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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와 제국 : 식민지말 문학의 언어, 생명정치, 테크놀로지 | 2011-09-30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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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벌레와 제국

황호덕 저
새물결 | 201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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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 지금도 인간을 벌레로 만들어낸다. 벌레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 우리가 가진 언어와 생명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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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쏘공 7/8/9 마지막 도서는 문체, 분량, 기한 그 모든 것에 있어서 최고의 난이도를 보여주었다(리벼c님 책 늦게 도착하면 마감기한 연장해주신다고 하셨는데 잊으신 듯...). 이 책은 현대철학자들의 논의에 기반하여 근대문학과 언어에 대해 연구한 논문들을 묶은 책인 것 같아보인다. 어떤 책의 서론을 읽을 때 이 독서는 어떻겠구나 감이 오는데, 이 책을 펴자마자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명쾌하게 잡히지 않는 학술적인 문체에 숨이 막혀왔다. 생소한 인명과 단어, 한자어나 외국어, 대량의 주석도 그렇지만 학문 공동체에서 당연히 알 것으로 전제한 내용을 쏟아내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논문이나 학술서적을 읽다보면 가끔 학문이나 학술적 글쓰기에도 세대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을 때가 있다. 우리 세대가 기성세대가 되면 논문의 문체는 어떻게 변해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윤구병 선생님께서 지식인은 제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하셨던 말씀이 이 책을 읽는 내내 생각났다. 이 책에서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그 내용이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기도 전에 독자가 독서를 포기하게 될 위험성을 보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전달불가능성'을 의외의 곳에서 만난 셈이다. 은연 중에 독자를 소외시키는 학자, 비평가의 언어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저자가 연구자로서 갖는 전문성은 탁월해보이니 꾹 참고 읽으면 개개인이 얻을 수 있는 면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해력이 떨어지는 탓인지, 근대에 대해서는 미시사를 다룬 책만 읽어서 그런지 일본 제국과 조선의 관계에 대한 저자의 입장 자체가 잘 잡히지 않았다. 서론에서 '일제 강점'과 '식민'이 다르며 한국도 일본도 예나 지금이나 '식민'이라는 단어 사용하기를 꺼리고 강점(한국), 내지/외지를 구분(일본)하는 식으로 그 단어를 피해갔다고 저자는 말한다. 김구는 일본에 속하기 싫어했고 최재서는 일본에 속하고 싶어했다. 그들의 입장 차이는 일제의 통치를 '강점'으로 받아들인 입장과 '식민'으로 받아들인 입장을 대표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논의를 극단으로 몰아가 '식민'의 입장에서 조선인들이 처했던 현실을 논의하겠다고 밝힌다. 이러한 전제에 따라 책 내내 저자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서 사실을 기술하는 듯이 '식민'을 기반으로 그 시대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 담긴 저자의 가치판단은 무엇인가? 내용 이해의 어려움이 문제가 아니라 그저 문장을 또렷이 이해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독서 과정 중 내내 이 질문이 머리속을 맴돌았다. 이 책을 통해 '일제는 강점이 아니라 식민을 기반으로 통치를 했다, 친일로 전향한 지식인들은 식민을 옹호했던 것이다'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할 증거를 제시하는 저자의 행위 속에 특정한 방향성을 가진 가치판단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우리 시대에 '식민사관'에 대해 팽배해 있는 가치판단처럼 이 책도 불온한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좀 더 그 시대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참신한 시각을 담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서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저자의 글들이 전체적으로 불온한 논조를 띠고 있는 것 같아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왜냐하면 위의 모든 의구심과 궁금증이 에필로그에서 싹 풀렸기 때문이다. 일제 통치에 대한 그의 입장이 잡히지 않았던 것은, 그가 식민주의에 대해 계보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분석하고자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일제 치하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이 겪었을 내면적인 갈등에 대해 좀 더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당대 '지식인'들이라면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견문도 넓혔으니 바보는 아니었을텐데, 일제가 '내선일체'나 '대동아공영' 허황된 주장을 퍼뜨릴 때 왜 협력했을까 항상 궁금했다. 정말 지킬지 안 지킬지 확신할 수 없는 일제의 그 공허한 약속을 어떤 이는 마음 깊이 믿었을지도 모르고, 어떤 이는 현실적으로 취할 것만 취하자는 실용주의적인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저자가 제시한, 내선일체와 대동아공영이 아시아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일제의 논리가 생각보다 탄탄하고 치밀해서 식자일 수록 납득할 만한 것일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것 같은 그 암울한 시대에 반은 일제의 협박에 의해, 반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일제의 논리를 내면화하며 전향한 지식인도 꽤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먼 훗날인 지금 친일파로 분류되는 그들을 쉽게 비판해버리기 전에, 내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나는 어떤 입장에 섰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물론 친일로 전향한 이후 그들이 누렸을 혜택에 대해서는 분명 책임 추궁을 당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근대문학 연구자로서, 당대 언어와 문학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즉 '타인의 얼굴'이 아니라 '타인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것 같아보인다. 개인적인 관심사인 '숭고(말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감각불가능한, 전달불가능한)'가 떠오르는 부분이 있었다.

"물론 많은 사라진 자들, 빼앗긴 목소리들이 있었으리라. 지배자archons란 기록관archeion을 의미하고, 지배는 당연히도 스스로의 논리에 합당하지 않은 기록들을 재ash로 돌린다. 그 재의 더미- 입 밖으로 내어지지 못한 말들의 영원한 침묵. 들을 수 없지만 들어야만 하는 이것. 이제 더는 말할 수 없는 타자들- 불태워진 목소리들을 상상하는 윤리 속에서 어쨌든 우리는 '쓰인 것'을 해명하는 '과학'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나의 해명, 나의 결론은 여전히 애매하고, 그런 한에서 결론이 될 수 없는데, 어떤가 하면 적어도 지금의 나의 '사적' 아카이브에는 '다른' 말이 많지 못하다. 그것이 어렵다. p.227"

 

(아리스토텔레스-)하이데거(-현대 철학자들)의 신-인간-동물-기계를 가르는 '유한성'과 '언어'의 문제에 대한 논의는 저자가 논문들을 재배치하는 기본 토대가 된 것 같다. 차례를 보면 무한하고 언어가 있는 '신', 유한하고 언어가 있는 '인간', 유한하고 언어가 없는 '동물', 그리고 언어와 유한성을 넘어서는 '기계' 도식에 따라 본문은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의도가 정말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읽었다.

 

"1장: 신화와 정치, 믿음과 약속의 체계들", 여기에서는 천황을 상징으로 신격화된 국가와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북계 신화를 재발견하려고 했던 노력을 다룬다. 천황은 대대적인 의식을 통해 신민에게 인간 혹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증여한다. 이러한 상황은 투쟁을 통해 인권을 쟁취한 유럽과는 다르다. 그러나 세상에 선물은 없다는 데리다의 말처럼 신격화된 국가는 권리를 선물하고 목숨을 요구한다. 

저자는 책 내내 일본의 겉과 속의 차이를 계속 드러낸다. 겉으로는 내지인과 외지인을 동등하게 대할 것을 약속하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내지의 외연을 계속 넓혀나가면서 외지를 먹어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특히 저자는 그 시대에 언어를 통해 나타나던 차이와 차별에 집중하고 있다. 신격화된 국가가 목숨을 요구하는 것은 조선인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과연 그 탐탁지 않은 '권리'라는 것이 온전한 것이었는지 의문이다.

 

"2장: 언어와 삶- 상황과 제도들"에서는 고쿠고(일제 시대의 국어가 된 일본어)와 조선어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근대의 민족 담론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언어일 것이다. 민족어는 민족 정신을 환기시켜 독립운동을 부추길 것이라는 일제의 두려움과, 언어가 통일되어야 군인들을 비롯한 조선인을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으리라는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었다. 내지의 외연을 대륙으로 넓히는 과정에서 조선어 없애기는 곧 조선 없애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완벽하게 일본어를 발음할 수 없는 조선인은 항상 차별 받는 타자, 소수자가 되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을 식별하는 방법으로 발음하기 어려운 일본어를 말해보게 했던 사례는 유명하다.

당대 지식인들은 조선어 사용에 대한 논리를 만들어내었다. 그 중 하나는 '조선어 해소론'이었다. 일제의 논리가 납득되어서이든, 현실적인 필요 때문이든 그들은 조선어가 아닌 고쿠고를 사용하자고 주장한다. 고쿠고를 전용하는 것이 내선일체를 완성하는 길이고, 차별 받지 않으면서도 내지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에 의해 조선인은 어떤 목적을 위해 모국어를 버릴 것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영어 몰입 교육'의 논리가 생각났다. 아니나 다를까 저자도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어서인지 다음 장에서 그에 대해 언급한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은 미국 제국주의의 치하에 있는 것일까. 조금 길지만 기억해두고 싶은 부분이라 옮겨본다.

"영어로 말하기. 예외적 순간이 모든 상례적 삶을 조직하고, 예외 속의 능력이 인간을 나누는 절대적 기준이 되어 가는 오늘날, 다시 김사량을 읽는다. 영어강박에 강력하게 붙들린 한국의 오늘을 언어정치학의 관점에서 문제제기하며 '언어'와 '인간'을 질문할 때 우리가 처음으로 떠올리는 순간이 식민지 혹은 식민지의 일본어이기 때문이다.

물론 외재적 힘에 의해 강요된 일본어와 '자발적 선택'의 형식을 취한 영어 몰입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언어를 선택한다거나, 언어를 특정한 '목적'과 관계시키는 움직임은 언제나 강한 비윤리성을 포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일본어든 영어든, 그에 대한 선택은 선택이 불가능한 자들에 대한 배제와 '포기'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물론 단일언어주의는 인간의 오랜 이상이었고, 또 구체적인 삶에서 종종 부딪히는 '실용적 필요'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실용'의 근거를 묻는 일이다. 인간은 단순히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 산다. 그 행복은 언제나 일종의 '느낌'이고 지금 이순간과 관련되어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미래를 위해 지금을 양보하라는 주장은 언제나 틀렸다는 사실이다. 장혁주나 김사량 같은 조선 문인들의 일본어, 강용흘의 영문학, 재일조선인 문학이 표시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고통'이며 선택이 아니라 강요된 조건 속의 몸부림과 분열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례를 참고하며 하이데거는 인간과 동물과 신의 존재론적 차이를 유한성mortality과 언어language라는 표지를 통해 구별했다. 인간은 유한하나 언어를 소유하고 있다. 신은 언어를 가지지만 무한하다. 동물은 유한한 존재이나 언어를 소유하지 않는다. 여기서 언어는 수단이 아니라 존재의 조건이나 근원이다. 유한한 인간에게서 그들의 언어를 빼앗고, 새로운 언어 속에서만 인간의 지위를 부여하려 할 때 허다한 인간은 인간도 동물도 아닌 어떤 것, 즉 벌거벗은 삶의 영역으로 추방되고 만다. 인간은 언어를 가진 '생명체'이다. 이때의 언어란 형이상학적인 말logos을 뜻하지만 이 '말'은 살아있는 인간의 신체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phone/voice'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언어란 결코 선택이나 실용적 도구가 될 수 없다. 유한한 존재에게 100년 후의 행복이나 자식 세대의 행복을 말하며 현재를 포기하라고 할 수 있을까. 80세 남짓한 삶의 몇몇 예외적 순간을 위해 전 인생을 저당 잡힌 인생은 행복한가. 인간은 무한한 존재가 아니다.

타자의 언어를 익히는 일 자체는 언제나 윤리적인 요청이자 매우 정당한 주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익을 위해 타자의 언어, 특히 힘 있는 언어를 익히려 할 때 그것은 일종의 폭력에의 동참으로 전락하고 만다. 일본어나 영어에 대한 욕망이 어떤 타자들을 배제하는지, 어떤 인간들을 비인간으로 만들게 될지를 생각해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김사량의 글을 포함해 식민지말의 문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바로 지금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는 언어가 어떤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남의 말을 배우되, 나의 삶과 남의 삶 모두에 호혜적인 방식으로 배워야 한다. 영어를 배우되, 잘 배우고 즐겁게 배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한편 또 다른 타자에 대한 폭력을 내재하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전히 우리가 들어야 할 고통의 목소리가 한국어 사이에서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복과 행복했던 순간들이 이 한국어 목소리를 통해 존재했고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작위와 폭력을 동반한 채 언어를 배우는 일이 결코 윤리적으로 정당할 리 없다. pp.423-425"

또한 일제의 검열 제도에 의해 쓰여진 모든 글은 마치 '엽서'처럼 되어, 조선인 모두는 우편불안에 빠진다. 가장 내면적이고 비밀스러운 내용을 담는 일기와 편지에서조차 잠재적인 수신자는 일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기 언어를 빼앗긴 조선인은 비인(非人), 벌레가 된다.

     

이러한 논의를 이어가서 "3장: 생명정치, 말하는 동물의 비명들"에서는 언어를 빼앗기고 동물화된 조선인의 모습을 그린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특히 언어를 다루는 작가들은 곤란에 빠졌다. 일본어로 글을 썼느냐의 여부만으로 그들의 입장을 따지기에는 조금 복잡한 측면이 있다. 근래 재조명되고 있다는 김사량의 입장이 바로 그렇다. 저자는 그가 조선과 조선어를 사랑했기 때문에 일본어로 글을 썼다고 주장한다. 일제를 비판하기 위해 내지인을 대상으로 소설을 썼다는 것이다. 그러한 글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내지에 대한) 지방문학으로서 아쿠타가와 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단다. 아무튼 번역, 일본어 소설에 파편적으로 조선어를 넣기, 한글로 조선인이 발음하는 일본어 표기하기와 같은 김사량의 작업들은 고쿠고와 조선어의 경계에서 차이를 드러내는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를 빼앗겨 동물화된 조선인들의 비명을 담은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일본어나 영어로 쓴 소설에서 '아이고'를 각각 가타가나,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것은, 내지인이나 외국인들에게 조선인이 조선어로 고통에 대한 비명을 지르는 목소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언어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입이라는 인간의 신체 기관은 '말하기'도 하고 '먹기'도 하는 기관이지만, 언어를 빼앗긴 조선인은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이 압착되어 버리고 동물화 되었다.

일제 치하의 조선인들은 이중언어 구사 환경에 놓였을 뿐 아니라 이중적인 공간에 살았다. 근대 미시사를 다룬 책을 읽을 때에는 '모던 보이가 산책을 좋아했구나'라고 생각하며 무심히 넘기곤 했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들의 산책에 담긴 의미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일본 문화를 모던한 것이라며 동경하고 향유하고자 했던 지식인들은 외지 안의 내지를 산책, 구경한 후 조선이라는 일상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는 것이다. 전자는 감각적으로 생경한 공간이었고 후자는 감각적으로 친밀한 장소였다(이 부분에서 저자는 중립적인 경성에 대해서는 공간space이라는 단어를, 경성을 신체 정치적으로 논의할 때는 장소topos라는 단어를 사용하겠다고 한다). 저자는 채만식이 그의 단편 '종로의 주민'에서, 주인공이 경성 속 일본인 명동을 산책하는 장면은 묘사하지 않고 건너뛰고 그 경계에서 종로로 나온 후는 모든 지명을 조선어로 기록하면서 세밀하게 묘사했다고 주장한다. 일제가 내지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 일본인을 경성으로 '이식'했기에, 신체적 장소를 빼앗기고 조선인이 겪었던 고통을 채만식이 의도적으로 드러냈다는 주장인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에게 종로는 체화된 장소, 몸 그 자체였던 것이다.

 

"4장: 국가의 기예와 그 사상적 구도"에서는 기계화된 국가와 통치에 대해 다루고 있다. 언어와 역사, 일제의 기술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통치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곧 푸코와 아렌트가 나올 때가 되었다 싶었다. 근대의 에피스테메는 과학적 사실성을 추구하는 것이었기에, 일제 말기로 갈 수록 과학기술은 신격화되고 통치는 기예적으로 변한다. 국가와 지식인은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메커니즘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이렇게 되고 보니, 마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대표되는 '악의 평범성'처럼 일제에 속했던 통치 관료들은 전후 과거 청산 과정에서 책임 추궁을 피해갈 구멍을 확보한다. '위에서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안 시켰는데 말단이 잘못 적용했다'와 같은 변명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즉 통치의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 장 첫 번째 절의 주요 사료가 된 우방협회의 '조선총독부 관계자 녹음기록'의 대화에서도 관료들의 그러한 자세가 드러나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한편 저자는 녹음기록이나 회고록이 사료로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거시사가 승자에 입장에서 남겨진 기록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미시적으로 남겨진 그러한 증언과 회고도 사료로서 특별한 의미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관료들의 변명처럼 왜곡과 은폐의 위험성 또한 내재하고 있다.

 

그리고 ㅂㄷ 교수님의 '기억과 상상'이 떠올랐던 대목.

"'개인의 기억 속에는 집단적 성격이 내재한다.' 따라서 '개인의 기억'과 '집단적 기억'은 서로 간섭하는데, 역사에서는 후자의 간섭력이 언제나 더 압도적이다. "개인은 사회적 기억의 틀에 의존하면서 기억을 소환해낼 수 있고, 각각의 기억은 사회적 기억에 녹아드는 순간에야 교육 내용, 개념이나 상징으로 변형되어 의미를 가지게 되며 사회적 사상 체계의 일부가 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베네딕트 앤더슨 이래의 '상상의 공동체'론에 접속된 연구로서 앤더슨 스스로가 "상상의 공동체" 증보판에서 '기억과 망각'이라는 장을 덧붙인 바 있다. 소위 상상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 만들어진 전통, 즉 집합적 기억이라고 할 때, 상상의 공동체는 '기억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일부러 비워 놓은 무명용사 기념비나 무덤에 대한 의례에서처럼, 우리는 기억하는데, 무엇보다 상상을 통해 그렇게 한다. pp.518-519"

 

"유한한 인간은 말이라는 전달 가능성 안에서 영속을 꿈꾸고, 그러하기에 기꺼이 죽음 앞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죽지만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위해서, 어떤 일반의지를 위해서 죽으며, 이 의지와 함께 기록됨으로써 기꺼이 죽는다. p.527"고 하는 아렌트적인 문장, 여기에서 문학에서 정치적인 것을 회복시키고 싶어하는 저자의 의도가 드러난다. 목소리와 언어를 담은 문학은 정치적인 것이고, 또한 정치적일 것을 요청받는다. 입 주위에 근육이 있다는 나꼼수 정봉주 의원처럼 말을 잘 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아니면 크레인 위에서 투쟁하면서 말의 목소리화를 통해 무력하게 정치에 참여할 수밖에 없거나. 어쨌든 언어는 정치적인 것이다. 결론에서 저자는 말이 고기처럼 허공에 매달려 있는 이 때, 문학은 언어를 어떻게 사용해야하며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던지는 것 같았다. 

 

책을 읽는 것이 여러모로 고통스러웠지만 어렵게 배운 것일 수록 소중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서 베이컨의 숭고한 혹은 감각적인 그림들이 생각났다. 고통 받는 예수수난상을 마치 구경 당하는 고기로 표현한 그림. 얼굴이 뭉개져 말할 입이 없어진 자화상, 또렷이 감각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져 충격으로 다가오는 그의 그림들이 생각났다. 언어를 빼앗겨 말이 목소리로 격하되고 벌레가 되었던 조상님들, 그리고 여전히 국가로부터 별반 고기나 기계와 다르지 않은 취급을 받는 듯한 우리를 돌아보며.
(그림 출처: http://blog.naver.com/sunmodol?Redirect=Log&logNo=120036743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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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데우스 | 영화 2011-09-28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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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아마데우스

밀로스 포먼
미국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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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케일 크고 세련된 영화가 정녕 1984년에 만든 것란 말인가!!
요즘 나오는 예술을 소재로 한 여느 영화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시대를 살았던 천재 모차르트를
이해하기 어려워하면서도 동경하는 당대 사람들의 모습을 잘 그린 것 같다.
물론 모차르트의 모습에는 과장이 많이 섞여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차르트 이미지는 이 영화에서 기인한 바가 큰 것 같다. 

살리에리의 스토리텔링에 기대 영화를 전개해나간다,
실제로 주인공도 모차르트라기보다는 살리에리인 것 같아보인다.
모차르트에 대한 애증이 교차하는 살리에리 내면의 갈등을 잘 보여주었다.
모차르트 같은 사람에게 재능을 준 신을 원망하면서도,
펜을 잡을 수 없는 그를 대신해서 곡을 받아 적는 그런 마음은 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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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 Normal: 평범함 속에 숨겨진 감동 슈퍼노멀 | 2011-09-27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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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Super Normal

후카사와 나오토,재스퍼 모리슨 공저
안그라픽스 | 2009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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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이 슈퍼노멀해질 수 있는 그 지점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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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의 노모스, 라틴어의 노르마, 영어의 노멀, 우리 말로는 형식이나 규칙, 법칙 같은 말로 바꿀 수 있을 Normal 앞에 Super가 붙었다. 슈퍼노멀은 노멀하지 않은 것과는 다르다. 노멀함을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논문 때문에 읽은 책이 아닌데, 어느 새 논문 생각을 하며 읽고 있었다. '슈퍼노멀' 전시 이후 만든 이 책에는 슈퍼노멀한 물건들의 사진과 그것들이 왜 슈퍼노멀한지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고, 마지막 부분에는 이 전시를 기획한 두 디자이너와의 대담이 실려 있다. 슈퍼노멀이라는 신조어가 어떤 철학을 담고 있는지는 이 대담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대담이나 설명이나 물건 자체보다 탁월해서, 그들 손에 가면 다 슈퍼노멀한 물건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 것 같기까지 하다.

 

슈퍼노멀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는 '원형, 형식, 이데아', '일상, 평범, 관계, 기능, 미니멀리즘'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전자는 좋은 디자인이나 좋은 물건이란 원형에 가까울 수록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대담에는 '완전성'이라는 단어도 등장한다. 그리고 범신론적으로 신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는 물성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대담 진행자는 이를 일본적 세계관에 기반을 둔 설명으로 보고 있지만, 완전성이나 신적인 것에 대해서는 고전주의에 비추어봐도 그다지 다르지 않아보인다. 형식과 내용은 미학에서 예술을 읽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대표적인 설명틀이기도 하고, 며칠 전 봉언니와 둘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를 했기에 아래 내용이 인상 깊었다.

"가메쿠라 유사쿠가 쓴 일본의 전통과 형태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는 '가타치形'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순수한' 형태, 즉 시장의 압력이나 다른 어떤 강요에도 흔들리지 않는 형태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가타치는 형태의 특유한 면모를 보여주는 성질을 가리키는데, 특정한 감정적, 이성적 속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는 책에서 '물질과 행위 모두에 존재하는 형태', '일본에서 형태는 여전히 단순함, 우아함, 그리고 장엄함을 표현한다'..." p. 108

 

후자는 기능에 적합한 디자인이기 때문에 과도하게 멋부리지 않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물건이라서 자주 오래 사용하게 되는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오래 사용한 물건은 손때가 묻어서 윤이 나고 물건에 혼이 깃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망치'에 대한 설명이 인상 깊었다. 전시의 기획자는 슈퍼노멀을 설명하면서 고무로 손잡이 모양을 만든 망치보다 나무 자루만 있지만 오래 사용해서 사용자의 손에 맞게 변형된 망치를 예로 든다. 클립 끝이 날카로워서 종이가 찢어지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아래와 같은 종이 클립이 상용화된다면 종이가 보호될 것이다. 이렇게 슈퍼노멀은 물건과 사용하는 사람,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고려한다.    


 

디자인에서 노멀함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 그것을 기반으로 아주 약간 넘어선 디자인이 화려하게 멋부린 디자인보다 훨씬 나은 것일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경험적으로 생각해보아도 납득이 된다. 상업주의 속에서 조금이라도 눈에 띄려고 최대한 화려하고 참신하고 싶어하는 디자인들 속에서 평범함은 오히려 매력적일 수 있다. 자주, 오래 사용해서 손때 묻은 물건들은 의외로 평범한 물건들이다. 노멀함과 슈퍼노멀함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에 대해 철학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다. 아마 한동안은 주변에서 슈퍼노멀한 물건들을 찾아보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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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생각의 탄생 | 2011-09-2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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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낭만주의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블루마크 기획/최연정 글/박태성 그림/문성원,이용재 감수
푸른나무플러스 | 2011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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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도서지만 어른이 읽어도 좋을, 낭만주의 개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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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낭만주의에 관심 생겼을 때 학교 도서관에 신청해놓고 기다리다가 정리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결국 구입해 읽었다. 어린이용 도서이지만 낭만주의에 대해 시대별, 장르별, 나라별로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어서 어른이 읽어도 손색이 없겠다. 이 책에 비하면 예전에 읽은 문고판 "낭만주의"는 구성이 산만했던 것 같다. 아무튼 어린이 때부터 서양의 각종 사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둔다면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을 것 같다.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예술의 필수 구성 요소가 '소재'와 '형식'이라면 고전주의의 특징은 '고상한 소재, 엄격한 형식'이었다. 이를 답답하게 생각한 사상가, 예술가들로부터 낭만주의는 태동한다(정치적인 이유 등 다른 요인도 있었지만). 이 책 역시 괴테와 실러의 질풍노도 운동을 그 시발점 중 하나로 제시한다. 아래 글을 읽으며 실러 미학에 나타난 이상과 현실에 대한 생각이 연상되었다. 실러가 이미 간파했던 가상으로서의 예술의 위험성까지도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낭만주의가 잘못 적용되면 현실로부터 도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병폐는 사실주의(리얼리즘을 말하는 듯)를 불러왔다.   

 

"유럽의 낭만주의는 현실에 대한 거리두기와 비판 의식에서 싹터 왔다. 현실이 긍정적이고 아름답기만 하다면, 낭만주의자가 굳이 자유를 부르짖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낭만주의자는 부정적인 현실에 맞서, 자신만의 이상 세계를 발견한다. 그것은 때로는 이국적인 문화일 수도, 때로는 과거의 역사일 수도, 또 때로는 자연일 수도 있다." p. 165

 

요즘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관계에 대해 고민 중이다보니, 낭만주의를 이끈 예술가들 중에서도 회화에 있어서 터너와 다비드의 숭고함, 컨스터블의 아름다움이 인상 깊었다. 영국 인상주의 전시 때 누군지 몰라서 무심코 지나쳤던 그림들이 낭만주의에 있어 이렇게 큰 의미를 갖는 것들이었다니. 또한 문학에 있어서 빅토르 위고가 "에르나니"나 "파리의 노트르담"을 통해 기괴함과 추함까지도 예술에 끌어들이고자 노력했던 것을 보았다. 기괴함과 추함까지도 숭고한 감정을 불러올 수 있는가, 존엄함과 도덕적 힘을 보여주었던 콰지모도를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빅토르 위고)는 예술이 고귀함과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기괴함과 추함까지도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p. 140

"그 순간의 콰지모도는 진정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름다웠다. 이 고아는, 이 허섭쓰레기는, 자신이 존엄하고 굳세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p. 145

"낭만주의는 추醜를 미美의 경지로 끌어올린 최초의 예술 사조다. - 예술 비평가 이주헌" p. 147

 

이 책이 우리나라 낭만주의도 다루고 있어서 놀랐다. 기획자는 외국인인데, 글은 한국인이 썼단다. 외국책을 번역, 재구성한 것일까? 대학교 때 한국 근대 미시사가 유행하면서 쏟아져 나왔던 책을 읽었던 것이 생각났다. 식민지 치하의 우울함, 연애와 죽음 같은 어두운 분위기가 1920년대 우리나라 낭만주의의 분위기였다고 이 책은 말한다.

 

이 책에 대해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도판에 몇 년 작인지도 표기해 주었으면 좋았겠다는 것이다. 예전에 역사를 배울 때에는 연대를 왜 외워야하나 싶었는데, 프랑스 혁명 덕분에 굉장히 상징적인 1789년을 기준으로 서양 문화가 급변한 것을 공부한 후로는 특정한 해를 기준으로 사상사에 따른 특징을 유추해보는 것이 유용하게 느껴진다. 특히 이 책은 특정 사조를 설명하는 책이니만큼 그림이 그려진 연도가 독자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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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제 cho young-jae | 2011-09-21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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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조영제

조영제 저
안그라픽스 | 201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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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조영제님의 디자인 포트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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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도서관에 왠일인지 디자인 관련 신간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이 책은 디자이너 조영제님의 디자인 포트폴리오이다. 관련 분야 종사자들께는 생업이고 밥줄이겠지만, 문외한으로서는 머리 식힐 때 휙휙 넘겨보기 좋구나.

 

광고 포스터가 대부분인데 80년대 디자인에서도 현란한 색감, 사진과 그래픽 사용, 참신한 발상, 한국적인 것 변용하기 등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사진들을 콜라주하기를 좋아하시는듯. 디자이너가 어떤 발상과 의도를 가지고 이런 디자인을 했는지 추측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서울대 교수님이셨다니, 선입견이 작동한 것일까?? 솔직히 예술가라기에는 상대적으로 저항이나 혁신에 대한 느낌이 덜 느껴졌다. 로고는 기업의 상징일진데, 어느 기업인지 말해주지 않아도 로고만 보면 알 수 있는 로고를 많이 만드셨다는 점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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