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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세바스찬 그리고 가면의 고백 | 소설,시 2018-12-25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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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가면의 고백

미시마 유키오 저/양윤옥 역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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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장편소설 가면의 고백을 다시금 읽게 된 동기가 있다. 철봉에 매달린 동급생 오미(omi)의 상체에 대한 매혹을 바라보면서 화자인 가 떠 올리는 인상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귀도 레니(Guido Reni)’의 그림, 성 세바스찬(St. Sebastian)으로 비롯된 일종의 모방작인,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를 피사체로 하여 사진작가 시노야마 기신(篠山紀信)’이 촬영한 동명의 사진에 가해지는 논의들에 대한 어떤 확인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분히 키치(kitsch)적인 이 사진작품과 함께 사진작가 호소에 에이코(細江英公)’가 미시마 유키오를 피사체로 촬영, 1963년 간행된 나체 사진집 장미형(薔薇刑)은 여성의 나체와 달리 대상화를 거부하고 스스로가 주체화되며 우상화되려는 미시마의 의식을 해독하는 증거로 제시되곤 한다. 사진집의 표지는 피사체를 객체화하려는 사람의 시선을 제압하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하는 미시마의 사진으로 꾸며져 있는데, 바로 이 미시마의 시선에 내재된 의미의 독해가 그의 첫 장편소설인 가면의 고백이 진정 무엇을 말하려했는가에 대한 상보적(相補的) 재료가 되어 주리라는 생각에서이다

    

 

사진: 細江英公(호소에 이이코)撮影三島由紀夫를 피사체로 한 裸體集 表紙

      

미시마 유키오의 반()자전적 작품으로 읽히는 이 소설은 화자인 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불안, 이에 대한 자의식의 끝없는 정상화라는 자기기만과의 투쟁, 그리고 성적 자기실현에 이르는 시련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 그림을 처음 본 순간 나의 모든 존재는 모종의 이교도적인 환희로 뒤흔들렸다. 내 피는 끓어오르고 내 육체의 기관은 분노의 빛으로 넘실거렸다. ...(중략)... 나의 내부로부터 어둡고 번쩍거리는 것이 빠른 걸음으로 공격해 올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중략)... 아득한 도취와 함께 튀어올랐다.” (출처: 문학동네 가면의 고백P 48 에서)

 

화자의 아버지가 사온 화보집에 실린 귀도 레니의 그림, <성 세바스찬>을 보고 최초의 ejaculatio(射精)를 경험하는 묘사이다. 이것은 탄탄한 근육질의 어깨와 가슴을 지닌, 또한 금지의 반역자이기도 한 동급생 오미의 육체에 대한 성적 갈망과 분출에 연결되어 혼란스러운 그의 성적 정체성을 묘사한다. 자신과 같은 또래의 소년들과는 다른 자신의 발견인데, 결코 친구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기에, 그들의 호기심에 동참하지 못하는 자신을 은폐하기 위해, 남자아이가 혼자일 때 느끼는 것을 추리하기위해 수많은 소설들에 이야기되는 인생의 모습들을 세심하게 읽기까지 한다.

      

결국 내 관심사는 일견 미시마 유키오의 자전적 상()이기도 한 소설의 화자가 동성의 남자에게만 육체적 욕망을 지니는 자기이해로부터 시작된 외견적 연기와 내면의 기만과 저항, 그리고 수용의 반복을 거듭하며 세상의 윤리적 시선을 어떻게 포섭해 나가느냐는 문제이다. 아마 다음의 문장은 화자의 정체성 성숙의 중간 기착지, 그 경유의 지대로 적절할 것 같다.

 

“....(전략)...남의 눈에 나의 연기로 비치는 것이 나로서는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의 표현이었고, 남의 눈에 자연스러운 나로 비치는 것이 곧 나의 연기라는 메커니즘을 그 무렵부터 나는 희미하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즉 육체적 감각에 대한 불안, 완벽하게 자신의 천성을 배반하기 위한 의식적인 연기에 돌입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의 여동생인 소노코거짓된 육감의 인공적인 합금으로만 이루어진 감정으로만 바라보던 여자”, 즉 위장된 연기가 아니라 존재의 밑바닥이 뒤흔들리는 듯한 슬픔의 감정으로 느끼게 됨으로써 전환을 맞이한다.

 

그러나 이것조차 남성 고유의 정체성으로 향하려는 의지의 시작이라는 자기의식의 강요에 불과하다. 그의 침잠한 내면의 소리는 어떤 여자에게서도 비열한 욕망이라는 것을 품어 본적 없는 너 자신을 잊어버릴 셈인가? 소노코의 벗은 몸을 상상해 본 일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어?” 하고 묻는다. “애초에 육체적 욕망에 전혀 뿌리를 두지 않는 사랑 따위가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명백한 배리(背理)가 아닌가?” 가 답변일 것이다. 이제 소설의 서사적 진전은 잠시 미루고, 욕망과 금욕, 수난과 속죄, 고통과 황홀, 남성의 동일화와 여성의 동일화 사이에 존재하는 귀도 레니<성 세바스찬>이 지닌 성을 넘어선 도상학적 양의성에 반발, 강력하게 반시대적 남성성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미시마 유키오<성 세바스찬>을 얘기할 때가 된 것 같다.

 

미시마 유키오가 표현한 이 그림이 페미니즘으로부터의 이의신청을 받아야 하는 그야말로 순전한 마초이즘의 발산에 불과하며, 성적인 시각의 한 가지 편향을 뒷받침하는 그런 것이기만 할까하는 의문이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충분한 요소들과 증거가 있다. “성 세바스찬의 그림에 매혹당한 이래로 나는 벌거숭이가 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머리위에서 교차시켜보는 버릇이 생겼다. ...(중략)... 그러자 내 시선이 겨드랑이로 향했다. 불가해한 정욕이 솟구쳐 올랐다.” 가면의 고백에 등장하는 몽상의 문장이다. 평자들은 이 몽상을 몰래 엮어 넣은 것이 미시마가 표현하고 있는 <성 세바스찬>이며, 이것은 찍히는 대상이 우위를 확보한 대상화의 전도(顚倒)라고까지 한 장미형의 미시마와 함께 남근중심적 성의 문화사회적 왜곡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설의 화자가 하는 내적 의식과 행위는 생물학적이 아닌 사회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성()에 순응하려는 것이 아니다. 소노코의 청혼을 비겁하게 거절하고 나서 타인의 아내가 된 소노코와의 재회이후 재개되는 만남의 마지막 장면인 댄스장에서의 한 묘사를 보자. 앞에 앉아있는 소노코를 잊고 울룩불룩한 팔 근육의 젊은 남자에 시선이 빼앗겼던 화자가 마침내 두 사람의 재회가 끝나는 시간, 젊은 남자가 있었던 해가 들이치는 의자 쪽을 훔쳐보는 시선이다. 그는 최종적으로 젠더, 사회적 규정을 배반하는 것이다.

 

성적 시각의 편향을 고착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며, 성의 대상화를 남성인 자신의 나체를 통해 부인하려는 역설로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자신의 인공적 정상성이라는 인위적 연출이라는 위험한 작업에 소노코를 끌어들인 것을 자각, 성찰하는 것에서도 화자의 최후적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자신을 무익하고 정교한 하나의 역설이라고 인식했던 미시마의 시적 이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지 않을까? 다름의 자기 인정이 그토록 어려웠던 것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에 이른다. 타자의 피부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의 욕망을 과감하게 드러낸 배리(背理:역설)의 미학, 혹은 의지의 미학이라 부름이 타당치 않을까? 아니 육체와 인간의지의 치열한 투쟁의 그 공존과 균형을 향한 미학이라 하고 싶다. 오늘 우리들은 이해의 다름에 더욱 넓은 시선을 갖도록 요구되는 환경에 있다. 시간의 변화, 시대의 감각적, 지적 수용의 변화는 인식의 확장을 또한 요구한다동성애등 퀴어가 시대의 어휘가 된 요즘 다시 읽어볼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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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문화적 정치적 코드를 해독한다 | 인문,사회 2018-12-22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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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감각의 근대

쓰보이 히데토 저/박광현,손지연,신승모,장유리,이승준 공역
어문학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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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중에서 이 책의 목적은 감각을 통해서 사고나 언어의 의미를 다시 묻고 혹은 사고나 언어가 어떻게 감각이나 감성을 구축해왔는지를 물어, ‘근대화 과정속에서 감각의 문제가 어떤 정치적, 문화적 영향을 미쳤는지 고찰하는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즉 감각이 표현해내는 현상들과 감각관련 담론의 분석을 통해서 그것의 현재적인 문제성을 파악하여 개인과 공동체의 분열된 감각의 균형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저자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은 오늘 우리네 사회를 소셜 미디어, 인터넷의 가속도적인 보급으로 독서, 문자 문화의 쇠퇴와 감각편중의 세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부분적으로는 옳은 진단이지만 또 한편으론 옳지 않다. 네트워크 사회가 지니는 확산과 획일성으로 오히려 감각은 균질화되고, 통제되고 있다할 수 있으며, 개인과 개인의 접촉(오감에 의한) 감소로 인해 감각의 현재성을 상실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나아가 감각이 지식과 정보라는 정신세계에 떠밀려 열등한 것으로 폄훼되고 있다고까지 생각된다. 이처럼 실재적 감각의 상실은 혐오, 비혼, 혼밥과 같은 한국인의 삶을 대표하는 어휘가 상징하는 그것일 것이다. 즉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과 회피, 피곤함, 불안으로 타자성을 잃어버리는 삭막한 세상을 낳고 있지 않는가?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구에서 유입되는 새로운 색채와 물질, 정신세계는 메이지, 다이쇼 시대를 관통하며 일본이 근대화의 세례를 받던 시기이다. 책은 바로 이 시기의 문학과 예술의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그네들의 삶에 침입, 투영되었던 감각의 수용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래서 오늘 우리네 사회문화적, 정치적 이해를 반성적으로 사유하는 기반으로서의 의미 있는 검토 주제가 되어준다.

 

1. 자의식 없는 관찰자들의 세계

 

책은 <고양이의 관상학>이라는 제목으로 제 1장을 연다. 1905년에 집필되고 1907년에 발표된 나쓰메 소세키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화자인 고양이가 관찰한 상황의 추이를 실시간으로 고하는 사생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에, 즉 발화 능력을 갖지 못한 존재가 보고, 들은 것을 재현(쓰는)하는, 방관자로서의 고양이 시점으로 인해 지극히 정치적인 논의를 예견케 한다. 자아를 향한 물음, 자기 정체성을 지니지 못한 고양이, 자기 상실과 맞바꿔 타자를 식별하려는 시선과 그 정열에서 근대적 병리의 뿌리를 발견하는 저자의 해독은 오늘 우리네 메마른 지식의 오만함으로 젠체하는 몽매한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타자를 읽는 세련된 기술만 읽힌 자의식이 결락된, 또한 권력장치에 의한 시선 관리에만 능한 현대인의 초상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아마 당대 근대 일본인들은 감시하고 식별하는 관찰자의 시선, 외면이 내면을 규정하는 방관자적 이기주의에 능한 인간의 계발이라는 기술적이고 처세적인 경쟁에 몰입하고 있었다는 이해일 것이다. 또한 관찰이라는 시선의 일방통행성타자를 어떻게 볼까?”라는 비평만을 할 줄 아는 기형적인 인간을 양산했으니 이 역시 오늘의 우리네 지식인의 모습과 닮아있어 씁쓸한 입맛을 다시게 한다. 등장인물인 하네다 하나코를 묘사하는 고양이의 주절거림에 얽혀있는 골상학, 황금률, 악명 높았던 롬브로소의 범죄인 식별학과 같은 인종과 계층 차별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서구의 의사 과학이 시선의 계층성, 시각적 권력의 고착화를 자연화하고 갱신하는데 공헌하였음을 설명하는 장에서는 그야말로 음험한 지식의 기술적 사용의 이기성을 확인하는 수확을 얻게도 된다.

 

이 관찰자적 시선의 성찰은 제2장에서 계속되는데, 역시 나쓰메 소세키의 피안 지날 때까지의 화자이자 청자로 등장하기도하는 탐정 다가와 게이타로를 통해 범례적인 욕망의 메커니즘이 노골적으로 구상되고있는 그 공허함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자기목적화한 탐정행위의 속성인 훔쳐보기의 증상에서 혐오와 폭력의 역겨움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낯선 해독이 아닐 것이다. 탐정의 숨겨진 욕망에 대상이 되는 여성 지요코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소름이 돋는다. 한편 본 장의 <도시의 표정을 읽는다>는 절()에서 고찰하고 있는 이주민이 몰려드는 대도시 도쿄의 담론을 통해 전락하는 당대의 인간군상을 대면하는 것도 또다른 사유의 단초를 제시해 주기도 한다.

 

2. 타자를 상실한 나르시즘, 그리고 키치

 

잘 알려진 소설 묵동기담의 작가 나가이 가후가 도쿄 최대의 사창굴인 다마노이의 골목세계에 대한 추억의 변을 시작으로 하는 3<주니카이의 풍경>에 이르면, 1890년에 세워진 정식명칭 료운카쿠로 불리는 아사쿠사의 12(주니카이)짜리 도쿄내 최고층 건축물()과 그 아래의 난삽한 미궁세계가 어울려 빚어내는 근대 일본의 나르시즘과 거세될 수밖에 없었던 치부를 비춘다. “주니카이는 도쿄 명물인 기묘한 말뚝 버섯, 포경상태의 음경이라고 읊었던 가네코 마쓰하루의 시()처럼 꿈과 환영이 쌓아올린 빈약한 남근으로서의 근대 일본인의 시선, 그 욕망을 엿보게 한다. 자기를 상실한 세계의 음영을 바라보는 오늘의 내 시선이 교차하며, 서울의 저 높은 쾌락의 고도가 떠오른다.

 

, 이 책의 모든 장()을 얘기할 의도는 없다. 감각(感覺)의 표상으로서 내게 어떤 사유의 꿈틀거림을 제공했던 부분을 언급하려는 것뿐이다. 사실 시와 사진예술을 통해 노스탤지어를 이야기하는 4<향수의 시각>이나, 역시 잃어버린 근대 이전의 시대에 대한 향수를 말하는 5<산과 시네마>는 내게 동시대성의 담론을 발견해내는데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비로소 시각적 표상이 아닌 촉각을 탐색하는 6<손가락 끝의 시학>을 만나게 된다. 1917년 발표된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시()에서 발견되는 초점화된 촉각에 의한 관능과 위로의 모티브로부터 한 개인의 퍼스낼리티로 통합되지 못하고 페티시한 쾌락에 머물러 있는 단편화와 나르시스적 병성(病性)이라는 유동화의 도취감을 당대의 정신으로 읽어내는 부분은 꽤 강한 이미지로 남는다.

 

특히 발생학적으로 아포토시스(apotosis; 計劃細胞死)에 의해 손이 형성되는 생명과학이론으로부터 손가락 끝의 촉각이 자멸, 자기상실이라는 상실된 통증을 댓가로 예민함, 세계와 타자와의 접촉능력을 획득하고 있다는 발상은 접촉(touch)이라는 촉각이 타자와의 정서교감이라는 타자성의 시작이자 본질이 아닐까하는 심적 믿음까지 가져온다. 인간 피부의 인류학적 권위자인 애슐러 몬터규가 쓴 터칭(Touchng)건강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 초기 발달과정에서 꼭 겪어야 하는 촉각 경험이 떠오른다. 타자와의 소통은 물론, 평화와 화합을 유지하는 데 촉각행위의 경험을 강조하는 이 문장은 오늘 소외와 관계의 피로에 시달리는 우리네가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게 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회복되어야 할 촉각의 절대적 배려와 신뢰의 손길, 그 타자성의 지고함을 말이다.

 

가면의 고백을 쓴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피사체가 된 그의 나체 사진집인 장미형의 사진을 중심으로 촉각적 시각사디즘=마조히즘의 자상증후군에 시달리는 근대 일본인의 비틀린 초상을 독해하는 6<세바스찬의 피부>는 후각을 얘기하는 8장과 9장과 함께 이 책의 백미(白眉)중 백미라 하고 싶다. 더구나 다니자키 준이치로금색의 죽음(金色)과 함께 타자의 시선에 의해 소유, 객체화되지 않으려 하는 자기애적 기호와 마초적 남성성의 모순적 충돌을 통해 근대일본의 형이상학적 한계를 해독해내는 부분은 교양주의의 노예가 된 일본문화의 추악한 모방성의 질타로까지 이어진다. 물론 모조품의 근대, 키치(kitsch)로서의 근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예술창조 의지조차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대 일본에 넘쳐났던 빈 수레와 같은 졸부취미의 요란함은 역시 오늘의 한국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오랜 도상학적 규범이 축적된 귀도 레니가 그린 성 세바스찬의 순교를 모방한 미시마 유키오의 남근중심적 일탈의 사진은 거북한 웃음을 짓게 한다. 촉각, 통각적 세계가 추방된 일방통행적 섹슈얼리티의 강고한 요구를 보는 역겨움 그것일 것이다. 이와는 달리 1981년에 발표된 페미니스트 작가인 마쓰우라 리에코가 쓴 소설 세바스찬의 여주인공인 마조히스트 마키코를 통해 표현하는 그 거부는 지금의 미투와 더불어 신체에 성이 제한되어 살아가야하는 우리네의 타자 접촉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욕망과 동경의 아프리오리(a priori)한 자연법칙을 생각게 한다. 다른 성과 성차이를 배제한 미시마와 다니자키를 일신한 오늘의 믿음과 가치를 다시금 반추하게 된다.

 

3. 후각, 계급화, 젠더화 - 그 차별의 감각

 

책의 마지막장을 이루는 8<맡아지는 언어로>9<향기로운 텍스트>는 근대의 신체와 후각표상이라는 부제처럼 시각중심주의에서 주변부위로 밀려난 후각에 내재하는 굴절된 편견과 계층화와 같은 권력 기호의 기능으로 작동하게 되는 당대의 문화정치적 추이를 따라가며 사회적 시선의 확장을 위한 커다란 논의라 하겠다. 도시화가 급격하게 추진되면서 당대 도쿄의 악취는 사람들의 공통화제였던 모양이다. 이것은 곧 도시민의 감수성 및 모럴로 이전되고, 편견적 담론이 통속적으로 과학화되어 차별화, 계층화라는 후각의 정치학을 낳았다는 것이다.

 

결국 냄새가 위생이나 경제상의 부()의 가치를 짊어지게 됨으로써 후각이라는 감각 자체가 폄하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로써 냄새는 악취라는 공공감각이 되어 저급한 계급의 상징이 되고, 에로스적 감각을 일으키는 향수라는 인공적 향기는 개별 감각이 되어 상류계급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그런데 이 냄새가 세기말 퇴폐주의와 함께 낭만화 극화하는 요소로 변질되는 것에서 자연주의와 상징주의가 혼합되어 유입된 일본의 근대 문학과 예술 세계는 근대인의 감수성의 상징으로 반전시키는 퇴화 병리의 증후를 보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냄새가 사적인 관계나 나르시스적인 신체 영역에서 이탈하여 널리 공유되면 즉시 불쾌한 악취로 혐오의 대상이 되거나 계급을 분절하는 권력의 기호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간바라 아리아케라는 시인의 1905년에 발표된 자서(自序) 속 한 구절을 보면 당대 후각에 대한 양의성 논란, 즉 감각표상의 악전고취를 보게된다.

 

... (전략) ...

영혼의 향미(香味)를 느끼는 것은 악취를 맡는 관능이다.

후각을 비관(卑官)이라 칭함이란 절실한 관능의 힘을 모르는 자들이나 하는 말이리라.

 

더욱 흥미로운 논의는 색, 형태, 소리처럼 재현하거나 재생될 수 있는 감각과 달리 재수용되는 것이 불가능한 냄새를 기록하려는 시도이다. 기록의 영역이 아닌 기억의 영역인 냄새를 도식화려는 것, 냄새의 언어화에 대한 몽상에 짙게 드리운 에로스적 표상에의 편입을 통한 고상화는 꿈틀거리는 남성적 욕망의 굴절된 젠더의식의 비대칭성을 발견케 한다. 다시금 회귀한다. 냄새를 맡아서 구별하는 남자, 여자라는 향기로운 텍스트를 해독하는 남자, 포로노그라피의 무대를 발견한 것이다. 결국 냄새는 계층화, 성차별, 인종의 구별과 같은 위계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이해일 것이다. 이 두 개의 장은 후각에 대한 넘칠 듯 풍부한 담론과 문학작품의 인용으로 빼곡하다. 에밀 졸라의 나나, 파트릭 쥐스킨트의 향수에서부터 카를 위스망스의 거꾸로, 다무라 도시코의 여작가(女作家선혈(生血), 다자이 오사무의 여학생(女學生)에 이르기까지 냄새와 향기에 어린 문화적 해독의 다양함에서 인간과 그 사회의 정치적 욕망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책은 감각의 기원을 통한 탐색을 통해 인간과 그 사회가 감각을 어떻게 문화적, 사회정치적으로 수용하고 있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이를 통해 오늘,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인식하고 표출하는 감각의 지형을 되새겨보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무수하게 인용, 분석되는 소설과 시, 그리고 예술작품과 도시풍경의 산책을 제시하여 근대 문학에 대한 비교문학적 읽기와 문화비평서로서의 탐구 기틀도 마련해주고 있으니 가히 즐겁게 생각하는 독서가 되어줄 터이다. 내겐 읽는 동안 감각과 타자성의 회복과의 상호관련성에 대한 사유가 떠나지 않았다. 오늘의 우리네 사회가 감각편중이 아니라 감각 상실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다만, 촉각의 고유한 영역인 타자성의 고찰 없음에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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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욕, 얼마나 육체적인가! | 인문,사회 2018-12-19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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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육체와 예술

피터 부룩스 저/이봉지,한애경 공역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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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소설의 경우, 육체에 도달하려는 의도는 성공, 혹은 실패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산출되는 성취, 혹은 환멸의 이야기는 이야기의 중심 플롯이 된다.

이것은 바로 인생의 신비를 꿰뚫어 보려는 욕망의 구체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 피터 브룩스, 육체와 예술(2013, 문학과지성사) 에서

 

소설 작품을 읽을 때 표면에 나타난 이야기가 어떤 이면의 이야기, 즉 표면이 품고 있는 진짜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독서의 진실일지도 모른다. 홀로 내밀히 맛보는 즐거움, 뭔가 은밀한 것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달성하려 했던 앎의 욕망의 성취. 그럼에도 이 욕구는 만족할지 모르고 다른 소설 작품으로 향하게 한다. 결코 영원히 알 수 없는 앎의 세계, 좀처럼 멈춰지지 않는 소유에의 충동, 그 본질적으로 만족될 수 없는 파우스트적 시도를 지속하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하다보면 에로틱(Erotic)'이란 말과 유별나게 닮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육체를 욕망의 주체 및 대상으로 파악하려는 태도, 욕망과 관련하여 의미를 띠게 되는 육체에 대한 고찰, 그 본질인 성적이며 호기심 가득한 지식욕이 얼마나 육체적인 것인지 말이다.

 

롤랑 바르트상징적인 장()은 오직 하나의 물체로 채워져 있다. ....다름아닌 인간의 육체다.”라고 썼다. 또한 테리 이글턴육체는 정신의 전제 조건이며, 형이상학적 탐색이 궁극적으로 회귀하는 실체라고 했으며, ‘피터 브룩스육체는 의미생성의 장소이며, 이야기가 각인되는 장소가 되며, 동시에 그 자체가 하나의 기표, 서술적 플롯과 의미산출의 일차적 요소라고 하기까지 했다. 즉 육체는 모든 상징의 근원임과 동시에 궁극적인 종착점이란 뜻으로 읽힌다. 결국 인간의 지식애적 욕구란 육체를 알기 위해, 육체를 소유하기 위해 서술되는 이야기들의 알레고리, 바로 그 자체인 것처럼 여겨진다.

 

1. 지식애() = 내밀한 삶으로서의 육체

 

피터 브룩스의 육체와 예술에는 이러한 생각을 확증해 주듯 장 자크 루소고백록에 대한 문학사적 성격의 설명이 있는데 꽤나 흥미롭다. 고백록1권 첫 머리에 소개되는 자기 육체에 대한 고백인데, 열한 살 시절 자신의 교육을 담당하던 랑베르시 양이 벌로써 그의 엉덩이를 때린 사건이다. 그때 루소는 고통 중에, 심지어는 수치감 속에서도 일종의 관능적 쾌락을 느꼈으며 .... 두려움 보다는 차라리 욕망을 느꼈다.”는 고백이다. 이때부터 그의 육체에 에로틱한 기표가 새겨졌다는 것이다.

 

그리곤 이렇게 진술한다. 그 벌이 나의 전 생애에 걸쳐 내 취향과 욕망과 열정, 그리고 나 자신의 정체성까지 결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대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결국 그의 생의 이야기는 초기에 그의 육체에 새겨진 자국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육체에 새겨진 자국이라는 알레고리는 신 엘로이즈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에서 반복되는 알레고리로 꾸준히 등장한다고 한다. 이 자국은 욕망의 자국이 새겨진 육체다. 재현되지 못하던 육체가 자국을 통해서 언어의 영역, 글쓰기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브룩스는 주장한다. “글쓰기는 욕망과 그 대상의 재현 관계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아마 고백록은 인간 삶의 모든 문제는 육체가 자리 잡은 곳과 그 의미로 귀결된다는 점을 간파한, 그래서 자기 자신의 사적 생활 영역에 주목하고, 육체는 육체 이외의 장소에서 생성되지 못하는 의미 생성의 장소로서 파악한 인간 의식의 역사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한 저작임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이처럼 육체에 대한 고려가 이야기의 중심 주제가 되는 서사물들이 육체가 어떻게 의미를 갖게 되는가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야릇한 즐거움을 준다. 책을 읽는 것,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욕망은 육체에 대한 욕망과 무척이나 흡사하다는 점이다. 육체는 욕망 충족, 권력, 의미의 열쇠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상징적 체계의 본질에 다다르는 길을 열어주는 여정이 마치 육체에 대한 욕망에 접근하는 것과 동일한 다른 표현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2. 글쓰기 작업: 치명적 죄의 극복

 

육체에 글을 쓰는 문제의 이야기로서 1916년에 발표된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유형지에서는 문자 그대로 육체가 글을 새기는 공간이 되는 끔찍한 상황을 묘사한다. 루소의 작품이 가부장적 남성의 시선에 포획된 것이었다면 카프카의 소설은 육체에 메시지를 쓰려는 것에의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반()육체적이고, 남성적 시선의 전복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롭다.

 

상관에 복종하지 않은 한 군인의 처형에 초대된 탐험가의 이야기다. 아마 이야기의 핵심은 일벌백계의 관습을 항구적으로 존속시키려는 사형 집행기계에 관한 설명일 것이다. 기계가 작동되면 사형수의 몸에 내려진 선고의 문장(“상관들에게 경의를 표하라!”)이 거대하고 날카로운 바늘로 사형수의 몸에 12시간에 걸쳐 새겨지는 것이다. 탐험가는 사형 집행자인 장교에게 묻는다.

 

죄수가 자기 몸에 새겨지는 문장을 압니까?” , 장교의 대답은 그야말로 잔인한 무지로 가득 차 있다. “모릅니다. 죄수에게 말해봐야 소용없을 겁니다. 죄수는 몸으로 그 문장을 배울 겁니다.” 즉 죄수의 몸에 법률을 새기는 벌이 죄수를 내적으로 변화시키리라 기대하는 것으로, 장교는 부언한다. “정확히 여섯 시간 만에 얼마나 조용해졌습니까? 죄수의 눈 주위에서 깨달음이 시작되죠.” 죄수가 몸에 새겨진 상처를 통해 의미를 해독하는 데 여섯 시간이 필요하며, 그때 쯤 죄수는 피와 물이 흥건한 구덩이에 던져진다.

 

과연 죄수는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까에 대해 탐험가가 회의를 보이자, 장교는 직접 시범을 보이기 위해 기계에 정당해라!’라고 선고를 써 넣고 기계위에 서자 그 기계는 저절로 파괴되며 12시간이 아니라 바로 장교의 몸에 바늘이 꿰어지고 장교의 몸은 꼬챙이에 매달려 죽고 만다. 장교가 설명했듯이 새겨진 문자를 깨닫기는커녕 아무런 깨달음도 없이 그저 죽었을 뿐이다. 결코 정당하라!’는 문장은 써지지도 않으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육체가 법과 의미를 회복해주리라는 기대는 믿을 수 없는 잘못된 것이라는 작가의 전체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우화이리라.

 

즉 고통당하는 육체는 고문하는 권력을 만족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이며, 도덕적 타락의 상징일 것이다. 단지 육체를 문화의 산물로 만들려는, 육체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에 대한 경고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육체의 의미화에 대한 이런 냉혹하고 부정적인 시선처럼 아무런 깨달음도 주는 것이 없는 것일까?

 

육체에 대한 자국내기의 과정을 지배하는 것은 일련의 욕망들이다. 그것이 긍정성을 지니든, 부정적이든. 권력이 개인의 육체를 좌우하려 하는 것이든, 연인의 육체에 다가가려는 것이든, 육체를 소유하거나 합일하려는 갈망의 존재라는 측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즉 타자를 알려는 충동이다. 비록 오늘의 세계가 육체를 진부한 것으로 만들고 신비를 거의 벗겨내기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우리는 육체를 알지 못한다. 어찌 앎이 달성 될 수 있겠는가. 어찌 타자의 육체를 소유 할 수 있겠는가. 육체를 반복적으로 글쓰기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어쩌면 탈육체화가 이루어지는 어느 날 의미를 상실할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까지는 육체에 대한 욕망의 이야기는 인간의 앎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지속되지 않을까를 생각게 된다. 소설 읽기를 멈추지 못하는 내 무의식의 유혹은 이렇듯 앎을 향한 쾌락의 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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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로 읽는 한국인의 심상(心狀) | 인문,사회 2018-12-14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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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지금, 한국을 읽다

배영 저
아날로그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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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들어가는 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빅데이터를 통해 사회 구성원의 마음과 사회변화를 읽으려는 노력이다. 우리 사회와 구성원 개개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무엇을 선호하고, 공적 담론이나 여론의 향방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트위터 블로그등 SNS, 언론기사를 통해 의미를 추출해 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소개되고 있는 특정 현상을 상징하는 언어와 빈도높게 출현하는 연관어들 전반에 대한 소감은 우리들에게 엄청난 파편화와 개인화가 진행되고 있구나 하는 것이다. 타자성의 상실이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으며, 문제를 외부에서 찾으려하는 우리네와 우리사회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도 떠나지 않는다.

 

소개되고 있는 대표적인 주제어는 혐오갑질’, ‘비혼’, ‘불안’, ‘혼밥으로 사용되고 있는 언어들일 것이다. 이들 언어들은 대개 문제의 원인을 타자, 외부를 가리키고 있다. 내겐 아무런 문제가 없어, ‘아닌 쪽에 손가락질 하며 폄훼하고 비난하며 미움과 꺼림, 증오, 분노의 감정을 쏟아낸다.

 

2006년에서 2016년까지 10년간 한 일간지에 혐오관련 기사가 1639건이었다고 한다. 06~11년에는 주로 소각장, 납골당과 같은 혐오시설과 관련하여 등장하던 단어가 11~16년에는 소수자, 개똥녀, 여성, 동성애자, 외국인, 장애인과 같은 사람 혐오의 감정어로 변화했다고 한다. 혐오란 즐거움, 기쁨, 슬픔, 아픔과 같이 나를 중심으로 발생하는 감정이 아니라 타자화된 대상을 필요로 하는 감정이라고 한다. 타자에 대한 부정적 대상화가 급증하는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갑질기사가 2013년부터 우리 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했다는데, 이러한 행위가 새삼스럽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 대한 평등성과 정의감 성숙, SNS와 같은 매체의 다양성 증가가 수면아래에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타자성에 묘한 충돌이 엿보인다. 약자, 소수자인 타자에 대한 연민이라는 감정과 타자의 물질화, 대상화라는 감정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대한항공 땅콩회항사건부터 백화점 모녀의 주차관리원(경비원) 무릎 꿇린 사건, 공관병 부당노동 강요사건 등 한동안 미디어의 중심을 차지하던 갑질 사건들에서 우리 모두는 공모자라는 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를 생각게 된다. 더구나 핵심 연관어가 부인’ (장성부인, 회장 부인, 국회의원 부인...)이라는 점이나, 피해자가 운전기사, 경비원, 가맹점원(편의점 등)이라는 것도 오늘 우리네의 가치관을 점령하고 있는 의식을 반추해볼 대목이다.

 

    

 

 

비혼은 우리네 사회 전반의 미래를 우울하게 하는 언어다. ‘미혼이 아니고 비혼이란다. 자발적 결혼 포기, 혹은 지향하는 삶의 기준이 변화했음을 알리는 신조어다. 빈도가 높은 주요 연관어가 여성인 것은 어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곤 행복, 반려동물, 저출산이 뒤를 잇는 언어인 것은 곤혹감을 느끼게 한다. 2014년에서 2017년 사이 산부인과는 3.7% 줄고, 동물병원은 13.8% 늘어났다고 한다. 또한 10년 만에 년간 혼인건수는 33만 건에서 28만 건으로 감소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결혼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우리의 사회 구조적 - 경제적 여건, 사회적 진출, 임신과 양육의 불안한 환경 등과 같은 - 강압이 작동한다.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보다는 자신의 삶을 중시하겠다는 여성의 변화된 가치관이 긍정적이라거나 부정적이라는 판단에 앞서 타자와 함께하는 그 정서적 교환의 고귀한 가치를 언젠가부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되는 것은 왜일까? 인간과의 접촉을 반려동물로 대체하는 우리들과 우리사회에 대해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누구나 관계에 대한 부담과 그 피로를 크게 느끼고 있다. 어쩌면 타자를 대상화하는 학습에 훈련된 우리들이기에 타자에 대한 저항이 더욱 커진 것은 아닐까? 밟고 서야할 대상, 경쟁에서 이겨야 할 대상, 내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대상으로만 가르쳐온 기성세대들, 기득권자들이 종용한 결과가 이토록 피폐한 인간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하고 건강하게 나이듦을 결정하는 것은 지적 능력이나 경제적 계급이 아니라 사회적 인간관계다.”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인간관계란 바로 상실해가는 타자성(otherness)의 증식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혼밥도 이와 다르지 않은 맥락의 언어로 보인다. 나홀로족, 혹은 자발적 아웃사이더(아싸)로 불리는 이 조어도 관계의 피로에 연유하는 것일 게다. SNS상에서도 금요일과 토요일, 즉 사회생활의 피로감에서 벗어나는 주말에 빈도 높게 등장한다고 한다. 인간관계, 타자와의 관계가 이토록 고통스런 사회라는 것은 그것이 과연 인간 개인의 내재적 문제인지, 사회적, 외부적 문제인지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 만 같다. 유아시절부터 습관화시키는 타자에 대한 이해의 바로잡음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따뜻한 정감과 배려의 대상으로서 말이다.

 

책이 소개하는 주제어가 물론 이들만은 아니다. ‘적폐에서 출산’, ‘추석과 설’, ‘가짜뉴스’, ‘더위에 이르기까지 우리네 사회의 일상적 모습을 담고 있는 무수한 단어들이 열거, 추적되고 있다. 그런데 빅데이터로 활용된 SNS상의 언어, 정보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요구하는 온라인상의 정보 확산은 시선을 끈다. 그 첫 예는 더위와 관련하여 전기요금 누진제부과에 대한 문제제기와 제도변화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인데, 더위가 언급되고 관련 트위터 게시물이 증가한다고 한다. 그리곤 관련 기사량이 증가하고 누진제 관련 언론 기사가 등장하고, 트위터에 리트윗되면 정보 공유가 확산되어 사회적 이슈가 생성되기 시작하며, 이어 근거가 되는 사회적 인물이나 사건을 발판으로 여론 형성의 단계와 공감 채널이 증가한다. 이로인한 학습효과증대로 인해 제도변화 요구가 시작된다고 한다. SNS의 긍정적 정보 확산의 예이다.

 

반면에 이처럼 전파와 확산이 빠르고 쉽다는 SNS의 특성이 악용되는 부정적 파급도 있다. 가짜뉴스가 그것인데 민감한 사회 이슈에 대한 기사 형태의 거짓, 왜곡 정보의 생산, 유포를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개인과 집단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사회적 동조현상이랄 수 있는 타인의 생각과 판단에 의존하려는 사회적 폭포효과,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더욱 편향된 정보를 심화시켜 자신들만의 기존 신념을 강화시켜 사회갈등을 극단화시킨다는 집단극화현상이 있다. 다수의 무비판적 공유와 소비는 사회적 건강성을 심각하게 파괴한다.

 

빅데이터를 통한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현상을 성찰한 이 책이 오늘 우리네의 지금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자각, 숙고하며 변화를 추진해야 하는지 그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와 우리네의 사유와 행위의 시간은 어디쯤에 있을까라는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는데 맞춤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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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늙지 않는, 퇴색하지 않는 기억이 되어 줄 인생 소설 | 소설,시 2018-12-1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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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태엽 감는 새 연대기

무라카미 하루키 저/김난주 역
민음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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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책을 받아들고 들뜬 마음으로 책장을 열어본 기억이 새로울만큼 반가운 작품이다. 근작(近作)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으며 내내 먼저 읽어보았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남아있었기에 한권에 묶여 새롭게 출간되자 냉큼 구입했다. 구덩이와 메마른 우물, 아내의 사라짐, 난징학살과 노몬한 전투와 같은 두 작품 여러 소재의 상징적 유사성을 살펴보고자하는 욕구 때문이랄 수 있다. 현실에 발을 단단히 딛고 있음에도 몽환적인 세계를 넘나들며 삶의 내면 저 밑바닥에 침잠해있는 어떤 진실을 모색케하는 솜씨는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는 듯하다.

 

매일 아침 나무 위에서 끼이이익 하며 이 세상의 태엽을 감는 새, 출구 없는 골목과 방치되어 퇴락한 빈 집 마당의 날지 못하는 새의 조상(彫像), 깊디 깊은 물 없는 우물이 자신의 이미지 없음을 중얼 거리는 실직한 서른 살 남자의 왠지모를 무력(無力)과 무념(無念), 삶의 시간이 진행되지 못하고 멈춰버린 듯한 낯선 세계와 겹치면서 은폐되어 있는 길고 긴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아내 구미코와 같이 기르던 그녀의 오빠 이름을 붙인 사라진 고양이 와타야 노보루를 찾아 나서는 오카다 도오루’ , 그리곤 우연히 마주하는 이웃의 열여섯 소녀 가사하라 메이, 물의 흐름을 말하며 몸의 조성이라는 기묘한 예언을 하는 가노 마르타, 크레타 자매, 인간을 밟고 서야 정상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신념 속에 성장한 에고이스트 와타야 노보루,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인의 관능적 전화, 중일 전쟁과 외몽골 접경 노몬한 전투의 생존자인 마미야 중위에 이르기까지 도둑 까치라는 표제의 1부는 거대한 서사의 시작을 알리는 다채로운 인물들을 통해 그만큼의 삶의 이야기들이 펼쳐질 것을 예견케 한다.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는 인생에 길들면, 끝내는 자신이 뭘 하는지 그것조차 모르게 된다.”는 오카다의 자조(自照)는 서른 살이고, 걸음을 멈췄으며, 자기 이미지도 잃어버린 남자가 찾아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려는 여정일 것임을 짐작케 한다.

귀 밑에 시원한 향취의 낯선 향수 내음을 발산하는 아내의 원피스 지퍼를 올려주었던 날 아내는 직장에서 돌아오지 않고 이내 사라져버리고, 결혼 후 어떤 대화도 없던 처남으로부터 이혼의 권유를 받기까지 한다.

 

남자는 아내의 가출 이유를 알지 못한다. 2예언 하는 새는 그래서 텅 빈껍데기 같은 인생, 죽은 것처럼 멈춘 삶, 정지되어 버린 듯한 삶의 흐름을 재개할 수 있는, 살아가야 할 진정의 의미를 찾는 행로가 된다. “인생이라는 행위 속에 빛이 비추는 것은 한정된 아주 짧은 기간뿐입니다. 어쩌면 불과 10여초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그 시간이 지나버리고 나면, 그리고 그 빛이 보여주는 계시를 포착하지 못하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라는 인생의 조언은 남자를 메마른 우물로 향하게 한다.

 

나무에 줄사다리를 풀리지 않게 묶고 어두운 심연의 바닥으로 내려간다. 반쯤 남은 우물 뚜껑 밖으로 비치는 반달의 형태를 올려보며. 도오루는 진정 찰라의 빛 속에서 삶의 이미지를 발견 할 수 있을까? 3새잡이 사내에 이르면 전희(前戲)처럼 가사하라 메이의 발칙한 행위가 소설적 긴장으로 이끈다. 비로소 로시니의 오페라 도둑까치》와의 조우는 긴박한 진실과 의미의 굶주림으로 인도한다. 아마 많은 이들에게 인생 소설로 남겨질지도 모르겠다. “절대 늙지 않는, 결코 퇴색하지 않는 기억이 되어줄 작품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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