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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삶의 진지한 열정, 어린 날개의 퍼덕거림... | 소설,시 2012-09-26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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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빅토리아의 발레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저/김의석 옮김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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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메타포의 언어로 인생의 의미를 투시했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의 그 기분 좋은 시적 문장들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작품이다. 치열한 자기 응시, 척박한 삶속에서도 피어나는 새로움에의 열망이 발산하는 찬연한 감동이 소설의 거대한 줄기가 되어 흐른다. 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어, 비록 가난하고 침울한 환경이 삶의 전망에 그림자를 드리워도 삶의 긴장과 희망을 위해 도전하는 자유로운 정신들은 아름다움이 되어 마음 저 깊은 곳에 어느새 들어와 앉고, 까닭모를 흐뭇한 위로와 안락의 기운에 감싸이게 된다.

 

절도죄로 수감 중이던 스무살 청년‘앙헬 산티아고’의 사면석방 풍경이 부패한 간수와의 미묘한 위협의 대화에 담겨 권력자와 피지배자의 삶의 시선이 되어 적대적으로 교차한다. 권력자인 간수는 자신이 가했던 파렴치 행위의 보복이 두려워 살인죄로 복역 중인 무기수를 빼돌려 앙헬의 목숨을 끊을 것을 청부한다. 참혹했던 오랜 군부독재가 종식되고 민주정부가 들어섰으나 사회 곳곳에 뿌리내렸던 부정과 타락과 부패는 단절되지 않고 여전히 그 악의 기운을 발하고, 편협과 독단, 획일과 고답으로 다양과 창의, 자유를 방해하며 기득권 유지의 불안으로 그 음흉함을 지속한다.

 

소설의 무대는 이처럼 근절되지 않은 부정의 구태에 새로움이 여전히 압도되고 있는 21세기의 칠레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들은 사랑하고 꿈을 꾸며 자유로운 희망의 날개들을 퍼덕거리기 마련이다. 좌절된 꿈으로 절망하는 소녀, ‘빅토리아 폰세’와 앙헬의 만남은 서로에게 희망, 미래의 존재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의지가 된다. 민주화가 되었지만 독재 군부에 의해 피살된 사람의 딸에게 보내지는 사회의 시선은 달라지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퇴학당하고 발레학원에는 수강료를 지불하지 못해 발붙일 곳이 없어진 소녀와, 세상의 사악함을 온 몸으로 체득한 청년은 그래서 서로의 꿈이 된다.

 

국립극장 무대에서 발레 공연을 하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는 빅토리아를 위해 무일푼의 앙헬은 은퇴한 최고의 금고털이‘베르가라 그레이’를 찾아 부정으로 축재한 권력자의 은닉된 재산을 털자고 제안한다. 추앙받는 최고의 범죄자가 아니라 고요한 범부로서의 삶을 희망하는 베르가라를 마침내 설득하여 인생의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의기투합한 이 주변인들의 행동이 위태롭지 않고, 불온해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추악한 권력의 희생자들인 이들이 취할 수 있는 불가피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도덕적 정당성에 관용을 부여할 수 있어서일까? 아니면 꿈꾸는 자들의 순수함, 새로운 세대에 대한 희망을 막아서지 않고 싶다는 기대에서일까? ...

 

한편, 알량하고 추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위선과 기만, 불변이라는 수구성을 강요하는 구태와 자기성찰의 기회를 통해 이를 반성하고 약자와 소외자를 위해 작은 몸짓이라도 하려는 변화의 소소한 충돌이 희극적 언어와 행동으로 소설의 저변을 수놓는다. 퇴학의 철회를 위해 마지막으로 부여된 구술시험에서 획일성의 구태를 고집하는 국어선생과 빅토리아의 시(詩)에 대한 해석은 변화와 혁신의 장애가 무엇인지를 꼬집는다. 또한 독재정권의 하수인이었던 순경이 빅토리아의 국립극장 공연을 위해 앙헬을 도와 지배계급들을 기만하는 장면은 사회의 진정한 변화가 누구로부터, 또한 무엇으로부터 변모해야 하는지를 고발한다. 운집한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몰아내고 발레 독무를 하는 빅토리아의 찬란한 아름다움이 영상처럼 시야에 그려지는 느낌은 그 어떤 화려함보다 멋지게 가슴에 들어차고, 왜 이러한 기성권위에 대한 도발이 감동인 것인지를 되뇌게 된다.

 

네루다와 그의 우편배달부 ‘마리오’, 마리오의 연인이고 아내가 된 ‘베아트리스’의 관계와 인생의 진정한 행복감, 유쾌함, 진지함의 투명한 본질들이 베르가라와 앙헬, 그리고 빅토리아로 변신하여 그대로 삶의 아름다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삶의 독자성이 더욱 견고하게 전달된다. 앙헬과의 벅찬 미래를 꿈꾸며 먼발치에서 연인을 기다리는 빅토리아의 간절한 시선이 못내 안타까움과 연민이 되어 더욱 작품의 여운이 오랜 파문을 남기지만, 거대한 하나의 메타포가 된 소설이 삶의 진지한 열정이 되어 비어버린 의지를 가득 채워준다. 영원처럼 다가오는 언어들과 문장, 이야기가 알 지 못하는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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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급의 편의적 상식을 깨뜨리는 날을 향해 | 인문,사회 2012-09-25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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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수의견

박권일 저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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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에 대한 상대적 표현으로서‘소수’를 말하듯이‘상대성’을 가진 의미이다. 그래서 소수란 결코 작다거나 혹은 수적으로 적다는 절대적 의미만을 지니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보이거나 보일 수 있는 것이고 그 이면에 노출되지 않은 엄청난 다수가 잠재하고 있을 수 있다. 우리네 사회의 여론이라든가 정치권력의 의사라는 것이 마치 다수가 동의한 결집된 의견인양 말하지만 사실 아무리 떠들어도 반영되지 않는 대다수 민중의 의지는 결코 들리지 않으며, 보이지도 않는다. 결국 국민의 여론, 즉 다수의 의견이라고 몰아가는 것은 소수 권력계층이 의도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대다수이다.

 

방송, 미디어 등 소위 여론을 조작하는 보수경제권력과 자신들의 기득적인 정치권력을 유지하려는 수구적 계층이라는 소수가 다수처럼 행동하고, 그래서 정작 다수인 민중은 소수가 되고 이들의 의견은 실종되어 버리는 것이다. 정말의 다수 의견인 주류적 시각에서의‘소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사회이다 보니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민중은 소외되고 그 삶은 점증적으로 피폐화되어 간다. 소득과 자산은 극소수에게 편중되고 배제된 소수인 대다수 민중은 극단적으로 가난해져 간다. 정책과 법제도는 기득권 유지와 부의 축적을 위한 방향성만을 모색한다. 여기에 자신들의 생활경제적 수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양가적 자의식의 중간계층이 자기 이익의 편의에 따라 보수와 진보를 왕복하며 소수의 지배권력을 도와 주류사회라는 것을 형성한다. 이 중립적이고 선수가 아닌 심판 같은 행동만 하려는 중간계급의 이중 잣대가 스스로들은 물론 민중 모두의 의견을 분산시켜 결집을 방해하여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가속화시킨다.

 

학연, 지연을 좋다고 하는 사회

 

다수인 민중의 의견을 압살하는 모순된 중간계급의 노예 의식과 이기적 욕망이 자신 또한 배제된 소수 의견자임을 망각케 한다. 더더욱 소수 의견은 이들의 무지와 무교양으로 인해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한 종편방송의 문화평론가, 의사, 변호사, 작가, 스포츠 해설가 등 중간계급 주류 인사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패널로 자리잡아 하는 말들은 이들의 무교양을 단적으로 입증한다. “학연 지연 자체는 좋은 거예요”라고 떠들어대며 마치 진리를 말한 것처럼 모두들 머리를 끄덕인다. 한국 사회의 건강성을 가장 악화시키는 악질적 폐해를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처럼 다수인 민중의 소수의견은 오간데 없어지고 보수 언론, 다시말해 소수 기득권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몰염치와 혐오스러움만이 난무하는 것이다.

 

이들은 왜 학연과 지연이 좋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규칙과 규범 등 공정한 루트를 통하지 않고 자기 개인들의 욕망을 관철할 수 있는‘뒷문 해결’을 위한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은 어쩔 수 없이 지키는 규칙을 자신만은 지키지 않아도 될 때의 특권의식이 가져다주는 쾌락,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한국은 지구상에서‘뒷문 해결사회’의 대표적 전형으로 지목된다.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사례로 들었듯이 ‘새치기의 시장 의식’을 떠 올릴 수 있다. 줄서기, 즉 규범과 규칙이라는 공평함과 자기노력의 가치인 공정성을 훼손시키는 주범이 새치기이다. 나는 규칙을 초월한 사람, 규칙의 예외를 적용받는 사람이라는 비뚤어진 권력의식이 작동하는 것이다. 쾌락의 효율성을 위해 민주적 질서와 배분양식을 파괴하는 악덕을 선이라고 주장하는 이 무지의 타락성이 오늘 한국사회의 도덕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 아니고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이것은 나아가 강남이라는 특수한 지대를 낳기에 이르렀다. 학연, 지연이라는 뒷문 해결의 사회인 한국사회에서 내 자식만큼은 모두를 짓밟고 일어서서 학연과 지연의 성채를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규칙의 예외를 적용 받으면서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고 쾌락을 만끽 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이 아니어도, 학연과 지연이 없어도, 규칙과 규범을 지켜도 손해를 입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중간 계급들이 상식이라고 행하는 것들, 사회적 관습이라고 용인되는 이러한 것들의 사슬을 끊어내지 않고 그 어떤 변화가 있겠는가? 구태의 썩은 정치를 바꾸고, 경제의 민주화를 이루자고 제아무리 외친들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중간계급의 의식이 바뀌지 않고서 어느 것인들 도달할 수 있을까?

 

비도덕성이 옹호되는 저열함이 그득한 사회

 

자, 다수로 보이는 것들의 왜곡과 편협의 사례는 이 사회에 무궁무진하다. 소위 소셜 미디어라고 칭하는 SNS의 공간으로 들어가 보자. 여론을 읽어내고 소통하는 만능의 공간처럼 주류의 미디어들은 떠들어 댄다. 그러나 정작 이 도구가 세상의 문제와 본질, 그리고 민중의 의견을 읽어내는, 진정한 의견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인가? 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 재벌, 그리고 고작 연예인들의 자기 전시 욕망의 표출 장소이고 연극성 인격장애와 무교양의 자폭 공간이외의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 더구나 감각적이고 표피적 단문으로 본질을 논하기 보다는 취향의 시비를 다투는 저열함이 더 극성을 부리지 않는가? 자신을 보여주고 대상화하는 것에 집중하는 전시 욕망, 바로 물신화와 자기소외의 황폐함만이 그득하지 않은가? 정신의 실종, 생각의 결여, 문제본질의 왜곡, ...

 

그래서 사회안전망의 바깥에 선 오늘의 청년과 중노년의 불안과 사회전체의 생산력을 불임화시키는 불안정 노동 진전의 사회인 현실의 논의는 이런 곳에서 행해지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설혹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더라도 엉뚱하게도 무지의 대결인 취향의 이전투구(泥田鬪狗) 장으로 추락하고 만다.

“임금소득 불평등 OECD 1위, 임시직 비율 2위”, “비정규직 858만명(2008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조사)”, OECD국가 “GDP대비 공적 사회복지 지출 비중 최하위”라는 지표가 말하듯이 한국사회는 불과 5년도 이르기 전에 두 국민(1%의 강부자와 99%의 민중)정책의 성공적 성취로 인해 국민 전체가 가난해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고용없는 성장, 불안정 노동의 확산, 자산 소득의 극단적 불평등으로 남미사회의 지독한 양극화 모델과 동일해지고 있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시장의 비도덕성이 옹호되는 도덕성 상실의 사회, 탈규범적 행태를 능력이라 찬양하는 타락과 부패의 사회가 된 한국사회에서 소수 의견이 짓밟히고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혁신을 기치로 내건 사람, 공평과 정의,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고 하는 사람이 나서 이제 한국사회를 바꾸자고 외친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 것인지, 누가 변화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가? 바로 소수가 된 민중, 양가적인 중간계급이 자신들의 상식을 파괴하는 힘든 여정을 지나야 하는 것일 게다. 정치, 일상, 이데올로기에서부터 취업, SNS, 청년빈곤 문제에 이르는 음영이 짙게 드리운 이 사회에 날선 비판을 담고 있는 이 책‘소수의견’이 다수, 주류의 의견이 되는 사회가 곧 우리들이 지향해야 하는, 변화의 도달지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소수 의견이 상식이 되는 그날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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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性)의 집중성, 위험성, 그 고통과 욕망의 성찰... | 소설,시 2012-09-12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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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악녀를 위한 밤

존 버든 저/이진 역
비채 | 2012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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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이야기에 이 만큼 완결성을 내재한 구성력을 갖춘 작품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쩜 행운일지도 모른다. 구태여 분류하자면 범죄 스릴러의 장르라고 하겠지만 ‘존 버든’의 소설은 이런 어정쩡한 구분을 넘어선다. 삶의 방향감각에 대해서, 인간과 사물, 어떤 대상에 대한 이해, 성 에너지와 같은 인간 내면의 독특한 심상들이 특정 사건의 해결을 향한 추리와 탐색이란 과정과 분리되지 않고 촘촘히 얽혀 뻔한 재미 이상의 진중한 무엇을 선사한다.

 

전작 『658, 우연히』에서 느껴졌던 전직 뉴욕형사‘데이브 거니’의 자기 성찰과 삶의 정작 중요한 것들에 대한 이해로 다가서는 고뇌의 원천이 계속하여 저변에 흐르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취약한 정신세계를 조롱하는 지적도발 역시 이 작품의 세련됨을 더해준다.

소설 속에 인용되고 있는 노벨상 수상자인 영국의 극작가‘헤럴드 핀터’의 “인간의 마음속에서 생성되는 가장 큰 두려움은 말로 설명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것”이란 말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첫 페이지의 문장들은 그야말로 평온 속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담겨진 위협들로 엄청난 공포의 직면을 기대케 한다.

 

“뻔뻔한 년을 제거하는 작업은 여러모로 성공적이었다고 결론지어도 좋으리라. - 中略 - 거울 앞에 서서 미소 짓는 자신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또한 이 문장은 한 사람을 살해한 자의 도취적 독백과 모습을 암시함과 아울러, “제아무리 추리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를 쫓을 수 없었다.” 라는 한껏 고양된 자신감으로 아예 초장부터 도발해 댄다. 많은 하객들이 모인 결혼식에서 신부가 살해되었지만 현장에는 불가능한 단서들, 조작된 단서들 이외에는 흔적조차 없다. 다만 사건과 함께 사라진‘멕시코인 정원사’라 알려진‘헥터 플로레스’란 인물이 유일한 추적의 대상일 뿐이다. 이미 전작에서 경험한 답변이 불가능한 살인사건에의 봉착이란 동일한 플롯임에도 이 작품은 더욱 지적 깊이를 더한 복선들로 한 없이 몰입되게 한다.

 

소설의 키워드라 할 것들을 감히 정리해본다면 ‘섹스 중독’혹은 ‘성 에너지’, ‘경계 의식’혹은 ‘반사회적 인격 장애’, ‘잠복근무’혹은 , ‘감정적 이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어휘들은 소설 저변을 도도히 흐르는 이야기의 정체성이자 주제이고, 사람과 삶의 방식에 대한 빛나는 통찰적 언어들이라 해도 무방할 듯싶다. 성적 피해자였으나 가해자로서 폭력성을 습득하게 된 여자 아이들의 성 중독을 치료하겠다는 특수학교, 섹스 중독 치료분야의 권위자인 정신과의사가 소설의 배경을 가득 채우고, “다른 사람이 칼에 찔리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 움찔하는 하는 것처럼” 친절하게도 인간의 불완전한 경계의식이야말로 타자에 대한 연민의 기초임을 설명하며 사이코패스들의 완벽한 경계의식을 통해 인간 본성의 본질을 생각게 한다. (사이코패스들은 움찔하지 않는 단다!)

 

특히 거의 작품을 지배하는 정의라 할 수 있는 “상대가 믿어주기를 바라는 사실을 그가 스스로 발견하도록 유도하는 기술”이 바로 잠복근무임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감정적 이득으로 인해 시야를 흐릴 수 있음을 지적 하는 대목은 우리들의 삶의 방향감각과 이해에 대한 정곡을 가리키며, 동시에 사건 해결의 단서로 향하는 길목을 제대로 바라볼 것을 경고한다. 이를테면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자신이야말로 항상 부재중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자신의 생각이 맞기를 무의식중에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처럼 소설은 하나의 시선과 언어에서 삶의 본질에 대한 사유와 사건의 추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단서로 동시에 작동한다. 같은 맥락에서 그 자체로 가공할 위력을 지닌 성(性) 에너지의 특징들을 통해서 사건의 완전무결성, 위험성, 왜곡의 현상들을 보여준다. “인간을 그토록 완전무결하게 집중시킬 수 있는 힘”으로써 성(SEX)은 인간의 고통과 욕망의 근저에 자리잡는다. 자 속칭 ‘개잡년’이라고 명명된 섹스중독의 여자들이 잇달아 살해되는 범죄의 본류를 따라가야 하는 험난한 수사는 감정적 이득으로 판단을 흐려서도 안 되며, 그 엄청난 파괴력과 집중성이라는 힘을 이해해야 하고, 인간의 가면이라는 태생적 본질을 망각해서도 안 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이야기를 믿고 싶은 바로 그 마음이 우리를 파멸시키기에 인간의 상상력만큼이나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없으리라는 이해일 것이다. 이 소설이 가진 미덕들을 얘기하다보니 스토리가 소홀해졌지만, 소설을 지배하는 암흑의 심연이 발산하는 압도적인 흡인력은 거부하기가 버거울 정도로 폭력적이라는 말로 대체해야 할 것 같다. 재미와 사유를 동시에 잡아맨 걸작이라 아니 할 수 없다. 60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이 오히려 부족하다 할 정도로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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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저주의 세상 속에 애틋한 사랑이...빼어난 다크 판타지! | 소설,시 2012-09-0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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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조힐 저/박현주 역
비채 | 2012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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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선과 악, 그 경계를 찾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말하려는 것이었을까? 소설은 삶의 실제와 몽상적 시공을 오간다. 그런데 그 구분이 지극히 모호하다. 이승과 저승의 이원적 경계를 오락가락하는데, 그것이 대체 현실인지 죽음의 세계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나치게 은유의 세상을 살아 온 탓에 순수하게 바라 볼 수 없을 만큼 내 관념의 세계가 불순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표의된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을 혹여 정말의 의미는 따로 있다고 억척스레 해석하는데 익숙해진 이유일 것이다. 자고 일어나니 양쪽 관자놀이에 뿔이 자라나 있다면 이미 현실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단순하게 받아들여도 되는 것일까? 뿔은 그저 심상(心象)일 뿐인 것인가? 악(惡)이 깃든 마음의 표상의 수단으로서? 아니 이 둘 모두는 아닐까? 현실의 악이자, 저승의 세계를 모두 포함하는 모순된 기표로서 말이다.

 

소설은 이처럼 모순의 세계를 넘나든다. 삶과 죽음, 선함과 악함이 마구 뒤섞여 살아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사람인지, 악마인지 분간할 수 없다. 이렇게 분간하려는 것이 오류는 아닌지, 사실 그 구분이란 본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악이란 것이 오롯이 악이지만은 아닌 것처럼. 그래서인지 뿔이 솟아난 남자‘이그’는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악인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인물이다. 사랑하던 연인‘메린’의 처참한 죽음이라는 상실을 지우지 못하고 있음에도 세상은 그에게서 메린의 살해용의자라는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미래의 아이들을 말하던 두 사람의 사랑, 그 사랑을 앗아간 세상은 그에겐 이미 지옥이다. 지옥 같은 현실, 바로 죽음의 세계 아니던가?

 

소설은 사랑을 만들고 우정을 키워가며 사람의 본성을 알아가던 과거의 시간을 통해 인간에 내재된 악마성의 실체를 탐색한다. 자기중심적 사고, 오해, 잃을 것을 가진 자의 두려움, 집착, 소유욕..., 하찮은 욕망들이 발산하는 터무니없고 또한 형편없는 산물들. 뿔은 메린이 살해되는 현장을 들려주고, 살인자와 희생자, 동행자인 오랜 지기인 ‘리’와 연인 ‘메린’, 형 ‘테리’와의 기억들을 통해 신(神)의 자리를 대신한 악마의 선의를 역설(逆說)한다. 선과 악의 혼화(混和) 그리고 순환. 그런데 더럽게 종교적이다. 이 뿔 달린 악마가 죽은 연인의 십자가 목걸이에는 무력화하고 순화된다. 굳이 평하자면 이 소설의 오점이랄 수 있는데, 관대하게 보아 넘기려면 연인의 순결한 영혼의 상징이라고 할까? 결국 조금 유치하게 되어버리긴 하지만 아무튼 이것은 소설에서 중요한 중의적 도구로 사용된다.

 

십자가가 달린 메린의 목걸이, 이것은 사랑의 매개이며 또한 욕망의 매개체로 이그와 리, 메린의 육신을 돌아다닌다. 우상이다. 그러면서도 본질은 영원성을 말하는듯하다. 이들이 모두 이승을 떠났을 때에도 지상에 남아 누군가를 또 기다리는 걸 보면. 물질이 영원이라는 정신을 대체하는 것 아닌가? 사랑하는 여인이 어느 날 서로 다른 이성과의 경험을 위해 자신들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 것인지 확인하는 이별의 시간을 갖자고 한다. 분노한 남자는 그런 여자를 남겨두고 떠나버린다. 여자의 살에 대한 집착을 가진 이그의 친구, 리는 여자가 자신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이별이라고 여기지만 여자에겐 사랑하는 연인 이그를 위한 필연적 선택으로서의 이별일 뿐이다. 여기서 세상의 악은 자라난다. 분노는 살인을 부르고 거짓과 위선, 기만, 도피를 만들어낸다. 그리곤 세상은 저주와 죽음의 욕망만이 부글거린다.

 

소설은 또한 피살된 여자의 죽음에 기묘한 필연을 엮어 넣는다. 암(癌)에 점령당한 육신의 부패를 사랑하는 이에게 부담시키지 않기 위한 절절함의 당위성으로 말이다. 이렇게 되면 살인자의 행위는 악행이면서도 선행이기도 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처럼 선악의 구분이란 것이 얼마나 인간적인 오류이자 얼토당토않은 것이냐고 묻는 것일 게다. 삶이란 이렇듯 규정지을 수 없는 무엇들일 것이다. 분노와 악의가 설설 끓어댈 것 같은 악마가 더없이 인간적인 행보를 하는 것도 이미 분간 할 수 없는 본성의 본질을 역설(力說)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캄캄한 절망의 세계, 저주가 너울거리는 지옥의 세상에서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가 흐느끼는 절묘한 이야기에 인간의 본질을 탁월하게 담아낸 다크 판타지(Dark Fantasy)의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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