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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 일반 2017-11-23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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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모티머 J.애들러,찰스 반 도렌 공저/독고 앤 역
멘토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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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법의 고전^^ 무조건 읽어야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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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티머 애들러와 찰스 반 도렌이 공저한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은 독서법의 고전이다(독서법에 대한 책을 읽으면 대부분이 이 책을 인용하고 있다). 1940년에 최초로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72년에 개정하여 출간되었다(물론 이 후에 개정2판이 출간).


이 책이 말하고자하는 핵심은 모든 책을 똑같은 속도로 똑같이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책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적절한 속도로 읽는 능력을 갖춰야 책을 제대로 읽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제1부 '독서의 단계'에서 독서의 목적과 이유를 분명히 해야한다고 말한다. '정보를 얻기 위한 읽기'와 '이해를 하기 위한 읽기'가 있다는 것이다. 능동적인 독서를 하기 위해서는 그 책이 어떠한 책인지를 빠르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체계적으로 훑어보는 방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제2부 '분석하며 읽기'에서는 더욱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분석하며 읽기의 1단계는 그것이 무엇에 관한 책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2단계는 내용을 해석하는단계이며, 3단계는 지식을 잘 전달하고 있는지 비평하는 단계이다. 이러한 모든 단계마다 구체적인 실천사항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제3부 '분야별로 다르게 읽는 법'에서는 실용서적, 문학서적, 소설, 희곡, 시, 역사서적, 과학서적과 수학서적, 철학서적, 사회과학 서적을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읽을 것인지를 조목조목 이야기하고 있다.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모든 책을 똑같은 속도와 똑같은 방법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종류에 따라 다르게 읽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다. 

제4부 '책 읽기의 궁극적인 목적'에서는 사회과학서적에 집중하여, 통합적인 읽기에 대해서 할애하고 있다. 다소 어려운 책읽기 방법이긴 하지만 한가지 주제나 이슈에 대해서 다양하고 많은 책들을 비교분석하여 정리하는 책읽기의 방법이다. 

그는 마지막장인 21장 '책읽기와 정신의 성장'에서 좋은 책을 읽는 유익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좋은 책을 읽는 유익은 첫째로 좋은 책을 붙잡고 씨름한 댓가로 책을 읽는 기술을 향상시켜주는 것이며, 둘째로 (훨씬 더 중요한 댓가인)이 세상과 독자 자신에 대해서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 안에 있는 책을 읽어도 실력이 늘지 않는다. 능력 밖에 있는 책, 당신의 머리를 넘어서는 책을 붙잡아야한다. 그래야만 정신을 확장시킬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배울 수 없다.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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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칠 수 있는 용기 | 일반 2017-11-23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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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가르칠 수 있는 용기

파커 J. 파머 저/이종인,이은정 공역
한문화 | 2013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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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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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파커 J. 파머(Parker J. Palmer)는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과 『삶이 내게 말을 걸어 올 때』를 통해 만났다.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에서도 저자는 가르침의 공간에 대해서 강조한다. 그 전에 대학교를 졸업하려던 시기에 만났던 책이『삶이 내게 말을 걸어 올 때』였다. 이 책은 객관적 정보를 주는 책이라기 보다, 저자의 삶을 통해 울림을 주는 책이다. 파커 파머는 소명이라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선물을 인식하고, 잘 들음으로 얻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특별히 “가장 어려운 일은 남의 고통을 ‘고치겠다고’ 덤벼들지 않는 일, 그냥 그 사람의 신비와 고통의 가장자리에서 공손하게 가만히 서 있는 일이다”와 “정체성이란 우리가 수행하는 역할이나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배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정체성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간단한 사실에 달려 있다.”라는 글귀는 오랫동안 나의 뇌리와 가슴에 남아있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는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을 더 확장하고 구체화한 듯하다.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에서 충분히 다루지 못했던 부분들이나 예화들이 더 풍성하게 담겨져있으며, 더 교육적이고 일반적인 느낌을 가졌다.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이 교육과 영성을 모두 잡으려 했다면, 『가르칠 수 있는 용기』는 과감히 영성의 색을 버리고 교육적 요소에 집중하고 있다. 물론 저자 자신의 삶의 맥락과 과정을 봤을 때, 충분히 사회와 소통 가능한 언어를 가졌으며, 그럼에도 곳곳에서 기독교 영성가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는 교사들의 존재와 내면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는 다른 교육학 책에서 볼 수 없는 색다른 관점이며, 과감한 도전이다. 교육이 잘 일어나기 위한 방법론적 접근을 하는 책은 많지만, 교육을 함에 있어, 교사의 내면을 다루고 있는 책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내면을 다룰 때도 추상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는 실제적이며 경험적인 언어로 내면의 역동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언어는 교육의 일선에 있는 많은 사람들(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사만이 아닌)에게 공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결국 가르치는 사람은 우리 자신이며, 우리는 자아를 가르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교육의 ‘내용’(What)과 ‘방법’(How)에 집중하지만, 우리는 교육에 있어 ‘왜’(Why)라는 질문과 ‘누구’(Who)라는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져야 할 것이다. 근본적이고 실존적인 고민이 뒷받침되며, 핵심적이고 중차대한 부분에 접근해야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성장이 일어날 것이다. 또한 어디 하나에 편중되거나 치우친 관점이 아니라, 지성과 감성, 영성의 3대 노선을 적절하게 취하면서, 그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영성의 강조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일반 교사를 대상으로 한 책에서도 기독교 영성가의 모습을 보인다는 근거이며, 그 동안의 파커 팔머의 삶을 볼 때 충분히 납득가능하고 일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청년사역을 하면서 청년 리더들에게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은 ‘자신의 마음 속에 가장 큰 영향력을 준 것이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많은 소그룹에서 성경공부와 예배와 사역의 3대 요소를 적절히 배치하여 잘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질문의 답에 그들은 성경공부나 예배나 사역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은 바로 ‘사람’이었다. 자신을 섬겨준 리더일 수도 있고, 함께 소그룹에서 뒹굴었던 멤버일 수도 있다. 


이 책에서도 교육에서 일어나는 많은 변화들의 핵심에 ‘사람’이 놓여있다고한다. 결국 교육은 자아의 내부에서 지혜의 핵심을 뽑아내려는 노력이다. 우리의 정체성과 불가분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관계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하지만 많은 교육자들은 자신의 존재와 내면에 대한 관심보다는 바로 눈 앞에 놓여있는 겉으로 보이는 것들을 해결하기에 급급하다. 자아정체성의 확립과 성실성이 겸비되지 않는다면 참된 교육이 일어나는 일은 어려워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가르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의 능력 뿐만 아니라 존재나 인격까지도 비방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공포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지를 알 때에 학생의 공포를 이해하며 함께 끌어안을 수 있다. 이러한 공포는 다양한 이유로 야기된다. 공포를 발생시키는 사회구조악이 있다. 분열되고 깨어진 사회는 서로를 경쟁상대로 인식하며, 함께 공존하는 것에 어떤 유익이 있는지를 잘 알지 못한다. 공포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지식은 명제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지식은 혼자서 독단적으로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지식은 타자와의 일체감을 이루는 방식이며, 언제나 상호연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우리의 돌파구는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될 때 큰 고통을 겪게 된다. 하나의 돌파구는 공포를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를 인정하고, 공포 그 자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두려움은 어떠한 관점으로 그것을 해석하는가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우리가 그 동안 배워왔고 쌓아왔던 다양한 정보와 지식은 새롭게 정리되어지고 갈아엎어지고, 통합되어져야한다. 그래야만 온전하고 통합적인 관점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다. 우리의 교육도 이러한 관점의 변화 가운데서 보아야 한다. 능력을 추구하며,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는 세상의 현실에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역설적 사고방식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역설적 사고방식은 우리에게 양극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관을 수용하라고 요구한다.


저자는 커뮤니티를 강조한다. 혼자만의 힘으로 기존의 사고와 체계를 바꿀 수 없다. 갈수록 서로의 동료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현실태는 더욱 교사를 고립되게 만들고, 성장할 수 없게 만든다. 교사는 교실에 들어가는 순간 동료들에게도 문을 닫는다. 교사뿐이겠는가? 목회에서도 동일하다. 동료가 어떤 비전을 세워 어떻게 그 과정을 일구어나가는지 볼 수가 없다. 커뮤니티를 일구기 위해서는 성실함이 필요하다. 기존에 해 오던 것들을 기본적으로 충실히 하면서도 새로운 곳에 에너지를 많이 쏟아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체를 통해 기존의 것과 다른 다른 차원의 지식을 배우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다. 사역을 반복하면서 가지게 되는 외로움과 공허함, 자존감의 하락 등은 커뮤티를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커뮤니티에서 정직한 소통을 이루며 치열한 하지만 따뜻한 논의의 장을 만들어갈 때, 새롭고 통전적인 교육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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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 | 종교 2017-11-23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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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

케네스 E. 베일리 저/오광만 역
이레서원 | 2017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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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식 주해 방법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한 예수님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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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베일리(Kenneth Bailey)의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는 본래 Poet & Peasant의 번역서로 이전에 『시인과 농부』로 번역되었던 책이다. 저자 베일리 박사는 부친이 아프리카 지역에서 선교사로 계셔서,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본인도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이집트, 레바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사이프러스 등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중동에서의 오랜 생활을 바탕으로 신약성경을 중동의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존에 서구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왔던 것을 탈피하여, 신약성경이 쓰여졌고 읽혀졌던 그 때 당시의 상황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 문맥 가운데서 성경을 읽어야만 성경의 원래 메시지를 더욱 명확하게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중동에서의 오랜 경험은 그의 주장이 단순히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명제로 머물지 않게 해준다. 성경의 본문을 더욱 입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한다.


특히 여러 책 중 Poet & Peasant은 베일리 박사를 세상에 알린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누가복음의 비유 중에서 네 개의 본문을 택해서 팔레스타인 농부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중동의 농촌 문화와 더불어 이러한 비유들의 문학적 양식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이 비유들이 가진 핵심적인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많은 논란과 다양한 견해가 있는 누가복음 16장 1-8절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문화적이고 문학적인 자신의 해석학적 틀에서 명쾌하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은 이 책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는 방법론의 문제를 다룬다. 2부는 1부에서 제시한 방법론을 가지고 누가복음 예루살렘 여행 기사 속의 비유 네 편과 시 두 편을 분석한다. 특히 눈여겨 볼 것은 1부에서 제시한 방법론이다. 베일리 박사가 비유 연구에 사용한 해석방법론은 "동양식 주해"다. 


이 방법론의 핵심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중동의 농경문화를 이해함에 있다. 이러한 이해가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함에 필수요소가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동양어 역본들의 사용이다. 번역은 그 문화권의 정서를 반영한다. 그렇기에 베일리 박사는 아람어와 콥틱어 역본 등을 통해 팔레스타인 주변의 문화가 반영된 번역을 통해 세밀한 해석들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비유의 문학적 구조이다. 이는 이미 많은 학자들이 강조한 부분이지만, 베일리 박사는 더욱 명쾌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또한 유대인들의 삶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문학적 기법인 대구법과 수미상관법을 더 세밀하게 적용하고 발전시킨다.


이러한 해석학적 방법론을 통해 저자는 누가복음 16:1-13, 11:5-13과 누가복음 15장을 분석하고 있다. 그 동안 우리가 해석하고 적용했던 부분들도 있지만, 저자는 본문을 더욱 구체적으로 분석하며, 자신의 해석학적 방법을 하나하나 적용시킨다.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다양한 학자들의 해석과 저서들이 있지만, 베일리 박사의 이 책은 필수적으로 구비해야할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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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와 교회 | 종교 2017-11-23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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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삼위일체와 교회

미로슬라브 볼프 저/황은영 역
새물결플러스 | 2012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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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정교회를 아우르는 교회론의 집대성! 개혁교회의 응답은 어떠해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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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Miroslav Volf)의 가장 큰 장점은 자료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독해 능력일 것이다. 방대하고 폭넓은 텍스트를 다루면서도 핵심을 짚는다. 또한 그 텍스트를 적절하게 배치한다. 뿐만 아니라 적절한 비판과 대안제시는 감탄을 자아내게한다. 자칫 철학과 인문학적 사상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전혀 새로운 가치나 독특한 관점을 제시할만한데, 그는 철저히 신학적 작업을 수행한다. 그는 결코 그 중심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신학은 삼위일체 중심적이다. 그는 삼위일체의 영원한 페리코레시스적 교제 안에서 기독론과 성령론, 교회론을 재해석해낸다.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통찰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을 보여준다. 본 서평에서는 『삼위일체와 교회』의 모든 장을 다루지 않고, 핵심적인 장들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내용을 전개함에 있어 이후의 장들은 앞의 챕터들의 내용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Ⅲ장 ‘교회의 교회성’에서는 교회론에서 다루어야 할 핵심적인 내용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미로슬라브 볼프의 언급대로 교회성에 대한 질문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 즉 교회가 갖추어야 할 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일 것이다. 이것은 다름아닌, 교회의 전제조건은 무엇인가?’ 의 질문과 맞닿아 있다. 교회론은 다른 조직신학의 각론과 분리되지 않으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히 저자는 교회론은 구원론과 인간론, 삼위일체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관점을 통해서만 온전한 교회론을 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교회론은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에 근거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자연스럽게 종말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속적으로 고대한다. 한편으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 사건과 성령 하나님의 보냄 이후에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그것을 드러내야한다.


저자는 교회성의 공통된 두 조건으로 성례전과 하나님의 백성의 현존을 말한다. 초기의 자유교회 전통은 여기에 그리스도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교회의 성서적 조직을 추가한다. 볼프는 이와 같이 최초의 침례교도인 존 스미스(John Smyth)의 신학을 적절하게 활용하며, 스미스의 사상을 자유교회 전통의 핵심적 사상으로 간주한다. 이후에도 볼프는 스미스와 Ⅰ,Ⅱ장의 라칭거(Joseph Aloisius Ratzinger)와 지지울라스(John D. Zizioulas)의 교회론을 집중적으로 다루며, 이를 비교분석한다. 이는 곧 감독제와 자유교회에 대한 비교이다. 감독제와 자유교회의 가장 특이할 만한 차이점은 보편교회와 지역교회에 대한 차이일 것이다. 


저자는 보편교회와 지역교회을 연결하는 주요한 통찰들을 제시한다. 특히 공동체적 신앙 고백이 개인적이고 사적인 사안을 넘어서는 사회적이고 공적인 차원임을 말한다. 교회적 발화의 객관적 수행과 교회의 모든 개인적 구성원들의 주관적 신앙을 연결시키는 통찰도 큰 공감을 일으킨다. 다만 교회의 존재에서 직임과 성례전의 중요성을 말하는 부분에서 성례전에 비해 직임에 대한 분량이 적은 것이 아쉽다.


제Ⅴ장 ‘삼위일체와 교회’에서 볼프는 라칭거와 지지울라스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교회와 삼위일체 사이에 상응하는 지점의 가능성과 한계를 분석하고 있다. 삼위일체적 개념을 면밀하게 분석함으로서 교회의 통일성과 보편성, 상호관계성 등을 고찰할 수 있다. 즉, “삼위일체적 용어를 통해 보편화와 다수화 사이의 이원론을 피해가는 것이다(323).” 삼위일체에 대한 풍성한 이해를 통해서 교회의 교회됨에 대한 더욱 다양한 발전적 논의가 가능하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는 이미 삼위일체적 논의를 통해 교회론을 발전시켰다. 물론 서방교회 전통에서 신적 본질의 통일성이 우선되고, 동방교회 전통에서는 삼위 인격의 삼중성이 우선된다. 그렇기에 이러한 차이는 서방교회는 보편교회를 우선하고, 동방교회는 지역교회를 우선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신학적인 차이가 실제적인 현상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교회 전통에서는 교회와 삼위일체의 상응 관계에 대한 개념은 발전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학적 근거가 기독론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볼프는 자유교회의 교회론을 삼위일체적으로 재구성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모든 유비에는 한계가 있지만, 추상적이고 명제화된 개념에 비해 유비는 더욱 풍성한 이해를 함에 있어 많은 기여를 한다. 교회론적 인격과 교제의 개념에 있어서도 우리는 삼위일체에 대한 유비를 통해 더욱 풍성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비록 인간 존재는 피조물적 방식으로만 하나님에 상응할 수 있지만, 이러한 점을 인정하면서 우리의 인식을 더욱 확장할 필요가 있다. “교회적 교제는 언제나 인간 존재를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게 하는 세례와 그러한 교제가 완성되는 종말론적인 새 창조 사이에 있는 길에서 실현된다. 이 지점에서 교회는 역사적 최소치와 종말론적 최대치 사이에 존재하게 된다(333). “우리의 교회에 대한 이해는 이 사이에서 역동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볼프는 보편 교회와 지역 교회의 관계를 삼위일체의 개념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분석하고 있다. 라칭거로 대표되는 서방교회와 지지울라스로 대표되는 동방교회의 차이는 각각의 전통이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확연하게 구분된다. 우리는 제3의 길을 모색해야하며, 저자는 이를 ‘페리코레시스’의 개념을 통해 발전시키고 있다. 물론 삼위일체의 페리코레시스를 통해서 보편 교회와 지역 교회의 상관성을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교회의 교회됨에 대한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더욱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성령의 내주함’이 교회의 페리코레시스적 교제의 매우 주요한 근거로 제시하는데, 어떻게 성령의 내주함이 가능한지에 대한 더욱 구체적 설명이 있었다면(물론 논지를 벗어나는 우를 범할 수 있지만), 더욱 실제적이고 현실적이었을 것 같다. 


제 Ⅶ장에서 볼프는 교회의 ‘catholicity’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교회의 보편성이 전체성을 지향하긴 하지만, 저마다의 특정한 방식을 따라 보편적이라고 말한다. 가톨릭과 동방정교회는 ‘보편성’에 대해서 강조하지만, 정작 상대방의 교회를 인정하지 않음으로 보편성을 잃어버렸다. 즉 보편성이라는 용어를 자신들의 교회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말처럼 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논의는 항상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고자 노력할 때에만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보편성’은 언제나 통일성과 다수성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즉 전체성에 대한 이해는 그것을 요구하거나 허용하는 통합과 차별의 정도에 따라 다른 것이다. 결국 교회의 내적 문제임과 동시에 외적 문제인데, 이러한 외적 차원은 포용성과 배타성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보편성의 문제는 양적 이해와 질적 이해로 분류되는데, 저자는 양적 이해는 교회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보지 않는다. 지리적 차원에서의 보편적 확장은 교회의 결정적 특질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며 보편성의 양적 이해를 비판한다. 결국 보편성은 질적 이해로 귀결되며, 이는 충만함(fullness)으로 표현될 수 있다. 구원의 충만함이 실현된 교회가 보편적임은 모두가 동의하지만, 이를 어떻게 실제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볼프는 이를 종말론적 구도 안에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하나님의 종말론적 새 창조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 보편성은 오로지 하나님의 새 창조의 종말론적 전체성이라는 틀 안에서만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새 창조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의 영화롭게 된 백성들이 상호 내주하는 것이다(계 21-22장). 인간과 세계의 전체 역사는 심판에 의해 부정성으로부터 해방되어서 새 창조라는 포괄적 실체로 편입될 것이다. 새 창조는 따라서 그 시초로부터 계속된 창조세계 전체의 총괄갱신(recapitulation), 즉 하나님, 그분의 전체 백성, 전체 우주가 하나의 분화된 통일성을 구현할 전체성일 것이다. 그 분화된 통일성은 교제인데, 삼위 하나님이 '만유 안에 계시'게 될(엡 1:10; 고전 15:28을 보라) 그러한 교제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 전일성은 오로지 하나님의 새 창조의 종말론적 전체성이라는 틀 안에서만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 전체 하나님의 백성이 가지는 전일성은 결국 창조된 실제 전체를 위한 구원의 종말론적 충만함이 가지는 교회론적 차원이다.(p. 442)"



통일성은 각각의 독특성과 함께 가야하며, 교회는 이러한 이해를 잘 실현시키고 구현해야 할 것이다. 삼위 일체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전체 하나님의 백성과의 포괄적 관계를 통해 우리는 교회의 보편성뿐만 아니라 각 그리스도인의 인격적 보편성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됨의 핵심적 요소이며, 필수불가결한 전제이다.


그동안 교회의 하나됨에 대한 우리의 호소는 추상적인 구호에 머물렀던 것 같다. 논리적인 근거가 많이 부족하여, 그만큼 설득도 쉽지 않았다. 볼프의 이러한 주장은 지역교회와 보편교회의 관계에 대한 풍성한 이해를 갖게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 각 그리스도인들은 전 세계와 우주적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과 어떤 관계를 갖게 되는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준다. 더불어 계속되는 질문은 수많은 교단으로 분열된 한국 교회의 현실 가운데 어떻게 하나됨을 이룰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또한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에서 탈피해서 전체를 바라보는 눈을 어떻게 하면 향상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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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배제와 포용

미로슬라브 볼프 저/박세혁 역
IVP | 2012년 07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배제와 포용을 역학관계를 적실하게 다룬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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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Miroslav Volf)는 『배제와 포용』에서 민족적이고 인종적인 갈등에 대한 이미지로부터 서론을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체성과 타자성이다. 그동안의 정체성과 타자성의 문제에 대한 접근과 해법은 사회적 구조(social arrangements)에 집중했었다. 하지만 저자는 사회적 구조에서 사회적 행위자(social agent)로 초점을 돌린다. 결국 이러한 접근이 신학적 접근임을 그는 강조한다. 특히 그는 우리의 신학적 전제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1장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악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며, 분별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 악을 변형하여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포장하기까지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화해자로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열망조차 잃어버렸다. 우리는 종교적 힘을 빌려 우리의 죄악을 교묘하게 강화한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가 있는 곳에는 화해와 평화, 치유가 임한다. 그 곳 가운데 기쁨이 있으며, 참된 용서가 있다. 혹여나 우리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는 곳에 갈등과 반목이 가득하다면, 우리는 다시금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진정한 '회개'가 필요하다.

저자는 ‘거리두기’와 ‘소속하기’에 대해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사도 바울의 신학을 통해 논지를 발전시킨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문화적・가족적 관계를 끊고 모든 가문과 모든 문화의 하나님이신 그분께 순종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그는 기꺼이 이방인이 되고자 했다. 이러한 아브라함식의 ‘떠남’은 주요한 비판을 야기한다. 첫번째 비판은 질 들뢰즈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던 사상이다. 이는 아브라함의 떠남은 목적없는 떠남이며, 이곳 저곳 떠돌아다님을 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떠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며, 특정한 장소로의 떠남이다. 분명한 목표가 있는 떠남이다. 두번째 비판은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으로, 분리와 독립이 아닌 관계망 속에 들어가고, 내재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관계성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묶여 있었다. 또한 그는 유랑하는 공동체에 둘러싸여 있었다. 

볼프는 바울의 신학을 통해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긴장에 대한 해법을 소개한다. 한 분이신 하나님은 보편성을 요구하시며, 보편성은 인류의 평등을 함의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혈통적 약속의 성취인 동시에 하나님께 접근하는 특권으로서의 혈통의 마침표다(68).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다른 몸을 한 몸으로 연합시키신다. 그 연합은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다. 또한 성령하나님은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그 특수성을 가지면서도 하나되게 하신다. 한 몸을 이루게 하신다.

우리는 죄악이 만연한 세상과 이러한 문화 가운데서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모습으로 선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책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방법론을 제시하고, 전제를 두고 있는 부분이기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앞의 질문들은 앞으로의 논리전개를 볼 때 곧 해결될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의 삶 가운데서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 같다. 


볼프(Miroslav Volf)는 『배제와 포용』 2장 ‘배제’에서 인간의 내재된 교묘한 죄의 모습으로서의 배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더불어 사회구조적인 악의 모습으로 배제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볼프는 먼저 서구에서 말하는 ‘포함’이라는 환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들은 상대를 대상화하고, 자신들은 그릇된 행동과는 무관한 사람들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지금 여기’의 악과 벽을 보지 못한다. “배제는 ‘선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악이자 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야만성인 경우가 많다(91).” “포함의 역사 이면은 배제의 역사다(93).” 

볼프는 구별과 배제, 판단을 새롭게 정의한다. 구별은 “상호 의존의 패턴을 낳는 ‘분리하고 결합하는’ 창조적 행위(99)”이다. 구별이란 분리와 결합이다. 단순한 분리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관계를 맺고 있다. 결국 우리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과 구별 짓기의 결과면서 타자와의 관계를 내면화한 결과다(100). 배제는 그러한 관계 맺음 가운데서 극단적 독립을 추구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배제는 상호 의존의 존재로 인식되지 않게 한다. 따라서 배제는 배타적인 것이며, 이는 곧 다른 사람과의 창조적 만남을 가로막는 것이다. 배제적인 판단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은 정당한 ‘구별’과 정당하지 않은 ‘배제’가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고, 적절하고도 겸손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저자는 바울의 갈라디아서 2장 19-20절의 말씀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자아와 중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볼프는 이를 통해 성경에서의 ‘자아’는 중심을 지녔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잘못된 중심으로부터 벗어나야하며, 이러한 행동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자아를 변화시킨다. 새로운 중심으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의 자아는 해체되지 않고, 중심을 재설정하게 된다. 새로운 중심은 자아를 개방한다. 또한 타자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죄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에 ‘죄’라고 명명된 많은 행동들에 대해 새롭게 이름 붙여주신다. 그는 자신의 삶과 사역을 통해 경직되고 이분법적인 논리를 무력하게 하셨다.    

무죄한 사람이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아야한다. 자기 정당화와 기만 등으로 우리의 죄악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는 것들을 걷어내야한다. 우리는 오로지 무죄하신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서만 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 하나님은 자아의 요새로 들어가셔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드신다. 우리의 중심을 해체하시고, 우리가 배제의 힘에 저항할 수 있게 해주신다.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포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볼프의 논증을 통해, 우리 안에 교묘하게 뿌리 박혀 있는 죄악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죄악이 얼마나 깊고 넓게 우리의 자아를 차지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있는지를 보게 되었다. 이러한 교묘한 죄악의 문제에 대하여 아주 세밀하게 논증해나가는데에 감탄하며 읽어나갔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교묘한 이 죄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되고 회복될지에 대한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앞으로의 논지전개가 사뭇 기대된다.


볼프(Miroslav Volf)는 『배제와 포용』 3장 ‘포용’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 인간이 타자와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하는지를 논증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적대하며, 언약을 깨뜨리는 인류를 끝까지 보듬고 품으면서 자신과의 교제의 관계로 받아들이셨다. 이러한 본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하는지를 유추해보고, 우리가 추구해야할 방향에 대한 목표를 세울 수 있다. 저자는 포용으로 이동하고자 할때 필요한 네 가지 계기, 즉 ‘회개’ ‘용서’ ‘자신 안에 타자를 위한 공간 마련하기’ ‘기억의 치유’를 다룬다. 저자는 배제에서 포용으로 나아갈 때, 흔히 설명되어지는 ‘희생자’와 ‘가해자’의 양극적 이해를 피해려 노력한다. 이는 양극성이 없음을 의미하기보다는, 양극성을 지나치게 주장하게 되면서 갖게 되는 또 다른 부정적 영향 때문이다. 갈등이 지속될 수록 이러한 갈등은 혼란스러운 양상을 띄게 된다. 가해자와 희생자의 그 분이 모호해지고, 희생자가 해방자가 될 때 생기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올바른 물음은 ‘최종적인 화해를 이룰 것인가’가 아니라, ‘최종적인 화해가 없더라도,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결국 볼프는 우리가 추구하는 최종적 화해는 인간이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면서 그는 ‘회개’를 강조한다. 이는 완전한 전환이다. 실수 했음을 고백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죄를 범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해자 뿐만 아니라 억압받고 있는 희생자들에게도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과 태도의 변화 없이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참된 변화를 맞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이전 세계에 침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옛 세계의 변혁을 이끌어 낸다.

참된 회개 이후에는 ‘용서’다. 용서는 정의에 대하여 긍정한다. 용서가 어려운 것은 원수를 공동체로부터 배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도 죄인의 공동체로부터 배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배제를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극복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가능하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보여준다.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드러낸다. 용서는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참된 용서를 위한 용기를 얻게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전인류를 포용하신다.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의 원수를 향해 팔을 벌리게 된다. 그들을 포용하고 포옹하기 위해 행동을 취하게 된다.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서 서로를 포용하라는 요청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나님의 포용의 역사 가운데 기억의 잊어버림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역설이다. 우리의 모든 죄를 잊어버리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러한 방법을 취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마주하게 된다. 새 언약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관계로 초대받는다. 우리 편에서 언약을 깨뜨렸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편에서 새롭게 언약을 베풀어 주신다. 다른 사람을 포용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나님의 극적인 용서를 경험하고서도 여전히 우리의 자존심이 우리를 발목잡는다. 때로는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척 하는 모습도 우리에게 많이 보인다. 실제적인 포용의 과정을 자세하게 서술한 볼프의 책을 통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포용의 과정을 밟아가기를 원한다.


볼프(Miroslav Volf)는 『배제와 포용』 4장 ‘성 정체성’에서 성 정체성과 젠더의 문제를 다룬다. 이 문제는 신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최근에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주제이며, 뜨거운 주제일 것이다. 볼프는 성경 말씀을 토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정체성을 통해 이 주제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고자 한다. 젠더 라는 주제와는 상관이 없을 것 같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를 통해 볼프는 본 장을 시작하고 있다. 볼프는 「우상의 황혼」에서 등장하는 경구, “남자는 여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그의 신, 그의 ‘이상’의 갈빗대로부터”라는 말을 통해 두 가지의 중요한 통찰을 이끌어낸다. 즉 그것은 ‘여자’라고 말할때 의도하는 뜻은 문화적으로 구성된 개념이며, 그 일차적인 행위 주체가 남자들임을 강조한다는 것이고, ‘여성성’의 내용이 남자의 신, 남자의 이상과 관계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볼프는 하나님께서는 성적 구별을 초월한 존재이며, 혹여나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에서 우리의 언어로 통해 젠더가 규정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피조물의 영역에서 유례된 것이라고 강조한다. 바르트(Karl Barth)조차도 인간의 유비에 하나님을 규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에 관해서 어떠한 은유를 사용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특정한 젠더에 규정되어지시는 분이 아니다. 그는 특정한 젠더의 모범이 아니라, 공통된 인간성에 대한 모법이다. 

볼프는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이 “동일자의 논리”에 가깝기에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유의미한 대안을 제시해주기에는 부적합한 삼위일체론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복합적인 성 정체성 관념을 계발하기 위하여 요제프 라칭거(Joseph Aloisius Ratzinger)와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의 삼위일체론을 비교한다. 라칭거는 신적 ‘자기 계시’를 중심으로 하나님 안에 일어나는 대화를 삼위일체 교리의 근거로 삼는다. 또한 성자의 “전적 개방성”, 즉 ‘타자에게 자아를 내어줌’과 ‘자아 안의 타자의 존재’라는 쌍둥이 개념을 말한다. 하지만 이 개념은 성자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켜 내지 못하고, 삼위일체 내의 근본적 서열을 야기하기에 전적으로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볼프는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을 통해 라칭거의 삼위일체론을 더욱 발전시킨다. 몰트만은 ‘위격’과 ‘관계’를 모두 보존하기 원한다. 그리하여 몰트만은 ‘페리코레시스’를 통해 삼위일체론을 설명한다. 

볼프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이상을 세울 것이 아니라, 각각을 구별되는 몸을 통해 그 근거로 삼으면서, 신적 위격의 정체성과 관계성을 통해 젠더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삼위일체와 마찬가지로 젠더는 한 젠더가 다른 젠더로 변형되어서는 안되며, 두 젠더가 하나의 새로운 종합으로 바뀌어서도 안된다. 환원할 수 없는 이원성과 성 정체성의 역동적 구성을 강조하면서도 우리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근본적인 평등을 놓쳐서는 안된다. 결국 자신의 확고한 정체성 가운데서, 타자를 향해 열려있는 관계가 필요하다고 볼프는 강조한다. ‘자기 내어줌’은 ‘자기 상실’이 아니다. 실제적으로 볼 때, (볼프도 우려를 하고 있지만) ‘자기 내어줌’이 온전하게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구체적인 관계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한 쪽의 희생을 통해 다른 한 쪽이 수혜받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 희생이 순환적이고 평등하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지속적으로 한 사람의 희생이 강요받는 구조가 된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혹은 일상의 관계 가운데서도 우리는 매우 빈번하게 이러한 관계를 보게 된다. 따라서 볼프의 통찰과 제안이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가능할지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필요할 듯하다.


볼프(Miroslav Volf)는 『배제와 포용』 6장 기만과 진실에서 기억의 중요성으로 서두를 연다. 우리는 기억의 의무를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는 알게 된 것을 기억해야 하고, 기억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 더불어 볼프는 자아와 타자, 혹은 그 두 문화와 그들의 공통된 역사를 아무 관점 없이 바라보기 보다 그것을 두 관점으로, 즉 ‘여기로부터’ 동시에 ‘거기로부터’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신의 외부로 걸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사회적 경계를 가로질러 타자의 세계로 들어가 잠시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타자를 우리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왜 우리는 ‘여기로부터’ 그리고 ‘거기로부터’ 상황을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진리를 찾기 전에 그것을 찾는 데에 관심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리에 복종하려는 의 지가 없다면 진리에 대한 의지는 유지될 수 없다.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진리를 대면했을 때 그것을 볼 수 있기 위해, 두려움 없이 진리를 외치기 위해, 진실한 삶이 필요하다. 진리에 대한 의지는 타자를 포용하려는 의지, 공동체를 향한 의지를 동반해야 한다. 타자를 포용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진리도 없을 것이며, 사람들 사이에 진리가 없다면 평화도 없을 것이다. 


7장에서 볼프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고통보다는 힘과 권력을 가지신 예수님을 더 따르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폭력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한다. 하지만 폭력을 근절하고자 했던 칼이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고 만다. 우리는 악순환 속에 갇혀 있다. 많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폭력에 반대하여 이성을 통해 정의와 진리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문명화 과정”이 폭력의 감소를 가져온다는 관념은 순진한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이 폭력 자체의 감소를 필연적으로 수반하지는 않았고, 불규칙한 폭력만 감소시켰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것인가? 우리는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 십자가는 폭력을 승인하기 위한 자기 부인이 낳은 비극적 결과가 아니라, 폭력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위해 싸우는 삶에 일어날 수 있는 예견된 종말이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하나님이 역사 안으로 들어오셔서 불의하고 기만적인 세상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주장이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의 죄를 스스로 지심으로써 기만적인 세상에 관한 진리를 말씀하셨고, 불의한 세상에서 정의를 왕좌에 앉히셨다. 계몽주의는 우리에게 이성이나 폭력 중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폭력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 즉 하나님이 진리와 정의를 붙들러 오셨고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라는 지식 속에서 타자를 포용하기 위해 폭력을 기꺼이 흡수하려는 태도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하셨듯이, 속이는 이들과 불의 한 이들을 기꺼이 포용하려는 사람들만이 이성과 담론을 폭력이 아니라 평화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현실세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간다고해도 폭력적인 세상을 단번에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폭력이 아닌 평화와 사랑을 선택하는 삶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한다면, 서서히 세상이 변화되어 갈 것이다. 그렇다면 거대한 악과 폭력 앞에서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평화를 선택할 수 있는 대안적 삶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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