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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읽으며(1) | 나의 리뷰 2019-12-31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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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3:40 ~ 04:30


2) 처음 ~ P 127


3) 총 856쪽의 단권으로 2018년 10월25일 1판 4쇄로 출간된 故 박지리 작가의 장편 소설, 『다윈영의 악의 기원』에 대한 감상이다. 여러 형태의 분권, 합본, 특별판 등으로 출간된 까닭에 판본의 형태와 출간년도를 밝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 기록으로 남겨둔다.





작품 배경은 사회 계급에 따라 거주지구의 등급이 나뉘어진 세계인 것 같다. 1,2,3 상위 세 지구의 출신에게만 입학시험 자격이 주어지는, 그나마 2.3등급은 형식적 배려에 불과한 듯하며, 매년 5만명 대상자중 단 2백명만 선발하는 최고의 엘리트 학교인 '프라임 스쿨'의 권위와 전통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소설의 표제에 있는 '다윈 영'은 이 학교를 다니는 열여섯 살 남자아이의 이름이다. 문교부 차관인 그의 아버지,  '니스 영'은 매년 30년 전에 죽은 친구의 추모식을 기린다. 작품의 초반부인 지금까지는 성실함과 명예를 지키려 하며, 타자에 대한 편견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청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이 짧은 여정에 눈 밝은 이들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도처에서 내쉬는 깊은 사유의 숨을 느낄 수 있다. 하늘을 바라보며 상상할 줄 알며, 죽음의 존중에서 삶의 존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읽을 줄 알게 한다.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고 생각해?"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모두가 가지고 있진 않을거야."

"그럼 어떤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    - P 47中에서


추모식의 대상인 아버지 친구의 조카인 동갑내기 소녀 루미와의 대화 내용중 한 단락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겐 영혼 같은 것은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기에 ...


다윈 영이란 캐릭터는 애정을 듬뿍 쏟아내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게하는 그런 인물처럼 보인다.  학업 성취를 위한 과정에서 오는 자괴감으로 괴로울 때 프라임스쿨을 둘러싼 오솔길을 걸으며 자연, 모든 존재가 자신의 운명을 다하고 있다는 믿음에 이르는 깨달음과 같은 정신적 포용력과 사유의 깊이는 독자에게 의도적으로라도 빠져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제 소년은 폐쇄된 공간인 최상위의 기숙학교와 최상위 계급의 경직된 존재들이 모여있는 곳이 아닌 다른 세계, 다른 가치의 존재에 대한 바다로 뛰어들려 한다. 아주 자연스러운 인생의 발걸음 속에서...


4) 예견하지 못한 느낌의 글에 빠져들고 있다. 문장에 지극히 자연스럽게 내재된 무한한 삶의 깊이를 살피는 사유가 절로 마음에 스며들게 하는 그런 글들이다. 여기서 어떻게  '악의 기원'이 출현할지 도저히 상상을 할 수 없기에 더욱 책 장 넘기는 것이 아깝다.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은 그럼에도 소모나 게으름이 아닌 그런 작품이다. 이 작가의 새로운 작품을 더는 읽을 수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눈 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다.... 



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저
사계절 | 2016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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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 파괴된 환경 명세서? | 인문,사회 2019-12-26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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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클라이브 폰팅의 녹색 세계사

클라이브 폰팅 저/이진아,김정민 역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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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체계인 지구에서 쓰레기를 버린다는 말은

쓰레기를 어딘가에 둔다는 의미이다.” - P 498에서

 

 

생태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 행사와 그 생태계가 인간에 영향을 끼친 응징적 순환의 역사를 읽게 된다. 12천 년 전 대륙과 섬의 모든 곳에 현명한 자라는 자화자찬의 이름이 주어진 호모사피엔스의 발걸음이 미쳤을 때부터 21세기 초에 이르는 장구한 시간, 지구라는 이 닫힌 생태계에서 벌어진 적나라한 빅히스토리. 지구의 공전과 자전축의 기울기, 지각판의 이동, 태양에너지, 토양, 해양, 동물과 식물, 대기, 인간의 역사를 통일적으로 조망하며, 그 이해를 바탕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귀환 불가능점을 넘어서는 파멸이 아닌 지속 가능한 생태계로서의 전()지구적 과제를 숙고키 위한 제언이기도 하다.

 

통찰력이 부족해 문제를 키워서 모든 사람이 문제를 인식하기에 이른다면

이미 해결할 방법은 없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이 책의 판본인 2007년 개정판 서문에서 저자 재앙(災殃)적 환경파괴로 인한 공멸의 불가역(不可逆)적 행로를 치닫는 인류를 향해 마키아벨리군주론에서 인용한 한 구절이다. 인류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10여 년 전의 이 경고 메시지를 마치 아무런 충격을 받은 적 없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대하기에는 이미 문제에 대한 인식의 범위에 우리는 너무 깊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저자는 지구상의 생명을 지탱하는 전체시스템에 영향을 주는 중대한 두 종류의 오염으로 오존층 파괴지구 온난화를 지목하고 있다. 이 문제 제기는 새삼스럽다고 느껴질 만큼 익숙한 목소리다. 1896년 스웨덴 과학자 스반테 아레니우스가 당시 화석연료 사용의 급격한 증가로 지구 기온 상승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1980년대 말 과학계의 우려 섞인 문제인식과 함께 비로소 ‘UN 기후변동에 관한 정부간 패널IPCC가 설립되었다.

 

이 목소리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편입되었다는 어렴풋한 동의의 움직임이 있기까지 대략 1세기가 걸렸다는 뜻이다. 이로부터 다시금 30여년이 지났으나 생태계 파괴의 속도는 더욱 가속화 되고 있을 뿐, 지난 두 세기 동안 대기 오염 주요 배출 5개국(미국, 영국, 일본, 독일, 구소련)의 선두자인 미국은 아예 대놓고 아무런 행동도 못하겠다고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태도는 개발업자들의 이익은 멸종 위기 동물들보다 중시되어야 한다.”(P 252) 야생동물과 국립공원 책임자인 미국 내무차관이었던 크레이그 맨슨의 노골적인 언사에도 그대로 표출되고 있다. 지구는 닫힌 생태계이다. 이는 먹이사슬로 연결된 촘촘한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그 사슬의 무엇 하나가 사라질 때마다 전체 시스템에 교란, 나아가 돌이킬 수 없는 파괴가 발생하는 체계이며, 그 파괴에서 어디론가 도망 갈 곳이 없는 폐쇄된 체계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닫힌 생태계의 환경적 엄중함을 시사하는 이스터섬의 교훈으로 책의 1장을 여는 것은 어쩌면 인류를 향한 저자의 충격 요법인지도 모르겠다.

 

 

1. 명멸했던 문명들

 

사라진 문명, 비밀 종교의 역사와 같은 신비 그득한 제목을 달고 흥미롭게 대중의 시선을 끌곤 했던 남태평양 폴리네시아의 작은 섬 이스터(Easter Island)거대한 석상 모아이(moai)를 인간의 압력을 버텨내지 못한 환경과 더불어 몰락해버린 어떤 파국적 상징물로서 보게 된다. 극도로 제한된 자원은 씨족 간의 끊임없는 싸움을 야기하고 수십 톤씩 나가는 돌을 경쟁적으로 운반하기 위한 레일로 삼림은 한 그루의 나무도 남지 않을 때까지 남벌된다. 그 사회는 무너진 환경과 더불어 몰락해버렸다. 메마른 식수원, 나무 한그루 없어 섬을 빠져나갈 배 한 척 만들 수 없었던 이 닫힌 공간과 함께 한 때 번성했던 이들은 그 자취를 감추었다. 이 소박한 교훈이 오늘의 인류에게 아무것도 말하는 것이 없다면 어쩌면 우리에겐 미래가 없다는 의미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생태계 파괴를 통해 자멸한 문명의 역사들이 빼곡하게 서술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 불리는 고대 수메르의 도시들, 거대한 곡창이었다던 우르는 이제 인적 없는 황무지 사막이다. 인간이 자연 환경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변화시켰던 지역이 메소포타미아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정주 농경생활을 시작한 이들의 대규모 삼림파괴, 관개시설로 인한 자멸적 재앙의 초래는 기원전 2000년 무렵, 토양이 하얘졌다.”라는 급격한 염화를 기술한 그네들의 기록처럼 환경은 그들을 역사에서 퇴장시켜버렸다.

 

또한 거대한 문명을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한 가장 뚜렷한 예로서 마야 문명은 열대우림지역이라는 생태기반이 취약한 지역에서의 집약적인 삼림파괴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하는지에 대한 가혹하지만 명료한 반면교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문명에서부터 고대 사회들, 그리고 중세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를 생태계 파괴에 대한 역사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만큼 그 증거들을 거론하는 것은 숨이 찰 정도이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멸종한 동물들, 사라진 삼림의 면적, 고갈된 해양자원들의 명세서라 해도 무방할 것만 같다.

 

 

2. 인류 역사의 대전환

 

인류 역사의 대전환이라는 이 웅대한 표현은 사실 전혀 긍정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 못하다. 지구 환경을 전혀 다른 속도와 방법으로 유린하는, 그래서 생태계 일원으로서의 인간 종의 자멸을 가속화시키는 부정적 언어의 다름 아니다.

인류가 정주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한 것이 인류역사의 첫 번째 대전환이었음은 이젠 대중적 상식처럼 되어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대전환기라 할 수 있는 화석연료를 사용하기 시작하는 18세기 근대산업사회로의 이전에 이르기까지 지구 전역에 가해진 광범위한 토양의 침식은 아시아, 아프리카지역 등까지 서구의 식량생산 기지화로 인한 지구 황폐화 확산의 역사라 할 것이다.

 

영국의 아프리카 점령 수장이었던 세실 로즈(Cecil Rhodes)'의 다음과 같은 연설기록은 환경 파괴의 이중적 양상을 보여주는 인간 행동 양식의 전형적인 보기가 되어 줄 것 같다.

 

우리는 원료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새 땅을 발견해야 하며, 동시에 식민지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야 한다. 식민지들은 또한 우리의 공장에서 잉여 생산된

쓰레기 처리장이 되어 줄 것이다.” (P 295)

 

서구의 식단을 채우기 위한 획일화된 농산물 생산 용도의 대규모 삼림 파괴를 수반하는 농장의 개간, 그리고 그들의 오염된 공장 폐기물을 적치함으로써 거듭 손상되는 현상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 이러한 모습은 20세기에도 자국 숲을 보호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의 처녀림을 남벌하였던 일본의 행태에서도, 필리핀의 삼림 벌목으로 그네들의 처녀림을 단번에 50%, 그리고 21세기 초 원시림의 3%만 잔존하게 했던 미국의 행동이 국가간 불평등의 역사와 함께 나란히 환경 파괴 역사의 그늘을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역사적 양상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오늘날 세계의 환경문제는 1500년 이후에 형성된 세계 경제가 지닌 특성의 맥락을 고려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서구의 동진, 즉 식민지 수탈로부터 지구 환경 파괴가 본격화되었음에 대한 역사적 통찰의 시선이다. 여기에 화석연료의 사용을 동반하는 산업사회로의 이전은 21세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실로 가공할 급격한 파괴로 치닫고 있음을 열거하고 있다. 인류 역사의 두 번째 대전환이다.

 

정말 아이러니한 현상이라 보여 진다. 화석연료의 최초 사용이 1807 영국 맨체스터와 미국 로드아일랜드 면방직 공장에서 공장가동 시간을 연장, 즉 노동 착취를 위한 수단으로 석탄가스를 사용함으로써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인간 노예화와 환경 착취의 현상이 이렇게 나란히 역사를 쓰게 되는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초기 문명에서 나타나는 거대한 제례, 지도자의 숭배를 위한 강제노역과 노예의 동원은 피라미드 건설, 이스터의 거석 상, 플랜테이션 농장을 위한 노예무역과 같이 대규모 환경파괴와 함께 병행한다. 인간 불평등의 역사와 생태계의 파괴는 어째 그 발원지가 같은 것 아닌가하는 의문조차 머리를 치켜든다.

 




18세기에 이르는 환경 파괴의 역사가 생태계에 대한 인간의 국지적 지배력 행사에 머물렀다면 19세기에서 20세기 초의 지난 200년간은 전지구적, 전방위적 파괴로 인한 환경의 근본적 손상에 이르렀음을, 그 심각성이 지구 환경이 버텨낼 수 있는 한계에 이르렀음을 확인하는 역사의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대량 소비사회의 대두는 과시적 소비 조장의 압력이라는 표현의 서로 다른 관점에 불과할 것이다. 자동차의 폭증은 교통 인프라의 구축을 수반하고, 이는 사회적 비용의 증가와 환경파괴를 요구한다. 터널, 교량, 고속도로, 주차장 등등, 그리고 원자재의 채굴, 농지와 임야의 개발, 강과 해양의 오염, 배출가스의 대기오염, 생명체의 호흡 등 건강의 위협 등 단 하나의 생산물이 야기하는 생태계에 미치는 그 파급적 위력은 지구의 이전 역사에서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3. 결어(인류는 지속 가능한 생태계로 전환 할 수 있는가?)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 게다가 인구밀집의 도시사회인 오늘, 우리의 시선이 미처 다가서지 못한 무수한 원인(原因)처에서 생태계의 불가역적 파괴가 진행되고 있다. 최근 30년간 705건에 달하는 해양 원유누출, 멕시코만 유전개발에서 벌어지는 60만 톤에 이르는 석유누출, 가난한 나라로 투기되는 독성 폐기물의 무역으로 인한 오염물질의 방치, 우라늄 농축과정에 소모되는 엄청난 에너지와 고준위 핵폐기물 저장이라는 난제를 지닌 핵오염, 교통오염, 축산농업에서 야기되는 배기가스 등 온실기체의 한계 없는 배출은 지구궤도의 장기변동과 함께하는 밀로비치 효과와 어울려 닫힌 생태계인 지구를 되돌릴 수 없는 파국으로 내몰고 있다.

 

지구 환경문제의 가장 심각한, 그 해결 방법이 강구되어야만 하는 난제의 으뜸은 지구온난화라 지적하고 있다. 온난화의 책임은 선진국, 특히 미,,,,러로 대표되는 지난 2세기 동안 그들의 산업화로 인한 혜택을 독점해 온 국가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야 함을 그간의 배출 가스 통계에 의거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산업화에 들어선 중국, 인도, 브라질 3개국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구미 선진 여러 나라들의 노력을 무위로 돌릴 정도로 급격한 증가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해결책이 있는 것인가? 저자는 이를 해결하는 것은 극도로 어려울 것이다.”라고, 인간 사회가 지난 1만년 동안 행동해 온 방식 속에 뿌리 깊게 잡은 어떤 이유 때문”(P 577)이라고 맺고 있다. 그 어떤 이유란 무엇인가? 인간 욕망, 자기 편익 앞에서는 인류애, 양심이라는 것은 종적을 감추는 이기심인가? 더구나 지구 환경이라는 추상적 기호로 대체되어 표현되는 대기와 해양, 이를테면 무주공산처럼 느껴지는 접근성 개방 체제의 자원일 경우 마구잡이로 수탈하려는 그 경향성 탓인가?

 

위기를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시점에서는 이미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변화를 추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음”(P 611)을 줄줄이 역사의 증거로 서술한 저자의 결론치고는 사실 무참함을 느끼게 된다. 대재앙으로 잔존한 인간들의 미래사회를 그린 '도선우' 작가의 소설 모조사회의 문장이 떠오른다. 인간은 변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지구는 회복될 수 없었다.” 이 비관적인 웅얼거림 이외에는 우리가 할 행동이란 없다는 얘기인가? 오늘 우리들이 하는 이 엄청난 소비의 생활방식이 과연 언제까지 고수될 수 있는 것인지, 우리에겐 이스터섬의 운명을 회피 할 수 있는 그런 지혜, 아니 자기반성의 실천이 불가능한 종이란 것인가? 역사의 교훈에 매달려 인식의 전환에 호소하는 것처럼 이해되는 것은 환경이라는 토대위에 통합적 역사를 기술했다는 '빅히스토리'로서의 귀중한 가치를 지닌 역작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아쉬움, 미흡함을 떨쳐내기 쉽지 않은 여운을 남게 한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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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특별한 눈 (2) | 나의 리뷰 2019-12-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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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3:30 ~ 04:20

2) P 59 ~ P 129

3) '상품'의 신비롭고 음흉한 진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 부르게 되는 시대의 시작은 '추상노동', 즉 "평범한 인간이 평균적으로 지니고 있는 단순 노동력, '단순한 평균적 노동'"이라는 인식이 가능함으로써 가치의 실체가 규명되는 시기일 것이다.  대중화, 산업화에 따른 인간노동력의 보편화가 시작되는 시기에 이름으로써 새롭고, 특정한 인간학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가 출생하는 것이라 하겠다.


출처 : 『마르크스의 특별한 눈』 본문 P 61 부분 발췌


『자본』을 한 번쯤 펼쳐본 이들은 제1장 3절의 화폐를 이야기하는 「가치형태 및 교환가치」부분에서 '데이비드 하비'가 말한 것처럼 그 지루함이 야기하는 짜증으로 책장을 덮어버렸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진척이 잘 안되는 곳이다. 모든 '가치 형태'의 비밀을 밝히는 가치형태에서 표현되는 등식 때문인데, 한 상품의 가치가 어떻게 다른 상품과의 관계로 표현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통해 "화폐란 일반화된 등가형태에 불과"함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진실은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속성을 여실히 입증한다. 그 어떤 상품이 되었든 '일반등가물'이 될 수 있다. 여러 상품이 어떤 특정 상품으로 표상될 수 있게 하는 그 어떤 상품을 일반등가물이라 한다. 이때 고약스런 상황이 발생하는데, 이를테면 이것이 '표상권력'이라 부르는 것이 되어 "대표가 표현해주지 않으면 내게는 의사가 있어도 없는것처럼 되고 마는", 그런 양상이 전개된다. 동일한 가치 척도로 상호 가치를 표시해주던 관계에서 주종의 관계로 변질되는 것인데, 일반적 가치형태는 상품에게 "상품으로 인정받으려면 순응할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하에서의 상품에는 이처럼 복종과 순응의 강요라는 폭력성이 내재한다. 상품이 된다는 것은 복종의 세계, 예속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팔기 위해서는 이와같이 순응자, 예속자가 됨으로써 상품화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이러한 일반등가물의 지위를 화폐, 돈이 차지하고 있으니,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돈에 복종하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된다. 사실 『자본』 제 1권의 30쪽 남짓에 불과한 분량이지만 자본주의 세계에 거대한 파장을 미치는 개념들을 담고 있는 그야말로 중차대한 논리가 빼곡한 부분이다. 어눌한 내 표현이 어찌 아침의 단상에 감히 모두 담아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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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특별한 눈

<고병권> 저
천년의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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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특별한 눈(1) | 나의 리뷰 2019-12-21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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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4:10 ~ 05:00

 

2) P 3 ~ P 57

 

3) '유령' 이야기


자본11장은 '상품'에 대한 개념 정립에서 시작된다, '다시 자본을 읽자' 시리즈 2권인 이 책의 내용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가장 단순한 형태, 즉 경제적 세포로서 '상품', 상품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이 순서라 본 것이고, 어쩌면 책자본을 읽고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관문인 것 같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부가 상품더미로 나타나고 

그 부의 기본 형태는 상품이기에 이것에서 시작한다." - P 20

 

증식하고 축적하려는 이 부, 상품의 가치를 이해하려면 어떤 일반화된 기준, 척도가 필요하다. 점퍼 한 벌이 구두약 X개와 같다는 등식이 성립하려면 물성이 전혀 다른 두 개의 상품에 동일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물음이다. 즉 이것들의 가치를 비교하기위해 감각할 수있는 속성 모두를 제거하면 실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그런데도 이 두 개의 상품을 교환 가능케 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마 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 '마르크스의 눈'일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작동하는 그 유령, 부의 축적을 충동하는 가치, '교환가치'의 실체를 밝히는 흥미로운 과정이다.

 

"어떤 감각적인 몸에 가치라는 초감각적인 것이 들어있는 것이것이 상품이다."- P 52

 

4) 평범한 것에 놀라는 눈, 맹목을 맹목으로 보지 않는 눈, 사실 특별할 것도 없는 이 관심의 눈을 계속해서 되뇌는 여정입니다. 늘 염두에 두어야지 하면서도 둔감해지기 일쑤인 내 눈을 실없이 문질러댑니다...



마르크스의 특별한 눈

고병권 저
천년의상상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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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파적 읽기로서의 자본(Das Kapital) | 인문,사회 2019-12-2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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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올해의 책 리뷰 이벤트 참여

[도서]다시 자본을 읽자

고병권 저
천년의상상 | 2018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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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자본(Das Kapital)1권을 철학자 고병권이 함께 읽어 나가며 쓴 12권으로 이루어진 시리즈의 제 1권이다. "걸어 들어가는 건지 끌려들어 가는 건지 알 수 없는" 그런 독서라 말했듯이 "주체 변형의 위험과 매력이 공존하는" 독서임을 부인하기 어려운 끌림의 저술이라 하겠다. 자본 11장을 펼치면 알게 되는 지리한 개념의 설명에 압도되어 이내 본론에 들어가는 것을 저어했던 기억이 있는 이들에게는 이 친절하고도 깊은 해석과 해설이 진정 반가운 비처럼 느껴질 터이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증식하는 가치로서의 '자본', 가치 증식과 축적 목적의 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역사적, 개념적 정의에서부터, 자본의 부제인 '정치경제학 비판'을 시작으로 추출의 결과가 아니라 원리자체를 겨냥한 마르크스의 앎의 의지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된다. 비판 대상으로서의 당파성을 그 한계 너머까지 파고드는 인류사적 걸작을 오늘 우리네 사회의 위상에 맞춰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준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라는 중요한 길목이 있다. 정치경제학이라는 과학(학문)의 전제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 학문을 통해 나타내려는 욕망과 의지는 무엇이었는지를 드러내는 과정이 곧 비판이다.

 

피와 불의 문자로 기록된 연대기라 표현된 자본주의 논리가 자리 잡는 역사의 여정, 그리고 정치경제학이란 대체 어떤 시야를 지닌 렌즈인가 하는 그 시야적 도구의 의지를 밝혀낸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통해 하나의 개념이 내재하고 있는 욕망을 밝혀내는 설명은 그야말로 귀에 쏙쏙 들어온다. 아마 정치경제학(어쩌면 오늘 우리네 주류 경제학이라 해도 무방할 듯)이 계급의 사적 이익을 위한 제한된 시야를 가지고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잡기위해 쓴 하데스의 투구(Knee)에 대한 해석적 문단은 오늘 읽기의 하이라이트라 해야겠다.

 

괴물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 위해 투구를 눈과 귀 밑까지 눌러쓰고 있다” - 마르크스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으려는 계급적 이익을 위한 가장 맹렬하고 저열하며 추악한 감정에 기반한 학문, 역사적 조건과 함께 출현하였듯이 그 해체와 함께 사라질 학문으로서...

 

"어떤 렌즈, 어떤 조명, 어떤 시각, 어떤 틀에서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자신이 쥐고 있는 것조차 볼 수 없다."    - P 117

 

정치경제학에 투여된 욕망, 즉 보지 않으려,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위해 그네들이 지녔던 앎의 의지의 밑바닥까지 밀고 내려가는 비판으로서의 자본에 이어, 바로 그 의지가 품고 있는 특별한 조명, 특정한 퍼스펙티브(Perspective)로 보고 있음을 알아채는 눈을 독자도 지닐 수 있게 안내한다. 가치 축적을, 부의 독점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의 구축을 위한 의지, 그것이 사회 전체가 추종할 가치가 되는 인류역사 이래 가장 특수한 행동양식으로 정착하는 그 역설적 구성원리를 쫓는다.

 

알튀세르가 말한 가시성 장()의 구조가 낳는 필연적 효과로서의 비가시성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리라. 손에 쥐고 있어도 그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는 인지적 편협성, 이것이 야기하는 혼란과 두려움, 나아가 폭력성은 오늘 우리네가 매양 현실에서 듣고, 보고 있는 그것일 것이다. 전제와 원인에 똬리를 틀고 숨어있는 존재를 보느냐, 외면하느냐, 아니면 볼 수 있느냐, 보지 못하느냐의 문제로서...

 

결국 당파적이라 하는 표현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혹여 나만의 렌즈를 통해 보는 세계가 무엇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한 옮음의 두 주장을 세우는 논리가 해결할 수 없는 영역에 작동하는 의 성격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잉여가치량은 가치증식과 축적으로서의 자본의 운명과 관련한 핵심적 부분이다. 노동시간, 최저임금.... 등의 결정에 작동하는 것이 과연 논리인가? 누가 힘이 더 샌가에 달려있지 않은가? 인간 삶의 세계란 논리가 멈추는 곳, 경험의 지평이 막다른 곳에 이른 곳에서 시작된다고 누군가 말했던가? 바로 실천의 장에 펼쳐지는 지독한 투쟁, 혹은 새로운 세계를 보는, 자기 경험의 세계 너머의 지평, 다르게 볼 수 있는 시선을 갖는 것이 바로 지금의 우리가 시작해야 할 일 아닐까? 책은 이처럼 논리가 실패하는 장소, 힘이 재판관으로 행세하는 그 모순된 지점까지 치닫는 비판의 정수를 학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한편 독자로서의 자본의 읽기에 대한 당파성을 요구하는 저자의 안내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내부에서, 체제 구성원리에서 그 해체의 원리를 찾는 앎의 의지, 다르게 보려는 의지로서의 당파성을. 그 역설의 변증법을.

 

"무구한 독해란 결코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가 죄를 범한 독해가 어떤 것인지를 말하라“     -알튀세르

 

알튀세르의 이 강렬한 당파성의 권유가 자본을 읽는, 아니 저자와 함께하는 다시 읽는 자본이 가리키는 그 실천의 장, 등가교환을 했음에도 눈 밑에 그늘을 드리운 그 누군가를 볼 수 있는 그러한 독서의 장을 안내한다. 격월간으로 출간되는 이 시리즈가 이미 7권까지 출간되었다. 늦은 출발이지만 8권이 출간되는 날 따라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남용, 위반, 자의에 의한 비판으로서가 아니라, 판단하는 잣대가 바뀌는 것, 전제가 된 구조자체의 변형과 관련한 비판으로서, 세계를 다르게 보는 귀중한 렌즈를 얻었다는 어떤 충만함을 느끼면서 『자본』제1장 「상품」,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근원인 '가치'의 개념으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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