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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틈 사이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 | 기본 카테고리 2018-12-26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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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이반 일리치의 죽음 / 광인의 수기

레프 똘스또이 저/석영중,정지원 공역
열린책들 | 2018년 12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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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

레프 톨스또이 지음 |  석영중·정지원 옮김 |  [열린책들]

 

 

 

톨스토이가 자신의 80 인생 중에서 절반인 40여년에 이르는 동안 죽음이라는 무형의 진실과 대면하고 주제에 천착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마흔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등법원 판사 이반 일리치의 부고 기사를 신문에서 확인한 동료의 대화로 시작한다. 다시 소설 속의 장면은 이반 일리치의 시신이 안치된 장례식장으로 옮겨졌다가 이반 일리치라는 인물의 생애를 거꾸로 더듬어 올라가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소설이 발표된 당시(1886, 당시58) 거의 비슷한 시기에 씌여 발표된 <광인의 수기>(1884, 당시 56) 인간의 삶과 죽음을 탐구하는 작업으로 50 후반에 발표된 소설이다. 전체적인 인상을 다시 떠올려보자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인간의 죽음을 계기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대면하여 삶을 성찰할 기회를 준다면, <광인의 수기>에서는 짧지만 삶의 의미 탐구하려는 작가의 강한 의지를 읽을 있었다. 나아가 <부활>이나 <안나 카레리나>에서 살며시 드러나는 삶의 태도, 진실을 추구하려는 흔적이 집약된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는 결혼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소설 속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관리의 아들로서 법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엘리트이자 집안의 자랑이었다. 톨스토이가 표현했듯이 유쾌하면서도 품위있는 엘리트의 누리는 것이 중요한 삶의 가치이자 목적이었다. 사교모임에서 부인을 만나긴 했으나 사람에 대한 사랑없이 결혼을 하고, 높은 연봉이 보장된 자리를 찾아 기회를 노리는 부류가 되어갔다. 이반 일리치에게 결혼은 마디로 안정적인 보험이자 사회(상류층 사회) 통념에 바람직한 방향을 따르는 통과의례일 뿐이다. 이반 일리치는 마디로 사회가 만들어 놓은 궤도에서 평생 벗어나 적이 없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아내의 임신 이후 나날이 심해지는 아내의 변덕과 질투, 트집은 이반으로 하여금 일에 매진하도록 하였다.

 

중요한 것은 사회 통념이 정해 놓은 외적인 품위와 형식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37)

 

개인의 역할에 대한 사회의 강요에 스스로를 밀어넣는 사람들은 이후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결국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기 쉽다. 삶의 의미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오로지 속에서만 삶의 재미를 느낀 이반 일리치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가장들과 많이 닮아있다. 가족을 위해 평생 직장에 평생을 바친 가장들이 은퇴한 이후 가족이라는 구성원으로 돌아가기란 쉽지 않다. 많은 가장들이 은퇴이후 잃어버려 흔적만 남은 자신의 자리 주변을 유령처럼 배회한다. 가정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평생 사회의 고정관념을 따라 사는 삶을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그래서 끔찍한 이라고 톨스토이는 생각했던 같다. 130 러시아의 대문호가 날카롭게 지적한 것들이 여전히 빛을 바래지 않고 유효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삶의 조건들은 개선되고 향상되었는지 반문해볼 있다. 아니 외적인 삶의 조건에 대해 물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여전히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물어보면 일이다.

 

공무를 수행하며 느끼는 기쁨은 자존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고 사교활동을 하며 느끼는 기쁨은 허영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진짜 기쁨은 빈트 게임이었다.(<이반 일리치의 죽음>, 53)

 

겉으로 보이는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사회의 덫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 있다. 현재보다 연봉이 높은 자리로 가기위해 청탁을 하고, 집을 구하고 집을 꾸미기 위해 지출을 늘리고 자주 만찬을 열어 사교계 사람들을 초대해야만 한다. 오늘날 아파트를 장만하는 것이 인생의 꿈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의 모습과 다를바가 없다. 욕망의 충족을 위해 대출을 받고, 고가의 외제차를 할부로 구입하여 살면서도 언제나 돈이 부족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이반 일리치로 대표되는 인물상과는 상당한 유사점을 갖는다.  사회의 통념에 따라 결혼하고, 상류층의 사람들이 믿는 바대로 행동한 이반 일리치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죽음을 둘러싼 풍경 - 금기시된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

원인모를 병으로 한 인간이 갑자기 죽어가는 풍경은 때론 불편하게 다가오지만, 강력한 진실성을 담고있다. 죽음이라는 무지가 주는 거대한 공포는 근원적이고 모든 생명체에게 해당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시작부분에서 이반의 직장 동료들이 이반의 부고 기사를 보고 자신의 죽음이 아닌 것에 안도하고, 남편의 사망으로 국가에서 나오는 지원금을 궁금해하는 것은 속물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오늘날의 우리도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행동들이다. 장례식장에서 화투를 밤새 치는 우리의 장례식 풍경처럼 이반의 직장 동료/지인들은 어떻게하면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카드 게임을 있을지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강박적으로 떠올렸던 죽음이라는 문제는 특히나 오늘날 언급을 하거나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마저 금기시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다. 과거에는 죽음이라는 삶의 행사가 보다 우리 주변에 가까이 존재했다. 아픈 이들은 대부분 집에서 요양을 하다가가 돌아가신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죽음 처리가 외주화되었다고 해야할까. 집에서 맞는 죽음이 금기시되어버린 느낌이다. 문명 속 사는 대부분의 이들에게 죽음이란 병원에서 맞아야하는 사건이 되었다. 톨스토이가 기록하고 있는, 이반 일리치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둘러싼 풍경은 매우 현실적이다.

 

불결함과 창피함과 냄새가, 그리고 용변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너무나 괴롭혔다.(<이반 일리치의 죽음>, 85)

 

이반 일리치가 원인 모를 병으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데도, 이반의 부인과 딸은 연민은 커녕 죽어가는 이를 비난한다. 나아가 자신들이 오히려 고통받는 피해자임을 자처하는 행동을 보이고 있다. 의사마저도 병자에게 솔직하게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병의 진단에만 관심을 두는 것같다.  죽음에 대한 금기는 여전히 병원에서도 . ‘죽음 대한 금기로 인하여 죽어가는 모든 이들, 오늘날 다른 이반 일리치들은 오히려 더욱 고립되고 절대 고독 속에서 절망하며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죽어가는 이들에 대한 존엄역시 방치되고 있다.

 

그나마 이반에게는 방치된 존엄 추락하지 않게 붙들어주는 인물이 있다. 바로 농부 출신 게라심의 존재 때문이다. 오직 게라심만이 이반의 처지를 이해하고 연민을 보낸다. 죽음에 대해, 죽어가는 이에 대해 진실한 농부의 말과 행동에 이반은 심지어 위안을 느끼고 있다. 배운 없는 농부에게 풍부한 학식과 재산을 가진 판사 출신 이반 일리치가 느낀 위안은 우리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게라심은 죽음 또한 삶의 일부로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언젠가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91)라고 담담하게 이반 일리치에게 털어 놓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소설의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놀랐던 것은 톨스토이가 죽음의 과정에 대해 기술한 일련의 묘사들이 너무나 사실적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죽어가는 이들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사라진다는 점이나, ‘검은 구멍속으로 빨려들어간 이후 나락으로 굴러떨어져 보는 과정과 최후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 죽어가는 환자 1000여 명을 17 관찰하고 기록한 스위스의 의사 모니카 렌츠가 저술한 <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 나타난 죽음의 과정과 너무나 흡사한 것 같다. 톨스토이의 작품을 점점 대하게 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어느 소설이나 죽음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광인의 수기>에서처럼 보다 직접적으로 톨스토이 자신의 경험을 드러낸 작품에서 죽음 이미지가 더욱 비범하고 강렬하게 분출된다. 특히 <광인의 수기>에서 하인과 멀리 떨어진 곳의 영지를 매입하러 가는 길에 네모난 하얀 에서 덮져온 발작증세, 그리고 겨울 사냥을 하다 눈으로 덮힌 사방 천지에서 길을 잃고  경험했던 발작의 장면이 특히 인상에 남는다. 장면 모두 주인공은 나는 , 여기에 왔고,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자문하고 있다. 실제적인 공간에서 주인공이 느꼈을 법한 방향감각의 상실과 백색 공포 죽음에의 공포 이어지고 있다. 미완성인 자전적 소설을 읽노라면, 절대 진실인 죽음이란 실체 앞에서 모든 인간들의 허위와 거짓의 삶은 아무런 존재이유를 상실해 버린다.

 

 

 

 

그렇게 그는 죽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카이사르도 죽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 필멸의 존재다.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 <광인의 수기> 보노라면 50 후반에 이미 죽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했고 진지하게 고민했던 톨스토이의 진지한 모습과 젊은 시절 주색잡기와 방탕한 생활을 했던 젊은 톨스토이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사람은 누구나 변하지 않는다는 세속화된 믿음을 아무런 의문 없이 믿고 있던 나에게는 너무나 커다란 격차이자 변화이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극적인 삶을 살아보았기에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으며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의 과오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삶에 대한 명민한 관찰과 감성의 소유자가 아니면 거치기 힘든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톨스토이는 죽음 대한 자각 이후에 크게 변한 사람으로 이해된다.

 

소설 이반 일리치는 모든 평범한인간을 대표한다. 사회가 정한 통념에 의문없이 따르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반의 죽음으로부터 톨스토이는 인간의 보편적인 생애를 더듬어 나가며 죽음이라는 인간 실존의 절대 고독 고찰했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도중에 멈추더니 온몸을 뻗었다. 그렇게 그는 죽었다.”(<이반 일리치의 죽음>, 126)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모습을 보노라면 평범한 인간들의 마지막 모습을 군더더기 없이 써내려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끝나버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을 것인가? 책을 덮으면서 톨스토이는 마치 나에게 바로 지금 진정으로 살아있는가?라고 묻는 듯했다. 이반 일리치가 생의 마지막에 생각한 그것 무엇인지 톨스토이는 명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가 겪은 죽음의 과정을 통해 톨스토이는 각자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삶의 조건이 만들어내는 허구의 거미줄을 모두 걷어낼 . 그리고 삶의 본질을 바라보고 삶을 누리라는 것이 이반의 그것 아니었을까?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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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하지않은 몰락

강상중,우치다 타츠루 공저/노수경 역
사계절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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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두 사상가, 

강상중과 우치다 타츠루가 말하는 불안과 화해의 시대론


1950년 전후 일본에서 태어나 근대화 과정을 성찰하며 일본 사회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한 강상중과 우치다 타츠루가 처음으로 만났다. 두 사람은 『위험하지 않은 몰락』에서 근대화의 그늘과 세계의 오늘을 돌아보며, 다시 한 번 역사의 비극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인류에게 ‘처참과 고난, 비탄과 번민, 죽음과 질병 같은 비극을 통해 숙연해지고 새로 태어나’야 한다고 경고한다. 두 지성의 날카롭지만 섬세한 대화 속에서 독자들은 오늘날 마주하고 있는 불안의 이유를 발견하고, 그것과 화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근대의 아이들이다

인류는 근대를 거치며 자유와 평등이라는 사상 위에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근대의 횃불은 시민혁명을 잉태했고 헌법 아래에서 국민의 권리가 보장되는 국가를 출현시켰으며, 또한 찬란히 빛나는 이성의 힘은 인류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 안에서 태어난 근대의 아이들인 우리는 영원히 평화를 구가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굳건할 것만 같았던 근대는 이제 종언을 고하는 중이다.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에 테러가 침입하고 글로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소용돌이치는 오늘날, 근대를 지탱해온 국민국가체제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전 세계는 최종 전쟁 단계에 돌입했다. 문제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인류의 역사는 ‘21세기의 야만’을 넘어 다시 한 번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 수 있을까.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 강상중과 우치다 타츠루는 이 책에서 근대의 침몰은 막을 수 없다고 말하며, 세계가 조금 더 안전하게 다음 단계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세계최종전쟁’ 단계로의 돌입


세계의 역사는 근대의 정통을 자처하는 혁명의 나라와 독립혁명의 나라를 모범으로 삼아 전개된다고 여겼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통’은 혁명이라는 특정한 원리와 원칙에 따라 새로 만들어진 국가라는 뜻이며, 한마디로 자유를 근본 원리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_강상중, 24~26쪽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초 위에 건국된 미국과 프랑스는 사상과 문물의 종주를 자부하며 역사를 전진시켰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두 나라가 테러리즘의 목표물이 되었다는 사실은 근대의 아이러니다. 『위험하지 않은 몰락』은 이 도착적 상황의 원인을 추적한다. 

강상중에 따르면, 냉전이 끝나고 ‘근대’가 세계의 기준이 되어 전 세계가 미국과 프랑스를 본받아 자유를 원리로 하는 국가, 사회, 제도를 만들기 시작하던 순간 중동에 ‘이슬람 부흥’을 기치로 내건 국가들이 출현하면서 ‘유일하고 순수한 근대 모델’의 환상이 깨지기 시작했다. 미국과 프랑스는 중동의 혼란을 수습하고 세계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중동에서 벌어진 전쟁과 갈등은 수많은 사상자와 난민을 초래했고, 이때 피해자가 된 중동 사람들의 심상에 미국과 프랑스에 대한 분노와 복수의 감정이 자리 잡는다. 강상중은 여기에서 현재 서구 대도시의 일상생활 속으로 침입한 테러리즘의 기원을 찾는다. 


새로운 야만의 출현, 전 세계적 우경화


세계는 20세기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을 겪으며 전체주의라는 환상의 위험을 통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과거의 기억은 희미해졌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 프랑스 ‘국민전선’의 대약진, 일본 아베 총리의 장기 집권 등 전 세계에서 우경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 현상을 ‘21세기 새로운 야만’의 징조로 경고한다. 


그에 따르면 17세기 이후 근대 세계는 ‘국민국가’라는 공통 조건하에서 유지될 수 있었다. 국민국가체제라는 모델에 따라 세계는 제도와 문화를 획일화하고 경제성장이라는 유일한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마침내 ‘자본과 시장’이 지상의 원리가 되는 시점에 이르자, 국민국가체제는 더 이상 경제성장의 조건이 될 수 없게 되었다. 자본과 시장은 각 국가의 경계를 넘어 자유롭게 이동하기를 원하는 반면, 국가는 자본과 시장을 국경 안에서 보호하고 운용하고자 했다. 20세기가 끝날 무렵까지 치열하게 전개된 국가와 시장의 갈등에서 마침내 시장이 승리했고, 여기에 대한 반발로 자국의 국경에 높은 담장을 치자는 ‘우경화’ 현상이 다시 대두했다는 분석이다. 


우치다 타츠루는 현재 일본의 정치 상황도 명쾌하게 설명한다. 그는 아베 총리가 원하는 일본은 북한과 싱가포르를 합친 나라라고 말한다. 정치적으로는 시민에게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강권적 지배 국가인 북한을 모델로, 경제적으로는 국가의 목표가 오로지 성장에 매몰되어 사회의 모든 제도가 오로지 돈벌이를 위해 설계된 싱가포르를 모델로 삼고 있다. 두 모델 사이에서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경제 모델이며, 극우 전체국가는 궁극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사회주의의 승리로 향하는 과정에 자본주의의 발전을 포함시켰던 마르크스의 계획이 겹쳐지는 대목이다.


우리는 불안한 시대에 빙의되었는가

강상중과 우치다 타츠루는 일본인이 시대의 불안한 분위기에 ‘빙의’되어 있다고 우려한다. 언론은 북한은 별거 아니라며 전쟁을 종용하고,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제대로 수습하지 않은 채 지방 경제를 말살시키더니 결국 헌법을 뜯어고쳐 일본을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 과정에 집권 자민당이 설정한 경제성장 모델이 있다고 분석한다.


공화적 합의 형성의 절차나 분권 시스템으로는 이 속도를 유지할 수 없어요.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권한을 총리관저에 집중시키고 사법부와 입법부가 행정부의 지시를 따르는 구조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_우치다 타츠루, 200쪽


전 국민이 도시에서 임노동을 하며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시장에서 상품으로 구입해야 하는 구조를 갖추면 GDP가 어느 정도 유지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시에서 임노동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_우치다 타츠루, 206쪽



침몰을 막을 열쇠는 관용과 환대의 정신

이 책에서 두 지식인의 대화는 위험을 분석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21세기의 야만을 극복할 방법을 찾기 위해 무한히 확장되던 두 사람의 사고는 한 곳에서 동시에 멈춘다. 바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이다. 


전후 독일은 세계의 그 어느 국가보다 전쟁 책임을 치열하게 반성했고, 그 반성적 사고 위에 새로운 국가의 초석을 세웠다. 다른 나라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인도적이고 윤리적인 책무를 지는 것을 국가 이념으로 삼은 독일은, 아예 헌법에 ‘난민 수용’ 조항을 명문화시켰다. 윤리적 부채 의식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독일은 유럽 국가들 가운데 가장 안정적으로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온 난민을 수용하고 있다. 나아가 강상중은 독일의 반성과 윤리적 부채 의식이 동·서독 통일의 바탕이 되었다고도 설명한다. 세계대전을 겪으며 타자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교훈을 전 국민이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두 사람은 이슬람 공동체의 ‘자카트 문화’를 오늘날의 위기를 잠재울 수 있는 또 다른 열쇠로 제시한다. ‘우리가 양보하면 그쪽도 양보하라’ 같은 평등주의 논리가 아니라 내가 먼저 양보하는 관용의 자세가 공생과 화해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언제 물과 식량 없이 황야를 헤매게 될지 모릅니다. (중략) 착한 사람을 만나면 살아남고 구두쇠를 만나면 죽는다는 건 곤란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사막에서 천막을 발견했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결과 황야에서 생존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언제나 타자와 공유한다는 도덕이 신체화되었습니다. _우치다 타츠루, 126쪽


작은 공동체에서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다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두 사람은 작은 공동체 단위로 세계가 재구축될 것이라고 말하며 독자를 안심시킨다. 미국이라는 세계 유일의 성장 모델이 힘을 잃고 국민국가체제가 액상화됨에 따라 세계는 이슬람권, 유럽권, 유교권 등 몇 개의 단위로 광역화되는 동시에 그에 대한 보완으로 작은 지역 단위의 공동체가 재구축된다는 예상이다. 우치다 타츠루는 지역화 과정에서 ‘정상경제’가 회복될 것이라고 말한다. 


7만 년 전부터 인간은 경제활동을 해왔습니다. 그 대부분의 시기 동안 한 개인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산의 형태와 교환의 형태가 거의 바뀌지 않는 정상경제였습니다. 1년간 몇 퍼센트 성장을 했는지 같은 수치를 산업혁명 이전의 인류는 구경한 적도 없으니까요. (중략) 시장에서 상품으로 구입할 때는 몹시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서비스도, 상호부조적 공동체의 내부에서는 ‘좀 부탁드립니다’라는 말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 대가는 다른 기회에 다른 형태로 누군가의 ‘좀 부탁드릴게요’에 응하는 것으로 치러집니다. _우치다 타츠루, 219쪽


강상중과 우치다 타츠루는 초고속 화폐경제 시스템의 반대편에 교역 중심의 호혜적 경제 시스템을 위치시킨다. 성격이 전혀 다른 경제활동이 공존하는 세계에서 다양한 공동체가 각자의 역사 배경과 지리 조건에 기반하여 최선의 모델을 결정하는 미래. 인류의 새로운 역사는 두 사람이 가리킨 방향으로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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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타 크리스토프(Agota Kristof) 지음 |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1] (글쓰기에 대한 열망)

 

소설에는 작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토비아스 호르바츠) 등장한다.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헝가리 태생이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고국을 떠나 스위스에 정착, 생애 대부분을 시계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글을 써냈던 인물이다. 그리고 소설의 토비아스는 작가의 아바타인 셈이다. 주인공 역시 가족과 고국을 떠나 이방인으로서 공장에서 일하며 글을 쓰곤 한다. 고등교육을 받지는 못한 주인공이지만 글쓰기에 대한 열정만큼은 남다르다.

 

나는 어디를 가든 항상 글을 쓴다. (…) 나는 하루종일 머릿속에 썼던 글들을 저녁마다 종이에 옮겨적으면서 내가 이런 글들을 쓰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누구를 위해서, 쓰는가?” (16)

 

글쓰기에 대한 열정과 야망은 작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2] (디아스포라의 삶에 대한 관찰 )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와 표면상 분리되어 있으나 분리될 없는 대상이다. 자신을 버린 생물학적 아버지의 등에 칼을 꽂고 도망쳐 나온 주인공은 타지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 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들에게 이방인이다.” (49) 저자가 시계공장에서 하루 두시간씩 오랜 시간을 일하며 글쓰기를 했던 것처럼 소설 주인공 또한 공장에서 그리고 저자와 같은 이방인으로서 여전히 분리될 없는 경험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걸었다. 간혹 다른 행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가벼워 보였고, 무게가 없는 사람들 같았다. 뿌리가 없는 그들의 발은 결코 상처받지 않았다. 그것은 집을 떠난 사람들,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 가는 길이었다.” (115)

 

소설 전체를 통해 주인공이 내던져진 운명은 사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경험과 분리될 없다. 이것이 그녀를 평생 지배해왔으므로. 따라서 크리스토프는 고국을 떠난 이방인들에 대해 민감한 관심을 갖고 여러 군데에 그녀만의 스케치를 배치해두었다.

 

 시간이 갈라진다. 유년의 공백은 어디서 다시 찾을 것인가? 어두운 공간에 갖힌 일그러진 태양은? 허공에서 전복된 길은 어디서 되찾을 것인가? 계절들은 의미를 잃었다. 내일, 어제, 그런 단어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재가 있을 . (…) 지금 일어나고 있다. 항상. 모든 것이 동시에. 왜냐하면 사물들은 안에서 살고 있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에서는, 모든 것이 현재다.”(115-116)

 

어느 곳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기 힘든 이방인들의 시제는 언제나 현재인지도 모른다. 내일을 기약할 없는 사람들에게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라고 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과거의 공백, 과거에 대한 상실감은 이방인에게 회복할 없는 무력감만을 안길 것이다. 오로지 현재만을 붙들 수밖에 없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이런 이방인의 실존적인 모습을 민감하게 포착해 내었다고 생각한다.

 

 

 

[3] (인생의 깊은 상실감-꿈을 잃는다는 것의 슬픔)

 

자신의 이복동생을 사랑하게 토비아스의 결말은 순탄치 않을 것을 예비하였다. 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이복동생 캐롤린은 이미 결혼하여 아이도 키우는 주부였기에 더욱이 금지된 사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린의 가족이 해체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되면서 토비아스는 커다란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인생에 대해 말하자면 마디로 요약될 있다. 린이 왔다가 다시 떠났다라고.” (134)

 

짧은 문장이지만 여기에는 세상 모든 것을 잃은 듯한 깊은 상실감과 자조, 우울감이 느껴진다.

 

토비아스는 린이 떠난 여자친구 욜란드와 결혼하여 린과 작은 아들 토비아스를 낳아 기른다. 그리고 여전히 주인공은 시계공장에서 일하지만 그에게 세상은 이미 다른 세상이 되어 버렸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간결하다.

 

나는 이제 더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140)

 

아파트가 인생일대의 되어버린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에게 글을 쓰지 않기로 했다는의미가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했다. 너무 뜽금없는 주문일까. 토비아스에게는 자신의 온전한 정체성이었던 글쓰기, 그리고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삶의 좌절 앞에 무너저 버렸다. 해가 지나가는 마지막 달에 꿈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꿈꾸어야할까를 생각해보게된다. 꿈을 버리고 현실에 안주해버리는 토비아스 호로바츠는 오늘날 꿈을 잃고 표류하는 우리들의 모습 같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꿈을 잃은 이방인이다 

 

 

 

어제

아고타 크리스토프 저/용경식 역
문학동네 | 2007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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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보니것 [고양이 요람]을 읽고 - 메모와 단상들 | 기본 카테고리 2018-12-13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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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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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요람 Cat’s Cradle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 지음 | 김송현정 옮김 | [문학동네]

 

 

[1]

소설은 나를 조나라고 부르라라는 대목으로 시작한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 문장을 패러디하며, 기독교의 <구약성경> 등장하는 모티브 또한 함축하고 있는 문장이다. 소설을 읽어나가며 저자가 정말 독특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흥미가 더해졌는, 블랙 유머와 생태주의의 시선을 잇는다는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보다는 좀더 수월하게 접할 있었다. 엉뚱하면서도 기발한 이야기 전개에도 중간 중간 작가는 진지한 마디를 알게모르게 툭툭 던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특이한 여행 제안은 하느님이 제공하는 무용 수업이다.”(85) 라는 위트가 들어있는 문장이 하나의 예이다. 나는 이러한 문장이 특히 재미있다고 느꼈는데, 장편소설 <고양이 요람>(1963) 시점에서 21 후인 1984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던 작가와 과연 동일한 인물일까 궁금해졌다. 어쩌면 문장에도 전쟁의 복판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사람으로서, 전후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미국, 팍스 아메리카나의 사회를 바라보는 저자의 냉소가 묻어있지는 않을까 생각해본다. 

 

 

[2]

저자의 연보를 보다보면 저자 자신의 생애도 <고양이 요람> 주인공 조나, 존처럼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생화학을 공부하던 코넬대 재학시절 대한민국의 남학생들 처럼 군대에 입대하고 기계공학을 공부하기도 했던 커트 보니것은 <호밀밭의 파수꾼> 저자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처럼 2차대전에 참전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독일군 포로에 잡혀 드레스덴으로 끌려갔으며,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으로 도시가 불타는 와중에도 가까스로 살아남은 저자의 ---(저자가 소설에서 설정해놓은 사이비 종교인 보코논교 용어로 숙명, 필연적인 운명) 다른 이야기를 예비하는 것이었다. 커트 보니것의 인생을 흔들어놓았던 때의 체험은 다른 사람들처럼 허무주의로 빠지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 대한 애정을 품게 만든 계기가 되었을 것 같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를 커트 보니것은 전쟁의 경험을 통해 절실히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그토록 무관심한 인간을 적이 없소.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동처럼 차갑게 죽어있는 자들이 너무나 많소. 이따금 그게 세상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92)

 

저자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이 지식에 대한 욕구만 있는 지식인, 도덕적인 책임은 회피하는 과학자들의 문제를 미국의 핵폭탄을 연구하는 과학자라는 설정을 통해 보다 극적으로 제시한. 문득 휴머니즘이라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애정의 정신을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가 절실하게 이해할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3]

언젠가 경제학을 전공한 사진가 세바스티앙 살가두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 적이 있다. 사진가 경력의 대부분을 세계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 학살 현장 난민 캠프 현장에서 보냈던 살가두는 르완다 난민 학살을 경험하는 것을 끝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를 안전히 잃어버린 했다. 그리고 마음에 병을 얻고 카메라에서 손을 한동안 놓았던 것이다.

 

살가두가 방문한 난민 캠프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우리가 당장 한반도에 전쟁이 발생하는 경우, 포화를 피하여 피난민이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많은 이들이 아프리카의 난민 캠프에서와 같은 환경에 처해지는 것은 피할 없는 결과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도 제주에 난민 문제와 관련하여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있지만, 문제에 대한 결론을 바로 내리지는 않아도 공적인 대화의 장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할 사항이라는 생각을 한다. 모든 나라에서 난민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난민 수용 여부에 대한 도덕성이나 우리의 처지에 대한 판단을 떠나, 인간이 타인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행위가 아닐까. 인간(人間)’이라는  이 매우 철학적인 용어를 고려할 , 인간은 '인간 사이의 관계' 형성을 통해 서로 의지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질적인 이유로든 정신적인 이유로든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통해 문득 문득 드러나는 작가의 인간에 대한 관심, 애정이 느껴졌다.

 

 

[4]

소설은 알듯 모를듯 매우 다양한 이슈들이 화자인 조나의 지나가는 말투를 통해 다루어진다. 미국의 세계 패권주의, 나치즘, 지식인과 과학자의 사회적/도덕적 책무, 진짜와 가짜의 문제, 종교의 본질, 미국의 매카시즘이 50-60년대에 남긴 , 비트 세대로 대변되는 미국의 저항운동, 여권 문제 등등에 대한 저자의 폭넓은 관심이 보니것 특유의 신랄한 유머에 묻어 나오고 있다. 무거운 사회문제 뿐만 아니라 저자는 문학의 역할 내지는 기능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고 있다.

 

나는 아버지 캐슬에게 물었다. “선생님, 문학이 주는 위안을 박탈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죽을까요?”

하나겠지. 심장 경화 아니면 신경계 위축.” 그가 말했다.

어느 쪽도 그리 유쾌하진 않을 같군요.” 내가 말했다.

그렇소. 그러니, 젠장, 사람 모두 제발 계속 글을 쓰시게!” 아머지 캐슬이 말했다.’ (276-277)

 

 

[5]

옮긴이는 책의 제목 고양이 요람 상징하는 것이 사람들 스스로가 행복과 위안을 주기 위해 만든 모든 종류의 거짓이라고 풀어주고 있다. 이는 밀란 쿤데라가 <참을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야기 했던 키치와도 닮은 구석이 있다. ‘고양이 요람이든 키치이든 모두 진짜에 해당하는 대상 또는 진실이 아닌 허구 내지는 모조품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다. 대량복제가 가능해진 산업사회의 제품/결과물(모조품) 우리는 나의 개성을 표현해주는 물건이라 착각하고 살아가며 이를 욕망한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진실을 대면할 무엇을 선택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고양이 요람>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호니커 박사의 난쟁이 막내 아들 뉴트가 실뜨게를 하다 문득 대화 상대방에게 고양이가 보이세요? 요람이 보이세요? 묻는 대목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이는 아마도 화자들이 사회의 진실에 대면하는 순간 대화 상대방에게 묻는 절차를 빌어 우리 독자에게도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손에 걸린 실을 보고 요람 같이 생겼는지혹은 요람 속에 고양이가 보이는지 사람의 상상력 선택 달려있을 것이다. 뉴트는 대화 상대자에게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내지는 '무엇을 보고 싶은가?’ 묻고 있는 것이다.

 

보니것은 고양이 요람 선택 기로에서 어느 입장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아마도 어떤 규칙이나 관점을 정하여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더없는 죄악이 아닐까 생각하는 듯하다. 이유는 소설의 커버 페이지에 나온 일명 <보코논서> 구절에 실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책의 어떤 내용도 진실이 아니다.

그대를 용감하고 친절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는 포마(무해한 거짓말) 따라 살지어다.

<보코논서> 15

 

관점에서 선언 성경에 등장하는 핵심, 사랑 다른 표현으로도 읽힌다. 다시말해 세속적인 사랑의 개념차원을 넘어 인간에 대한 애정, 배려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특정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타인에게 강요한다거나, 특정 집단/기득권 층에만 유리한 법의 제정은 없는 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교조적인 장치가 될 뿐이다. 차라리 타인을 배려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포마'가 오늘 나오 타인의 하루를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커트 보니것의 소설은 사이비 종교 보코논이라는 설정과 저자의 유머를 통해 숙성된 매우 기독교적 배경을 보여주는 소설이기며, 인간 관계의 핵심적인 비결을 알려주는 비전(秘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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