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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 동시대 미술 1998-2009』 서평단 모집 | My Favorites 2018-01-2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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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동시대 미술 1998-2009

반이정 저
미메시스 | 2018년 01월

 





신청 기간 : ~1 25일(목) 24:00

모집 인원 :  10 

발표 :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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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동시대 미술, 2000년 전후의 지형도

2000년대 한국 미술사를 12개의 독립된 주제로 풀다


현장에서 밀접하게 한국 미술의 현재를 전달하는 미술 평론가 반이정이 2000년 전후의 한국 동시대 미술의 흐름 중 1998년부터 2009년까지 12년에 집중한 책을 미메시스에서 펴냈다. 세상 전체가 구조 조정을 겪으면서 이전과 다른 세상이 출현하던 1997년 외환 위기 이후부터 한국 미술 역시 시대의 한 부분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세기가 바뀌는 그 짧은 10여 년 동안 한국 미술이 압축적인 성장을 경험할 때 미술 현장에서 비평 활동을 펼쳐 온 반이정은 몸소 경험한 생생한 한국 미술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한다. 

한국 동시대 미술을 다루되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12년(1998~2009)의 한국 미술에 집중하는 이 책은 오광수 원로 평론가가 1900-2000년까지의 한국 미술사를 집필한 이후 유일하다. 반이정은 그 12년을 동양화, 전시장(대안 공간), 미술 비평, 관객, 미디어 아트, 팝 아트, 미술 시장/미술계 스캔들, 여성 미술 등 각각 독립된 12개의 주제를 연결시켰고, 이때 각각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시대상과도 연관지음으로써 미술과 현실의 유기적인 관계를 설득하고 있다. 이 책은 한국 동시대 미술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지도로써의 역할을 충분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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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다 | 에세이,평론 2018-01-2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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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똑똑

정여울 저
천년의상상 | 2018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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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내 심상(心像)에 빈번하게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는 어린 시절 흑백TV 앞에서 보았던 몇 몇의 영화장면들이다. 그 중에서도 전쟁의 한 가운데 극히 제한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애절(哀切)한 사랑, 그리곤 공허함만이 아프고 답답하게 다가오던 마지막 장면으로 기억되는 영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그 애틋함인데, 아마 소년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모양이다. 결국 영화의 원작인 레마르크의 소설을 펴들고 아주 조금씩 읽어나가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그 소년의 마음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리워하는 그 마음에 무언가를 채워 넣으려는 소극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작가 정여울의 글에는 이러한 문장이 있다.

나는 우선 당신조차 알지 못하는 그 아픈 무의식의 밑바닥까지 어루만지는 글을 쓰고 싶다. 마침내 당신의 상처 입은 마음 속 깊은 그곳까지 닿을 수 있도록

설혹 그것이 상처인지 아닌지 그저 막연한 결핍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심스러움이 묻어나는 똑똑하는 두드림의 소리에 문을 열면 그곳에는 부드러운 손길을 가진 진솔한 말()이 서있으리라.

 

이렇게 마주하게 된 월간 정여울은 나와의 은밀한 대화가 된다. 내 자신을 향하여 솔직한 삶을 얘기하게 한다. “나에게 부디 낯선 사람이 되지는 말아줘.” 라는 관계의 기적을 말하기 위해 인용된 이 평범한 문장이 모든 관계를 무시하는 듯한 내 오만의 밑바닥에 있는 정말의 목소리가 아닐까하는 의문의 시간이 되고, 그것은 다시금 한쪽이 열릴 때도 한쪽은 늘 닫혀있는 회전문의 비유에서 내가 침전 시켜놓은 마음의 비밀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묻혀있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비밀이 없으려면 아낌없이 마음을 줘야 한다.” (P56)

 

얼마나 굳게 마음이 닫혀있었는지, 관계에 얼마나 소홀했는지, 얼마나 인색한 마음이었는지를 조용히 가늠해본다. , 인과응보지. 그렇게 닫아걸고는 옛 소년을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속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소년은 사람들을 많이 사랑했다. 그리고 무한한 사랑을 받았다. 소년에겐 숨길 것이 없었으니까. 정말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고 얼마나 열성적으로 들었던가?

 

표현보다는 수용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보세요.” (P86)

 

나이가 들며 소년의 열성적 듣기가 수그러들긴 했지만 표현보다 수용의 비중이 크다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판단하려 들었던 모양이다. 작가의 지적처럼 좋다, 나쁘다, 괜찮다, 싫다, 라는 판단으로 단절을 만들어냈던 모양이다.

 

판단은 이야기를 끝내는 것이지만 사유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에요.” (P89)

 

허겁지겁 판단하며 달려왔더니 정말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부터 일 것이다. 그럼에도 외로움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것을 부르는 것이 그 단어임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가뭄처럼 쩍쩍 갈라진 메말라버린 심장. 그 목마름을 저 깊은 곳에선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눈부신 첫 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소년이 지닌 감성, 내가 너무 멀리 도망쳐왔던 것의 실체이리라.

 

그 모든 삶의 기쁨이 오직 당신과 함께 해야만 가능한 눈부신 기적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으니까.” (P100)

 

작가가 말하는 부사 어쩌면의 용법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주술적 희망의 향기가 묻어나는, “가능성을 탐색하여야 할 여유의 공백을 잃어버리고 있었음을. 아마 소년을 찾는 내 여정에 월간 정여울은 동행할 것이리라.

읽는 이 마다 대화의 내용은 달라지리라. 그럼에도 문을 열면 그 진솔함에 마음을 열지 않을까? “끝내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마음 또한 어루만지는 치유자이기를 말하는 작가 정여울과 내밀한 속내를 교환하는 순수한 희열의 시간이 될 수 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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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함, 그리고 충만한 감동의 울림 | 소설,시 2018-01-21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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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 저/강미경 역
느낌이있는책 | 2018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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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 그릇을 받쳐 든 작은 두 손과 분홍색깔 배경의 예쁘게 장정된 책,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가 내 시선을 잡아당긴 이유는 이것이었을 것이다. 아이의 작은 손에 느껴지는 공손함과 그 이면의 두려움, 조심스러움, 연약함이, 그리고 강제된 어떤 힘에 대한 것이.

감정의 과잉일까? 이미 소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배경 지식 때문일지는 모르겠다. 에밀의 저자 ‘J.J.루소아이는 자연이다.”라 말했다. 조작된 어떠한 것도 끼어들지 않은 그것, 그런데 이 인위적인 것들이 자연을 다른 무엇으로 변화시킨다. 굴종을, 겸손을, 불필요한 정념들에 주눅 든 존재로, 소설은 바로 이 조작을 자연이라는 선으로 회귀시키려는 놀라운 희생과 믿음, 사랑을 이야기 한다.

 

1. 범죄를 생산하는 사회

 

산업자본가들의 광기가 고조되던 노동 착취적 환경, 이로 인한 극심한 빈곤이 대중화되던 19세기 영국사회가 배경인 작품이다. “경비절감, 수지타산”, 이 단어들은 아홉 살 어린아이를 팔아먹기 위해 구빈원 위원들의 비밀회의에서 들려오는 음절들이다. 또한 먹이를 주지 않아도 살수 있다는 괴상한 논리를 실험하여 아이 10명중 여덟 명을 저세상으로 보내는 보육원장의 탐욕스러움까지 더해진 파렴치와 잔혹함이 사회의식을 장악한 세계이다.

 

죽 한 그릇 더 주세요, 원장님.”

올리버 트위스트가 죽을 더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아이는 교수형을 당할 거요.” (P 30)

 

어쩌다 주어지는 멀건 죽 한 그릇, 그마저도 혹독한 매질이 대신하는 극한의 생존환경, 아이는 구빈원의 탁월한 자본가적 계산에 의해 노동력이 필요하던 장례사에게 떠 넘겨진다. 계층의 밑바닥으로 내려갈수록 약자들 간의 잔인함은 더욱 증폭된다. 거짓과 위선, 질시와 경계의 감정이 더해지고 굶주림과 폭력은 늘어난다.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의 그것들이 편협과 무지, 악과 지배욕에 올라타 아이에게 불행을 요구한다.

 

아이는 도망친다. 광기와 불행이 너울대는 고향, ‘머드포구를 벗어나 런던으로. 농촌에서 쫓겨난 도시빈민들로 득실대는 대도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듯이 올리버를 이끈다. 먹을 것도, 잠 잘 곳도 없는 아이에게 구빈원을 대신한 곳은 소매치기 집단이다. 악을 생산하는 사회 구조에서 그야말로 자연스러움 자체일 뿐이다. 집단의 우두머리인 페이긴은 범죄의 종착점인 교수대를 설명함으로써 올리버를 위협하고 속박한다. 사회의 모든 계층이 뒤질세라 범죄를 양산하고, 또한 이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선서 시키시오

입 다무시오.”

쇼를 하는구먼.”

판결을 하겠소.”

“3개월간 중노동형에 처한다. 퇴정하시오.” (P 136~137)

 

단지 두려워서 내달린 어린 아이를 잡아와 벌이는 즉결심판의 모습이다. 왜곡된 지식, 부재하는 도덕, 하찮은 권위들이 팽배한 세계, 올리버를 단지 수지타산의 물건으로만 여겼던 구빈원교구(敎區)직원 범블이나, 소매치기 우두머리 페이긴’, 즉결심판 판사, 이들 모두는 자신들이 악인이라 생각지 않는다. ‘선한 이웃이라 자처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추악한 세계의 이율배반(antinomy), 어쩌면 이것이 우리네의 모습일 것이다.

 

2. 사랑이라는 믿음, 그리고 희생

 

이처럼 그 경계를 구분키조차 어려울 만큼 얽혀있는 집단과 계층의 부도덕성이 점령한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임에도 소설은 아름다움과 자연이라는 선의 감동이 충만한 작품으로 가슴에 남게 한다.

 

브라운로’, ‘로즈’, ‘메일리 여사로 등장하는 인물들에 의해 아이는 구원되고, 보호받는다. 이들은 버려진 채로, 외면 된 채로, 이용과 착취의 대상으로, 냉담함과 밀려드는 공포의 환경이기만 했던 세상에서 안전과, 위로와 평온의 존재함을 아이에게 알려주는 사람들이다. 아이의 고통을 교감할 수 있는 사람들, 아이라는 자연에 대한 조건 없는 믿음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 소설의 강렬함은 간신히 벗어났던 구렁텅이로 어린 올리버를 다시금 소매치기집단에 넘겨주었던 낸시라는 여성이 발휘하는 죄에 대한 자기이해와, 그로부터 시작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처참한 죽음의 장면이랄 수 있다. 매춘, 좀도둑질, 밀고로 점철된 삶을 살아야만 했던 여인이 새로운 삶의 무대로 나갈 수 없을 만큼의 악의 조밀한 얽매임은 그것으로부터의 탈출이란 것이 짐작할 수 없는 용기와 고통임을 보여준다.

 

세상에서 버려졌던 아이, 그 자연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데에는 무수한 사람들 공동의 협력과 노력, 그리고 생명을 건 분투여야만 한다. 이 소설이 발산하는 감동의 울림은 이처럼 진정함, 정의, 믿음의 회복을 위한 지난한 헌신과 희생임을 발견케 하는 데 있는 것이지 않을까?

 

고작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인간됨을 잃지 않고 행복을 찾아가는 어린 소년의 이야기라는 이 소설에 오랫동안 달린 계도(啓導)적 해석들은 사회와 기성의 인간 공동체가 자신들은 책임이 없음을 회피하는 몰염치가 될 것이다. 디킨스의 이 문학작품은 단순한 아동문학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어린아이 올리버 트위스트로 대변되는 자연의 순수성과 도덕적 가치의 고귀함에 대한 환기이며, 이의 회복을 위한 자기반성을 상실한 사회와 인간 구성원들에 대한 비판이라 해야 할 것이다. 때 묻은 마음이 정화되는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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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믿음에 대한 가능성의 이야기가 아닐까? | 소설,시 2018-01-15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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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에레혼 EREWHON

새뮤얼 버틀러 저/한은경 역/이인식 해제
김영사 | 2018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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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here', 어디에도(없는)이라는 단어가 거꾸로 써진 ‘Erewhon(에레혼)’이란 이 소설은 146년 전, 18725월에 발표되었다. 19세기 중엽에 써진 케케묵은 이야기가 21세기 오늘 다시 소환되어 읽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계가 더욱 완벽하게 우리를 독재하지 못하게끔 우리에게 없어도 될 만큼 기계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P257)”하는 소설 속 문장이 지닌 오늘의 현실과의 유비(類比)때문일 것이다.

 

컴퓨터 혁명이 순수한 기계적 사건에서 생물학적 격변으로 바뀌고, 권한이 인간에게서 네트워크로 연결된 알고리즘에게로 이동(호모데우스P472)”하는 현실, 더 이상 인간 자신들의 욕망과 경험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위기의 예견과 닮아있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겐 이 영국인의 직관이 더욱 빛나게 와 닿은 것은 공동(共同)이 만들어내는 믿음의 허구성과 환상성이라 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사람들이 믿기로 하면 곧 의미가 되, 그 믿음이 자신들의 질서를 구축하고, 또 그 기반위에서 세계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양을 치는 목동인 화자(話者)가 새로운 땅과 황금을 찾아 아무도 넘어서지 못했던 아득한 산맥과 협곡을 넘어 찾아든 새로운 세계인 에레혼의 사람들이 지닌 도덕관과 세계관에 혼란을 느끼는 것은 다른 믿음, ‘유발 하라리의 말을 빌면, 그네들이 함께 짠 공동의 이야기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리라.

 

개인의 질병은 물론 불운(不運)조차 재판을 받고 구금되는 범죄가 되고, 출생하는 것은 태어 난 자()의 책임이며, 비이성이 찬양받는 세계를 오늘 우리들의 심상에 떠올리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소설의 거의 모든 지면은 이러한 기이한 질서가 삶을 지배하는 낯선 세계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이를테면 <에레혼의 재판>이라는 장에 등장하는 한 토막의 이야기인데, 아내를 막 잃은 남자에 대한 판사의 선고는 다음과 같다. “피고는 큰 상실을 경험했다. 자연은 이러한 범죄에 심각한 벌점을 부여하며, 인간의 법은 자연의 명령을 강조해야한다. 배심원의 권고가 아니었더라면 피고에게 6개월의 노역을 선고했겠으나 ....(中略)...감형한다.” 상실이라는 불운은 자연의 섭리에 비추어 볼 때 조야하고 반사회적이라는 믿음이 이들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같은 이야기를 믿는 한, 사람들은 똑같은 규칙을 따르고, 그 상상의 질서에 자신들 믿음의 토대를 구축한다는 이야기이다.

 

21세기 바로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질서, 도덕, 체제라는 것들 역시 이러한 이야기의 그물망에 기반한 것 아닌가? 이걸 거꾸로 새기면 사람들이 더 이상 믿지 않게 되면 가치가 증발해 버리고,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호모데우스에서 유발 하라리가 적시하는 돈, , 기업, 국가와 같이 상호주관적 실재라는 것들, 그 허구적 실체에 목매는 우리들을 에레혼 사람들이 보았을 때, 그들 역시 혼란스럽지 않겠는가?

 

우리의 믿음이란 것은 결국 우리네가 어떤 이야기를 직조해내느냐, 그리고 그것에 어떤 상상의 질서를 부여하려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환경에 놓여 질수 있는 것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아무런 의견을 갖지 않는 것은 물론,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태도는 학문과 훌륭한 교육의 완성으로 여겨졌다.”<비이성의 대학>의 우아하게 완벽한 중립의 태도를 접하게 될 때 실소(失笑)보다는 새뮤얼 버틀러의 이 해학(諧謔)적 묘사에서 극단의 순전한 부조리가 넘쳐나는 넌더리의 냄새를 맡게 되는 것은 왜일까?

 

에레혼의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이러한 가치중립적 태도는 오늘 우리네가 과학기술에 기대했던 동일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소설은 바로 여기에서 그들이 이러한 삶의 태도, 즉 이러한 믿음의 질서를 만들어 낸 동기가 소개되는데, 이 작품을 미래소설의 걸작으로 불리게 한 3개의 장으로 구성된 <기계의 책>이 그것이다. 기계파괴혁명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논리들인데, 분명 작가 새뮤얼 버틀러의 안광(眼光)이 돋보이는 부분이랄 수 있다.

 

기계에 구속된 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기계왕국의 발전에 평생을 헌신하는 이들도 늘어난 것을 감안 해 볼 때, 기계가 인간보다 우위를 점했다는 사실이 명백하지 않은가?(P259)” 이어서 기계는 인간의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이익을 훨씬 선호하는 경향을 착취하여...(後略)”, 그리곤 인간의 의식이 갑자기 충격을 받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소리 없이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살금살금 인간은 기계에 구속되고...(後略)”에서와 같이 오늘날 잠시도 디지털 네트워크에서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발산되는 스트레스 냄새의 유사성이다.

 

즉 에레혼은 기계파괴혁명 이후에 새롭게 만들어진 믿음의 세계인 것이다. 21세기 오늘, 우리들 역시 인간의 개별성이 내부에서 조용히 붕괴되는 소리를 듣고 있다. 자신들이 개발한 기술들이 성장하면서 그것이 인간이 한 번도 가 본적 없는 곳으로, 또는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으로 가는지에 대한 두려움도 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의 우리는 멈출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소설 에레혼의 낯선 도덕과 믿음들의 이야기는 더더욱 인간의 믿음이라는 이 허구적 실체, 그 환상을 다시 그려 낼 수는 없는 것인지를 생각게 한다. 21세기 인간들이 믿고 있는 도덕 과 법이라는 윤리와 질서의 기반이 된 인본주의의 신화, 그 이야기를 새로 짤 수는 없는 것인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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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우리가 망각한 사람들 | 나의 리뷰 2018-01-13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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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도서출판 은행나무의 문학지(文學誌) Axt 10(2017.1/2)부터 15(2017.11/12)까지, 6회에 걸쳐 게재된 작가 김 숨의 장편소설 떠도는 땅에 대한 리뷰입니다.)

 

 

월간, 격월간, 혹은 계간에 이르기까지 연재(連載)된 장편소설을 찾아 읽는 것은 내겐 손에 꼽는 극히 예외적인 독서 행위라 할 수 있다. 소설의 흐름이 단절된 상태를 다시 복원하여 기억을 되살려내야 하는 불편 때문이며, 이 과정 속에서 독서의 의지를 상실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랄 수 있다. 그럼에도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고 떠도는 이야기가 있어, 연결되기를 기다리게 되는 드문 경우가 발생하곤 한다. 아마 떠도는 땅의 화자(話者)들이 실려 있는 공간의 특수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소설은 아기가 태어날 땅, 그 땅이 어떤 땅일지 금실은 모른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 된다. 1937103, 스탈린의 강제이주 명령에 따라 어디로 가는지, 그것이 죽음의 처형장인지, 삶의 무대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가축운반용 열차에 실려 그저 끌려가는 여인과 그녀의 뱃속 아기, 그리고 미지의 땅에 대한 이야기임을.

 

팔다리를 접고 웅크린 사람들의 두루뭉술하게 뭉개진 윤곽으로 표현되는 조선인 무리로 그득한 열차안의 풍경, 그리고 뼈들이 구르고 구르는 동안 부서지고 마모되어서는, 마침내 열차가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가루가 될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며, 마치 이를 잊기라도 하려는 듯이 이들이 토해내는 고독과 그리움과 생존을 향한 처절한 삶의 투쟁에 대한 기억들과 소회들이 흐른다.

 

지주의, 일본의 개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한 그릇의 죽이라도 먹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버려진 이국의 땅을 찾아든 조선인들, 무리를 이끈 가장도, 그들의 손에 이끌려온 아이도, 그리고 그 척박한 곳에서 생을 시작한 이들까지, 그네들이 이루어낸 환경에서 무참히 내쫓겨 가축처럼 실려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열차 안에서 꾸려진다. 그것은 그네들의 사연과 기억이란 기록 속을 오가며 , 삶의 뿌리가 내려지는 곳, 그러나 이를 방해하는 편견과 의혹들이 인종적으로, 때론 민족주의에 실려, 그리고 이념과 영토와 국가라는 허구적 실재가 사람들을, 땅을 어떻게 갈라놓는지를 드러내 놓는다.

 

그런데 이들의 대화는 능숙하게 숙련된 지식인의 언어로서가 아니라 순박함과 귀동냥한 소박한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테면 아기도 살수 없는 그 어떤 곳으로 자신들을 이끄는 처참한 가축용 열차 칸에 태운 스탈린의 처사를 말하는 인물들의 면면이다. 유대인의 머리가 큰 것은 하도 머리를 쳐서라고 믿는 을녀, 오순, 백순, 공덕과 같은 사람들의 물음과 대답이 엮여 디아스포라(Diaspora)에 이르고, “뭔가 죄를 지었으니까 떠돌며 사는 거겠지에 도달한다.

 

소설에서는 그네들 자신에게 씌워진 죄의 굴레에 대한 인식의 대립이 인설일천이라는 두 인물에 의해 그려진다.

소련 내에 외국 스파이, 해충, 변절주의자....들로 가득하다....‘ 소련 정부가 조선인들을 탄압하기 위해 떠들어대던 말을 하고 싶은 거요?”

따지고 보면 반역자들 때문에 우리가 이 꼴을 당하는 거 아니겠소?”

누가 반역자인가요? 볼셰비키 혁명의 승리를 위해 싸운,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외치던 조선인이 반역자인가요?”

 

고난의 여정인 강제이주 열차는 이러한 담론들의 격전장이기만한 것은 아니다. 7개월 된 태아를 지닌 여인 금실인설에게 감도는 삶의 태동, 흐릿한 희망의 움, 그 잿빛 무대에서도 실낱같은 빛이 있다는 것이다. “금실의 눈길이 그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설을 향한다. 남편 근석에게는 느끼지 못했던 낯설고 미묘한 감정에 그녀는 어깨를 떤다.”

 

“103일 페르바야 레치카 역을 떠난 열차는 30여일이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구릉들과 갈대밭뿐인 버려진 땅. 다시 반복된다. “너희는 무슨 죄를 지어서 아무것도 없는 땅에 버려졌지?” “신조차 용서 못할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버려진 거야?”

나는 이런 것들을 떠올린다. 허구에 대한 믿음을 가진 죄,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믿은 죄,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 죄..., 아니 죄 없이 버려진 죄. 떠난 자들을 망각한 자들의 죄....

 

80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세대들은 무심히 하바롭스크로, 블라디보스톡으로, 또한 알마타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곤 예기치 않게 위령비와 곡창지대로, 화려한 도시로 변화된 그곳들을 거닐게 된다. 소설 속의 사람들, 우리가 잊어버린 그네들의 그리움과 외로움을 알지 못한 채. 땅에 대한 그 절박한 필요가 있었던 삶들에 대한 찬연(燦然)한 애가(哀歌)가 어찌 이제야 들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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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6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