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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숙, 챔피언의 얼굴 | 문화 웹진 읽기 2019-12-31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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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_송은이.jpg
송은이 인스타그램 계정 (@saru337)
 


김숙이 지금 KBS에서 진행을 맡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은 3개다. 여행예능 <배틀트립>, 관찰예능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퀴즈예능 <옥탑방의 문제아들>. 특히 <배틀트립>의 초창기 MC들이 교체되는 와중에도 김숙은 홀로 남아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지켰고,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는 80의 나이에 MC가 된 심영순을 리드하며 8개월 만에 프로그램을 안정세에 올렸다. KBS Joy <연애의 참견>을 두 시즌 동안 지키고 있는 것 또한 김숙이다. 돌이켜보면 최근 몇 년간 KBS 예능국이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했던 순간마다 그 자리에는 김숙이 있었다. 김숙은 KBS <인간의 조건> 여성편의 맏언니였고, <언니들의 슬램덩크>를 지탱했던 팀의 척추였으며, <김생민의 영수증>에서 소비지향적인 사람들을 변호하는 대변인이었다. 자기들도 남자로만 MC 네 명을 채웠으면서, <대화의 희열> 시즌1이 한국 예능의 기형적인 성비를 성토할 수 있었던 건, 오직 첫 게스트가 김숙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KBS가 김숙에게 많은 기회를 주고 중용했다고 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나는 김숙이 KBS에게 알리바이가 필요한 순간마다 등장해 KBS를 도왔다고 본다. 우리가 남자 예능만 만드는 채널은 아니라는 알리바이, 우리도 시대의 조류에 발맞춰 열심히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있다는 알리바이. KBS <연예대상> 지지 연설을 하러 나온 전년도 대상 수상자 이영자의 말처럼, 김숙은 KBS에서 <개그 콘테스트> 은상을 받은 것 말고는 상은커녕 제대로 된 기회도 받은 적이 없어서 광야를 떠돌다가 팟캐스트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 JTBC <님과 함께 - 최고의 사랑>으로 대세가 된 뒤에야 KBS에 돌아올 수 있었다. <개그 콘테스트> 은상 수상과 <연예대상> 토크&쇼 MC부문 여자 최우수상 수상 사이의 21년의 공백을 생각하면, 도움을 받은 쪽은 김숙보단 KBS 쪽에 가깝다.
 
데뷔 24년만에 첫 연예대상 대상 후보가 된 김숙은 빈 손으로 돌아갔다. 대상은 KBS <해피선데이 -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슈퍼맨 아빠들’의 몫이었다. 난 여전히 올해는 김숙이 받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안다. 김숙이 일궈온 명백한 성취를 증명하기 위해 굳이 대상 트로피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트로피보다 더 찬란히 빛나고 있는 건 김숙 자신이라는 것을. 송은이는 <연예대상> 다음날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며 “숙이가 세계 챔피언!!!!!”이라 말했다. 양희은이 “축하! 그런데 무엇으로 세계 챔피언인지?”라고 묻자 송은이는 이렇게 답했다. “웃기고,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고. 이제 정상적인 멘트도 잘하고. 엠씨도 잘 보고, 밝고 명랑하고 착하고. 이정도면 챔피언이죠.” 송은이가 맞다. 지금 이 순간 챔피언의 자리에 서 있는 건 그 누구도 아닌 김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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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새벽의 눈 : 자신 또한 헤매고 있노라 말해주는 어른의 눈 | 문화 웹진 읽기 2019-12-31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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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새벽.jpg

영화 <벌새>의 한 장면


 

사춘기란 내 앞에 놓인 세상이 자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의문을 품는 순간 시작되는 게 아닐까. 가장 가깝고 가장 기꺼이 사랑할 수 있는 가족이야말로 나를 가장 많이 상처 입히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았을 때의 충격이나, 하나도 훌륭해 보이지 않는 어른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가르침을 열렬히 설파하는 순간의 위화감 같은 것들. 단단한 실체를 지닌 것처럼 보이던 세상이 겉모습과는 달리 복잡한 무늬를 그리며 끊임없이 흔들리는 이들의 총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아이는 그간 배워왔던 세상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세상 모든 것에 시니컬하게 반응하는 이들을 두고 ‘중2병’이라 말하는 건 쉽지만, 중2가 세상을 환멸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란 사실을 우린 자주 잊는다.
 
영화 <벌새>(2017) 속 은희(박지후)가 경험하는 1994년의 중학교 2학년 또한 폭력적인 모순으로 가득한 세계다. 오빠는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툭하면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학교 선생님은 노래방을 다니거나 이성교제를 하는 학생을 ‘날라리’라고 부르며 그게 대단히 큰 죄인 것마냥 색출작업을 일삼는다. 가장 친한 친구들은 돌연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언제든 기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엄마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렇다면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런 세계 안에서 우리는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답은 그렇게 쉽게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을 믿게 된다. 그리고 은희가 다니는 한문학원에 새로 출강을 나온 영지 선생님(김새벽)이야말로 그런 어른이다.
 
영지 선생님이 한문학원 책상 위에 올려 둔 책들은 온통 그가 나름대로 세상의 답을 찾아 헤맨 흔적들로 가득하지만, 정작 그가 은희에게 알려준 지식의 대부분은 세상에 쉽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내용이다. 얼굴을 아는 친구가 아니라 속마음까지 아는 친구는 과연 몇이나 되겠냐고, 겉으로 보기에 딱하다고 해서 함부로 동정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고. 은희는 영지 선생님의 가르침에 의지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세상의 모순 속을 조금씩 통과해 간다. 어찌 할 수 없는 무력감이 몰려올 때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손가락을 움직여 보면서, 자기보다 조금 먼저 그 모순을 받아들이려고 발버둥친 어른의 발자국을 좇으며.
 
그래서 <벌새>는 1994년에 사춘기를 맞이한 관객뿐 아니라, 자신의 사춘기를 기억하는 모든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영화다. 우리 모두에게도, 나를 그처럼 지긋이 바라보며 말을 걸어주고 자신도 헤맸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던 영지 선생님 같은 사람들이 있지 않았냐고.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며, 조심스레 모순 속에서도 살아갈 만한 이유를 이야기해주는 이들이 있지 않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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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메리 크리스마스 - 시집서점으로부터 | 문화 웹진 읽기 2019-12-31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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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을 하다가, 크리스마스트리를 파는 가게를 보았다. 오래된 꽃집의 허름한 쇼윈도에 별반 화려하지 않은 것인데. 그런데도 반짝이는 전구들을 보니 설레고 말았다. 새삼 겨울이고 새삼 연말이고 새삼 눈을 기다리게 되고 새삼 크리스마스 직전.

 

나는 크리스마스를 정말 좋아한다. 크리스마스의 거리를 좋아한다. 크리스마스의 거리를 채운 사람들의 표정을 좋아한다. 저 옛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크리스마스가 싫었던 적이 없다. 잘 우는 사람이고 속이 까만 사람이고 그러니 산타 할아버지를 만날 기회 따윈 없는데도. 그날에 누군가는 슬프고 아프고 가난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크리스마스는 좋은 것이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주니까. 그리움에는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러니 맘껏 좋은 이를 미운 이를 떠올리고 사랑하고 이해해보려고 노력해도 좋은 날이 크리스마스. 분명 그렇고말고. 넘치도록 화려한 트리의 장식들과 전구들은 그런 의미를 담아 반짝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서점에 닿자마자 이곳저곳을 뒤적인다. 작년겨울에 산 트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없다가 책장 위에서 찾아냈다. 기쁨도 잠시. 금방 실망하고 만다. 너무 조그맣잖아. 채 두 뼘도 되지 않을 것 같다. 먼지를 털면서, 작년의 나를 원망한다. 혜화로 건너온 즈음이었다. 책장을 정리하고 이러저러한 비품들을 구매하느라 정신이 없는 중에 인근 문구점에서 급히 구했던 것 같다. 내년에는 더 크고 멋진 것을 살 거야 하고 다짐했을 텐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새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생겼구나. 매사 이런 식이야 나는. 시무룩해져서 코드를 콘센트에 꽂아본다. 작고 따듯한 빛들이 떠오른다. 그것들이 서점을 가득 채우는 것만 같다. 그렇게 작은 트리가 커다래진다. 점점 더 커지는 모습을 한참 본다. 아마 작년에도 이랬나 보다. 이것도 괜찮네, 충분하네 하면서. 마침 찾아온 독자들이 올라와서 반갑게, 트리네, 한다. 내 눈에만 그런 것이 아닌 모양이다.

 

독자들이 계산대에 올려놓은 시집을 보며 어떤 기대를 품는다. 혹시 이 시집들이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아무리 내가 시인이래도 시집서점을 운영하고 있대도 시집이 근사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언젠가 기사로도 본 적이 있다. 제일 받기 싫은 선물 1위가 책이랬다. 하물며 시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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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론 겨울밤하고 시집은 잘 어울린다고 우기고 싶다. 크리스마스트리와 그 트리 위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노랗고 파란 불빛들과도. 무언가를 떠올리면서 그리워하면서 아까워하면서 시를 읽는 시간. 그 시간을 선물하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독자들에게 이 시집이 크리스마스 선물이느냐고 묻지 않는다. 아닐까 봐서. 그러니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말 뿐이다.

 

정작 급한 것은 내 쪽이다. 열흘 정도 남았다. 올해 크리스마스. 바쁘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사람들을 하나둘 떠올린다. 친구들도 있고 이름은 모르지만 낯이 익은 독자들도 있다. 그들에게 시집을 선물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처지다. 주머니도 가난하니까 소박해져보자. 고민 끝에 사진을 찍어주면 어떨까 싶어졌다. 마침 필름 카메라도 하나 있겠다, 거절하지 않는다면 찍어주고 싶다. 인화를 해서 우편으로 보내주고 싶다. 짧은 메시지라도 담아서 카드를 곁들여야겠다 싶고. 내친김에 나도 한 장 챙겨야겠다 생각해본다. 어떤 이들하고는 같이 찍어도 좋겠지. 이런 것이 선물이 되려나 싶기도 하지만 시집만큼이나 겨울밤에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한때를 진하고 깊게 그리워할 수 있는 그런 까만 겨울밤에.

 

창문 너머 빛은 사라지고 조금씩 어두워지는 서점의 내부. 덕분에 작은 트리는 점점 더 예뻐지고 있다. 너무 예쁘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너무 예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정작 산더미 같은 고민에 깔려 있고, 즐길 겨를 따위는 조금도 없지만, 이 멋진 소란이 그저 근사하기만 하다. 잠깐의 착각일지라도 모두가 모두에게 사랑에 빠져 있다 여길 만한 때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겠어. 맘껏 그리워해도 괜찮은 때도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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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배명훈 칼럼] 작가의 말 | 문화 웹진 읽기 2019-12-30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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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플래쉬2.jpg 

언스플래쉬

 

 

나는 작가와 편집자의 관계를 종종 소리꾼과 고수의 관계로 비유하곤 한다. 우선 이 둘은 파트너 관계다. 책 만드는 일 또한 의외로 협업이 필요한 과정이다. 각자의 영역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온 두 사람이 만나면 좋은 결과물이 나올 가능성도 당연히 커지겠지만, 때로는 그런 것과 관계없이 그냥 호흡이 잘 맞는 파트너가 나을 때도 있다. 어쨌거나 이 일은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고수는 흥으로 소리꾼을 몰아붙이는 사람이다. 너무너무 힘든 대목을 마친 소리꾼이 잠깐 쉬어가면 안 될까 망설이는 순간 고수가 추임새와 북소리로 흥을 돋우며 달아오른 분위기를 계속 이어가면, 소리꾼은 힘들어 죽을 것 같던 마음을 내려놓고 다음 대목으로 스르르 넘어가게 된다고 한다. 이는 작가와 편집자 사이에서도 일어나곤 하는 일이다. 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판소리 공연보다 훨씬 길어서 저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은 장면이 발생하는 경우가 훨씬 많겠지만, 그래도 편집자와 작가가 흥을 주고받으며 호흡을 맞춰가며 만들어낸 책에는 한마디로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특별한 느낌이 담기게 마련이다.

 

그럴 때 편집자는 작가가 책에 많은 것들을 쏟아붓게 만든다. 작가가 미처 엄두를 내지 못했으나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제안하고, 최선의 결과가 나오도록 함께 고민한다. 작품이 도달할 수 있는 상한선은 결국 작가의 역량에 달려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떤 이상한 실험을 하더라도 작품이 어느 선 이하로 무너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다면 작가의 역량이 발휘될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좋은 편집자가 품질의 최저선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숨 가쁜” 협업은 이런 식으로 이어진다. 작가와 편집자, 두 사람 모두에게 평소보다 더 많은 수고를 요구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작가가 작품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이제 더는 할 말이 남아 있지 않다는 확신이 들 때쯤, 편집자에게서 마지막 요청이 들어온다.

 

“이제 작가의 말 쓰셔야죠.”


나는 원래부터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웬만한 글은 부담 갖지 않고 쓰는 편이지만 작가의 말만은 마음 편히 쓰는 경우가 드물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일단 앞서 말한 것처럼, 책 한 권을 다 끝내고 나면 하고 싶은 말이 딱히 없다. 다음 이유도 꽤 중요한데, 작가의 말은 너무 잘 써도 안 되고 너무 못 써도 안 되는 장르다. 세상에는 작품을 깎아내리기 위해 “책 전체에서 작가의 말이 제일 재미있었다”라는 평을 남기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가 혹평을 남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저런 표현을 보면 책의 저자가 아닌 사람도 분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저런 혹평을 목격한 작가는 작가의 말을 잘 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순히 욕을 먹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가의 말이 작품을 앞서는 상황이 욕으로 쓰일 만큼 비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을 쓰기가 어려운 세 번째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왜 작가의 말은 작품보다 좋아서는 안 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너무 애쓰지는 말자. 이런 질문은 이른바 근대적인 질문의 형식에 해당한다. “사과는 왜 떨어질까?” “사람들은 왜 착한 일을 할까?” 유용한 질문 방식이지만 세상 모든 문제의 열쇠는 아니다. 대신 이 질문에 깔린 암묵적인 전제 하나를 찾아내는 것이 더 유용할지도 모른다. 즉, 작가의 말과 작품의 말은 다른 종류의 말이라는 사실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세상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닌 사람들이 많다. 천문학자들이 산꼭대기 천문대에서 생활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그들의 연구 주제와 함께 듣고 있으면, 진짜 SF는 이런 데서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숙연한 생각마저 들곤 한다. 별자리 이야기나 천문대 주위에서 피는 야생화 이야기, 천문대 식구가 된 강아지나 국립공원관리공단 사람들과의 일화, 외국 천문대에 묵으면서 먹었던 음식에 관한 에피소드까지, 천문대는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가득 찬 곳이다. 여러 과학 분야 중에서도 특히 천문학처럼 큰돈을 벌기 힘든 분야에서는 대중을 상대하는 일에 능한 학자가 많다.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강연을 하거나 맛깔스러운 대중 과학서를 써내는 사람이 이미 드물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조차도 그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설로 써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말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소설의 말은 어떤 말일까? ‘근대소설의 말’이라는 것이 있다. 한국 기준으로는 이광수 이후, 그러니까 100년쯤 전에 개발된 말이다. 내가 젊은 시절 학자를 꿈꿨던 외교학과라는 곳에는 학과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한국 근대소설을 쭉 읽는 대학원 수업이 있었다. 강의 제목은 ‘한국현대국제정치사상사’ 같은 것이었을 텐데, 내용은 결국 문학 수업이다. 그 세미나를 진행하신 선생님에 따르면, 이광수는 근대 한국어를 만든 사람이라고 한다. 신소설이나 판소리의 말과는 어딘지 많이 다르고, 지금 우리가 아는 문어체와는 상당히 유사한 어떤 말이 이광수 이후 몇십 년에 걸쳐 완성되어가는데, 그 말이 바로 현대 한국어의 문어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문학을 통해 근대의 말이 새로 만들어지는 현상은 많은 언어권에서 꽤 보편적으로 일어난 일이다. 서세동점(西勢東漸) 시기에 서양 문명이 들어오면서 중국도 문체의 변화를 겪고, 인도에서도 근대식 소설과 산문의 창시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일본도 마찬가지인데, 한국 근대소설 작가 중에는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는 사실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그’, ‘그녀’ 같은 대명사를 새로 개발하고, 과거 시제로 이야기를 서술하며, 판소리와는 다르게 소설가나 1인칭 주인공과 분리되는 객관적 화자를 도입하는 것 등이 이 말의 특징에 해당할 것이다.

 

물론 현대 한국어 사용자들이 이런 요소들을 인식하고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소설가도 마찬가지다. 그저 ‘소설의 말’이라는 막연한 느낌으로 분류되고 저장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좀처럼 이 말을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한다. 개인적인 관찰이어서 학술적인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닌 사람들이 다행히도 좋은 소설을 써내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라고 믿는다. 거의 소설에 가까운 산문을 쓰는 작가인데도 끝내 이 선 하나를 넘지 못해 소설을 써내지 못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아온 탓이다.

 

이것은 일종의 연기력 문제다. 서술자는 두 번째 인격 같은 것이다. 작가는 지면 위에서 그 두 번째 인격체의 말투로 말을 해야 한다. 연극배우가 번역 투로 말하고, 소리꾼이 무대 위에서 애드리브를 할 때 왠지 전라도 지방 말로 말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언스플래쉬3.jpg

언스플래쉬

 


나의 두 번째 인격인 내 소설의 서술자는 사실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다. 오래전 일이지만 소설을 쓰기 전의 나는 비관적이고 염세적이고 빨리 지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으면 나는 지금이라도 금방 이렇게 변할 수 있다. 반면 내 소설을 끌고 가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낙천적이고 자신감에 차 있고 인간을 사랑하며 심지어 유머 감각까지 지니고 있다. 내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평 중에는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라는 의견이 많은데, 이것은 내 시선이 아니라 내 서술자의 시선이다. 다만 소설을 쓰기 위해 내가 내 서술자의 탈을 쓰고 있는 시간이 짧지 않으므로 서술자의 인생관이 점점 내 인생관으로 번져가는 과정을 겪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서술자보다 본인이 더 훌륭한 사람들이 소설을 쓰는 일을 의아하게 여긴다. 이를테면 연예인들이 소설을 쓰는 경우가 그렇다. 누구든 소설을 써내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그와 별개로 나는 연예인 소설가는 작품 활동을 오래 해나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레짐작한다. 그런 사람들의 경우, 적어도 첫 책을 내는 시점에는 자기 서술자보다 작가 본인이 더 아름답거나 훌륭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나보다 훨씬 훌륭한 내가 쓰는 글. 내가 작가의 말을 쓰기가 꺼려지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이다. 서술자가 몇 달간 공들여 쓴 소설은, 자연인인 작가 본인이 잠깐의 감흥으로 쥐어 짜낸 자기 글에 대한 감상문보다 몇 배는 훌륭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직업이 작가인 것이다.


그런데도 작가의 말은 보통 책의 맨 뒤에 들어간다. 문제집으로 치면 모범 답안이 들어가는 위치다. 작가의 말은 소설 맨 뒤에 등장해서 소설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열쇠 역할을 할 위험이 있는 부록이다. 작품 해설도 비슷한 위치에 들어가지만, 적어도 작가 본인이 쓴 말은 아니므로 정답을 이야기하는 역할까지는 하지 못한다. 그런데 작가의 말은 누가 봐도 정답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작품에 대해 무슨 의미심장한 말이라도 했다가는 작품에 대한 작가의 결정적인 해석으로 오해받기 딱 좋다. 이것은 월권이다. 나에 대한 나의 월권이다.

 

글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목소리는 누가 지니고 있어야 하는가? 서술자다. “그래서 결국 살인범은 누구인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소설에서 이것을 확정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서술자다. 주인공인 탐정의 입에서 나온 말까지도 뒤집을 수 있는 최고 권위자인 셈이다. 단순히 범인을 알아내는 것을 넘어 삶과 세상에 대한 추상적인 메시지를 담아낸 소설에서라면 더 그럴 것이다. “결국 그 이야기는 무슨 의미였을까?” 이것을 확정할 수 있는 것도 서술자밖에 없다. 서술자라고 글의 의미를 일일이 말로 밝혀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독자 스스로 답을 찾아낼 수 있도록 암시와 상징의 형태로 남겨두는 경우도 많겠지만, 혹시라도 서술자가 무슨 말을 남겼다면 이 말은 분명 결정적인 한마디일 것이다. 그렇게 해석되는 게 마땅하다.

 

반면 작품이 다 끝난 뒤, 일반인에 불과한 작가가 툭 던지고 지나간 한마디는 어떤가? 이 말은 아무 의미도 없어야 한다. 가능하면 책 뒤에 이런 말이 붙어 있지도 않아야 한다. 작가라는 인간이 직접 쓴 말이 책 어딘가에 반드시 부록으로 달려 있어야 한다면 작품 뒤보다는 앞이 낫다. 그래야 결정적인 스포일러 없이, 작품 해석에 대한 모든 권위를 내려놓은 채, 애매한 이야기만 하게 될 테니까.


물론 많은 독자가, 그래도 작가의 말 같은 것이 붙어 있지 않으면 어쩐지 책이 미완성으로 끝난 것 같아 아쉽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작품이 감동적이었을 경우, 마치 커튼콜을 하듯 여운을 함께할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말도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있다. 편집자 중에도 작가의 말이 없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도 계속 작가의 말을 써야 할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시대가 벌써 21세기인데 인공지능이 작가의 말 정도는 대신 써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인공지능은 의외로 사람들이 꼭 필요로 하는 일을 해줄 생각은 없어 보이므로, 대략 2030년까지는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수밖에 없다. 그 이후에도 사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나의 작가의 말 스타일은 감상문이 아닌 설명문을 써버리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작품의 맥락이나 관련 자료를 기록하듯 덤덤하게 써두는 식이다. 너무 잘 써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못 써도 안 되는 글이라면, 소설과 충돌하지 않는 방식으로 열심히 쓰는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은, 작가의 말을 본문보다 먼저 써두는 것이다. 제목을 미리 지어두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글을 다 쓴 다음 제목을 지으려고 하면 좀처럼 글에 어울리는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데, 아무것도 없을 때 제목을 지어두면 본문 내용 때문에 제목을 짓지 못하는 어려움은 피할 수 있다. 그래서 가끔은 출간 예정일 4개월 전부터 작가의 말을 고민하곤 하는데 그 무렵이면 사실 본문 수정 작업도 덜 끝났을 시기이기는 하다.

 

그 외에 작가의 말 제도를 전면 폐지하겠다는 정치 세력을 후원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지구에는 아직 그런 세력이 없다. 그러니 별수 없이 작가도 말을 하는 수밖에.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부디 작가의 말을 보고 작품을 평가하지는 말아주기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책에서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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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 17기 12월 미션 완료 | 파워문화블로그 2019-12-29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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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 17기 12월 미션 완료합니다.

 

영화 리뷰

 

1. http://blog.yes24.com/document/11884977 영화 리뷰 [유열의 음악앨범] 감성을 터치하는

2. http://blog.yes24.com/document/11865770 영화 리뷰 [더 랍스터] 이보다 더 냉소적일 수

3. http://blog.yes24.com/document/11843448 영화 리뷰 [나를 찾아줘] 차라리 스릴러가

4. http://blog.yes24.com/document/11887866 영화 리뷰 [포드 V 페라리] 장인들의 향연

5. http://blog.yes24.com/document/11941557 영화 리뷰 [백두산] 오락 영화의 경계에서

 

위에 리뷰를 남긴 것 외에도 <생일>, <겨울왕국1> 등 몇 편의 영화가 더 있네요. 이 영화들은 다음 기회에 리뷰 올리겠습니다. 12월에는 <포드 V 페라리> 영화가 가장 오래 기억에 남네요. 클래식하면서도 엔틱한 분위기. 그리고 고집과 열정, 우정,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결혼에 대한 극단적인, 철학적인 가치관을 보여 주었던 <더 랍스터>. 두고두고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한편 연말에 기대를 많이 했던우리 영화  <백두산>,  살짝 아쉽지요.

 

도서 리뷰

 

1. http://blog.yes24.com/document/11935395 서평단 도서 리뷰 [올해는 다른 크리스마스]

2. http://blog.yes24.com/document/11927457 서평단 도서 리뷰 [모네] 아르테 클래식 클라우드

3. http://blog.yes24.com/document/11926250 서평단 도서 리뷰 [도시 여행자를 위한 파리×역사]

4. http://blog.yes24.com/document/11923477 도서 리뷰 [헬로 루비 : 코딩이랑 놀자]

5. http://blog.yes24.com/document/11922301 도서 리뷰 [헬로 루비: 컴퓨터랑 놀자]

6. http://blog.yes24.com/document/11917081 도서 리뷰 [햄버거성의 셰프봇을 작동시켜라]

7. http://blog.yes24.com/document/11916953 도서 리뷰 [꼭 갖고 싶은 로봇 친구]

8. http://blog.yes24.com/document/11903495 도서 리뷰 [그냥 흐림이라고 대답하겠다] 시집

9. http://blog.yes24.com/document/11900223 도서 리뷰 [벌새] 함께 생각하고 토론하고

10. http://blog.yes24.com/document/11889504 도서 리뷰 [깃털 도둑]  우리는 어쩌면 모두

11. http://blog.yes24.com/document/11880811 도서 리뷰 [그림책] 너에게 보여 주고 싶어

12. http://blog.yes24.com/document/11868314 서평단 도서 리뷰 [번쩍번쩍 눈 오는 밤] 도깨비를

13. http://blog.yes24.com/document/11848939 도서 리뷰 [그레이스 피어리어드] 은총이 가득한

14. http://blog.yes24.com/document/11848566 도서 리뷰 [마음사전]  김소연

 

이번 달에 서평단 도서 리뷰가 4편, 자율 독서 리뷰가 10편으로, 지난 달들보다 조금 많이 올렸지요. 음 그것은 '코딩, SW 교육' 관련 초등학생 도서가 몇 편 있어서. 나름 수월하게(?) 올렸습니다.

 

그리고 서평단 도서들이 모두 따뜻하고 몽글몽글 부드러운 내용들이었어요. 지난 달에 이어, 모네 & 파리& 런던의 여정이 이어져서 아주 행복하면서도, 어떤 이유로든 여행의 길에서 건져 올린 경험들이 부러웠습니다.

 

가장 좋았던 점은, 블로그 이웃님의 시집을 받았고, 그 시집에서 아련하면서도 따뜻한 문장들을 많이 만났다는 점. 그리고 영화 <벌새>의 시나리오와 그 영화를 이야기하는 책 <벌새>를 만났다는 점이 아주 행복했습니다.

 

앗. 이것은 지난 번에 올렸던 리뷰를 다시 "올해의 책"으로 올린 리뷰입니다.

http://blog.yes24.com/document/11926522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 책의 내용에서 제가 꿈꾸는 것들이 많아서 참 좋았습니다 ㅎㅎ

 

일상 포스팅

 

1. http://blog.yes24.com/document/11934271 2020년 나에게 하는 약속

2. http://blog.yes24.com/document/11911008 나달 리턴 게임 승률 순위표 , 2019 시즌

3. http://blog.yes24.com/document/11901179 슈톨렌 빵이 왔어요~~

4. http://blog.yes24.com/document/11888767 [테니스] ATP CUP 소개

5. http://blog.yes24.com/document/11844808 10년 전 나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문학동네 리뷰대회]

6. http://blog.yes24.com/document/11844137 2019년 올해의 영화 추천 : 이동진 평론가

7. http://blog.yes24.com/document/11849446 첫눈이 내렸어요

 

위의 포스팅 외에도 테니스 소식을 좀 많이 올렸어요. 제 여가 시간의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테니스 관람, 테니스 뉴스 기사 읽기라서. 현실의 삶을 아주 직접적으로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죠. ^^

그리고 이 추운 겨울밤을 녹여 줄, 기대하고 기대했던 현빈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첫방송 이후 열심히 시청하고 있는데. 스토리는 그닥 흥미롭지 않지만. 현빈의 잘생김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행복합니다.

앗 그리고. 올해는 연말 리뷰대회에도 도전해 보았습니다. ㅎㅎ

앞으로 이 도전은 계속 해 보려구요. 나름 독서 리뷰 정리도 되고, 글(리뷰)을 잘 써 보아야겠다는 승부욕도 생기더라구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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