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쉘 위 공부? - 인문학 공부를 위한 세미나 지침 《세미나책》 | 기본 카테고리 2021-06-2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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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세미나책

정승연 저
봄날의박씨 | 2021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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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책

정승연 지음 | [봄날의박씨]

 

 

쉘 위 공부? - 인문학 공부를 위한 세미나 지침

 

필사’, ‘발제란 표현을 알게 된지 몇 년이 되지 않았다. 독서모임이나 세미나 모임에 참여도 해보고 나서야 나는 이 용어를 접하게 된 셈인데,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세미나책을 읽기 직전까지도 발제의 개념을 제대로 몰랐다. 1년에 3-4권 정도 읽으면 이미 포만감을 느꼈을 정도로 책읽기를 힘들어 했던 내가 책 읽기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공부를 위한 책읽기는 혼자 못할 이유도 없지만 세미나를 통한 공부는 네트워크가 함께하는 공부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미나는 외부를 이어주어, 지금까지의 나를 벗어나게 해주는 접속구이기도 하다.

 

책 읽기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 방법론적인 책을 여러 권 본 기억이 있다. 원래 매뉴얼 같은 안내서를 가까이하지 않았지만, ‘1만권 읽기와 같은 제목을 단 책들의 저자는 과연 책을 어떻게 읽는지 궁금했었다. 속독과 다독의 비결을 알려주는 책을 여러 권 읽어보았지만, 대부분의 책에서 소개해주는 책읽기의 방법론은 인문학 공부에 크게 도움이 안 되는 독서법이었다. 어느 자기계발서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며 이 방법은 인문학 서적에는 적절하지 않습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이 경우는 저자가 솔직한 경우였다. 내가 관심 있는 인문학 공부의 책읽기, 공부하기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책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책들을 몇 권 읽고 내린 결론은 내 관심사를 파악해서 내 속도대로 읽어나가자는 것이었다.

 

세미나책은 나의 경험에 비추어 크게 기대하고 읽어 나가지는 않았지만, 의외로 저자의 인문학 세미나 경험과 공부에 대해 생각해볼 거리를 많이 던져주어서 만족스러웠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해서야 비로소 처음 인문학 공부를 시도했다. 이 때 처음 경험해보았던 것이 세미나식 공부였다. 다만 나를 괴롭혔던 것은 다소 기계적인 측면이 있는 내용 요약하기가 아니라 발제문 만들기였다.

 

내가 관심있게 읽은 부분을 중심으로 간단히 정리해보자. 저자에 따르면, 발제란 질문을 던질만한 문제를 찾는 일’(140)이다. 따라서 발제자는 세미나에서 고민할 문제를 만들어오되, 형식적으로는 이 문제를 만들기까지 고민했던 전후 맥락을 기록’(141)한다. 이것이 발제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나는 과연 발제문이 무엇인가하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이전에 내가 만들어간 발제문은 마감에 급급하여 끄적거린 요약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정작 중요한 질문을 곁가지취급을 했고, 이 질문은 내용 이해를 위한 요약과도 따로 놀았던 셈이다. 물론 그런 점에서 과거에 우왕좌왕하며 고민하던 경험이 전혀 쓸모없지는 않았다는데 위안을 삼는다.

 

발제와 발제문 만들기는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었고, 나 스스로 발제란 무엇인지 납득할 수 있었다. 저자 역시 지속적으로 참가하는 세미나 공부를 통해 이 부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정리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밖에 이 책은 세미나 구성과 읽기, 발제문과 에세이 쓰기, 말하기와 같은 공부의 뼈대가 되는 방법론을 이야기하되, 다른 방법론 책과 달리 인문학 공부란 무언인가라는 저자의 공부론을 접할 수 있어서, 이 부분이 좋았다. 이를테면 인문학 공부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의식적 차원의 공부’(6)이며, 그런 의미에서 세미나/공부란 말로 바뀐 내 지식과 정서를 타자와 만나게 하는 장소’(161)이면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발굴해 내는 작업’(202)이라는 견해에 공감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공부는 어떠해야 할까 생각해본다. 저자가 학창시절 참여했던 운동권 공부얻은 지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공부였다면, 이 책의 (인문학) 공부는 나를 바꾸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는 언급도 인상 깊다. 저자는 공부의 주제로 삼을 만한 것이 마음이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87)이라고 말한다. 어떤 책을 읽을 때 납득이 가지 않거나 생경하게 다가올 때, 바로 이 지점에서 이 문제를 파고들어야 내 삶에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내가 품고 있던 문제, 내가 결핍감을 느끼는 지점, 나의 욕망이 무엇인지 들여다봐야 한다는 주문일 테다. ‘나의 공부역시 이 지점을 향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고미숙 작가의 어느 글에서 공부’(工夫)는 중국 무술 쿵후’(功夫)와 발음이 같다는 언급을 읽은 기억이 난다. ‘쿵후는 공부의 ’()에 힘쓰기()가 더 들어간 셈이니, 몸을 중심으로 익히는 공부라고 볼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선인들의 공부(工夫)는 단순히 지식을 머리에 넣는 행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익히고 숙달하는 과정을 전제한다. 말하자면 몸과 머리에 역사를 담고 쌓아가는 개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들어온 지식이 내 안에서 겉돌지 않고, 나의 삶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어야 공부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부는 인문학 열풍의 정체가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공부라고 진단한다. 이를 나의 말로 표현하자면, ‘인문학 열풍의 원인은 지식이 스펙 쌓기처럼 물신화되어 버린데 있다고 생각한다. 요즈음 뉴스를 보면 경제력뿐만 아니라 지식을 가진 이가 경쟁력을 가진 존재가 되고, 이것이 하나의 권력이 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공부’(工夫)란 무엇인가를 묻는 일은 의미심장하다. 나의 공부가 어떠해야하는지를 묻는 일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스스로에게 묻고 점검해야할 물음이 되어야 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미나책은 세미나를 통한 인문학 공부의 지침을 알려주는 것뿐 아니라, ‘공부란 무언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해준 책이다. 이 책은 많은 책을 읽기 위한 테크닉과 같은 일방적이고 기능주의적인 시각에 충분히 보완이 될 만한 견해와 시각을 담고 있다. 이제 내 삶을 들여다보고 나를 바꾸는 공부를 할 때다. 쉘 위 공부?

 

 

[책 속으로]

[1] “(인문학 공부는) 좀 더 의식적인 차원의 공부입니다.” (6)

 

인문학 공부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다른 관점의 획득입니다. (...) 그것은 곧 자기 갱신이기도 합니다.” (20)

 

“(인문학 공부를 통해) 그 과정을 반복하는 사이에 바뀌는 것은 나의 일상이고, 일상이 바뀌면 욕망’, 그러니까 원하는 게 바뀝니다.” (23)

 

[2] “‘마음이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피해서는 안 되는 공부의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파고들어야 내 삶에 무언가 남길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87)

 

[3] “발제문은 무엇일까요? 그 시간에 고민한 문제와 발제자가 그 문제를 만들기까지 고민했던 전후 맥락을 기록한 글입니다.” (141)

 

세미나에 있어서 발제문은 읽기말하기사이에서 그 둘을 이어 주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 내가 정말 문제라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서도 납득 가능한 설명을 붙여 주어야 합니다.” (142)

 

[4] “세미나는 말로 바뀐 내 지식과 정서를 타자와 만나게 하는 장소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내 말의 한계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의 한계를 봅니다. 그리고 잘만 한다면 내 존재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언가로 변환시킬 수도 있습니다.” (161)

 

[5] “텍스트에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이 잠재되어 있는데, ‘읽기, ‘세미나, ‘공부란 바로 그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을 발굴해 내는 작업인 것입니다.” (202)

 

[6] “공부는 내 인생과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나 자신과 함께 공진화해 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매번 새롭게 주사위를 던져 보는 것뿐입니다.” (205)

 

[7] “‘공부로 인생역전한다는 건 공부를 발판 삼아 출세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인생의 성질을 바꾸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어떻습니까? 공부, 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206)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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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당신은 이 삶의 여행자인가? 아니면 방랑자인가? | 기본 카테고리 2021-06-2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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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헤르만 헤세 저/안인희 역
창비 | 202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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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Baume)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지음 | 안인희 옮김 | [창비]

 

 

당신은 이 삶의 여행자인가? 아니면 방랑자인가?’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유리알 유희의 작가 헤르만 헤세가 자연에 대해 쓴 산문과 시를 엮은 책이다. 자연에 대한 명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주 대상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나무들이다. 손주를 둔 할아버지 헤세가 말년에 쓴 글들이 많은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실린 글에는 고향과 그리움에 대한 기억이 자주 소환된다. 이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대상이 바로 나무다.

 

노년의 헤세에게 나무는 어떤 존재였을까? 그에게 나무는 우선 그 자체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자연의 무구함을 내세우는 존재’(36)였다. 인상적인 유일무이함으로 영원성을 드러내는 존재’(10)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나무 안에는 신이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제 나무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존재이자 존재의 비밀을 품고 있는 존재’(10)인 셈이다. 헤세에게 나무는 존재의 비밀이 발현된 증거이자 신의 존재를 보여주는 대상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하지만 자연의 모습이 계절에 따라 바뀌듯, 나무도 자신의 모습을 달리한다. 나무는 불변의 영원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생명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존재다. 저자가 이 깨달음은 환기하게 된 계기는, 나무가 몇 개월 동안 꼭 붙들고 있던 잎들을 바람 잔잔한 어느 날 한 순간에 떨구는 모습을 본 사건이었다. 게다가 비바람에 늙은 고목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헤세는 나무가 주는 아름다움과 죽음, 괘락과 무상함까지도 성찰한다. 이 책은 헤세가 자연, 특히 나무에 대한 관찰을 통해 자연과 삶의 역사와 진실에 대해 써내려간 시와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가 나무로부터 배운 삶의 진실은 노년에 이른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숲에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떨리는 소리를 내면, 헤세는 늘 방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방랑자에게 모든 길은 집으로 데려가는 길, 모든 발걸음은 탄생이고 죽음이며 모든 무덤은 어머니”(11)였음을 가르쳐 주기도 했을 테다. 떠남과 돌아옴이 삶의 순리인 것처럼, 나무도 자연의 질서를 묵묵히 따른다. 나무 역시 상실과 죽음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저자는 발견하고 이를 받아들인다. 생명체의 죽음은 개별적이었다. 헤세는 스러진 늙은 나무를 애도하고, 상실에 대해 작별 인사를 한다. 젊은 시절의 세상이 친구로 가득했었다면, 안개 속을 걸어가듯 만년의 그는 홀로 걸어가는 자신을 자각했을 듯싶다.

 

만년의 헤세가 자신의 글에서 한 가지 바람을 얘기한 부분이 인상 깊다. “한번만이라도 다시 젊어져서 아무것도 모르고 구속받지 않은 채 뻔뻔하게 호기심에 차서 세상으로 떠나고, 배가 고파 길가에서 버찌로 식사를 하고, (...) 한번 더 숲의 새, 도마뱀, 풍뎅이와 조화롭게 어울려 지내는 방랑의 시간을 갖고 싶다!”(83)고 언급한 대목이었다. 그에게 방랑은 떠돌이들과 도제들의 여행방식이었다. 방랑자는 소유하는 자들이 아니다. 길 위에서 즐거움을 맛보되, ‘모든 즐거움이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다. 떠나온 장소, 집 혹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결핍, 그리고 불안마저 함께 하면서도 말이다. 방랑자는 길 위의 모든 것을 섬세하게 감지하고, 순간의 즐거움을 맛보면서도 이 즐거움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조급해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헤세에게 방랑의 묘미는 낯설음을 동반한 달콤함이 깃든 맛이었을 테다. 노년의 헤세는 이 방랑의 기쁨을 추억하고, 길 위에서 숲의 향기와 꽃을 누리는 경험을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어 한다. 언제나 방랑자로 남고 싶었을 테다.

 

이와 달리 헤세는 여행자의 면모를 이야기한다. 여행자란, 방문했던 장소를 해마다 다시 찾고 아름다운 광경과 작별하면서도 언젠가 또 다시 오리라고 다짐하는 수집광적 면모를 지닌 자들이었다. 향기에 취해 보리수꽃을 따는 여인들처럼 말이다. 저자의 설명이 와 닿지 않는다면, 전시회나 미술관 풍경을 상상해볼 수도 있겠다. 설치되어 있는 모든 작품을 카메라에 담는 이들을 종종 보게 되는데, 헤세의 관점에서 이들은 미술 애호가라기보다는 이미지 수집가다. 헤세가 보기에 수집광적인 여행자는 방랑자처럼 진지하게 즐거움을 만끽하면서도 작별할 줄 아는이들이 아니다. 아름다움의 유한성과 상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여행자들은 잃어버린 것 혹은 잃게 될 것에 대한 조바심을 갖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순간순간의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하고, 방랑자들처럼 가장 섬세한 것을 얻지도 못하게 된다.

 

이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나는 여행자일까 아니면 방랑자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헤세가 이야기하는 여러 특징들을 고려하면 나는 영락없이 여행자였다. 순간순간 느끼는 아름다움과 행복을 붙들고자 했다. 이내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착실한 여행자처럼 언젠가 다시 그 즐거움을 느끼겠노라 생각했다. 나는 조용한 방랑의 감각을 지니지 못한 여행자였던 모양이다. ‘다시 젊어진다면, 방랑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하던 헤세는 노년의 자신을 회상하면서, 이내 젊은 시절의 방랑자보다 이제는 고독하고 어두우며 고요한 길’(84)을 걸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에게 이 장면은 자연의 섭리를 인정하고 나이듦을 받아들이는 헤세의 모습으로 읽힌다. 그러므로 이 책은 헤세가 노년에 이르러 나무와 꽃을 바라보고 추억을 회상하며 아름다움과 죽음을 성찰함으로써 삶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책이기도 하다. 방랑자 헤세는 신의 선물을 맛보고 즐거움을 만끽했던 추억을 되살리면서도 언젠가는 작별하게 될 자신의 삶도 직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한 방랑자가 걸어온 길에 대한 예찬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걸어갈 고독한 길을 준비하는 글로도 읽힌다. 이처럼 상실에 대한 작별인사를 준비하는 그는 여지없이 조용한 방랑의 감각을 지녔던 방랑자였다. 그럼 당신은 인생이란 길의 여행자인가, 아니면 방랑자인가?

 

 

[책 속으로]

[1] “한 그루 나무는 말한다. 내 안에는 핵심이 있어 불꽃이, 생각이 감추어져 있지. (...) 인상적인 유일무이함으로 영원성을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이 나의 직분이다.” (10)

 

[2] “나무들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울 뿐 아니라 건축물로 자신을 표현하는 인간에 맞서 자연의 무구함을 내세운다.” (36)

 

[3] “글을 쓰거나 어떤 일을 할 때, 다시 한번만 더 그렇게 바보처럼 즐겁고 진심으로 행복해지고 싶다.” (43)

- 헤세가 습작으로 시를 쓰곤 하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4] “손주들아, 뻐꾸기 소리를 잘 들어라, 녀석은 아는 것이 많으니 녀석에게서 배워라! 뻐꾸기에게서 즐거움으로 떨리는 대담한 봄의 비상을 배워라! 구애하는 따스한 유혹의 외침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방랑의 생활을...” (66)

 

[5] “보리수꽃의 향기처럼 그것(기쁨)은 누구에게나 무료로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다.” (79)

 

[6] “방랑자는 모든 즐거움 중에 최고의 것, 가장 섬세한 것을 얻는다. 즐거움을 맛보는 것 말고도 모든 즐거움이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79)

 

[7] “함박꽃도 난쟁이나무도 낙관론자도 비관론자도 옳다. 다만 나는 낙관론이 조금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낙관론의 성급한 만족감과 배부른 웃음에서 저 1914년을, 이른바 건강하다던 그때의 낙관론을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 비관론자들의 일부는 조롱당하고 또 일부는 총살당했다.” (104)

 

[8] “아름다움과 죽음, 쾌락과 무상함이 서로를 얼마나 요구하고 제약하는지 경이롭구나! (...) 자연적인 생명의 모든 움직임은 그렇듯 무상하고 아름답다.” (145)

 

[9] “신이 인도인이나 중국인들에게서는 그리스인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표현된다고 해도, 그것은 결함이 아니라 풍성함이지요. 신적인 것이 드러나는 이런 모든 현상방식들을 요약하려고 하면 떡갈나무나 밤나무가 아니라 나무라는 말이 가장 좋습니다.” (164)

- 1955, 헤세가 독자의 편지에 답한 내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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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리뷰/독서일기] 장하석 교수의《물은 H2O인가?》를 읽는 중입니다 | 기본 카테고리 2021-06-19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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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H2O인가?

장하석 저/전대호 역
김영사 | 2021년 06월

 

물은 H2O인가?

장하석 지음 | 전대호 옮김 | [김영사]

 

 

[독서일기] 장하석 교수의 물은 H2O인가?를 읽는 중입니다

 

장하석 교수의 물은 H2O인가?를 아주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100자 정도로 책에 대한 인상을 남겨보려 했는데, 끄적거리다가 100자를 넘기게 되었네요. 그래서 두서없지만 좀 더 살을 붙여보기로 합니다.

 

이 책은 다른 대중과학철학서(앞선 글에서 언급했던 과학철학자 팀 르윈스의 저서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MID, 2016와 같은 책)에서 이미 여러 번 언급된 책이기도 해서 번역되어 나오면 흥미롭겠다고 여기고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책입니다. 몇 년이 지나서 번역이 되었네요.

 

제가 잠시 장비회사에서 물건을 팔러 다닐 때 취급했던 장비가 전기분해를 이용한 장비였습니다. 그 때 살균효과에 중요한 발생 성분이 '염소'였구요, 그래서 이와 관련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다시 발견하게 된 책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2장과 3장에 걸쳐 논의되는 전기분해물은 H2O인가?’라는 주제에 가장 관심이 갑니다. 이 책에서는 아마도 물이 H2O인가를 의심하고 이를 따지는 부분이 가장 중심적인 메시지를 줄 것으로 기대됩니다만, 저는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2장부터 흥미 있게 읽어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기분해 장비를 취급할 때, 영업에 필요한 홍보자료를 만들면서 학술적으로도 우리가 전기분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모호한 상태인지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전기분해'의 과정 및 결과는 그동안 학계와 다수에 의해 '이렇게 믿기로 하자'라고 잠정적으로 합의된 지식이었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정작 반응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정확이 아는바가 없다는 것이죠. 물론 당시에는 일이 바쁘니 더 이상의 질문을 하며 나름의 답을 구하지는 못했습니다.

 

저도 이제 이 책을 읽기 시작해서 전체적인 인상을 이야기하는 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다만 책에 대한 '첫 인상'을 남겨볼 수는 있겠죠. 물론 책을 읽다보니 제가 막연하게 짐작했던 부분 중에 책의 의도에서 많이 어긋난 부분도 있긴 합니다. 앞서 게시했던 물은 H2O인가?에 대한 기대평에서 제가 모호하게 알고 있거나 오해한 부분은 책을 읽으면서 다시 정리해봐야 겠습니다.

 

다만 이 책에서 장하석 교수가 특히 강조하는 '다원주의'는 제가 막연하게 예상했던 개념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원리로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공기와 물의 정체성을 파악하던 과학혁명 당시 혹은 그 전후의 화학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는 현대 과학사/과학철학서와는 달리 접근성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내용이나 읽기가 더 쉬워지는 것은 아니긴 합니다. 저자의 생각과 논리를 잘 따라가야 하는 숙제가 남습니다. 또 책의 두께가 주는 압박이 있지만 원서의 페이지수와는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보다 번역서의 글자가 크고 한 페이지에 포함되는 글자 수가 적은 편이기 때문일 겁니다. 아무튼 꽤 오랜 시간 붙들고 읽어도 피로감을 덜할 것 같습니다.

 

책을 천천히 읽다보니 제가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마음에 들어서, 아예 간단히 첫인상을 기록해두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아무래도 잘못 알고 있던 부분이나 이해의 폭이 확장된 제 모습을 발견하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시점에서 제가 파악하는 책의 성격은 이 책이 과학 지식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과연 옳은 것 일까?를 묻고 있습니다. 각 장의 시작은 보다 저자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해 역사적인 맥락을 전달하기 위한 배경지식을 전개합니다. 그런 다음 저자는 주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차근차근 꺼내놓습니다. 그러니까 책의 이해를 위한 배경으로 과학지식(양자역학 같은 지식을 포함하여)을 필요로 하기 보다는, 바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저자의 주장을 잘 따라가며 읽는 것이 관건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은 H2O'라고 믿고 있는 우리에게 '과연 그런가?'라고 저자는 묻습니다. 이에 저자는 과학사의 여러 장면 전후를 들여다보면서 집요하게 우리의 믿음 체계를 공략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읽기에 가볍고 부담 없는 도서를 많이 찾게 되는 요즈음, 장하석 교수의 책은 누구나 한번쯤 고민하고 생각해볼만한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과학혁명의 구조를 썼던 토마스 쿤으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기에, 저자는 토마스 쿤을 비롯한 선배 학자들의 연구까지 보다 폭넓게 고려하며 고찰합니다. 그러니 물은 H2O인가?를 읽는 것은 과학혁명의 구조와 같은 과학사 및 과학철학의 고전을 보다 깊이 읽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를 해봅니다.

 

이번 장하석 교수의 신간은 특히 자신의 견해만이 옳다고 믿고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지 못하는 학자들, 상대방과 학문적인 대화를 허심탄회하게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경직된 국내 학계를 비롯해서,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분들에게 시사하는 점이 상당히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과학 지식을 얻는 것도 중요한 과정이지만, 한편으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과정도 제겐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다른 분들의 독서 활동과 기록을 통해 배우는 바가 많습니다. 이 책 역시 그런 질문을 끌어안고 있는 책이란 생각이 들고요. 그래서 책을 읽는 중이긴 하지만, 이 책 이야기를 다시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책을 다 읽게 되면 읽기 전의 저와는 분명 달라져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제게는 중요한 책이 될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하는 책입니다. 다 읽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팀 르윈스 저/김경숙 역
MID 엠아이디 | 2016년 07월

과학혁명의 구조

토머스 S. 쿤 저/김명자,홍성욱 공역
까치(까치글방) | 2013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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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엔 물이 H2O가 아니었다는 거죠? | 기본 카테고리 2021-06-16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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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H2O인가?

장하석 지음 | 전대호 옮김 | [김영사]

 

과거엔 물이 H2O가 아니었다는 거죠?’

 

한동안 기다려온 과학철학자 장하석 교수의 책 Is Water H2O? 이 번역되어 나왔다. 번역서 제목도 간결하게 물은 H2O인가?. 학창 시절에 밤새 만화와 무협지를 열심히 보고 수업시간에 줄곧 졸았던 사람이라도 물이 H2O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다. 그런데 세계적인 과학철학자가 물이 H2O인가?’라고 묻는 제목의 책을, 그것도 두께의 압박을 보여주는 책 한 권으로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런데 장하석 교수는 어려운 과학철학(과학도 어려운데 철학까지...)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위해 당연하게 보이는이 주제를 소재로 가져온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 내가 현재까지 정리한 사항은 과거에 물이 두 가지 측면에서 H2O가 아니었다는 것과 현재, 그리고 앞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물이 H2O라는 점이다. 이 과거와 현재(혹은 미래)를 관통하는 두 가지 기준은 인류의 기억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은유적 측면과 근현대 이후의 과학적 측면을 가리킨다.

 

‘20세기 후반의 급진적인 사상가라고 불렸던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저서 H2O와 망각의 강(사월의책, 2020)에서 바로 전자의 측면에서 물을 고찰한다. 이 관점에서 과거에 물이 H2O이 아니었다는 점은 물이 신화적 상상력을 품은 존재물로서 인류의 역사 속에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과거에 인류의 선조가 인식했던 물은 마오리 신화에서처럼 창조와 생성의 근원이었고, 죽은 자를 강물에서 씻기던 행위에서 정화의 기능을 가진 신성한 재료였다. 죽은 이들의 기억을 씻어낸다는 신화적 상상력 속의 레테의 강은 생명체의 기억, 곧 역사를 품은 재료였다. 따라서 인류의 선조에게 물은 단순히 우리가 과학시간에 배운 H2O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반 일리치에게 화학식 H2O이란 상징으로서의 기호는 물의 신성함과 기억이 상실된 질료로서의 물을 의미한다고 이해된다.

 

과학적인 측면에서 과거에 물이 H2O가 아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과거에 과학자들은 물이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화학 실험을 통해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명한 화학자 돌튼은 물의 성분이 HO라고 주장했다. 과학 분야에서 물이 우리가 알고 있는 H2O가 될 수 있었던 계기는 또 다른 걸출한 화학자 아보가드로가 제시한 주장 때문이었다. 이번에 출간된 물은 H2O인가?의 배경이 될 만한 설명은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지식채널, 2014)8장에 이미 간결하게 소개가 되어 있다. 장하석 교수는 이 책에서 돌튼 대 아보가드로, HO H2O의 대결구도에서 어떻게 물이 H2O가 되었는지를 역사적 맥락에서 짚어주면서 동시에 원자의 실재론 철학의 맥락으로 이어갔다. 또 저자는 아보가드로가 물이 H2O라고 주장했던 1811년 이후, 이 지식이 받아들여지기까지’ 5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그러므로 과거 어느 한 때에 과학사적 장면에서도 물은 H2O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저자의 신간에서는 이러한 측면을 보다 심도 있게 들려주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오늘날 물이 결국 H2O가 된 이유 두 가지는 앞에 설명한 배경의 결론적인 변화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의 주장대로 오늘날 물은 과거에 지녔던 역사성을 상실했다. 나아가 인류는 물에 대한 가치를 망각하고, 단순히 산업과 생활의 편의만을 위해 필요한 대상으로 취급했기에 이제는 상징적인 의미로 물이 H2O로 영구히 환원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의미에서도 과학의 지식축적과 측정도구의 발달로 과학자 집단에 의해 물이 H2O로 받아들여 진것이다.

 

아마 이번에 출간된 장하석 교수의 신간에서는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에서 간결하게 보여준 물에 얽힌 과학사와 쟁점들을 보다 다양한 측면에서 본격적으로 접근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저자는 이 주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정말 물이 H2O라고 확신할 수 있나?’라는 또 다른 주제에 대해 어떤 답을 내놓고 있을지 궁금하다. 앞서 언급한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에서 저자가 또 주목했던 지점은 다원주의(pluralism). 저자는 과학 연구의 역사에서 기존의 지식에 의문을 갖고 다른 관점을 용인하며 새롭게 기존의 지식을 검토하도록 하는 이 감각이 중요한 교훈이 된다고 말했다. 정답만을 찾고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은 우리의 주입식 교육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과연 물이 H2O일까?’라고 묻는 일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교육적인 차원에서 볼 때 여전히 경직되어 있는 우리의 교육 현장에서도 참고할 만한 사항들이 많을 것이란 기대를 이번 신간에 해본다.

 

장하석 교수가 주목하는 이 다원주의적 태도는 최근에 읽은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의 글에서도 줄곧 돋보이는 관점이다. 장하석 교수와 굴드 교수의 다원주의적 시각에서는 과학사에서 등장했던 다양한 가설과 지식이 비록 오늘날에는 잘못된 지식으로 판명되더라도, 각자 나름의 가치를 용인한다. ‘지금은 틀렸지만, 당시에는 나름의 이유로 옳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태도다. 인류의 지성사는 이렇게 서로 다른 견해가 모두 하나의 링 위에 올라 경합을 벌이는 과정에서 빛을 발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미 출간된 저자의 저서를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나 역시 다시 질문해볼만한 문제이긴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점은 다양한 주장과 가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떤 경우에도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다. 다양성이란 특징이 단지 생태학적인 관점에서만 자연에 유익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지성사, 나아가 앞으로 인류의 생존 가능성에까지 유익한 교훈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개인적으로 물이 H2O인가?’하는 주제에 흥미를 갖게 된 계기는 과학철학자 팀 르윈스의 책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MID, 2016) 통해서였다. 이 책은 장하석 교수의 동료인 저자가 쓴 대중을 위한 과학철학서였다. 르윈스는 이 책의 4장에서 바로 물이 H2O인가?’라는 주제를 가져와 과학적 실재론과 관련지어 설명을 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이 질문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장하석 교수의 물은 H2O인가?을 언급했다. 팀 르윈스 교수는 이 부분에서 과학자들이 여전히 물은 단순히 H2O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는 중이라고 언급하는데, 이 대목이 흥미로웠다. 그는 이렇게 언급한다.

 

철학자이자 과학사가인 장하석 교수가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는 단순한 H2O분자 덩어리를 물로 여기지 않는데, 그 이유는 흔히 물을 구성하는 것으로 여기는 성분에는 여러 이온이 같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158면에서 인용)

 

나아가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진리라고 알고 있는(그리고 학교에서 배워서 물이 H2O라고 알고 있는) H2O가설보다 더 나은 과학 이론이 현재로서는 없기 때문이라고 정리한다. 따라서 팀 르윈스는 물이 H2O인가?’라는 명제가 화학자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동의하지만, 여전히 논쟁의 여지는 있다는 말도 남겨두었다. 따라서 이반 일리치가 자신의 책에서 다소 낙담한 듯한 어조로 태초에 지구가 꼴을 갖추지 못하고 미완의 상태였던 때이래로 물은 그저 H2O일 뿐이다.”(H2O와 망각의 강, 17)라고 말하긴 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물에 얽힌 이야기가 단지 역사적인 질료로서 끝나지는 않을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본다앞으로 물의 정체성을 밝히는 일에 우리의 상상력도 더 필요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물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잊혀 진 물에 대한 기억과 물의 가치를 되살리는 일도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장하석 교수의 온도계의 철학(동아시아, 2013) 함께 언급해둔다. 이 책 역시 두께의 압박이 있지만, 어차피 천천히 읽어야 할 책이다. 우리가 온도를 말할 때, ‘온도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과학전공자들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말이 많은 과학자들에게 말을 줄이게 하는 방법에는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 아마도 온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추가하면 될 것 같다. 그만큼 간단해 보이는 이 질문에 쉽고 명쾌하게 답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 책은 온도라는 개념과 온도계의 발명, 그리고 과학에서 측정이란 행위, 나아가 과학 행위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과학의 발전 혹은 진보라는 맥락에서 생각해볼 기회를 줄 것이다.

 

 

H

물은 H2O인가?

장하석 저/전대호 역
김영사 | 2021년 06월

H2O와 망각의 강

이반 일리치 저/안희곤 역
사월의책 | 2020년 07월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장하석 저
지식플러스 | 2015년 07월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팀 르윈스 저/김경숙 역
MID 엠아이디 | 2016년 07월

온도계의 철학

장하석 저/오철우 역/이상욱 감수
동아시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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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제이 굴드’ 정치적 읽기 | 기본 카테고리 2021-06-14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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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판다의 엄지

스티븐 제이 굴드 저/김동광 역
사이언스북스 | 2016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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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의 엄지

: The Panda's Thumb (1980)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지음 | 김동광 옮김 | [사이언스북스]

 

 

스티븐 제이 굴드정치적 읽기

 

40여 년 전에 고생물학자 및 진화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쓴 자연사 에세이를 틈나는 대로 읽고 있다. 첫 번째 에세이집 다윈 이후(1977)를 읽고, 두 번째 책으로 판다의 엄지(1980)를 읽고 있다. 과학계에서는 10년만 지나도 새롭게 발견된 사실과 얻게 된 통찰이 쌓여 만만치 않은데, 이 시점에서 굴드의 에세이를 읽는 이유는 뭘까. 그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줄곧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굴드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이 발간하는 월간지 자연사 Natural History에 매달 에세이 한 편씩, 한 번도 거르지 않고 27년 동안 기고했다고 한다.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았을까 싶지만, 그는 과학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학, 건축 등의 문화예술 분야, 자신이 좋아하는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에도 강한 호기심과 박식함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에세이에서는 주요 연구 분야인 고생물학을 비롯하여, 진화론, 현대 진화 생물학, 유전학 등을 글의 중심에 놓되, 언제나 인간이라는 요소를 잊지 않았다. 굴드가 글을 쓰며 줄곧 유지하는 자세는 과학 행위란 역시 인간이 하는 일이란 명제다.

 

여성의 뇌(14)라는 제목의 글에서 굴드는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인 시각을 도마 위에 놀려 놓는다. 작가 조지 엘리엇의 작품 미들 마치 Middle March의 서문으로 시작하여 끝을 맺는 이 에세이는 유럽의 일류 과학자 집단이 여성의 열등성을 증명하기 위해, ‘과학이라는 이름의 정교한 장치를 활용한 역사를 짚어본다. 저자는 인간이 하는 과학이란 무엇인지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과학은 추론을 통한 실천이지 무수한 사실들로 이루어진 목록이 아니다. 따라서 숫자 그 자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여러분이 무수한 사실들로 이루어진 목록이 아니다. 여러분이 그 숫자를 이용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206)

 

과학행위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보다 더 명확하고 중요한 메시지가 있을까 싶다. 나는 다윈 이후에 이어 이제 두 번째 책을 읽고 있을 뿐이지만, 저자가 끊임없이 제기하는 문제들에서 보이는 일관된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상식이나 인간 사회에 줄곧 이어지는 편견과 오해를 붙들고 자세히 들여다보며 이야기했다. ‘라마르크는 과연 무능한 진화론자였을까?’, ‘다윈이 20년 넘게 자신이 완성한 자연선택설을 발표하지 않고 묻어 둔 이유가 보다 확실한 증거를 모으기 위함인가?’와 같은 질문들이 그러한 예다. 또 후손의 눈으로 조상의 지식과 결정을 소급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시대적·사회적 배경과 맥락 속에서 이들이 주장한 논리가 나름대로 타당하고 심지어 합리적이기까지 했다는 결론도 내린다.

 

하지만 굴드가 자신의 글에서 줄곧 드러내는 문제의식은 보다 근원적이며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쟁점들이며, 나아가 서양 사회의 차별과 배제의 오랜 역사와 닿아있다고 본다. 보다 구체적으로, 굴드는 백인 남성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사회가 오랜 역사를 거쳐 구축해온 기득권 유지 장치의 단면을 끊임없이 조명한다. 서양사에 대해 아직 이해가 부족하지만, 개인적으로 인류사에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차별과 배제의 증거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서 이미 흔히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른 전통이다. 사실 야만인은 말 그대로 잔인한 짐승 같은 존재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언어와 문화를 향유하는 자들에 대한 무지와 혐오에 오만함이 더해진 비하 행위의 다른 이름일 테다. 동양인들에 대해 유럽인들이 째진 눈제스처를 하는 행위, ‘흉노족훈족과 동일시한 사례는 단지 유럽의 백인 남성 기득권 사회가 끌어들여 활용한 장치의 곁가지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굴드는 서구 사회에서 이렇게 통용된 차별과 배제장치를 다양한 맥락에서 소환하며, 이러한 사회적·정치적 장치들을 과학적 태도로 비판한다. 진화론에 대한 왜곡된 해석으로 굳어진 우생학을 비롯해서, 인간중심적 우월주의, 백인(남자)의 인종적/성적 우월성, 유전자 결정론적 시각, 머리 크기와 지능의 관계 등을 끊임없이 글 속으로 끌어들인다. 굴드는 왜 이러한 주제들에 매달렸던 것일까? 에세이를 읽어가면서 점점 궁금해졌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 소재들이 자신의 문제의식을 건드렸고, 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 서구 사회의 편견과 여기에 기인한 차별과 배제의 행태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반응했다. 바로 서구 문명사회가 은밀히 구축하여 규범화 하고 강요해온 구별짓기의 전략이다. 무엇보다 백인 남성이 전략적이고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왜곡하여 끌어들인 장치들을, 굴드는 과학자의 눈으로 직접 들여다보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굴드의 눈에 비친 서구문명의 차별과 배제전략은 왜/어떻게 생겨났던 것일까. 나는 그 이유에 대한 실마리가 백인 기득권층의 두려움과 혐오라고 본다. 예를 들면, 19세기에 미국의 일류 자연학자였던 루이 아가시(Louis Agassiz)의 인종차별적인 면모를 보여준 16(빅토리아 시대의 숨은 결함)에서 그 단서를 엿볼 수 있다. 아가시는 보스턴 소재 래드클리프 대학의 창설자이자 초대 학장, 하버드 대학교 비교 동물학 박물관을 건립했던 명망 있는 지식인이자 인정받는 보스턴 시민이기도 했다. 역사탐정의 면모로 굴드는 아가시가 흑인을 처음 만난 후 남긴 기록의 무삭제 원본을 복원하여 에세이에 소개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기록은 아가시가 이 글을 쓴 후 헌신적인 아내의 검열과 삭제를 거쳐 130년 넘게 아가시의 인종차별적 면모가 가려져있었다. 흑인에 대한 동정을 보내면서도 혐오 또한 숨기지 않았다. 그는 혼혈아를 만들어 내는 것은 (...) 자연에 대한 범죄입니다.”(238)라고까지 썼다. 굴드는 아가시가 남긴 기록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요약한다. “루이 아가시는 백인의 우월성이 희석되지 않도록 모든 인종을 따로 격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236) 나는 아가시의 글에서 상대방(흑인)에 대한 혐오뿐만 아니라 두려움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구 사회의 기득권층, 특히 백인 남성들이 강렬하게 지녔던 이 두려움과 혐오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유명한 공상과학영화의 한 장면에서 상징적으로 떠올릴 수 있겠다.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에 등장하는 다스베이더(Darth Vader)로부터 말이다. 그는 영화 대부분에서 줄곧 검은 가면과 망토 속에 가려진 상태로 등장한다. 강력한 악의 힘을 다루면서도 그가 줄곧 느끼는 두려움이다. 굳이 언어로 풀어 놓는다면 진실에 대한 두려움정도가 아닐까. 인간이 갖는 근원적인 감정으로서 이 두려움은 죽음과 같은 절대적 무지에 대한 두려움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와 더불어 자신의 비밀과 추악함이 밝혀지는 사태에 대한 두려움도 있을 것이다. 백인 남성이 구축해온 문명 속에서 공기처럼 누려온 이 기득권 유지와 둘러싼 비밀이 사실은 근거 없음으로 드러나게 된다면, 이러한 사태는 이미 힘을 가진 집단에게는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결국 세상의 절반은 거대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과학과 종교의 힘을 빌려, 여기에 맞는 논리를 만들어내야 했다. 오로지 자신의 비밀 유지를 위해서 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세상의 다른 절반의 삶을 좌우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남녀만의 차별뿐만 아니라 모든 인종에 대한 차별도 고려해야 하므로, 우리의 삶은 절반에 훨씬 못 미치는 백인 남성 기득권 사회가 다른 모든 존재를 장악하고자 했던 시도의 영향을 받아온 셈이다. 굴드는 자신의 글에서 줄곧 인간우월주의적 시각, 유전자 결정론, 인종 및 성차별적 시각의 역사를 문제시한다. 저자의 양심의 눈에 끊임없이 비쳐진 것은 어쩌면 서양인들의 잠재의식 속에 흐르는 기만죄의식의 감정(곧 백인의 죄책감, white guilt)을 덮고자한 방어기제였다.

 

물론 굴드는 서양 백인들의 차별과 배제의 오랜 역사를 언급하지만, 이것이 서양 문화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다. 전 지구는 이미 서양화되어 있어서, 오늘날 각 민족, 각 인종의 다양성은 심각하게 줄어들고 획일화되어 버렸다. 때로는 서양인들의 편견일부를 우리는 아무런 문제없이 받아들이기도 하며 상식이 된 것들도 있다. 진화를 진보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미묘한 해석도 그러한 예다. 또 우리 중 많은 이들이 동남아시아인들을 바라보았던 시각을 떠올려볼 수 있다. 분명히 많은 이들이 백인을 보는 시선과도 크게 차이가 난다. 굴드는 이렇게 통용되며 사람들에 심어진 편견에 주목하고 꼼꼼하게 이를 이해하고자 한다. 이 행위를 바탕으로 자신의 관점에서, 직접 판단을 내린다. 따라서 그는 서양 기득권 세력이 구축해온 세계 질서를 비판하고 이 도도한 인식의 흐름을 바꾸어보고자 했던 사람, 양심적이고 반성적인 서구 지식인의 한 명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작가 제인 오스틴은 정교하고 정확한 언어, 섬세한 시선과 재치로 18세기 영국의 중상류층 여성들의 삶을 다루었다고 한다(아직 그녀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다). 그녀의 작품과 생애를 기반으로 한 영화를 몇 편 보면서 느끼는 점은, 오스틴의 작품에는 영국 사회가 마련해놓은 질서 안에서 여성들이 겪었을 삶의 모순을 치밀한 심리와 함께 묘사해 놓았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큰 흐름에서 볼 때, 여성 주인공들은 백인 남성이 구축하고 강요하는 사회의 규범 내에서 발생한 오해와 이해 부족에 결과한 편견으로 고통을 받는다. 작가 오스틴의 삶도 이런 배경 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오스틴이 이러한 규범과 편견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기록했으며 이에 저항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더 좋은 조건을 가진 남자들을 만나기 위해 여성들이 겪는 에피소드가 아닌, 여기에 오스틴이 지녔으며 작품을 통해 드러냈던 정치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제인 오스틴의 이야기를 불쑥 꺼낸 이유는 굴드 역시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인 편견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이에 반응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서양 기득권자 집단이 자신들의 목적에 맞추어 왜곡하고 이용했던 진화론또는 다윈주의에 얽힌 스캔들을 소재로 삼되, 미묘하면서도 때론 유쾌하게 문제제기를 한다. 그렇다면 스티븐 제이 굴드가 고생물학계의 제인 오스틴과 같은 면모를 지녔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앞에서 굴드가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언급했던 내용을 인용한 바 있다. 굴드의 과학은 결국 이 행위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다는 점을 말한다. 서양의 기득권 집단이 줄곧 주장해온 논리 역시 무지’, ‘죽음’, ‘비밀에 대한 두려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여기에 뿌리를 내린 편견이 만들어낸 정치성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굴드를 읽는다는 것은, 과학이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으로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묻는 일이 될듯하다. 과학이란 내가 어떤 근거와 자료로 대상 혹은 현상을 바라보고 해석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을 포함한다. 나는 어떤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 할 것인가, 나아가 세상을 바라볼 때 나는 어디에 발을 딛고 설 것인가 하는 위치 선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굴드 읽기는 내가 어디에 받을 딛고 설지를 끊임없이 묻고 배우고 수정하는 과정이라고 읽힌다. 이점이 굴드를 읽으면서 중립적으로 읽을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유다.

 

 

 

[책 속으로]

[1] "과거에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사태로 자주 인용되는 사례가 하나 있는데, 핀의 머리에 천사가 몇 명 올라갈 수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 하나의 핀이 유한의 수를 수용할 수 있는지 아니면 무한의 수를 수용할 수 있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인것이라는 사실... 한 신학 체계에서는 천사의 실체 여부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201)

 

[2] "브로카와 그의 학파는 (...) 어느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 개인이나 집단보다 우수한 이유를 설명하는 문제를 뇌의 크기와 지능의 상관관계를 통해 해결 할 수 있음을 입증하고 싶었던 것이다." (201)

 

[3] "과학은 추론을 통한 실천이지 무수한 사실들로 이루어진 목록이 아니다. 따라서 숫자 그 자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여러분이 그 숫자를 이용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206)

 

[4] "우리는(특히 타처럼 키가 작은 사람들은) 높은 지능이 키가 큰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212)

 

[5] "트리소미 21은 대개 몽고 백치, 몽고증, 다운 증후군 등의 이름으로 불려 왔다." (219)

 

[6] "그들은 익살꾼 연기자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뛰어난 모방력을 가지고 있다." (224)

  "아시아인의 지적인 힘은 인정하지만 그 능력은 혁신적인 천재의 능력이라기보다는 남의 것을 잘 흉내 내는 능력에 불과하다는 식의 설명을 분인 것이다." (225)

- 다운증후군을 연구했던 다운 박사의 아시아인에 대한 시각

 

[7] "브로카의 발언은 실제로는 특정 시대의 사회적 차별에 불과한 것을 생물학적으로 이미 결정되어진 것인양 호도하는 보편론이라는 전체 맥락에서 판단할 필요가 있다." (212)

"저는 이 퇴보하고 퇴화한 인종을 보면서 연민의 느낌을 받았고, (...) 그 운명에 동정심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들이 우리와 같은 혈통이 아니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 신이시여, 이러한 접촉으로부터 저희를 지켜 주소서!" (235)

- 미국 래드클리프대학의 창설자이자 초대 총장, 하버드 대학교 비교 동물학 박물관을 세운 루이 아가시의 메모

 

[8] "굴복하지 않고 용맹무쌍하고 자긍심이 강한 인디언, 그들은 유순하고 비굴하고 모방하기 좋아하는 니그로에 비해, 또는 교활하고 잔꾀에 능하고 겁쟁이인 몽골 인종과 얼마나 다른가!" (233)

- 루이 아가시가 <크리스천 이그재미너 Christian Examiner>(1850)에 발표했던 글 중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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