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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 광기를 이기는 정신 | 책을 읽다 2022-10-0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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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에라스무스 평전

슈테판 츠바이크 저/정민영 역
원더박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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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는 나치의 나라에서 살 수 없었다. 유대인이었던 그의 책은 금서로 지정되었고, 불살라졌다. 결국 영국으로 피신했고, 결국 2차 세대대전 중 브라질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에라스무스의 평전을 쓴 것은 1934년 영국으로 망명하기 직전이었다. 그는 에라스무스에 자신의 시대와 자신의 조국, 그리고 츠바이크 자신을 투영했다. 광기와 극단에 반대했던 힘없는 이상주의자 에라스무스를 통해 시대를 고발하고자 했고, 자신의 신념을 밝히고자 했다. 츠바이크가 쓴 많은 평전이 그랬듯이.

 


 

 

에라스무스는 어떤 이였는가? 그는 인문주의자이자 최초의 유럽인, 혹은 세계주의자였다. 글쓰기만으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던 책의 인간이었다. 그는 이성의 힘을 믿었으며, 광신을 증오했다. 그는 하나의 주제를 깊이 파고들기보다 넓은 분야를 아우르는 의 학자였다.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았던 중립의 인간이었고, 겁이 많아 위험을 피해 달아나는 인간이었다. <우신예찬>과 같은 책들을 통해 종교개혁의 이념의 단초를 드러냈지만, 깃발을 든 루터에 동조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교황의 편에도 서지 않았다.

 

츠바이크는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당대의 인문주의자에게서 오늘날까지 여전히 실현되지 못한, 공동 문화와 문명 속에 통일된 유럽 국가가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당대 인문주의자에 대해 긍정의 시각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을 너무도 간단히 보았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귀족의 거만함을 유지하며 평민과 교류하지 않으면서 민중을 무시했다. “인문주의의 근본적인 결함은 민중을 이해하고 그들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고 위에서 그들을 가르치려 했다는 데 있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츠바이크는 루터나 마키아벨리와 비교하며 에라스무스 사상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에라스무스의 사상이 역사의 주류가 된 적이 없고, 유럽의 운명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적 없지만, 한번도 현실화되지 않았으므로 패배한 적도 없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이상이야말로 영원한 회귀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사상은 몽테뉴로, 스피노자로, 디드로로, 볼테르로, 레상으로, 실러로, 칸트로, 톨스토이로, 간디로, 롤랑으로 이어져 세계주의자의 보편적 사상이 되고 있다.

 

츠바이크가 에라스무스에 투영시킨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다. 광기의 시대에 이성의 힘을 믿었다. 집단적 광신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한번도 주류가 되지 못했던 사상이지만 그래도 도덕적 각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좌절된 순간,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시대에 다시 에라스무스에 대해 읽는 이유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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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에라스무스 평전 | 한줄평 2022-10-09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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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주의자이자 에라스무스에 투영시킨 츠바이크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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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사건으로 본 역사의 단면 | 책을 읽다 2022-10-07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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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세상을 뒤흔든 50가지 범죄사건

김형민 저
믹스커피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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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역사 속에 기록되면서 개인이든, 공동체든 함께 기록된 것이 바로 범죄일 것이다. 범죄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 공동체와 개인,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원인이자, 동시에 결과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범죄 자체는 사회의 거울이며, 당연히 역사의 단면을 드러낸다. 생각해보면 역사의 기록은 범죄 기록이 대부분이랄 수 있는데(역사의 흐름에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쟁 자체가 범죄다. 적어도 어느 한쪽에서는), 사실 역사를 기술한다면서 대놓고 범죄를 운운하는 경우는 잘 보지 못했다.

 

방송 PD이자, 역사 덕후 김형민이 한 작업이 바로 그 범죄라는 사회의 거울을 통해서 역사의 단면, 사회의 모순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통해서 사회가 발전되는 모습을 엿보자는 것이다. 과연 여기의 범죄들이 모두 세상을 뒤흔든것인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하나가 의미를 둘 수 밖에 없는 사건들이라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우선 역사의 흐름을 뒤바꾼, 혹은 역사의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범죄가 있다.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된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건이 있고, 홍콩의 부정부패를 급감시킨 부정부패 사건이 있다. 범죄자를 체포할 때 반드시 고지해야 하는 미란다 원칙이 된 범죄자(그가 바로 미란다다)가 있고, <모나리자>를 훔치고 되돌려줌으로써 그 그림을 최고로 유명한 그림으로 만들고, 이탈리아의 영웅으로 떠오른 도둑도 있다. 학대받는 소녀를 구하기 위해 동물보호법을 동원해야 했던 역사도 여기에 넣고 있다.

 

괴물 같은 범죄자들도 있다. 커플 갱, 일본의 60년대를 뒤흔든 극좌파, 연쇄살인마들, ‘아기 농장을 만든 괴물, 추종자들을 집단 자살로 이끈 사이비 교주 같은 이들이 그렇다. 야만의 시대에 야만적인 범죄자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도 쉽지 않다. 그것을 그대로 시대의 한계라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지, 그게 아니라 그럼에도 그들을 지독하고도, 파렴치한 범죄자라고 비난해야 할지.

 

1부가 외국의 범죄들을 다루고 있는 데 반해, 2부에서는 우리나라의 범죄, 범죄자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더욱 친근(?)하면서도 더 시사적이다. 가난이 만든 범죄자, 일제 강점기의 남편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아내(그리고 그 여인의 미모에 더 열중했던 언론), 성노예가 되었던 식모의 살인, 권력자의 아들(이기붕의 아들 이강석) 행세했던 청년, 일본에 히로뽕을 밀수하면서 애국한다고 우겼던 이들, 고고학자보다 더 많은 보물을 발굴했던 도굴꾼들(그들 덕분에 석가탑에 모셔졌던 무주정광대다라니경이 발굴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의 이야기들이 그렇다. 그 아름다운 소설들을 우리에게 남긴 소설가 김유정의 전형적인 스토커였다는 것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그런데, 이 책에서는 간첩에 대한 얘기가 한 장(chapter)이나 차지한다. 여섯 꼭지의 이야기다. 남파 간첩 이야기뿐만 아니라, 자생적 공산주의자가 북한의 간첩으로 둔갑하기도 하고, 이중 간첩으로 활동하다 남파된 후 자수했음에도, 간첩으로 활동하기 위해 자수했다는 판결로 사형당할 수 밖에 없기도 했다. 간첩을 만드는 데도사같았던 이들의 이야기도 했다. 다른 데서는 쉽게 한꺼번에 접하기 힘든 내용들이지 않나 싶은데, 남과 북의 간첩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 아픈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을 흉측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물론 대부분 선량하지만, 누구든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간다. 그것이 범죄로 처벌받을지 아닐지는 그것을 판단하는 이의 주관에 따를지도 모른다. 범죄자의 얘기를 읽다보니 세상이 어두워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이들 사이에서도 이만큼 왔다는 생각에 작은 빛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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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든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미생물 | 책을 읽다 2022-10-06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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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100개의 미생물, 우주와 만나다

플로리안 프라이슈테터,헬무트 융비르트 저/유영미 역/김성건 감수
갈매나무 | 2022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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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물은 어디에나 있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 딱 드는 생각이 그것이라 확신할 수 있다.

 


 

 

100종의 미생물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먼저 미생물이란 게 어떤 결 포함하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우선 박테리아(bacteria)라고 하는 세균을 포함한다. 그리고 고세균(archaebacteria)를 포함하는데, 모양은 꼭 앞의 세균(bacteria, 고세균과 구분하기 위해 진정세균이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과 닮았지만, 오히려 진핵생물(동물과 식물, 균류 등)과 더 가까운 것을 말한다. 이것들은 대체로 극한 환경, 즉 높은 온도, 높은 압력, 높은 염분 등에서도 살아가는 생명체들로 1980년대 칼 워스(Carl Woese, 이 책에서는 워스라고 쓰고 있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이 양반은 자신의 이름을 우스라고 발음했다)가 찾아내 진핵생물, 세균과 구분되는 새로운 역(Domain)을 창설했다. 세균, 고세균과 함께 이른바 진핵 미생물이라 불리는 종류도 포함된다. 버섯, 곰팡이, 효모 등을 포함하는 균류(fungi), 조류(algae)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생물인지, 아닌지에 대해 지금도 논란이 있는 바이러스(virus)도 있다(이 책의 저자들은 일단 바이러스가 생물이 아니란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미생물에 포함시킨 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전 세계 모든 생물학과에서 바이러스를 다루는 걸 보면 바이러스가 생물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는 느낌이다). 이런 종류의 생물(바이러스까지 포함하여) 100종이다.

 

그들이 다루는 미생물들은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일반적이라는 것은, 미생물, 혹은 세균, 고세균, 균류, 조류, 바이러스 등의 일반적인 특징을 설명하는 데 이용되는 교과서적인 종류들이 아니란 얘기다. 그러니까 대장균(E. coli)’와 같은 세균은 없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렇게 일반적이지 않은미생물의 특성이 일반적인 미생물의 특성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미생물은 아주 다양하며, 그 다양성으로 어디에든 있으며, 정말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그 무슨 일이든에는, 핵폐기물의 감시자 역할도 있으며, 우주의 미니 광부 역할도 있으며, 우리가 알을 낳지 않게 진화하도록 한 것도 있으며, 경제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으며, 치즈 맛을 결정하기도 하며, 어떤 국가의 독립에 기여하기도 하며, 다이너마이트를 만드는 데 역할을 하기도 하며, 약을 몸속에 전달하기도 하며, 질병을 치료하기도 하며, 다이어트에 도움을 주고도 하며, 초콜릿의 아로마와 풍미를 만들기도 하며, 핏빛 눈을 만들기도 하고, 기후 온난화의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하고, 치명적인 생물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만약 지금 못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조만간 그런 일을 하는 미생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의 미생물의 종류나 역할을 보면, 우주에서의 역할에 대한 얘기가 많다. 저자 중 한 명이 천문학자여서이기도 한데(그래서 제목이 <... 우주와 만나다>이기도 하다), 우주의 극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고, 또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미생물이기에 우리의 우주 탐험, 개발에 앞장세울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 어디에나 있으며, 무슨 일이든 하는 미생물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겸허해진다. 저자들의 말마따나 우리가 미생물로 가득한 지구의 손님일 뿐이라는 자각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여기가 우리들만이 점유하고, 우리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세상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 역시 우리만의 능력이 아니란 것도 알 수 있으며, 우리가 앞으로 여기 지구에서 살아가든, 어떻게든 이 지구를 탈출해 우주로 그 서식 범위를 넓히든 우리 힘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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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100개의 미생물, 우주와 만나다 | 한줄평 2022-10-06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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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미생물, 그중 딱 100개만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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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뢰성,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추리소설 기법으로... | 책을 읽다 2022-10-0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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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흑뢰성

요네자와 호노부 저/김선영 역
리드비(READbie) | 2022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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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무협소설 제목에다 표지까지 음산한 책이지만, 단 몇 장을 읽고 나면 빠져든다. 이 소설은 역사소설이면서, 추리소설이면서, 심리소설이다. 일본 전국시대 사들의 쟁패를 다루면서도, 괴이한 사건의 전말을 추리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치열한 심리 게임이 벌어진다.

 


 

 

배경은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 전국시대의 혼란을 정리하며 패권을 눈앞에 둔 시점에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든 아라키 무라시게의 아리오카성이다(찾아봤더니 아라키 무라시게는 실제 인물로 무장이면서 다인(茶人)으로 리큐십철(利休十哲)의 한 명이라고 한다. 소설에서도 그의 다인으로서의 풍모가 나온다). 무라시게는 오다의 휘하에 있었으나 그에 대적하는 모리 가문 쪽에 붙고, 철옹성과 같은 아리오카성에서 농성 중이다. 모리 가문이 그들을 응원하러 오기를 기다리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고, 주변의 믿었던, 혹은 의심하던 세력들은 오다에게 항복하면서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인다.

 

소설은 무라시게를 설득하기 위해 온 구로다 간베에라는 명민한 사내를 지하감옥에 가두는 장면에서 시작한다(‘흑뢰성(黑牢城)’이란 제목이 뭘 의미하는지 궁금했는데, 바로 지하감옥을 뜻한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당시의 상식으로는 그의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를 죽여야 했지만, 제발 죽여달라는 간베에의 처절한 외침을 무시하고 무라시게는 그렇게 하지 않고 살려둔다. 그리고 성 안에서는 괴이한 사건이 일어난다. 인질로 잡아 두었던 소년이 이해하지 못할 방법으로 살해되고, 기습 작전으로 베어온 오다 쪽 장수의 머리가 바뀌어 버린다. 그리고 오다 쪽 밀사로 온 승려가 역시 미스터리한 방식으로 죽고, 그를 죽인 반역자가 번개에 맞아 죽는 순간 무라시게의 명령도 없이 철포가 발사된다.

 

이 수수께끼와 같은 사건들은 모두 성 내부의 혼란을 가져오고, 점점 싸울 의지를 분산시킨다. 무라시게는 이 미스터리를 풀어야 했으며, 그때마다 자신이 지하감옥에 가둔 간베에를 찾아간다. 여기서 무라시게와 간베에의 치열한 심리전이 벌어지고, 간베에는 알 듯 모를 듯한 힌트를 준다. 이를 토대로 무라시게는 가까스로 미스터리를 풀게 된다.

 

그러나 전세는 기울고, 무라시게는 이 모든 사건이 어떻게 해서 하나의 흐름 속에서 벌어졌으며, 그것을 꾸민 이가 누구인지 깨닫는다. 그리고 간베에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고, 그게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인 줄 알면서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그리고 소설은 간베에가 열 달 동안 지하감옥에서 지독하게 품은 복수의 칼날이 결국은 허무한 것이었다는 걸 보여주며 끝난다. 허무한 것은 간베에의 복수심만이 아니라 전쟁 자체라는 것이었다.

 

소설은 각 장마다 긴장을 놓지 않는다. 문장과 언어는 늘어지지 않아 그 긴장감을 잘 붙잡아 놓고 있다. 사건의 내용은 그지없이 중세의 이야기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은 영락없는 현대 추리소설이다. 전쟁과 삶의 진퇴에 관한 윤리관이 맞붙는데, 이는 어느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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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반테 페보, 2022년 노벨생리의학상 | Science 2022-10-04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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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노벨 생리의학상이 스반테 페보에게 돌아갔다. 

어떤 언론에서는 '파보'라고도 쓰지만 '페보'가 더 적절한 발음이라고 한다. 

그는 <잃어버린 게놈을 찾아서>라는 책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에게 노벨 생리의학상이 주어진 것은 사실 상당히 의외다. 아마도 생리의학상이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그의 업적에 질병 유전자 얘기가 들어간 것 같지만, 그의 주 업적으로는 '생리'도, '의학'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의 전공은 진화유전학이고, 고인류의 뼈에서 유전자를 추출해서 전장 유전체(whole genome)을 결정해서 비교하는 것이다. 

의외지만, 개인적으로는 반가운 수상 소식이다. 

잃어버린 게놈을 찾아서

스반테 페보 저/김명주 역
부키 | 2015년 09월

 

<Nature>지에 실린 스반테 페보 수상에 대한 소식을 양병찬 씨가 번역했다. 

 

(2022 노벨 생리의학상) 고인류의 삶을 밝혀낸 유전학자,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스반테 파보(Svante Paabo)는 고(古)DNA를 분석함으로써, 우리의 조상 종(種)에 대한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했다.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기타 호미닌에서 DNA를 추출한 파보의 연구는 현대 의학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古)DNA로 구성된 인간 유전체의 비율은 적지만, 이 유전물질은 무게 이상으로 강력해서 조현병에서 중증 COVID-19에 이르는 질병의 위험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티베트 고원에 사는 사람들은 고지대 적응과 관련된 유전자 변이에 대해 데니소바인에게 감사해야 한다.

 

▶ 「2022 노벨 생리의학상」은 수만 년 된 화석에서 발견된 귀중한 DNA 조각(precious snippets of DNA)을 활용한 '선구적인 인간 진화 연구'(https://www.nature.com/articles/d41586-018-06004-0)에 돌아갔다.

 

독일 라이프치히에 있는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MPI-EVA)의 유전학자 스반테 파보(Svante Paabo)의 연구는 고유전체학(palaeogenomics)이라는 불꽃 튀는 학문 분야를 탄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네안데르탈인 유전체의 시퀀싱과 데니소바인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호미닌 그룹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고대 호미닌 개체군 사이에서 유전자가 어떻게 이동했는지'를 추적함으로써, 연구자들은 '면역계의 특징'과 '고지대 생활에의 적응 메커니즘'을 포함하여 현대 인간 생리학의 일부 측면의 기원뿐만 아니라 이동을 추적할 수 있었다.

 

“고유전체학 분야가 성숙해지고 있다는 점과, 인간 유골에서 고(古)DNA를 추출하는 기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통합하는 데 기여한 공로가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소재 하버드 의대의 개체군 유전학자 데이빗 라이히(David Reich)는 말했다. 그는 네안데르탈인 유전체의 염기서열에 관해 파보와 긴밀히 협력한 인물이다.

 

발표 후 기자회견에서 파보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하며, 스톡홀름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고 실토했다. "처음에는 우리 연구소 사람들이 꾸며낸 정교한 장난이라고 생각했다"라고 그는 말했다.

 

런던 자연사박물관(London Natural History Museum)의 고인류학자인 크리스 스트링어(Chris Stringer)에 의하면, 파보의 업적?기록상 가장 오래된 고인류의 DNA인, 스페인에서 발견된 430,000년 된 염기서열의 복구 포함(https://doi.org/10.1038%2Fnature17405)?은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는 "이제 이것은 인간 진화 연구의 핵심이다"라고 말하며, 파보의 노벨상 수상은 "희소식"이라고 덧붙였다.

 

1. 손상된 DNA

 

파보는 수천 년 동안 원소에 노출되어 손상되고, 세균과 현대인의 염기서열로 오염된 DNA를 분석하는 방법을 개발해야 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2010년에 출판된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시퀀싱 작업(https://www.science.org/doi/10.1126/science.1188021)에 이 기술을 적용했다. 이 유전자 분석을 통해,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가 이종교배되었으며, 유럽 또는 아시아 출신 현대인 유전체의 1-4%가 네안데르탈인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파보의 기술은 2008년 시베리아 남부의 동굴에서 발견된 40,000년 된 손가락 뼈의 기원을 확인하는 데도 적용되었다. 뼈에서 분리된 DNA는 네안데르탈인의 것도도 호모 사피엔스의 것도 아니고, 새로운 호미닌 그룹에 속하는 개인(https://www.nature.com/articles/nature08976)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 그룹은 뼈가 발견된 동굴의 이름을 따서 데니소바인(Denisovans)이라고 명명되었다. 아시아에 살았던 고인류도 이 그룹과 교배하여, 오늘날 수십억 명의 유전체에 데니소바인의 DNA를 남겼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기에 파보 등의 과학자들이 이끄는 고(古)DNA 연구는 현대인 DNA의 오염(혼입)에 대한 우려로 시달렸다(이집트 미라에서 초기에 회수된 DNA가, 아마도 자신의 것인 듯하다고 파보는 인정했다). 그러나 파보의 연구실에서 개발된 방법과 새로운 시퀀싱 기술의 출현으로 인해 오염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처음 이 길에 들어섰을 때, 우리는 고인류의 DNA로 작업할 수 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했다"라고 런던에 소재 프랜시스 크릭 연구소(Francis Crick Institute)의 고생물학자인 폰투스 스코글룬드(Pontus Skoglund)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스반테의 부서가 이끄는 대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우리의 접근방법에서 오염은 더 이상 주요 이슈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2. 건강에의 시사점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기타 호미닌에서 DNA를 추출한 파보의 연구는 현대 의학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古)DNA로 구성된 인간 유전체의 비율은 적지만, 이 유전물질은 무게 이상으로 강력해서 조현병(https://doi.org/10.1002%2Fajmg.b.32872)에서 중증 COVID-19(https://doi.org/10.1038%2Fs41586-020-2818-3)에 이르는 질병의 위험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티베트 고원에 사는 사람들은 고지대 적응과 관련된 유전자 변이에 대해 데니소바인에게 감사해야 한다(https://doi.org/10.1038%2Fnature13408).

 

"오늘날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네안데르탈인 같은 고인류의 DNA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중요한 결과다"라고 라이히는 말했다. "그것을 알고, 그것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우리 종(種)의 남은 시간 동안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여러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의 유전체를 사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이제 고유한 인간 유전자를 식별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라고 MPI-EVA의 고유전학자인 요하네스 크라우제(Johannes Krause)는 말했다. 지난 9월, 연구자들은 인간에게서는 발견되지만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유전자 변이가 실험실에서 배양한 뇌 오가노이드(https://www.science.org/doi/10.1126/science.abl6422)의 신경 성장과 관련있음을 보여주었다(https://www.nature.com/articles/d41586-022-02895-2). "우리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 요소'를 이해하는 데 이렇게 가까이 다가간 적이 없었다"라고 크라우제는 말했다.

 

연구자들은 파보를 가리켜 "강렬하고 의욕적이지만 또한 동료애적이고 관대하다"라고 설명한다. MPI-EVA에서 그가 이끄는 부서는 이 분야를 더욱 발전시키고 있는 고유전학자 세대를 배출했다.

 

파보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교의 고생물학자 비비안 슬론(Viviane Slon)은 자신의 멘토를 가리켜 "세부사항에 레이저 초점을 유지하면서,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기이한' 능력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Slon이 '1세대 인간-네안데르탈인 잡종'인 것으로 판명된 유골을 연구하고 있을 때, 모계로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DNA의 서열은 네안데르탈인의 서열과 일치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발표할 때, 파보는 슬론에게 '양쪽 부모로부터 유전된 핵 DNA의 염기서열을 분석할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라'고 촉구했다. "우리가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는 네안데르탈인이라고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혼합된 자손(mixed offspring)으로 밝혀졌다"라고 슬론은 말했다.

 

라이히에 의하면, 파보 및 그의 연구팀과 손잡고 최초의 네안데르탈인 유전체의 염기서열을 해독하고 분석한 것으로부터 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최고의 컨소시엄이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그들이 생산한 데이터가 얼마나 특별하고 독창적인지 인식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라이히가 자신의 고(古) DNA 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파보가 고(古)DNA 연구에 미친 영향은 워낙 지대해서, 만약 그가 없었다면 이 분야가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는 이 분야의 대부다"라고 스코글룬드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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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거짓말을 분석하긴 했지만... | 책을 읽다 2022-10-03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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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한국인의 거짓말

김형희 저
추수밭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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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일 등 세 심리학자의 책 이그노벨상 읽어드립니다에서 한국인이 거짓말하는 패턴, 특히 남녀 사이의 차이에 대한 얘기에 대한 인용이 인상 깊어 찾아 읽게 되었다(http://blog.yes24.com/document/16888333).

 


 

 

저자 김형희는 한국인의 거짓말 습관을 실험을 통해 연구했고, 이를 분석해서 한 권의 책으로 내놓았다. 자원자를 모으고, 그들로 하여금 거짓말과 진실을 자유롭게 말하도록 한 다음, 영상을 분석하여 거짓말할 때의 습관을 찾아낸 것이다. 그렇게 1038개의 거짓말에서 거짓말 신호 25가지를 찾아냈다. 안면비대칭, 답변의 길이(남자는 말이 많아지고, 여자는 줄어든다. 이 내용이 김경일 등의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특정 단어 반복 등.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기 다소 무리가 있다.

저자는 일단 한국인이 거짓말을 가장 많이 한다는 것을 전제로 시작한다. 그 근거는 OECD 국가들 중 사기 범죄 1위라는 것인데, 과연 그게 객관적인 증거로 삼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어쨌든 나와 있는 통계 자료이니 그것을 저자의 평가와 연결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이 책 내용의 바탕이 되는 연구를 자세히 보니, 뭔가 이상하다. 한국인의 거짓말에 대해서 연구를 했다고 하는데, 5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다. 그것도 단 한 차례. 이게 과연 한국인의 거짓말을 대표할 수 있을 만한 연구라 할 수 있을까? 1038개의 거짓말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 얘기일까, 했더니 50명을 인터뷰하는 도중 나온 거짓말의 총 개수다.

 

또 한 가지의 문제는 어떤 신호를 거짓말의 신호로 잡고 있지만, 그렇다면 그 신호가 진실을 얘기할 때는 얼마나 나오는지에 대한 분석은 없다. 예를 들어 눈동자의 좌우 이동이 한국인의 거짓말 신호 중 두 번째로 많이 나오는 신호라고 하고 있다. 361차례의 거짓말에 나타나고, 그래서 33.3%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실을 얘기할 때 눈동자의 좌우 이동이 얼마나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이 분석이 있어야 눈동자의 좌우 이동이 거짓말에 대한 신호로서 유의미한 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연구는 과학적인 분석이라기보다는 그저 일화적인 분석이고, 저자 주관적인 판단에 근거했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저자가 찾아낸 25개의 신호가 얼마나 거짓말과 연관성이 있는지 저자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한 가지로 판단하면 안 되고, 최소한 3가지 이상을 결합시켜 판단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것들이 결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분석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것은 없고 단지 3가지 이상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하지만 뭔가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이 부족한 연구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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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으로 읽는 책 이야기 | 책을 읽다 2022-10-02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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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김기태의 초판본 이야기

김기태 저
새라의 숲 | 2022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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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의 여러 책과 윤길수의 운명, 책을 탐하다등을 통해 책 자체를 수집하는 태도에 대해 대충 감을 잡았다. 특히 책에서 판본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고,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의 판본을 살펴보기도 했다. 초판본일수록 가치가 나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김기태의 초판본 이야기는 책 수집가 김기태가 모은 초판본, 그중에서도 1쇄본 다섯 권의 책에 관한 책이다. 그가 수만 종에 달하는 책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책이니만큼 의미가 깊은 책들이라 할 수 있다. 책표지에서 제목과 저자 이름, 출판사이 어떤 방식으로 쓰여 있는지, 표지 디자인은 누가 어떤 의미로 한 것인지, 안쪽 날개의 저자 소개는 어떤지, 사진은 어떤 걸 썼는지, 목차는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간기면(刊記面)의 정보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는지, 서문에 담긴 내용, 책에 담긴 내용, 그 책에 대해 덧붙인 다른 이들의 이야기 등등을 꼼꼼히 읽고 있다.

 

초판본이고 1쇄본이니만큼 여러 흠결을 찾는 것도 묘미다. 이를테면 책의 제목과 실린 단편의 제목이 조금 다른 경우도 있고(이를테면, 김승옥의 소설집의 제목은 서울 1964년 겨울로 쉼표가 없지만, 실제 단편의 제목은 <서울, 1964, 겨울>이다), 시에서 두 줄이 통째로 사라져버린 경우도 있다(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에 실린 <아홉 가지 기도>그 그렇다). 그 밖에도 이러저런 실수를 찾아내지만, 그게 놀림의 대상,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고, 흥미로운 관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런 형식보다 무엇보다 소개하고 있는 열다섯 종의 책이 가지는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이야 말할 것도 없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끝까지 추구한 영랑시선, 일제에 협력한 죄과와는 별도로 누구나 읊고 있는 싯구를 남긴 노천명의 사슴의 노래, 유신 시대 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를 외쳤던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우리에게는 <인연>과 같은 수필로 더 잘알려져 있지만 원래 시인이자 영문학자였던 피천득의 금아시선, 아내의 영전에 바친 싯구로 최초의 밀리언셀러 시집이 된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과 같은 시집이 있고,

지금도 한국 최고의 소설이라 극찬받으며, 수차례 개작을 통해 완성도를 높여온 최인훈의 광장, 전후(戰後) 세대로, 벼락같이 등장했던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중의 이야기로 삶의 이야기를 담은 김성동의 만다라, 가장 비천한 이들의 삶을 쓴 이동철의 꼬방동네 사람들, 대중소설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영화로도 만들어 히트한 최인호의 고래사냥, 마흔의 나이에 문단에 데뷔해 우리 주변의 삶, 특히 평범한 여성의 질곡 가득한 삶을 그린 박완서의 그대 아직 꿈꾸고 있는가와 같은 소설도 있다.

그 밖에 김병익의 평론집 지성과 반지성, 법정 스님의 수상집 서 있는 사람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김대중 옥중서신_민족의 한을 안고도 소개하고 있다.

 

한 꼭지, 한 꼭지의 글을 읽으며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책들을 살펴보는 게 우리의 문화적 지형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개관할 수 있는 계기를 준다는 점이다. 책의 장정은 점점 탄탄해지고, 표지의 서체도 세련되어 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고, 책 안의 활자도 보다 가독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책에 담긴 내용만큼은 그런 외양의 것과는 상관 없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우리가 <진달래꽃>이라는 시를 외우는 것도, 아직도 최인훈의 광장을 필독서로 올리며 읽고 있는 것은 책의 표지가 예뻐서도 아니고, 활자체가 깔끔해서도 아니다. 그 시가, 그 소설이 우리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다시 불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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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코 에코, 번역에 대한 생각 | 책을 읽다 2022-10-01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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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번역한다는 것

움베르토 에코 저/김운찬 역
열린책들 | 2010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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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의미하는 라틴어 translatio는 원래 바꾸기를 의미하지만, ‘옮기기, ’은행의 환전‘, ’식물의 접붙이기‘, ’은유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354). 다양한 의미로 쓰이던 그 용어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기의 의미로 확정된 것은 세네카에 이르러서였다.

 

번역은 완벽할 수 없다. 언어와 언어 사이에 모든 단어가 1:1로 대응하는 것도 아니며, 설령 기적처럼 1:1로 대응한다고 하더라도 한 문장을 썼을 때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깡그리 무시할 수 없기에 다른 언어에서 그것을 온전히 살릴 수는 없다. 그래서 모든 번역은 오역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번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류가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여러 종족으로 나뉘어진 이상 번역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어쩌면 책을 읽는 모든 행위는 번역일 지도 모른다.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이 다른 언어로 쓰인 책을 이탈리아어로 옮긴 경험, 자신의 책이 다른 언어로 옮겨진 경험을 바탕으로 번역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정확히는 번역 이론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이중 경험을 바탕으로 한 고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성격 자체가 에코가 생각하는 번역을 의미한다. ,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번역 이론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텍스트마다 적절한 번역이 있다는 것이다.

 

에코는 번역이란 다른 언어로 거의똑같은 것을 말하기라고 정의하고 있다. , 애당초 완벽한번역이란 없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번역은 상당히 유연한 작업일 수 밖에 없는데, 원저에서 한 단어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도착 언어에서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 서술식으로 표현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번역은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무언가 잃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번역자의 선택이다. 다만 번역자의 선택이라면 용서가 가능하지만, 번역자의 능력 부족이나 게으름이라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다. 에코는 자신의 출판사에서 근무할 당시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원자폭탄 연구의 역사를 다루는 책에서 기차 경주로 번역된 게 원래는 ’training courses', 연구 과정이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흥미로운 부분은 알타비스타(Altavista)라는 2000년대 초반의 자동번역기를 통해 번역의 상황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다. 당시의 자동번역기는 지금의 구글번역기나 Naver의 파파고가 채택하고 있는 방식과는 달리 한 언어의 단어를 다른 언어로 직접 대치하는 식이었다. 그렇기에 에코에게 번역에 관한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 과정에서 한 단어라 다른 언어에서 얼마나 다양하게 대응하는지, 혹은 전혀 대응하는 말이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 쓰고 있다. 에코는 구글 번역기가 등장한 이후까지 살았는데, 과연 구글 번역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하다(아마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고, 거기서 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뽑아냈을 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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