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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의 악마들 | 책을 읽다 2021-11-30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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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실크로드의 악마들

피터 홉커크 저/김영종 역
사계절 | 200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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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말과 1900년대 초반의 중앙아시아는 모래 속에 묻힌 유물을 찾아나선 이들로 북적였다. 한때는 도시였고, 사원이었던 곳들은 자연의 힘에 의해, 혹은 권력의 공백에 의해 타클라마칸 사막의 모래 속으로 묻혀버렸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져 있었다. 사막 속으로 들어간 이들은 그곳에 과거의 화려한 미술품이, 문서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건 분명 제국주의적 확장의 한 방편이었다.

 

피터 홉커크의 실크로드의 악마들는 바로 그 시기, 어떤 이들은 위대한 탐험가라 부르고, 어떤 이들은 파렴치한 약탈자라 부르는 이들의 모험담을 다룬다. 주로 여섯 명이다. 스웨덴의 스벤 헤딘, 영국의 오렐 스타인, 독일의 폰 르콕, 프랑스의 폴 펠리오, 미국의 랭던 워너(인디애나 존스 시리즈 주인공의 모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본의 오타니 백작. 그들은 중국이 비로소 깨닫고 유물 반출을 적극적으로 막기 전까지 경쟁적으로 타클라마칸 사막에 걸친, 실크로드의 사라져버린 도시에 벽화들이며, 조상(彫像)이며, 문서들이며, 그 밖의 유물들을 마구잡이로 캐내고 자신들 나라의 박물관으로 실어날랐다.

 

제목에서부터 그들을 비록 악마들(원제, foreign devels)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저자가 그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 혹은 중앙아시아에서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고, 어떤 의미로는 우리가 붉은 악마라고 부르는 의미에서 그렇게 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저자는 그들의 행위에 가치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벽화를 떼어내고, 문서를 갈취한 행위가 도덕적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는 지점에 이르면 바로 그에 대한 판단을 미뤄버린다. 그러니까 그들의 행위가 정당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고, ‘위대한모험에 대해서 집중하고,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자는 것이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 사라진 도시에 접근했고, 어떤 경우에는 별 전문성도 없이, 또 어떤 경우에는 매우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유물들을 수집했다. 그들이 수집해서 고국으로 보낸 유물은 많은 사람들(대중들을 포함해서)의 환호성을 자아냈고, 탐험가들은 존경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으며, 그러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 여겼다. 오히려 무지몽매한 현지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에서 구출해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자도 미처 반출하지 못한 유물이 파괴되는 경우를 서술하며 그런 시각을 언뜻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시각이다. 한반도의 발전이 일제의 점령이 없었으면 오히려 늦어졌을 거란 시각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런 역사적 가정 자체가 부질없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자신들 행위의 부도덕성을 가리기 위한 논리이기도 하다.

 

탐험가들의 모험은 개별적으로 보자면 드라마틱하고 전율이 인다(그게 이 책의 가치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 같은 영화의 소재가 되었을까 싶다. 그들 스스로는 사명감에, 혹은 공명심에 그런 목숨을 건 모험을 했을지 모르지만, 그 행위의 정당함에 대해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 냉전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80년에 초판이 쓰여졌고, 번역본의 텍스트도 1987년판인 책이라, 그 이후에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고, 연구 성과도 많이 축적되어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다룬 책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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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로서 한국어, 어떻게 가르치고 배우나 | 책을 읽다 2021-11-2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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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한국어 수업 이야기

이창용 저
프시케의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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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차 한국어 교원 이창용은 이 책을 네 부류 독자를 생각하며 썼다고 했다. 나는 그중 한국어가 궁금한 독자에 해당한다. 가끔 번역에 관한 책도 읽게 되는데, 그런 책을 읽는 이유와 비슷하다. 우리말, 우리글을 우리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좀 다른 시각에서 봤을 때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이 책도 집어 들었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올해 처음 대학원 실험실에 외국인 학생을 들였다. -메일로, 가끔은 직접 찾아와서 대학원 입학을 문의하는 외국인이 정말 많다. 지금까지는 모두 거절했다. 간단하게 답을 한 적도 있지만, 답을 하지 못한 적도 많았다. 그러다 처음 외국인 학생을 받은 것이다. 몽골 출신의 이 친구가 달랐던 점은 우리말로 문의를 해왔다는 점이다(그런 학생이 맨 처음은 아니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아주 요점을 분명하게 적어서 보냈다.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고, 이 정도의 우리말 실력이면 그래도 의사소통은 되겠다 싶어 받았다. 당시 한국어학당에 다니고 있었다. 한국어학당이란 데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가르치고, 어느 정도나 배우는지 궁금해졌다.

 

책은 크게 세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한국어학당이라는 존재에 대한 것이다. 한국어학당이라는 데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쓰고 있다. 물론 한국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 한국어학당(구체적인 명칭은 서로 다르지만)이다. 그런데 그것만 하지 않는다. 말이라는 게 소통을 위한 도구이니만큼 그런 소통을 한국어로 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는 것이다.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내 학생이 어떤 생활을 했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다음은 한국어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옳게 쓰고 있는 한국어가 설명하려면 이리도 까다로운 것인지를 한국어교원을 통해 깨닫는다. 규칙적인 것이야 설명할 수 있지만, 불규칙적인 것은 설명으로 되질 않는다(‘떡볶이가 왜 . . 냐는 질문이 그토록 까다로운 질문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경험적으로 알 뿐. 그걸 이해시키고 훈련시키는 한국어교원이 대단하고, 또 한국어가 고맥락 문화권이고 영어는 저맥락 문화권이라는 설명에서 우리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다른 학생들의 영어 실력보다 뛰어난 몽골 학생의 한국어 실력에 대해서도 달리 보인다.

 

마지막으론 한국어교원에 대한 얘기다. 자신의 경험과 최근 한국어교원의 지위에 대한 여러 일들에 대해 쓰고 있다. 한국어, 내지는 한글에 대해 자부심을 자주 얘기하지만 그 한국어와 한글을 외국인들에게 가르치는 한국어교원의 지위가 그런 줄은 생각지 못했다.

 

토픽, 즉 한국어능력시험의 한 해 응시인원수가 40만 명에 이른다는 얘기를 읽고 놀랐다. 한국의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서 한국어에 대한 수요도 늘어나고 있고, 당분간은 증가할 것이다. 지금보다 더 다양하게 한국어가 쓰일 것이다. 그런 만큼 한국어학당과 한국어교원은 더 필요해진다. 그 기능과 지위가 (자부심을 가질 만큼) 그렇게 탄탄하지 못하다는 것은 아쉽고, 또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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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와 메소니에, 잔인한 재평가 | 책을 읽다 2021-11-28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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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파리의 심판 The Judgement of Paris

로스 킹 저/황주영 역/강유원 감수
다빈치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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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프랑스의 두 화가를 대비하고 있다.

에르네스트 메소니에와 에두라르 마네.

 

비교 대상이 될까 싶다. 마네야말로 인상주의의 대가로 높이 칭송받고, 그의 작품은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는 화가다. 메소니에? 글쎄 내 기억으로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화가다. 그래서 한 화가(마네)의 놀라운 성공과 다른 화가(메소니에)의 비참한 실패를 대비하는 책임에 분명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맞다. 한 화가의 놀라운 성공과 다른 화가의 반복되는 실패를 다룬 책임이라는 것은 맞다. 하지만 앞의 화가는 메소니에이고, 뒤의 화가는 마네다. 적어도 본문만 600쪽이 넘는 이 책에서 마지막 십여 쪽 분량의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말이다.

 

시대는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쿠데타를 통해 제정을 선언하여 나폴레옹 3세로 군림하던 때이고, 장소는 많은 화가들의 성공을 향해 돌진하며 모여들었던 프랑스의 파리다. 메소니에는 최고의 영예를 누리고, 가장 비싸게 작품이 팔리던 작가였다. 반면 마네는 파리 근교 바티뇰의 스튜디어에서 부지런히 그림을 그렸지만 살롱전에 번번이 낙선하는 화가였다.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라든가 <올랭피아>를 통해 온갖 악명(惡名)을 떨쳤고, 심사위원들이나 일부(이를테면 에밀 졸라)를 제외한 많은 미술평론가들, 그리고 대중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주제나 소재뿐만 아니라 그는 제대로 된 윤곽을 그릴 줄도 모르는 화가였으며 그림을 대충 마무리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역사화가를 그리며 유명세를 떨친 메소니에는 말의 근육 하나하나까지 꼼꼼히 연구하여 그릴 정도로 극도의 사실주의적인 그림을 그렸다. 인물을 그릴 때도 밀랍 인형을 먼저 만들었고, 전쟁화를 그리기 위해 온갖 제복이며 무기들을 다 갖췄다. 크기가 크지도 않은 그림 한 점을 그리는 데 몇 년이 걸리기 일쑤였다(아이러니한 것은 마네는 사실주의 화가로, 메소니에는 그런 명칭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역사의 평가(여기서는 파리의 심판’)는 달랐다. 메소니에가 생존에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의 사후 십 년쯤 지난 후에 완전히 보잘 것 없는 작가, 가치가 없는 작가로 폄훼되고 말았고, 미술사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가끔 등장하는 것은 마네의 작품에 대한 방해라는 사실과는 좀 다른 얘기를 할 때뿐이다). 반면 마네는 일련의 화가들(이를테면 모네, 르누아르, 세잔 등)을 대표해서 인상주의의 왕으로 칭송받게 된다.

 

인상주의, 혹은 인상파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은, 1874년의 살롱전에 낙선한 화가들이 전시장 근처에 따로 그림을 전시했을 때 모네의 <르아브르: 항구를 떠나는 고깃배>라는 작품이 무미건조한 제목에 르누아르가 넌더리를 내자 모네가 제목을 <인상: 해돋이>라고 다시 붙인 데서 기인한다고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몇 가지 수정해야 하는 것이 있다. 이 전시회는 많은 낙선화가들이 참여했지만 1874년 살롱전에 대한 낙선전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낙선전이 처음 열린 것은 1863년이었다(그래서 이 인상파 화가들을 대체로 1863세대로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보수적인 미술 정책에 따라 많은 작품들이 낙선되자 화가들이 적극적으로 요구해서 당국의 허가 하에 열린 것이었다. 거기에는 마네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후로 10년 간 마네의 위상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올랭피아>는 여전히 그의 스튜디어오에 잠들어 있을 수 밖에 없었지만 다른 작품으로 조금씩 살롱전에 입선되고 있었고, 조금씩 팔리는 작품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1874년의 전시회(“다양한 자본금의 주식회사라는 따분하고도 전혀 의외의 제목이었다)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광채와 명예가 넘치는 영광으로 남으며인상파의 거두로 소개된 셈이다.

 

책에 실린 그림들을 보면 왜 메소니에가 당시에 상찬받는 화가였지만 지금은 잊혀진 화가였는지, 마네가 왜 당시에는 그런 혐오의 대상으로까지 지탄받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대단한 화가로 평가받는지를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창의성의 문제인 셈이다. 미술 작품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있는 것을 그대로 정확히 표현하는 것을 대단하게 인정하는 세태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작가의 관점에서 표현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순식간에 바뀐 것이다. 그게 바로 파리의 심판이다.

 

이것은 미술 작품뿐만 아니라 한 사람을 포함한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당대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역사의 평가가 바뀌는 것을 이 사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문화적으로 우상과 같이 평가받는 이들이 후대에 어떻게 평가받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혹은 과거에 높은 칭찬을 받았다가 지금은 내팽개쳐진 인물이 또 나중에는 다시 평가될 수도 있는 일이다. 로스 킹이 표현하고 있듯이 잔인한 재평가. 언제나 이러한 잔인한 재평가 앞에 서 있는 우리들 모두는 겸손해져야 한다.

 

19세기 인상파의 대두를 도식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그려낸 이 뛰어난 책을 읽으며 정말 가슴이 벅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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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절의 유래, '4월의 물고기' | 책을 읽으며 2021-11-27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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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을 항상 11일에 경축한 것은 아니었다. 중세 동안 유럽에서 통용된 율리우스력에서 설날은 325일 춘분 즈음이었다. 그러나 1564년 프랑스의 샤를 9세는 루이옹 칙령에서 새해를 11일에 시작한다는 정했다. 3월 말에 새해를 축하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매우 혼란스러워 했다고 전해진다. 바뀐 달력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민간 전통은 41일에 짓궂은 장난을 치는 날을 만들어주었다. 4월 첫날에 짓궂은 장난을 치는 관습은 모든 프랑스 사람들이 새로운 달력에 익숙해진 뒤에도 계속되었다. 가장 인기 있는 장난은 종이로 만든 물고리를 친구의 등에 물래 붙이고, 들켰을 때 ”4월의 물고기(Poisson d’Avril)!“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이 문구는 곧 이 날을 지칭하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41일에는 만우절 바보를 뜻하는 ‘4월의 물고기가 되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로스 킹, 파리의 심판(329)

 

 

파리의 심판 The Judgement of Paris

로스 킹 저/황주영 역/강유원 감수
다빈치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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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 자신의 모습을 그리다 | 책을 읽으며 2021-11-26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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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들라크루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광대들이 익살을 떨고 대규모의 불꽃놀이가 파리에서 열린 지 이틀 뒤인 1863817일 페르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앵그르와 회화에서 중요한 것인 무엇인지에 대해 평생을 두고 대립했던 들라크루아였다(아주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애그르는 ’, 들라크루아는 이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1831년 살롱에서 처음 공개된 이 작품은 프랑스 대혁명이 아니라 1830년 혁명이 배경이다. 이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물러나고 자유주의적인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오른다. 이 전투적이고 명예로운 작품에 들라크루아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여리고 얌전한 들라크루아는 난폭한 폭도들에 겁을 먹고 바리케이드에서 싸우지는 않았지만, 그림 속에 자기를 그려넣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가슴을 드러낸 자유의 여신 옆에 서 있는, 실크해트를 쓰고 손에는 라이플을 들고 있는 건장한 사람이 바로 그이다.”

-로스 킹, 파리의 심판(191)

 

 

파리의 심판 The Judgement of Paris

로스 킹 저/황주영 역/강유원 감수
다빈치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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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의 태피스트리 짜기 | 책을 읽다 2021-11-2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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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자연은 가장 긴 실만을 써서 무늬를 짠다

타스님 제흐라 후사인 저/이한음 역
EBS BOOKS | 2021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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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ED를 발전시킨 공로로 1965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리처드 파인만은 1964년 코넬 대학교 특강을 다음과 같은 맺음말로 마무리했다.

자연은 가장 긴 실만을 써서 무늬를 짠다. 따라서 자연의 천은 작은 조각 하나하나가 태피스트리 전체의 짜임새를 드러낸다.”

 

번역서의 제목뿐만 아니라 원제목(“Only The Longest Threads”)는 바로 여기서 왔다. 저자는 이 책의 두 축 중 한 명인 사라의 편지를 빌어 이 문장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세계는 너무나 풍부하고 다양해서 언뜻 보면 엉성하게 이어 붙인 온갖 것들의 조각보 같아요. 하지만 이따금 한순간 환하게 반짝이는 조명에 천에서 이리저리 구불거리며 가까이 있는 것들과 멀리 있듯 것들을 연결하는 한 가닥의 실이 빛나곤 하지요. 이론들이 통일될 때 벌어지는 일이 이것이 아닐까요? 바로 그 순간에 공통의 기본 구조가 빛을 발하는 거예요.”

 

파키스탄의 끈이론 연구자인 타스님 제흐라 후사인인 그렇게 물리학에서 언뜻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과 같은 발견을 가장 긴 실을 이용하듯 서로 연결하고 있다.

 

후사인이 물리학에서 영광의 순간들과 이론들을 소개하는 방식은 독특하다. 많은 과학교양서적들이 하듯이 위대한 물리학자들의 발견을 소개하고,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밝히고, 그것이 후대에 어떻게 이어졌는지, 그리고 어떤 한계가 있었는지 등을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다.

작중의 작가인 레오는 힉스 보손의 발견 발표 현장에서 만난 사라의 충고에 따라서 이론이 아닌 사람에 집중하기로 하고, 소설의 형식을 빌려 위대한 물리학 발견의 순간의 의미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후대의 관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이의 시점이 아니라 그 발견이 이루어진 당대, 혹은 바로 그 직후의 시점에, 그 발견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그 발견에 대해 진심으로 매혹당한 이들의 관점에서 쓰고 있는 것이다.

 

맨 첫 장면은 뉴턴이 사망한 해에 한 시골 지주의 10대 아들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를 읽으며 그 의미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모습이다. 물리학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이의 흥분이 절로 느껴진다. 그 다음은 케임브리지의 학자가 화가인 자신의 누이에게 보낸 편지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패러데이의 전자기 발견에 이은 맥스웰의 통합이다. 그가 맥스웰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맥스웰의 놀라운 천재성도 포함되지만 과학을 통해 생각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과학이 이미 삶에서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어가는 시대를 표상하는 것이다.

 

20세기의 물리학의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다(물리학만의 성과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업적들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관해서는 아인슈타인이 미국에 첫발을 내딛을 때 그 장소(뉴욕)에 있었던 한 과학 교사가 쓰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책과 그의 이론을 해석한 동시대의 책을 통해서 상대성이론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밤을 새는 교사는 상대성이론뿐만 아니라 그 이론을 주창한 이에게 푹 빠진다. 정말 제대로 이해한다면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묶고, 질량과 에너지를 관련시킨 이에게 빠지지 않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양자역학에 관해서는 양자역학의 산실이 되었던 덴마크 코펜하겐의 닐스 보어 연구소의 박사후 연구원이 맡고 있다. 양자역학의 난해함은 그 정도나 되어야 설명이 가능할 듯 한 것이다. 다른 책에서도 수도 없이 소개되는 양자역학의 영웅들이 여기서도 등장하지만, 그들의 등장은 양자역학을 통해 세계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당대의 느낌을 보조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다음부터는 좀더 난해해진다. 입자물리학과 전약통일(전기력과 약력의 통일)에 관해서, 양자 장 이론과 재규격화에 대해서 다룬다. 만약 이 이론들을 그냥 다뤘다면 많이 이들이 냅다 내팽겨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사인이 취한 방식은 그 이론들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이론을 연구하고, 받아들이는 입장이 과연 어떤 마음을 통한 것인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물리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자식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오래 전에 물리학을 연구하다 지금은 포기한 중년 신사가 노벨상 수상식장에서 떠올리는 상념들은 물리학이 차가운 학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끝으로는 끈이론을 연구하는 것으로 설정된 사라가 끈이론에 대해서 짧게 덧붙이고 있다. 끈이론이야말로 모든 것을 통합하는 이론이라는 시각도 있고, 증명하지 못하는 유사과학이라는 시각도 없지 않지만, 이 이론을 연구하는 이의 바램이 과연 무엇인지를 이 짧은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후대의 눈은 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지만, 너무 많은 것을 보기 때문에 발견의 당대에서 가지는 의미를 놓치기 쉽다. 그래서 당대의 눈으로 보는 것은 중요하다. 이 책이 당대의 눈을 완벽히 재생시켜 놓지는 못했겠지만(당대에 쓴 책이 아니므로), 그런 시도 자체가 물리학, 과학의 의미를 좀더 세심하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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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시원한 권선징악은 아니지만... | 책을 읽다 2021-11-25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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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버닝 룸

마이클 코넬리 저/한정아 역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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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를 드롭, 블랙박스에 이어 버닝 룸까지 읽어보니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해리 보슈라는 은퇴를 앞둔 유능한 형사는 한번에 한 사건만을 캐지 않고, 적어도 2개의 사건을 동시에 해결해 나간다. 속도가 붙는 사건에 더 몰두하지만, 다른 사건에 대해서 무심하지 않는다. 파트너와 약간의 갈등 관계가 초반에 형성되지만, 결국엔 협력적인 관계가 되고 둘의 조화가 사건 해결에 큰 힘이 된다. 상관과는 대립한다. 상관은 정치성을 띨 수 밖에 없고, 그런 정치성을 해리 보슈는 인정은 하지만 혐오한다. 정치성이 편견으로 이어질 때는 더욱 그렇다. 그는 여러 기관에 친구를 두고 있다. 전 애인도 있고, 공적으로 엮인 관계도 있지만, 그는 그의 사건을 도와줄 사람을 잘 찾아낸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이를테면 기자의 경우에는 기사)을 적절히 줄 줄 안다. 수사에 있어서는 적당히 선을 넘는다. 그것 때문에 개인적으로 곤란한 지경에 처하기도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특히 버닝 룸에서는 그 곤란한 지경에 처한 상황으로 소설이 끝난다). 그리고 그는 사건을 멋지게 해결한다. 여기서 멋지게라는 것은 시원하게권선징악으로 끝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최선을 다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수준까지 사건을 설명해낸다. 그게 그가 하는 일이다. 개성이 강한 한 형사를 주인공을 하고 있다 보니 당연히 어느 정도의 전형적인 전개가 당연지만, 그게 작품의 밀도를 옅게 하는 작용은 하지 않는다.

 

버닝 룸에서는 한 유랑악단 단원이 느닷없이 날아온 총탄에 맞았다가 10년 후에 사망하게 된다. 그제서야 피해자의 몸에서 총알을 빼낼 수가 있었고, 그 총알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이전까지 추측하고 있었던 내용이 바뀌고, 수사에 돌입하게 된다. 해리 보슈의 새로운 파트너는 젊은 라틴계 여성 형사 소토. 그녀는 갱단과의 총격전을 수행하고 영웅이 된 인물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아픔이 있었고, 그게 경찰이 된 이유 중 하나였다. 해리 보슈와 소토는 총격 사건과 함께 소토의 어린 시절 겪었던 사건(방화 사건이었고, 지하 어린이집의 여러 어린이들과 교사가 죽었다)을 동시에 추적한다.

 

다른 사건에서도 그래왔지만, 여기서도 해리 보슈는 아주 작은 단서를 바탕으로 그물을 넓게 펼친 후, 조금씩 조금씩 그 그물을 당기면서 범위를 좁혀간다. 분명 증거에 기반해서 사건 추적을 시작하지만, 자신의 감에 의존하기도 하고, 또 연극도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밝혀진 사건의 진실은 씁쓸하기만 하다. 하나는 아내의 불륜 상대를 처치하기 위한 청부 살인에서 빚어졌으며,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파렴치한 사건이었고, 또 하나는 그 사건의 주동자인지 공범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사건을 일으킨 자가 자신 나름대로 용서를 구해버렸다. 앞서도 썼지만, 둘 다 권선징악의 속시원한 해결은 아니다. 어쩌면 그게 현실인 것처럼.

 

어쨌든 이 소설에서도 마이클 코넬리는 자신이 아주 뛰어난 경찰 소설, 범죄 소설 작가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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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1%의 아드레날린을 위해서 | 책을 읽다 2021-11-24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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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블랙박스

마이클 코넬리 저/한정아 역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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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보슈는 드롭: 위기의 남자이후 새로운 사건으로 1992년의 살인 사건을 맡는다. 1992년은 바로 LA 폭동이 일어난 해이다. 경찰의 로드니 킹 폭행 사건에 이은 법원의 판결에 불만을 품고 흑인들을 중심으로 LA를 무법천지로 만들었던 사건이다. 그리고 그해는 <LA 타임즈>의 범죄 담당 기자이던 마이클 코넬 리가 LA 경찰 해리 보슈를 주인공으로 하는 첫 장편소설 블랙 에코를 쓰고 작가로 데뷔한 해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마이클 코넬리는 자신의 출발점에서 벌어진 사건을 현재(물론 LA 폭동으로부터 20년이 지난 2012년 시점)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사건은 LA 폭동 당시 덴마크 기자가 총으로 살해되었고, 남아 있는 것은 92년형 베레타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탄피뿐이다. 그런데 이 총은 2012년 살인 사건에서도 증거품으로 나오면서 재수사가 시작된 것이다. 작은 단서이고, 여기서 그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가능성은 무척 낮은 상황이다. 그러나 해리 보슈는 작은 단서들을 모으고 또 모으며 퍼즐을 맞춰가기 시작한다.

 

소설의 시작은 백설공주사건이라는 자극적인 명칭으로 시작하지만 중간은 다분히 지루하다. 해리 보슈가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증거를 찾고, 정치적인 상사와 대립하면서 감찰을 받고, 또 딸과 드롭: 위기의 남자시절 사귀기 시작한 애인과의 관계가 이어진다. 그러나 해리 보슈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사건은 갑자기 진전을 보인다. 이게 작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마도 대부분의 경찰 수사, 특히 시간을 오래 끌게 되는 수사, 그리고 미제 사건 수사가 이런 과정을 거치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해 마이클 코넬리는 경찰 수사는 99퍼센트의 지루함과 1퍼센트의 아드레날린으로 이루어진다.”라고 쓰고 있다. 물론 이 소설은 ‘99퍼센트의 지루함은 아니지만, 마지막의 아드레날린을 위하여 그 과정들을 다 거쳐야 한다.

그런 아드레날린의 세례를 듬뿍 줄 수 있는 소설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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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해리 보슈 | 책을 읽다 2021-11-24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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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드롭:위기의 남자

마이클 코넬리 저/한정아 역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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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코넬리의 이름을 누군가의 서평에서 읽으면서 기시감이 들었다. 찾아보니 이미 10년 정도 전에 시인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라는 작품을 읽었었다.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는 영화로도 본 기억이 있다. 시인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쫄깃쫄깃한 느낌이 들었던 것으로,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는 진퇴양난의 덫에 걸린 한 변호사의 심리에 빠져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작가 소개>를 보면 마이클 코넬리의 대표 작품은 해리 보슈라는 형사를 주인공을 한 작품들이라고 되어 있다. 이미 스무 편 가까운 작품이 번역되어 있을 정도다. 어느 것부터 읽을까 고민하다 너무 멀지는 않게, 그러나 가장 최근은 아니게, 라는 기준으로 드롭: 위기의 남자을 골랐다(해리 보슈 시리즈의 제15).

 

DROP은 미국 경찰의 퇴직유예제도를 말한다. 이미 경찰 정년이 지난 해리 보슈는 드롭을 신청하고 정년이 3년이 연장된다. 미제사건을 전담하는 부서에서 일하는 해리 보슈는 우선 미스터리한 사건 하나를 맡는다. 1989년의 살인 사건에서 채취한 혈액 DNA29살의 성폭행범의 것으로 밝혀진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8살 때 그 짓을 벌였다는 것인데,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해리 보슈는 이것이 경찰국의 실수 때문에 이런 결과가 벌어진 것인지 조심히 조사를 시작한다.

 

그런데 이 사건을 맡자마자 아주 정치적인 사건 하나를 의뢰받는다. 전직 경찰 간부이자 현직 시의원, 동시에 해리 보슈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어빈 어빙의 아들이 고급 호텔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이다. 일단 자살로 보이는 이 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조사해달라고 특별 요청한 이가 바로 어빈 어빙이라는 점은 해리 보슈를 혼란스럽게 하지만, 그는 묵묵히 사건의 진실을 쫓는다.

 

섣부른 예상과는 달리, 그리고 일반적인 상황에 맞게도 두 사건은 서로 얽히지 않는다. 우선 두 번째 추락 사고와 관련해서 해리 보슈는 잘못된 길로 접어들려는 찰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론은 해리 보슈의 의도와는 달리 경찰국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게 된다. 해리 보슈는 자신의 감()이 떨어졌음을 깨닫고 퇴직유예를 철회하고자 한다.

 

그러던 와중 그는 파트너와 함께 첫 번째 사건을 처리한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이 되어 그들 눈앞에 펼쳐진다. 한 건의 살인 사건, 그것도 전혀 단서가 없던 사건의 진실은 수십 건의 연쇄 납치 살인 사건의 한 끄트머리였던 것이다. 이로써 해리 보슈는 그런 살인 사건의 범죄자를 잡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놀랍도록 극적인 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이를테면 범인이 자신의 아버지인 척하는 것을 해리 보슈가 거울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다 깨닫는 장면), 깜짝 놀랄 만큼의 반전을 거듭하는 소설은 아니다. 다만 경찰 생활 끄트머리에서 자신의 일을 성찰하고, 그것이 범죄자를 바라보는 관점(범죄자는 태어나는 것인가, 환경 때문에 생겨나는 것인가)에 조금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은 정답이 없는 삶에서 나이를 먹어가며 지속적으로 고지식해지는 것이 아니라, 고민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되기란 정말 힘드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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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 세계를 재편하다 | 책을 읽다 2021-11-23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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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얄타

세르히 플로히 저/허승철 역
역사비평사 | 2020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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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23,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기울어가는 시점에 미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 이른바 3거두(Big Three)가 크림 반도의 얄타에 모였다. 막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4선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프랭클린 루스벨트, 독일에 맞서 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을 이끈 원스턴 처칠, 그리고 잔혹한 독재자였지만 독일로부터 국가를 지켜낸 이오시프 스탈린, 이들은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이며, 전쟁이 끝난 세계를 어떻게 재편할 것인지에 대해 8일 동안 논의했다.

 

회담의 시간과 장소부터 보안에 부쳐졌던 얄타 회담은 정해진 시간도 없었고, 의제도 미리 정해져 있지 않았다(물론 상대방이 어떤 데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서로 거의 확실하게 짐작하고 있긴 했지만). 그들이 회담은 공식적인 모임과 비공식적인 모임을 번갈아가며 협력과 대립을 오갔다. 그들은 국가의 지도자였지만, 개인적인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하고, 혹은 숨겨가면서 협상했다. 그렇게 협상한 결과는 모두에게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였지만, 얄타 회담은 결국 전쟁이 끝나고 3년 후 냉전으로 이어지고야 말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련이 해체된 이후 새로운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얄타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졌다. 세르히 플로히(그는 체르노빌)의 저자이기도 하다)는 미국과 영국, 소련의 문서들과 그 회담에 참여했던 이들의 회고록, 일기 등을 종합해 얄타 회담을 재구성하고 있다.

 

우리는 얄타 회담을 한반도의 분단으로 이어진 결정적 계기가 된 회담으로 공부했고(포츠담 회담을 그것을 확정지었다). 또 병에 걸린 루스벨트를 스탈린이 주물럭거려 많은 이득을 챙긴 회담으로 쓰여진 것을 많이 읽었다. 하지만 세르히 플로히가 기록하고 있는 얄타 회담은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 각자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이해 관계를 가지고 회담을 참여했다.

 

루스벨트는 UN 창설 문제와 소련의 대일 전쟁 참여가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처칠에게는 프랑스의 독일 점령 분할에의 참여와 폴란드에서의 정부 성격이 우선적으로 얻어내야 할 사안이었다. 그에 더하여 영국 식민지 문제를 덮는 것도 관건이었다. 스탈린은 루스벨트와 처칠의 그런 우선 사안들을 지렛대 삼아 소련의 이익을 극대화시킨다. UN에 참여하겠다고 하면서 추가 의석을 요구하였고,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를 약속하며 사할린 점령과 만주에서의 권리를 얻어냈다. 영국에 대해서는 프랑스를 인정하면서도 폴란드 문제에 대해서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미 소련이 폴란드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처칠의 영국이 그리스에서 한 일을 묵인하면서 스탈린의 소련이 동유럽에서 할 일에 대해서도 묵인받기를 원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의중을 떠보고, 협력과 대립을 반복하면서 그들은 전쟁 이후의 세계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재편하고자 했다. 의외인 것은 처칠과 루스벨트의 사이가 협력이 위주이면서 부분적으로 대립한 것이 아니라(그렇게 해서 스탈린에 대적한 것이 아니라), 처칠과 루스벨트, 스탈린이 사안 사안마다 서로 우호적인 입장을 취한 경우가 달랐다는 점이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매력을 느끼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의 참모들도 지도자가 이끄는 대로 그대로 행동하고 말을 하지 않았던 것도 이 책은 그대로 보여준다(물론 소련은 그렇지 않았다).

 

세계는 얄타 회담에서 논의된 그대로 재편되지는 않았다. 루스벨트는 회담 2달 후 죽었고, 처칠은 포츠담 회담 중에 선거 결과가 발표되면서 수상 직에서 내려왔다. 동맹은 금방 깨졌고, 세계는 냉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많은 경우 지금까지) 얄타에서 그어진 국경선은 지금도 국경선으로 작용하고 있고, 그것이 여전히 갈등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얄타 회담을 통해서 동의를 받은 UN는 그 위상에 대한 회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얄타 회담의 영향권에서 살아오고 있었던 셈이다.

 

세르히 플로히는 내가 그 회담장 근방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듣고, 행동을 관찰하는 느낌이 들게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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