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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질 수 밖에 없던 전쟁 | 책을 읽다 2022-05-28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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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병자호란

임용한,조현영 저
레드리버 | 2022년 02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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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전란을 두 번이나 겪고, 수십 년간 전쟁준비를 한 나라인가? 훈련도감, 어영청, 수어청 같은 군영 설치, 직업군인 양성, 화기와 화약 개발, 남한산성 축조, 속오군, 영장제... 단어만 나열하면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사제도는 획기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막상 열어보니 속 빈 강정이었다.” (196)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겨우 30여 년 후 전란에 휩싸인다.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라 불리는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의 호된 경험은 아무런 소용도 없이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누르하치의 발흥과 후금()과 명의 세력 관계에 대해 전혀 무지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허약하고 허술한 방어 능력으로 그들을 맞았을까?

전쟁사 전문의 역사학자 임용한은 어떻게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시점 시점마다 청(후금)의 상황과 조선의 대응을 점검하며, 병자호란을 질 수 밖에 없었던 전쟁으로 결론짓고 있다.

 


 

 

사실 병자호란에 관해서 주로 알고 있는 부분은 청의 군대가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진격하자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이후, 그 혼란스럽고 안타까운 처지와 이후 삼전도의 치욕이라 불리는 항복에 이르는 상황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전쟁의 결과이다. 결과가 그렇게 된 데에는 거기까지 이르게 된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임용한의 병자호란: 그냥 지는 전쟁은 없다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깊이 다루고 있다.

 

몇 가지 상황이 병자호란의 패배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건진여진족의 추장에 불과했던 누르하치의 야망과 발흥에서 시작한다. 여진족의 성장은 임진왜란의 혼란스런 상황과 명의 약화와 관련되어 있었다. 누르하치는 때로는 자신의 야망을 숨기고, 때로는 과감한 작전을 통해 세력을 넓히고 후금이라는 국가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조선은 어떠했나? 누르하치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응은 중구난방이었었다. 말은 많았으나, 아니 말만 많았기에 집중하지 못했고, 누르하치라는 인물에 대한 파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명의 실력에 대한 믿음도 거의 신앙에 가까웠다. 산성 하나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고, 제대로 된 군대도 양성하지 못했다. 지휘 체계도 단일화되지 못했다. 모문룡이라는 사기꾼에게 휘둘리며 국력은 소모되었다.

 

병자호란 전에 정묘호란이 있었다. 연전연패라고 할 수 밖에 없었지만 겨우 화친을 맺고 한숨을 돌렸다. 후금은 아직 조선보다는 명과의 대결이 더 급했고, 조선이 후방을 치지 않지 않도록 단도리하는 게 중요했다. 그런 이유로 쉬이 화친을 맺고 간 것이었지만 조선은 상황을 오판한다. 정세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대비를 해야 했음에도 역시 말만 많았고 대응은 형식에 그치지 않았다.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조선을 침략한다. 병자호란이었다. 조선은 그들이 침략한 의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병력도 정확히 알지 못했고(끝까지 그랬다), 그들의 실력도 과소평가했다. 정묘호란 이후 가까스로 구축해놓은 방어를 위한 성이 있었으나 청은 그 성들을 우회하고 직접 한양으로 진격했다. 당황한 조정은 일부만 강화도로 피난했으나 금새 강화로 가는 길을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남한산성에 웅거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의 상황도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각지의 군사들이 그래도 임금을 구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몰려들지만 체계적인 작전도 없었다. 그래서 각개 격파되었고, 안심하고 있던 강화도마저 함락되어 인조는 항복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어이없는 상황이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의 임금 인조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인조는 자신이 직접 반정을 이끌었을 만큼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신하들을 다루는 데 능수능란했다는 평가를 받는 인조였지만, 그런 능수능란함은 전쟁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인조는 자신이 책임지지 않으려 했다. 그러니 명확한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화와 척화파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다. 곤란한 상황이 오면 신하들 보고 논의를 통해 결정을 내리고 보고하라고 한다. 이미 둘로 쪼개져 대립하고 있는 신하들이, 게다가 대부분 탁상공론에만 머물러 있던 신하들이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임용한은 이 상황을 누구도 책임지지 싫고, 왕은 누구에게도 권한을 주고 싶지 않고, 강력한 명분론에 단어 하나마다 시비가 걸리니라고 쓰고 있다.

 

임용한의 화살은 주로 주전론을 주장한 척화파를 향하고 있다. 그들은 대책도 없이 명에 대한 사대에 몰입했고,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을 내세웠고, 주화파를 무조건적으로 배척하여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항복에 이르게 된 것을 비록 질 지언정 싸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책임은 최명길을 비롯한 주화파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전쟁 중에 화살 하나도 쏘지 않았고, 돌 한 덩이도 청의 군대를 향해 던지지 않았다(양반이라고 말도 없이 움직일 수 없고, 말이 있어도 말잡이 없이 말을 탈 수 없고, 배낭도 멜 수 없어 성 밖으로 나가 상황을 전할 수 없다는 말에는 실소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이 끝나고 그들은 애국자, 영웅이 되었다. 역사에서 원칙론자, 근본주의자들이 차지하는 위치는 대개 그렇다.

 

이랬으면, 저랬으면 병자호란의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란 상황과 시점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그 많은 상황에서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내려진 결정, 혹은 내려지지 않은 결정은 모두 현실이 되었고, 한 궤에 꿰어 있는 것이었다. 전쟁은 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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