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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비결'은 무엇일까? | 기본 카테고리 2017-09-30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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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계의 비결

박영규 저
MID 엠아이디 | 2017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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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비결

박영규 지음 | MID

 

 

 인간(人間)이라는 단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자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 함축하고 있음을 있다. 단어는 개별자로서의 존재를 지칭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 그리고 사이의 관계를 담는 사회적인 함의까지 염두해둔 단어로 생각할 있을 것이다. 단순히 사람 ()자를 살펴보아도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듯한 문자를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스스로 드러내는 인류사의 흔적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싱겁게 단어를 떠올린 이유는 언젠가 수많은 인간군상이 등장하는 사마천의 <사기> <사기열전> 읽고 싶은 마음에 책을 사두고 시도를 하지 못하고 있는 차에 관계라는 키워드로 <사기> 읽어낸 <관계의 비결>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사기열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이유는 사회생활을 위해 무언가 쓸만한사교적 기술을 배울 있을까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던 같다. 

 

 

정치학 전공의 저자가 관계라는 키워드로 <사기> 읽고 쓰기를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역사건 사회의 모든 활동은 인간들 관여하여 이루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특정 키워드를 중심으로 고전의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다양하고 폭넓은 독서 경험이 전제가 되어야할 것이고, 텍스트를 새롭게 바라보게해주는 역할을 있다. 반면 이런 시도에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특정 키워드에 고전의 내용을 맞추려고 노력하게 되거나, 해석의 가능성을 보다 제한하는 결과를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아직 나의 개인적인 의혹은 원전 <사기> 읽어보지 못했기에 판단하기는 이를 것같다. <관계의 비결>에는 <사기> 등장하는 항우 유방’, ‘관중 포숙 같은 익히 알려진 인물뿐만 아니라 정말로 다양한 인물들의 에피소드가 많이 등장한다.

 

 

대학을 졸업한 십수년이 지나다보니 나를 비롯한 학창시절의 친구들은 이제 대부분 아이들의 학부모가 되고, 한창 사회활동을 하느라 만날 기회가 좀처럼 없다. 사회 초년생 시절과는 달리 이제는 직장 안과 밖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그만큼 사회생활의 어려움을 많이 절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요즘 많이 떠오르는 단어들은 아마도 사람과 사람사이의 신의 신뢰’, ‘믿음 같은 키워드가 아닐까 한다. 마음을 나누는 친구들은 점점 서로 시간을 마련하기 힘들고, 그나마 아직 장가를 안간 것인지 못간 것이지 결혼 안한 녀석들은 가끔씩 전화를 해와 나를 괴롭히는데, 이것도 사실은 전화를 해준 것도, 나를 술친구로 생각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란 생각을 하고 있다. ‘친구 하면 우리는 비슷한 나이대의 인간관계를 연상하곤 하지만, 사실 나이가 진실한 친구관계의 전제조건이 수는 없을 것이다.

 

 

책에서 오래간만에 만나는 관포지교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나는 오래간만에 나의 친구 관계 잠깐 떠올려보고 있다. 저자는 후하게 주고 박하게 받아라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전달해주려고 하는 같지만, 이러한 매뉴얼같은 가르침 이전에 좀더 본질적인 관계를 어떻게 유지해야 할까를 고민해본다면 결국 좋은 관계유지의 기본은 내가 노력해야한다 점이다. 친구에게 내가 먼저 좋은 사람 되려고 노력하는 , 거래나 경영에서 내가 먼저 솔선수범하고 양보하는 자세가 좋은 관계 비결이 있다는 점을 주목해본다. 내가 어떤 집단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좋은 대접 기대하고, 요구하기 이전에 내가 먼저 노력하는 부분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는다. ‘관포지교 하나의 예이긴 하지만, 문제를 두고 고민을 해본다면 이렇게 옆길로 새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된다. 경영학 교과서의 매뉴얼과 같은 책이 아니라, 오히려 성긴 느낌의 이러한 고전 텍스트가 하나 하나의 에피소드를 천천히 읽어나가면서 나의 삶을 대입해보고 고민해보는 장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해석이나 개개인이 안고 있는 문제 등과 관련하여 얻게되는 교훈의 방점이 조금씩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지구 위의 인구 만큼이나 다양한 고민들이 다른 양상으로 존재할 것이므로, 책이 안내하는 길은 그만큼의 다양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또한 우리가 고전이라고 불리는 텍스트의 모호한 장점이라고 있지 않은가.         

 

 

책에 소개되는 다양한 에피소드 뿐만 아니라 저자의 폭넓은 독서 경험을 통해 새롭게 배우게 되는 부분도 하나의 재미다. 관중의 <관자> 같은 책들은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경영 관점에서 다양한 지혜를 있을 것이다. 복잡 미묘한 인간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끼리의 관계 언제나 무난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님을 누구나 절감할 것이다. 사회는 개개인들로 하여금 구성원으로서 하나의 역할 기대하고, 따라서 개개인의 생각과 욕망대로만 행동할 수는 없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더구나 헬조선이라는 유행어처럼 결코 쉽지 않은 대한민국 사회에 살면서 때로는 유방의 태자 교체를 목숨걸고 반대하며 유방에게 충고한 손숙통처럼 자신의 소신을 이야기할 있을까하는 의구심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사회에서 내가 자리한 역할 위치’, 나의 사회관계에 영향을 있는 행동을 나의 소신대로 있을지 모르겠다. ‘사람 사이 관계, 그리고 사회에서의 나의 역할 행동 그만큼 명확한 답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어렵다. 비슷한 사례라도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야기하고 문제의 시작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내가 <관계의 비결>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행동해야(how to do)’하는가의 문제라기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사람 사이의 관계 무엇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이것은 분명히 저자가 글로 가르쳐줄 수있는 부분은 제한적일 것이다. 결국 에피소드를 통해 내가 파악해야만하는 나만의 숙제가 것이다. 

 

 

역사상 최초의 셰프 출신 재상으로 저자가 흥미롭게 소개하는 이윤의 에피소드에서도 있듯이, 생각하는 리더의 본보기가 될만한 사항들을 많이 발견할 있다. 뿐만 아니라 음식 관련한 관계의 비결 보다 직접적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리를 확인하는 의식으로 생각해볼 있을 같다. 집단 내에서 누군가를 배제하고 음식을 나누는 행위는 기존의 관계를 그르치거나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하고, 심지어는 대사를 그르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교훈을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 <전국책> 인용되어있는 중산국의 왕의 말이다. 숱한 세월을 지나면서 분명히 이야기가 좀더 극적으로 정리되거나 세세한 부분이 다듬어지고 제외된 부분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알맹이만을 곱씹어 수는 있을 것이다.

 

 

베푸는 것은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재앙을 당하는데 있으며, 원한은 깊고 얕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엋난 마음에 있다. 나는 양고기 국물 그릇으로 나라를 잃었고 찬밥 덩어리로 목숨을 구했다.”(294)  

 

 

책을 덮으며 남게된 인상은, 저자의 강의 경험과 폭넓은 독서 경험이 반영되어서인지 책에 나온 에피소드를 엮고 소개하는 방식은 독자가 쉽고 재미있게 읽어나갈 있었다는 점이다. 다만 다양한 독서를 연결시키려는 저자의 의도는 다른 자기계발서로부터 인용한 문구로 시작하는 대목에서 엿볼 있는데, 이는 다소 산만해지거나 소개하는 에피소드의 교훈을 강요하는 의도로 비추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실 <관계의 기술> 두어 시간만에 읽어낼 있는 책이면서도, 동시에 오래두고 읽을 수도 있는 책이란 생각을 해본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명제로부터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각각의 개별적인 관계의 양상은 다를 있지만, 독자에 따라 <관계의 기술> 재미있는 고사를 들려주는 이야기책이 수도, 나의 관계를 다시금 되돌아볼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는 책이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다시금 환기하게 생각은 책에 인용된 루소의 언급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갓난 아이의 울음으로부터 불가피해지는 인간관계를 유지해나가야한다면, 내가 타인에게 좋은 친구, 좋은 사람이 되어야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이번 일독을 통해 내가 얻은 가지 관계의 비결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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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과 함께한 어느 가을의 기록 | 기본 카테고리 2017-09-23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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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앙투안 콩파뇽,줄리아 크리스테바 등저/길혜연 역
책세상 | 2017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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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원제: Un Ete Avec Proust)

앙투안 콩파뇽/줄리아 크리스테바 6(8) 지음

길혜연 옮김 | 책세상

 

 

 

 

이제, 때가 듯하다.

 

 

 

10 어느 무미건조한 실험실 구석에서 프루스트의 문장, ‘ 세월,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읽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을 때거나, 20 어느 지하 벙커에서 군복무하며, ‘우리는 사랑하자마자 아무도 사랑하지 않게 된다라는 구절을 읽으며 고무신 거꾸로 신은 여친에 대한 분노를 삭이고 있었을 때였다면, 프루스트의 텍스트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감히 말할 있을 같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을 있을 같다. 아니 최소한 시도는 해볼 있을 같다. ‘처음 30페이지가 마지노선이라는 옮긴이의 귀뜸처럼, 어릴 향이 고약한 한약을 먹기 위해 코를 막고 약을 들이마시듯, 프루스트의 흔적을 따라가볼 수는 있겠다는 말이다. 나의 잃어버린 시간 앞으로 잃게 시간보다 많아졌음을 절감하게 중년에 와서야 나는 비로소 프루스트의 소설을 읽을 준비가 되었나보다. 과감한(?) 결심을 하게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분명히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발견했고, 읽었기 때문이다.

 

 

 

가을의 문턱에서 접하게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8명의 프루스트 전문가들(전문가 이기 전에 프루스트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진 이들) 각자 나름의 주제 8개를 통해 써내려간 각자의 독후 기록이다. 특히 책은 몽테뉴의 <수상록> 몽테뉴의 사상에 관해 간략하게 소개했던 <인생의 >(원제: 몽테뉴와 함께한 여름) 써냈던 앙투안 콩파뇽의 프루스트읽기로 시작하고 있어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있었다.

 

 

 

시몬느 보부아르가 평생 읽고 읽고 싶은 으로 꼽았다고 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막상 읽기가 쉽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문장에800단어가 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 악명높은 책도 결국은 인간이 생각해낼 있는 거의 모든 사유의 영역과 접촉한 흔적을 보여주는 기록이 아니겠는가. 결국 화자에게 불현듯 등장하는 과거의 어떤 기억의 부분들은 결국 독자의 추억을 통해 등가물을 찾아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달리말하면 프루스트의 소설은 작가가 오랜 시간동안, 특히 길지 않았던 작가의 생애 말년을 바쳐 완성해갔던 작품이므로 작가 자신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 또한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러한 우려를 분명히 알고 있다는 듯이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에서는 작품의 내용이나 이론적인 논의에 치우칠 있는 전문가들의 프루스트 읽기는 보다 작가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보여주고 있다.    

 

 

 

【프루스트와 몽테뉴 줄기차게 자기의 내면을 향하는 시선

 

책에 등장하는 8명의 프루스트 전문가 명인 라파엘 앙토벤 프루스트와 철학자들이라는 키워드로 써내려간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으면서(, 소설을 통해 자신을 읽으면서), 책이 나를 삼키도록 내버려두면서, 항복의 대가로 자비심을 구하며 포식동물 앞에 몸을 바치듯 눈을 감고 독서에 몸을 맡기면서, 나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말이 메아리처럼 들리는 느낌을 받았다.”(255)

 

나는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쓰기 전에 책을 소설로 것인지 아니면 철학에세이로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스스로에게 나는 소설가인가?’라고 수첩에 적어놓았다는 대목에서부터 <에세> 작가 미셸 몽테뉴를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아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어보지는 못했으므로,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에서 접하는 상황을 살펴보면, 프루스트라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외부세계(살롱과 같은 사교계 ) 대한 명민한 관찰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도 극도로 까다로운, 예민한 탐색자이기도 했다는 점을 알게된다. 몽테뉴의 <에세> 떠올릴 , 프루스트의 나는 소설가인가?라는 물음에 대응하는 몽테뉴의 독백이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çai-je?)라는 질문이다. 몽테뉴의 수상록 <에세> 마치 질문에 대한 수렴하는 방향으로 자신에 대한 회의적 성찰을 책을 통해 줄기차게 보여주었다면, 프루스트는 자신의 거대한 소설을 통해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회의하는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었다고 있을것이다. 이들의 모습은 결국 당사자의 내면으로 향하는 시선들로서 서로 공유하는 무언가를 갖고있다고 생각된다. 위의 라파엘 앙토벤이 언급한 대목처럼 극히 제한적이나마 역시 선배 철학자들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떠올린 배경이다.  

 

 

 

소속되느냐, 소속되지 않느냐

 

작가 줄리아 크리스테바 읽은 프루스트는 상상의 세계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현대적인 작가로서의 면모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줄리아는 프루스트의 가족배경을 언급한다. 프루스트는 파리 코뮌 민중 봉기가 한창일 유대인 어머니와 카톨릭 신자인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출생했고, 것이 프루스트의 인간적인 , 다시말해 주변부적 인물이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프루스트가 유대인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았다는 , 나아가 흔히 드레피스 사건으로 알려진 알프레드 드레피스가 연루된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 것을 넘어 그를 옹호하는데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는 점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러한 프루스트의 배경을 고려해보면 다시 몽테뉴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15세기 에스파냐의 국토재정복 운동을 통해 쫒겨난 유대인들이 유럽에 퍼지게 되는 과정에서 몽테뉴의 어머니 가족은 프랑스게 정착하게 것이다. 결국 몽테뉴의 어머니가 유대인, 아버지가 카톨릭 신자인 프랑스이었다는 구성마저 프루스트와 동일한 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리하여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몽테뉴가 유대교 회당에가서 유대교 신자들과 지적인 대화를 나누고 배척하지 않게 점도 결국은 (어머니와 사이는 좋지 못했으나) 어머니의 유산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어떤 확고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닌 소속과 비소속의 어느 경계에 있었다는 , 그리고 이것이 결국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스스로의 회의적인 시선을 사람 모두가 갖게된 배경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나는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읽어나가며 프루스트의 삶을 조금 알게되고, 조금 구체적으로 그와 소설에 대해 상상할 있게 것이다.

 

 

 

 

 

프루스트와 바르트의 <밝은 >, 그리고 예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우리 주변을 둘러싼 망자들에게 바치는 기념비다. 소설은 그들에게 발언권을 주며 그들을 추모한다. 무의지적 기억은 상실과 소생이라는 복잡한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47, 앙투안 콩파뇽 글에서 인용)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등장하는 첫번째 작가 앙투안 콩파뇽 시간이라는 키워드로 글의 부분을 읽다가 대목을 읽을 , 나의 무의지적 기억 연결해준 사람은 바로 롤랑 바르트였다.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저서 <밝은 >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하나의 계기로 어머니의 사진 한장을 시작으로 사진에 관한 에세이를 써내려가는 것이다. ‘등장인물이란 키워드로 프루스트와 소설에 대해 써내려간 이브 타디에 글에서 그는 프루스트의 소설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어떤 이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장대한 편지라고 말한다.”(71)

 

 

 

나아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화자는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추억하는 대목이 나온다고 했다. 어린 화자에게 무한한 사랑 의미했던 할머니을 죽음을 추모하며, 자신에게 결핍된 존재인 할머니를 소환해낸다. 이렇게 본다면 프루스트의 소설이 바르트에게 분명히 영향을 부분이 있다고 생각할 있다. 나는 바르트의 저서  <밝은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오마주로서 있다고 생각한다.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우리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운명적으로 결핍하게 수밖에 없는 대상은 시간이다. 그리고 시간과 함께 결핍되어가는 우리 삶의 모습들, 우리가 사랑했으며, 사랑하고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한 환기가 바로 프루스트와 바르트의 책이 공유하는 인식으로 있을 같다. 

 

 

‘<밝은 > 연결되는 하나의 고리

 

예술이라는 키워드로 프루스트와 그의 작품에 대해 써내려간 아드리앵 괴츠 글에서 나는 바르트와 연결되는 하나의 연결고리를 찾았다. 음악과 회화를 열광적으로 좋아했다는 프루스트가 유럽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미술관을 일정에 포함시키지 않을리가 없다. 프루스트가 헤이그의 미술관에서 베르메르가 1600년대 중반에 그린 델프트 풍경 보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상세히 기록하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진품은 아니지만 인터넷을 이용하여 스크린을 통해 그림을 나도 보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다시 바르트의 <밝은 > 나오는 부분을 바로 떠올렸다. 바로 바르트가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제롬의 사진을 보며 (자신이) ‘황제를 보았던 눈을 보고 있다라고 중얼거리며 책의 서두를 시작하는 대목이다. 프루스트가델프트 풍경 보며 놀라워하고, 아름다움에 만족감을 표시하는 모습을 나는 스크린을 통해 보면서 상상해보게되며, 사실이 바르트가 나폴레옹의 동생 사진을 보며 느꼈을 경이감과 같은 감정들을 떠올려주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사소할지 모르지만 프루스트와 바르트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나만의 상상은 아닐 같다.

 

 

 

마지막 연결고리 동성애 코드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읽어나가며 프루스트와 바르트의 하나의 연결고리를 발견하자면, 바로 성정체성과 관련한 점이다. 넉넉한 집안의 아들이었던 프루스트에게 프루스트의 운전사로 일했던 알프레드 아고스티넬리,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이자 작가였던 뤼시앵 도데, 그리고 프루스트가 음악에 대한 애호를 더해주었던 작곡가 레날도 안과의 친밀한관계를 맺는 것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당시에 흔치 않던 동성애적 코드 노출시켜 놓았던 프루스트와는 달리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동성애적 코드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다만 작가 아니 에르노의 어느 소설에서 우리 둘은 사드보다 외설스럽다라는 바르트의 말을 인용한 페이지를 발견했을 바르트는 이미 나에게 강렬한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사실 보다 엄밀하게는 프루스트의 경우 양성애적코드가 적절하겠으나, 바르트와의 연결고리를 고려할 동성애 코드 한정시켰을 뿐이다.

 

 

 

아울러 흥미로운 것은 책의 전반을 통해 여러 프루스트 전문가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장하는 인물들과 실제인물들을 찾아 열결짓고 있는 부분이다. 프루스트가 영화배우로서 잠시 연인이기도 했던 루이자 모르낭과의 사랑과 추억을 통해 소설 인물인 알베르틴을 탄생시킨 것처럼,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소설이긴 하지만, 프루스트의 삶이 온전히 바쳐지고 반영된 하나의 세계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당시에 동성애 관련된 무언가를 공공연하게 발설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생각해보면, 프루스트는 자신의 전체를 걸고 소설에 투영하느라 분투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정리하며

 

주말 아침 라디오를 듣고 있다. 가수가 누구인지는 듣지 못했으나, 제목이 You Belong to Me라고 하였다.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다시 들어보는데 여러 가수들의 노래 나는 Carla Bruni 버전이 프루스트를 생각하기에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노래를 들으며, 똑같이 어머니를 애도했던 바르트를 떠올려보고 있다. 그리고 다시 무의지적 기억 나를 가족의 이야기로 연결시켜 준다. 소중한 사람의 부재는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다. 아픔은 시간이 지나도 아문다고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극복되지 않는 것도 있는 모양이다. 지금 현재 내게 속해있고, 내가 속해있는 사람들을 다시 생각해보게되는 순간이다. Carla Bruni 곡을 들으며 마무리를 하려는데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지하철에서 읽다가 그냥 먹먹해진 아래 문장을 다시 만났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 사랑하는 것입니다.

<꽃다운 소녀들의 그늘에> 문장 재인용(87)

 

 

그렇다. 프루스트든, 바르트든, 몽테뉴든 먼저 살다간 사람들이 남긴 유산이 내게 가르쳐주는 바는 바로 프루스트가 소설 속에 숨겨두었다. 바로 사랑하는 이다. ‘사랑하기 언제나 희망하고, ‘사랑했음 언제나 간직해두는 . 프루스트가 일종의 경계인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다고 해도,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분명히 그에게 강하게 소속되어있음은 분명하다. 반대로 프루스트 자신의 존재도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확고부동히 소속되어 있었음 상기하는 . 이것이 찰나처럼 지나가는 인생에서 우리가 부인할 없는 진실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도 이제는 프루스트를 읽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나에게 바로 삶에서 사랑하기 환기해볼 소중한 기회를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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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로렌 R. 그레이엄 저/최형섭 역
역사인 | 2017년 08월


안녕하세요, 리벼C입니다.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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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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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그레이엄은 『처형당한 엔지니어 유령』 에서 표트르 팔친스키라는 러시아 엔지니어의 삶을 추적한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 기술 교육을 받은 팔친스키는 서유럽 사회에서의 경험을 살려 러시아의 근대화에 기여하기를 원했다. 혁명 이후 들어선 소비에트 연방은 러시아 사회의 근대화를 위해 당시 세계 최고로 알려진 미국식 기술과 경영관리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집권하는 1920년대 중반이 되자 소련 지도부는 인민의 삶보다는 자본주의와의 경쟁과 체제의 유지에 초점을 맞춘 기술 체계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팔친스키는 엔지니어링 전문가로서 공산당의 정책에 반기를 들었고, 이를 이유로 1929년 사형에 처해졌다. 그레이엄은 팔친스키의 삶을 통해 테크놀로지를 둘러싼 소련 초창기의 문제점을 짚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궁극적으로 소련 패망의 중요한 원인들 중 하나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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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지구를 돌려라]를 읽으며 남긴 메모들 | 기본 카테고리 2017-09-04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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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칼럼 매캔 저/박찬원 역
뿔(웅진문학에디션) | 201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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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원제: Let the Great World Spin)

칼럼 매캔(Column McCann) 지음 | 박찬원 옮김 | [>

 

     책을 많이 읽었음을 드러내보이는 사람보다 권의 소설, 짧은 소설 편에서도 묵직한 이야기를 자신의 삶과 견주어 꺼낼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었다. 젊은 시절에는 속독가들의 능력이 부러웠고, 다치바나 다카시와 같은 다독가가 부러웠었더랬다. 하긴 때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으니,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기에 일말의 부러움도 나에게는 사치였을 것이다. 30대가 훌쩍 넘어 어릴 읽던 <영웅문> 같은 무협지 이후 다시 소설이란 것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나에게 문학이란 무용한 ’,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이었고, ‘쓸모 없음의 쓸모 알기에는 안에서 쌓여야할 시간이, 그리고 삶의 고단함이, 밥벌이의 지겨움 좀더 필요했던 모양이다.

 

     언젠가 최인호 작가가 중학교 단편을 읽어본 적이 있다.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다. 중학생이 부부사이의 미묘한 갈등과 심리를 이해하고 이를 유머러스하게 단편으로 써놓은 글이었다. 나는 불굴의 노력, 후천적인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최인호 작가와 같은 이런 분들을 보면 타고난무언가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도 이제는 믿는다. 꾸준한 노력으로(예컨대 1만시간 이상의 꾸준한 노력으로) 뛰어난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탁월함 경지라는 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믿는다. 그리고 타고난탁월함이 없는 나에게 자신의 결핍을 계속 들여다보며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나와 같은 이들이 불굴의 의지와 꾸준한 노력으로 이를 있는 경지는 타고난 탁월함 경지에 점근적으로만 다가갈 이들은 결국 만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타고나지 않음 비관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칼럼 매캔의 소설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바로 이런 타고남+탁월함 차원에서 사는 사람의 일종이라 생각했다.

 

     오늘 권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들은 리뷰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부끄럽지만 권의 책을 읽고 페이지라도 인상을, 책에 대한 기억들을 남겨두고자 끄적거리던 것들을 모은 메모에서 출발하였다.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작가 칼럼 매캔은 아일랜드 출신(1965 ) 작가로 1990년대 뉴욕에 정착했다고 한다. 성인이 되어 이방인으로서 낯선 사회에 정착하게된 작가가 신대륙에서 바라본 삶의 양상들이 소설에 나타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미국 개척기에 네덜란드인들이 도착하여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렀던 지금의 뉴욕 통해 작가는 미국사회가 안고있는 사회의 문제들과 미국의 트라우마를 직간접적으로 예리하게 들추어낸다. 1974 쌍둥이 빌딩으로 알려진 세계무역센터에 줄을 걸고 사이를 걸었다는 프랑스인 필리프 프티에 관한 사건이 각색되어있긴 하지만 소설에서 하나의 중심 축을 구성하고 있다. 지금은 2001 테러 인하여 무너진 110층의 세계무역센터 위를 우아하게 걸었던 프랑스인의 사건과, 아래 구질구질하고 피폐한 또는 부유하지만 공허한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과 과연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소설을 읽어가면서 내내 떠올렸던 궁금증이었다. 

 

     우선 책의 시간적인 배경은 70년대를 주축으로 하여 후반에 이르러 소위 ‘9.11테러이후의 삶이 대비되어 나온다.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아마도 ‘9.11테러 미국인에게, 작가 자신에게 갖는 의미를 되짚어보는 작업을 염두해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분명 ‘9.11테러 존재는 작가에게, 나아가 미국인들에게 크나큰 트라우마를 남겨준 사건일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1997 ‘IMF외환위기 가져다준 트라우마와 사회의 질적 변화와도 같이 ‘9.11테러 미국인들에게 실로 거대한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70년대의 미국은 무엇보다도 명분없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회의와 방향 상실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던 시기로 있을 것이다.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에서는 거대한모순의 세계에서 상처입은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베트남 전쟁에 아들을 내보낸 어머니들의 이야기가 담겨있고,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도 한다. 나아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실질적으로 그리고 여전히 백인 사회에 어떻게 뿌리내리고 있는지, 나아가 이에 대해 양심적인 백인들이 느끼고 항상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상에서 회피하곤하는 백인들의 죄책감(white guiltiness) 대해서도 보여주고 있다. 기나긴 소설이 점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실 중반을 넘어서이다. 다양한 등장 인물에 매번 시점이 바뀌어 화자가 동일하지 않은 점은 다소 혼란스럽다. 하지만 저자가 등장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무엇보다 따뜻하기에 소설의 후반으로 가면서 점점 공감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저자는 미국사회에 만연하는 모순과 편견의 양상을 간접적으로 독자가 들여다볼 있도록 안내하는데, 미국사회가 겪는 트라우마 통해 직간접적으로 상처받는 이들의 삶이 어떻게 치유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듯 쓰고 있다. 등장 인물들은 허구의 인물들이지만 결국 미국인들의 실체적인 모습을 모두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사회의 모순으로부터 상처를 입은 무기력하게 살아가야하는 이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삶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부대껴 나가는지를 그리고 있다.

 

     소설에서 있는 미국의 트라우마는 구체적으로 이런한 것이다. 세계의 도시 뉴욕에서도 부유한 동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