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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랑 출판사 블로그

 

 

 

도서명: 법의 무지

부 제: 무의식의 저널 엄브라Umbr(a)

ISBN : 978-89-7418-595-4

부가기호: 93100

가 격: 17,000원

저 자: 슬라보예 지젝/알랭 바디우 외

역 자: 강수영

발행일 : 2020년 7월 20일

원서명: Umbr(a): A Journal of the Unconscious, Ignorance of the Law, no. 1(2003)

원저자: Slavoj Zizek, Alain Badiou 외

페이지: 270페이지

판 형: 변형신국판(가로148mm * 세로205mm)

분 야: 국내도서 > 인문학 > 교양 인문학

국내도서 > 인문학 > 심리학/정신분석학

국내도서 > 인문학 > 서양철학 > 현대철학 > 현대철학 일반

 

 

 

 

필자 및 역자 소개

 

지은이

알랭 바디우

파리 8대학과 에꼴 노르말의 철학과 교수 역임. 다수의 철학논문을 출간했으

며, 주요 저서로는 Being and Event(Seuil, 1988), Manifesto for Philosoph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9 [Seuil, 1989]), Ethics: An Essay

on the Unverstanding of Evil(Verso, 2001[Hatier, 1998]) 등이 있다.

에띠엔느 발리바르

파리 10대학 도덕과 정치철학과 석좌교수이며 캘리포니아 대학(어바인 소재)

의 비판이론과 교수. 저서로는 루이 알뛰쎄와 공저한 Reading Capital(N.L.B,

1970[F. Maspero, 1965]), Politics and Other Scenes(Verso, 2002), We, the People

of Europe? Reflectioins on Transnational Citizenship(Princeton University

Press)이 있다.

마리나 드 까네리

이탈리아의 트렌토 대학과 필라델피아 소재 템플 대학, 파리 8대학에서 각각

비교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뉴욕 주립대(버펄로 소재)의 비교문학과에서

「주체와 여성성」이라는 제목으로 박사논문을 썼다.

스티븐 밀러

캘리포니아 대학(어바인 소재) 비교문학과에서 2002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논문 「법의 완성: 전후사상과 소설에 나타난 저항」은 사도 바울, 칸

트, 아렌트, 라깡, 쥬네, 바타이유와 베케트에 나타는 신학-정치적 법의 개념

을 고찰했다. 제이슨 스미스와 함께 장-뤽 낭시(Jean-Luc Nancy)의 Hegel:

The Restlessness of the Negative(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2)를 공역했

다. 현재 뉴욕주립대(버펄로 소재) 영문과 교수이며 정신분석문화센터장을 맡

고 있다.

캘파나 세샤드리-크룩스

보스턴 칼리지의 영문학과 부교수로, Desiring Whiteness: A Lacanian Analysisy

of Race(Routledge, 2002)를 출간했고, The Pre-Occupation of Post-colonial

Studies(Duke University Press, 2000)을 공편했다.

?야니스 스타브라카키스

2006년부터 아리스토텔레스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Lacan and the

Politics(Rout-ledge, 1999)를 출간했고, Discourse Theory and Political

Analysis(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00)과 Lacan & Science(Karnac

Books, 2002)의 편집에 참여했다.

캔디스 보글러

시카고 대학 인문학부 철학과 교수이며, 석사 프로그램 공동 디렉터이다. 저서

John Stuart Mill’s Deliberative Landscape(Routledge, 2001), Reasonably

Vicious(Harvard University Press, 2002)가 있다.

슬라보예 지젝

정신분석이론가이며 철학가로 슬로베니아 류블랴냐 대학교 사회연구소 선임

연구원이다. 다수의 정신분석 철학, 문화비평이론서를 출간했다.

조운 콥젝

현 브라운대학 현대문화와 미디어학과 교수이며 저널 엄브라의 편집장을 역임

했다. 저서로는 『내 욕망을 읽어봐』와 『여자가 없다고 상상해봐』가 있다. 영미

권에 슬라보예 지젝을 소개하고 후원한 장본인이다.

 

 

 

역자 강수영

문학연구가, 전문번역가, 강사.

2007년부터 무의식의 저널 『엄브라』 번역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최근 역서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21세기 비판이론』(스튜어트 제프리스)이 있다.

 

차례

 

한국 독자들에게7

법은 그곳에 있다 - 개정판 역자 서문14

법, 주체, 욕망 - 초판 역자 서문21

 

편집자의 말: 법의 무지 29

/ 알리싸 리 존스

법 이론의 한계에 선 라캉: 법, 욕망, 최고 폭력36

/ 스티븐 밀러

안티고네의 유혹: 정치적 윤리학의 아포리아63

/ 야니스 스타브라카키스

“누군가 말하기를 …”:

야니스 스타브라카키스에 대한 답변89

/ 슬라보예 지젝

존재의 결여, 선의 부인 99

/ 캔디스 보글러

현실의 총체성135

/ 마리나 드 까네리

주체 162

/ 에띠엔느 발리바르

결여와 파괴 190

/ 알랭 바디우

인간됨: 수간, 식인, 그리고 법233

/ 캘파나 세샤드리-크룩스

저자 약력269

 

 

 

이책은:

『법의 무지』는 법 개념의 축소와 동시에 발생한 위험천만한 법의 인플레이션에 저항하려는 목적에서 기획되었다. “어느 누구도 법을 (법적으로) 무시할 수 없다”는 것, 우리는 법에 의해 이미 항상 호명되어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 피할 수 없는 법의 성격이 최근에 법이 누리고 있는 권력과 편재성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 이번 호는 법의 완전하고 복합적인 상징적 가치를 회복하려는 시도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주체가 법과 맺는 관계는 법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금지할 뿐 아니라, 주체의 일정한 무지가 법 자체에 반드시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운 콥젝)

 

인간은 항상 결코 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위치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담론의 법 전체를 통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이 이 최종적이고 설명되지 않으며 설명할 수 없는 법의 존재가 매달려 있는 주춧돌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분석경험에서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은 바로 이 하나가 있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의 법이 있다. 그리고 진실로 법의 담론은 결코 완전히 완성될 수 없으며, 이 최종적 항목에 하나가 있다. (자크 라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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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거시적, 미시적 물리학 | 나의 리뷰 2020-06-2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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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위상학(Topologie der Gewalt) - 사회 면역학적 긍정성이 내재한 폭력에 대해서


'폭력의 비가시성'에 대한 담론은 그 이론적 배경을 달리하면서 갈퉁의 구조적 폭력, 부르디외의 상징적 폭력, 지젝의 객관적 폭력 혹은 사회적-상징적 폭력 등으로 정의되면서 무수한 서사를 이루어왔다.  아마  철학자 '한병철'의 『폭력의 위상학(Topologie der Gewalt)』이 이들의 인식과 다른 지평에 있다면 표제가 시사하듯이 '위상(位相)'이라는 공간의 상대적 관계성으로 상징되는 어떤 현상이나 상황, 사물간의 관계성, 즉 타자로부터 자아로, 외부에서 내부로, 적에서 경쟁자로와 같이 물리적 공간의 이동에서 폭력의 은폐성, 비가시성을 파악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위상을 결정짓는 것, 즉 폭력의 가시성과 비가시성 또는 폭력의 거시물리학과 미시물리학의  경계에  '사회에 대한 면역학적 부정성과 긍정성'이 놓여있다. 즉 외부로서의 타자가 자아에 침입할 때 그것에 대한 자기 내부의 반응에 따른 구분이라 할 수 있다. 이 구분은 면역학적 반응에 따라 법을 초월한 권력으로서의 주권 사회와 규율과 금지를 통해 지배하는 규율사회는 '부정성',  그리고 오늘날 과다와 과잉의 산만성과 자기 소진에 시달리는 성과사회는 '긍정성'으로 설명된다. 폭력이 가시적일 때,  이를테면 갈등과 적대관계 속에서 자기 내면화할 수 없는 타자가 자아에 침입하고 침투하여 굴종과 예속, 죽음을 요구하는 폭력의 작동방식은 외부화되어 누구나 볼 수 있다. 즉 부정성은 외부적이고 전시적이며 지배와 억압이라는 타자 강제의 산물이다.




이와달리 면역학적 부정성이 사라지고 긍정성만이 남은 오늘의 성과사회는 명령하는 타자 없이 자기 자신에 귀 기울이는 사회이다.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되어 끊임없이 더 많은 성과를 올리기 위해 강박에 시달리고 자발적인 자기 착취에 마침내 소진되어 우울증에 휩쓸려있는 사회이다. 따라서 타자라는 침입이 존재하지 않기에 면역학적 부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긍정성의 사회이니, 내재화된 폭력이 보일리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이렇듯  '성과사회'의 속성들을 해독하여 21세기 오늘에 대한 진단을 하는 저자의 주장에 거시적 견지에서 이의의 여지 없음은 물론이다. 


특히  「폭력의 미시 물리학」에서 중점적으로 논의되는 '긍정성,  투명성, 대량생산되는 미디어, 끊임없는 접속적 연합적 관계의 분열증적인 리좀, 그리고 지구화'가 내면화시켜, 직접적 의식이 불가능한 비가시성의 폭력에 대한 성찰은 "과열과 과부하로 시스템의 파열을 목전에 둔 바로 지금"의 우리네 삶의 태도에 강력한 반성적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할만큼 빼어난 비판적 통찰력에 몰입하게 한다.


왜 지금의 세계, 사람들이 면역학적 저항을 하지 않는가? 다른 말로 하자면 왜 타자의 침입에 반항하지 않는가? 라는 물음이 될 것이다. 아마 오늘의 사회를 '과잉의 시대'라 일컫는 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동의 할 것이다. "극도의 과잉생산, 과잉 성과, 과잉 소비, 과잉 커뮤니케이션, 과잉 정보 (...), 비만은 내 쫓을 지방이 없으며 다만 줄 일 수 있을 뿐"인 것처럼, 동일한 것은 긍정적이다. 동일한 것에는 항체가 형성되지 않으니 이 '동일성의 폭력'에 저항력을 강화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이는 결국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며, 무한한 자기 소진만을 촉발한다. 긍정성의 폭력이 곤혹스러운 것은 이처럼 내재성의 테러, 부정성이 없는 폭력이기에 효과적 방어 수단이 없다는 데 있다. 


코로나바이러스19의 확산 방지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제일 준칙이 '투명성'이었음은 모두가 아는 바이다. 투명한 정보와 실천 방안을 통해 국민에 대한 심리적 안정감과 방역의 효율성을 확보하려는 모범적 사례로 국민적 자부심까지 안겨준 정책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투명한 사회, 이 긍정성의 사회는 모든 것을 균질화하고 문턱이라는 경계를 사라지게 한다. 이렇게 전면적 투명성이 장악하게 되면 어떤 상황이 될까? 궁극적으로 모두가 동일한 것으로 획일화되고 이질성이 제거되는 양상이 드러날 것이며,  정치적, 기업적, 사적 비밀이라는 개체의 존엄성과 같은 배타적 공간이 들어서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기능화되고 기계적, 수치(數値)적 , 노골적인 사회로 전락할 것이다.  "모든 것을 가시화의 과정 속에 던져 넣으려는 강박은 외설적이다."  이것은 자유와 통제가 하나가 된 자기 감시의 저항할 대상 없는 폭력으로 몰아 넣는다. 그것은 고통의 늪이 된다. 오늘의 우리네 사회를 이보다 철저하게 묘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에 더해, "동일한 것의 무더기에서,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에서 태어난다."는 새로운 언어 폭력의 실체인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의 스팸화, 일말의 정보적 가치도 없으며, 소통적이지도 않은 쓰레기 더미는 자아의 비대화와 함께 공허한 커뮤니케이션만을 낳는다. 타자의 주의를 끌어보려는, 그러나 진정한 타자는 없고 소비자와 구경꾼의 무관심이 스쳐지나갈 뿐이다. 자발적 전시의 강박이란 이 과도함은 산만함과 지각의 둔감함을 재촉하고 정작의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  "과잉 커뮤니케이션이란 곧 존재의 결핍"이라는 진단에서 '미디어 무더기 시대(Mass-Age)'의 동영상 속, 발가벗음을 서슴치 않는 사람들의 수단과 목적 사이의 파괴된 경제적 관계를 읽는 것은 이제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모든 것은 "더 열광적으로 시장의, 탈코드의, 탈영토의 운동속으로 뛰어들고", 현재의 한계를 넘어 진행되도록 추동할 뿐이다. 폭력의 내재성은 정면으로 싸울 상대를 소멸시킨다. 전지구적 차원의 과잉  가속화는 지구라는 시스템의 전소(Burnout)상황이 되어서야 멈출지도 모를 일이다.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루며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는 자기 착취적 관계가 우울증이란 병리현상을 오늘의 사람들을 점령하는 것은 불가피한, 아니 필연적인 현상일 것이다. 마침 코로나19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정신, 새로운 삶의 태도를 요구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이들 긍정성, 과잉의 욕망이 휩쓰는 비가시적 폭력을 잠깐 가시권역에 드러내준 자연의 선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성과사회라는 오늘의 진단 속에 내재한 이러한 비가시적 폭력성의 모습들을 드러냄으로써 나르시시즘에 마비된 우리네를 차갑게 깨워댄다. 그러나 이 자극적인 비판적 통찰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성과사회라는 오늘이 면역학적 저항이 부재하는 자기관계적, 자타의 동일성만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머리를 치켜드는 것이다. 21세기 오늘, 규율사회, 면역학적 패러다임이 여전히 암약하는 사회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이 책은 칼 슈미트, 벤야민, 아감벤, 푸코, 지라르, 들뢰즈에 이르는 사회와 인간의 관계적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 터 잡아 면역학적 부정과 긍정성에 기초하는 독창적 폭력의 실체 해부론이라 할 수 있다. 이들 모두에 대한 비판 배경을 옮길 생각은 없다. 다만 시대착오적 사상이라며 아감벤이 여전히 면역학의 시대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에 동의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과연 오늘의 사회가 오직 자기소진에만 매달리는 성과사회이기만 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이렇게 오늘의 사회를 단절적으로 면역학 전후의 시대로 명쾌하게 분리,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획일화된 규명이 아닐까?


"아감벤은 주권사회도, 규율사회도 지나온 사회, 면역학 이후의 사회에 속하는 사람이다. 이런 결정적 패러다임 전환에도 불구하고 (...) 부정성의 형상을 긍정성의 사회에 (...) 잘못된  투사로 면역학 이후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  P 99 中에서


아감벤을 이처럼 비판하는 것은 성과사회는 온통 긍정성의 사회이며, 결코 부정성은 존재하지 않음을 주장하기 위한 토대이다. 배제와 금지를 바탕으로하는 부정성의 폭력은 오늘의 사회에 존재치 않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오히려 오늘날의 폭력은 조지 플로이드 사건처럼  합의의 순응성보다 이의의 적대성이 여전히 주가되는 사회이지 않은가? 아감벤이 성과사회 특유의 긍정성의 폭력을 포착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 할지언정 부정성의 폭력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지배와 영광이 자본의 내부공간으로 옮겨왔다고 사회가 빈틈없이 자기착취만 기능하는 것도 아니며, 폭력과 법을 분간할 수 없는 지점의 사태가 더욱 극명하게 대두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무대에 등장하기 위해 미디어 속 스펙터클의 가상 속에 몸을 숨기는 정치, 속이 텅빈 공허한 내용없는 정치"의 현실이 물론 현존하지만, 권력과 지배의 형태는 달라졌지만 보다 큰 정치 또한 실재하고 있음을 오늘 한국 사람들은 경험하고 있다. 즉 부정성의 폭력과 긍정성의 폭력이 상존하고 있음이다. 


지나치게 긍정성의 폭력만 상정할 경우, 모든 의무와 책임을 개인에게 몰아 넣어 권력화된 것들, 사회 시스템이 지닌 폭력성에 문제를 제기치 못하게 하는 면죄부가 될 수도 있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가치와 표준의 창출을 위한 시험 무대에 서있다. 진정 패러다임의 전환, 과잉의 성과사회라 표현되는 자기 소멸적 시스템의 전환을 화급히 모색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서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워진다. 무한 욕망의 무한 긍정, 스스로 불타버릴 때까지 스스로를 착취케하는 성과사회의  내재적 폭력,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한 이 도발적인 저술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공허, 불가능한 무한성의 환상적 삶에서 우리를 깨워댄다.



폭력의 위상학

한병철 저/김태환 역
김영사 | 202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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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문명의 표준이 바뀌고 있다 | 에세이,평론 2020-06-15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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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코로나 사피엔스

최재천,장하준,최재붕,홍기빈,김누리,김경일,정관용 저/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제작진 기획
인플루엔셜 | 202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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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우리가 맞닥뜨린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코로나 19'란 단지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이며, 생화학적 백신만 개발되면 이전의 삶의 방식과 정치, 경제, 사회적 체제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인가? 다시 말해 생산의 무한성, 소비적 욕구의 무한한 충족, 지속적 물질적 성장에 기초한 삶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인가?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옹호하는 신자유주의자들, 그리고 끝없는 패권적 이익을 챙기기 위해 개발하고 빼앗고 착취하기에 여념이 없는 자본가들, 이들의 뒤에 숨어 권력을 행세하려는 수구 정치 세력들은 코로나 19 이전의 회귀를 염원하는 낙관적 담론을 형성하려 할 것이지만, 과연 이들의 욕심이 가능한 세계가 다시 오겠는가?

 

어쩌면 세계관의 전복을 말하는 '김누리' 교수의 경고처럼  "재난 상황을 자본 지배를 강화하는 절호의 기회로 활용하는 '재난 자본주의'의 강자 중심주의의 악폐"가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인류의 앞날을 저해할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코로나 대응에서 보여준 인간존엄과 투명성, 공공과 개인 자유의 균형과 같이 오늘 촛불을 들었던 한국사회의 구성원인 우리네의 정치의식과 반성적 성찰역량을 훼손하기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코로나 사피엔스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진화생물학자, 정치 경제학자, 문화비평가, 인간-기계 융합 공학자, 인지심리학자에 이르는 분야별 전문가들과 불가피성에 의해 변화된 작금의 생활 양식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지, 그 의미로부터 우리가 사유하고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공식적인 담론의 장에서 논의키 위한 '발제(發題) 대담'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담론들이 독자들의 감상에 머물지 않고 한국사회의 모든 사람들, 나아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확산과 연대의 장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1. '코로나19'가 야기한 삶의 현상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사람들간 접촉의 최소화 요구가 단연 가시적 현상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 양식을 수용할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은 강력한 전염성과 사망율이 야기하는 불안과 염려이며, 바이러스의 인간세계 진입이 바로 인간의 생태계 교란, 자연의 지배력을 무참히 행사하려는 무한한 인간 욕망의 탓임을 비로소 인지했다는 성찰이 놓여있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생화학적 백신이 개발되면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적 전망과 함께, 다시금 성장, 즉 물질적 발전이라는 탐욕스러운 정책을 슬그머니 꺼내놓기까지 한다. 대기업 감세를 새로운 국회의 제1호 법안이라 제시하는 수구적인 그 어처구니없음과 시대착오적 폐악을!

 

언택트(untact), 비접촉 비대면의 정상화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아이들은 집에서 온라인을 통해 강의를 받고, 배달과 택배가 증폭하며, 의료의 공공성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고 있다. 국가간 사람의 이동과 물질의 교역도 제한을 받고 있으며, 이에따른 물질생산과 서비스 수요의 감소로 고용능력이 악화된 기업들은 실업자를 양산하고 있다.

 

새로운 체제를 말하는 정치경제학자 '홍기빈' 교수는 "지난 40년간 자본주의를 떠받치던 지구화, 도시화, 금융화, 생태계라는 네 개의 기둥, 그 구조가 모두 붕괴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선진 각국의 유수한 정치 경제 전문연구 기관, 세계 경제 기구들에서는 연일 전지구적 저성장을 예측 발표하고, 높은 실업률과 자영업, 중소기업의 도산을 감소시키기 위해 막대한 정부 재정을 쏟아 붓고 있다. 코로나19 이전의 삶의 방식 - 정치와 경제 정책, 사회적 습관, 자연에 대한 이해, 욕구의 소비 방식 등 - 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더이상 유지할 수 없는 순간에 들어서 있다는 인식이다.

 

진화생물학자이자 한국생태학회장인 '최재천' 교수는 3~5년 주기로 지금과 같은 바이러스가 인간 사회를 교란 할 것이라 예측한다. 백신의 개발은 항상 뒤늦은 처방이 될 수밖에 없으며, 오늘의 현상과 같은 고위험, 고실업, 저성장이 반복될 것이라 지적한다. 생화학적 백신은 결코 인류사회를 구원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자연과 절제된 접촉', 자연을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는 계산을 드디어 사람들이 할지도 모른다" 는 희망과 함께 근본적 삶의 자세를 새롭게 성찰해야 할 순간이 바로 지금이 아니겠는가라는 물음이다.

 

2.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성찰해야하나?

 

그렇다면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성찰하라고 하고 있는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역사적 데이터를 찾을 수도 없으며, 따라서 어떠한 예측 기능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이해이다. 예측이 안 될 때, 아니, 할 수 없을 때 우리가 미래를 대하는 방식은 '결단'이라고 한다. "어떤 전제를 놓고 모델을 만들어 미래에 투사할 수 없을 때에 우리는 어떤 식의 미래를 우리가 만들고 싶은가?" 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처럼 새로운 가치에 따른 기준과 표준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에 진입해 있음의 자각이다. 문명의 표준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사태는 우리를 새로운 가치에 눈뜨게 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들, 의료, 기본 서비스들, 가사노동, 보육, 요양, 고용의 안정과 같이 '돌봄 경제(Care Economy)', 즉 모두를 안전하게 지키고 재난에 대응할 수 있는 복지사회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국가와 경제라는 것이 사람을 지키는 것이지 기술혁신도 생산성이나 무역의 증가가 목적이 되는 주객이 전도된 지금의 물질 성장주의 체제는 이제 지양해야 하는 것이라는 반성이다. "가치 재정립을 위한 적시가 바로 지금이 아니면 언제이겠는가"라는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의 일침은 우리들의 인식 전환을 촉구한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의 무한 욕망을 무한히 긍정하는 문명과 결별해야만 하는 순간에 와있다. 프레임 자체, 사고의 틀을 바꿔야 하는 그런 상황이라는 자각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어쩌면 인간-기계공학의 융합을 리드하는 '최재붕' 교수의 진단처럼 "지금까지의 생활 플랫폼들이 전부 다 바뀌게 될 것"이며, 따라서 새로운 정책의 표준이 마련되어야 하는 그런 인식이 필요한 시간일 것이다.

 

또한 저성장의 정상화라는 자본주의 근간이 흔들리는 지금, 성장지상주의 발전 이데올로기는 생태적 붕괴와 그 궤적을 같이하며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찾아가야 하는,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의 정립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뉴노멀, 신인류의 삶의 양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3. 뉴노멀(New Normal), 신인류의 삶

 

바이러스의 주기적인 인간 세계의 진입이라는 사태는 인간의 생태계 교란과 훼손이라는 측면에서 최재천 교수는 자연과의 공존, 기후 변화를 줄이기 위한 노력으로서 생태백신과 사회적 거리두기와 같은 행동백신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한편, 4차 산업혁명이라는 문명 표준의 변화라는 비대면, 디지털 기반의 문명의 도래라고 이해하는 최재붕 교수는 일자리라는 생존의 요구 측면에서 온라인, 디지털 문명의 수용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표준을 바꾸는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한다.

 

우리가 원하는 삶의 질서는 무엇인가?

우리가 가진 욕구와 능력의 한계와 질서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 P 122 중에서

 

홍기빈 교수의 이 물음은 새로운 삶의 표준, 방식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들 각자에게 자신의 욕망의 주소를 냉정하게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 욕망에 스스로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라고 말이다. 무한 욕망의 자기 통제를 비롯한 그가 제시하는 미래를 위한 원칙인 사회 방역시스템(광의의 사회적 건강보호 체계의 의미로 사용됨)과 고용보장제도는 새로운 정책 기준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붕괴를 피할 수 없는 무한 욕망의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그 폐기를 또는 자본주의 인간화를 주장하는 홍기빈 교수의 인간존엄을 토대로 한 인간적이고 생태적인 체제의 제안은 우리를 지배하는 사고의 준거 틀을 근본적으로 제고케 한다. <행복의 척도>를 말하는김경일교수의 지혜로운 만족감으로 표현되는 나에게 충실한 삶이란 무엇인가? 라는 자성적 성찰에서 시작하여 공존과 포용의 문화로의 지향은 새로운 체제의 표준적인 심리적 지침이 되어 줄 터이다.

 

4.  결 어 


"생태적 붕괴 때문에 22세기는 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 지구상의 사람들이 마지막 인류가 될 것이다. " - P 145 중에서

 

자신의 죽음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는 착각처럼, 비관적 전망은 항시 배제되어 공적 논의의 장에 들어서지 못하곤 한다. 더 늦기 전에 문명의 전환을 위한 준비를 하라는 듯이 자연이 경고하고 있다. 어쩌면 인류 문명의 프레임을 전환할 절대적 운명의 시간이 찾아 온 것인지 모르겠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효과적이고 합리적으로 충족시켜준다는 이데올로기 아래 인간 간의 자유와 권리의 불평등, 부의 왜곡된 축적을 가능케 하는 자본주의의 야수성, 그 무한한 욕망의 탐닉으로 파괴되는 자기 존립기반의 생태계 위기를 반성적으로 성찰케하는 바이러스의 무의지적 강요성이 말이다.

 

이에 더해 디지털 혁명을 비롯한 4차산업혁명이라는 근미래 공학기술 기반 시대의 도래는 인간의 생활 양식을 새로운 질서와 기준으로 바라보게 하고 있다. 마침의 순간이다. 비관주의라며 외면하고 공적 영역에서 논의할 것을 회피하는 수구주의자들의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서도 이보다 좋은 자기 성찰의 시간은 없으리라.

 

한국의 분야별 대표 학자들로부터 경청하게 되는 바로 지금의 문명 전환적 통찰들은 우리가 만들고 싶은 미래를 어떻게 설계하여야 하는지 그 방향과 방식을 명료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 갈 수 없다.  예측이 아니라 결단이 요구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새로운 표준, 가치를 위해 인류 모두 머리를 맞대고 숙고해야 할 시간이다. 보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 책이 발제한 '지도에 없는 영역'을 창출하고 성숙시키기 위한 담론의 장을 확대시켜 공론화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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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문학에 투영된 정서와 영혼의 역사 | 인문,사회 2020-06-10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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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풀의 향기

알랭 코르뱅 저/이선민 역
돌배나무 | 202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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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艸)하면 내겐 한창의 청년시절 담채색의 고요한 여인을 부르던, '풀같다'라는 의미로 지은 '초여(艸如)'를 떠올리게 된다.  꿋꿋하게 솟아오르는 생명력과 함께 온화함과 깨끗함, 그리고 기이한 충동, 어떤 일렁임을 느끼게 하는 '푸른 진실'같기만 했던 한 존재를.   '알랭 코르뱅'의 『풀의 향기』는 숨어있던 기억을 길어 올리게 한다.  초록의 물결이 흐드러지게 펼쳐진 그 어느 들녘의 이름없는 야생초, 고요한 상념(想念)의 세계로 이끄는 시각적이고 촉각적이며 후각적인 풀의 세계에 심취하며, 영혼의 어떤 위안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한 장의 풀잎에 대한 이야기에 무수한 사랑을 담아낼 수 있겠지요."라고 말했던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말처럼, 책은 총 12장에 걸쳐 풀에 투영된 인간의 오랜 욕망의 역사를 그 본질적인 태초의 정취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으로, 기억과 감각사이의 상호작용이 이끌어내는 유년의 추억, 원형적 욕망의 모습들을 거쳐 자연으로서의 풀에서 사람에게 복종된 인위적 풀 - 화단(정원), 잔디밭 - 의 질서와 분류가 발하는 욕망, 그리곤 풀밭 위를 걷는 하얀 맨발과 목신(牧神) 판(Pan)의 에로티시즘,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의 '행복한 요람'에 대한 관능적 쾌락의 세계, 마침내 병적인 푸르름, 죽음이라는 초월성의 상징에까지 내 닫는다.


1. 풀, 태초의 언어 - 원형의 기억 


"풀이 건네는 말이 곧 자연의 말이다....대지의 수많은 비밀을 담고 있으며, 

땅 그 자체를 담아낸 것..., 풀은 감정의 물질이다."    - P 10 에서(변형 발췌 인용)


옛 시인들의 이 상징적 표현만큼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묘사할 수는 없으리라. 우리는 풀을 탐하고 자신의 기억 속에 새긴다. "여기가 바로 나의 고향이로구나."라고 외친 시인 '랄프 에머슨'은 풀의 생명력과 소멸, 삶의 온갖 감각의 근원을 발견하였던 모양이다. 초록의 풀은 분명 시원적인 세계로 이끄는 무궁한 깊이와 풍요로운 언어를 가진 듯하다.  아마  "아린 행복감을 가장 잘 느끼게끔 하는 것도 나 홀로 풀밭을 거닐었던 순간들이다."라고 의식 깊숙한 곳에서 길어올린 '헤르만 헤세'의 표현처럼. 풀은 우리네 심연에 켜켜이 새겨진 태고의 기억을, 그 근원을 사유케한다. 


아, 과장되게 풀의 비의적 측면에 취해 코르뱅의 의도를 소홀히 한 것 같다. '풀의 역사', 보다 세심하게 묘사하자면 '풀을 향한 인간 욕망의 역사'를 고대에서 중세, 근대의 걸출한 문인(시인)들의 문학작품에 다채롭게 배어있는 문장들을 통해 화려한 초록의 향연을 펼쳐낸다.  


2. 전원, 목가적 환희


16세기 프랑스 시인중의 왕자로 불렸던 '롱사르(Pierre de Ronsard) '의 전원적 쾌락, " 미친듯이 들판으로 달려 나가/  한껏 숨을 들이마시며 아름다운 초원을 바라보네." 라며 초록의 초원이 불러일으키는 전원(田園)과 목가(牧歌)적 정경에 대한 환희와 찬양은 어떤 야생적 기쁨, 삶의 에너지를 끌어내는 영양분이 바로 거기에 있음을 이야기하는 '데이비드 소로'의 눈부신 금빛 물결이 되어 몸을 담그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는 풀밭에 누워 (...) 자신 앞에 깔린 안개 낀 어둠을 오랫동안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 

순간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비밀의 문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 문 너머 세상은 고요히 자라나는 싱그러운 식물들로 뒤덮인 곳일 듯 했다."   - P 99 中에서


영국 시인 '존 쿠퍼 포이스'가 쓴 위의 감상처럼 내겐 시각적 기쁨에서 발흥하는 즐거움보다는 그것과 직접 접촉하며 온 몸에 스며들고 마침내 정신을 고양시키고 몽상과 아득한 침묵의 세계로 향하게 하는 대상으로서의 풀에 보다 마음이 동했던 모양이다. 세기의 시인들이 노래하던 '로쿠스 아모이누스(locus amoenus)', 즉 지상낙원, 혹은 에덴동산이라는 태고이래 인간에 새겨진 근원에 대한 동경의 세계로.


이탈리아의 시인 '야코포 사나자로'가 1504년 발표한 시집 『아르카디아』의 목가들에서부터 『나무를 심은 사람』으로 잘 알려진 '장 지오노'의 풀에 관한 최고의 소설로 불리는 『소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육감과 풀의 본능적 연결은 시인 '이브 본느푸와'의  "여기가 바로 내가 있을 자리이니. 결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곳"이라는 외침, 어떤 원형의 기억에 가닿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코르뱅이 이처럼 고답(高踏)적인 감상만을 전하는 것은 아니다.  어찌 인간의 욕망이 한 방향으로만 지속되기만 하던가? 자연의 변화무쌍함이란 혼돈과 무질서 아니던가. 우아하고 고상한, 혹은 조화와 질서라는 차별화를 향한 욕구와 함께 복속의 욕망이 투사되기도 한다.


3. 사회적 욕망이 된 풀


'잔디밭(pelouse)'이라는 용어가 14세기 말에 등장하고 16세기에 이르면  "가까이에 짧게 깎은 풀을 두고 보는 것보다 보기 좋은 것은 없다."라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처럼 풀이 귀족의 사회적 위신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정돈된 광경, 여기에 후각의 즐거움을 고려한 화단의 배열까지 더해  "제왕적 권위를 상기시키기 위한 감정의 그물들을 엮기 시작"했단다. 이에 깃든 욕망이란 무릇 풀들이 서로 뒤섞이지 않는 품종의 분류는 물론 "자신의 줄에서 벗어나는" 풀을 용납하지 않는 복종과 지배라는 계급화, 권력화의 의지일 것이다.


이 매끈하고 반듯하게 깔린 카펫같은 귀족적 정원이 주는 세련된 시각적, 후각적 즐거움과 함께 자연으로서의 식물이 지닌 약동감이라는 원시적 그리움, 자유에의 의지라는 비판과 경합하며 욕망의 모순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에밀 졸라 '나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의 소설 작품에는 이러한 양가적 감정이 꽤나 산재해 있는 모양이다.  풀의 자연성은 인간의 욕망에 복속되어 새로운 엘리트, 부르주와의 감성에 맞도록 틀이짜인, 연출된 대상으로서, 다분히 장식적인 인공화된 물질이 되었음이다. 



21세기 오늘은 물론 내 어린 시절 고궁이나 공공시설의 잔디밭에는 항시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결코 가까이 접근하거나 밟아서는 안되는 진열장 속 접촉이 금지된 것이었다. 아이들은 푸른 잔디밭을 보면 그 위에서 마구 뛰놀며 꺄르륵 대고 싶어하지만, 오로지 "눈으로 만져보는 법을 배우며,  '거의 무가치한 것의 존엄함'까지 배우도록" 한다.  이에대해 코르뱅의 시선은 의외의 긍정성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희생과 구속의 도리, 또는 자유로운 순간의 통제와 침착성을 배우는 역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하, 하나의 현상과 물질에 대해 그 상징적, 은닉된 의미를 해독하는 인간 반응의 다양성이란 이처럼 종잡을수 없는 것인 모양이다.


오늘날 도시화된 공간에서 발견 할 수 있는 풀, 혹은 화단이나 정원, 공원의 초록은 절제와 긴장과 희생정신이라는 곤혹감을 안겨준다. 더구나 이들 제한된 공간 이외에 자라난 풀은 '잡초'가 되어,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불온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럼에도 쐐기풀, 민들레, 토끼풀, 쓴쑥 뭉치들, 이들 잡초 무리들은 이러한 인공의 권위에  반란이라도 일으키듯 보도 블럭, 건물 벽의 작은 틈바구니, 차도의 균열에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솟아난다. '민초(民草)'로 불리는 서민 대중의 호칭이야말로 아름답게 승화된 잡초의 본성 아니겠는가.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서구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이식한 거대한 방목지와 골프장 잔디야말로 식민지 공간을 재정립해 지배하려는 '지리적 폭력'이며, 엘리트 계층의 '불평등주의 원칙의 의지'라고 인용하는 대목에서는 풀이 인간에 의해 오욕을 듬뿍 뒤집어쓰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풀, 고유의 식물성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인간 욕망의 역사 속에서.


4. 관능과 쾌락, 풀밭위의 점심


이 책의 백미, 아니 코르뱅 특유의 감각적 문화사의 절창이라 할 수 있는 후각과 촉각, 온 몸이 느끼는 풀과 인간이 접촉하는 세계는 무한한 상상의 지평으로 이끌어댄다.  소박하고 영롱한 자연의 풍광과 생동하는 젊음이 약동하는 시인 '네르발'이 실비와 산책하며 취했던 건초더미와 숲의 향기, 그리스 신화 속 뮤즈들이 거닐던 파르나스 풀밭, '페트라르카'가 심취했던 관능적인 초록 색 풀을 밟는 하얀 여성의 발이 있다. 또한 '빅토르 위고'가 본 푸른 풀밭위의 격정적 사랑과 '에밀 졸라'의 풀밭을 더럽히는 삶의 무대에 이르기까지 풀이 발산하는 내밀함, 자연과의 조화와 일치, 욕망과 쾌락의 형태들을 발견하는 여정은 문학의 일대 카니발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땅의 푸른 혀들 사이를 유연하게 오가며 (...) 여인의 주변으로 몰려드는

열기의 부드러운 진동...” - P 222 (클로드 시몽의 소설 ) 중에서

 

순결의 상징이자 치명적으로 유혹하는 음험한 존재이며 목가의 무대이자 과오의 목격자이며 징벌의 형상이기도 한 풀과 인간의 교묘한 줄다리기에 한껏 심취하며 고단한 도시의 시름을 잊고 켜켜이 쌓였던 기억의 한 페이지를 열어보는 잠깐의 멋진 외도의 시간이었다고 해야 할까? 풀과 맺는 인간 개체의 감성적 관점에서 사회화된 욕망에까지 그 상념의 폭이 무한하게 확장되는 지성의 노고를 만끽케 되는 기회였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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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 피케티의 자본과 이데올로기 | 나의 리뷰 2020-06-03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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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PIKETTY'의 『자본과 이데올로기』 with Essence Book



'토마 피케티'의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본책과는 별도로 에센스 북(Essence Book)이란 것이 더불어 출간되었다.  책을 읽기 전에 긴요한 참조 문서집, 혹은 핵심 요약집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에는 소유주의 이데올로기라던가 삼원주의, 다중엘리트체제, 사회토착주의, 보편적 자본지원 등의 비교적 낯선 (1)용어들에 대한 핵심 개념의 설명,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경제학자  '이정우' 전 경북대 교수의 (2)해제, 그리고 (3)본문 주요 참조 도표들과 그에 대한 발췌내용이 있다. 


피케티를 일약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돋움하게 했던 전작인 『21세기 자본』은 "도래하는 21세기는 불평등이 커지는 '세습자본주의'로의 회귀"라는 우울한 전망이었다. 특히 자본수익율(r)이 경제성장율(g)보다 높아지는 것, 즉 자본/소득 비율(일명 피케티 비율)이 높아져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분석을 토대로 "과거가 미래를 잡아먹는다"는 명문장을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불평등의 크기와 변동 추세를 분석했던 것에 이어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불평등 체제의 역사와 정치,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세운 다분히 정치 사회적인 분석과 대안적 모색을 중심으로 한 저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류의 역사는 그 구조적 형태나 논리에 있어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담론과 제도로 구성되어 있었다는문제의식의 제기이며, 이에대한 경제적 지표들과 통계 및 사회를 지배하는 법과 제도를 역사적 맥락에서 읽어내는 일련의 여정이다.  여기에 소유권을 사회적 안정의 핵심적인 필수조건으로 옹호하는 '소유주의'와 사제, 귀족, 노동자(제3신분)의 세 기능으로 분할되어 작동했던 '삼원사회(三元社會, Societe ternaire)'가 오랜 역사의 기간 인간사회의 체제였음과,  21세기 자본주의 오늘의 학력 엘리트와 자산 엘리트의 유착 메커니즘인 '다중 엘리트 체계'로 그 모습이 변형되어 불평등주의체제를 고착화시키는 모습 등 정치 사회적 통찰이 더해진다.


마르크스의 『자본,Das Kapital』이 출간된 1867년, 영국의 소득분배가 최악의 정점에 도달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은 결코 역사적 아이러니만은 아니었으리라.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 마르크스가 주장했다면, 피케티는 '불평등의 역사'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분석의 망라를 통해 부의 분배가 왜 불평등하게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는지, 또한 어떤 특정의 역사적 사건이 빈부의 격차를 감소 시키거나 증가시켰는지를 규명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 가공할 노고의 결과물이 곧 『자본과 이데올로기』이다.


이정우 교수가 피케티의 정치경제적, 나아가 인류사회적 기여는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바꾸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라고 하였듯이, 불평등의 축소를 통해 더불어 사는 인류사회를 염원하는 어떤 소명의식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코로나 팬데믹이 전 지구적으로 기존의 생활양식을 바꿀 것을 강제하고 있다. 이제 인류는 좋던 싫던 새로운 시대를 마주해야 하게 되었고, 우리 한국사회 역시 생존을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성장의 논리는 어불성설이 되었으며, 긴급구호와 공공사업을 통한 일자리 마련과 같은 생존 정책이 최우선의 과제가 되었다. 한국 정부의 그린뉴딜 정책은 피케티가 예시하는 20세기 대공황 이후의 뉴딜정책이 소득불평등을 축소하고 경제의 실질성장율 증진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대 사건으로서의 성공적 정책이었음과 마침 그 궤도를 같이 한다.


불평등주의체제를 완화하기 위한 피케티의 대안은 일견 급진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과연 지금의 자본주의체제를 넘어서는 '참여사회주의'를 우리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가와 '기업 내부 권력의 분유를 확대'하고 '누진세 정책을 적극적 시행'하여 '사회적 소유'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 또한 일정 연령의 청년들에 '보편적으로 자본을 지원하는 제도'를 도입하여 소유집중과 자본의 순환을 이루어 낼 수 있는가? 나아가 초민족적, 초국가적 규제를 시행하기 위한 '금융자산의 소유에 대한 범세계적 등록 강제제도'의 도입 등은 분명 점차 심화되는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요구하는 코로나 팬데믹은 어쩌면 도달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이러한 정책들을 시도하고 실현할 수 있는 인류 역사의 대전환적 운명인것만 같다는 생각을 갖게한다.


코로나19 사태와 이후 전망에 대한 프랑스 〈르몽드 지〉에 올린 피케티의 기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중대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격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실증적 경제분석을 토대로 한 사회과학적 성취의 최고 산물이라는 표현에 어떠한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시대의 역작이라 하고 싶다. 자본주의의 한계를 초월하여 세계적 신질서의 창출을 위해, 인류의 공존을 위한 더할나위 없는 통찰과 제안으로 가득한 이 책은 그의 전작의 명성을 훨씬 능가한다고 감히 말해도 누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자본과 이데올로기

토마 피케티 저/안준범 역
문학동네 | 2020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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