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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파울 첼란의 흔적을 찾아서 [2] | 기본 카테고리 2021-02-24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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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 전집 1

파울 첼란 저/허수경 역
문학동네 | 2020년 12월

파울 첼란 전집 2

파울 첼란 저/허수경 역
문학동네 | 2020년 12월

 

‘한 생애의 발자국들 뒤에

내 발자국을 얹어본다.’

시인 파울 첼란의 흔적을 찾아서 [2]

 

지난 글에서는 파울 첼란의 발자국을 상상하며 따라가 보았다. 오늘은 다른 작가의 글에서 ‘우연히’ 발견한 파울 첼란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독일문학비평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폴란드 유대인으로서 20세기 전반이라는, 인류사의 유례없는 굴곡을 살아낸 인물이었다. 그런 까닭에 말년에 그가 남긴 회고록 《나의 인생 Mein Leben》을 인상 깊게 읽었다. 그런데 우연히 다시 그의 회고록을 넘기다가 라니츠키가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를 언급한 대목을 발견했다. 사실 우연히 《파울 첼란의 전집》이 나온 것과 비슷한 시기에 라니츠키의 회고록을 읽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시의 발견을 출발점으로 삼아 첼란의 삶을 좀 더 이해해볼 수 있을까 했던 것이 이번 기획(?)의 동기다.

 

라니츠키의 회고록 중에서 나의 눈길을 붙들었던 대목은 이렇다.

 

“이튿날 토지아(결혼 전의 아내) 아버지의 장례가 치러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은 땅에 묻혔다. 그때까지만 해도. 얼마 후면 유대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에 나오는 “공중 무덤”뿐일 것이다. 유대인의 자살이 아직은 생소하던 때라 묘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나의 인생》, 178면)

 

다시 이 부분을 읽어보니 무척이나 생소하다. ‘공중 무덤’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나는 자살을 미화할 의도는 없다. 다만 모든 자살에는 ‘메시지가 있다’고 믿는다. 이 메시지의 앞에는 ‘세상을 향한’, 혹은 ‘사회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더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행동함으로써 언어로 이야기되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일이다. 여기에 인용한 대목은 나치의 위협과 굴욕적인 대우를 받던 폴란드 망명 시절 이웃집에 살던 랑나스씨가 자살한 사건을 언급한 부분이다. 어머니의 요청으로 랑나스씨의 딸을 위로해주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지만 랑나스씨의 죽음으로 두 사람의 인연은 결혼으로, 그리고 정말로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게 된다. 삶과 죽음 사이를 지나는 역사의 굴곡 속에서 맺어진 인연이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다.

 

마침 전영애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된 적 있는 《죽음의 푸가》(민음사, 2011)를 먼저 구하게 되어, 이 ‘공중 무덤’이란 표현이 등장하는 시를 찾아보았다. 이 시는 1952년에 출판된 첼란의 시집 《양귀비와 기억》에 실린 ‘죽음의 푸가’라는 제목의 시다. 그리고 이 시는 아우슈비츠를 소재로 삼고 있으며, 이 시집에서 가장 유명해진 시라고 한다. 참고로 《시인의 집》에서 전영애 교수는 이 시집이 1953년에 출판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97), 큰 문제는 아니겠으나, 출판연도가 1952년인지 아니면 1953년인지 정확한 것으로 수정되었으면 한다. 무엇보다 이 시집은 이미 첼란이 파리에 정착한 1948년에 적은 부수로 출판한 시들을 재수록한 것이라고 한다.

 

죽음의 푸가’는 그다지 길진 않은 시지만, 번역자의 저자권 문제도 있으므로 여기에서 전문을 인용하지는 않는다. 이번 글에서는 시에 대한 소개와 출처를 밝히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

우리는 너를 마신다 낮에 또 아침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  (《죽음의 푸가》, 민음사, 전영애 옮김, 2011, 40-41면)

 

내가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시인이 무엇을 보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너무나 어두운 얘기만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 시를 상상해보기 위해 아버지를 화장하던 날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던 검은 연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딛고 있는 땅에 나를 낳아 준 존재가 매여 있다는 느낌, 더듬을 수 있는 형체가 사라져버렸다는 황망함이란 대체불가 한 것이었다. 그렇게 비쩍 마른 한 몸도 편안히 누울 수 없었을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매일 가스실로 향하는 행렬과 굴뚝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검은 연기를 목격해야 했을 테다. 그들은 수용소에서 매일의 의식처럼 이들의 재를 들이마셔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동포들의 재를 들이마셨던 수용소 생존자들이 하나 같이 우울증으로 고통 받았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나 파울 첼란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것을 단순화해서는 안 되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과 같은 것은 아닐까라고 자문한 적도 있다. 이런 경험을 했던 사람들의 의식을, 경험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다만 상상할 뿐이다. 맥락은 다소 다르지만, 첼란의 시는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쓴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라는 글을 읽었던 기억으로 이어졌다. 식인 부족의 문화를 연구하기도 했던 그는 서양인들이 이 부족들을 미개인이라고 치부해버리는 편견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오히려 야만적인 자신의 문화를 돌아보았다. 식인 행위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부모나 지인을 태운 재를 마심으로써 이들을 자신의 내부에 ‘모시는’ 의식에 더 가깝다.

 

고고학자 강인욱의 책 《테라 인코그니타》에서도 식인 행위의 첫 번째 배경을 ‘사랑의 발로’라고 언급했다. 곧 “떠나간 가족, 친구를 보내는 환송 의식의 하나로 그 사람의 신체 일부를 먹음으로써 죽은 사람이 우리 곁에 영원히 함께 한다고 믿는 사랑의 발로”(63)라는 해석이다. 물론 첼란이 경험했던 비통하고 비인간적인 경험과 레비-스트로스의 관점, 그리고 일반적인 식인 행위의 시각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려는 것이 나의 목적은 아니다. 첼란이 ‘살아남의 자의 죽음’을 증언하는 언어를 따라가다 보니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문제가 나에게 주어진 삶의 과제 같은 것으로 다가왔다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겠다. 곧 다른 동기에서지만, 타인의 재가 내 몸 안에 들어온다는 것의 경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마주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청년 파울 첼란의 무대로 돌아온다. 지난 글과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청년 시인 첼란과 미래의 문학비평가 라이히라니츠키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유럽을 관통했던 역사를 기록했다. 1938년 11월, 독일에서는 나치가 유대인의 건물을 파괴하고 재산을 빼앗았으며, 폭력을 자행했던 ‘수정의 밤’ 사건이 발생했다. 조국에서 유대인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길이 막힌 파울 첼란이 프랑스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기위해 프랑스로 가던 시점에, 라니츠키의 가족은 불과 며칠 전에 독일에서 추방당했다는 것은 앞선 글에서 언급했다. 

 

폴란드로 쫓겨 간 라니츠키의 가족은 나치군인들이 자행하는 폭력적인 위협을 경험한다. 라니츠키의 증언에 따르면 독일군은 할례를 받는 유대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남자들의 바지를 내리게 했고, 여자들에겐 관공서 바닥을 닦을 때, 이들이 입던 속옷을 벗어 걸레로 사용하게 했다. 어느 날 독일군에 호출된 라이츠키 형제는 “우리는 유대인 개새끼들이다. 우리는 더러운 유대인이다. 우리는 인간도 아니다.”라는 구호를 수도 없이 복창해야 했다. 우리는 수많은 자기계발서에서 인간의 놀라운 ‘회복탄력성’을 이야기하지만,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선 경험은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망가져버린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지 그들은 살아가는 동안에는 상황에 따라 다른 페르소나로 연기하는 것일뿐인지도 모른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결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 여기에 의문의 여지는 없다. 인간의 기억은 신체 전체를 통해 각인되니까. 그리고 의식은 신체와 분리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그저 몸과 하나를 이루는 몸의 일부이면서 몸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존자들의 경험과 기억이야말로 비가역적 법칙을 따른다. 이런 행위를 강압에 의해 따라야 했던 이들뿐만 아니라, 이를 강요했던 이들까지도 말이다. 이들의 경험을 조금이라도 상상해보려면 이들이 남긴 증언을 읽어보면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 히틀러의 건축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이라면 가해자의 입장을 조금은 상상해볼 수 있을까. 한나 아렌트가 남긴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증언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 같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 정권의 전쟁 물자 생산을 총괄한 군수장관이었기에, 나치의 범죄 행위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내밀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일부의 비판처럼 ‘자기 방어에만 급급한’ 책인지는 읽어보면서 판단해볼 일이다. 최소한 리영희 선생이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달은 정황이 있으니,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다.

 

이번엔 다른 작품에서 파울 첼란의 시를 살펴보려 한다. 그의 시 ‘죽음의 푸가’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작가가 이 시를 분명히 읽었음직한 정황이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 작가 홋타 요시에의 장편소설 《시간 時間》에서 그 정황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소설은 일본군이 자행한 ‘난징 대학살’의 면모를 그려내었다. 공교롭게도 난징 대학살이 발생했던 시기(1937년 12월 - 1938년 2월) 역시 독일에서 발생했던 ‘수정의 밤’(1938년 11월)과 시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은 가해국(일본)의 작가가 피해국(중국) 장교의 시선으로 썼다는 점이다. 그는 난징 대학살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이야기를 일기 형식으로 써내려가며 가해국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여기에 첼란의 시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 나오는 것이다.

 

검은 점 하나로 응축된 검은 세발솥이 내 시선을 끌어당겼다. (...) 세발솥은 옛사람들이 우주를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우주를 데우기 위해서 수탄(獸炭)을 썼다고 한다. 세 개의 두꺼운 다리 옆에 시체 두 구가 너부러져 있다. 시체 두 구를 숯으로 해서 우주가 데워지고 있다. 아지랑이처럼 사람의 피와 기름이 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의 난징을 상징하는 듯이.

(《시간 時間》, 박현덕 옮김, 글항아리, 73-74면)

 

일본군이 수 개월간 유린한 난징의 모습을 시내로 나간 화자가 관찰하는 대목이다. “아지랑이처럼 사람의 피와 기름이 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라는 대목에서 나는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를 떠올렸다. 그 이유는 홋타 요시에가 이 소설을 발표한 것이 1955년이라는 시점과, 1918년생인 그가 30년대 말 혹은 40년대 초에 게이오대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다는 것을 바탕으로 상상해볼 뿐이다. 나아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 「죽음의 푸가」가 실린 시집 《양귀비와 기억》이 1952년 혹은 1953년에 출판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미 1948년에 자비로 소량 출판한 책에 실려 있었기에 추정해보는 것이다. 요시에는 대학시절(30년대 말, 40년대 초) 이미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했기에,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당대의 시인들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보았을 법하다. 물론 첼란은 파리라는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 독일어로 시를 쓴 시인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요시에가 첼란의 시를 읽었는지 여부를 밝히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첼란이 세상에 내놓은 ‘살아남은 자의 증언’을 요시에가 읽었다면, 그리고 첼란의 부모와 지인을 죽인 자들의 언어로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그 정황을 요시에가 인식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던 것이다. 소설을 쓰기 전에 선체험으로 요시에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말이다. 나는 그 가능성에 주목하고 상상해보고자 했다. 요시에가 《시간 時間》을 씀으로써, 어쩌면 자신의 신변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을 이러한 글쓰기를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첼란의 언어가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상상해보는 것이다. 반성적인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첼란(1920년생)과 라이히라니츠키(1920년생)과 동년배인 요시에(1918년생)가 겪은 세계사적 사건들을 함께 바라볼 때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시인의 마지막 길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은 보편적이면서도 동시에 특수한 그의 삶을 닮았다. 시인은 투병을 시작하고, 가족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으로, 센 강 근처의 집을 얻어 따로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70년 4월 어느 날 그는 파리 센 강에 투신한다. 투병 중이던 그의 방에는 카프카의 책이 펼쳐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독 속에서 병마와 싸웠을 그는 “당신이 나를 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버림받은 느낌이고 외롭습니다”(《시인의 집》, 69면)라는 카프카의 구절에 밑줄을 쳐놓았단다. 언젠가 파리에 가게 된다면 시인이 보았을 거리와 파리 식물원의 플라타너스 나무를 보았으면 한다. 그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플라타너스의 잎뿐”(《시인의 집》, 89면)이라던 시인의 시선을 떠올릴 수는 있을 테니까.

 

추가로 파울 첼란의 삶과 작업에 보다 가까이 가기 전에 두 가지 작품에 주목해본다. 하나는 첼란의 후기 시집 《숨결돌림》 중 ‘숨결수정’이라는 시에 관심이 간다. 이 시는 아내 지젤의 판화작업과 나란히 영감을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진 공동작업이라고 한다. “이 공동작업은 아름다운 부부애의 예로 꼽힌다”(93)라는 전영애 교수의 말을 기억해두기로 한다. 시인과 화가 부부가 만들어낸 판화 시화집이 나온다면 꼭 소장하고 싶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 허수경 시인의 번역으로 나온 《파울 첼란 전집》 제2권에는 《숨전환》(1967)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 것 같다. 전영애 교수가 《시인의 집》에서 언급한 시집 《숨결돌림》이 아닐까 생각한다. 「숨결수정」이라는 시가 《파울 첼란 전집》 제2권에서는 어떤 제목으로 소개가 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또 주목해보고 싶은 첼란의 작업 하나는 독일 시인 잉에보르크 바하만(1926-1973)과 파울 첼란이 주고받은 편지 묶음 《마음 시간 Herrzeit》이다. 전영애 교수에 따르면, 이 제목은 첼란이 바흐만에게 써준 스물세 편의 시 중 ‘쾰른, 암 호프’라는 시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 시는 《파울 첼란 전집》 제1권에 실려 있다. 시 ‘쾰른, 암 호프’는 두 사람이 쾰른에서 재회했을 때 첼란이 써준 시다. 시인의 말년에 두 사람은 시를 매개로 하여 많은 교감을 나누고 사랑했던 사이라고 한다. 두 사람은 전후 독일 문인들의 모임인 ‘47그룹’에서 서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그룹에는 독일 문학계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모여 있었다. ‘47그룹’은 첼란과 바흐만을 비롯하여 귄터 그라스, 하인리히 뵐, 문학비평가 라이히라니츠키까지 참여하던 모임이었다.

 

시를 떠나 두 시인의 배경을 살펴보면 두 사람이 얼마나 이질적인 조건을 지닌 사람들인지 알 수 있다. 첼란은 나치에 의해 부모를 잃고, ‘살인자의 언어’인 독일어가 모국어인 까닭에 독일어로 시를 써야 했던 시인이었다. 국적을 잃은 이방인으로서 살아가야 했던 첼란과는 달리, 바흐만은 골수 나치 당원의 딸이었으며 독일 문단과 문화계의 주목을 받기까지 했던 시인이라고 한다. 이들은 오로지 시를 매개로 교감을 나누고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도 대조적이다. 첼란은 센 강에 투신했고, 바흐만은 로마의 집에서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길지 않은 이 시인들의 삶 후기에 이루어졌던 작업들을 이 작품으로 접근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참고: 함께 언급한 책들]

시인의 집

전영애 저
문학동네 | 2015년 07월

죽음의 푸가

파울 첼란 저/전영애 역
민음사 | 2011년 07월

나의 인생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저/이기숙 역
문학동네 | 2014년 03월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

알베르트 슈페어 저/김기영 역
마티 | 2016년 06월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저/강주헌 역
arte(아르테) | 2015년 09월

테라 인코그니타

강인욱 저
창비 | 2021년 01월

시간

홋타 요시에 저/박현덕 역
글항아리 | 2020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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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파울 첼란의 흔적을 찾아서 [1] | 기본 카테고리 2021-02-23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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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 전집 1

파울 첼란 저/허수경 역
문학동네 | 2020년 12월

파울 첼란 전집 2

파울 첼란 저/허수경 역
문학동네 | 2020년 12월

 

‘한 생애의 발자국들 뒤에

내 발자국을 얹어본다.’

: 시인 파울 첼란의 흔적을 찾아서 [1]

 

 

작년(2020년) 말에 《파울 첼란 전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시 전집은 1920년에 출생한 첼란의 탄생 100주년, 사후 5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으로 나오게 되었다. 특히 이 작품은 시인 허수경의 유고 번역작업이기도 하여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파울 첼란이라는 시인의 이름은 익숙하지만 내가 그의 시를 읽어본 것은 없다. 아, 한두 편은 있을 것이다. 독문학자 전영애 교수가 독일어권 시인들의 자취를 찾아다니며 써내려간 《시인의 집》에 인용된 시 몇 구절과 만난 인연은 있다.

 

시는 언제나 읽어보고자 하면 번번이 높은 장벽을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전문 번역자에게도 매우 난해하다고 알려진 첼란의 시에 굳이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시인의 집》을 통해 알게 된 시인의 삶을 조금 들여다보고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인들이 마주해야 했던 삶을 조금이나마 상상해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 여러 번 읽어보았던 책이지만, 다시 파울 첼란이 살던 집과 자취를 찾아간 대목을 읽어보니 처음 읽는 것 같이 새롭다. 언젠가 허수경 시인의 번역으로 만나는 《파울 첼란 전집》을 읽어보길 바라며, 충동적(?)으로 첼란의 삶을 가능한 한 조사하고 기억해두고 싶었다. 오늘은 전영애 교수의 《시인의 집》을 기반으로 하면서, 그동안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를 앞서 지나 간 첼란의 흔적을 밟아 따라가 보고자 한다.

 

먼저 파울 첼란은 루마니아의 끝자락인 부코비나에서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1920년 11월). ‘너도밤나무숲’ 혹은 ‘너도밤나무가 많은 곳’을 의미한다는 부코비나에서 성장했단다. 하지만 가혹한 역사는 식물을 유난히 사랑하던 유대인 청년을 가만히 놔주지 않았다. 나치에 끌려간 부모는 그가 23세일 때 목숨을 잃었다. 그가 18세 일 때(1938년) 의대로 진학하고 싶었으나 루마니아에서는 이미 유대인에 대한 엄격한 정원제를 실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스에 있는 의대로 진학하기 위해 프랑스로 가던 중 독일을 지나게 되는데, 그 다음날이 바로 나치가 유대인들의 건물을 급습하여 파괴를 일삼았던 ‘수정의 밤(1938년 11월 9일)’이었다고 한다. 이 ‘수정의 밤’이란 이름은 깨져버린 수많은 유리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밤의 불빛에 반짝반짝 빛났던 광경에서 나온 명명이라고 알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수정의 밤’이 발생하기 며칠 전에, 훗날 평론가로 이름을 날리게 될 또 다른 유대인 청년이 독일에서 추방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바로 독문학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가족이 추방당해 폴란드로 갔던 것이다. 게다가 라니츠키는 파울 첼란과 동갑인 1920년 생이었다. 수정의 밤 사건이 발생하던 시기, 루마니아 출신의 유대인 청년은 프랑스가 있는 서부로,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청년은 다시 폴란드가 있는 동부로 이주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을 떠올려보게 된다. 수정의 밤 이후 나치는 10,000명에 가까운 유대인을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로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전영애 교수에 따르면 이 ‘부헨발트’라는 이름 역시 ‘너도밤나무숲’ 혹은 ‘너도밤나무가 많은 곳’을 의미한다고 한다. 순간, 같은 의미를 지닌 부코비나에서 출생한 첼란의 삶이 교차한다. 그에게 이 나무의 의미가 어떻게 다가왔을지 짐작해볼 뿐이다.

 

나치의 손에 부모를 잃고, 노동수용소에서 ‘우연히’ 살아남은 시인은 전후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1948년 7월부터 파리의 센 강에 몸을 던졌던 1970년 4월 까지 22년 간 이곳에서 ‘국적 없는 유대인이자 철저한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독일에는 평생 한 번도 살아 본 적도 없지만, 독일어가 모국어였던 시인이다. 달리 말해 자신의 부모를 죽인 이들의 언어를 모국어로 해야 했던, 뒤엉켜버린 실타래 같은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던 시인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부모를 수용소에서 잃고, 부모를 죽인 이들의 문학을 이들의 언어로 평생 글을 써야 했던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삶이 다시 소환되는 지점이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거대한 운명의 물결을 누군들 거스를 수 있었을까? 라이히라니츠키는 자서전 《나의 인생》에서 그저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첼란과 라이히라니츠키의 운명을 일별해보니 이들과는 또 다른 대척점에 있는 한 유대인의 삶을 떠올린다. 바로 독일의 과학자 프리츠 하버다. 그는 무엇보다 질소고정법으로 공기에서 질소를 얻고, 이 질소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발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합성비료를 만드는 데에 하버의 발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하버는 이 공로로 1918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친구이기도 하며 역시 유대인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하버가 살충제 개발을 한다는 명목으로 청산염 개발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과학저술가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금지된 지식》에 따르면, 이 청산염은 ‘세포의 신진대사를 방해해서 신체 내부 질식’(175)을 일으키는 물질이다. 나치가 대량 학살에 사용했던 치큰론베라는 독가스의 원리를 하버가 만들었던 것이다. 유대인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독가스가 자신의 형제자매를 학살하는데 사용되었던 모순적인 역사의 진실을 읽을 수 있다.

 

다시 첼란의 파리로 되돌아온다. 전영애 교수는 시인의 자취를 따라간 기록에서, 시인의 시선을 상상하며 시인이 보았을 법한 풍경을 바라본다. 교수는 주소 몇 개와 지도 한 장만을 가지고 시인이 살았던 집들과, 걸었음직한 장소를 찾아 길을 나섰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플라타너스의 잎뿐’이라는 첼란의 문구를 기억하는 교수는 시인이 바라봤음직한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들을 발견한다. 문득 시집 한 권과 지도를 들고 길을 찾아 헤매던 전영해 교수의 시 읽기가 궁금해졌다. 나도 시를 읽는 방법과 관련하여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까해서다. 전영애 교수는 ‘파울 첼란을 읽는 일로 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하며, ‘(첼란의 시가) 쉽게 읽히지 않지만 소중히 읽을 수밖에 없는 시’라고 말한다. 《시인의 집》을 펼칠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교수는 시인의 흔적을 따라가는 과정이 또다시 새로운 이들과의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 생애의 발자국들 위에 내 발자국을 얹어본다.”(66) 한 줄 한 줄 시를 읽어나가는 과정뿐만 아니라, 길 위에서 만나는 인연이 매우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는 유독 시와 거리가 먼 유형의 사람이지만, 시인의 삶과 이들이 지나간 길을 따라가다보면, 이들은 자신의 작업물을 발견하고 따라가는 이들에게 ‘초라하고 작은 삶을 소중히 하라’는 복음(?)을 전하는 임무를 지닌 이들이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다. 다음 글에는 여러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첼란의 흔적으로 이어가보려고 한다. ‘역사와 언어에 대한 회의’를 표현했다고 하는 첼란의 언어를 일부나마 들여다보려고 한다.

 

 

나의 인생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저/이기숙 역
문학동네 | 2014년 03월

시인의 집

전영애 저
문학동네 | 2015년 07월

금지된 지식

에른스트 페터 피셔 저/이승희 역
다산초당 | 2021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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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함께 읽는 그림책] '할머니의 팡도르' | 기본 카테고리 2021-02-2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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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할머니의 팡도르

안나마리아 고치 저/비올레타 로피즈 그림/정원정,박서영 공역
오후의소묘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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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그림책 읽기를 시작하며’

 

 

아내와 함께 그림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림 공부를 한 아내와 이공계 전공인 나는 책에 대해 서로 취향이 많이 다르다. 그림책 읽기는 그 접점으로서 같은 책을 각자가 어떻게 읽었는지를 들여다보는 기회가 될 듯하여 내가 아내에게 제안해본 것이다. 요새는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도 많이 나온다고 하니까. 난 그림책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에 아내가 읽고 싶어 하는 책을 받아서 읽고, 각자가 책에 관해서 써보기로 했다. 여기에 규칙이 하나 있다면, 글을 다 쓰기 전까진 상대방의 글을 읽지 않는 것이다.

 

막상 그림책을 받고서 읽어보니 난 그림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텍스트는 거의 없는 데다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을 어떻게 읽어내야 할지 당황스럽기만 하다. 단순히 부담 없이 금방 읽고 함께 무언가를 써보고자 했던 나의 바람은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았다. 그림책의 텍스트는 어디로 나아갈지 방황하는 나의 생각을 붙들고 제안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어떻게 그림을 읽어내야 할지가 나의 관심사였다. 안 그래도 공감능력(?)이 부족한 내가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일까 고민이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없던 일로 되돌리기도 멋쩍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어떤 일이든 마음의 부담을 많이 안고서 즐길 수는 없는 일이다. 요새는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읽기 안내 프로그램도 있다고 하던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런 프로그램에 집중력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서 나 혼자 시행착오를 해가며 꾸역꾸역 시작해보기로 한다. 난 아무래도 뭔가를 시작했다가 꽤 시간이 지나서야 내게 부족한 것들을 파악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인 듯하다. 나도 역시 타인의 경험과 지혜를 받아들이는데 익숙하지 않거나 둔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이 점이 스스로도 안타깝다. 하지만 그게 나인걸 어쩌겠나. 그러니 아내와 그림책 읽기도 그저 나의 엉뚱한 생각으로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시작하게 되었다. 아내가 뭔가 재미있어 보이니까, 그리고 그 즐거움을 나만 모르고 지나가면 아쉬울 것 같았다. 그러니 부담 없이 그림책을 읽어 가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붙들어 기록해보기로 한다.

 

“자 그럼 이제 시작!”

 

 

《할머니의 팡도르》

(원제: I Pani d'Oro della Vecchina, 2012)

안나마리아 고치(Annamaria Gozzi) 지음 | 비올레타 로피즈(Violeta Lopiz) 그림

정원정, 박서영 옮김 | [오후의소묘]

 

‘음식을 매개로 운명과 밀당 하는 할머니’

 

책장을 넘기면서 눈에 들어오는 빨간색의 패턴과 할머니, 그리고 검은 색의 형체 없는 존재는 궁금증부터 일으킨다. 빨강과 검은 색의 색연필이 대부분인 이 그림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죽음’이다. 아무리 어른들도 보는 그림책이라고 하지만, ‘죽음’이란 주제는 으레 달갑지 않다. 아무런 기대 없이 책을 펼친 문외한으로서는 다소 당황스럽다. 하지만 삶과 죽음이 별개가 아닌, 우리를 규정하는 자연의 엄연한 진실이라면, 우리가 기피할 이유는 없다. 대신 저자와 그림 작가가 이 형이상학적인 진실을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표현했을까가 궁금해지는 책이다.

 

빨간 두건을 한 할머니는 코와 볼은, 할머니의 집과 마찬가지로 붉은 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주름과 ‘가늘어진 입술’을 지니게 된 할머니는 겨울이 되면 매년 해오던 크리스마스 빵과 쿠키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 때 집 밖에 표현된 검은 색의 저승사자(사신)은 할머니를 데려오기 위해 집 안으로 들어온다. 할머니와 할머니의 집이 붉은 색으로 표현되어 있는 반면, 겨울이 되어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메마른 나무와 사신이 검은 색으로 표현된 것이 대조적이다. 온기를 지닌 존재, 생명은 붉은 색으로, 엄연한 진실, 곧 죽음은 검은 색으로 표현한 것이겠다. 할머니는 자신만의 비법으로 과일과 계피, 그리고 꿀이 가득 들어간 크리스마스 빵을 만드느라 사신이 곁에 가가와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사신의 임무는 응당 사람을 저승의 세계로 데려가는 일이다. 따라오라는 사신의 말에 할머니는 아이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빵을 완성하고 싶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대신 자신이 빵에 넣을 소를 만들던 주걱을 사신의 입에 넣어 준다. 이런 식으로 사신과 할머니 사이의 밀당이 일주일간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할머니는 사신이 집을 방문할 때마다 따뜻하게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자신이 만들고 있던 빵이며 쿠키를 맛보여 준다.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이 인상 깊다. 특히 추상적인 ‘죽음’을 형체가 분명하지 않은 검은 덩어리로 표현한 것도 재미있다. 이 사신은 할머니를 언제든 삼켜 죽음의 세계로 데려가려는 듯 언제나 커다란 입을 벌린 모습을 하고 있다.

 

북부 이탈리아 출신인 작가 안나마리아 고치는 신화와 전설, 민속 전통에 큰 관심을 갖고 이를 수집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 책의 이야기에 모티브를 제공한 것도 이탈리아 전통과 디저트에 얽힌 전설이라고 한다. 나는 가끔 우리가 삶과 죽음을 마치 별개인 듯 분리하는 시대를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다. 집에서 돌아가셨던 할머니와 달리 이제 우리는 집에서 맞는 죽음이 거의 금기시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과거에는 할머니 세대의 삶과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은 보다 가까웠던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할머니 역시 자신의 죽음을 단지 두려워 미룬 것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빵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일주일 정도를 미루었을 뿐이다. 죽음을 의연하고 담담하게 맞이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삶에 대한 작가의 지혜를 발견한다. 어쩌면 금빛 팡도르는 이승에서 그녀의 삶을 규정한 전통과 기억이 빚어낸 할머니의 분신인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가 되어 할머니는 자신이 만든 빵과 쿠키를 아이들과 사신이 함께 어우러져 나누어 먹는다. 그리고는 자신이 갈 시간임을 받아들인다. “이제 갈 시간이야”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의 바램 하나를 더 생각해 내었다. 나도 언젠가 떠날 시간이 되었을 때 의연하고 담담할 수 있기를 말이다. 사람과 사람을 통해 전해지는 전통과 집단의 기억은 할머니가 자신의 찰다 속에 숨겨 놓은 레시피처럼, 온기를 가지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금 책을 들춰 보았더니 한 그림에 눈길이 멈춘다. 할머니는 사신과 마주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접시에 담아 사신에게 건네는 장면이다. 빵 하나를 맛본 사신은 자신의 임무를 잠시 잊고 “아름다운 맛이군요”라고 감탄한다. 이 책은 삶과 죽음의 엄연한 진실을 그리면서도, 삶에 대한 비결 하나를 한 문장으로 남겨 놓은 듯하다. 바로 이 문장이다. 바로 매 순간을 살면서 ‘삶에 감탄하는 일’이 바로 삶의 비결이 아닌가 하고 내게 말해주는 듯했다. 오늘 처음 그림책에 대해 무언가를 끄적거리면서 발견한 것 하나다. 다음에는 아내가 어떤 책을 들고 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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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금지가 아니라 통제되어야 한다’ - 《금지된 지식》을 읽고 | 기본 카테고리 2021-02-18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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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금지된 지식

에른스트 페터 피셔 저/이승희 역
다산초당 | 2021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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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지식

: 역사의 이정표가 된 진실의 개척자들

에른스트 페터 피셔(Ernst Peter Fischer) 지음 | 이승희 옮김 | [다산초당]

 

 

지식은 금지가 아니라 통제되어야 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 괴테의 파우스트,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구약 성서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 이 모든 캐릭터의 공통점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들이 앎 또는 지식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가졌다는 점이라고 답하겠다. 물론 이 관점은 과학저술가 에른스트 페터 피셔가 금지된 지식에서 제시한 것을 기반으로 종합해본 것이다. 저자는 오디세우스가 지식에 중독된 자이며,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고 싶어 하여, 항해를 통해 모든 경계를 넘어서고 싶어 하는 인물이라 말한다. 파우스트는 이 세상의 온갖 지식을 섭렵했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 악마와 계약을 맺고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넘기면서까지 감각적 삶에 대한 호기심을 추구하려 한다. 또 저자는 신화 속의 오이디푸스를 지식과 진실을 향한 인간의 욕망’(302)을 드러내는 인물로 해석한다. 신탁이 예언한 금지된 지식을 얻자, 어머니이자 아내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 자신은 핀으로 눈을 찌른다. 구약 성서에서 아담과 이브는 뱀의 유혹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금단의 열매를 먹는다. 그 결과 분별을 얻는 대신 에덴에서 영원히 추방당한다.

 

이처럼 문화사에서 묘사되는 인간의 공통적인 특징은 지식에 목말라 한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 추구가 모든 인간의 본성이다’(9)라고 언급했는데, 고대인들도 이미 알고자하는 충동, 호기심을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간주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본능이 얼마나 강렬한지는 문학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야기 문학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천일야화를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가 된다. 화자인 셰에라자드 공주는 인간의 강한 호기심을 이용하여 이야기의 흐름을 제한하고 스스로의 목숨까지도 지켜낸다. 이 이야기를 지어낸 이들은 분명히 호기심이라는 인간의 본능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 속의 이야기와 작품의 구성에 어떻게 반영했는지를 명백히 보여주었다.

 

이 책에서 저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는 바로 이 인간의 본능적인 호기심, 앎에 대한 욕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인간이 만들어낸 지식이 인간 사회에서 어떻게 금지되어 왔는지를 폭넓은 사례를 통해 제시한다. 저자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지식의 위상에 대해 먼저 검토를 한다. 저자는 지식이 무엇인지 묻는데, 그에 따르면 지식이란 인간에게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대상’(21)이다. 나아가 지식정보’, ‘데이터를 좀 더 구체적으로 구분한다. 정보는 이해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1차적으로 우리에게 접수된 것으로, 신체에 감지된 감각 정보를 떠올릴 수 있겠다. 이에 반해, 데이터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데이터, 정보, 지식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위계구조를 갖는데, 지식을 의미 있게 사용하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지혜는 단지 인지 작용이 대상에 개입된 것을 넘어 어떤 가치를 내포하게 된다. 한편 지식에는 인간의 인지작용이 개입하기 때문에 각각의 인식 주체에 따라 지식 도출과정과 그 내용에 조금씩 차이가 생기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이 타인과 겪게 되는 충돌과 불화는 어떤 면에서는 앎에 대한 강한 호기심뿐만 아니라 앎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앎에 대한 태도가 다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저자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은 지식과 성의 긴밀한 유착관계다. 뱀의 유혹을 통해 이브가 획득한 금지된 지식은 금지된 사랑성적 결합을 의미한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사회 권력이 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규정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설명’(57)한다. 그는 인류사에서 지식과 성에 권력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통찰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권력이 지식과 성에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은 우리의 문화를 바라보고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서양 사회에서 이러한 특징을 예비했던 인물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닐까한다. 그는 어느 시기에 계시를 받고 회개한 후,고백록을 쓴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방탕했던 젊은 시절을 반성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가 원죄개념을 생각하고 종교 철학에 도입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 개념은 곧바로 지식에 대한 금지로 이어지게 되었다. 피셔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인간의 본능적인 호기심을 억누르고 금지했던 인물로 평가한다. 그의 원죄 개념이 종교라는 권위와 결합하여 도출한 금지된 지식은 인류사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무엇보다 유럽 지식인의 관점에서 지식 금지의 역사를 방대하게 다룬다.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국내에 큰 영향력을 지니는 미국문화 중심 사례가 아니라 유럽 중심의 사례들을 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국인 독자로서 비교적 신선하게 다가왔다. 또한 저자는 구체적이고 수많은 지식 금지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동시에 금지된 지식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이미 우리는 전 세계가 팬데믹에 영향을 받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왜곡되고 비밀스럽게 유지된 정보가 얼마나 위태로운가를 경험했다. 발병 초기에 (COVID-19의 시작이 정말로 중국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중국 정부 당국이 환자들에 대한 정보를 숨기기만 급급했던 모습을 떠올려 본다. 또 국내 모 종교집단의 방역지침 무시와 비협조, 정보의 은폐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도 분명히 보았다. 저자는 정보지식 사회에서 지식의 은폐가 권력에 의해 이루어질 때 사생활의 권리가 어려움에 처한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저자는 정보 권력에 의해 개발된 알고리즘으로 인간이 감시받게 될 때를 제시한다. 손글씨나 얼굴 분석만으로도 해당 사람의 성별이나 성적 지향을 알아내는 사례는 독자를 왠지 오싹하게 만든다. 이제 우리는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식은 보다 더 공개되고 투명해질수록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은폐된 지식이 공개되어 왜곡되어온 진실을 바로잡고, 삶을 보다 주체적으로 살아갈 기회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지식의 투명성이 모든 경우, 좋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최종적인 노벨상 수상자를 선정할 때 제안된 근거 기록에 대한 열람 금지 기간이 지나 공개되었을 때, 저자는 실망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않는다. 수상자를 결정한 이들의 어처구니없는 무지와 오판을 알게 된 저자는 오히려 투명성이 도움이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마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든 마술에 대해 비밀스러운 진실을 아는 것보다는 차라리 마술사의 침묵을 바란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저자가 지식에 대해 갖는 양가적인 태도다. 다시 말해, 저자는 지식을 금지하기 전에 지식을 책임감 있게 대하는 일”(244)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울러 고객을 착취하고 이들의 정보를 대가 없이 빼앗는정보 권력 페이스북의 사례와 인간유전자 정보와 유전자 편집 기술에 대한 우려를 드러낸다. 결국 저자가 지식에 대해 갖는 태도는 (지식이) 금지되어서는 안 되지만 통제되어야 한다’(364)는 입장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결국 저자도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사항은, 인간의 지식을 향한 충동은 기본적인 본능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의 호기심을 인정하고, 이를 강제로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이런 본능은 유전자 조작이나 권력으로도 금지시킬 수 없는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의 관점은 인간이 지혜를 모아 이런 지식에 대해 제한적으로 공개해야 한다는 입장에 더 가깝다. 금지되지 않은 것은 인간을 급속히 지루하게 만든다. 하지만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한 시인의 말처럼 인간은 진실을 향한 열망과 환상에서 느끼는 기쁨으로 충분하다’(311)고 느끼는 역설적인 존재인지 모른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금지된 지식과 관련한 과거 사례를 검토하여, 점점 강력해지는 정보 권력에 대해서도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나아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삶의 조건을 우리가 다시 인식하길 요구하고, 우리의 호기심, 그리고 지식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를 갖추길 바란다. 그래야 비로소 지식 그 자체가 또다시 만들어내는 비밀에 인간은 계속해서 호기심과 감탄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리뷰의 마무리는 이 책에서 줄곧 언급 된 파우스트의 한 구절로 마무리해본다.

 

그걸 인식한 얼마 안 되는 사람들,

어리석어서, 충만한 마음을 혼자 간직하지 못하고

몽매한 무리에게 자신이 느낀 것, 본 것을 발설했던 사람들,

그런 이들은 자고로 십자가에 매달리고 불태워졌지.

자아, 이보게, 밤이 깊었네,

이제는 그만해야겠네."

(파우스트 I, 정영애 역, 123)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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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균,쇠] 읽다가 발견한 흥미로운 단어와 셰익스피어의 언어유희 | 기본 카테고리 2021-02-17 14:06
테마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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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대표 저서 <Guns, Germs, And Steel>(원서)를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영어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어서 시도했는데, 벌써 6개월 넘게 읽고 있네요(다시 따져보니 10개월 째입니다 -,-;;). 틈나는 대로 읽기에 언제 끝날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제 17장을 읽고 있으니, 나머지 두 장만 읽으면 끝이 날 것 같습니다.

 

어제는 17장을 읽다가 발견한 한 단어를 발견했는데요, '암양'을 의미하는 ewe라는 단어의 발음[ju:]이 재미있어서 기억해두고 있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잡다하게 조사한 내용을 정리해봅니다.

참고로 숫양을 의미하는 단어는 ram이네요.

 

Guns, Germs, and Steel: The Fates of Human Societies

Diamond, Jared
W.W. Norton & Company | 2005년 07월

 

우선 <총,균,쇠>에서 단어 ewe가 나온 문장은 이렇습니다.

 

For instance, the words meaning "sheep" in many languages of the Indo-European language family, distributed from Ireland to India, are quite similar:

"avis," "avis," "ovis," "oveja," "ovtsa," "owis," and "oi" in Lithuanian, Sanskrit, Latin, Spanish, Russian, Greek, and Irish, respectively. (The English "sheep" is obviously from a different root, but English retains the original root in the word "ewe.") Comparison of the sound shitfs that the various modern Indo-European languasges have undergone during their histories suggests that the original form was "owis" in the ancestral Indo-European language spoken around 6,000 years ago. That unwritten ancestral language is termed Proto-Indo-European.

 <Guns, Germs, and Steel> 1997 ed., 343p

 

일반적인 양 sheep이란 단어의 인도-유럽어족에 관한 설명을 하는 대목입니다.

 

ewe의 발음[ju:]이 재미있는데요, 더 재미었었던 것은 

셰익스피어의 <The Merchant of Venice> 1막 3장에서 

ewe단어로 언어유희하는 장면을 '발견(?)'해서 여기에 모아봤습니다. 

 

 

<The Merchant of Venice> 1막 3장에서 ewe가 나오는 문장은 이렇습니다.

Antonio(안토니오): (...)

                     Was this inserted to make interest good? 

               (이자를 정당화하려고 그 얘기가 성경에 쓰였다는 거요?)

                     Or is your gold and silver ewes and rams

               (아니면 당신의 금화와 은화가 암양과 숫양이라는 거요?)

 

Shylock(샤일록): I cannot tell. I make it breed as fast. 

                 (그건 모르지만, 내 돈도 그만큼 빠르게 새끼 치지요.)

                  (...)

                              [번역은 펭귄클래식버전, 강석주 역]

 

여기서 this는 <창세기>  30장 25-43절에 보면 야곱이 장인 라반으로부터 검은 양을 자기 몫으로 달라고 해서 재산을 불리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이야기를 가리킵니다. 다시 보니 야곱이 이렇게 의도적으로 검은 양을 낳도록 구별해서 사육한 이야기는 성경에서 '사육에 의한 변이 생산'을 기록하고 있는 최초의 기록으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참고로 다윈은 <종의 기원> 1장에서 바로 '인간의 사육에 의한 변이'를 이야기하고, 2장에서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변이'에 대해 이야기 한 다음 '자연선택' 개념을 도입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성경에서 생물학 지식을 이용하여 재산을 불린 최초의 인물이라고 이해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재미있는 것은 위의 대사에서 셰익스피어가 암양의 복수인 ewes[ju:s]의 발음과 샤일록이 유대인(jews)인 것, '사용하다'는 의미의 use를 떠올리게 하면서 셰익스피어의 특징적인 동음이의어식 언어유희(pun)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견해는 미국 노트르담 대학 방송연극영화과 교수 피터 홀랜드의 작품 해설(펭귄클래식 버전 <베니스의 상인>, 181p)에서 참고했습니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갈 부분은 암양을 통해 새끼를 치는 것과 이자로 재산을 불리는 현상을 기가막히게 병치시키고 있다는 부분이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베니스의 상인

윌리엄 셰익스피어 저 /강석주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4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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