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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마라톤] 모비 딕 - 8장 천천히 읽기 | 기본 카테고리 2019-09-26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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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8] 설교단 (The Pulpit)

 

[8장의 기본 줄거리]

예배를 보러 고래잡이 예배당 들어온 이슈메일은 눈보라를 헤치고 들어온 목사의 행동을 관찰한다. 목사는 독특한 설교단으로 오르는 모습과 이후의 행동, 그리고 설교단 뒤에 걸린 커다란 그림을 관찰하며, 설교단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한다.  

 

 

소설의 화자인 이슈메일은 이번 8장에서 설교단의 보편적인 상징성 주목한다. 고래잡이 산업이 주를 이루는 이곳 뉴베드포드의 항구에 있는 고래잡이 예배당 있는 설교단은 우선 일반적인 계단이 없다. 대신 작은 배에서 배로 올라갈 사용하는 줄사다리를 달아 놓았다. 이제 우산도 마차도 이용하지 않고 눈보라를 뚫고 도착한 노인은 존경받은 교회의 매플 목사였다. 그는 젊은 시절, 작살잡이로도 일했던 사람이었으며, 일찍 성직에 몸을 담았다.    

 

이내 이슈메일의 시선은 설교단으로 향하는 목사를 따라간다. 줄사다리를 타고 높은 곳에 위치한 설교단을 오른 다음, 목사는 설교단 밖으로 걸쳐있는 줄사다리를 끌어 올리는 연극적 행위에 주목한다. 목사 스스로 작은 퀘벡 요새처럼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할 있을 것인가를 자문하는 것이다. 우선 이슈메일은 행위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행위는 바깥세상의 모든 세속적 인연과 관계로부터 정신적으로 잠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아닐까? 하느님의 충실한 종인 그에게 하느님 말씀의 고기와 포도주로 가득 설교단은 자급자족할 있는 요새, 성벽 안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이 있는 에렌브라이트슈타인인 것이다.

 

, 이슈메일이 생각해 설교단의 상징성은 8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설교단은 바로 세상의 선두이며, 세상을 이끌어 나가는 곳이라는 것이다. 다분히 미국적이라고 알려진, 혹은 미국을 만든 책으로 꼽히기도 하는 모비 정치와 종교가 헌법상 분리되어 있는 미국이 사실은 기독교를 믿는 백인들이 이끌어가는 곳이라는 미국의 본질을 이미 간파하고 있다고 간주해도 같다. 여기에서 나아가 매플 목사는 하느님의 종인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세상의 선봉에 자가 것이다. 이슈메일은 세상이 항해를 떠난 배이며, 배의 형상을 설교단은  세상이라는 뱃머리라고 하며 8장을 마무리 짓는다.

 


 

예배당의 그림과 다른 상징성

 

8장에서 흥미를 부분은 설교단보다도 이슈메일의 시선이 스치듯이 지나가며 발견하고 있는 커다란 그림이었다. 설교단 뒷벽에 걸려있다고 이야기하는 그림에 대한 묘사와7장에서 잠시 언급했던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그림 <노예선The Slave Ship> 묘사와 매우 흡사하여, 나는 멜빌이 8장에서 터너의 그림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주장해보고자 한다.

 

우선 터너의  <노예선 The Slave Ship> 그림(아래)을 먼저 보자.


(전체그림)


(오른쪽 아래 부분 확대 그림)


그림의 정확한 제목은 다음과 같다.

<Slavers Throwing overboard the Dead and Dying?Typhoon coming on > 이다.

 

제목을 거칠게 직역해보자면,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들을 밖으로 던지는 노예상인들 ? 다가오는 폭풍> 정도가 같다. 그림은 캔버스에 그린 유화로, 터너가 1840년에 처음 전시한 그림이라고 한다. 위키피디아와 서경식 교수의 나의 영국 인문 기행 따르면, 토마스 클락슨(Thomas Clarkson) 저서 《노예 무역의 역사와 폐지  The History and Abolition of the Slave Trade 읽고 영감을 받아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림이 7장에서 언급했던 종호학살사건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위키피디아는 추측이 맞음을 확인해주었다. ‘종호학살사건 1781년에 영국인 선주가 노예를 자신의 재화라고 생각하고, 죽거나 건강하지 못해 죽어가던 노예들을 수장시켜 잃어버린 재화 대한 보험금 청구를 위해 저질러진 학살사건이었다. 사건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60년이 지나서도 터너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음을 있다.

 

전체 그림(첫 번째)을 보면, 그림의 가운데에 노을과 함께 해가 저물고 있으며, 왼편에는 검은 폭풍우와 이곳으로 향하는 배가 보인다. 그리고 그림의 아래, 바다에는 물에 던져진 노예들의 손과 발이 보이는데, 여전히 쇠고랑이 채워져 있는 모습을 있다. 그림의 오른 아래 부분을 확대한 부분 그림이 아래( 번째) 그림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바다의 물고기들과 상어들, 그리고 새들은 물에 빠진 노예들에게 달려들거나 주위를 배회하는 모습이 보인다. 여기에는 물고기, 상어 떼에 잡아 먹히는 쇠고랑 노예들의 쇠고랑 채워진 수족이 거센 파도 속에서 모를 보이고 있다. 

 

대략 그림을 파악했으니, 이제 모비 8장에 등장하는 설교단 뒤의 그림 관해 이슈메일이 묘사하는 대목을 살펴보자.

 

파도가 검은 바위에 부딪혀 눈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해안 앞바다에서 무서운 폭풍우를 만난 호화로운 척이 묘사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찬 바람에 흩날리는 소나기와 굽이치는 먹구름 높은 하늘에는 태양이 작은 섬처럼 있고, 그곳에서 천사의 얼굴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빛나는 얼굴이 심하게 흔들리는 배의 갑판에 빛을 던져, 넬슨 제독이 빅토리 갑판에 박아 놓은 은판처럼, 부분만 또렷이 드러났다.

 

다시 묘사와 터너의 그림을 놓고 비교해 보면, 일치해 보이는 부분이 상당히 많아 보인다.  폭풍우를 만난 척이 검은 바위처럼 보이는 어두운 바다로 거친 파도를 힘겹게 헤치며 나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림의 가운데 보이는 태양이 개인적으로는 날개가 있는 천사의 형상으로 상상되어 보이기도 한다. 이슈메일은 죽음의 바다에 던져진 인간들의 처절한 모습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는다. 예배당의 의자에서 높은 곳에 위치한 설교단 뒤의 그림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대신 이슈메일은 끓어 넘치듯 분노하는 바다 멀리 척이 폭풍을 향해 나아가는 그림의 분위기를 읽어내는 것이다.  

 

다시 모비 7 읽기를 상기해보면, 1781년에 영국의 노예선 (Zong)에서 죽거나 죽어가는 아프리카 노예 132명을 수장시켜버린 종호학살사건 대해서 정리해두었다. 우선 멜빌은 현재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터너의 <노예선The Slave Ship> 그림 원본을 보스턴 미술관에서 보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보스턴 미술관은 1870년에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모비 딕》 집필하던 1850 시점에서 보스턴 미술관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말이 된다. 터너가 그림을 그리고 처음 전시한 연도는 1840년인데, 전시된 곳은 영국(런던에서 태어나 평생 런던에서 살았으므로 아마도 런던에서 전시가 되었을 것이다) 것이다. 작가정신 《모비 딕》버전에 기록된 허먼 멜빌의 행적을 따라가보면, 1839 20세의 혈기왕성하던 청년 멜빌은 영국 서부 해안의 도시 리버풀로 향하는 화물선에 급사로 승선했다고 나온다. 리버풀은 노동자들의 도시로 이곳에 도착한 멜빌은 대도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빅토리아조 사회의 명백한 불평등을 발견 한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직접 몸으로 부대끼며 세상을 배워나갔던 멜빌은 처음 영국의 공업도시 리버풀에 도착하고, 사회의 구조적인 양상을 목격하고 있다. 그러므로 터너가 자신이 그린 <노예선The Slave Ship> 영국에서 그림을 전시하던 즈음(1840) 멜빌이 영국을 처음 방문(1839-1840)했을 것으로 보이며, 당시 사회를 놀라게 했던, 혹은 논쟁적일 만한 그림에 대해 또는 화가 윌리엄 터너에 대해 멜빌이 들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물론 나의 추정일 뿐이다. 하지만 20세의 젊은 나이라고 해도, 리버풀에 처음 도착하여 리버풀이라는 도시에서 계급의 격차라는 문제를 알아볼 만큼의 예민함과 《모비 딕》3장에서도 짐작해볼 있듯이, 그림에 관심을 가졌던 멜빌이 터너의 작업에 대해 알았을 법한 감수성은 이미 갖추고 있다고 보인다.

 

다시 정리해보면, 1840년에 터너의 그림이 영국에서 전시되었을 , 멜빌이 그림의 원본을 직접 보았을 가망은 희박하다. 하지만 당시에도 그림을 모사하여 걸어두는 것이 흔한 유행이기도 했기에, 포경산업이 중심을 이루는 뉴베드포드의 예배당에 터너가 그린 그림, 폭풍우 속을 항해하는 배가 그려져 있는 (모사한) 그림이 설교단의 뒤에 걸려있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울러 영국의 공업도시 리버풀의 계급적 격차의 모습을 알아보는 감수성을 지녔던 20살의 멜빌이라면, 그리고 배를 타면서도 여가 시간을 온전히 책을 읽는데 할애하며 지식과 교양을 쌓아가던젊은 청년이라면, 수십년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종호학살사건 윌리엄 터너의 과감하고 논쟁적인 그림을 모르지 않았을 터이다. 아울러 노예제를 혐오했던 멜빌이  정치적으로 급진파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공명했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고 생각해본다.  

 

다시 작가 연보에 따르면, 이후 1840 즈음 고국으로 돌아온 멜빌은 서부에서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실패하고, 포경선 아쿠시넷호를 타게 되는데, 때의 경험이 바로 《모비 딕》 녹아들어가 훗날 수면으로 부상하게 된다.

 

 

터너의 노예선에 대한 외국 블로거의 해석

 

다시 터너의 노예선에 대해 궁금해하다가 터너의 <노예선> 그림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을 간단히 덧붙여두기로 한다.

 

[출처: http://www.the-art-minute.com/joseph-mallord-turner/ ]

 

글에 따르면, 블로거는 터너의 그림이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미라는 낭만주의 개념을 저버린 행위다라는 취지로 이야기한다. (참고: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미 대한 논의는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김동훈 옮김, [마티] 참고할 )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미 개념은 이미 모비 3 읽기 부분에서 이슈메일이 물보라 여인숙입구에 걸린 형체를 없고 불길해 보이는 그림을 보는 장면에서 잠시 언급했던 개념이다. 어쩌면 3장에서 여인숙에 걸려있던 그림도 역시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서 찾을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앞서 출처 부분에 소개한 블로거에 따르면, 숭고미 낭만주의의 개념에 범주화되어 있음을 있다. 그리고 개념은 자기 보존이라는 인간의 본능과 연관되어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숭고미 공포와 고통에 대한 생각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며 동시에 신과 자연의 권능(power) 보여주기에 우리를 압도하는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터너의 그림 <노예선> 보자.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폭풍우 속으로 들어가는 노예선 앞의 바다는 거센 파도가 일고 있다. 그림 자체는  종호학살사건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자세히 보지 않고는 세부 모습을 알기 어렵다. 대신 비극이 벌어지는 거센 바다의 격랑은 신의 분노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에드먼드 버크가 이야기한 숭고미 요소가 보인다. 하지만 터너는 숭고미의 낭만적 개념을 배반한다. 거칠게 일렁이는, 심지어 부글부글 끊어 오르는 듯한 바다의 표면은 죽은 노예의 시체와 바다에 던져진 병든 노예가 상어 떼의 습격으로 고통과 아우성, 피로 물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블로거는 강렬한 장면을 인륜을 저버린 인간에 대해 분노하고 못마땅해 하는 신의 분노를 포착하는 그림으로 이해한다. 인간을 압도하고, 심지어 두려움과 경외감을 느끼게 해주기도 하며, 신의 권능과 자연의 웅장함이 드러내는 숭고함’, ‘숭고미라는 개념은 인간의 탐욕과 인간성이 상실된 학살 행위로, 피로 물드는 바다의 그림을 통해 숭고함 얼룩지고 배반당하고 있는 것이다.       






[ 내용에 대한 무단 전재와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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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평단 모집]『중심 : 마음을 지키는 중국 그림의 힘』 | 새소식 2019-09-23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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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고실험 | 기본 카테고리 2019-09-23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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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드라이

닐 셔스터먼,재러드 셔스터먼 저/이민희 역
창비 | 2019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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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

셔스터먼/재러드 셔스터먼 지음 | 이민희 옮김 | [창비]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고실험

 

인간의 조상은 상당히 오랫동안 생존 유일한 목표였던 시기를 겪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타고 가던 배가 태평양의 가운데에서 조난을 당해 수십일 가까이 표류하다가 급기야는 죽은 동료들을 잡아먹은 실화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안데스 산맥에 불시착하여 생존했으나 조난 당해 속에 넘게 갖혀 지내며 옆에 죽어 있던 사람들을 잡아 먹고 생명을 유지하다 구조되었던 사람들에 관한 실화를 우리는 알고 있다. 법과 규칙이 준수되는 현대 문명 사회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우리는 생존에 위협을 받는 나약한 존재다. 《드라이》 저자인 셔스터먼과 재러드 셔스터먼 부자는 심지어 우리 문명 사회에서 생존 최우선과제가 되는 상황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다. 수도관 공사나 물탱크 청소 등으로 반나절이라도 단수를 경험해본 이들이라면 물의 공급이 예고도 없이 중단되는 상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있는지 실감나게 구성해 내었다.

 

물공급이 중단된 배경은 물이 부족한 지역인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에 공급되는 배수관에 흘러드는 물의 공급이 지역이기주의의 결과로 중단된 것이 발단이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물공급 문제가 해결이 기미가 보이질 않자 대형 마트의 물과 음료 코너가 동이나고, 급기야는 사람들과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심지어 단수 2일차에 이미 병원행 급수차에 있는 물을 탈취하려다 총을 맞고 사망하는 사람이 발생한다. 물이 당장 필요한 사람들 중에서 탈수로 사망하는 사건이 이미 단수 3일차가 되기 전에 발생한다. 우리가 공기오염과 미세먼지로 맑은 공기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기 전까지 공기에 대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얼리샤도 그랬다.

 

예전에는 물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도 못하고 신경도 썼다. 언제나 자리에 있었으니까.”(16)      

 

우리가 일상에서 향유하는 모든 필수 생활요소와 물품은 우리가 결핍의 상황과 마주하지 않는 대상의 편리함과 가치를 생각해볼 기회가 흔치않다. 물은 응당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현금은 으레 현금지급기와 에서 나오는 줄로만 알게되는 것이다. 단수 조치는 지역끼리의 이기주의의 결과였기에 분명한 인재였다. 저자의 상상을 따라가다보면 실로 생각하기도 싫은 불편함과 바로 마주하게 된다. 샤워는 커녕, 용변의 문제로 인한 위생상의 문제가 곧바로 사람들을 취약한 상황으로 몰고감을 있다. 와중에 물을 갖고 있는 가정에 대한 시기심과 생존본능으로 작은 마을에서조차 반목과 다툼이 일어날 있음을 충분히 예상해볼 있다. 상당히 현실감있는 문제다. 특히 우물물을 퍼서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물을 나누어 쓰던 부모님의 세대까지만 해도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개울에서, 산에서 물을 길어다가 나누어줄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거의 모든 수자원은 기업이 소유권을 주장하고 병에 물을 넣어 생수를 파는 세상이 되었다. 물과 지하수는 오염이 되었고, 기업들의 과도한 지하수 사용으로 지하수가 줄었다. 우리가 만약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혼돈의 상태가 것임은 충분히 상상해볼 있겠다.

 

소설은 주인공인 얼리샤 집안의 부모가 단수 조치 물을 구하러 나간 , 큰딸인 얼리샤와 남동생 개릿, 이웃집 소년 켈턴이 얼리샤의 부모와 물을 찾아 떠나는 일종의 로드무비와 같은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장면마다 새로운 사건과 위기가 다가오기도하고 가장 어린 개릿의 실수로 전체가 위기에 처하기도 하는 안타깝고 긴장감을 자아내는 플롯이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 재난이라는 거대한 상황에 휘말린 주인공들이 겪는 일종의 호러 소설이라는 맥락에서 본다면 셔스터먼 부자가 애초에 드라마나 영화제작을 염두에두고 구상한 소설인지도 모르겠다. 문명 속의 인간에게는 언제나 자리에 있는 하나인 결핍이란 사태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어둠을 어떤 양상으로 끌어내 보일 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있다. 책을 읽어나가며 그대로 물을 마시기 위해 이성을 잃은 워터좀비들이 보여주는 폭력성과 인간이 갖고 있는 어두운 면을 다채롭게 상상해볼 있을 것이다.  

 

 

해변에서 만난 소녀 재키가 물을 많이 보유하고 있던 켈턴 집안의 비극을 보며 (켈턴의 )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의 피뢰침이었다”(208)라고 혼잣말하고 있는 것처럼, 상황에서 물의 가치는 가격을 따지기 힘들 정도가 된다. 탈수로 고통받는 주인공들 역시 워터좀비가 되어간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도덕적으로 보이던 얼리샤에게도 생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생존이라는 경쟁에서 2등은 무의미하다. 오직 생존 아니면 죽음이 있을 . 급기야 탈수 증상이 심해져 기력을 잃은 동생 개릿을 보며 얼리샤에는 이제 도덕 무의미해진 단계에 이른다.

 

동생을 살리기 위해 누가 죽어야 한다면, 얼마든지 물을 빼앗고 죽게 내버려 둘테다. 헨리가 맞았다.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돼야 때도 있다. 지금 나는 괴물이다.”(406)

 

속에서 불길이 일행을 뒤에서 바짝 따라오는 와중에 정신을 잃어가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 노인에게 유일하게 남은 한잔을 빼앗아버리는 얼리샤의 모습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어두운 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자신의 혹은 가족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생존에 영향을 주거나 심지어 짓밟는 것이 정당한가, 혹은 윤리적인가하는 우선적인 문제와 마주하도록 한다.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있을 것인가? 우리는 심심치않게 괴물은 되지 말자라는 표현을 접하곤 하지만 물이든 식량이든 우리의 생존에 지장을 줄만한 상황 속에 놓이게 되었을 , 소설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과 같은 괴물 되지 않겠다고 확신할 있을까? 소설 드라이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을 인간이 어떤 행동을 있을 것인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보는 일종의 사고실험이라고도 있을 같다.

 

드라이 일주일 정도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단수 사태로 평범한 사람들이 인간성을 잃고 20만명의 생명이 사라져버린 재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직접적인 단수의 원인(지역 이기주의의 결과) 소설에 등장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을 파헤치고 있지는 않다. 애초에 이런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상존하는지를 고찰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의 방향은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과 윤리의 문제, 그리고 개개인의 투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영화나 드라마 제작을 염두에 두고 구상된 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단수 문제가 미국내 여러 사이의 정치적인 문제와 얽혀있으므로 보다 분쟁의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만약 문제가 국가 간의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있을까. 사고실험만으로도 보다 국가 전쟁이 발생할 있다고 상상할 있다. 실제로 환경운동가 반다나 시바의 저서 물전쟁에서 저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 어떤 점에서는 물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경우 관심의 대상은 요르단강이다. 요르단강은 이스라엘,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과 요르단강의 서안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는 강이다. 요르단강은 이스라엘 물수요의 60% 공급하고 있기에 수자원을 확보하는 문제는 인종분쟁과 종교분쟁을 떠나 전국민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에는 언제나 물의 결핍에 대한 우려 내지는 두려움이 함께하고 있다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나일강은 어떨까. 나일강은 아프리카 북부지역의 10 국가(에티오피아, 이집트, 수단,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 부룬디, 르완다, 콩고공화국, 에리트레아 ) 지나는 강이다. 반나나 시바에 의하면, 지역은 이집트의 아스완댐 건설로 10만명의 수단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물분쟁을 가속화했다. 소설드라이에서는 미국 사이의 정치적 이기주의로 인하여 일주일간의 단수에 머물렀으나, 현실에서 나일강과 같이 다른 민족과 다른 국가가 얽혀있는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을 예상해볼 있다는 것이다. 물론 드라이에서는 보다 시스템과 국가 분쟁이라는 커다란 문제를 단순화하고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문제에 초첨을 맞춘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물과 관련한 문제는 단순히 물부족으로 시달리는 아프리카 어린아이들을 돕는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여러 문제들을 논의해볼 여지가 있다.

 

한편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주인공 일행이 만나게 되는 새로운 인물인 헨리 어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자기계발 분야 구루들의 교훈을 끌어들이는 장면은 다소 어색한 부분으로 남는다. 이들이 처한 상황은 워터좀비들이 인간성을 잃고 폭도로 변하여 한치 앞도 예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예컨대 헨리가 가지고 있는 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과정에서 위기는 기회이며, 진정한 부는 사고방식에서 나온다라는 식의 자기계발서들의 교훈을 꺼내드는 것이 소설의 전개과정과 인간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장치로 사용하기에는 다소 어색하게 다가왔다. 자신이 머무는 집에 침입한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감정에 굴복하지 말고, 감정을 이용하야 한다라고 침착하게 되뇌인다고 문제가 해결될지는 미지수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재난이 벌어지고 있는 형국에 이성적인 개인으로서의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행동 강령이 과연 도움이 것인지는 의문이다.

 

일상으로 돌아온 얼리샤가 스스로에게 묻는 대목이 기억난다. “정녕 우리네 삶이 예전으로 돌아갈 있을까?”(442) 재난을 겪은 이들에게 재난 전후의 삶은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재난의 고통은 온몸에 각인될 것이고, 사람들은 기억과 함께 살아가게 것이다. 워터좀비가 살아남았다면, 다시 이성을 갖춘 문명인으로 돌아와 도덕적인 상처를 어딘가에 묻은 살아가게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란 문제에 관심을 드라이 읽으며 나는 인간은 잔인한 동물이다라는 말을 가려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의 본성이 잔인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표현보다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라는 측면이 인간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 전제가 아닐까. 인간이란 주어진 환경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잔인해질 있는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 소설 드라이 전제하는 인간상의 모습에 적합하지 않을까 판단해본다. 소설은 인간이란 존재에 필수불가결한 부족한 상황이 되었을 이웃들이 워터좀비가 되어 잔인해질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점을 부각시켜준 흥미로운 사고실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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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 한 인간의 상처와 욕망을 읽고 공감하다 | 기본 카테고리 2019-09-17 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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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피츠제럴드

최민석 저
arte(아르테) | 2019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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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최민석 지음 | [arte]


 

학창시절, 그러니까 오래전에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처음 읽었다. 하지만 일말의 공감도 없었다. 읽었던 소설에 대한 내용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개츠비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지도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나는 부분은 갑자기 부자가 남자가 여자를 잊지 못해 스토커 내지는 변태 수준으로 과거의 여자를 생각하고 그녀를 궁금해하며 흥청망청 파티를 여는 장면 뿐이었다. 도대체 읽었던걸까. 개츠비가 도대체 위대한걸까를 궁금해하기도 전에 나는 수많은 독서인들의 찬사를 받은 소설이 이해가 되지 않아 나의 무식한 교양 수준을 탓할 뿐이었다. 그렇게 《위대한 개츠비》 나의 학창시절 이후 오랫동안 무명의 개츠비 잠수를 타다 앞에 나타났다.

 

소설가 최민석 작가가 피츠제럴드의 자취를 따라가며 일종의 취재를 겸한 여행 정리한 책이 이번에 만나게 《피츠제럴드》이다. 제목이 드러내듯 책은 인간 피츠제럴드에 대한 안내서라고 있다. 그렇다고 보다 포괄적이고 집요한 평전과는 다르게, 짧았던 피츠제럴드의 생애의 후반부를 대상으로 한다. 최민석 작가는 끊임없이 방랑하듯 살았던 피츠제럴드의 생애 중에서도 작가가 판단하기에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장소 곳을 선별하여 인간 피츠제럴드가 살았던 생애 어느 순간을 조명하고 있다. 책의 서문 피츠제럴드와 부분을 보자마자 그의 생애를 따라가며 글쓰기를 준비했을 최민석 작가의 마음가짐에 공감할 있었다. 여러 편의 소설집과 에세이집을 펴낸 작가이면서도 대한민국에서 글쓰는 ’, 소설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암시하는 생계형 작가로서의 고백을 따라가며 피츠제럴드 이전에 그가 어떤 마음으로 책을 준비했을지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저자처럼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지는 않지만, 박봉을 쪼개어 아내에게 전달해야하는 가장으로서의 모습을, 무엇보다 그의 문장에서 찾아낼 있었다. 물론 책의 후반에서 소설가인 저자도 처음 《위대한 개츠비》 읽었을 , 소설이 고전인가?’ 반문했다는 고백또한  《위대한 개츠비》 대해 다시 관심을 갖게 해준 요인이었다. 단순히 나의 독서 수준이 낮거나 난독증을 의심할만한 징후가 아니었음을 확인해 해주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 내가 타인의 삶에 대해 공감할 있는 데이터가 너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는 사회에 나와 살아가면서, 보다 보편적인 삶의 이해와 경험치들이 쌓임에 따라 이제는 《위대한 개츠비》 다시 읽더라도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하는 일말의 희망은 얻은 셈이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는 19세기가 끝나갈 무렵(그러고 보니 그의 123 생일을 앞두고 있다)에서 20세기 전반을 살다간 사람이다. 젊은 시절에 1 대전의 시기를 겪었고, 유럽에서 일어나 끝난 전쟁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미국의 호황기였던 1920년대를 관통했던 인물이다. 특히 1920년대는 미국의 에포크’(좋은 시절)였다. 비록 20 내내 금주법의 시기였지만, 당시에 주류 생산을 급격히 줄인 결과, 오히려 술값이 내려갔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등장하듯, 밀주를 팔아서 부를 축적했던 이들 또한 있기 마련이다. 20년대는 또한 일명 재즈 시대이기도 하다. ‘아는 사람 초대되어 들어갈 있는 클럽의 비밀 공간에서 재즈를 듣고, 술을 마시며 흥청망청했던 당시에 끈적끈적하고 매캐한 공기 속에서 피츠제럴드가 하이볼을 손에 들고 자신의 야망과 상승욕구를 불태웠으리라 상상을 해본다.

 

피츠제럴드를 미국적인 작가라고 불렀을 , 표현의 함의는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우선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사회적 요소와 백인 중심 사회라는 키워드를 떠올려보게 된다. 아마도 피츠제럴드가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아버지의 친척 중에는 미국 국가를 작사한 인물이 있으며, 볼티모어 시에는 그의 동상도 있다고 한다. 바로 부계 쪽으로 명망있는 백인 가문이라는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으며, 모계 쪽으로는 1850년대 아일랜드 대기근 이후 미국으로 이민온 부유한 이민자들의 후손으로서의 연결고리를 모두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창시절 처음 《위대한 개츠비》 읽었을 아무런 감흥이나 기억나는 부분이 거의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미국적이라는 키워드의 함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피츠제럴드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사회의 커다랗고 공고한 장벽과 처음 맞닿게 되는 프린스턴 대학 시절을 조사한 부분을 주목해본다. 나는 부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최민석 작가가 프린스턴에서 마주한 발견들을 따라가면서 돈만 있다면 귀한 신분이 있는 대한민국의 사회보다 철저히 근본적인 철옹벽이 둘러쳐져 있는 미국사회의 보수성과 배타성을 새롭게 있었다. 아들이 친구들과 점심먹을 공간을 짓는데 대략 20 원에 해당하는 기부금을 내는 가문들이 미국과 세계를 좌지우지하고 있고, 이들의 자녀들은 곳에서 대학생활을 함께하며 평생 사업을 같이 친분을 쌓아 것이다. 사실 저자가 소개한 피츠제럴드의 집안 역시 개츠비에 대한 설정처럼 가난한 환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어린 시절부터 프린스턴 시절에 이르기까지 강박에 가까울정도로 스스로를 상대화 시키며 자신이 결핍하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소설에서조차  미국인이라면 지느러미를 가지고 태어나야 한다”, “그들은 (미국인들은) 그렇게 태어난 셈이다. 돈이 지느러미다라고 써둔 것이 아니겠는가.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금수저와 흙수저를 이야기하지만, 이미 1-2세기 전에 자본주의 사회의 최전선인 미국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교훈을 이미 우리에게 주고 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가 일종의 돈많은 스토커 있었던 것은 데이지라는 여인 때문이다. 미국의 빈부격차를 극명하게 있는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어느 지역에 물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지역 이스트 에그(전통 명문가가 사는 , 데이지의 집이 있는 )’ 웨스트 에그(신흥 부자들이 사는 , 개츠비의 집이 있다)’ 있다. 소설에서 장소를 분리하는 물은 개츠비에게 장애물이자, 넘어야할 대상일 뿐이다. 개츠비에게 있어 물을 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라는 지느러미 필요하다. 속을 거스르든, 헤쳐 나가든 하기 위해서는 응당 지느러미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소설 밖에서 피츠제럴드의 또한 상당히 극적이었음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특히 돈없는 가난뱅이라는 이유로 사랑을 이룰 없었던 피츠제럴드가 어떤 상처를 받았을지 짐작해볼 수는 있겠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뛰어난 점이 하나 있다면 상상할 있는 능력 테니까. 물론 피츠제럴드가 겪었을 법한 이런 현실은 극소수이긴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기에, 우리는 이런 부유하면서도 심리적으로 아픈 이들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가늠해볼 수는 있다.

 

피츠제럴드가 살아간 생애의 실마리를 따라간 이번 기회로 미루어 보면 그는 모든 소설에서 자신의 결핍과 상처를 어떤 방식으로든 글의 소재로 사용했음을 깨닫게 된다. 달리 말하면 최민석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피츠제럴드는 평생 자전 소설을 작가라는 간결 명료한 표현을 곱씹어보게 된다. 1 대전에 참전하기를 갈망하며 대기하던 와중에 전쟁이 끝나 헤밍웨이처럼 전쟁 영웅이 기회조차도 얻지 못했던 피츠제럴드. 이마저도 상처와 결핍이 되었던 그의 삶을 보면, 그의 소설은 작가 피츠제럴드 자신의 욕망을 대리 실현하는 공간으로서 사용했다고도 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가 전쟁에 참전하여 영웅의 모습으로 복귀하는 설정도 이러한 배경과 저자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따라서 피츠제럴드의 작품들을 단서로서 분석하면, 역으로 그의 결핍과 욕망이 어떤 식으로 투영되고 문자화되었는지를  파악할 수도 있겠다. 특히 최민석 작가가 소설의 화자인 닉이 피츠제럴드의 다른 페르소나로서 있다는 지적은 분명 《위대한 개츠비》 다시 읽어나감에 있어 중요한 키워드가 같다. 피츠제럴드에게 있어 개츠비가 계급이라는 벽으로부터 받은 결핍과 상처의 보상 기작이라고 한다면, 닉은 글을 쓰는 자로서 피츠제럴드의 욕망이 분출된 캐릭터라고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데이지가 젊은 시절 사랑의 실패에 대한 아픔의 기억을 통해 되살아난 캐릭터라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피츠제럴드가 평생 자전 소설을 썼다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며, 이건 하나의 강박에 다름아니라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된다.

 

  최민석 작가의《피츠제럴드》 읽으며 피츠제럴드의 삶을 조금 이해하다보니 다시 《위대한 개츠비》 읽어보고 싶어졌다. 다른 고전들은 경우에 따라 다를 있겠지만, 특히나 피츠제럴드의 경우는 자신이 써낸 작품이 자신의 삶과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고 있다. 잊혀진 작가로 알고 있던 피츠제럴드가 팔리지 않는 자신의 책을 사려고 서점을 방문했을 , 놀란 서점 주인들의 표정을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그리고 피츠제럴드의 말년에 정신병원에 있던 아내 젤다에게 이제 나는 완전히 잊혔소라고 인정하며 써내려간 순간의 심정은 어땠을까. 피츠제럴드의 작품이 아닌 그의 삶을 따라가보며 44 이라는 짧은 생애에 응축된 인간의 고뇌와 상처를 가까이서 느끼고 공감하게 되었다. 이제 다시 그의 작품을 읽어보게 되면 소름돋을 정도로 솔직한 그의 내밀한 욕망을 이해할 있지 않을까. 최민석 작가의 말대로 위대한 소설은 일상을 살아내고 있을 존재감을 드러낸다라는 점을 믿어보고 싶다. 머나먼 이국 땅에 묻힌 작가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릴 아는 작가의 말이니까. 내게는 생애의 절반에 가까운 소설이 익는 시간 필요했던 모양이다. 최민석 작가의 진심과 도움을 빌어 나의 감각과 영혼 눈을 뜨는 순간을 나도 기대해보게 된다.                   

 

책이 인간 피츠제럴드를 이해하고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가까워지길 의도한 결과물이라면, 최민식 작가는 성공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책을 읽은 다음 이미 오래 전에 《위대한 개츠비》 읽었을 , 아무런 감흥이나 기억나는 대목하나 남아있지 않은 중년의 어느 초보 독자가 《위대한 개츠비》 주문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문학작품의 뒤에 정리되어 나오는 작가연보 수준이 아닌, 작가의 삶을 보다 생생하고 깊이 들여다보는 기회를 통해 작품과의 관련성을 함께 생각해보게 해주는 시도는 인간의 삶과 그의 작품을 통해 나의 모습도 발견할 있는 기회가 있겠다.

 

마지막으로 최민석 작가가 피츠제럴드의 작품 중에서 인용한 대목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을 재인용하며 마무리해본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은 오류의 왕관, 판도라의 상자였다. 자부심 가득한 뉴요커의 사람으로 올라갔던 나는 그곳에서 뉴욕의 빌딩 숲은 끝없는 연속이 아니라 유한하다는 사실을, 도시는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녹색과 청색의 무한한 자연으로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난생처음 그토록 높은 곳에 올라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재즈 시대의 메아리》나의 잃어버린 도시중에서 재인용(291)




#클래식클라우드 #피츠제럴드 #위대한개츠비 #최민석 #아르테 #arte #리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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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평단 모집]★장하준 추천★『돈 : 사회와 경제를 움직인 화폐의 역사』 | 새소식 2019-09-16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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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마틴 저/한상연 역
문학동네 | 2019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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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대한 책을 딱 한 권만 읽고 싶다면 바로 이 책이다.

가장 읽기 쉬우면서 흥미진진하다.” _장하준


돈이란 무엇이고 신용이란 무엇인가? 화폐는 국가만 발행할 수 있는 걸까?

금융위기에 세금을 투입하는 것은 정당한가?

위험은 사회가 부담해야 하는가,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가?


화폐의 핵심은 물물교환의 대체가 아니라 ‘양도 가능한 신용’이다!

화폐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사회적 기술이다!

돈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도 극적으로 달라진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 ‘돈’의 역경 어린 역사!


『돈』은 우리가 익히 안다고 믿었던 돈의 역사를 기술하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와 경제, 그리고 점점 이해 불가한 것이 되어가는 금융과 경제정책, 세계경제가 모색해야 할 길을 제시한다. 화폐는 기발하고 탁월한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폐는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안정’과 ‘자유’를 모두 주겠다고 약속하며 사회의 경제적 위험을 체계적으로 분배했고 그럼으로써 사회적 이동이 가능해진 동시에 사회는 무정부주의적 위험에 빠지지 않는 안정을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화폐에 관한 오래된 오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경제학은 나날이 추상화되어 실제 경제에서 멀어졌다. 펠릭스 마틴에 따르면 화폐는 물물교환을 대체하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사회적 기술이고, 화폐의 핵심은 신용이다. 그는 그동안 거시경제학이 간과한 화폐·은행·금융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경제를 제대로 바라보려면 화폐부터 다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고대 역사와 사상, 중세와 근대의 화폐 정책 및 군주의 역할, 은행의 탄생, 로크의 사상이 화폐를 보는 관점에 끼친 영향은 물론 케인스, 월터 배젓, 래리 서머스 등 여러 경제학자의 시각을 두루 기술하며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돈을 바라보게끔 안내한다.


돈이란 무엇이고 신용이란 무엇인가? 화폐는 국가만 발행할 수 있는 걸까?

금융위기에 세금을 투입하는 것은 정당한가?

위험은 사회가 부담해야 하는가,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가?


화폐의 핵심은 물물교환의 대체가 아니라 ‘양도 가능한 신용’이다!

화폐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사회적 기술이다!

돈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도 극적으로 달라진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 ‘돈’의 역경 어린 역사!


『돈』은 우리가 익히 안다고 믿었던 돈의 역사를 기술하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와 경제, 그리고 점점 이해 불가한 것이 되어가는 금융과 경제정책, 세계경제가 모색해야 할 길을 제시한다. 화폐는 기발하고 탁월한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폐는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안정’과 ‘자유’를 모두 주겠다고 약속하며 사회의 경제적 위험을 체계적으로 분배했고 그럼으로써 사회적 이동이 가능해진 동시에 사회는 무정부주의적 위험에 빠지지 않는 안정을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화폐에 관한 오래된 오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경제학은 나날이 추상화되어 실제 경제에서 멀어졌다. 펠릭스 마틴에 따르면 화폐는 물물교환을 대체하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사회적 기술이고, 화폐의 핵심은 신용이다. 그는 그동안 거시경제학이 간과한 화폐·은행·금융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경제를 제대로 바라보려면 화폐부터 다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고대 역사와 사상, 중세와 근대의 화폐 정책 및 군주의 역할, 은행의 탄생, 로크의 사상이 화폐를 보는 관점에 끼친 영향은 물론 케인스, 월터 배젓, 래리 서머스 등 여러 경제학자의 시각을 두루 기술하며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돈을 바라보게끔 안내한다.


화폐의 원초적 실체는 신용

돈은 물물교환을 쉽게 하려고 생겨난 발명품이 아니다


태평양에 있는 지구 최고의 오지, 야프섬에는 ‘페이(fei)’라는 아주 특이한 돌 화폐가 있다. 외부로부터 고립된 이곳 경제 시스템에서 통용되는 이 돌 화폐는 지름이 30센티미터에서 360센티미터에 이르는,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 화폐. 실제로 원주민들은 이 무거운 돌 화폐를 주고받으면서 거래를 성사시키지 않았다. 페이의 위치가 이동되는 일은 드물었으며 사람들은 거기에 만족했다. 심지어 바다에 가라앉아 있어 소유주조차 그 실체를 본 적 없는 페이도 존재했다. 그렇다면 태곳적 경제에 가까운 야프섬 경제에서 진짜 화폐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야프섬의 화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근원적 신용거래 및 정산 시스템이었고, 페이는 이 시스템을 추적·기록하는 보존 수단으로, 이들 신용거래를 나타내는 증거물에 불과했다. 페이의 존재는 “태초에 우리 조상들은 물물교환을 했는데 매번 그러자니 서로 교환하는 물건의 가치도 딱 맞지 않고 상하는 물건도 있어서 물물교환을 더 쉽게 하려고 화폐가 탄생한 것”이라고 흔히 이야기되는 화폐의 기원에 대한 가설을 보기 좋게 배반한다.


여기에서 출발해 지은이는 고대 문명과 그리스·로마의 역사, 중세 신흥 상인계급의 발흥과 은행의 탄생, 화폐정책·화폐 주조를 두고 벌어진 국왕과 의회의 줄다리기 등을 차례차례 짚으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화폐가 어떤 역경을 거쳐왔는지 낱낱이 알려준다. 역사를 되짚으며 또렷이 떠오르는 화폐의 핵심은 복잡하지 않다. 화폐의 핵심은 양도 가능한 신용이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덕분에 사람들은 안심하고 거래를 하게 됐고 사회적 이동이 가능해졌다. 화폐는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화폐는 ‘금융적 의무’(쉽게 말해 부채)를 만들어냄으로써 얼핏 자유와 상반되어 보이는 안정성과 확실성도 보장했다. 이 두 가지를 다 약속한 화폐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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