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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눈부신 하루'를 보고 | My Story 2006-02-16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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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 잡지사에서 이벤트 당첨되었다는 연락에 한껏  부푼 마음을 안고 시사회에 갔습니다. 솔직히 전 이런 작은 규모의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타입이 아닙니다. 그냥 '공짜 티켓'에 눈이 멀어 달려간, 어중이 떠중이에 불과했죠.

 시사회가 저녁 늦은 시간에 잡혀 있는 터라, 친구와 인사동 바닥에서 한참을 노닥이다가, 시사회 직전에 영화관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영화관에는 미리온 사람들로 가득찼었죠.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웅성대며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시오다군을 비롯한 주연배우들이었더군요. 뒤쫓아가서 사진을 찍어로고 싶었지만, 깨달았을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라,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답니다.

 

 독립영화쪽은 처음이라, 혹시나 졸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첫 영화 <보물섬>은 아름다운 제주도 풍광과 경쾌한 배경음악이 잘 어울어진 아름다운 영상으로 제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제주도 한림에 묻혀있다는 보물을 찾아 여행하는 두 소녀들.  그러나 그들의 '보물섬'은, 말도 통하지 않는 두 이방인 소녀에게는 너무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불친절한 직원들, 돈을 빼앗아간 사기꾼, 길바닥에 버려두고간 택시기사등, 눈부신 제주의 하늘과 바다가 무색할 정도로 각박한 사람들 뿐이었죠. 영화 <보물섬>은, 먹다남은 사과씨를 곱게 봉투에 담아두는 일본소녀들에게 각박한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일 겁니다. 우리끼리는 서로 한핏줄이라며 부둥켜 안지만, 일본인에게는 배타적인, 혹은 단지 이용할 꺼리로만 보는 그런 나라. 그 핏줄의 일부가 이어진 제일교포마저 "일본인 행세"하는 사람이라며 배척하는 나라. 결국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그들에게 '거짓말'을 강요하는 나라. 그것이 우리의 한국이라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한일교류'라는 기치 아래 만들어진 영화인만큼, 영화는 극단적인 반한감정만을 표출하지는 않습니다. 길거리에 주저앉아있는 이방인소녀를 위해 행복의 노래를 불러주는 사랑과 열정의 사람들 덕분에, 소녀들은 "86배쯤" 힘을 낼 수 있었으니까요. 더불어 이런 영화를 통해, 몇십년동안 땅속에 숨겨져야 했던 한일 양국의 관계가, 이제는 과거를 묻어두고 현재 옆에앉은 친구를 받아들이는 미에와 에이코처럼 순수하게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복잡한 용산상가에서 돈많은 남자의 뒤를 밟는 소년. 소년은 남자에게 노트북을 파는 척 하면서 돈을 훔쳐 달아납니다.  아직 앳된 얼굴을 한 소년이 몇백만원이나 하는 돈을 훔치는 모습에, 저를 비롯한 관객들은 모두 "아, 저 못된 놈"이라는 생각을 했을테지만, 감독은 그런 우리들의 뒤통수를 칩니다. 잰걸음의 소년을 따라가며 카메라가 비춘 곳은 혼자 지나가기도 버거운 좁은 골목에 연탄재가 쌓여있는 빈민가. 소년은 그 무심한 현실을 말없이 지켜보다 달아납니다. 제주도가 미에와 에이코의 보물섬이었다면, 반대로 종환에게는 엄마가 살고 있다는 일본땅이 삶의 희망입니다. 보는 사람까지 가슴 조이게 하는 대담한 범행을 하는 것은, 모두 일본행 티켓을 구입하기 위한 것이죠. 대낮에 절도를 하고, 친구에게 자전거를 강매하질 않나, 툭하면 욕지거리를 내뱉는 종환은, 분명 한국사회의 '이단아'입니다. 학교에서도 내놓은 실업계학생이죠. 하지만 아직 그는 친구와 장난치며 해맑게 웃을 줄도 알고, 괴롭혔던 친구에게 자전거를 넘겨주며 미안해 하기도 하고, 또 고맙다는 말에 계면쩍어 하며 욕지거리를 내뱉는 미숙함도 남아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가 그렇게 '이단아'가 되어 한국땅을 떠나고 싶어하는 것은, 오히려 한국이 그의 소년됨을 받아주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영화는 제목인 <눈부신하루>와는 반대로, 굉장히 어두운 내용입니다. 소년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티켓마저 불살라지고 돈마저 빼앗긴채, 소년은 집을 향해 희미한 가로등이 깜박이는 골목길을 걸어갑니다. 심지어 영화의 종반부를 차지한 일본의 거리는, 과연  그곳이 소년이 그리 꿈꿔 왔던 이상향이었는지를 의심하게 합니다. 어지러운 일본거리에서 과연 소년이 무사히 엄마를 만날 수 있을지, 그리고 엄마는 과연 '돈을 많이 벌어' 소년을 반갑게 맞아 줄 지, 관객은 알수 없습니다. 아니, 종환은 정말 일본땅에 서있는게 맞는 걸까요, 아니면 단지 상상에 불과할까요? 감독은 뒷얘기는 관객에게 남겨둔채, 상당히 뒤끝이 쌈싸름하게 이야기를 마치더군요.

  

 제가 유일하게 눈에 익은 이소연씨와, 상영전의 귀여운 멘트로 관객들을 사로잡은 훤칠한 외모의 시오다군이 연기한 <공항남녀>는 시작전부터 가장 기대가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전반적으로, 경쾌한 사건들와 이소연씨의 자연스러운연기, 그리고 시오다군의 어리숙한 모습이 유쾌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두 작품에 비해 너무 가벼운 느낌이었습니다. 건망증에 트러블메이커인 서점직원과 어리숙한 남자가 우연히 부딪혀 게 되고, 이를 계기로 꿈같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는 설정는, 다들 어디선가 본것 같은 평이한 소재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손짓발짓을 하다가, 결국 자기 편할대로 상대를 해석해 버리는 모습이 상당히 귀여웠던 건 사실입니다. 개연성 여부를 떠나서, 말도 통하지 않은 이방인과 몇시간 동안 앉아 마음을 나눌수 있다는 상상, 정말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 보고 싶은 환타지겠죠.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 제 머리속을 가득매운 의문은, 과연 나중에 오고리가 일본어나 영어로 이메일을 보내다가, 상대가 온천집 아들이 아니란걸 알았을때 얼마나 실망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비교적 가볍게 즐길 수 있던 영화였던 것 같네요. 한일문제를 다룬다기에 상당히 심각한 내용일꺼라 생각하고 겁을 먹었던 처음과 달리, 그리고 독립영화라기에 어려운 상징으로 가득한 예술영화일까봐 걱정했던 것과 달리, 평이한 어조로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의 모습과 생각을 그려낸것 같습니다. . 시종일관 스피커를 때리는 경쾌한 배경음악도 좋았습니다. 무거운 주제를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도 꽤 색다른 경험이었죠.  '대박'까지는 아니더라도,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는 영화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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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스펀 경제학이라.. | 나의 리뷰 2006-02-08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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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그린스펀 경제학의 위험한 유산

래비 바트라 저/황해선 역
돈키호테 | 2006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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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린스펀..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몇안되는 사람중 하나이다.

그린스펀 말 한마디에 증시가 급락하는 상황이다. 어떤 이들은 그린스펀이

 미국경제를 호황으로 이끌었다고 말하지만, 반대로 그린스펀의 재임기간에

 IMF같은 초 악재도 많았으니까, '역 그린스펀효과'도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특히 미국인들은 미국중심의 경제정책을 펼치는 그린스

펀에 대해 여전히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이번 그린스펀의

퇴임으로 미국 경제가 악화될 꺼라 생각하기도 한다.

  <그린스펀 경제학의 위험한 유산>은 이러한 미국인들의 편견을 지적하

며, 그린스펀을 비롯한 미국우월의 경제학을 비판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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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 은 어떻게 '마왕'이 되었나 | 나의 리뷰 2006-02-04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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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악마

로베르 뮈샹블레 저/노영란 역
박영률출판사 | 2006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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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적인 무언가를 기대하고 이 책을 펼쳤을때, 몇 페이지를 읽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하다못해 악마에 대한 예술작품 한 두점은 삽화로 들어갈 법 하건만은, 주석이 잔뜩 달린 생소한 용어들만 보였다. 조금 가벼워 보이는 제목만을 보고, 최근의 악마주의에 편승
한 흥미위주의 책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악마의 역사가 아닌, 악마라는 모티브를 통해 인간들의 탐욕의 역사를 고찰한다. 그것도 우리에게 굉장히 생소한 사건이나 사상가들을 언급하면서 말이다. 게다가, 프랑스작가의 글이다보니 수식어도 많고, 번역투의 긴 문장도 많다. 아무리봐도 첫인상과 달리,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였다.

그러나 이 책이 전문 학술서라는 것을 기억하자. 이런저런 학자들의 말을 인용한 것은, 악마의 역사에 대한 가설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그냥 교양으로 읽는 나 같은 독자들이, 그런 세밀한 배경지식에 억눌릴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게다가 작가 뮈샹블레는 나같은 초심자들을 배려해서, 다양한 사례를 통해, 악마와 인간역사의 관계를 설명해준다. 그리고 그 사례들을 하나 하나 읽을 때마다, 천년역사의 역동적인 권력관계를 하나의 모티브로 꿰뚫은 작가의 통찰력에 감동하게 되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대학시절부터 이런 식의 연구를 자주 접해왔다. 서양사를 전공하면서, ''육체의 사회학''이나 ''성을 통해본 서양문화사''등의 수업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성이 인간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한 르네상스 이후 반이성의 요소, 즉 육체나 성, 그리고 악마등은 금기가 되었고, 학자들의 연구대상에서 제되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실은 역동적으로 역사를 움직이는 힘을 지녔다는 가설은 오히려 20C 학자들을 매료시켰던 듯하다.

하지만 <악마 : 천년의 역사>는, 기존의 비주류문화에 대한 연구들을 답습한 아류작으로 치부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뮈샹블레는 육체나 관습 등 가시적인 사회현상이 아닌, ''악마''라는 추상적 개념에 주목했다. 다른 사회현상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지만, 추상적인 개념만큼 유동적인 것은 없다. 동시대 사람들의 생각이 개념을 만들어내지만, 반대로 개념은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도식(schema)이 되기도 한다. 종교 자체가 그러하고, 선악이란는 것이 그렇듯, ''악마''의 모습은 상당히 모호하다. 12C이전에는 ''악마''가 수만의 부하를 거느리고 인간세계를 파괴하는 ''마왕 루시퍼''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저 드워프나 엘프같은 정령이었다. 작가 뮈샹블레는, 이처럼 ''악마''가 상당히 유동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당대의 통념을 쉽게 흡수해서, 역사적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 것 같다. 즉 <악마 : 천년의 역사>란, ''악마''의 개념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고, 또 사람들이 이 ''악마''를 어떻게 조작했는지를 천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고찰한 역사서이다.

악마라는 개념은 무엇보다, 인간사를 설명할때 결코 도외시될 수 없는, 권력이라는 소재와 맞닿아있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적이 필요하다. 작가는 봉건주의 아래에서는 하찮게 취급되던 ''악마''가, 중앙집권이 심화될 수록, 구체적이고 강력한 형상을 얻는다고 본다. 정령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서라면 레골라스 하나면 되겠지만, 절대악 사우론을 대적하려면 전 대륙이 힘을 합쳐야한다. 즉 싸워야 하는 악마의 힘이 강할수록 그에 대적하기 위해서 힘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권력자는 스스로를 정의라 칭하면서 그 힘을 소유한다, 강력한 악마에 대적하기 위해서. ''악마''를 권력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은 종교계도 마찬가지다. 종교전쟁때, 자신들의 점령지에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서, 구교와 신교 모두 마녀에 대한 공포심을 이용했다. 흔히 마녀사냥이 중세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근대의 종교개혁기에 문제된 것이다. 이는 ''악마''라 종교 교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권력욕과 연관된 문제임을 말해준다.

또한 ''악마''의 진화는, 다른 비주류문화연구, 즉 ''육체주의''의 부족한 점을 메워준다. 즉 과학과 이성의 시대인 20C에, 오히려 반이성인 육체가 부각되는가 하는 모순이다. 사회규범은 육체를 억압하는데, 육체는 오히려 방종하는 현실을, 기존의 연구는, 현대사회의 이중성이나 다원주의로 설명한다. 하지만 뮈샹블레에 따르면, 이는 모순이 아닌 당연한 논리이다. 즉 합리주의라는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 속의 악마 역시 강력해지는 것이 순리이다. 이성과 절제의 사회규범이 강할수록, 육체라는 ''악마''의 영향력이 커지고, 더불어 자본주의가 이런 방종에 대한 욕구를 이용함으로써 현대의 악마숭배가 나타난다고 본다. 20C들어 ''악마''가 다시 우리 옆으로 다가왔지만, 이 ''악마''는 천 년전과는 다른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현대의 ''악마''는 어리숙한 숲 속의 ''정령''이 아니라, 브라운관 속의 ''마왕''이다.

''악마''라는 개념 하나로 권력의 투쟁이라는 서양사의 큰 줄기를 집어가는 것을 의외로 매력적인 일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작가가 서양인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고려시대의 자유로웠던 풍속이, 성리학에 의해 격하되었던 역사가 있다. ''악마''의 개념이 한국사에 어떻게 표현되었으며, 결국 ''붉은악마''로 승화되었는지를 고찰한 책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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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순과 슬픈눈의 몽환적인 사랑 이야기 | 나의 리뷰 2006-02-03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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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형사 특별판 (3Disc)


엔터원 | 2006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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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형사>를 보고 나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영화와 이명세 감독을 욕했다. 화려한 영상과 배우 강동원의 ''얼굴''말고는 볼 게 없다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특이한 점은, 엄청난 제작비와 화려한 영상미로 치장한, 최근의 그저그런 한국영화에 신랄한 비판을 퍼부어 대던 평론계에서 오히려 <형사>에 열광했다는 것이다.

<형사>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갈리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기대의 차이인 것 같다.
일단 몇년전의 드라마<다모>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어설픈 사투리를 쓰는 우악스러운 하지원의 모습에 기겁한다. 신분과 혈연의 장벽에 막혀 사랑의 가슴앓이를 하던 ''채옥''이, 다 튿어진 속바지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거나 희롱하는 남정네의 약점;;을 움켜쥐는 ''남순''이 되어버린 것에, 일종의 배신감을 느낀다.
또 <형사>를 ''위조화폐를 둘러싼 수사극''으로, 혹은 화려한 한국식 무협으로 기대하던 사람들은 여지없이 이 작품에 돌을 던진다. 안포교와 남순이 사건해결을 위해 잠복수사까지 하지만 사실상 소득은 전무하고, 결국 ''슬픈눈''이 던져준 책 한권에 모든 음모는 분쇄된다. 또 군데군데 있는 격투씬은 담벼락에 가려지거나 카메라 앵글 밖으로 빠진다. 더구나 시종일관 귀를 때리는 강렬한 테크노 비트는, 우리가 예상했던 무협물과는 거리가 있다. 결국 이런 무협팬들은 "광고가 전부인 영화"였느니, "강동원 팬클럽용"이라며 분노한다.

<형사>의 실패는, 영화 마케팅의 실패였다고 생각한다. 영화 시작 전부터 제2의 다모 라느니, 최고의 한국적 무협물이니, 하는 마케팅은 일시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형사>는 <다모>가 아니고, 무협수사극도 아니다. 그런 고정관념은 관객들이 진짜 영화를 느끼지 못하게 방해했다. 그런 의미에서, 다모도 보지 않고, 광고도 보지 않은채, 아무런 기대없이 이 영화를 접할 수 있었던 나는 행운아 였는지 모른다.
원래 이명세 감독은 극의 스토리라인에 치중하는 감독이 아니다. 다소 단조로운 이야기를 특유의 만화적 기법을 사용하여 환상과 혼돈의 이미지를 만들어 간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는 말풍선이나 원색의 세트, 그리고 만화풍의 개그를,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과다한 슬로우모션과 2차원적인 카메라워크가 인상적이었다.
<형사>는 가장 이명세적인 영화이다. 원색의 색감, 과장된 캐릭터와 개그, 그리고 슬로우모션과 오버랩의 과잉, 거기에 보이스오버로 처리된 남순의 처절한 외침..등은 <형사>를 영화가 아닌 만화적영화로 만들어준다.

병판의 생일잔치에서 슬픈눈이 검무를 추기전 남순에게 시선을 향한 것은 우연이 아닌 의식적 행동이었을 것이다. 병판과 자신이 역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남순이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미 남순을 사랑하고 있는 슬픈눈은 그런 남순을 모르는 척 한다. 슬픈눈의 검무는,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따르는 병판이 자신을 반역의 길로 이끄는 것을 알면서도 따를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대한 분노이자, 자신을 따라오면서도 정작 자신을 봐주지 않는 남순에 대한 사랑의 울부짖음일 것이다. 남순은 둘이 처음 술잔을 마주한 그 사랑방이나, 처음 대화를 나눈 담벼락에서 슬픈눈을 그린다. 그러나 슬픈눈은 그보다 훨씬 전인 장터에서부터 자신을 따라오는 남순을 위해 노리개를 사지만, 정작 남순은 슬픈눈이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때문에 남순의 천을 잘라냄으로써 여성으로서의 남순을 발견한 것처럼, 눈앞에 드리워진 천을 베어냄으로써 자신을 ''슬픈눈''이 아닌 한 남자로 바라보게 했다. 그러나 슬픈눈은 끝끝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을 ''슬픈눈''이라고 말한 적도 없다. 남순에게 의미없는 존재로 남기 싫어 장부와 함께 장신구를 건내지만, 그렇다고 떳떳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도 없다. 슬픈눈은 ''사람새끼''가 아니니까. 목적없이 남을 죽이며 숨어살아가던 슬픈눈은 이름 따윈 필요없는 존재였으니까, 이름 없는 존재로 남을 수 밖에 없다. <형사>의 가장 큰 미스터리이자 서스펜스는 ''슬픈눈''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웃음^^) 남순과 슬픈눈이 정식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물어본 것도 이름이요, 슬픈눈의 유일한 삶의 의미였던 병판을 배신하고 남순을 선택할 때에 물어본 것도 이름이요, 병판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배신한 슬픈눈을 용서할때 마지막으로 불러보려 한 것도 슬픈눈의 이름이다. 그리고 눈이 흩날리는 한겨울의 달밤에 남순이 부르짖은 것도 슬픈눈의 이름이다. 그러나 불친절한 강동원씨;;는 끝끝내 이름을 밣히지 않는다.

또 마음에 드는 장면은 병판의 체포장면이다. 병판은 하얀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어둠속에 섞여 있는 안포교등의 포졸들에게 칼을 휘두른다. 위조화폐를 만들고 살인을 청부하는 악역이, 오히려 망해가는 조선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내던진 정의감 넘치는 악역이라는 아이러니는, 눈발이 점점이 흩어지는 칠흑같은 밤중에, 백색의 악당이 흑색의 선과 결투를 벌인다는 묘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영화 <인정사정볼것없다>가 장대비처럼 처절한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형사>에서는 하얀 눈밭에 잠긴 고요한 적막을 그린다. 그런 조용한 적막과 강렬한 비트의 탱고, 테크노, 클래식이 어울어지고, 또 백색의 눈밭에 칠흑같은 어둠이 깔리는 식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극적인 사랑과, 슬픈눈과 병판의 비극적인 운명이 몽환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영화의 끝장면은, 오프닝때와 마찬가지로, 한 장돌뱅이의 ''이야기''이다. "옛날옛날에"라는 식의 이야기는, 그냥 ''믿거나 말거나''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눈이 소복히 쌓인 담벼락아래서, 남순이 진짜 ''슬픈눈''을 만난 것인지, 아니면 지나친 사랑의 슬픔에 환상을 본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장터에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남순이고, 슬픈눈일지도 모르고, 혹은 아에 남순과 슬픈눈의 운명 자체가 허구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장돌뱅이는, 이 영화는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냥 장면마다의 찰나의 영상과 감정에 충실해 주기를 바란다는, 감독의 사족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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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은 어떻게 ''마왕''이 되었나 | 도서서평 2006-02-03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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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악마

로베르 뮈샹블레 저/노영란 역
박영률출판사 | 2006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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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적인 무언가를 기대하고 이 책을 펼쳤을때, 몇 페이지를 읽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하다못해 악마에 대한 예술작품 한 두점은 삽화로 들어갈 법 하건만은, 주석이 잔뜩 달린 생소한 용어들만 보였다. 조금 가벼워 보이는 제목만을 보고, 최근의 악마주의에 편승
한 흥미위주의 책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악마의 역사가 아닌, 악마라는 모티브를 통해 인간들의 탐욕의 역사를 고찰한다. 그것도 우리에게 굉장히 생소한 사건이나 사상가들을 언급하면서 말이다. 게다가, 프랑스작가의 글이다보니 수식어도 많고, 번역투의 긴 문장도 많다. 아무리봐도 첫인상과 달리,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였다.

그러나 이 책이 전문 학술서라는 것을 기억하자. 이런저런 학자들의 말을 인용한 것은, 악마의 역사에 대한 가설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그냥 교양으로 읽는 나 같은 독자들이, 그런 세밀한 배경지식에 억눌릴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게다가 작가 뮈샹블레는 나같은 초심자들을 배려해서, 다양한 사례를 통해, 악마와 인간역사의 관계를 설명해준다. 그리고 그 사례들을 하나 하나 읽을 때마다, 천년역사의 역동적인 권력관계를 하나의 모티브로 꿰뚫은 작가의 통찰력에 감동하게 되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대학시절부터 이런 식의 연구를 자주 접해왔다. 서양사를 전공하면서, ''육체의 사회학''이나 ''성을 통해본 서양문화사''등의 수업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성이 인간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한 르네상스 이후 반이성의 요소, 즉 육체나 성, 그리고 악마등은 금기가 되었고, 학자들의 연구대상에서 제되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실은 역동적으로 역사를 움직이는 힘을 지녔다는 가설은 오히려 20C 학자들을 매료시켰던 듯하다.

하지만 <악마 : 천년의 역사>는, 기존의 비주류문화에 대한 연구들을 답습한 아류작으로 치부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뮈샹블레는 육체나 관습 등 가시적인 사회현상이 아닌, ''악마''라는 추상적 개념에 주목했다. 다른 사회현상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지만, 추상적인 개념만큼 유동적인 것은 없다. 동시대 사람들의 생각이 개념을 만들어내지만, 반대로 개념은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도식(schema)이 되기도 한다. 종교 자체가 그러하고, 선악이란는 것이 그렇듯, ''악마''의 모습은 상당히 모호하다. 12C이전에는 ''악마''가 수만의 부하를 거느리고 인간세계를 파괴하는 ''마왕 루시퍼''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저 드워프나 엘프같은 정령이었다. 작가 뮈샹블레는, 이처럼 ''악마''가 상당히 유동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당대의 통념을 쉽게 흡수해서, 역사적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 것 같다. 즉 <악마 : 천년의 역사>란, ''악마''의 개념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고, 또 사람들이 이 ''악마''를 어떻게 조작했는지를 천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고찰한 역사서이다.

악마라는 개념은 무엇보다, 인간사를 설명할때 결코 도외시될 수 없는, 권력이라는 소재와 맞닿아있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적이 필요하다. 작가는 봉건주의 아래에서는 하찮게 취급되던 ''악마''가, 중앙집권이 심화될 수록, 구체적이고 강력한 형상을 얻는다고 본다. 정령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서라면 레골라스 하나면 되겠지만, 절대악 사우론을 대적하려면 전 대륙이 힘을 합쳐야한다. 즉 싸워야 하는 악마의 힘이 강할수록 그에 대적하기 위해서 힘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권력자는 스스로를 정의라 칭하면서 그 힘을 소유한다, 강력한 악마에 대적하기 위해서. ''악마''를 권력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은 종교계도 마찬가지다. 종교전쟁때, 자신들의 점령지에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서, 구교와 신교 모두 마녀에 대한 공포심을 이용했다. 흔히 마녀사냥이 중세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근대의 종교개혁기에 문제된 것이다. 이는 ''악마''라 종교 교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권력욕과 연관된 문제임을 말해준다.

또한 ''악마''의 진화는, 다른 비주류문화연구, 즉 ''육체주의''의 부족한 점을 메워준다. 즉 과학과 이성의 시대인 20C에, 오히려 반이성인 육체가 부각되는가 하는 모순이다. 사회규범은 육체를 억압하는데, 육체는 오히려 방종하는 현실을, 기존의 연구는, 현대사회의 이중성이나 다원주의로 설명한다. 하지만 뮈샹블레에 따르면, 이는 모순이 아닌 당연한 논리이다. 즉 합리주의라는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 속의 악마 역시 강력해지는 것이 순리이다. 이성과 절제의 사회규범이 강할수록, 육체라는 ''악마''의 영향력이 커지고, 더불어 자본주의가 이런 방종에 대한 욕구를 이용함으로써 현대의 악마숭배가 나타난다고 본다. 20C들어 ''악마''가 다시 우리 옆으로 다가왔지만, 이 ''악마''는 천 년전과는 다른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현대의 ''악마''는 어리숙한 숲 속의 ''정령''이 아니라, 브라운관 속의 ''마왕''이다.

''악마''라는 개념 하나로 권력의 투쟁이라는 서양사의 큰 줄기를 집어가는 것을 의외로 매력적인 일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작가가 서양인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고려시대의 자유로웠던 풍속이, 성리학에 의해 격하되었던 역사가 있다. ''악마''의 개념이 한국사에 어떻게 표현되었으며, 결국 ''붉은악마''로 승화되었는지를 고찰한 책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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