 된다. 한(漢)나라 고조가 된‘유방’에게 패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실패한 인물이 승자보다 더 인구에 회자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를 생각게 하는 대목이다. 왜 항우를 말하는가? 왜 패자(敗者)를 노래하는가? 더더욱 승자에 집착하며 패자를 조롱하기에 여념 없는 비정의 세상인 지금에서. 그런데 과연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잣대는 무엇인가? 무언가를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이기는 것인가? 부, 권력, 부릴 수 있는 인간들, 명예 같은 것들? 아니면 도덕성, 배려심, 연민, 고통에의 공감 같은 사랑은?

 

책은 강력한 군사적 천재성을 지닌, 그리고 초의 대대손손 명망 귀족의 배경으로 가볍게 정치 무대의 상석에 서는 유리한 출발선까지 가졌던 항우가 왜 천하통일의 패업(霸業)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는가를 인물, 전략, 사회적 배경, 정치적 인식 등을 토대로 분석해 내고 있다. 이 해석에서 저자는 때론 일반적 통설을 뒤엎는 주장도 하며 항우의 인간적 매력을 높이기도 하지만, 실패 요인의 분석에 있어서는 냉철한 통찰로 수장(首長)의 자질, 시쳇말로 리더의 경영학적 모델이랄 수 있는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경쟁자인 유방이나 배신하여 유방을 도운 한신에 대한 평가는 항우의 그것과 비교하여 참말의 사람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게도 한다.

 

항우의 정치적 인식

 

항우의 패배이유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이 정치적 인식의 미성숙이다. 군사적 역량의 천재성은 항우의 성장기에서 시작하여 그가 참여하는 전투에서의 압도적 승리로 인해 반박할 여지없이 승인되는 사항이고, 사가(史家)들 역시 입을 모아 그의 군사능력의 탁월함에는 어떠한 이의도 붙이지 않는다. 항우 자신의 주장이나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와 같이 잘 알려진 비유처럼 그가 참여하는 전투에서 지지 않았다. 싸움에서 지지 않는 장수가 졌다는 얘기는 모순처럼 들리지만, 여기에 바로 정치라고 하는 권모술수가 개입한다.

 

한마디로 그는 술수를 부리지 못하는 영웅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유방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모든 분야에서 이류에 불과하던 유방이 뛰어난 것이 이 점이었기에 항우의 정치적 유치성은 더욱 부각된다. 진나라를 멸하고 관중에 진입하면서 이를 제지하던 유방에 대한 항우의 분노를 교묘한 변설과 임기웅변으로 위기를 피하는 유명한‘홍문연’사건은 대표적인 항우의 정치적 패착과 유아(幼兒)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군사적 규모나 영향력에서 상대가 되지 못하던 유방이 항우의 명예심을 자극하고, 당면한 갈등을 모호하게 하기 위하여 진나라의 멸(滅)을 위하여 공동으로 일어선 역사적 단계로 항우의 경각심을 돌린 교활성에 놀아날 정도로 정치적으로 무식했다는 점을 드러내는 결정적 사건이 된다.

 

물론 여기에는 항우의 인척으로 유방과 그의 모사인 장량의 술책에 놀아난 항백의 무능함과 어리석음이 역사적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을 무위로 바꾸어 버린 점이라든가, 유독 애정과 친정(親情)에 취약했던 항우의 편협성에 근인을 두고 있다. 초한(楚漢)전쟁이라 불리는 항우와 유방의 4년간의 싸움에서 국부적 전장에서는 줄 곧 유방에 승리하면서도 전체 국면에 대한 전략적 관심 부족으로 유방의 세력에 포위되어 고립되는 형국에 이르는 것은 그의 정치적 인식 능력의 취약성을 거듭 확인하게 한다.

 

또한 유방과 달리 항우에게는‘범증’이라는 별로 뛰어나지도 못한 모사가 유일한 것처럼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신이 있다. 즉 간언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그의 인식능력에 이미 제약, 한계가 있었다는 측면을 말한다. 그러하다 보니 사람을 잘못 판단하는 실찰(失察)로 좋은 사람을 잃어버리는 실인(失人)은 그의 실패를 예견케 하는 지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궁지에 빠뜨리는 적과의 내통으로 자기이익만 챙기는 삼촌 항백은 보지 못하고 장량의 이간책에 말려 하나뿐인 모사인 범증까지 쫓아버리는 항우의 전략적 인식능력은 사실 유치함을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아마 한국의 대다수 기업의 오너들에서 항우의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족벌경영은 거의 예외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고, 경영적 판단이라는 소위 의사결정에 있어서도 오너의 독단적 판단에 좌우되는 낙후된 관습이 여전하다는데 동의 할 수 있을 것이다. 간언을 참지 못하고,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는 장을 봉쇄하는 한국사회를 예측하는데 이보다 좋은 교훈이 있을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럼에도 왜 항우인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한국 사회는 이긴 자가 선하고 진 자는 악하다는 해괴한 신념이 있다. 그래서 무지하고 분별없는 자들은 실패자, 혹은 낙오자라고 조롱하고 멸시하며 배제하는 것을 마치 자신의 우월성인 듯이 행동하는 것에 수치를 알지 못하는 천박한 뻔뻔함을 보인다.

항우는 소위 말하는 루저다! 그러나 사가들을 비롯한 후대인들은 항우를 이러한 해괴한 신념의 선상에서 판단하지 않는다. 다음의 전해오는 영사시(詠史詩)처럼 여전히 영웅으로 회자되고 그의 실패를 안타까워한다.

 

살아서는 사람 중의 인걸이요,

죽어서는 귀신중의 영웅이구나.

사람들이 아직까지 항우를 생각하는 것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몰래 강동을 건너지 않았음이리라.

 

이것은 비록 역사적 터닝 포인트를 인식하는 능력이 부족하긴 하였으나, 그의 인간됨됨이는 인걸이자 영웅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는 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무엇이 그러했다는 것일까? 이러한 일면은 그의 행적 곳곳에서 발견된다. 제업(帝業)이라는 중앙에 권력이 집중된 통치권자이기보다는 패업을 선택한 그의 행로라든가, 홍구를 경계로 유방과 휴전을 취할 때에도 유방에게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자신의 패업을 위해 백성들을 고생시키는 것이라는 이기심에 대한 참회의식이 그것이다. 물론 유방은 이것마저도 자기 이익의 편취를 위해 사용할 정도로 교활하였지만 말이다.

 

또한 오강에서 강을 건너 도피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패착을 인정하고 자결을 택했으며, 더구나 배신한 부하에게 자신의 목을 내 놓는 장면은 더 이상의 무고한 백성의 희생을 연장시키지 않겠다는 의지였을 것이다. 시대의 환경이 이익을 보면 의리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이 아무런 수치가 되지 않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였다는 것 또한 항우의 불운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오늘처럼.

그저 자신들의 이익만 쫓는 사회, 타인은 단지 딛고 일어서야 할 물체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항우를 배신한 한신, 경포,...등이 이러한 인간들의 표상일 것이다. 그들의 말로는 어떠했을까?

 

유방의 모사 중 괴통이 전하는 유명한 말이 있다. “짐승을 다잡으면 사냥개는 삶겨 죽습니다... 공훈이 탁월한 사람은 종종 상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유방은 결코 사람을 아끼는 자가 아니었다. 더구나 신의라는 것을 품고 있지 않는 인물이었다. 다만 활용할 가치가 있는 재능을 확실히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었을 뿐이니, 천하 통일이라는 대업을 달성하고 황제를 칭하게 되었을 때 한신 등을 주살해버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오로지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이라는 말을 진리처럼 신봉하는 사회가 과연 인간의 주류사회여야 한다는 것이 옳은 것일까? 지금도 한국의 조직 사회 곳곳에서 이러한 비뚤어진 신념에 의해 희생당하는 인재들이 무수하게 양산되고 있을 것이다. 진정 인재들은 소외되고 얼치기들이 세상을 차지하는 양태에서 무슨 바른 판단과 정신이 서겠는가?

 

결어

 

잔혹한 폭정으로 백성을 학대한 진을 멸한다는 공동의 이익과 목표가 사라질 때, 바로 그것이 정치적 환경의 전환점임을 알지 못했으며, 유방의 경쟁자로서의 성장을 인식하지 못했던 어리석음, 또한 타인을 이용할 줄 모르고 믿지 못했던 약점이 분명 있는 인물이지만 이것들은 일컬어 전략이라는 술수를 부리지 않았으며, 남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지 않았다는 측면으로 해석하게 되면 더없이 진실한 인물이 된다.

 

더구나 그의 실패를 야기한 배경에는 백성을 먼저 생각한, 전장에서 자신이 행사한 무참한 폭력에 대한 참회가 있다. 또한 칭 황제 이후에야 관용을 버리고 잔혹해진 유방과 달리 전쟁 중 관용에 인색했던 항우의 우직함 역시 교활함과는 한 참이나 다른 곧은 성품을 짐작케 한다. 우린 패자를 노래해야 한다. 비극의 영웅을 말해야 한다. 잃어버린, 갖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격려하고 그들의 분노를 위로해야 한다. 진짜배기 사람들은 패자들인 바로 우리들이니까 말이다.

 

항우의 우미인(虞姬)과의 사랑 얘기인 패왕별희의 일담(逸談)도, 고구려의 살수대첩을 연상시키는 용수와 한신의 유수(㶙水)전투도, 장량, 진평, 소하, 역이기 등 모사들의 기지도, 두목, 왕안석, 이청조 등 중국을 대표하는 시인들의 영사시(詠史詩)까지 더해 초한(楚漢)의 쟁패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맛깔나게 재해석하고 있는 이 책은 오늘 왜 우리들이 패자에 연민의 눈길을 보내야 하는지의 이유를 즐겁고 명쾌하게 깨우치게 한다. 오강에서 딱 한 번 웃으며 생을 마감한 항우의 그 호탕한 웃음이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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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스포츠의 불온한 제3자에 대해서 | My Story 2012-08-07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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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판이 직접 경기에 개입하는 스포츠 종목에 대한 단상

 

제3자가 당사자에 개입하여 어떤 형태로든 우열을 가리는 행위에는 그 제 3자의 영향력이란 절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제 3자에 대한 자격 요건이 엄중하게 설정되고,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판단능력이란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전문성과 판단성이란 것이 모호하기가 그지없다. 인간이 다른 인간들의 행위를 판단하는 것에 동의하고 그 권위를 부여하기로 한 순간부터 부정은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이 약속된 합의와 조건에는‘신뢰’라는 독특한 이해가 있다. 믿고 의지한다는 의미를 지닌 인식에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미련, 사실 확실히 알 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의심’을 누를 수 있는 어떤 힘의 필요성에서 나온 피치 못할 기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하다보니 강한 권위를 가진 누군가, 혹은 권력집단에 의해 이 불안정한 매개체에 대한 권위의 확보는 불가피한 것이 되고, 이 지배적인 권위 앞에 당사자들은 약자로서 굴복하고 복종할 밖에 없다.

 

인류의 스포츠 대제전이라 불리는 올림픽, 특히 유럽의 섬나라인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올림픽이 유독 많은 오심판정으로 회자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불안정하고 모호하며 부정의 토대위에 놓인 인간의 재량행위에 대한 진실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 런던에서 이토록 많은 심판의 잘못된 판정이 발생하는 것일까? 오심이 문제되는 것은 주로 어떤 종목들인가? 거의 모든 종목에는 직간접의 심판이 있다. 그러나 당사자가 벌이는 경기에 제3자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개입되는 종목에서 주로 발생한다는 것은 대다수가 눈치 챘을 것이다.

 

이러한 예는 스포츠 경기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사법제도나 행정청의 인허가 행위는 대표적인 제3자의 개입이자 재량행위이고, 그 제3자로 하여금 당사자 간의 다툼이나 타당성을 합의된 전문성에 기초한 권위에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문성이란 것이 그리 믿을만한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단지 신뢰성이 강제로 부여된, 사회 기초질서라는 것의 유지를 위해 강요된 권위에 대한 묵시적 합의가 깔려있다. 결국 주류인 지배권력의 안정과 유지를 위한 이기적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올림픽의 각 종목의 심판, 심판위원, 심판장이란 명칭을 가진 자들은 이처럼 해당 종목의 지배적 권위나 권력을 가진 누구에 의해 판단에 개입하기 마련이다. 이것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위선이요, 기만이라 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심판이 경기에 직접 개입하여 영향력을 많이 행사하는 종목들, 심판의 주관적 채점에 의존하는 종목들을 떠올려 보자. 유도, 레슬링 같은 격투기 시합들이 그렇고, 다이빙,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체조, 복싱 같은 종목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심판의 재량 행위에 맡겨진 종목들은 그만큼 심판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승패와 우열이 가려진다고 할 수 있다.

 

 

주심, 부심이 결정한 판단이 심판장의 거부에 의해 일거에 뒤집어지고, 승패를 결정짓는 벌점을 연거푸 부과해 승자와 패자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종목들에도 객관적인 판단 기준이 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것도 없다면 애초에 경기가 될 수 없으니 말할 것도 아니지만, 인간의 개입이라는 애초에 의심스러운 것에 신뢰라는 억지스런 권위를 입히다보니 발생하는 예상되는 폐해임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그러하다보니 믿으려 했던 자로부터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그 판단의 불신으로 분노가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런 순서가 될 것이다.

 

이것은 해당 종목에 영향력을 가진 국가나 집단, 인물이 행사하는 입김이 경기력을 좌우한다는 말이 된다. 약소국, 유색인종, 경쟁자 등에 대한 불이익이 하시라도 행사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유럽 백인 중심의 종목에 유색인종의 두각은 불편한 것이고, 자국 선수의 승리를 위해 방해되는 경쟁자는 패배하여야 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 공정성과 같은 정의를 말하는 것은 한낱 비웃음의 대상 밖에 되지 못한다. 영국 BBC방송은 한국 여자 펜싱선수의 억울한 패배를 조롱하기에 바빴고, 유례없는 유도의 판정 번복은 시정되지 않았을 뿐이다. 심판이라는 제3자가 경기에 직접 개입하는 종목이 과연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주관성, 자의성, 불완전성이라는 태생적 하자를 지닌 인간에게 판결을 맡기는 것은 다시 반복하지만 이미 부정을 전제하는 것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는 달리 심판의 직간접적 개입이 상대적으로 적은, 단지 경기의 운영적 측면에서만 개입하는 종목들, 즉 당사자의 운동능력과 노력의 객관적 결과만이 승패에 관여하는 것들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사격, 양궁, 수영, 역도, 100m 달리기 등 육상 종목들은 제3자의 개입이 극히 미미하다. 부정의 개입 여지가 없기에 진정 건강하고, 유쾌한 감상을 전달해 주지 않는가!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갈채를 보내고 감동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순수성에 있다 할 것이다. 인간의 자의적 권위에 의해 판단되지 않는 것, 어떠한 인위적인 합의를 전제로 하지 않는 것, 오직 당사자의 인간적 능력만을 경기의 대상으로 할 때 경건함이 우릴 감동의 장에 합류하게 한다.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의 배제라는 심판대에 올려졌건 어떻건 간에 심판의 주관적 판단을 배제하기 위해 전자 감응장치에 의한 자동 채점 방식을 도입하는 것은 제3자인 불온한 인간의 권위를 벗어나 진정한 스포츠에 다가가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방식과 같이 제3자라는 모호한 심판이란 이름의 개입이 경기의 결정적 판단의 지위에 있는 종목은 올림픽이라는 스포츠 제전에서 제외하여야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심판의 매개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인종차별, 약소국의 차별, 이해관계에 의한 차별, 합의된 전문성의 결여로 인한 심판 자질의 미흡, 인간의 태생적이고 본질적인 오류 등이 각고의 노력을 쌓아 온 선수의 능력과 진정성을 무참하게 짓밟는 폭력을 줄 일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의 대표 선수들만 아니라 많은 나라의 대표 선수들이 이러한 부정한 시스템 하에서 희생되는 장면이 무수하게 목격된다. 한 인간의 숭고한 노력이 제 3자의 개입으로 손상되는 것은 정말 참기 힘든 역겨움이다. 섬나라의 편협한 백인들이‘런던올림픽은 아시아인들을 위한 잔치가 되었다고 빈정’거릴 정도로 올림픽의 정신은 훼손되었고, 그들의 부정한 개입에 대한 옹호가 더욱 스포츠 정신을 타락 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깊어진다. 인류가 과연 화합할 수 있을까? 서구동점(西歐東漸)의 2세기가 지나고 21세기에 동양의 서진(西進)이 제국주의 잔상을 버리지 못한 섬나라 백인들을 두렵게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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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살만한 희망의 사회를 생각키 위해... | My Story 2012-08-04 12:18
테마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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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아는 척 하는 것들, 내가 주류입네 하는 것들의 터무니없는 편견과 왜곡들,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내 놓고 고착(固着)적으로 대입하는 이론들이라는 것들, 그래서 이것들과 다른 것은 배제되고, 소외되고, 또한 경계 밖으로 밀려나 진실과 진리를 사라지게 하는 것들의 허위와 위선을 드러내는 일이야말로 우리들이 알아야 하고, 그 시정을 실천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1. 평론, 예술을 엿 먹이다

 

예술 평론이 그러하고, 뻔뻔한 주류의 정치가 그러하며, 사회 곳곳에 억눌린 스트레스가 그것일 것이다. 자의적 해석과 지적 허세로 얼토당토 않는 예술평론을 하고 마치 대상 예술 작품은 그러하다고 말하는 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사실 그런 촌극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는가? 공영방송의 예술프로그램을 표방하며 서양의 건축과 미술품을 놓고 하찮은 지식의 허영을 자랑하는 그 미욱한 자들에겐 동정의 연민마저 느끼게 되곤 한다. 예술을 한낱 드라마적 소품으로 전락시키는 어리석은 자들의 코미디, 그야말로 비(非)미학적인 이 독소를 배제하는 방법이란 무엇일까?

 

2. 뻔뻔한 시대, 한 줌의 정치

 

또 있다. 이렇게 진실, 그 본모습을 엉터리로 재단하는 것에 한국사회의 정치만한 것도 없으리라. 자신만의 이득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어떤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 후안무치의 사회, “두고 보면 알 것이라고 말하며 그 어떤 비판과 우려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태도”, 정말이지 피로와 염증만을 남기는 환멸! 그것 아닌가?

“다수와 소수 사이의 간극과 불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파렴치한들의 사회, 정치, 불온 한 것들이라고 배제하는 주류의 의식, 보잘것없어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 멸시하는 사회, 아마 한국사회는 뻔뻔함이 미덕이되고 비정함이 진리가 되는 재난의 국면에 이미 들어서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3. 재난은 몰래 오지 않는다

 

그래 재난이다! 위험한 세상을 미리 알아보는“파국의 신호를 읽는 법”이야말로 이 사회에 필요한 양식이지 않겠는가?

“풀숲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그저 바람 때문이 아니라 맹수일 거라 여기고 대비한 사람이 살아남아 후대에 유전자를 남길 수 있”도록 진화한 것처럼, 재난을 미리 예견하려는 인간의 오래된 본성을 왜 무시해야겠는가.

 

“무관심이 지배해 똑똑한 사람들을 도리어 배척하는” 이 사회의 분위기, 권력과 부를 가진 것들이 한 마을을 투자 목적으로 몰려들면서 원주민을 내모는 현상들, “반값등록금을 외치며 알바 시간을 피해 수업을 들어야 하는 대학생들”과,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실업자들”,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이들의 목록이 수도 없이 늘어나는 것은 바로 ‘재난이 보내는 경고 신호’일 것이다. 이 뻔뻔한 시대, 스트레스가 여기저기서 억눌려 산재한 사회에 희망을 돌려놓으려면 우린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뜨거운 태양열이 모든 걸 작살 낼 것처럼 뜨겁게 열기를 뿜어내는 이 여름날, 이 하찮은 허세와 뻔뻔함, 위선과 무지, 은폐된 재난의 신호들을 알아가는 것은 어쩜 이열치열의 슬기가 되지 않겠는가?

 

평론, 예술을 '엿먹이다'

로저 킴볼 저/이일환 역
베가북스 | 2012년 06월

 

뻔뻔한 시대, 한 줌의 정치

이진경 저
문학동네 | 2012년 07월

 

재난은 몰래 오지 않는다

렌 피셔 저/김아림 역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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