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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트레이시 시리즈의 서막 | 기본 카테고리 2021-12-26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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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내 동생의 무덤

로버트 두고니 저/이원경 역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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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참 작가는 많다. 한국에 연간 대략 250여 권 내외의 추미스 계열 책이 출간되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미처 소개되지 못하는 세계 각국에 존재하는 유수(有數)의 작가들이 많다. 이번에 <내 동생의 무덤>으로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로버트 두고니'라는 미국 작가도 그렇다. 보통 작가들은 뚜렷한 한 명의 캐릭터 시리즈도 성공적으로 이어가기 쉽지 않은 레드 오션이 장르물 시장이건만, 두고니는 '데이비드 슬로언' 시리즈, '찰스 젠킨슨' 시리즈를 인기리에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내 동생의 무덤>은 '데이비드 슬로언' 시리즈에 잠시 등장한 시애틀 최초의 여성 강력계 형사 트레이시 크로스로드를 독립시킨 또 다른 '형사 트레이시' 시리즈의 서막이다. 형사 트레이시의 전사(前史)를 밝히는 시리즈의 기원인 것.


「우애가 너무 좋은 트레이시와 세라 자매. 트레이시가 벤에게 청혼을 받은 세상에서 가장 기쁜 날 세라는 행방불명이 돼버리고,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정황 증거만으로 성범죄 전과자 에드먼드는 1급 살인 유죄를 받아 무기징역에 처해진다. 짜 맞춘 듯한 증거와 믿을 수 없는 지각 목격자, 석연치 않은 재판 과정에 강한 의구심을 가진 트레이시는 결국 고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그날의 진실을 몸소 밝히기 위해서 경찰에 투신한다. 20년의 세월이 흘러 동생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닫혀 있던 진실의 문은 열리는데... 」

490쪽의 책에서 354쪽에 이르러, 과거의 미심쩍은 판결이 뒤집히면서 누명을 쓴 에드먼드가 석방되는 과정이 그려진다. 첫 번째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면, 남은 140쪽에서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 새로운 인물이 갑자기 튀어나올 수는 없고, 그렇다면 앞서 진술된 인물들 중에 누군가는 결정적인 카드 한 장을 들고 있단 소리인데, 트레이시가 추적을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자매의 아빠로 밝혀지는데...

소설의 결말을 중반 이후까지 종잡지 못했다. 중간중간 작가가 흘리는 떡밥에 투척되어 나만의 시나리오를 그리기도 했건만, 결말은 나의 그것과는 달랐다. 미스터리를 읽다 보면 독자의 짐작과 결말이 동일할 때 생기는 자긍심도 있지만, 그보다는 역시 짐작을 배반하는 결말이 짜릿하다. 짐작과 간격이 크면 클수록 묵직한 타격감이 크다. 흔히 말하는 반전의 쾌감이다.

최근 무수히 쏟아지는 반전을 위한 작품으로 <내 동생의 무덤>은 쓰이지 않았지만, 소설의 결말에서 다시 한번 만나는 뜨거운 가족애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미스터리에서 만나는 이런 감동은 사뭇 신선하다.

 

두 개의 축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하나는 트레이시의 친구 변호사 댄의 활약으로 과거 재판의 불합리를 뒤집는 법정 스릴러이고, 다른 하나는 형사 트레이시의 수사 과정이다. 13년간 변호사 생활을 한 로버트 두고니가 그려내는 법정 신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자신감이 넘친다.

시체가 발견되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데, 여기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건 과학수사다. 과거엔 의미를 밝혀낼 수 없던 증거물들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 이는 에드먼드의 무죄 입증에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법정 스릴러로도, 형사물로도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를 보여주는 잘 쓰인 깔끔한 스릴러다. 미국에서 그리 큰 사랑을 받았다는 두고니의 작품이 왜 이제서야 소개되었는지 한탄하기 보다, 2014년 작품이지만 이제라도 선을 보이게 돼서 다행이란 생각이다. 이미 '형사 트레이시' 시리즈는 8권이 출간되었고, 현재도 집필 중이라고 전한다. '형사 트레이시'의 다른 작품, 아니면 두고니의 다른 작품을 또 만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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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월드의 시발점 | 기본 카테고리 2021-12-26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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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유지니아

온다 리쿠 저/권영주 역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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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소설에는 반드시 시체가 등장해야 한다. 시체는 많을수록 좋다. 살인보다 가벼운 범죄는 독자가 300페이지 가까운 책을 읽게 할 동기로는 부족하다. 끝까지 읽는 독자의 노력은 보상받아야 한다."

미스터리 황금기를 대표하는 미국 작가 S.S. 밴 다인의 '20칙'중 7번째 원칙이다.

소설이 시작하고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 일가족은 물론, 집안 경사에 놀러 온 이웃까지 무려 17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더 놀라운 건 조금 지나 범인이 범행 일체를 자백하고 자살한다는 전개다.

보통 미스터리는 세 가지 중 하나에 천착하기 마련이다. 누가(후더닛) 어떻게(하우더닛) 왜(와이더닛) 범행을 저질렀는가 밝히는 과정이 책을 읽는 재미다. '누가'는 고전기와 일본 (신)본격물에서 최고의 재미 '범인 찾기'를 선사했고, '어떻게'는 대표적으로 밀실이란 소장르에서 위세를 떨쳤으며, '왜'는 사회파 작가들의 화두라 간단히 정리해 볼 수 있겠다. '누가, 어떻게'가 소설 초반에 한여름 땡볕처럼 명백하게 밝혀진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에서 남는 수수께끼는 '왜'뿐이다. 도대체 왜?

해당 독살사건(나카오가키 사건)이 일어나고 20년이 지난 시점, 누군가(!)가 당시 사건의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다시 과거의 기억을 헤집는다. 도대체 왜 2?

라쇼몽식 구성으로 관련자들의 진술은 이어지는데, 놀랍게도 사건을 담당한 경찰을 비롯한 몇몇 인물은 당시 유일한 생존자인 앞 못 보는 명문가 소녀가 희생자가 아닌 진범일지 모른다는 강한 의구심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앞서 밝혀진 사건의 전모는 '도서(倒敍) 미스터리'였단 말인가! 독자들은 황급히 앞서 철석같이 믿었던 '누가'와 '어떻게'를 재확인해야만 한다. 근본이 흔들리는 상황, 그럼에도 여전히 '왜'라는 숙제는 풀리지 않는다. 도대체 왜 3?


정통 미스터리에서 범인은 밝혀지고, 사건의 모든 정황이라 할 범행 동기, 수법 등은 속시원히 드러난다. 제59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유지니아>는 그런 뻔한 길을 가지 않는, 별미를 제공하는 소설이다. 온다 리쿠는 의도적으로 곳곳에 여백을 남겨 놓아, 그곳을 독자의 상상력으로 채우게 한다. 딱 들어맞는 퍼즐이 아니라, 독자만의 퍼즐을 만들어낼 수 있는 'DIY'형이라고나 할까.

정말 아오사와 히사코는 진범인가? 헌책방 화재는? 마키코의 사망은 단지 일사병 때문일까?


<유지니아>는 비채의 일본 문학선 '블랙&화이트'의 3번째 책으로 2007년 처음 출간되었다, 14년이 지난 2021년 전면 개정판으로 우리 앞에 다시 섰다. 17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소설을 '아름답다'라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좋지만, 여전히 <유지니아>는 몽환적이며 탐미적인 명작이다. '온다 월드'를 탐사하기 위해선 <유지니아>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며, 여러 번 읽으면 처음 읽었을 때 몰랐던 비밀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매력덩어리다. '범인 찾기'에 다소 물린 독자라면 마땅히 <유지니아>를 펼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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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대화된 불편함 | 기본 카테고리 2021-12-22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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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그날 저녁의 불편함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저/김지현 역
비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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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상 강국 네덜란드에서 스케이팅은 일상이다. 큰 오빠 맛히스는 스케이트를 타러 나간 어느 날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

"돈을 모아서 새 아들을 살 수는 없는 것이다." - 65쪽

참척의 고통이라고 하던가. 자식을 자신들보다 먼저 보낸 부모 심정을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 독실한 신자였던 이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불행을 잘 인정하지 못하고, 서로 관계마저 소원해진다. 원래도 별생각 없어 보였던 아빠는 아무 생각이 없는 듯하고, 엄마는 식욕을 잃고 '살 만큼 살았으니 죽었으면 좋겠다'라는 내뱉어서는 안 될 대사를 자식들 앞에서 읊조리는 지경에 이르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르던 소들이 살처분되는 참사마저 닥친다. 정신줄을 놓아버린 이들 부부에게 자식을 돌봐야 한다는 부모의 의무는 뒷전이다.

"우리 오빠는 서서히 사람들의 마음에서 흐려져가는 반면 우리의 마음속으로는 점점 더 깊이 들어오고 있다." - 123쪽

4남매에서 3남매가 된 아이들. 오빠 '오버'는 행동이 오버 투성이다. 머리를 찧으며 자해하고 비행 청소년의 모습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소설의 화자, 주인공 나(야스)는 충격으로 똥을 누지 않으며, 오빠의 사고날 입고 있던 코트를 벗지 않는 강령으로 세상에 맞선다. 이들의 내재된 슬픔과 끝 모를 분노는 이상 행동으로 나타난다. 동물 학대, 호기심인지 선을 넘을랑 말랑 하는 성적 일탈 행위들... 그러면서 슬픔의 강을 건넌다.

10세 소녀의 시선으로 오빠를 잃은 상실감과 이후 변화를 다루는 <그날 저녁의 불편함>은 문장에 대화가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티키타카가 이어지지 않는다. 스토리텔링을 따라가기보다 주인공의 내면 심리 묘사에 치중한 탓이다. 역시나 문학상 수상작답게 독자 친화적이지 않다. 세상 사물을 보는 남다른 시선을 지닌 저자의 시적인 문장은 소설 곳곳에서 또아리를 튼다. 레이네펠트는 시인으로 먼저 등단했다.

역시나 이런 소설은 절대로 아무나 쓸 수 없다. 세 살 때 오빠를 잃은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에만 6년이 걸린 <그날 저녁의 불편함>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섬세하고 날선 감수성이 아니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신경쇠약 직전의 경지를 보여준다. 이런 소설에 공명하는 독자 역시 날카롭고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일 테고, '재미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라고 믿는 일파는 조금 거리를 두는 게 현명하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은 '장밋빛'이 아닐 때가 많고, 때론 슬픔도 힘이 된다는 점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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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작가, 15개의 소우주! | 기본 카테고리 2021-12-19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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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레이먼드 카버 등저/파리 리뷰 편/이주혜 역
다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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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리뷰>(the PARIS REVIEW)는 '작가들의 꿈의 무대'라 부르는 미국의 문학 계간지로, 1953년 출판과 문학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에서 창간했다. 영어로 작품을 발표하는 유명 작가치고 여기 지면을 거치지 않은 이가 없다 할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는 문학잡지인데, 어느 날 편집자는 재미있는 기획을 한다.

작가들에게 <파리 리뷰>가 발표한 단편소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 하나를 고르고, 그 소설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결정적인 이유를 서술해달라고 부탁한 것. 2012년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Object Lessons : The Paris Review Presents the Art of the Short Story》다. 출간 연도를 고려하면 약 60년의 세월 동안 발표된 작품들 가운데 현직 작가들이 고른 결과물인 셈이다. 국내 소설집의 아름다운 제목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는 수록된「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에 나오는 문장에서 따왔다. 원서에는 스무 편이 실렸다는데, 도서출판 다른에서 나온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는 이중 열다섯 편을 추려 수록했다. 소설 애호가라면 누구나 그냥 지나치기 힘든 유혹이다.

 

소설이든 영화든 최고 작품을 뽑을 때 평론가와 일반 팬들의 리스트는 많이 다르다. 아무래도 전문적인 감식안을 가진 사람들이 손꼽는 작품들은 일반인들의 눈에는 그냥 스쳐 지나가거나, 무엇보다 재미가 담보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이 책에 선정된 단편들은 창작 강의나 글쓰기를 생업으로 하는 성공한 문인 자신이 꼽은 작품들이라 아마도 일반 독자들의 그것과는 다를 거다. 그야말로 '작가들의 작가'인 셈 아닌가. 보통 독자들이 좋아하는 스토리텔링 위주의 단편보다는, 다소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성향의 작품이 이들의 레이더에 포착돼 창작에 자극과 영감을 주었을 확률이 높다. 또한 해당 작가의 알려진 대표작이 아닌 숨겨진 걸작을 복권하고픈 심리도 있었을 테고.

수록된 작가들의 면면을 살핀다. 레이먼드 카버, 제임스 설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이렇게 세 명의 작가 정도만 이름을 알고 다른 분들은 잘 모르겠다. 조이 윌리엄스는 추천 작가로 본인의 작품이 실리기도 했고, 추천인으로 다른 작품을 추천하기도 한다. 보르헤스의 「모든 걸 기억하는 푸네스」를 추천한 알렉산다르 헤몬은 내주 개봉하는 <매트릭스 : 리저렉션>의 각본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앞서 예측한 대로 약 절반 이상은 핵심적인 줄거리가 잘 드러나지 않는 단편들이 많다. 완곡하게 표현하자면 읽는 재미가 별로라는 이야기다. 일반 독자의 시선으로 대가의 경지까지는 이해하지 못한 탓이 크다. 이런 독자들을 위해 해당 소설을 추천한 작가들이 소설의 말미, 몇 페이지에 걸친 해제를 실어 이해를 돕는다. 해제가 대부분 소설보다 더 어렵다는 게 함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없는 거보다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마음을 뺏긴 단편은 이선 캐닌이 쓴 「궁전 도둑」이다. 좋은 소설은 일 방향의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개인적인 감상은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로 「궁전 도둑」의 주제를 평가하고 싶다. 누구나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잊지 못할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을 테고 그와 연관된 사건이 분명 있으리라. 두 번에 걸친 '미스터 율리우스 카이사르 선발대회'를 다루는 이 단편이 소설집의 백미로 다가왔다. 「궁전 도둑」은 2002년 <엠퍼러스 클럽>으로 영화화되었는데, 아쉽게도 국내엔 소개되지 않았다.

그 외 폴라로이드 사진 같은 즉각적인 이미지를 남기는 카버의 「춤추지 않을래」, 짧은 대화로 어떻게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는지 잘 보여주는 모범답안 제임스 설터의 「방콕」,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아들의 시선에서 연민으로 지켜보는 「늙은 새들」, 걸작을 위해서는 작가는 그 무엇도 희생할 수 있다는 풍자와 은유 「스톡홀름행 야간비행」이 기억에 남는다.

아직도 문학의 힘을 믿는 소설 팬들은 전문가들이 이름을 걸고 감식한 15편의 소우주에서 분명 자기와 주파수가 맞는 작품을 만날 것이다. 문예 창작을 염두에 둔 자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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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물 애호가를 위한 최고의 연말 선물 | 기본 카테고리 2021-12-19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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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쾌 : 젓가락 괴담 경연

미쓰다 신조,쉐시쓰,예터우쯔,샤오샹선,찬호께이 공저/이현아,김다미 공역
비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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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가락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익숙한 식기로 식별성이 강해 우리 문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악어꿈」 331쪽

아시아 3개국의 장르물 작가들이 젓가락을 소재로 한 괴담집을 위해 어벤저스를 구성했다. 원래 중화권 작가들을 대상으로 기획되었으나, 괴기, 호러, 추리의 결합이라면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거물 미쓰다 신조가 합류하면서 판이 커졌다. 여기다 홍콩의 찬호께이마저 등장하니 추미스 팬이라면 환호성을 지를 만하다. 나머지 3명의 대만, 홍콩 작가 역시 신조나 찬호께이와 일합을 겨루려면 한국에 소개가 안 되었을 뿐, 자국에서는 1진 급 작가임에 틀림없다. 이 작가들은 후기에서 미쓰다 신조와 함께 글을 쓰는 영광을 누린다고 한껏 자세를 낮추지만, 팀을 구성하는데 턱없이 실력이 부족한 작가가 낄 틈은 없었을 거다. 이리 해서 탄생한 <쾌 : 젓가락 괴담 경연>(? : 怪談競演奇物語)은 5人5色의 매력으로 장르문학 애호가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책을 읽기 전 젓가락이라는 동아시아 공통의 소재로 각자 괴담을 쓰는 형식으로 알았는데, 5편의 중·단편이 실린 이 책은 '따로 또 같이'의 연작 구성을 취한다. 각 소설은 완결성을 띠지만, 일정 부분 연결 고리가 있다. 이 단편에서는 스쳐가는 인물이 다른 단편에서는 주요 배역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이야기의 매음새도 이어지고 있는 것. 상상력이 중요한 작가들에게 자유형이 아닌 이런 가이드를 두면 불편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개떡같이 얘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A급 작가들은 역시나 나의 기우를 뛰어넘는 내공을 보인다. 분명 이들 못지않게 빼어난 편집자의 공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통상적으로 육상 계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마지막 주자이고, 그다음이 첫 번째 주자다. 5인 릴레이의 시작은 미쓰다 신조, 마지막은 찬호께이다.

 

"여러분은 저주를 기획할 때 자신들이 인간의 '악의'라는 벌집을 쑤신다는 것을 알아야 했어요. 아무리 간접적이라고 해도 부정적인 일이 생기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요?" - 「저주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 321쪽

'저주'를 생각한다.

강하게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사람들은 기복(祈福) 행위를 한다. 소원을 말해보고, 기도, 기원, 축복을 하고...

악의를 가지고 하면 그건 저주가 된다. 힘이 있는 자, 권세가 있는 자는 저주를 잘 하지 않는다. 저주란 힘없는 약자의 마지막 무기다. 한없이 당하기만 했을 때, 물리적인 힘으로는 도저히 가해자에게 복수를 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저주뿐이다. 결혼 못 하고 죽은 처녀 귀신의 저주는 무섭다.


개별 작품들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를 해본다.

「젓가락님」 - 미쓰다 신조

젓가락님(오하시사마) 의식과 꿈속 '고도쿠' 세계의 결합.

* 고도쿠 ☞ 항아리 하나에 파충류나 벌레를 여러 종류 집어넣고, 마지막 한 마리가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잡아먹게 한 뒤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것을 섬기면 신령한 능력을 얻는다고 믿는 주술.

역시 미쓰다 신조의 향기가 강하게 배어있다. 너무 짧아서 아쉬운데, 애초 계획한 2만 자 규칙을 지킨 유일한 작품이라고.

「산호 뼈」 - 쉐시쓰

트라우마를 지닌 여성 고객이 찾아간 퇴마 전문가와의 심리전.

젓가락은 왕선군(王仙君)이란 고유명사로 영혼을 부여받고 신격화되고 종교가 된다.

괴담으로 영혼이 치유되는 신비한 경험!

「저주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 - 예터우쯔 (본 젓가락 괴담 경연의 발제자)

제한된 공간과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지만 기둥 트릭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귀신 신부만 있고, 정작 경찰서에 가가 형사는 없단 말인가!

「악어 꿈」 - 샤오샹선

이 소설집에서 가장 강력한 한 방.

구성, 복선, 반전 모두 만족스럽다.

그것이 알고 싶다. "어떻게 젓가락님 의식은 타이완에서 일본으로 건너 갔는가?"

다만 10세 소녀의 위업은 무리수 아닌가요, 작가님.

「해시노어」 - 찬호께이

'누가 어떤 전개를 하더라도 내가 다 받아줄게'하는 찬호께이의 객기. 박학다식한 그의 대체 역사 강의. 다른 작품들과 톤 앤 매너가 다소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뷔페에서도 손이 안 가는 음식이 있기 마련.

전반적으로 매우 만족스럽다. 골라 먹는 재미가 있는 진수성찬이라고나 할까. 찬호께이와 미쓰다 신조가 참여한 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벽돌책을 앞에 두고 무념무상이다. 올해도 '도조 겐야' 시리즈 신작이 나왔건만 일단 '선수들의 결과물' <쾌>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본다.

더 이상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대할 수 없는 당신이 미쓰다 신조나 찬호께이라는 이름에 설렌다면 올해 연말 선물은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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