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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와 [달과 6펜스]가 만난 자리 | 기본 카테고리 2019-08-29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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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황태연 옮김 | 비홍출판사

제4부 정리66-정리73을 위주로 한 단상들

: 자유인과 노예에 관한 생각


스피노자는 《에티카》4부에서 감정이 갖는 힘, 내지는 감정의 역량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히 정리 66의 주석에서는 자유인과 노예를 언급한다. 스피노자가 자유인과 노예를 구분하는 기준은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가’ 아니면 ‘감정이나 의견에 의해서만 인도되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스피노자에게 자유인은 ‘자기 이외의 아무도 따르지 않고,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을, 그런 까닭에 가장 많이 욕구하는 것들 만을 행하’는 사람이다. 반면 노예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이 대부분 모르는 것들을’ 행한다. 제3부에 등장하는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노력’인 코나투스(conatus) 개념으로 말하면, 자유인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도록’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인’에 근접한 사람으로 생각해본 인물은 《달과 6펜스》의 찰스 스트릭랜드이다. 서머싯 몸은 후기 인상파 화가 고갱의 삶을 기반으로 이 소설을 썼다. 소설 속의 스트릭랜드는 앞길이 보장되고 편안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증권 중개인이었지만, 마흔을 넘긴 어느 날 부인과 두 아이들을 떠나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오로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였다. 사람들은 스트릭랜드를 도덕적인 이유로 비난했다. 자신의 본분을 잊고, 그것도 가차없이 가족의 인연을 끊은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나아가 그림에 탁월한 재능도 없던 사람이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그림을 그리는데 모든 것을 버릴 필요까지야 있었을까. 사람들은 스트릭랜드를 비난하고 조롱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게 조롱과 비난을 보냈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물론 스트릭랜드가 《에티카》에 제시된 ‘자유인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스트릭랜드가 냉철한 이성의 지도에 따라 결정했던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세인들이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스트릭랜드의 이기심은 분명히 ‘자기애에 기초한 이기심’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었다. 


     스트릭랜드는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인의 조건에 어느 정도 부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록 마흔이 될 때까지는 ‘6펜스’의 세계, 곧 세속과 물질의 세계, 관습과 타성적 욕망의 세계에서 자신에게 기대되어진 ‘역할’을 맡아,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 대긴 했으나, 그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스트릭랜드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자신의 열망을 억누르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며, 스피노자의 ‘노예’처럼 살아왔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서 화자인 이슈메일이 ‘이 세상에 노예 아닌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다’라고 말한 맥락과 유사하다.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예속된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스트릭랜드는 문명의 관습이 자신에게 부여한 책임을 수행하며 ‘체제 안의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천둥 벼락과 같은 계시’를 받았는지 모른다. 스트릭랜드는 마흔을 넘긴 나이에 잘 정돈되고 편안한 삶을 모두 벗어던지고 스스로 ‘체제 밖, 달의 세계’로 튕겨져 나간다. 관습의 울타리를 벗어난 그에게는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비난하는지는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스트릭랜드를 인도했던 그 무언가가 ‘이성’(제2종 인식)이 아니었다면, ‘직관의 인식’(제3종 인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 속에서 일관되게 감정이 거세되어 보이는 인물, 스트릭랜드가 어떤 감정이나 의견에 인도된다고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트릭랜드는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인의 조건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인물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자기 이외의 아무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그림 그리기)을, 그러므로 가장 많이 욕구하는 것 만을 행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편 스피노자는 자유인의 ‘능동적인 정서’로서 ‘인식(understanding)하는 한에서 정신에 관계하는 감정에서 생기는 활동’인 ‘정신의 힘’을 제시한다. 이 정신의 힘에는 용기(tenacity, 정신의 강인함)와 아량(nobility, 고귀함에서 나오는 친절, 배려)이 있다[제3부 정리 59의 주석 참조]. 스피노자에 따르면, ‘용기’는 이성의 지령에 따라 자신의 존재(being)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욕망이다. 그리고 ‘아량’은 이성의 지령에 따라 타인을 돕고 이들과 친교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욕망으로 정리하고 있다. 스트릭랜드는 분명 스피노자의 용기로 ‘6펜스’의 세계를 벗어나 자신이 유일하게 원하고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그림 그리기’를 위해 ‘달의 세계’로 자신을 던져넣는다. 다만 스트릭랜드가 스피노자의 ‘완전한 자유인’이 되기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들과 친교를 맺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일 것이다. 여기에 이야기의 비극성이 위치한다. 그는 인습과 구속의 세계를 벗어나지만 타히티의 완벽한 고독 속에서 문둥병에 걸려 죽어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해간다. 


     정리해보면 스트릭랜드는 스피노자의 자유인에 불완전하지만 상당히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제4부 정리 73에서 언급된 내용("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는 고독 속에서 보다는 공동의 결정에 따라서 생활하는 국가 내에서 더욱 자유롭다.")에는 정확히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티카》의 마지막 문장("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드물다.")이 전하듯 스피노자의 자유인이 되기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소설에 구현된 찰스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코나투스에 따라 살았던 인물이라고 판단한다. 그는 비록 고독과 문둥병 속에서 죽었지만, 고독과 죽음은 자유인인 그에게 무의미했다. 스트릭랜드는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고 자신을 구원했던 사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에티카

스피노자 저/황태연 역
비홍 | 2014년 03월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저/송무 역
민음사 | 200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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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의 과학] 하나의 세포가 소우주로 됨을 연구하다 | 기본 카테고리 2019-08-28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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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탄생의 과학

최영은 저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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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의 과학

최영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하나의 세포가 수백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온전한 개체로 된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아마 바쁜 생활에 쫓겨 이런 주제들을 잠시 생각해볼 여지도 없었을 것이다. 익숙한 하면서도 사실 모르고 있는 이런 분야를 연구하는 학문이 발생학이다.  발생학과 재생생물학을 전공한 저자가 국내 과학잡지에 2 동안 연재한 글을 모은 탄생의 과학 이렇게 탄생했고, 나와 만나게 되었다. 상아탑에서 연구를 하는 저자가 자신의 연구를 대중과 나누기 위해 쉽게 말을 고르고, 핵심을 전달하는 일은 쉬운일은 아니다. 하지만 매우 가치있는 일임은 분명하다. 특히 발생학이라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과학분야를 일반 독자들에게 우리의 글로 전달하려는 시도는 드물기 때문에 그만큼 책에 주목하게 된다.

 

탄생의 과학 발생학의 관심 영역 전반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한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과정에서부터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에 대해 개괄적이면서 때론 구체적인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책을 읽으면서 수정란이 분열과 분화를 거듭하며 개체로 변화하는 과정 대부분이 산모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을 깨닫게된다. 과정의 중요성을 더욱 느끼게 된다. 저자는 수정과 관련된 현상을 이해하는 과정에도 남성중심적인 시각, 예를 들면 수정 과정에 정자들의 경쟁과 능동성만 언급되어온 편견을 지적하고 있다. 난자도 치열한 경쟁을 거치며, 수동적으로 정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예를 들면, 나팔관 내의 온도 차와 액체의 흐름을 만들어 정자의 길을 밝히며, 난자가 화학 신호를 내보내 정자의 방향을 유도한다. 저자는 양자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과학의 목표는 점진적으로 편견을 없애는 ”) 인용하기도하며, ‘수정이라는 생명 현상에 관한 일반의 편견을 바로잡고자 한다.   

 


우리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줄기세포

 

책에서 저자가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는 부분 하나가 줄기세포 관련한 부분이다.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줄기세포 논문 조작 사건’, 그리고 전직 대통령이 미용을 목적으로 불법 줄기세포 시술에 대한 의혹으로 대중에게 익숙해진 용어에 대해 저자의 지식과 경험을 할애하고 있다. 여기서 줄기세포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가 유래된 세포 의미한다고 한다. 수정란은 분열하고 분화하면서, 다양한 세포가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발달잠재력 따라 여러 등급의 세포들을 만들어낸다는 점이 핵심적인 개념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줄기세포들의 발달잠재력은 세포의 분화가 진행됨에 따라 점차 낮아진다. 다시 말해 분화의 후기 단계에서는 같은 종류의 세포가 아닌 다른 세포로 분화될 가능성이 극히 줄어드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 세포(발달잠재력이 없는 세포)로부터  다시 만능 줄기세포 유도한 실험결과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의 유연성을, 자연에 존재하는 생명체를 다시 보게 해주는 사실이었다.

 

발생학자들이 줄기세포와 관련한 연구에 주목하는 데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유도 만능 줄기세포 연구가 자폐증과 같은 병의 원인을 분석하는데 도움을 있다. 뿐만 아니라 줄기 세포를 배양하여 임상 실험에 응용하면, 현재 많은 우려와 반대를 낳고 있는 동물실험 문제를 크게 줄일 있다고 한다. 동물 실험 과정은 특히 신약 개발에서 많은 우려와 반대를 낳고 있는데, 줄기세포 연구가 신약 개발 과정에서 동물실험을 크게 줄이거나, 대체할 가능성을 기대할 있다. 줄기 세포가 병의 치료에 활용될 있는 부분은 골수이식이 필요한 경우이다. 백혈병과 같은 희귀 질환의 치료를 위해서는 골수 이식을 통해 건강한 혈액성분을 만들어낼 있는 조혈 모세포를 이식해야한다고 한다. 지하철 광고 중에 조혈 모세포 기증 관한 안내를 적이 있는데, 이처럼 발생학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니 조혈 모세포 기증 어떤 의미를 갖는지 조금은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줄기세포 연구에는 장미빛 미래만 있을까? 2018 중국에서 배아 줄기세포를 이용한 세계 최초의 복제 원숭이가 탄생한 사례는 인간 복제도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물론 생물학계는 국제적인 연구지침으로서 인간 복제 배아를 14 이내로만 실험실에서 유지할 있다고 정해놓았다. 수정 17 부터 신경계가 발달하고, 따라서 배아가 고통을 느낄 있는 여지를 없애기 위함이다. 저자의 말대로 , 특히 생명의 시작을 어디서부터 것인가의 문제는 윤리적인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과학자 혹은 정책입안자들만 결정하는 것보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원활한 의견을 주고 받으며 결정할 필요가 있는 사안일 것이다. 과정에서 과학자들은 전문지식을 대중에게 소개하고 나누는 중요한 역할을 있다. 어떤 기술도 그렇지만, 줄기세포 연구도 인류에게 유익하게 사용될수도, 아니면 특정 집단의 이익과 이기심에만 봉사할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본다. 책에서 저자가 일반 독자들이 주의할만한 생명과학 연구의 문제점 혹은 우려사항을 담은 부분도 언급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발생학 분야 전반을 일반 독자에게 쉽게 전달하려는 노력에 균형감각을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발생학, 인식의 확장으로서의 역할

 

발생학연구를 통해 세포의 놀라운 잠재성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러한 지식은 우리의 편견을 바로잡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학문적인 연구는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여기에는 연구수행자의 인식의 한계, 편견이 개입될 수도 있다. 책의 처음에 언급된 수정란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저자는 수동적인 난자, 무기력한 난자 편견을 지적해주었다. 난자는 101일이 넘는 치열한 경쟁을 거치며, 수정을 유도하기 위해 나름 화학 신호를 열심히 내보낸다는 등을 알게 되었다. 분명히 남성 위주의 현상 해석은 과학적인 사실을 계속해서 알아내고, 끊임없이 나누는 과정을 통해 편견을 바로잡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번 책에서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저자가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 흥미로웠다. 저자에 따르면 배아 발달과정 초기에 인간은 남녀 생식기 어느 쪽으로도 발달할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인간에게는 모두 남성 여성 결정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이었다. 특히 SRY유전자라고 하는 유전자가 성별을 결정하게 되는데, 세포가 SRY유전자를 읽게되면, 남성 결정유전자들이 차례로 활성화되고, 반대로 여성 결정 유전자들은 발현이 억제된다고 한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 몸이 각자의 결정된 성을 유지하기 위해 평생동안 세포들이 노력한다는 점이다. 실험을 통해, 성결정 유전자를 제거하니, 암컷의 난소 세포가 고환으로 변했다는 연구결과는, 점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백과사전적인 책에는 남자로 살다가 어느 시기에 여성화되어버린 사람의 사례를 적이 잇는데, 이것이 마법이나 신의 저주가 아니라 실제로 드물지만 가능하다는 점을 이해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식을 통해 성소수자들의 생물학적인 특징을 이해해볼 있지 않을까.

 

플라톤의 향연에는인간의 가지 형태의 원형들(-, -, -) 등장한다. 원형 인간이 신들의 노여움 때문에 둘로 나뉘어 지금의 남자와 여자로 되었다는 이야기말이다. 그런데 생물학을 이해하면 신화적이고 은유적인 이야기가 단순히 상상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해본다. 저자는 우리 인간은 남녀 모두의 잠재성이 있다는 , 우리의 몸이 결정된 성을 유지하도록 평생 노력한다는 , 그리고 안의 다른 성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그럼 우리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물을 , 이런 생물학적인 지식도 철학적 성찰에 분명히 영향을 있다. 우리 인간은 가지 성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리고 수십 억의 인간이 각자 동일한 성의 잠재성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므로 그만큼 다양한 성적 특성을 지닌 사람들이 분포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상 비정상 기준을 과연 정할 있을까? 문제는 생명을 어느 단계에서부터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처럼 정답이 없다. 그런데 가지 확실한 점은 100% 정상 남자이거나, 100% 정상 여자라는 개념은 환상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정상 남자 정상 여자사이에 무수히 많은 다양한 양상의 성을 지닌 사람들이 존재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남성성과 여성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며, 어느 쪽이 좀더 우세한지에 따라 수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말이다. 따라서 성의 문제에 있어서 정상 비정상 문제는 종교의 문제도, 정책입안자의 문제도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정상 비정상이라는 환상은 생물학 지식을 통해 부조리함을 알아차릴 있을 것이다. 저자가 우리의 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포들이 평생 노력한다는 위의 연구는 성의 정의, 성의 유동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79)라고 언급에서 나는 성소수자 것이 본인들의 의지나 도덕적 타락 등의 문제가 아니며, 생명체의 다양성 메커니즘으로 이해할 있다고 생각한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아도 이런 다양한 성소수자 모습들은 생명체가 다양성을 위해 마련한 기작의 한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부분에 대한 저자의 언급이 있었다면하는 아쉬움은 있었으나, 기고문의 성격상 제약은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생각하며

 

책을 읽으며 안에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생물학적인 사실은 흥미로웠다. 그리고 지금 순간에도 몸의 세포들은 유전자의 정보에 따라 성의 발현 특징을 유지하기 위해 쉼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나아가 언제는 몸에 어떤 이상으로 인해 성결정 유전자에 변형이 발생하면, 내가 여성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철학적인 시각에서 인간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과정에도 분명히 생물학 연구의 결과를 고려해야할 같다. 플라톤과 같은 고대의 철학자들은 지금과 같은 생물학 지식이  없었을지라도 상당히 예민하고 명민한 관찰자였음이 분명하다. 은유적이나마 인간의 특징을 파악하고 분류하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발생학을 비롯한 생물학의 연구를 통해 우리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하게 되면 인간이 인간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을 있지 않을까? 수많은 편견이 영향력있는 지식인들에 의해 형성되고 사회에 영향을 미쳐왔음을 역사기록에서 흔히 확인할 있다. 그러므로 편견을 바로잡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력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도 발생학은 사람들의 편견을 바로잡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있으며, 그래야한다고 믿는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하나의 세포에서 수백 개의 세포로 구성된 온전한 개체로 변화되어가는 현상은 우리 몸이 하나의 소우주라는 표현이 결코 진부한 것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사람의 세포 내에 있는 2만여 개의 유전자들이 만들어내는 소우주인 우리는 모두 경이로운 존재인 것이다. 유전자에 기록된 정보에 따라 하나의 세포가 수많은 세포로 되면서 다양한 기능이 분화하고 복잡한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배아의 분화과정에서 초기 대칭성이 어느 순간 깨어지고, 몸의 좌우 비대칭이 형성되는 기작은 상당히 신기하고 놀라운 이야기였다. 특히 발생학 분야의 연구를 통해 인간의 발생 과정은 다른 동물들의 발생 과정과 크게 다를바 없으며 공통점을 지닌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그러면 인간이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는데 도움을 있지 않을가. 아울러 우리가 거대한 자연이라는 우주 속의 일부라는 점을 인식하는데 기여를 있다고 생각한다. 세포가 지닌 다양한 발달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생명체의 몸이 지금 모습대로 이루어진 , 그리고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은 생명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있다고 본다. 탄생의 과학 발생학자의 지식을 일반 독자들과 나누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다만 인간 혹은 생명체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인 견해를 들을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았을 것같다. 이제 과학분야의 기본 지식 없이 인간에 대한 성찰을 한다는 것은 분명 한계가 존재하다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탄생의 과학 나와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일반 독자로서 더욱 주목하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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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체적으로 어떻게 살것인가를 묻는 책 [건강의 배신] | 기본 카테고리 2019-08-21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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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건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저/조영 역
부키 | 2019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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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의 배신》

(원제: Natural Causes)

바버라 애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 지음 | 조영 옮김 | [부키]

 

나의 지인 중에는 자신의 신체 컨디션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 있다. 그는 각종 측정기구를 통해 자신의 신체 상태를 체크하고 반드시 숫자로 표기된 결과가 건강한 영역 내에 포함되는지를 따진다. 물론 결과 여부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체중이 늘었는데, 약한 비만 기준을 넘었다는 이유로 음식을 줄여야 하며 맛있는 식사를 피하거나 조금 밖에 즐기지 못한다. 옆에서 보면 마치 스스로에게 벌을 준다거나 학대를 하는 사람 같아 보일 때가 있다. 그리고는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나의 몸을 관리하지 못하는나를 보고는 가르쳐주려 한다. 오늘 만나게 바버라 애런라이크의 신간 건강의 배신에서는 바로 이렇게 지나친 건강 염려증의 허상을 파헤치기도 한다. 책은 기본적으로 건강을 지나치게 염려하는 현대인들이 어떻게 나올 있었는지, 의료화된 우리의 건강에 대한 관점을 검토하고,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할까를 되돌아볼 있는 기회를 준다.

 

책의 저자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노동의 배신 시작으로 하여 여러 종류의 배신시리즈를 출간한바 있다. 그녀는 번째 책에서 현대 자본주의 영향력 아래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마주하는 문제점들을 파헤치고 조사했다. 나도 저자의 배신시리즈를 익히 들어서 다른 도서들을 조만간 읽으려고 하던 차에 건강의 배신 만나게 되었다. 내가 저자의 책들에 주목하게 이유는 그녀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 미국사회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건강을 둘러싼 의료 현실은 미국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이미 우리 사회의 모습을 책에서 많이 발견할 있다.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일부 지역이나 국가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서도 발견할 있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에 더욱 주목해볼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이번에 출간된 책은 사상가 이반 일리치의 저작들(병원이 병을 만든다 전문가들의 사회 같은 저작들) 떠올리게 해주었다. 나는 이반 일리치의 저작을 인상깊게 읽었던 것을 기억한다. 건강의 배신에서는 크게 가지 점에 주목해보게 되었다. 하나는 자본주의라는 맥락에서 현대의 의료문화가 어떻게 진행되어가고 있는가하는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건강의 개념이란 무엇이고, 우리의 삶에 어떻게 귀결될 있는지에 관한 점이다. 사실 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주제다. 하지만 나는 항목으로 나누어 생각해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의료화된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책에서 의료서비스의 소비자들이 어떤 의료 환경에 놓여있는지를 다각도로 고찰한다. 책을 읽다보면 현대인이 의지하는 의료문화가 자본주의체제라는 맥락과 분리하여 생각할 없음을 깨닫게 된다. 현대의 의료 환경은 의학 전반 분야의 발달과 함께 거대한 의료 산업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 사회의 의료 문화에서도 과잉 진단, 과잉 진료가 화제에 오르고 있다. 환자들 혹은 내담자들이 불필요한 검진 검사를 받는 이유는 의사들이 그렇게 하라고 권하기 때문이다.

 

검사와 검진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의 원인 하나는 바로 이윤이다. (…) 영리를 추구하는 민영 의료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29)

 

고가의 장비를 빚을 내어 개원하는 개인 클리닉의 경우, 의료인들은 이윤 추구라는 현실에 더욱 내몰리게 된다. 책에 소개된 의료 산업의 이윤에 대한 집착 혹은 광기를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가 있다. 어느 의학 세미나에서 ‘100 여성이 생애 최초로 유방 조영 검사를 마쳤다 보고된 청중들이 엄청난 환호를 터뜨렸다는 이야기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노인은 검사를 받으면 안되는가를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문제의 본질은 자체로 발병의 위험 요인 되는 유방 조영 검사를 과잉 진단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는 , 그리고 이를 광고한 아니라, 수많은 의사들, 의료관계자들이 보여준 반응 때문이다.

 

저자는 건강에 대한 정보 제공의 명목으로 건강에 대한 우려를 하는 이들에게, 의료 엘리트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를 이용하여, 건강한 이들로부터 돈을 버는 시스템이 형성된 점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모든 의사가 동의하는 것은 아닐 것이나, 관찰되는 양상은 의사와 병원, 제약회사가 연관되어 있다. 의료 소비자가 충분히 많은 검사와 검진을 받게 하면, 의사들은 추가 검진을 유도하기도 한다. 저자는 검사를 권하는 의사가 검진 영상 장비에 경제적 이해관계가 있을 과잉검사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의례화된 건강 검진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의례라고 표현한 것은 개별 환자의 의료행위가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느 공동체, 사회에서 의례는 당대의 사회문화적 목적에 기여하고 있으며, 목적에 부합하고 있다는 의미가 것이다. 나는 건강 검진이 전국민의 건강을 확인하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보장제도로서의 장치가 아닌가라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오히려 서구 의학의 의례화된 검진이 원시 부족의 치유 의례와 유사성이 더욱 크다고 본다. 구성원들에게 확신과 가르침을 주거나 단결을 강화하던 원시 부족의 의례와 비슷하게, 의례화된 검진은 건강 염려에 중독된사람들에게 환자의 권익 보호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몸이 보살핌을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저자의 경우, 의료 대상자 본인들의 주체적인 참여와 함께 실질적인 효과와 건강의 증진을 가져오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무력감과 패배감을 주고 있다고 보는 같다.

 

예컨대 일반적인 치과진료를 받던 저자가 치과의사로부터 수면 무호흡증으로 자다가 죽을 수도 있으니자신이 추천하는 의료기기를 구매하면 안전하게 수면을 취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분노를 떠올려보면 더욱 수긍이 간다. 나아가 여성의 경우 적어도 사춘기부터 폐경기에 이르기까지 의료 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상황은 저자에게 더욱 무력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이에 저자는 의례화된 검진에서 의사의 지배적 위치와 환자로서의 복종적 관계에 주목한다. 문제는 남성 의사에 의한 여성 검진 대상자에 허용되는 프라이버시 침해 상황에서 더욱 불거진다. 사회가 용인하는 의사의 권위에 여성 검진 대상자는 자신의 몸에 대한 프라이버시 접근 권한을 무기력하게 양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여성 환자 혹은 검진 대상자의 생명을 구하거나 질병의 위험을 줄이지 못하고 있는상황에서 말이다. 여기에 연례 건강검진에 적용되는 신체의 부위가 개별 의사들과 해당 검진에 대한 비용 부담에 동의하는 보험회사 기타 기관들의 이해관계가 더해진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의례화된 정기 건강검진의 무용론을 이렇게 지적하며 반문한다.

 

환자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관심과 염려의 표현이라면, 의료행위가 연구실과 실험실에서 양성되어 고도로 자본집약적인 의료 기관에서 일하는 의사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일까?”(51)

 

한편 저자는 연간3 달러의 산업으로 성장해버린 미국 헬스 케어 시스템 산업의 본질은 우리 몸에 대한 통제를 제안하고 있다는 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산업화된 시스템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미국적 자기계발 운동의 맥락과 불교 신비주의적인 종교의 영향이 결합되어 우리의 마음 자본의 통제아래 놓이게 되었다. 나아가 현대인들이 스스로 자기 통제라는 유행에 기꺼이 참여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해보아야 것이다. 우리가 건강 혹은 건강한 상태라고 믿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에 보다 가까워지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내몰고 있는 형국이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몰두하며,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통제한다는 미명하에, 피트니스가 자기계발과 성장의 수단으로 확산된 것처럼 말이다. 고용상태가 불안한 직장에서 소진된 현대인들은 퇴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피트니스 센터에서 다른 노동에 내몰리게 된다. 이런 맥락에는 부지런함이나 자신의 몸을 돌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도덕적인 판단과 도덕적 의무의 문화가 개입한다. 그리고 과정에는 어김없이 건강보험의 존재 빠지지 않는다. 대목에선 한병철 교수가 피로사회에서 피력했던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소진되고, 소진됨에 기꺼이 참여하는 현대인들의 모습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것이다. 그러므로 상황을 다시 단순하게 정리하면 저자는 책에서 현대인은 누구나 자본화된 의료 산업의 영향력과 의사들의 지배아래 우리의 몸과 마음이 통제받게 되었음 다각도로 검토하여 보여주고 있다.       

 

 

 

건강 패러다임에 대하여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지인의 사례는 줄곧 내게 건강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한다. 의사가 아닌 평범한 직장인인 지인에게 건강이란 몸에서 측정한 수치 정상범위 내에 있는 것이다. 이건 무슨의미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생각거리들이 존재한다. 물론 측정된 수치가 절대로 믿을만하다는 가정에 근거한다. 하지만 정확성은 제쳐두고라도 매순간 변하고 유동하는 신체상태를 고착화된 수치로 나타내는 것은 참고의 기준은 지라도 지나친 신뢰를 갖는 것에도 나는 의문을 갖는다. 한편 우리가 정상혹은 건강 상태로 여겨지는 어떤 기준이라는 것도 나라마다, 문화마다 다르다. 게다가 우리는 기준을 정함에 있어 제약회사나 자본의 이해관계가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본 적이 있을까? 수많은 개별 인간의 편차를 두고 정상과 비정상혹은 건강과 비건강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이 과연 충분한가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가령 건강과 비건강의 경계 기준 언저리에 있던 어떤 사람이 어느 측정한 결과가 비건강의 영역으로 나왔고, 그리하여 평생 약을 먹으라고 권고를 받거나 호르몬 주사를 평생 맞아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볼 있다. 이건 분명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장비로 동일 항목을 측정해보니 건강한 영역에 속했다고 하면, 과연 누구를 믿어야 것인가. 혼자 결정하기란 쉽지 않은 문제다. 의료계가 정한 어떤 기준 분명히 건강과 비건강 대한 주의를 주고 환자나 해당자가 결과에 대처할 여지를 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건강 패러다임으로는 일시적인신체의 일탈을 용납하지 않는다. 대개 우리는 이런 일탈의 상태에서 벗어나거나 문제를 제거하는데 모든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다. 그리고 현대 서구 의학과 약리학의 입장은 이러한 관점에 입각한다.

 

지인의 경우, 이런 건강 개념에 따르면 몸을 상하게 여지도 있을 것이다. 당장 두통이 있고 감기까지 겹친 경우, 바로 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아오거나, 자가진단하는 경우, 감기약과 두통약을 함께 먹을 있다. 두통과 감기라는 비건강 요인이 있으며, 문제(두통과 감기) 제거가 건강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에 따라 종류의 약은 함께 복용하면 혹은 다른 신체 부위에 악영향을 있다고 설명서에 나온다. 흔히 우리는 이런 점을 간과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 나는 문제가 보다 분명하지 않는 몸의 회복력에 여지를 주는 편이다. 말하자면 건강에 대한 개념은 문제가 없는 몸의 상태보다 문제가 있을 때에도 이를 극복하고 회복하는 능력을 포함한 상태 주안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나는 몸의 상태와 감각에 보다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물론 약을 거부하거나 진료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료를 가기 전까지의 몸에 대한 판단과정은 저자의 관점과 유사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저자는 의학이 과학과 손잡음으로써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의료 사업의 독점권을 획득했다고 언급한다. 나아가 의학이 실험 과학으로 여겨지면서 의료 행위 자체가 샘플 등의 데이터를 필요로하는 채취산업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의료 검진에서 혈액, 소변, 혹은 조직 채취, X-Ray CT스캔 장비의 영상 자료 다양한 장비와 기구를 사용한 후의 증거, 신체에 대한 수치가 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저자의 입장은 분명히 과학적 의료 개념 공격하고자 함이 아니다. 단지 객관적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신체 데이터의 권위가 너무 확고해지거나 비대해짐을 경고한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가 말하는 자신의 병력이나 보다 자세한 증상에 대한 정보는 실증적 데이터보다 중요도가 떨어지게 되었다. 미국에서 에볼라 바이러스로 처음 사망한 사례가 바로 이러한 상황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리고 데이터에 대한 신뢰의 형성에는 어김없이 건강 보험 산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보험회사의 경우, 확고한 증거에 기반하여 보장할 있는 치료 범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보험회사의 입장에서 치료 범위의 문제는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으로서의 의학에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맥락과도 맞닿아 있음을 상기하며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다시 건강 문제로 돌아가보자. 건강에 대한 나의 관점은 한편으로는 지식의 부족으로 인하여 온전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건강해지기 위한 책임을 개인에게만 지우고, 이에 더하여 건강을 유지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비난까지 곁들여지게 정황에는 민영화된 의료환경의 영향을 무시할 없다. 여기에 미국이라는 문화적 맥락을 무시할 없을 것이다. 문화적 맥락을 결정짓는 미국적 요소에는 자본주의와 손을 잡은 프로테스탄트의 문화(근면한 자들의 자기계발 문화) 신비주의적 종교의 요소(뉴에이지 문화, 신비주의적 자기계발 문화) 해당된다. 특히 60-70년대 반문화주의의 영향과 어우러진 신비주의적인 영향으로 등장한 전체론의 관점은 내가 우리의 신체를 생각할 신뢰하고 주목하던 관점이었다. 전일적(holistic) 관점이라고도 하는 전체론의 관점은 몸과 마음이 이어져 있으며, 심신이라는 실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몸과 마음을 독립적인 개체로 보았던 심신이원론의 데카르트적 관점은 일찌감치 나의 관심사는 아니었는데, 아마도 신체가 기계같이 느껴지도록 했던 관점이기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같다. 데카르트적 관점에서 건강 문제를 어떻게 있을까. 아마도 서로 독립적인 신체와 마음의 개별적인 건강 개념이 필요할 같다. 데카르트적 관점에서 나아가면, 환원주의적 시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현대 생물학이 20세기 중반에 DNA 구조 역할에 대한 발견으로 극단적인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지지를 받았다. 반면 전체론적 시각은 분자 수준의 기능을 넘어, 신체의 부분의 협력과 조화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70년대 이후 많은 지지를 받아왔다.

 

이번 독서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우리의 , 건강에 대한 기존의 관점(환원주의 전체주의 관점) 불완전함을 보여준다는 사례였다. 바로 백혈구의 일종인 체내 대식세포의 이중적인 역할과 세포들의 개별적인 자율성에 대한 발견 사실 때문이었다. 대식세포는 신체의 외부에서 침입하는 세균 등을 잡아먹거나 노화된 세포를 먹어 청소하는 좋은세포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대식세포가 암세포와 결탁하여 암세포의 성장과 전이를 돕는다는 결과였다. 암환자들은 면역력을 강화해야 암을 극복할 있다정도로만 알고 있던 나의 지식 수준으로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대식세포가 심근경색이나 뇌졸증은 물론이고, 관절염과 당뇨병에 긴밀히 관여하며, 심지어 치매와 우울증, ADHD, 노화와 여드름까지도 관여한다는 증거가 나오고 있다고 저자는 전한다. 뿐만 아니라 대식세포는 상당한 자율성을 갖고 독자적인 활동을 하며 단순히 타자(침입 세균, 혹은 노화된 세포) 먹어치워 우리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주는 영웅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대식세포는 무엇보다 타자 구별하여 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유기체를 파괴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 주목해봐야 한다. 대식세포가 공격할 있음을 인정해야한다는 것이다.

 

바버라 애런라이크가 놀라면서 지적하고 있는 상황의 함의는 무엇일까. 의학계에서는 신체의 면역체계라는 관점에서 대식세포가 신체를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해왔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대식세포가 때로는 오히려 우리의 자체를 공격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개별적인 자율성을 갖는 대식세포는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 달리 유기체 전체에 반하여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할 있는존재라는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좀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저자는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토머스 홉스의 자연상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가까운 상태로 묘사하고 있다. 세포들의 집합체에는 이들을 통제할 왕이 없다. 따라서 우리 몸은 엄청나게 다양한 세포들의 공동체이며, 면역체계는 비유적인 공생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공생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구성 요소들 사이의 갈등과 동맹을 포함하는 전장이기도 하다는 뜻이된다. 저자는 대식세포가 보여주는 배신행위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몸의 세포들을 연결하는 모든 화학적, 전기적 커뮤니케이션에도 불구하고 다툼과 혼선이 발생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 안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조화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갈등까지 모두 포괄하는 패러다임이다.”(179)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것인가?

 

첨단 과학의 도움과 개인의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명분으로 구축된 현대의 여러 제도적 측면은 우리의 건강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에 온전한 답을 주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저자가 암시하고 있듯이, 여기저기에 우리의 건강에 대한 배신 요소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주위의 것들에 대해 아무런 의심없이 그저 수용하기만 해왔던 것은 아닐까 자문해본다. 건강의 배신 자본의 영향으로 구축된 현대의 의료 산업의 현주소를 재검토해보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준다. 우리는 얼마나 의료화된 영향을 받고 있는지,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하는 건강이란 개념에 대해서도 말이다.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책의 서론에서 독자에게 전하는 본인의 바램 줄을 이렇게 적고 있다.

 

    책이 몸과 마음을 향한 프로젝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책은 의료 산업이나 우리의 건강 프로젝트가 어떠해야 하는지 답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반면 우리가 현재 어디에 서있으며, 주체적으로 우리 삶의 결정권을 어떻게 획득할 있는지에 대해 자문해보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로서 내게 주어진 과제는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것인가 고민하고, 판단하는 일이 것이다. 저자는 분명히 의료의 혜택을 거부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의료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혜택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여기에 근거하여 살아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물론 저자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다음과 같이 슬쩍 내비치고 있기도 하다.

 

나는 예방 의료를 거부한 데서 걸음 나아가고자 한다. ‘의료화된 죽음이라는 고문에 반대할 아니라, ‘의료화된 받아들이는 것도 거부한다.  (…) 죽기에 충분한 나이가 됐다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성취이며, 그것이 가져다 주는 자유는 축하할 가치가 있다.”(32)

   

나는 부분을 바바라의 건강 선언으로 이름 붙이며 마무리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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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2230자

김인국 저
철수와영희 | 2019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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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0

김인국 칼럼집 | [철수와영희]

 

하루라도 아무런 사건없이 평온한 날이 있을까. 오죽하면 천주교 신부가 글을 통해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을 비판하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230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일원인 김인국 신부가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국내 일간지에 기고한 서른세 편의 칼럼을 모은 책이다. 날카로운 비판보다 원색적인 비방과 공격이 난무하는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을 고려해볼 , 김인국 신부의 칼럼에 주목하게 된다. ‘2230 저자가 기고하는 칼럼에 대한 분량제한인 듯하다. 저자는 사회의 크나큰 이슈들에 대한 생각을 한정된 분량의 지면에 풀어 놓는다. 그의 목소리는 사회의 일반 구성원이자 시민의 입장에서 나오고 있다. 때로는 목소리를 높여 준엄하게 권력을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어두운 현실에서 희망을 전하고자 한다.

 

나는 그리 길지 않았던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요지경 세상을 체험했다. 신문에서만 보던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을 가까운 거리에서 있었다. 아마 오랜 시간을 사회 속에서 지낸 사람들은 사회의 부조리한 면들이 이미 익숙해지고 무덤덤해졌을지 모르겠다. 백남기 농민을 전문 시위꾼이라 욕하던 회사의 임원도 있었고, ‘우리 나라가 일제 강점기 해방이 안되었으면 지금 살았을 이란 말을 하여 나를 놀라게 했던 거래처 임원을 만나기도 했다. 어느 중소기업 업체 사장은 요새 젊은이들 중에 빨갱이들이 너무 많다라며, 자신의 아파트 매매가격이 15 이하로 떨어졌다며 정부를 욕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때론 기업의 하청업체의 입장에서, 때로는 다른 외주업체에 일을 맡기는 작은 회사의 회사원으로서, 좋은 환경에서 전문직으로 살았다면 접하기 힘든 값진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난 이런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과 합리적인 일처리를 보여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일이 아닌 다른 문제에 관해서 이들은 어떻게 이런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회사생활을 하며 만났던 이들을 단순히 비난하기만 하는 일은 매우 쉽다. 하지만 언젠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장 쉬운 비난하기를 일단 접어두고, 이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생각과 주장을 하게 되었고, 나는 어떻게 바라볼 있을지 판단이 선다면, 보다 긍정적인 변화를 미칠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는 이미 익숙해진 사실인 언론의 글은 무엇보다 결론이 이미 정해진 상황에서 글이 쓰이거나 다듬어진다는 사실 염두해둔다면, 언론의 보도에 대해서도 좀더 비판적인 시각으로 검토해보고 판단할 있을 것이다. 우선 나는 앞서 예를 사람들의 논리 대해 이를 비판하고 의견을 갖출만한 논리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다. 발견으로 나는 나에 좀더 알게 부분도 있다. 나라는 사람의 감정과 지적인 한계에 대해 깨닫게 되면 여기에서부터 출발할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2230 읽어나갈 , 사회의 부조리에 비판하는 사람이 필요한 이유를 보다 분명히 깨닫게 된다. 일본사회의 상황을 예를 들어보아도 중요성을 바로 있다. 재일조선인 서경식 교수는 아베 정권과 여기에 동조하는 일부 세력이 기획하고 휘두르는 망동에 그동안 일본 사회내에서 비판기능이 상당히 약해져버렸음을 지속적으로 지적해왔다. 특히 90년대 이후 진보세력으로 자처하는 리버럴 세력의 붕괴현상으로 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더욱 입지를 찾기 힘들어 졌다. 오늘날 아베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목소리를 내는 자체가 힘든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아베를 비판하는 공무원은 상당수 퇴출되었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서경식 교수에 따르면 모든 결과의 근본원인으로 일본의 식민주의 대한 철저한 반성과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 그리고 이들과의 화해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거짓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점점 거짓말을 하다가 이제는 걷잡을 없게 형국이다.

 

김인국 사제의 비판은 우리 사회의 민감한 부분을 곧바로 겨냥하고 있다. 그렇기에 저자는 머리글에서부터 어차피 고운 말씨, 고운 말씀은 것입니다. 그래도 언제나 땅을 사랑하시고 땅의 형편때문에 자주 끙끙 앓으시는 하느님의 애끓는 심정이 어느 한구석 글자에라도 묻어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고백한다. 그의 글은 비판적이면서도 마디 마디가 조심스럽기도 하다. 사랑을 전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떠올리기도 하며,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비판과 포용을 하는 모습도 읽게 된다. 우리의 삶이 부조리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그리고 나름대로 만족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만족도는 사회가 부조리하게 변해갈 , 열악한 사회의 상황에 적응해갈 뿐이다. 당연해보이는 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가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이유다. 그리고  2230 저자는 사회에 당연해보이는 일에 곧바로 목소리를 높여 의문을 던지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칼럼 하나에 담긴 저자의 모든 주장에 공감이 가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보다 다양한 생각과 비판적 검토가 독자들 내부에서 이루어질 있다면, 칼럼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2230 독자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한 글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사회의 해당 문제와 시간·공간적으로 멀어지기 시작할 , 우리의 기억을 되살리고, 생각하게 하는데 역할이 있을 같다. ‘세월호 사건 우리 사회에 크나큰 충격과 경종을 주게된 사건이다. 그러나 사건의 배후에는 보다 거대한 어른들의 부조리가 함께 도사리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저자는 이제는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 타박하는 이들에게 이를 계속 기억할 계기를 준다. 보다 근본적인 사회의 문제점들을 개선하고 바꾸기에 변화는 아직 느리기에, 김인국 사제가 사회에 던지는 경종은 소중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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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마라톤] 5장 - 천천히 읽기 | 기본 카테고리 2019-08-0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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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5] 아침식사(Breakfast)

 

[5장의 기본 줄거리]

물보라 여인숙에서 침대, 이불을 덮고 하루 밤을 지낸 이슈메일과 퀴퀘그는 여인숙의 술청으로 내려가 아침식사를 한다. 술청에는 간밤에 들어온 투숙객들로 가득 있었다. 아직 선원용 재킷을 입고 있던 사내들로서 입항한 포경선의 선원들이었다. 이슈메일은 식탁에서 이들과 퀴퀘그의 식사예절을 관찰한다.

 

 


 

5장의 배경은 물보라 여인숙의 아침식사가 준비된 술청이다. 이번 장도 매우 짧은 장이며 이슈메일이 본격적으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기 전의 풍경, 포경선원들의 모습, 퀴퀘그의 식사법 등에 관한 관찰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밤새 만원을 이루던 여인숙에서 주인장 코핀의 장난으로 침대, 이불을 덮고 자게 퀴퀘그와 이슈메일 사람은 아침 식사를 하러 술청으로 내려간다.

 

히죽거리는 주인에게 이슈메일은 원한을 품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슈메일의 독백이 흥미롭다.

 

실컷 웃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기 드물게 좋은 일이다. (…)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자신을 유쾌한 웃음거리로 제공한다면, 사람이 부끄러워서 꽁무니를 빼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고 남의 웃음거리가 되게 해주어라. 자신에 대해 실컷 웃을 거리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들어 있을 분명하다.

 

  부분은 스치듯 지나가는 부분이며 작품을 이야기할 어떤 역할을 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저자의 내면에 보관되어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불쑥 드러나는 저자의 이런 생각들을 발견하는 것이 흥미롭다. 이런 행동은 저자인 멜빌이 수긍하고 동의하는 행동양식일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도 이런 생각을 하곤 했기 때문에 잠시 멈춰가게 되는 부분이다.

 

나는 언젠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 우리가 유머라고 하는 것의 기본적인 정신이자 자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희화화 과정에서 시작한다 말이다. 자기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를 유쾌한 웃음거리로 대상화하고 거리두기 있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용기있는 사람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슈메일의 독백대로 스스로 타인에게 웃음거리가 되게 제공하면, 기꺼이 남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는 행위는 성경의 가르침과 닮아 있기도 하다. ‘누군가 나의 왼쪽 뺨을 때리면, 나의 오른쪽 뺨도 대주어라 같은 논리의 성경문구를 떠올리게 한다. 유머의 관점에서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있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한사람이며, 유머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아울러 도덕적인 관점에서도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스스로 자유로운사람이 있는 조건이기도 것이다. 소설의 전개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니겠지만, 멜빌이 생각하고 공감하는 바를 170년이 지난 독자가 공감할 있는 이런 부분은 천천히 읽을 발견할 있는 부분이 아닐까한다.

 

여인숙 주인이 식사들 !’라는 말에 술청의 투숙객들은 모두 아침을 먹기 시작한다. 이슈메일은 아침 식사가 이루어지는 식탁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흥미로운 관찰을 한다. 그런데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많은 경험을 쌓은' 이들의 태도가 성숙한 사교술이 아닌 깊은 침묵으로 일관된 아침 식사 풍경을 보고 희한한 광경이라고 말한다. 서양에서는 특히 같은 식탁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태도는 예의바르지 못한 사교술이라고 판단하는 같다. 귀항한 포경선원들로부터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를 들을 기대에 부푼 이슈메일에게 이런 깊은 침묵은 마뜩잖다. ‘처음 보는 고래를 수줍음도 없이 죽이는 노련한 포경선원들이 식탁에 앉아 목장의 양들처럼 서로 바라보기만 하며식사를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이슈메일은 이들을 수줍어하는 곰들! 겁쟁이 전사 같은 고래잡이들!이라고 생각한다.

 

퀴퀘그 역시 날카로운 작살을 식탁에 올려놓고 설익은 비프스테이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말없이 먹는 집중한다. 이슈메일은 고드름처럼 차가운 그의 예절을 높이 평가할 없다고까지 말한다. 물론 오지를 여행하는 과거의 탐험가들처럼 사교술을 터특하기에 어울리지 않은 환경에 있던 사람들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교술은 어디서나 얻을 있다고 평한다.

 

다시 보면 서양에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침묵으로 서로를 무시한 , 음식을 먹는 행위에만 몰두하는 일은 예의바르지 않은 행동이다. 다시 말하면 행위가 예의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배운 이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깊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아침식사 풍경은 오히려 이들 대부분이 지니고 있는 교양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나마 이슈메일은 카토와 피타고라스를 이야기하고, 성경에 익숙한 교양인이라고 있다. 그러므로 당시에 교양인이라면 으레 하게되는, 혹은 갖게되는 행동양식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면을 이슈메일에서도 발견할 있다. 식탁에서의 침묵행위를 예절바르지 못하다고 언급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같다.

 

이번 5장에서는 아침식사 풍경을 통해 포경선원들의 일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퀴퀘그의 세세한 행동양식을 보여주기에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사람이 포경선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기 전에 소설의 장면은 이들이 다니는 뒤를 밟아 퀴퀘그의 면모를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이슈메일이 퀴퀘그를 관찰하는 부분은 당분간 간간이 나오게 것이다.






모비 딕

허먼 멜빌 저/김석희 역/모리스 포미에 그림
작가정신 | 2010년 01월

 

모비 딕

허먼 멜빌 저/김석희 역
작가정신 | 2011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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