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품격과 존엄의 포퍼먼스
2000년대 후반부터 우리 사회에 ‘품격’이라는 말이 공적 영역에 등장하며 품격있는 국가를 만들자는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이때 의미한 품격은 법과 질서를 잘 지키며 자신의 지위, 역학, 역량, 신분에 맞는 행동으로 국격의 품위를 지킬 수 있는 개개인이 되자고 강조했다. 그런데 이런 품위를 지키기 위해선 누군가의 도움이 뒷받침되어 품격이 유지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존엄’은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가치로 모두가 동등한 수준으로 보유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상위층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품격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쉽게 발휘할 수 있지만, 인간적인 존엄을 보장받지 못한 사람은 품격을 유지하기 힘들다.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상호작용하는 것과 존엄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내는 포퍼먼스는 다르다. 국회위원들이 복지관과 같은 곳에서 하는 품격 유지 포퍼먼스엔 상대방과 만들어내는 상호작용의 시너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역할에 집중하는 것이다. 반면 서로를 인격체로 존중하는 상호작용은 실재를 공유하면서 그 존중을 강화하는 것이다. 존엄은 상대를 환대하고 그 환대를 다시 환대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극명하게 빛나는 순간은 서로가 서로의 연기를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는 때이다. 품격이 상대방을 적절하게 접대하는 연기에 의해 구성된다면, 존엄은 상대를 환대하고 그 환대를 다시 환대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본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대우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서로를 대우할 때 비로소 존엄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p.71)
3장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부정한다.
죽음조차도 기획하며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사람들조차 장애인이 되기를 거부한다. 장애를 안게 되면 죽음의 이유가 장애 때문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이처럼 죽음까지 퍼포먼스로 삼는 인간이 있는 반면 가장 열악한 실존을 감내하면서도(수치심을 견뎌내면서도) 살기를 선택하는 자들은 극명히 차이가 난다. 전자는 품격을 위해 삶을 존중하지 않지만, 후자는 삶을 존중하기 위해 품격에 부여된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가치의 부채를 감내한다.
한때 국회의원이던 그녀가 장애인 목욕을 돕는다며 퍼포먼스를 했던 장면이 언급되는 데 나 또한 그때 상황에서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불편했던 마음의 해답을 이 책에서 답을 찾았다. 그 국회의원의 쇼에 등장하는 장애인은 단지 국회의원의 품격 유지를 위해 등장하는 소품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국회의원이나 상위층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며 나 또한 결코 타인을 도구로 한 퍼포먼스를 한 적이 없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존엄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에서 품격은 한낱 몇몇을 위한 겉치레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