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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세계의 불화, 그리고 불가능한 열망 | 소설,시 2020-09-30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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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오라시오 키로가 저/엄지영 역
문학동네 | 2020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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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친 상태로 태어나 양심을 발전시키고, 불행해진다. 그러고는 죽는다."

- Adam Philips, Going Sane에서


아담 필립스의 이 문장이 진실이라면 인간의 본질은 미친 상태, 곧 광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양심, 윤리라는 것, 광기의 억압을 습득함으로써 획득한 것 때문에 불행과 고통으로 살다 죽을 뿐이라고 한다. 인간 삶에서 마주치는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이 의문은 내게 광기라는 단어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한다. 은폐된 진실의 상징어 같기도 하고, 이를 이겨낸 자들의 기만책략 같기도 하고, 어떤 교만한 지성을 느끼게 된다.

 

죽음이 합리적인가? 사랑은 이성적인가? 결코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세계를 질서정연한 체계라고, 마치 모두 아는 것처럼 기만하는 데서 인간의 고통은 시작되는 것만 같다.  현실은 비합리적인 것들이 무수히 일어나 인간을 구석구석 에워싸는, 세계는 그 자체로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내게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읽기는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해야겠다. 이 세계의 불합리함, 죽음이라는 절망적 유한성에 맞서 삶의 어떤 명확함을 찾아 헤매는 열망간의 대결, 인간 가장 깊은 내면에 울려 퍼지고 있는 이 불가능한 열망의 호소로서.

 

작품 엘 솔리타리오(El solitario)는 세계와 인간 개인 사이의 이러한 균열과 충돌을 강렬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그는 못을 박듯이 수직으로 핀을 아내의 심장 속으로 끝까지 힘 있게 찔러 넣었다. (...)

그녀의 살갗에 오롯이 남은 다이아몬드가 신경 경련으로 인해 한동안 불규칙하게 떨렸다."

- 56, 엘 솔리타리오(El solitario)중에서

 

섬세한 보석 가공으로 신뢰를 받는, 그러나 사업 추진력은 부족한 남자 '카심'과 미모를 무기 삼아 상류계급으로 신분 상승을 꿈꾸지만 현실에 굴복한 여자인 아내 '마리아'와의 엇갈린 행복이 빚어내는 비극을 보여준다 위탁 받은 고가의 커다란 외 알 다이아몬드는 마리아의 소유 욕망을 부추기고 두 사람은 깊은 갈등에 빠진다.

 

남자는 잠자는 아내의 가슴 깊이 다이아몬드를 밀어 넣는다. 결코 끝나지 않을 욕망, 그 물질의 욕구를 영원히 잠재운다. 남자는 인간 삶의 한계, 죽음의 평화가 의미하는 바를 알았을 것이다. 세계와의 불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결핍된 욕망의 화신에게 죽음이라는 잔혹한 운명적 진실을 선사한다. 아찔한 현기증이 나는 이 행위가 결코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지 않을까? 카심의 살해 행위보다 마리아의 번뜩이는 눈 속에서 빛나는 그 갈망, 나는 이 광기가 더 공포로 다가온다.

 

단어 광기에서 의심을 불러내기에는 키로가가 삭제했던 세 편의 단편 중 그 마지막 작품인 광견병에 걸린 개가 제격인 듯싶다.

 

", 또 시작되었다! 저들은 내가 정말 광견병에 걸리기를 바라기라도 하는지 (...)

정말이지 이건 사는 게 아니다!" - 316, 광견병에 걸린 개중에서

 

마을을 휩쓸던 광견병에 걸린 개들의 울부짖음, 마침내 집에 들어 온 미친개를 몰아내다 다리에 물린 남자의 시간 경과에 따른 아내와 어머니의 반응, 그리고 그 반응에 반발하며 미쳐가는 과정의 이야기다. 이 광기에는 정치적 도덕률인 정신건강이 만들어 낸 재앙, 그 인위적 습관의 세계가 발하는 분리, 죽음의 음습한 냄새가 솔솔 풍겨 나온다. 그리곤 가족, 세계와 맺은 관계의 약속이 허물어 질 때 남자가 절망하며 부르짖는다. 독사들과 거미가 우글거리는 낯선 세계의 두려움. 그가 총을 난사하는 것은 어쩌면 납득할 수 없는 비이성, 불합리의 화해 불가능한 세계를 향한 것이 아니었을까?

 

수록된 소설들은 이처럼 인간의 빈번하게 제어되지 않는 충동에 자신의 의지를 부여하는 비인간화, 개인적 절망과 가족적 비극으로 이끄는 집착을 통해 세계와 인간 영혼의 끝나지 않는 갈등, 그 불화의 실체를 탐사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광기의 진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그 물질적 정신세계를 거닐고 있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끊임없이 존재적 결핍의 허기로 내몰리는 환상으로서 욕망의 세계 말이다.

 

아직 아버지 품에서 벗어나지 못한 애송이로군요. (...)

그 많은 재산이 어디에서 났는지 (...) 손님들 주머니에서 훔쳐간 주제에...”

25, 사랑의 계절중에서

 

이를테면 소설집의 첫 번째 작품인 사육제 축제 장면으로 시작되는 사랑의 계절"삶에서 순수한 추억보다 아름답고, 우리를 단단하게 단련시켜 주는 것은 없다." 는 도스토엡스키의 인용 문장처럼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어린 두 연인 '네벨''리디아'의 끓는 듯한, 애달픈 사랑은 어른들, 이미 부와 신분 등 욕망의 질서에 편입된 이들의 방해로 중지된다. 열네 살과 열여덟 살 소녀 소년의 사랑이라는 광기의 첫 대면이 이렇게 지나가지만 이것을 곧 좌절, 결핍의 욕망으로 변질시켜버린다. 즉 자본주의적 욕망의 근원지로서. 진실의 실패, 광기, 그 열정을 잃어버린 세계는 그야말로 삭막함 아니겠는가? 만 페소짜리 수표를 여자의 손에 쥐며 "날 너무 나쁘게 생각지 말아요."라고 이별을 외치는 장면은 정말 씁쓸함의 결정판이다.

 

이졸데의 죽음역시 사랑의 장애물은 신분과 재산이라는 합리주의의 가면을 쓴 자본주의적 가치가 내재화된 인간의 추억담으로 읽힌다. "당신도 같은 장면이 되풀이되는 서막을 봤을 거예요.", 이 반복의 사슬, 여기에 얽매이는 순간 살아있음은 곧 죽음 아닌가? 사랑, 그 광포한 생산에의 열망이 물적 교환의 대상으로 변질되는 순간 결핍의 욕망으로 추락하고 만다. 키로가는 이렇게 어둠에 잠긴 욕망의 세계를 들여다봄으로써 다른 삶의 가능성, 새로운 삶의 방식을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외에도 강에서 나무를 건져 올리는 이들이란 작품 또한 연장선에서 읽게 된다. 백인이 틀어 놓은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선율에 매혹된 원주민 '칸디유' 강으로 떠내려 오는 자단(紫檀)목을 건져 올려 축음기와 교환하는 과정의 이야기다.

 

"혼신의 힘을 다해 쉴 새 없이 노를 저으면서 소리 없는 투쟁을 시작한다. (...)

그의 머릿속은 온통 축음기 생각뿐이었다."

- 198, 강에서 나무를 건져 올리는 이들중에서

 

백인에 의해 교환의 세계, 자본주의적 믿음이 이미 내면화 된 인물은 그 소유의 욕망에 생명을 건, 죽음의 항전에 나서는 것인데, 이 욕망의 광기야말로 자본주의의 본성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천연 꿀 "평범한 삶에 좋은 추억거리를 남기고 싶어" 삼촌의 벌목장이 있는 정글을 찾는 공인회계사 '베닌카사'가 벌집을 발견하곤 게걸스레 꿀을 마시고, 멘수들(Los mensu)의 계약직 벌목 노동자 '카예''포델레이'의 술과 여자와 향수를 자신들의 자유의 갈망과 교환하곤 처참한 중노동의 현장, 죽음의 세계로 향하는 것이야말로 자발적인 복종이라는 자본 순환 고리에 순응한 인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실 광기는 억압하고 억제해서 획득한 것, 결핍의 욕망, 그 오만한 규율이 덧씌운 것 바로 그 자체라고.

 

아마 이 모든 문제의식이 집대성된, 이 소설집의 제목인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종합 세트는 목이 잘리고 선홍색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목 잘린 닭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불행이 닥치자 고통스러운 사랑의 불길이 새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고결한

사랑의 결실을 단 번에 되찾고 싶은 광적인 욕망에 사로잡혔다."

- 76, 목 잘린 닭중에서

 

이 문장처럼 사랑의 결실은 광적인 욕망에 기초한다. 그런데 이 욕망, 광기의 속성이 변질된다. 첫 째 아이, 둘째 아이 ...그리고 네째 아이까지 그 충만하고 아름다운 생산의 결과가 모두 백치다. 아이들은 짐승처럼 방치된다. 부부의 상대에 대한 태도도 변한다. 생산으로서의 욕망이 결핍의 욕망으로 바뀌는 것이다 다섯 번째 아이는 이렇게 변질된, 즉 결핍 충족의 수단으로서 욕망된 것이다. 백치인 네 아이가 그들에게 하찮은 사물 덩어리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다행인가? 아니면 불행인가? 네 아이는 부모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욕망에 충실한 인간들, 아니 존재가 된다. 태양을 바라보며 짐승처럼 즐거워하는 존재, "닭의 목을 자르고 피를 뽑아내는 장면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시뻘게...시뻘게...."

 

"닭털이라도 되는 양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 닭의 피가 여전히 고여 있는 부엌에서

아이들은 베르티타를 꽉 붙잡은 채, 몸에서 서서히 생명의 기운을 빼냈다."

- 83, 목 잘린 닭중에서

 

달성될 수 없는 프로이트식 욕망이 실천되는 방법은 살해뿐임을 증명하려는 듯한 이 장면은 끔찍함과 당혹감, 어떤 비현실적 느낌에 몸을 떨게 하지만 인간 욕망의 실체, 극복되지 못한 그 퇴행적 진실을 마주했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게 한다. 이처럼 모든 대상적 욕망이 폐기되고 네 아이들이 온종일 바라보는 붉은 벽돌담처럼 하나의 대상에 집중케 하는 편집증적인 욕망은 작품 표류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의 우주적 대자연에 몸을 맡긴 채 자기라는 망상적 주체를 놓아버린 인간들의 그 무한한 호흡에 이르러 광기의 도착점으로서의 죽음, 그 생생한 삶의 역동성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 같다.

 

"서쪽 하늘은 완연히 금빛으로 빛나고 (...) 황혼녘의 상쾌한 바람이 달콤한 오렌지 꽃향기와..."

- 111, 표류중에서

 

"나는 이내 내 존재가 사라진 것처럼 최면 상태로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 92,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중에서

 

눈과 빛이 만나고 코는 꽃향기와 짝짓는 무수한 육신의 모든 부분들이 저마다 생산적 욕구를 실현하고 있는 표류의 이 장면은 독사에 물려 강을 떠내려가는 한 남자의 다가오는 죽음의 여정이다. 한편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의 유일한 생존자가 들려주는 위의 문장은 이와 조응한다. 불안과 두려움, 결여의 획득을 위한 광기의 결과물로서 죽음이 아닌, 나라는 환상, 거짓 결핍의 환각에서 해방되는 것, 존재 그대로, 수많은 타자, 바깥과의 무한한 교류에 맡겨졌을 때, 죽음은 역설적으로 삶이란 생명성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무엇임을 알려주려는 것만 같다.

 

광기는 존재적 진실에 덧칠해진 위선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지우고 죽음을 망각케 하는, 이것을 촉발하는 생명의 근원임을 은폐함으로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혹독한 도덕률의 내면화로서. 그러나 양심의 발전이 고통인 것은 억압된 욕망, 그 결핍으로부터 이지 않은가? 집착과 부단한 욕망 반복의 사슬, 그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다시금 사랑과 죽음을 삶의 일상에 복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열정적인 부분대상들이 서로의 흐름 속으로 마구 뒤섞이는 짝짓기의 세계, 역동적 세계로의 회귀로


이 소설집이 내게 결코 잔인함과 공포의 이야기로 읽혀지지 않은 이유이다. 자신들을 짓누르는 것을 신격화하고, 자신의 것을 빼앗아간 것들 속에서 희망의 이유를 발견하려는 이 어처구니없음, 세계에 합리적 이성의 질서를 부여하려는 어리석음의 발견인 것만 같다. 아니, 어쩌면 열망하는 정신과 이 열망을 저버리는 세계 사이의 분리, 그리고 둘을 서로 묶어 놓으려는 모순의 탐사인지도.  삶을 온통 움켜 쥔 욕망의 진실, 인간과 세계의 그 간극의 원인들을 찾으려는, 한편은 무모해 보이는 키로가 자신의 처절한 자기 탐색의 글쓰기 인 것 같기만 하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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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란 본래 결핍이 아닌 생산-기계다! | 인문,사회 2020-09-26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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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안티 오이디푸스와 가족, 나는 아이가 아니다

신근영 저
북튜브 | 2020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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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오늘 한국사회의 가족주의가 지닌 문제를 성찰하는 <가족특강> 시리즈의 세째 권이다. 영화 기생충을 토대로 핵가족의 오직 소비와 화폐의 욕망만 내재화한 가족 이기주의의 자기파멸적 구조와 실체를 보여준 고미숙의 기생충과 가족에 이은 두 번째 읽기이다. 사회 구성원인 개개인의 삶의 태도와 양식이 만들어지는 그 근원 장소가 바로 '가족'이기에, 특히 '엄마-아버지-아이'라는 구조로 이뤄진, 근대에 이르러 새롭게 구성된 가족의 작동방식, 배치구조 등 그 성격을 탐사하는 것은 인간 개인과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 근간이 된다.

 

미시적으로는 왜 오늘 한국 사람들은 사랑을 할 줄 모르는가, 왜 혼밥을 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곤혹스러워하는가, 더구나 "가족은 건드리지 마라, 다른 거 가지고 딴지걸고 그러는 건 다 참지만, 가족은 안 된다."며 가족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고 선언하는가? 좀 거대 담론으로 나아가면 배타적 경쟁주의, 폐쇄적 이기주의에 의한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무공감의 고착화, 나아가 자본주의의 무한 욕망이라는 불가능한 추구의 작동원에 가족주의가 놓여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이라 할 것이다.


1. 오이디푸스 가족을 너머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안티 오이디푸스 ; 자본주의와 분열증 1를 저본(底本)으로 하여 오늘의 가족이 왜, "욕망의 배치가 구성되고 펼쳐지는 장소"인지, 그리고 이 욕망이 바로 자본주의가 굴러가게 되는 힘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이라는 비극적 신화인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인간의 억압된 무의식 세계를 설명하는 상징적 도구라 할 만큼 대중적인 소재이다. 이는 근친상간의 욕망을 포기해야만, 즉 자연 상태를 억압해서 극복해야만 비로소 문명인, 하나의 인간이 된다는 것이고, 결국 억압되고 포기된 근원적 욕망을 지닌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 프로이트가 본 무의식의 모습이다. 이것, 이 달성되지 못한 욕망을 우리는 결핍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자신 안에 어떤 결핍을 필연적으로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사실 이 결핍이란 것이 죽을 때까지 충족될 수 없는 것임은 포기된 욕망이 결코 달성될 수 없는 까닭이다.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면, "모든 욕망의 출발지는 가족이고, 아이의 출발은 가족이다."라는 정리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오이디푸스적 무의식은 가족적 경험으로 작동되는 것이라는 프로이트를 너머 '안티(Anti;)-오이디푸스'의 삶을 상상한다. "욕망이란 가족 경험으로 환원, 축소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비가족적으로 작동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삶의 기본 층위가 무의식이자 욕망이라는 프로이트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는 엄마,아빠를 엄마와 아빠로 본 적이 없다."라며 무의식이 문명인인 인간의 전유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욕망-기계'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관점이다. 무의식이 가족적 경험 이전의 것이 됨으로써 욕망이 억압과 결핍의 언어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된다. 가족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근원지라는 오명을 벗어나 그 폐쇄적 이기심의 자기 파멸성이 아니라 타자와 함께 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욕망을 '자아의 욕망'이나 '나의 욕망'과 같은 전체로서의 욕망을 거부하고 '부분대상', 즉 입의 욕망, 코의 욕망, 눈의 욕망과 같이 다종다양한 흐름인 '애벌레 자아'인 욕망-기계들의 작동으로 본다. 이 욕망-기계들, , , , , 항문, ...은 저마다의 끊임없는 활동, 곧 나름의 '생산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눈은 빛과 짝짓고, 코는 공기와 짝지어 숨을 쉬며, 몸 안에 모든 것들은 다 뭔가와 짝짓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짝짓기를 못하는 순간 그것을 죽음이라 한다. 이 말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나 아닌 다른 것과 짝짓기 하는 과정이고 이것이 욕망-기계라는 것이다. 욕망이란 이처럼 '결핍의 갈망이 아니라 생산의 욕구'라는 것이다.




이 짝짓기, 생산의 과정이 곧 생명의 원리, 혹은 존재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부분대상들이 다 탈각되고 오직 성기로 집중된 오이디푸스적 발달 단계는 욕망을 거세 콤플렉스로 축소시켜 탐욕, 무한 소비의 욕망을 정당화시키지만, 이 결핍 충족을 향한 욕망이 아니라 부분대상인 욕망-기계들의 생산과정으로 파악하게 되면, 바깥, 타자를 통해서만 자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자아, 가족의 열림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내 가족, 내 핏줄, 빗장을 걸어 잠근 문 안의 가족은 이러한 생명원리 측면에서 결코 바람직한 전략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주적 욕망을 가족적 경험으로 축소시켜 결핍에 시달리는 욕망으로 추락시킨 오이디푸스 가족, 바로 오늘 한국 사회의 가족주의는 새로운 지향을 모색해야 할 당위성, 무한 욕망의 구렁텅이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자본주의적 현실을 타개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2. '소파 위의 편집증자'에서 '분열자의 산책'으로


단순화해서 표현하자면 신경증이나 편집증은 에고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러한 자아의 욕망이 비대해져 그 충족되지 않는 결핍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을 양산하는 체제이다. 그러나 분열증은 애초 자아, 에고가 없는 사람들이기에 발산되고 해체되기에 갇혀 거대해진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소파 위의 편집증자란 저마다 짝짓기로 분주한 부분대상을 모두 탈각시키고 하나로 집중된 욕망의 탐닉자다. 반면에 분열자란 부분 대상들, 욕망-기계들이 짝짓고 하나의 흐름에서 다른 흐름으로 마구 섞여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 마치 자연을 산책하는, 나도 너도 없는 그저 온 몸으로 햇빛을 받고 바람을 받으며 자연과 인간의 구분을 잊은 채 우주의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는 그런 존재적 층위의 기분이다. 오로지 욕망-기계들의 생산, 짝짓기 과정만 있는, 여기에 그 어떤 결핍이 존재하겠는가? 그런데 이런 상태를 반복적으로 무력화시키는 것이 바로 가족이란 것이다. 다른 욕망-기계들의 작동을 제지하고 오직 결핍만을 장착시키는 욕망은 그래서 끝없는 채움, 획득과 소유의 메커니즘에 속박되게 한다.


자본주의는 바로 여기에 기초한다. 존재적 결핍감을 느끼게 하는 체제, 결핍을 채우려고 쇼핑하고 노동하고 상품을 만들고 끊임없이 화폐를 축적하게 만드는 이 신경증적이고 편집증적인 에고의 장소, 결핍을 내부화시키는 장소가 바로 가족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처럼 "욕망을 가족 안에 가둬놓는 작업을 통해서만 활성화 된다." 사람들 모두 자신들은 탐욕스럽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결핍된 존재라고 항변한다. "난 부족해, 난 없어, 그러니 가져야 해, 더 가져야 해", 더 깊은 결핍감으로 몰아넣는 자본의 기본적 속성은 소유를 갈망하게 한다. 관계의 독점, 배타적 관계는 그래서 오늘 한국 가족주의의 핵심이 된다.

 

비단 두 명의 법무장관, 그들이 자식과 가족을 위해 행사한 특권적 행위에서 보이는 불공정성과 이기심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를 향해 삿대질 하는 우리 모두, 이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스스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둘러봐야 하는 이유이다. 관계에 대한 독점적 욕망, 인정 욕망, 이 소유의 욕망, 일종의 '저장 증후군적 욕망'에는 만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한국사회의 갈등을 야기하는 그 근원에는 이 무한한 욕망, 이기적 탐욕이 있다는 것이다. 폐쇄된 관계, 독점적이고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 타자와 함께하는, 타자로부터 비롯되는 관계, 그 유대와 연대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자아, 가족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고작 작은 아이에서 큰 아이가 될 뿐인 이러한 미숙함과 결핍의 성장에서, 생산하는, 만물과 교접하는 분열자의 산책, 바로 그 길을 향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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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과 협의의 언어를 기대하며 | 에세이,평론 2020-09-18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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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강양구,권경애,김경율,서민,진중권 저
천년의상상 | 2020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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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갈등, 분열, ... 자기 이익에 반하는 것들에 대해 무차별적이고 무분별할 만큼 배설되는 적대 감정을 접하는 데 이미 그 피로가 한계에 이른 것 같다.  또한 '불공정, 불평등', 이 두 단어의 부정적 의미가 휘발되어 마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될 정도로 퍼부어지고 있으며, 민주주의 가치들인 자유, 정의, 평등의 근간을 훼손하는 것은 네 탓이라고 서로 비방하고 원망을 쏟아내고 있다.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려는 지금 한국사회에 번지는 혐오와 질시의 강박적 현상은 어디에 근원하는 것인가?


모두 '나의 생각과 내 말만이 정의다!' 라고 소리친다. 만 명이 만 개의  다른 정의를 외친다.  이 책,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에서 혹여 이와는 다른 언어, 새로운 정치기획을 발견하고픈 기대는  욕심이었던 듯하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끝장나는가"라는 부제는  자기 집착에 의해 스스로 압제와 종속의 세계로 들어 가게 될 것임을 예견한 '올더스 헉슬리'를 인용하여 말문을 시작하고 있듯이 민주주의의 파괴는 독재권력에 의한  감시와 통제의 전체주의사회화로 인한 파멸이 아닌 개인 욕망의 무한 추구로 인한 자기 파멸일 것이라는 성찰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에도 불구하고 대담자들의 말이 갈등과 분열의 주체로 특정 집단만을 향하고 있음은 안타깝다.  너와 나, 즉 '우리'라고 하는 한국사회 구성원인 모든 시민이 아니라 오직 '너'만을 가리키고 있다. 나는 아닌데 네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파괴시키고 있다고 한다.  시작 문장의 자기 반성적 성찰이 아니라 타자를 향한 비난이다.  대담자들이 겨누고 있는 현 정권의 권력 유지 욕구, 전 법무장관 조국 가족의 부정한 부의 추구, SNS를 비롯한 다양화된 온라인 채널 등 미디어의 집권 세력에 대한 지지 등 배타적 언행이 야기하는 반사회성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다는 주장은 또 다른  '프로파간다'의 하나를 보여주고 있을 따름 아니겠는가?   선동적 언어의 사용은 대담자들이 비난하는  문팬이나 태극기 애국주의자들, 극우 개신교 집단, 권위적 연고집단에 의존한 세력만 하고 있는 것인가? 


사실 이들이 조롱하고 폄훼하며 적대하기 위해 사용되는 논리는 그대로 이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  거짓말을 사실(Fact)에 대한 대안(代案)이라고 한 백악관 고위 참모진으로부터 시작된 반지성적 언어의 대표적인 표현에서 시작된 '대안사실'이라는 황당한 언어는 이제 모든 이들이 타자에 대항하는 자기 기만의  논리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문재인 정부가 지향하는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문팬'이라는 범주화를 통해 폐쇄적 선동가들로 매도되버리고, 대통령을 향해서는 "답답한 고구마라 했잖아요."라며, 자신의 말이 아니라 타자가 그렇게 말했다는 전언의 형식과 같은 비겁하고 고약한 화법을 구사하며 악의만 전달하곤 자신은 쏙빠지는 전술만이 보인다. 일종의 이간질 화법이라 해야하나?


 '닐 포스트먼'이  『죽도록 즐기기 (Amusing Ourselves to Death)』의 서문에서 올더스 헉슬리를 인용한 민주주의의  자기 파멸 현상을 지적하는 것은 오늘의 사회를 진단하는 적절한 하나의 시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리는 디지털화된 세계,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세계화의 무한 욕망의 구렁텅이에서 누구라도 사용 할 수 있다. 진중권이 조롱의 언어로 사용하는 '문빠'도 대담자들에게 이 논리를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SNS, 유트브 채널, 종편 채널..., 이곳에서 자신들만의 언어를 토해내는 사람들로부터  제외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란 말인가? 혹여 시민대중의 지적 게으름이나 무지라는 편협성의 토양에 편승하려는 것은 아닌가? 반합리주의와 반지성이 폭넓게 오늘의 사람들을 장악할지라도 각성된 이들의 시선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누가 훼손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제외된 채 너희들만 훼손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인권을 침해하는 건 국가가 아니라 시민이다."라는 말도 헉슬리의 예견 연장선에 놓여있는 다른 표현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동어반복적인 지리한 언어들을 동원하여 타자에게만 손가락질하는 태도를 스스로 돌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타자의 똥을 찍어 혐오의 손가락질 할 것 아니라 자신과 자기 가족의 구린내 나는 똥부터 찍어보라는 것이다.


새로운 불평등, 불안정을 통해 민주주의의 가치인 평등과 자유의 위협을 타자의 탓으로 향하게 하여 시민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가족주의에 기초한 자기이익의 극대화에 온갖 정신을 소모하는 물욕화된 계층 상승의 욕망이 얼마나 넘쳐나는지, 세계화된 신자유주의 경제, 디지털, 인공지능 등 신기술이 몰고온 일자리 감소를 비롯한 박탈감의 팽배함이 어느정도인지, 이러한 분노의 양상을 특정인, 특정 집단에게 돌리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또한 이를 이용하는 세력은 누구이겠는가?


사람들의 행동이란 자신들이 저지른 행동, 이를테면 화폐자본주의에 매몰된 금융, 부동산 투기꾼에서 자신들은 제외하고 바라보는 그 기만성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이 책임을 지우기에 가장 확실한 대상이 대통령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인권을 침해하는 것은 바로 시민이라는 문장의 의미는 무엇인가? 올더스 헉슬리의 음울한 예견은 다름아닌 시민 자신들의 탐욕, 부도덕성이 시민 자신들을 옥죄는 세계로 향하게 할 것이라는 말의 다름아니다.  자신의 죄를 덮기위해 손쉬운 대상에게 화살을 날리는 것은 마치 옛날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추장을 살해하는 그 야만적 어리석음과 무엇이 다른가?


가족 이기주의, 디지털화된 생활 플랫폼, 무한욕망의 환상을 쫓는 소비 자본주의,  바로 지금 한국사회의 모습은 헉슬리가 예견한 그것과 유사하며, 이러한 문제적 본질에 더해 기득권과의 처절한 싸움이란 환경이 더해져 있다.  진정 이러한 양상들에 반성적 성찰에서 우리들이 지향하고자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어느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공정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지키고자 하는 것 아닌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하나의 사태를 보자.  너는 자식을 위해 특권을 이용했어! 그러니 사죄하고 댓가를 치뤄! 라고 비난한다. 동의한다. 천번 만번 동의한다. 수많은 시민대중의 자식은 그런 변칙을 사용할 수 없으니까. 공정하지 못하다. 정의롭지 못하다.  그럼 한국사회의 특징적인 가족주의를 사유해 보자. 우리가 사용하는 잣대가 얼마나 자의적이고 편의적으로 악용되고 있는지. 비난의 대상이 된 자의 자성도 없으며, 이를 오직 정파적 이익, 권력탈취의 수단으로만 이용하려는 자들의 추한 언어만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검찰 권력은 정치적 이익을 가늠하기에 여념이 없다. 오히려 정의가 실종되도록 하는 추동력만 존재하는 기이한 형국이다. 


비판은 폭넓게 열려 있어야 한다. 이것은 협의의 자세를 내포한다. 머리를 맞대고 숙의할 의향이 없다면 비난이 되어버린다. 더구나 비판에는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가 있다. 이 사회가 오랜동안 축적한 예의와 문명이 그어놓은 한계선 말이다. 혐오와 적대감, 분노의 원망만이 서린 언어를 뱉어내면서 비판이라 하지 말자. 그건 욕설이고 모욕이며 악의이다. 이것은 오직 갈등과 분열로 향한다. 모두가 저마다 나만 정의롭고 도덕적 인간이라 한다면 아무도 정의롭지도 도덕적이지도 않다는 얘기 아닌가? 


한국 사회의 또다른 특징 하나를 말하면서 맺어야 할 것 같다. 한국사회는 미디어의 성향 혹은 수준이 어떻든 미디어에서 주목 받는 사람들이 담론의 변화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한 곳의 으뜸이라고 한다. 《슈피겔 》의 전 편집국장인 '한스 페터 마르틴'의 말을 빌면 독일을 비롯한 유럽사회의 경우 이들이 담론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작다고 한다. 한국인의 미디어에 대한 맹목적 신뢰를 지적하는 말이다. 여기 푸코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담론 형성에 참여 할 수 있는 자는 이미 기득권자이다. 대담자들 자신들은 기득권 계층에서 제외된 사람들처럼 말한다. 대담자들은  관조적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들이면서 아닌 채 하는 것은 위선이며 기만이 된다.


시민 대중은 기득권 계층이 누리는 불공정한 권리를 이제 내려 놓으라는 것이다. 뉴노멀을 말하는 자는 지금 우리가 준비하고 숙고해야 할 새로운 가치가 무엇인지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왜곡된 노동의 가치가 편성해 놓은 직업 계급의 재편이기도 하며, 성장을 축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그 무한 운동성의 붕괴를 대체할 가치경제의 새로운 이해이며, 사회적 거리두기와 같은 상시화 될 생활 환경이 빚어 내는 삶의 운영을 위한 무수한 가치들이지 않겠는가? 


시민전쟁을 부추겨 시민들 삶의 평화와 안정이 획득된다고 말하지 말자.  "이명박-박근혜 정권과 치열하게 싸웠던 '우리'"라고 말하지 말자. 감히 우리라고 하는 대담자가 아니라  시민들이 싸웠다. 민간인 사찰로 고통을 겪었나? 진짜 서러워하는 시민의 마음을 끌어 안아본 것인가? 지금 절망하고 있는 시민들이 보이는가? 그들이 너절한 미디어 채널의 서로다른 정체성을 선전하며, 상대를 향해 악의 독설을 배설하는 말들과 영상을 볼 시간이 있을 것 같은가? 무너지고 사라지고 물구나무 선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분열의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 그 자신들이지 않은가?  그 손가락질은 가장 먼저 자신에게 향할 때 민주주의는 바르고 곧게 선다.  기득권 수구세력을 위한 이이제이(以夷夷)전술적 도구가 되지 않기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그리스, 스웨덴, 덴마크..., 우익, 극우 정권이 들어 선 이들 유럽사회를 반면 교사로 삼는 지혜가 필요한 때임을 잊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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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되는 민주주의 가치들, 탈출구를 찾아서 | 인문,사회 2020-09-12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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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게임 오버 GAME OVER

한스 페터 마르틴 저/이지윤 역
한빛비즈 | 2020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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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은 기득권층에 저항해 새로운 자의식과 힘을 모색하는

인간 역사의 중요 사건으로 기록 될 그러한 시대에 들어섰다.”

- 본문 243쪽 중에서(부분 변형 발췌)

 

굳건하게 믿어오던 우리네 행위가 의지하던 가치들 - 평등,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 정의(공정성) 등등 - 이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분석, 규명하는 빼어난 통찰들이 끝없이 지금 이 세계 주요 담론 중 하나로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다. 사실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극우화하는 권위주의와 새로운 민족주의의 대두, 상실되어가는 시민 연대 가능성, 가짜뉴스와 음모론이 조장하는 분열주의에 숨은 수구적 기득권의 파렴치함 등은 이제 그 어휘에서조차 피로감이 느껴질 만큼 반복된 언어들이다.

 

이 책 게임 오버(Game Over)도 믿어왔던 가치들, 저자는 서구 세계가 쌓아 온 문명화 모델이라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이 상황 종료! 에 직면하였음을 선언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동일한 언어의 반복에 가깝다 할 수 있다. 다만, 저자가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는 독일을 중심으로 서유럽 국가들과 미국, 그리고 독재적 전체주의 시스템을 선전하고 있는 자본 대국 중국을 통해 변화하고 있는 세계 질서와 변질된 가치들의 형태와 양상을 이해하고, 추락하는 세상의 고통 고발이 한국 사회가 마주한 현안이거나 곧 다가 올 현실이기에 유용한 참조가 되어 준다.

 

12장으로 구성되어 1~9장에 이르는 9개의 장에서는 민주적 가치들의게임오버를 선언할 수밖에 없게 된 오늘의 세계를 분석, 조명하고, 이후 3개의 장에서는 일종의 출구 전략을 제시하고 있지만, 단연 세계를 하나의 중국으로 만들겠다는 야망이 빚어낸 그 파괴적 파급력을 말하는 이미 시작된 세계사회의 위기와 균열을 말하는 제2장과, ‘서구 사회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거부했는가라며 감정의 정치를 이용한 엘리트 기득권 계층의 민족주의의 민낯을 폭로하는 제 4장은 아마 이 책의 실질적 본질이며 비범한 통찰의 핵이라 할 것이다.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

 

 

중국이 강대국으로 재부상하겠다는 차이나 드림을 가로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習近平)

 

비약적 경제성장을 발판으로 완벽한 시민감시를 통해 권력기반을 공고하게 한 중국 정치 엘리트들은 자본주의는 자신들의 감시공산주의에서 더욱 꽃을 피운다는 듯, 그들의 독재적 전체주의 시스템을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선전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이식하던 서구사회의 기대와는 달리 중국의 시장은 결코 민주주의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으며, 이제 중국의 시장에 목을 맨 대다수의 경제 선진국들은 그들의 의지에 맞설 힘을 상실했다. 시진핑의 담대한 선언은 결코 공상적 기대의 말이 아니다. 독일 최대은행인 도이치방크의 최대주주, 세계 최고의 자동차 생산기업 다임러의 최대주주가 중국의 보험회사라는 것은 세계 자본의 헤게모니를 누가 쥐고 있는가?를 굳이 물어 볼 것도 없음의 증거이다.

 

이제 중국은 자신들의 이익에 토대를 둔 국제 규칙을 만든다. 중국 투자에 대한 제한 강도를 높이려던 유럽연합은 대규모 부채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에 중국의 압력에 굴복했다. 중국의 거대한 투자를 받아들이고, 중국식 전체주의 체제를 수입하기 시작한 헝가리, 체코, 그리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에스토니아, 알바니아..., 세계화의 덫에 서구 자신이 급사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일례로 전 세계에서 벌어들이는 영업이익의 50퍼센트를 중국에서 거둬들이고 있는 다임러가 자신들의 생산시설에서 스파이 노릇을 할 중국의 사이버보안법을 받아들이고, 자국(독일)의 법규를 개정하는 데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자본가의 탐욕과 중국의 퇴행적 시스템이 결합하는 고리가 됨을 보여준다.

 

런던정치경제대학, 케임브리지대학의 교수가 중국 공산당의 요구로 자리를 언제든 박탈당할 수 있다면 이를 믿겠는가? 이것이 현실이란 것이다. 중국은 세계인권선언(UDHR)’의 내용 중 의사표현의 자유와 고문금지규정을 자신들의 인권규정에 포함시키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외교부장 왕이는 중국은 여러 인권 조약을 실천하는 본보기로 꾸준한 인정을 받고 있다.”라며 거리낌없이 거짓 주장을 편다. 중국은 그 누구에게도 민주주의를 허락하지 않겠다며, 우리만의 역사를 쓸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새로운 세계 권력을 제재하려는 미국에 유럽의 국가들이 동조하지 않는 속사정이 여기에 있다. 중국이 실패하면 자신들에게 경제적 파장, 정치적 변화의 심각한 고통이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중국의 자본주의적 감시공산주의를 전면 수용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형국이란 것이다.

 

지금 미중 무역전쟁이 심화되고 있다. 그 파급에서 우리 또한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 이 거대제국이 뒷걸음질 치고, 붕괴되는 것이 과연 이롭기만 한 것인가? 아니면 그 변화가 몰고 올 새로운 질서를 위한 고통의 감수가 필요한 것인가? 이것은 경제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와 체제적 가치의 문제를 포함한다. “2017년 이후 전 세계에서 기업경기 실사지수(BSI)와 구매관리자지수(PMI)가 뒷걸음치고 있다고 한다. 급기야 20201월 이후 세계적 경기침체를 야기한 코로나 팬데믹은 세계 경제 질서를 더욱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변화된 경제 환경은 정치 행태, 정책의 변화, 새로운 방향의 사고를 요구한다. 한국 사회의 격화되는 적대와 갈등이 이러한 세계 경제와 정치질서의 현상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경시할 수 없는 이유이다.

 

 

우경화와 권위주의의 부활

 

 

이미 프랑스를 비롯한 이탈리아, 덴마크, 벨기에, 오스트리아...유럽 나라들은 우파 또는 극우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다. 난민유입이라는 정체성의 문제로 촉발되고, 자본의 탐욕을 헤집고 침투한 중국의 자본은 경제위기와 불평등의 확대심화, 게다가 신기술의 발달로 인한 일자리의 감소로 대중적 불안을 확산시킨다. 이는 수구세력의 부활 가능 도구로 이용되고 신민족주의라는 변화된 극우 세력을 출현시켰다.

 

유럽 사회가 이렇게 우경화되고 있는 원인의 역학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오늘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양상으로 인해 주의가 집중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유럽사회는 난민의 유입으로 인한 민족적 정체성이 대두되었지만, 한국 사회는 지역적 정체성이란 현상으로 혐오와 적대감이 표출되고 있다. 선거 행태는 정체성의 확립과정이라고 한다. 한국사회의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거대 여당과 지역당에 가까운 야당으로 끝났다. 정체성이라는 기본 감정을 자극하고 부추겨 원망 집단을 형성하는 것은 보수 세력의 오래된 전술이라는 점에서 유럽이나 한국이나 그 차이가 없다.

 

행동경제학자인 취리히대학의 에른스트 페르교수의 연구 결과처럼 정체성 표현의 통로였던 선거 결과의 패배는 무시당했다는 근거없는 맹목적 분노를 고착시킨다는 것이다. 이 맹목성은 원망으로 자의식을 형성시키고 개인적 인정 욕구가 부인되었음으로 연결되어 거부 역학을 강화하며, 이 충족되지 못한 인정욕구의 실체는 복수심으로 발현된다고 지적한다. 이 원망 집단은 형성된 적대 감정을 그대로 사회에 투사하는 데, 수구 우파 세력에게는 집권 세력의 비난 도구로 더할 나위없는 동조 세력이라는 것이다. 집권 세력의 모든 정책에 대해 부정과 악의를 쏟아내는 것은 이러한 정체성의 역학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농부는 이웃의 소가 늘어날 때, 하나님, 제발 이웃의 소가 줄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처럼 부정의 메커니즘에 침몰되는 이 정서적 현상은 감정의 정치를 돌아보게 한다.

 

이처럼 정체성의 맹목성은 우파세력 성장의 중요한 영양분이 된다. 여기에 어떠한 진실이나 올바름은 문제되지 않는다. 그저 유일한 동기는 같은 지역, 혈통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미워하는 자를 그들도 미워한다.”는 기본감정만으로 충분히 작동한다는 데 있다.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이 부정의 메커니즘을 내면화한 사람들, 원망 집단이 토해내는 거짓과 호도의 성격이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자기 인지 범위를 바탕으로 정의를 이해하기에 가능한 것인데, 이것을 실행할 때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을 덧붙이며 이 자기기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공정한 것만을 고려할 뿐 타자의 이로움에는 무관심할 뿐 아니라 제3자 심판의 입장에서 공정을 묻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혐오와 갈등의 촉발, 분열이라는 부정성으로 분노를 해소하는 것, 그 맹목성, 가치에 대한 목표가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이로인한 사회적 가치 실현의 지연과 후퇴 등 사회적 비용을 가중시키고 자유라는 명목으로 책임을 회피, 전가하기에 그 피해를 고스란히 공공에게 떠넘긴다는 것이다. 사실 이들의 집단화, 혹은 정치적 권력화는 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대중의 몫이니 굳이 그 정치적 결과를 논의하는 것이 사족에 불과할 듯하다.

 

 

지금,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성공적 정치가가 되기 위해서는 정확한 겉모습을 내 보일 줄 아는 기술이 필요하다.”

- 마키아벨리, 군주론

 

 

상황에 자신을 최적화시키는 약삭빠른 자들, 배후에서 나온 음모론을 믿고, 조작된 인터넷 게시판에서 위안을 찾으며, ‘저 윗놈들에 대한 분노에서 자양분을 얻어”, 거짓이 아니라 대안적 사실이라는 황당한 담론을 쏟아내는 자들 역시 언론 산업 주요 분야의 배후 엄호를 받으며 자신들의 입지 형성에 열을 올린다. 역시 자신들만이 정의의 전도사란 듯이. 마키아벨리의 말은 틀렸다. 누구나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성공적 정치가라 할 수 없다. 진짜배기는 속 알맹이, 진정성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그 지향성에 대한 사유와 이해를 요구하며, 기술이 아니라 오늘날 시민적 가치에 대한 공감의 정책이다. 무능한 이라는 수식어를 마치 독점적으로 사용할 권한을 지닌 것인 냥 비난의 언어에 실어 뱉어내는 자들의 기회주의적인 무책임성은 이러한 포퓰리즘에 기인하는 듯하다.

 

아마 도널드 트럼프만큼 이에 능한 자도 없을 것이다. 예의와 문명이 그어놓은 한계선을 무용화시킨 사람, 대중의 맹목적 감정을 부추겨 정치에 이용할 줄 아는 사람, 우파 극단주의자들이 환호작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트럼프 역시 정체성 정치를 끌어들였다. 백인 중심주의, 그래서 나머지는 적이 되고 백인집단은 똘똘 뭉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아무런 정치적 견해도 없는 자, 다만 자기 이익 실현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다는 탐욕스런 의지만 있다.

 

무역전쟁을 본격화한 것은 대통령 재선을 위한, 즉 권력의 연장을 위한 이기심을 기반으로 한다. 역사 경험이 무역전쟁은 패자밖에 없다는 것을 그의 똘똘한 참모진들이 모를 리 없지만 대중을 향한 행동으로서는 이만한 포퓰리즘적 성과가 있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기에 시작된 것이다. 시간이 지난 뒤 무역전쟁의 희생이 드러날 때면 새로운 전쟁으로 통화 전쟁을 예고하고 있다는 저자의 선견은 다가 올 세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음모기획과 가짜뉴스가 활개치는 환경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시키고, 이는 우경화된 수구세력의 전체주의적 의지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준다. 우파 극단주의자들의 폭력적 시위의 예고, 이들의 경찰력 무력화 시도를 통한 공권력의 훼손 유발, 폭력 격화의 도화선을 만들어내려 하는 반사회적 행위가 대중의 삶을 얼마나 피폐화시키는 지, 앞선 유럽사회들의 현실이 반면교사가 되어준다.



 


한스 페터 마르틴은 바로 오늘, 세계에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나라가 한 줌도 되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그는 전 세계가 한국에 희망을 걸었습니다.”라고 한국어판 서문을 열고 있지만 한국사회의 현실은 한 줌의 나라에 더 이상 버텨내기 어려울 정도로 폭력적 언어의 무자비함으로 무장한 사회 근간을 흔드는 기득권 세력과의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함께 살아가는 전체의 가치를 존중하는 다양성, 균형잡힌 부의 합리적 분배추구, 의사표현의 보편적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지만 사회적 결속에 대한 거부와 불평등, 불안정을 항구화하려는 수구 정치 집단의 끊임없는 이러한 갈등 국면의 조장은 뉴노멀을 향한 새로운 가치 정립의 실행을 지연시키고 좌절시킨다.

 

나라를 흔들어놓기 좋은 전술은 이 같은 지속적인 언어 공격이다. 황색신문으로 자리매김한 조중동을 비롯하여 아무나 개설할 수 있는 각종 온라인 채널들, 사유를 요구하지 않는 단문 메시지의 용이함 등은 인간의 자의식을 공격하기 위한 기막힌 터전이 되어준다. 공격 비용은 거의 들지 않지만 방어에는 엄청난 비용이 소용된다. 저자는 과연 민주주의는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를 무력화시키려는 극우주의와 포퓰리즘, 책임없는 무한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기회주의자들이 판치는 현실을 계속 좌시만 할 것인지를 묻는지도 모른다. 게임 오버의 선언을 할 때는 이미 모두 추락한 뒤일 것이다. 어느 누가 이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오늘 기만적 언어를 쏟아내며 선동하는 수구 세력과 이에 황색언론이 키워 낸 기생하는 소수 담론 계층 등 소위 엘리트층 이라 불리는 자들의 악취 나는 배설된 언어가 시민 대중의 마음에 가닿지 않으리라. 백서를 쓴 자, 흑서를 쓴 자들, 시민 대중의 황폐한 삶을 보듬을 줄 모르는 자들,  모두 입을 다물라!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대중과 소위 엘리트층이라 불리는 논객들의 언어와 믿음과 가치의 괴리가 극복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고 여겨진다. 이제 저자의 제안처럼 추첨으로 구성된시민위원회를 출범시켜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 세계의 파멸적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이들에게, 사회적 연대의 회복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그 출발 가능 지점을 들려 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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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가족 시대의 음울한 초상, 그 병리학에 대해서 | 에세이,평론 2020-09-11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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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기생충과 가족, 핵가족의 붕괴에 대한 유쾌한 묵시록

고미숙 저
북튜브 | 2020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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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거 자체가 길 위에 나서는 거고, 길 자체가 삶이에요.”  - P 120

 

 

유튜브의 한 채널에서 강연된 내용이가족 특강이라는 시리즈의 제 1권으로 출간된 저작이다. 책의 제목 중 기생충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그것이다. 물론 이 어휘가 의미하는 것은 생물학명이라기 보다는 서로 다른 종류의 생물이 함께 생활하며, 한쪽이 이익을 얻고 다른 쪽이 해를 입고 있는 일. 또는 그런 생활 형태.’라고 하는 사전적 의미로 사용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족이란 오늘의 전형적 가족 구성형태인 혼인한 성인남녀와 그들의 자녀로 구성된핵가족이다.

 

기생충을 관람한 이들은 영화 속 가족이 모두 핵가족임을 상기할 수 있다. 게다가 송강호가 분()한 김기사 가족의 생활형태가 사전적 주석과 일치하는 기생, 바로 그것이니 이 책은 영화 기생충을 통해 핵가족에 내재된 섬뜩한 반생명적, 반사회적, 병리학적 현상을 발견 규명하여 그 음침하고 교활하며 야비한 위악의 리얼리즘을 벗어나고자하는 변화의 모색이라 할 수 있다.

 


WARMING-UP (준비 운동; 데우기)

 

본론에 돌입하기 전에 저자 고미숙은 봉준호의 기 발표 작품들인 괴물,설국열차,옥자를 통해 문명의 폭력성, 기술의 오만, 욕망의 무한 증식을 향한 탐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세 영화의 가족에는 엄마가 없다. 소위 결손 가정이거나 기이한 가족 구성을 하고 있다. 엄마가 있는 스위트홈의 핵가족이 아니기에 오히려 이들은 결코 외부와 단절된, 타자와 경계를 둔 그런 사람들이 아닐 수 있다. 그리고 모두 가느다란 하나의 탈출구를 제시하며 막을 내린다.

 

미군이 한강에 버린 독성 폐기물로 인해 출현한 괴생명체인 괴물을 고미숙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큰 몸집, 거대한 입, 입안에 입, 그리고 또 입...”, 무한 탐욕의 상징물임을 알려준다. 생태계 오염이라는 거대한 재앙과 이에 대한 국가 시스템의 부조리함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테다. 설국열차또한 지구 온난화에 대한 기술문명의 오만, 사건을 대하는 인간 태도의 어리석음, 그리고 멸망한 인간종족의 유일한 생존집단인 열차에서 조차 계급사회를 구성한다는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종자임을 확인하게 한다.

 

그런데 모두 지배 계급이 있는 앞 칸으로의 전진만 생각한다. 여기서 저자의 시니컬한 변은 걸작이다. 앞으로 가는 건 기차 바깥의 세상을 일체 상상조차 하지 않는 것, 끝에 가봤자 뻔한 것, 자본주의 생태계란 것이 정점에 오른들 우월감 이외에 대체 뭐가 있다는 것이냐고 반문한다. 앞이 아니라 옆 칸으로 뛰쳐나가는 것, 그래야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기생충」 -  핵가족의 묵시록

 

Game over를 쓴 독일 슈피겔지() 편집국장을 역임했던 한스 페터 마르틴오늘의 세계는 많은 사람들이 꿈꾸던 안정적인 발전같은 것은 이제 없다. ‘극단적인 불확실성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진단처럼 신분과 계층의 사다리를 오를 정상적인 수단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일까? 영화의 핵심 키워드라 할 수 있는 김기사(송강호)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는 대사는 망가진 혼돈의 이 세계에서 소위 성취라는 걸 어떻게 하는 지에 대한 전형의 제시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중요한 것은 꿈이 아니라계획이란 것이다. 누군가를 밀어내고 내 자리를 확보하는 것, 내년에 갈 대학이기에 미리 당겨쓰는 것, 이게 계획이 되는 거다. 사기꾼의 방식인가? 아니, 우리 모두가 사용하는 삶의 방식이 아닌가? 대출 받아서 쓰고, 투자 받아 쓰고..., 그러니 이들에게 죄의식이 없다거나, 미안함과 같은 양심도 없는 인간이라 매도하는 것도 자기 얼굴 침 뱉기가 될 수도 있다. 지금의 인간 생태계에 지독하게 적응한 인간들이라 해야 하지 않겠나?

 

()이 다른 을()을 어떻게 대하는지 박사장네 가정부 문광이 지하에서 올라 올 때 발로 차 죽게 하는 것으로 설명이 족할 것이다. 소통, 연대가 아닌 그냥 밟아서 치워 버려야 하는 존재라고 사회가 가르쳐 오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지상에 작은 창이 간신이 걸린 반지하의 창도 없는 지하의 삶이 등장 하는 장면은 가히 충격, 어떤 당혹감을 기억해 내게 한다.

 

김기사의 아들 기우와  딸 기정이 박사장네 저택에 진입하는 과정의 수단들과 그것이 성공하는 장면들에는 날카로운 이 사회의 일상적 삶의 모습들이 꼼꼼하게 투영되고 있다. 디지털 문명이 초래한, 이를테면 인스타그램에 노출된 상위 계층의 태도와 경험까지 배워 동일해진 욕망의 내재화는 이들의 현실과 이상의 구별을 지워버린다. 사실 핵심은 이제 부터다. 김기사네가 박사장네에 자연스레 기생이 가능토록 하는 근원적 배경, 환경적 토대라 해야 할까?

 

핵가족이 지닌 폐쇄성인데, 등장하는 세 가족 모두 타자와의 연결 고리가 한없이 취약하다는 데 있다. 광현 부부, 김기사 가족, 박사장 가족, 이들 모두 우리는 가족이야.’를 내면화한 채 외부 세계는 그저 정보를 주고받거나, 밟아 뭉개야 하는 존재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외부가 없다. 부자는 부자이기에 타자와의 접촉을 경계하고, 가난한 자는 올라서기 위해 타자를 혐오한다. 여기에 그 폐쇄성의 장막이 얼마나 관계에 취약한지는 박사장 부인의 영앤심플(Young & Simple)이라는 맹함은 오히려 양념에 불과하달 것이다. 타자에 대한 불신과 경계가 기우와 기정이라는 터무니없는 인간들의 진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니 핵가족, 즉 가족 이기주의가 자기 파멸적 구조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니들과 우리로 구별하면서 인간 감각의 가장 원초적인 후각, 냄새 타령을 하는 박사장, 그가 얼마나 타자를 견디지 못하는 지에서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아무런 공감도 잣대도 없음을 목격하게 된다. 냄새라는 어휘에 민감한 것은 김기사 또한 그 대척점에 있다. 가난의 냄새, 그 콤플렉스가 살인으로 이어지는 것은 서로를 인정할 외부가 없는 이들의 불가피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저자 고미숙이 지적하듯이 핵가족, 스위트홈이라는 환상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정작 그 속에 사랑도, 삶이라는 인생행로에 대한 서로의 응원이란 것도 부재하다는 것이다. 어린이날, 생일, 이런 범주의 특정일에 핵가족들이 하는 행동이란 아마 상품과 이벤트 이외에 무엇이 아닐 것이다. 그저 마시고 먹고 쇼핑하는 소비, 그리고 화폐로만 이루어진 관계가 스위트홈의 정형화된 묘사라는 데 이의를 달기에는 변명거리가 너무 없다.

 

그런데 이 영화가 정말 무서운 것은 살인과 죽음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기우가 아버지 김기사에게 하는 자기성찰이란 아예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던지는 말이다. 아버지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세요.”,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는 한 치의 변화도 없는 욕망, 보편적 윤리란 것이 싹 거둬진 탐욕만이 여전히 넘실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당하는 모멸감에만 반응하며 타자에 대한 공감 능력이란 아예 존재치 않는 인간들이 바로 오늘 이 사회 우리들의 초상임을 발견해내야 한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결론 -  핵가족 폐쇄회로 탈출하기

 

겉보기에 안정적이고 화목하며 단란한 우리 가족이라는 스위트홈, 핵가족에 담겨있는 진실이란 이처럼 음울하고 반생명적이며 위악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정작 핵가족을 해부하고 보니 거기엔 공감의 세계도, 윤리도,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이다. 오직 소비와 화폐의 욕망만 있더라는 것이다. 괴물」「설국열차」「옥자에 엄마가 없었기에 가능했던 한 가닥의 통로가 기생충에 와서는 막혀버린, 사방이 완전 봉쇄되어버린 것이다. 어디에도 길이 없는 데 이제 어쩔거야!”라고 묻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끔찍한 계획을 버려!”라고 말한다. 명문대를 가야해, 공무원이 되어야 해, 30평 이상 아파트를 사야해,...(...) 핵가족을 꽁꽁 묶어 놓는 우라질 계획’”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계획의 삶을 살아내는 것, 즉 생명 차원에서의 연대, 세상을 향해 나가도록 힘차게 응원해주는 관계, 길을 나서는 베이스캠프, 생명의 플랫폼으로 변환하는 길을 모색하라고 제안한다. 오늘 우리네 사회의 이 무수한 혐오와 적대가 빚어내는 갈등들의 밑바닥에는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계와 단절, 개인들의 무한 탐욕을 근본으로 하는 핵가족, 그 구성원인 우리들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내가 변해야 하고, 내 가족이 변해야 한다. 너와 너희들에게 변하라고 말하기 전에. 비난의 손가락이 타자를 향하기 전에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먼저 향해야 세계는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팸플릿 분량의 짧은 글이지만 그 압축되고 정리된 문장들은 감당할 수 없는 불균형과 불안의 시대인 오늘, 그 꽉 막힌 듯한 모두가 원치 않는 세계에서의 탈출구를 찾기 위한 예리하지만 연민 넘치는 통찰의 혜안이 넘친다. 세계인이 공감한 문제작과 냉정하고 비범한 분석과 함께 하는 놀라운 각성의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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