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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뺑반

한준희
한국 | 2019년 01월

영화     구매하기

* 스포일러 주의!!

 

0. "파이널리스트" 보러 메가박스코엑스 갔다가 먼데 하나만 보기 아쉬워 개봉 기다렸던 이 영화 함께 예매함(마지막주 수요일 할인+yes24 마지막주 수요일 할인 쿠폰). 설 연휴 겨냥한(때리고 부수고 달리고 싸우는) 쉬운 영화인데, 요즘 푸코 책을 읽고 있어서 생각하며 보느라 어렵게 봄.

 

1. 대형 기획사에서 만들어 멀티플렉스에 걸리는 영화(마지막주 수요일에 개봉해서 멀티플렉스 점령 ㅎㄷㄷ..) 별로 안 보는 요즘인데 순전히 류준열 출연작이라 챙겨봄. 덕후 이미지도 중2병 눈빛도 마치 일상 같은 자연스러운 연기, 역시 믿고 봐야함!! 특히 감으로 뺑소니 원인 파악하는 장면들 매력있음. ㅠ_ㅠ...

 

2. 말고도 캐스팅 꽤나 괜찮음. 카메오들이 있으셔서 자세히 거론하긴 어렵지만. 염정아 덕분에 갑분 '스캐', 분량 많지 않은데 은근 신스틸러였음. 중요한 장면에서 친구 '아갈머리를 찢어'버릴까봐 ㅎㄷㄷ... 이 영화 보실 분은 sky캐슬 보고 보시면 나름 다른 재미가 있으실 듯.

 

3. 교통안전 캠페인 영화인줄("안전벨트 매라"는 대사 등등"). 푸코, "안전, 영토, 인구" 등 통치에 대해 생각나는 지점이 많았음. 선/악, 안전/위험에 대한 프레임은 주인공이 경찰이라 영화 자체가 경찰 관점인 듯, 추격신에서 CCTV와 각종 기기를 총동원해 '시민의 안전을 지키면서도 세밀한 통(내)치'하는 장면들이 잘 보임. 설 연휴 전후로 많은 관객이 편하게 볼 영화로 예상하는데, 웃고 떠들고 감동하며 관람하는 동안 여러 모로 '세뇌'당할 듯(이를 테면 자동차는 위험함, 과속 뺑소니를 하는 자는 정신이상자임, 착한 경찰은 시민을 지켜주는 존재임 등등). 또한 (착한 쪽) 검경 합작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지점이 인상 깊었고, 돈 많은 쪽이 법률에 대한 자원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지점은 푸코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분석했듯 우리가 경제(자유시장)이 법률을 포섭한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함. '보이는 진실'인 증거를 역으로 이용하는 부분이 재미있었음.

 

4. 푸코의 정신의학에 관한 논의들도 생각났는데, 영드 "셜록"의 셜록과 모리아티 캐릭터와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두 남성을 보며 '정상/비정상', '선/악'을 철저히 구분하기 가능한지 궁금해짐. 특히 '민재' 캐릭터는 선악 경계에서 계속 선택하기를 요구받고 있음. 여기서 경찰로서 그 갈등을 잘 극복했을 때 나타나는 인간성을 부각시킨 점은 다소 교훈적이어서 식상하게 느껴짐. 이런 맥락에서 사실 현대인은 다들 어느 정도는 정신에 이상한 지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 않나.

 

5. 캐릭터는 "셜록"들인데 너무나 한국 영화스럽게 해결 방식은 한국적임. 자동차 추격신 등에서 어설픈 지점들 아쉬움. 개인적으로 며칠 전 이성민 주연 "보안관"을 봤기 때문에 이 영화가 "보안관2"처럼 보였음. 감독 전작이 "차이나타운", 그나마 중요한 여성 캐릭터가 많았던 점은 선방. 쿠키 영상 보고 있으려니 이 영화 잘되면 "뺑반2"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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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 | 2019-01-2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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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성의 역사 2

미셸 푸코 저/문경자,신은영 공역
나남 | 2004년 06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푸코는 고대 그리스 자유인 남성이 보였던 삶의 양식(양생술, 가정관리술, 연애술)을 드러내는 문헌에서 당대인이 자기와 맺었던 관계, 자기 통치 기술을 분석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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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중이라 오독, 오해 여지 있으며 향후 수정할 수 있음/스크롤 압박 주의)

요즘 눈 뜨면 읽는다는 자세로 푸코 원 저작과 강의록을 닥치는 대로 읽고 있다. 푸코 말년 저작 “성의 역사” 시리즈는 제목 때문에 안타까운데 사실 성의 역사 자체를 깊이 분석한다기보다는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시대 ‘성’이라는 영역이 주체화, 자기 통치와 타자 통치에 관해 가졌던 독특한 면모를 드러내기 위해 언급한 소재 중 하나일 뿐이고, 다른 영역들도 함께 다루고 있다. 제목에서 특별히 '성'을 언급한 이유는 '쾌락'이 인간 삶에서 가장 ‘강한 힘’을 미치는 영역 중 하나이기도 하고, 몸에 관한 영역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작동했던 기술을 드러내기 편한 분야이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사실 푸코는 자기 생애에서 내내 지식, 권력, 정신의학, 규율기관(사법, 처벌), 통치 기술 등 다양한 영역을 소재로 삼아 역사(이론 나열X)적으로 특정 시기에 나타난 구체적인 사례를 발굴해 분석을 시도해왔다. 개인적으로 ‘자기 배려’를 다룬 2차 문헌에서 이미 많이 접한 내용이라 읽지 않았는데도 이미 읽은 기분이 드는 책이었는데 이번에 완독했다. 2편을 먼저 읽었고 곧 3편을 읽을 예정이며 1편은 막 구입해두었다. 푸코 제자들을 비롯한 연구자들은 “성의 역사” 1편/2, 3편을 구분해서 논의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1. ‘쾌락의 활용’ 방법 문제에서 도덕/윤리에 대한 관심

푸코는 “성의 역사” 2권 내내 자신이 이 작업을 시도하는 이유는 성의 역사(특히 근대식 심리학적, 욕망에 집중해 분석하는 이론) 자체를 나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대-중세에 나타난 삶의 양식으로서 구체적인 기술들을 분석함으로써 당대 사람들이 자기나 타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주체화했는지를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아주 거칠게 정리하면 서구 역사적으로 근대와 같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도덕’ 성격이 아니라, 고대에는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과 자유롭게 맺은 관계가 삶으로 드러남으로써(자기 통치) 타자에 대한 관계 맺기나 통치도 가능했고, 중세에는 자기(자신과 영혼에 대한)에 관한 모든 것을 고백해야 하는 제도를 종교적으로 만들었다. 늘 그랬듯 이 책에서도 푸코는 역사적 문헌을 파헤치는 작업을 거쳐 각 시기에 나타난 구체적인 삶의 양식들을 드러냄으로써,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논의하고 있다. 주체화 관심자로, 도덕/윤리를 공부해온 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인상 깊었다. 아래에는 다소 길지만 공부를 위해 관련 내용을 인용해둔다.

 

푸코는 이 책 서두에서 도덕과 윤리를 구분해보고 있다. 일단 도덕에 ‘금욕’적 면모가 포함됨을 인정하고 설명을 시작하는 듯하다. 이 부분에서 근대 규율에 입각한 도덕은 ‘규약지향’에 가깝고, 그가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시공간인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시대에 나타난 양식은 ‘윤리지향’에 좀 더 가까운지 더 공부가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 따르면 윤리는 좀 더 자유로운 주체가 단순하고 덜 엄격한 삶의 양식, 공식, 원리를 가지고 자기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 (자율적으로) 적용해 보인 행동으로 나타났을 테다. 푸코는 종교개혁 이전 중세 가톨릭 제도에 대해 금욕주의적 영성운동들이 주기적으로 법률화, 규약화에 항거해왔다고 분석하고 있다. 

“‘도덕’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자는 이 단어에 내포된 다음과 같은 여러 다른 현실을 고려해야만 한다. ‘도덕성’의 역사, 즉 어떠어떠한 개인이나 그룹들의 행동이 여러 다른 심급에 의해 제안된 규칙과 가치에 어느 정도나 부합되는지 아닌지를 연구하는 역사. ‘규약’들의 역사, 즉 어떤 사회나 그룹에서 문제되고 있는 규칙과 가치들의 여러 다른 체계, 그 체계들을 활용하는 심급이나 구속, 장치들, 그리고 그 체계들의 다양성, 차이, 혹은 모순이 취하는 형태를 분석하는 역사. 마지막으로 개인들이 스스로를 도덕적 행동의 주체로 세우게 되는 방식들의 역사, 이 역사는 자기와의 관계를 정립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자기에 대한 성찰, 자기에 의한 자기인식, 검토, 파악, 자신에게 행하고자 하는 변형 등을 위해 제안되어 온 모델들의 역사가 될 것이다. 이것이 ‘윤리’와 ‘금욕주의’의 역사, 즉 도덕적 주체화의 형태들, 그리고 자기를 확고히 하기 위한 자기실천의 역사라 불릴 수 있을 그런 역사인 것이다.

실제로 넓은 의미에서의 모든 ‘도덕’이 내가 방금 지적한 두 가지 측면, 즉 행동규약의 측면과 주체화 형태의 측면을 지니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 두 가지 측면이 결코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으며 서로가 상대적 자율성 속에서 발전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우리가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어떤 도덕에서는 특히 규약과 그 규약의 체계성, 방대함, 모든 가능한 경우에 들어맞을 수 있고 모든 행동영역을 포괄할 수 있는 그 규약의 능력이 강조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도덕에서는 이 규약을 활용하는, 도덕을 체득하고 준수하도록 강요하며 그 위반을 처벌하는 권력의 심급 측면을 탐구해 보는 것이 중요한데, 이런 상황에서 주체화는 주로 거의 사법적인 형태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도덕적 주체는 하나의 법, 혹은 일련의 법들을 따르게 되는데, 그는 이 법에 종속되어 있어서 이를 어기면 과실로 징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또 다른 도덕들은 그와는 반대로 주체화의 형태들과 자기실천의 측면을 탐구하는 데 뛰어나게 역동적인 요인을 지닌 도덕들이다. 이 경우 행동규칙과 규약들의 체계는 아주 단순할 수 있다. 어쨌든 개인이 자기 자신과 맺고 있는 관계, 그의 여러 다른 행동, 사고, 혹은 감정들 속에서 스스로를 도덕적 주체로 세우고자 할 때 이 개인에게 요구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이 규칙체계의 엄격한 준수는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강조되는 것은 자기에 대한 관계들의 형태, 그것을 완성해 가는 과정과 기법들, 스스로를 자신의 인식대상으로 부여하는 훈련들,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존재양식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실천들이다. 기독교에서는 쾌락의 금욕주의적 포기라 불리는 도덕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이 같은 ‘윤리지향성’ 도덕들이 ‘규약지향성’ 도덕들에 비해 상당히 중요했다...”, 47-48쪽.

 

푸코는 이 책 서두에서 고대에 나타난 ‘윤리’로서 삶의 양식 특성이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앞으로 당대 양생술, 가정관리술, 연애술, 진리와 맺는 관계(여기서는 ‘진정한 사랑’)에 대해 분석하겠다고 책 내용을 개괄하고 있다. 규율도덕이 익숙한 근대를 살아가는 독자로서 아래와 같은 푸코의 문제의식이 흥미롭고 새로웠으며, 실제로 푸코가 읽어낸 구체적인 면모가 의미 있었다. 즉 그는 이 작업에서 고대(정치에 참여할 시민인 자유인이나, 자기-가정-국가를 통치해야할 남성)인들이 그런 삶의 기술을 왜 필요로 했는지, 그들이 그러한 기술을 구사해서 얻고자 했던 효과를 드러내 보이고 있어 재미있었다. 일련의 과정에서 성이나 쾌락이 불러올지도 모르는 ‘위험’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구조를 보고 있노라면, 푸코가 다른 강의록 “안전, 영토, 인구”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했던 작업도 큰 틀에서는 비슷한 의도를 가지고 수행한 작업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 자유인인 남자가 불가항력적 금지에 부닥치지 않고 그의 활동을 펼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네 개의 큰 관계영역들이 어찌해서 바로 성적 행동이 강력히 문제로 제기되는 영역이 되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만 했다. 왜 그 지점에서 육체에 대해, 아내와 소년과 진리에 대해 쾌락의 실천이 문제가 되는가? 그 관계들에 성적 활동이 끼어들자 어째서 불안과 논쟁과 숙고의 대상이 되었는가? 어떤 이유에서 성적 행동의 감소, 그것의 절제, 그것의 형태화, 그리고 쾌락의 실천에서 엄격한 양식의 정의를 추구하는 사고가 이 일상적 경험의 축들로부터 생겨나게 되었는가? 어떻게 성적 행동이, 이 여러 다른 유형의 관계들을 함축하는 한에서, 도덕적 경험의 영역으로 판단되었는가?”, 42쪽.

 

푸코는 이 책에서 내내 삶의 형식(방식)이 가진 전략, 기술 예술적 면모를 강조해 드러내고 있다. 그러한 양식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보편적 법칙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적절하게 선택한 방식에 대한 문제였다. 푸코는 이 문제에 대해 근대적 도덕보다는 윤리에 가깝지 않느냐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실존의 미학 논의에서 ‘윤리’, ‘태도ethos’라는 개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성행위가 그리스 사상에서 ‘아프로디지아’, 즉 통제하기 힘든 힘들의 투쟁의 장에 속하는 쾌락행위들의 형태로 도덕적 실천의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행위는 합리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행동양식을 갖기 위해 절도와 시기, 횟수와 호기의 전략을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이 전략은 그것의 완성 지점과 최종 목표로서 철저한 자기통제를 지향한다. 이러한 자기통제에서 ‘주체’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데에 있어서까지 그 자신보다 ‘더 강하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주체의 형성에 내포된 엄격성의 요구는 각자 그리고 모두가 따라야 할 보편적 법칙의 형태로 제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자신의 삶에 가장 아름답고 완성된 형식을 부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 행동을 양식화하는 원리로서 제시된다... 성적 엄격함은, 도덕적 체험의 변화를 이해한다면, 법전의 역사보다도 더 결정적인 하나의 역사에 속해 있다. 그것은 개인을 도덕적 행동의 주체로서 성립하게 하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양식의 완성으로 이해된 ‘윤리’의 역사이다.”, 304-305쪽.

 

고대 철학 전체를 봤을 때 ‘자연’(타고난 본성, 계절 상황 등)에 따라 적절하게 삶의 양식을 선택하고 행동을 관리하는 일은 중요한 문제였을 테다. 푸코가 ‘자기의 테크놀로지’ 등 삶이 가진 ‘기술적 측면’을 드러내고, 이 책에서도 양생술을 중요한 한 장으로 배치하여 논의한 이유일 듯하다. 

“아스클레피오스나 그의 최초 계승자들의 시대에 양생술에 전념하지 않았던 이유는 인간들이 실제로 따랐던 ‘관리법’, 즉 그들이 섭생하고 운동하는 방식이 자연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양생술은 굴절된 의학이었다. 양생술은 삶의 방식으로서의 관리법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는 날에 가서야 이러한 치료술의 연장선상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항시 의학에 필수적인 부속물이 되는 것은, 실제로 사람의 병을 유발시킨 삶의 양식을 바로잡지 않고는 아무도 치료할 수 없으리라는 점에서 그러한 것이다.

어쨌든 양생술적 지식을 원초적 기술로 치부하건 아니면 그것을 차후에 파생된 것으로 보건 간에 ‘식이요법’ 그 자체가, 즉 관리법이 그것을 통해 인간의 행동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본적 범주임은 분명하다. 그것에 의해 사람이 자기 존재를 영위해 가는 방식이 특징지어지며 행동에 대한 규칙들의 총체가 정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보존하고 순응해야 하는 자연에 따라 이루어진, 행동의 문제설정 방식인 것이다. 관리법은 삶의 기술 전체이다.”, 133쪽.

 

2. 세 영역: 양생술, 가정관리술, 연애술, 그리고 진실과의 관계

“주체의 해석학”: http://blog.yes24.com/document/10404936 에서 푸코는 고대 안에서 다시 그리스(소크라테스) 시기와 헬레니즘 시기(기원 후 1-2세기) 주체화 양식을 구분해 분석한다. 이 “성의 역사2”에서도 아직은 전자에 집중해서 분석하는 편에 가까운 듯하다(“성의 역사3”에서 다음 시기와 중세를 분석하는지? 아직 읽기 전이라). 전자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알키비아데스”를 언급하며 앞으로 통치자가 될 알키비아데스가 수행해야 했을 자기 통치(자기 인식)를 중요한 문제로 다룬다. 비슷하게 여기 “성의 역사2”에서도 자기 통치-타자 통치, 가정관리-도시통치 기술의 동형성이 중요한 이슈이다. 고대에 ‘자기가 자기와 자유롭게 관계 맺어야 하는 사람“은 자유인인 성인 남성이었다. 그들은 정치에 참여해야하는 시민이었다. 그들은 대중이 보기에 ’통치할 성향과 능력‘을 갖춘 자로 ’드러나 보여야‘ 했다. 푸코가 보기에 ’양생술‘은 자기 몸을 계절이나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활용하는 기술, ’가정관리술‘은 가장이 아내와 재산을 잘 통치하되 외부에서 주어진 규율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방식으로(예를 들어 가정을 잘 돌보는 아내라는 특별한 지위를 존중하기 위해 외도하지 않겠다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킴) 실천, ’연애술‘은 장차 정치에 참여해야할 소년이 자신이 그러한 자질이 있음을 연애 상대에게 인정받으면서도 그 연애를 함부로 수락하지는 않고 적절히 처신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미덕을 드러내 보이기를 다루고 있다. 푸코는 이 세 분야에서 고대 그리스인 자유인인 남성들이 어떻게 자기와 타자를 통치하는데 자기 자신과 적절한 관계 맺기 및 삶의 양식 선택을 잘 활용했는지 드러내 보인다. 특히 그가 보기에 전과 달리 소크라테스-플라톤 철학적 맥락에서 ’진정한 사랑‘에 관한 정의를 내리는 흐름이 생겨났다. ’진실‘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지점은 자기 자신을 관리하며 선택한 삶의 양식을 상황에 따라 적용해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통치 능력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 인정‘ 받는 자유인 남성들의 모습이었다. 

“특별한 영혼 훈련 기술이 없는 데 대한 설명을 제공해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로 말하자면, 그것은 자기지배와 타인들의 지배가 똑같은 형태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정을 지배하고 국가 내에서 자기의 역할을 행하듯 자기 자신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 미덕, 특히 엔크라테이아에 대한 교육이, 다른 시민들보다 더 우월해져 그들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주는 그런 교육과 다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동일한 수련을 통해 미덕과 권력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확실히 감독하고 자기 집안을 관리하며 도시국가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 이것은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세 가지 실천들이다. 크세노폰의 “가정관리술”은 이 세 가지 ‘기술’들 간의 계속성, 동형성, 더불어 한 개인의 실존에서 그것이 연대순으로 잇달아 사용됨을 잘 보여준다.”

“... 그것이 뛰어난 육체적·도덕적 훈련이 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민의 정치교육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은 인간의 미덕의 훈련에도 도움이 될 것이며, 그 역으로 미덕의 훈련에 도움이 되는 것은 시민의 정치교육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도시국가에 유용한 인간의 교육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제어하고자 하는 자의 도덕적 훈련인 것이다.”, 106-107쪽.

 

‘가정-국가 이질동형성’(가정관리기술-도시통치기술 동형성) 때문에 통치할 사람이 ‘절제’ 능력을 가졌는지 여부는 매우 중요했다. 자기 통치에서 절제가 어려운 사람은 통치할 때 ‘권력 남용, 폭력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고 믿었다. 이렇게 당대에 “절제와 권력 사이의 연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특히 장차 정치에 참여할 소년은 대중들 앞에서 (연애술에 있어) 절제에 관한 ‘시련’, ‘시험’을 받는 맥락이 있었다.    

“지주의 생활이 갖는 이 모든 사적·공적 이점들은 “가정관리” 기술의 주된 장점으로 보이는 것 속에 모두 포함된다. 즉, 그는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지휘 실무경험을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오이코스를 이끌어간다는 것은 곧 통솔하는 것이고, 가정을 통솔한다는 것은 그가 도시에서 행사해야 할 권력의 방식과 다르지 않다.”, 193쪽.

“니코클레스가 생각하는 절제의 또 다른 이유는 한 국가의 통치와 한 가증의 관리 사이의 연계성과 동질성에 기인한다. 여기서 연계성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되는데, 우선 타자와 확립할 수 있는 모든 협력관계(koinoniai)를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에 의해 정의된다... 정의롭고자 하는 군주는 자신의 아내에 대해서도 공정해야 한다. 또한 군주의 가정을 지배해야 하는 질서와 백성을 지배하는 데에 필요한 질서 사이에도 연계성과 일종의 이질동형성 같은 것이 있다. 즉, “훌륭한 군주는 자신이 다스리는 국가만이 아니라 그가 사는 집과 영지를 일관된 정신으로 다스리고자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은 절제와 공정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니코클레스가 문헌 내내 언급하는 절제와 권력 사이의 연계는,...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와 다른 사람에 대한 지배 사이의 본질적 관계로 생각된다. 즉,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만큼이나 너 자신(arche sautou)에 대해서도 권한을 행사하라. 그리고 왕에게 가장 합당한 행동은 어떤 쾌락의 노예도 되지 않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보다 자신의 욕망을 더 잘 다스리는 것이다.” 니코클레스는 그가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한 도덕적 조건으로서 자제력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남자들이 얼마나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집착하는지, 그리고 이런 유의 권력남용에서 얼마나 자주 정치적 위기와 혁명이 초래되었는지를 상기하였다.”, 216-217쪽.

 

“모범적이면서도 우월성을 드러내주는 이 미덕이 모두가 보기에 존경받을 만한 행동이라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정치적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사실, 이러한 미덕은 피지배자들에게 군주가 그 자신과 맺는 관계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중요한 정치적 요소가 된다. 왜냐하면 군주가 다른 사람들에게 행사하는 권력의 사용을 조정하고 규제하는 것이 바로 이 자신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관계는 그 자체로서, 그리고 이것이 가시화될 때 나타나는 광채로 인해, 또한 그것을 보증해주는 합리적 기반으로 인해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니코클레스가 자신의 소프로쉬네, 즉 절제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일종의 시험을 치렀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이유이다. 실상 자신이 정당하고 금전이나 쾌락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가 별로 어렵지 않은 상황과 시기가 있다. 하지만 한창 젊은 나이로 권력을 물려받았을 때, 자제력의 과시는 일종의 자격시험이 된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미덕이 단순히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logismos)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가 의도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훌륭하게 처신하는 것은 우연도 아니고 상황에 따른 것도 아니다.

이처럼 가장 위험한 상황에서 시험을 치르고 영원한 이성에 의해 보장된 군주의 절제력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일종의 계약을 수립하는 데에 이용된다. 피지배자들은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지배자에게만 복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주의 덕이 보증되는 경우에만 신하들에게 복종을 요구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자기 자신을 통제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행사하는 권력을 절제할 수 있다.”

“...군주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와 그가 자신을 도덕적 주체로 세우는 방식은 정치체계를 구축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가 되며, 그 자신의 권위도 그 일부로서 정치조직을 확고히 하는 데에 기여한다. 또한 군주는 금욕을 실천하고 자신을 단련시켜야 한다. “요컨대 운동선수가 체력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의무는 군주가 자신의 정신을 단련시켜야 하는 의무만큼 크지는 않다. 왜냐하면 경기가 제공하는 가치는 군주인 당신들이 매일 매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가치들과 비교해볼 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219-220쪽.

 

푸코가 책 내내 강조하는 부분은 당대 문헌에서는 세밀한 외부 규율인 도덕 법칙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을 도덕·윤리 교육 맥락에서 읽고자 할 때, 당대에는 어떤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읽을 수 있었다. 그러한 교육은 중세나 근대처럼 세밀한 외부 규율 없이 단순하지만 상황에 따라 주체가 자발적으로 선택, 적용 가능한 큰 공식이나 원리로서 삶의 양식 가르쳐주기에 초점을 맞추었을 듯하다. 이 책에 따르면 당대인들은 ‘미덕’을 드러내 보이는 삶을 사는 사람이 가정과 도시도 잘 다스리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절제(아스케시스)’를 실천한다. 그 절제는 “개인이 스스로를 도덕적 주체로 세우는 데 필요 불가결한 실천적 훈련으로서의 아스케시스”이다. 쾌락에 예속되지 않도록 절제할 수 있는 기술(능력?)을 가진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이다. 성 뿐만 아니라 행동과 영혼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중세에는 ‘고백’ 문제로, 근대에는 (심리학 등등) 욕망 해석 문제로 변하게 된다(아마 “성의 역사” 다른 시리즈들에서 더 깊이 논의했으리라 기대).

“4. 자유와 진리

... “하지만 육체의 쾌락에 지배당하고 그래서 선을 실천할 수 없게 된 자, 자네는 그를 자유인이라고 생각하나?”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제력을 훈련함으로써, 그리고 쾌락의 실천에서 자제함으로써 도달하고자 하는 상태인 소프로쉬네는 자유와 유사한 특징을 지닌다... 그것은 자유롭기 위해, 그리고 계속 자유로운 상태로 있을 수 있기 위해 그런 것이다.”, 109쪽.

 

3. 자유, 진리

푸코를 몰아 읽으면서 계속 부딪치는 단어가 ‘자유’, ‘진리’이다. 푸코는 여러 강연과 글에서 역사적으로 다양한 시공간에서 일어났던 ‘진리 게임’을 논의한다. 그는 권력이 관계 문제이고, 권력-지식은 상호작용하며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권력 관계망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진리 게임’을 벌인다. 푸코가 이 시리즈 마지막 장에서 소크라테스-플라톤 논의에서 ‘진정한 사랑’ 이슈가 생겨났음을 굳이 짚고 넘어가는 의도가 있었을 듯하다. “향연” 등지에서 엿볼 수 있는 소크라테스-플라톤 논의에서 진정한 사랑은 그야말로 ’본질‘적이며 정신적인 사랑만으로도 성립 가능, 소년만이 주체인 연애술과는 다르게 나이가 들어서도 ’우정‘처럼 유지할 수 있는 인간관계 일종으로 변형되었다. 당대에 이성을 가진 인간은 ’인식=실천(앎=삶)’이 이루어져야 진실한 삶을 사는 인간이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삶에서 실천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가 타자 통치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리라고 믿었다. 

“절제력 있는 남자의 존재양식을 특징짓는 이러한 자유-지배력은 진리와의 관계를 배제하고는 이해될 수 없다. 자신의 쾌락을 지배하는 것과 그것을 로고스에 복종시키는 것은 동일한 성질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절제하는 자는 “올바른 이성이 명하는 것”(orthos logos)만을 욕망한다... 절제에 있어 인식이 가지는 역할... 크세노폰은 “회상록”에서 인식과 절제를 분리시킬 수 없으리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제를 상기시킨다. 무엇을 해야할지를 알면서도 그와는 반대되게 행동할 가능성을 언급하는 자들에게 소크라테스는 항시 무절제한 자들이 바로 무지한 자들이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어쨌든 사람들은 “모든 행동 가운데서 그들이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행동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절제의 본질적 조건들 중의 하나인 어떤 형태의 인식 없이는 절제를 실천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인식의 주체로 세우지 않고서는 쾌락의 활용에서 스스로를 도덕적 주체로 세울 수가 없다.”, 119쪽.

 

 

4. 실존의 미학

푸코 후기 저작이라 ‘미’, 아름다움을 포함하는 문장이 자주 등장하고 있어 다 옮겨두었다. 표현은 존재의 미학, 삶의 방식, 가시적 미와 같은 방식으로 변주한다. 특히 요즘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삶의 양식이 ‘현시’된다는 부분이다. 특히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몸으로 실천한 기술들을 무엇으로 선택했는지는 어떻게든 자기나 타인이 확인할 수 있도록 ‘드러나 보인다’. 푸코가 자기의 테크놀로지와 실존의 미학을 연관시켜 언급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로 보인다. 앞으로 “성의 역사3: 자기 배려”에서 또 언급하리라 기대한다.    

“절제하는 주체의 구성요소인 이 진리와의 관계는 후에 기독교적 정신성에서 그럴 것 같이 욕망의 해석학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존재의 미학으로 향하게 된다. 이 존재의 미학이라는 것은 어떤 삶의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이 삶의 방식의 도덕적 가치는 어떤 행동규범에 합치되는가, 자신을 깨끗이 하는 작업을 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쾌락의 활용과 배분, 우리가 준수하는 한계, 우리가 존중하는 위계 관계에서의 어떤 형식, 보다 정확히 말해 어떤 일반적인 형식적 원칙들과 관계된 것이다. 로고스에 의해, 이성과 그것을 지배하는 진리와의 관계에 의해 그러한 삶은 존재론적 질서의 유지나 재생과 접하게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삶은 어떤 미의 광채를 받게 되는데, 이 같은 미는 그것을 관조하거나 그것의 기억을 간직할 수 있는 자들에게 뚜렷이 보이는 것이다. 이같이 절제할 줄 아는 삶의 척도는 진리에 근거한 것으로, 어떤 존재론적 구조의 존중인 동시에 어떤 가시적 미의 윤곽이다.

... “고르기아스”에서 소크라테스는... “... 각각의 사물에 고유한 특징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 사물의 본성에 적합한 어떤 질서, 적절함, 기술(taxis, orthotes, techne)로부터 생겨난다... 그렇다면 각 사물의 덕목은 질서정연함과, 질서에서 비롯된 만족스런 배치에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 주장할 것이네. 결국 각 사물의 본성에 고유한 어떤 정돈의 미(losmos tis)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사물이 훌륭해지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결과적으로 또한 그 영혼에 적합한 질서를 가진 영혼이 이러한 질서가 없는 영혼보다 더 나은 것일까? 당연히 그렇네. 그러면 질서가 있는 영혼은 잘 정돈된 영혼인가? 물론 그렇네. 그리고 잘 정돈된 영혼은 절제력 있고 현명한가? 필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네. 따라서 절제력 있는 영혼은 훌륭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주장하는 바이며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바일세.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면 우리 각자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절제를 추구하고 그것을 훈련해야만 할 것 같네(diokteon kai asketeon).”

절제와 (그 고유한 본성이 질서인) 영혼의 미를 결부시키고 있는 이 문헌에 대한 반향으로 “국가”가 보여주게 될 것은 그와는 반대로 영혼과 육체의 완벽함이 쾌락의 과도함, 격렬함과 얼마나 대립되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영혼 속에 아름다운 품성(kala ethe)을 지니고 있고, 또 그 용모에도 품성에 어울리고 일치되는 동일한 유형의 아름다움을 겸비하고 있다면...”, 123-135쪽.

 

“이성에 합당한 사랑(ho orthos eros)이란 질서와 미에 의해 지배되는 현명한 사랑이란 말인가?” “분명히 그렇습니다.”...

우리가 또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크세노폰이 제시했던 씨루스 궁정의 이상적 묘사인데, 이 궁정은 각 개인이 자신을 완벽히 제어함으로써 그 자체가 미의 광경으로 제시된다. 군주는 자제력과 신중함을 공공연히 과시하고 있으며, 그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서열에 따라 절도 있게 행동하고,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며, 영혼과 육체를 세심하게 조절하고 행동을 관리하는지라 어떤 무의식적이고 격렬한 움직임도, 모든 사람들의 정신에 현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미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았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고대 문헌에서 만날 때마다 흥미로운 음악가 은유)

“...신체적 양생 생활의 엄격함, 이를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결단성에는 도덕적 강인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그 강인함 덕택에 이 양생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보기에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힘과 아름다움과 육체의 건강을 얻으려하는 실천들에 부여해야 할 진짜 이유이다. “국가” Ⅸ권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지각 있는 사람은 “동물적이고 부조리한 쾌락에 몸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 “자기 관심사를 그쪽으로 돌려놓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할 것이다. “그는 자기 건강을 고려에 넣지 않을 것이며 강하고, 건강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절제력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육체적 관리법은 일반적 존재미학의 원칙에 편입되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육체적 균형이 영혼의 올바른 위계를 위한 조건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는 자기 영혼 속에 조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의 육체 안에 조화를 세울 것이다.”-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진정한 음악가(mousikos)로 처신할 수 있을 것이다.”, 136-137쪽.

  

고대 문헌을 분석한 내용이라 지금 읽으면 여성들이 분개할 만한 지점이 많은 책이기는 했는데 푸코가 ‘그러한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려고 의도적으로 가져온 부분은 아닌 듯하다. 당대에 결혼한 아내가 외모를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워질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한 부분이 (현대인인 여성으로서 선호와 별개로) 흥미로웠다. 결혼한 아내를 실제로 아름답게 만드는 미덕은 가정에서 자기 할 일을 잘 하는데서 드러난다. 당대 사람들은 심지어 그런 행동(살림살이?)을 통해 아름다운 육체까지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아내는 어떻게 자기 남편에게 변함없는 욕망의 대상으로 남아 있을 수 있으며, 언젠가 그녀보다 더 젊고 예쁜 다른 여자한테 자리를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즈코마쿠스의 어린 아내는 분명하게 묻는다.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아름답기 위해서, 그리고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에겐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결정적 사항이 되는 것은 가정과 가정의 관리이다. 이즈코마쿠스에 의하면 어떤 경우라도 여성의 실제적 미는 그녀가 집안일을 훌륭하게 돌볼 때 그 일에 의해 충분히 보장된다. 실제로 그는 아내가 자신의 책임하에 있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노예처럼 기진맥진한 채 앉아 있거나 겉멋부리는 여자처럼 한가롭게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녀는 늘 서서 감시하고 관리하며,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진행 중인 작업을 점검하러 다닐 것이다. 똑바로 서 있는 자세와 걸음걸이는 그녀의 신체가, 그리스인들이 보기에 자유로운 개인의 형상을 특징지어주는 행동방식과 태도를 갖도록 해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부는 밀가루를 반죽하고 의복 또는 모포의 먼지를 흔들어 털고 정돈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해서 육체의 아름다움은 형성되고 유지된다. 지도자의 위치는 육체적으로는 아름다움이라는 형태로 표현된다. 게다가 아내의 의복은 하녀들과 그녀를 구별짓는 청결과 품위를 지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내는 이 하녀들과 비교할 때, 언제나 복종하고 속박 받는 노예처럼 의무로서 강요당하는 대신 자발적으로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 한다는 이점을 지닐 것이다.”, 204-205쪽. 

   

한편 소년이 보여야 할 아름다움은 통치자로서 힘과 용기를 드러내 보이는 육체적 힘, 건장함 등등이었다(성인 남성이 소년에게 연애를 거는 문화 때문에 고대 그리스에서 ‘여성스럽게? 연약하고 예쁜’ 소년이 인기 있었으리라는 편견이 있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푸코는 여러 차례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장치 좋은 통치자가 될 역량을 보이는 소년은 (유력자인) 성인 남성에게 연애 대상으로 선택되어, 연애술이라는 시련, 시험에서 어떤 처신을 보이는지 검증, 평가 받았던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활력, 인내력, 격정이 이 아름다움의 일부분을 이루었던 것이다. 당연히 훈련, 체조, 시합, 사냥으로 자신을 단련시키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매력이 유연함이나 연약함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증하였다. 후에 (이미 고대에서도) 청년의 아름다움을 이루는 요소로-더 정확히 말해 은밀한 이유로서-여겨지게 될, 묘하게 여자 같아 보이는 점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오히려 소년이 스스로도 경계하고 또 조심해야 할 점이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소년의 육체에 대한 도덕적 미학이 있다.”, 250쪽.

 

“그리스의 젊은이들에게서, 애인들의 추종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불명예스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그의 자질의 가시적 표식이었다... 아름다운 것과 사랑 받는다는 것이 이중의 행운(eutuchia)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킨다. 즉, 그것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orthos chresthai)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바로 이것이 이 문헌이 주장하는 요점이며, “명예에 관한 문제”라 불릴 수 있는 것을 지적해준다. 이러한 사실들은(ta pragmata) 그 자체로서 그리고 절대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에 따라(para tous chromenous) 이는 달라진다. 다른 곳에서도 진술된 바 있는 원칙에 따르면, 이것의 도덕적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활용”이다. 우리는 “향연”에서도 이와 대단히 유사한 표현을 볼 수 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이든 그 자체 단독으로 아름답거나 추하지는 않다. 다만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그 실천의 미이고, 그것을 추하게 만드는 것은 그 실천의 비열함이다.”, 258-259쪽.

 

피에르 아도,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http://blog.yes24.com/document/11015475 속 주장처럼 고대에 철학이 ‘삶의 양식’이었다면 소년이 연애술에서 보이는 ‘삶에 관한 자기 자신의 선택’ 역시 일종의 철학적 실천이었다고 볼 수 있을 테다. 그 그리스 소년이 처한 시련(추종자에 대한 처신, 연애술) 상황에서 스스로 적절한 수행을 통해 자신이 지배력(능력과 자질) 있는 자임을 드러냈다. 그러므로 푸코는 소년에게 ‘철학에 대한 훈련’이 필요했다고 주장했다. 철학을 갖추어 나갈수록 그는 자기 통치, 타자 통치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철학... “더 강한 자아가” 되어야 한다... 철학은 그 위에 다른 사람을 능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그 자체로서 철학은 지배의 원칙이다... “... 이 사고를 철학이 훈련시키면서 동시에 이끌어갈 수 있다.” 우리는 철학이 청년의 지혜에 매우 필수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는 그가 삶의 다른 형태로 돌아서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직면한 시련을 극복하고 명예를 보존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에서,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능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264쪽.

 

실존의 미학이 존재의 ‘미덕’을 ‘현시’하는 일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는데 장차 통치자가 될 자질을 보이는 소년에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그의 처신에 관한 ‘평판’이 존재했다. 푸코에 따르면 그 일련의 과정을 통해 도시에 속한 사람들은 공동의 예술 작품처럼 소년의 삶을 함께 만들어갔고, 소년은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쌓아갔다.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의 젊음과 앞으로 그가 갖게 될 지위...는 하나의 “전략적” 거점을 형성하며, 이를 둘러싸고 복잡한 게임이 요구된다. 육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어느 정도 좌우되는 소년의 명예는 또한 어느 정도 미래의 그의 역할과 평판을 결정지을 터인데, 바로 이 소년의 명예가 중요한 관건이다. 이것은 그에게는 적응과 훈련을 요구하는 일종의 시험이다. 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염려와 배려의 계기가 된다. 에피크라테스에 대한 예찬의 끝 부분에서, 저자는 소년의 삶, 그의 ‘비오스’(bios)가 “공동의” 작품이어야 함을 상기시킨다. 마치 완성해야 할 예술 작품인 것처럼, 그는 에피크라테스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래의 그의 모습에 “가능한 최고의 영광”을 부여하도록 촉구한다.", 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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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달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 2019-01-29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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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딱 한 달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윤동교 저
레드우드 | 2018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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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인생 중 한 달 정도는 의지를 내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공간 의지를 내어 만들어 보내는 일, 생각지 못한 큰 의미를 만날 수도 있다. 제주한달살기 통해 자기와 만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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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신청글을 올려 예스이십사 리뷰어클럽에서 받아보았다. 기대를 충족하는 독서 경험을 했다.

 

“최근에 제주 남부 올레 여행을 7박 8일 간 지인과 따로 또 같이 다녀왔어요. 제주 갈 때면 항상 ‘이번에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좀 여유롭게!!’라고 생각하면서도, 여행 성향이 열심히 보고 듣고 다니기를 지향하는지라 여행 가기 전에 책을 몰아 읽고 정보 검색을 해서 치밀하게 계획을 짜곤 하고 이번에도 또 그렇게 다녀왔어요. 폭설을 뚫고 돌아다니고 숙소에서도 계속 읽으면서 ‘역시 나란 사람은 여유로운 여행은 안 되는 건가...’라며 자조했지요. 이 피로사회에서 빈둥거리기를 선택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요즘 제주 한 달 살기처럼 여행보다 장기간 생활하기가 유행이더라고요. 저도 비교적 여유로운 시기를 보내는 동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 책 저자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생활’을 결심하고 가도 계속 여기 저기 다니며 무엇인가를 하고 다닐 제가 그려져요. 연말연시에 여행을 했더니 ‘다르게 살고 싶어서’ 제주로 이민했을 육지 사람들에게서 어떤 피로감 같은 걸 느끼기도 했고요. 그런 모습을 보며 어쩌면 중요한 건 시공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자는 제주에서 힐링 장기 거주 기간을 어떻게 여유롭게 보냈는지 예쁜 그림과 함께 구경하고 싶어 신청합니다. 37세 생일을 맞았는데 선물해주시면 기쁘겠어요. ^^“

 

 

 

  

 

 

작년에 연수 휴직 들어오면서 생각지 못하게 부딪친 난관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었다. 다른 삶에 대해 공부도 하고 경험도 하고 싶어서 만든 삶의 구조 속에서, 갑자기 내 앞에 24시간을 무슨 활동으로 채울지 전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생겼다. 직업과 먹여주고 재워주는 엄마와 통장 잔고와 대학원 수강 현실이 있는 비교적 안전한 상태에서의 생활인데도 찾아오는 불안감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사소한 일에도 걱정 많은 성향을 타고나서 유독 내가 심하게 겪는 정서인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이직과 퇴사, 임금노동을 거부하고 다른 삶을 다룬 책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 읽으면서 남들 분주하게 생산하고 있는 시기에 ‘나만 다르게 살고 있는 듯해 느끼는 불안감’은 이런 조건을 의도로 만들었거나 강제로 맞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감정인 듯했다. 결국 2018년 상반기를 넘어서면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뭐라도 읽고 있거나, 계속 할 일을 만들어내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대학원 공부, 개인 취미(독서, 음악, 수영 등), 단체 일, 연구와 집필이라는 큰 네 영역에서 했던 활동 자체에 대해서는 열심히 살았다는 생각 덕분에 아쉬움이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의도한 만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아쉽다. 2018년을 돌아보면 공부만 열심히 하지는 않았으면서 그렇다고 자유롭게 마음껏 놀지도 않은 애매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상술했듯 연말연시에 제주 여행을 다녀오면서도 계속 공간을 이동하며 시간 속에서 어떤 활동을 채워 불안감과 무의미함을 해소하고자 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원래 나는 놀 수 없는 인간형이냐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이런 맥락에서 위 내용에 격하게 공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제주에서 한 달 살기를 결심하고 숙소를 잡은 후 나보다 훨씬 잘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실천한 듯하다. 실제로 제주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그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이 책 일독을 권하고 싶을 정도다. 특히 나처럼 걱정 많고 놀지 못하는 인간형에게 권하고 싶다. 긴 인생을 위해 한 달 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는 시간 만들어서 보내도 큰 문제 생기지 않고 별 일 없다는 사실을 이 저자 경험을 통해 확인하고, 안심하고 한 달 살기를 계획, 실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심지어 저자가 제주에서 한 달을 사는 동안 자기 자신과 마주하며 느꼈던 내면의 변화를 구경하고 있노라니 그 시간이 분주하게 떠밀려 사는 일상보다 더 큰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책 속 지인들처럼 ‘저자야 딩크족을 선언한 부부 중 아내로서 남편이 100만원을 주며 제주 한 달 살기를 ‘허락’했으니 실행에 옮길 수 있었지, 나는 생업이나 아이들도 있고 지금 당장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배가 불렀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한가한 소리냐.'라고 비판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을 듯하다. 나도 무급 휴직을 2년이나 걸었을 때 다양한 피드백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건 결국 자기 자신의 삶의 양식에 대한 스스로의 의지를 낸 선택에 달려 있지 않을까. 과감하게 다른 삶을 선택한 자는 그 과정과 결과에서 책임을 지고 그만의 의미를 얻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저자가 원래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는 분이라 중간 중간 아기자기한 일러스트+독특한 유머 코드로 빵 터뜨리는 지점들이 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읽었다. 손거울 굿즈를 함께 보내주셔서 감사한데, 거기 그려둔 여성이 평소 내 스타일과 넘나 비슷해서 깜놀, 반가웠다. 감사히 잘 쓰겠다. ^^;;

 

* 저는 예스이십사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이 리뷰를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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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중쇄를 찍자! 9

마츠다 나오코 글,그림/주원일 역
애니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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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만화책 기획 편집자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코코로를 둘러싼 여러 에피소드를 보며 어떤 분야 전문가가 갖추어야 할 능력과 기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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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급 휴직 걸고 공부하고 있어 발생한 기회비용 생각하니 마냥 놀 수 없어서 마음 속 위시리스트에 담아만 두고 정주행하지 못하고 있는 일드가 바로 “중쇄를 찍자!”. 사카구치 켄타로와 오다기리 죠가 나온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 주에 좋게 본 영화 “일일시호일”: http://blog.yes24.com/document/11014989 주인공 쿠로키 하루가 무려 주인공 쿠로사와 코코로에 분했다는 놀라운 정보를 새삼 알게 되어 (읽을 게 많아 초조한 나날 중) 더욱 빨리 보고 싶어졌다. ㅠ_ㅠ...

 

하루종일 어려운 글만 읽고 있으면 숨 막혀 죽겠거나 어디가 이상해질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살려고 ‘읽고 싶은 책’을 구비해둔다. 증식하는 책을 감당 못하겠어서 이 만화도 희망도서로 도서관에 신청해두었는데 만화라서 그런지 다른 사람이 먼저 신청했는지 내 신청분은 취소가 되었고, 들어오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다가 결국은 구입했다. 푸코 읽다가 너무 집중이 안 되어 쉬는 독서를 했다. 만화책이라 한 시간이면 술술 다 읽을 수 있다(나는 활자 중독이라 글씨만 열심히 보고 그림은 잘 안 본다 ㅎ;;).

 

만화 “중쇄를 찍자” 시리즈는 에피소드 몇 개를 묶어 한 권으로 출간하는데, 읽을 때마다 한 권 중 꼭 내 마음에 꽂히는 부분이 몇 부분 있다. 이번에는 공부하는 훈련을 하고 있는 시기이고 글 읽고 쓰기에 관한 자존감이 떨어져 있는 상태라 그런지 아래와 같은 부분을 읽다가 울컥했다. 인기 만화가에게 배우려고 어시스턴트로 들어간 신인 만화가에 관한 에피소드다. 이 공동체에서 선배들은 처음에 표면적으로 신인 만화가 투고 콘티 약점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런데 작업하다 쉬는 시간에 인기 만화가(이자 스승)는 이 신인 만화가가 가지고 있는 고민을 무심한 듯 간파해내며 그 고민들에 대한 실질적인 조언을 해준다. 그렇게 조언해줄 수 있는 이유는 그 인기 만화가도 신인이었을 때 비슷한 고민을 했고 스승이나 선배에게 조언을 들으며 해결해왔기 때문이었을 듯하다. 자신이 경험하고 고민하지 못했던 문제에 대해서는 그 어려움에 공감할 수 없어 조언을 해주기 불가능할 테다. ‘전문가’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말이 많은 시대이지만, 역시 진정한 전문가가 가지고 있는 (그 분야에 대한 기술적) 능력치는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드러나는 기술과 능력이 스승을 존경할 수 있게 만드는 지점 중 하나일 테다.

 

코코로가 담당하는 신인 만화가 단행본이 출간해 인기를 얻고, 편집자의 성실함과 적극적인 업무 자세 덕분에 편집자와 담당자간 신뢰도 더욱 돈독해지고 있다. 코코로가 아유(지역 공부방에서 대학생 멘토가 무심코 ‘불쌍하다’고 한 말을 듣고 상처 받은)를 격려하는 장면, 만화책 부록으로 넣을 종이접기 키트를 제작하는 전문가에 관한 에피소드(몰입해서 자기 손으로 나만의 작품을 만들었을 때 누릴 수 있는 기쁨)들이 인상 깊었다. 책 만드는 세계에 관한 만화라 1권부터 출간할 때마다 꾸준히 따라오고 있는, 믿고 보는 만화다. 여담인데 비슷한 맥락에서 조만간(오늘이 첫회) tvN에서 방영할 “로맨스는 별책부록”을 기대하고 있는데 어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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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테로토피아 | 2019-01-25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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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헤테로토피아

미셸 푸코 저/이상길 역
문학과지성사 | 2014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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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고 이질적인 공간, 헤테로토피아. 건축학회에서의 강연 원고를 기반으로 엮은 책으로 푸코가 '공간'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볼 수 있음. 여전히 자유, 통치, 주체에 대해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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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는 세상이 없는 상상의 공간, 그에 비해 헤테로토피아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주류에 비해 이질적이어서 마치 없는 듯 여기는 ‘다른’ 공간이다. 장르 문학작품이나 sns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헤테로=異’ 다르다는 뜻이다. “말과 사물” 서두에 인용한 보르헤스 글처럼 푸코는 헤테로토피아에 대해 정의 내리면서 그런 공간을 예로 들어 나열하고 있다. 근대적 박물관이나 도서관이 나와 흥미롭다. 사실 최근에 이 책을 제주 여행 때 들고 갔는데 비행기에서 서두를 읽은 후 제주 올레길 위에서 아무도 없어 고요한데 바람만 부는 오름 정상이나 종종 마주칠 수 있는 묘지를 만날 때 ‘이게 헤테로토피아가 주는 느낌인가?’ 싶은 지점들이 있었다. 하루키, “태엽 감는 새 연대기”: http://blog.yes24.com/document/10936997 에서 주인공이 우물에 내려가거나 “해변의 카프카”: http://blog.yes24.com/document/290477에서 등장인물들이 숲속에 들어갈 때 갑자기 완전 다른 공간에 들어간 듯한 느낌과 비슷한가 싶기도 했다. 일상 중 매우 익숙하게 내가 잘 아는 세계가 아니라 낯선 공간을 가리킨다고 이해했다. 푸코는 아래에서 특히 근대 이후에는 일탈의 헤테로토피아, 축제의 양식으로 시간과 연계된 헤테로토피아를 만들어내고자 했다고 주장했다.     

 

“극장이 그렇고, 시장 또한 그러하며, 마을의 변두리나 어떤 경우엔 심지어 마을 한가운데 있는 멋진 공터가 그러하다. 거기에 가건물, 좌판, 온갖 희한한 물건들, 격투사, 뱀여인, 그리고 점쟁이들이 일 년에 한두 번씩 들어찬다. 더 최근에 우리 문명사에는 휴양촌이 있다... 예컨대, 제르바 섬의 [휴양촌] 오두막은 어떤 의미에서는 도서관이나 박물관과 같은 계열이다. 영원성의 헤테로토피아-사람들은 인류의 가장 오랜 전통과 다시 관계를 맺도록 초대된다-라는 점에서 말이다. 동시에 그것은 모든 도서관, 모든 박물관에 대한 부정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지우고 벌거숭이로 원죄의 순수함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21쪽.

 

“그러니까 장소 없는 지역들, 연대기 없는 역사들이 있다. 이런 저런 도시, 행성, 대륙, 우주. 어떤 지도 위에도 어떤 하늘 속에도 그 흔적을 복구하는 일이 불가능한 이유는 아주 단순히 그것들이 어떤 공간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우리는 순백의 중립적인 공간 안에서 살지 않는다... 서로 구별되는 이 온갖 장소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소들. 그것은 일종의 反공간이다. 이 반공간, 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들. 아이들은 그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정원의 깊숙한 곳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락방이고, 더 그럴듯하게는 다락방 한 가운데 세워진 인디언 텐트이며,...“, 11-13쪽.

 

“파라과이에서 예수회 수도사들은 실제로 경이로운 식민지를 건립했다. 그 안에서는 삶 전체가 완전히 규제되었고 토지와 가축이 모두의 것으로 선포되었으니 가장 완벽한 공산주의 체제가 지배하는 셈이었다. 각 가정의 몫으로는 오직 작은 뜰만 분배되었다. 집들은 십자로 교차하는 두 길을 따라 일정한 대열로 배치되었다. 마을 중앙 광장 깊숙한 안쪽에는 교회가 있었고, 한쪽 옆에는 학교가, 다른 쪽에는 감옥이 있었다. 예수회 수도사들은 식민지 주민들의 삶 전체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다시 저녁부터 아침까지 세심하게 규제했다. 아침 다섯 시면 잠을 깨우는 종소리가 울렸다... 실제로 인구가 번창했다. 예수회의 식민화 초창기에 13만 명이었던 인디언들은 18세기 중반에 40만 명이 되었다.”, 25쪽.

며칠 전 “안전, 영토, 인구”를 읽어서 특히 눈에 잘 들어왔던 대목이다. 푸코는 그 책에서 16-17, 18세기 통치성과 통치기술 변화 양상을 분석하고 있다. 위 사례에서 예수회 수도사들이 식민지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시공간을 어떻게 세심하게 배치하고 거기에 따라 사람들이 움직이도록 만들었는지 잘 나타나 있다. 16-17세기에 효과적인 통치 결과 지표 중 하나는 ‘인구 증가’였다. 인구는 노동력이기 때문이다. 중상주의자는 많은 국민을 좋은 노동자로 만들어야 국부에 관해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요즘 푸코 책을 집중적으로 몰아 읽다보니, 푸코가 했던 특정한 발언들이 어느 한 시기에만 관심사라서 충동적으로 발언했던 게 아니라 그의 생애를 사로잡고 있던 중요한 주제가 있었고 그 맥락을 따라 신중하게 (반복해서) 했던 발언이라는 점을 배우고 있다. 나는 푸코가 연구할 때 시공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활용했다고 생각한다. 시간에 있어서 그는 지식의 고고학과 권력, 주체의 계보학 방식에서 어떤 주제나 소재에 관해 문헌을 뒤져 구체적 사실들을 시대별로 나열하고 거기서 의미를 찾아내는 연구 방법을 활용했다. 공간에 있어서 푸코는 잘 알려져 있듯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 http://blog.yes24.com/document/10605233 과 같은 저작에서 근대 ‘규율권력’ 행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특정 효과를 노리고 만든 공간들(감옥, 병원, 군대, 학교 등등)을 다루었다. 푸코 저작과 강의에서 그는 자주 진리가 정해져있지 않고 만들어갈 자유가 있다는 맥락에서 ‘구축’과 같은 건축 용어를 썼다. 이런 저런 이유 때문인지 당대 건축가들 눈에 들어 어느 건축학회에서 발언했던 강의 원고를 정리한 내용이 이 책 서두 ‘헤테로토피아’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중반부는 ‘공간’이나 ‘건축’에 관해 레비나우와 수행한 인터뷰를 실었는데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논의와 연결되는 내용이다. 푸코 논의에서 자유, 비판, 저항(대항)과 같은 개념에 특히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의 다른 인터뷰에서도 인상 깊게 보았던 내용을 푸코 자신이 아래에서도 비슷하게 발언하고 있어서 인상 깊었다. 다른 글에서 푸코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비판하면서 ‘해방’이 자연스럽게 자유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자유로워질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줄 뿐이다. 해방 이후에 주체는 자유에 관한 내용을 스스로 구축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는 실천”이라는 발언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마찬가지로 건축에서도 저절로 그 공간에 있는 이용자를 자유롭게 만드는 그런 건축은 없다고 믿으며, 거기 있는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실천’하느냐가 자유 여부를 가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레비나우: 과거나 현재의 건축 프로젝트 가운데 당신이 보기에 자유 혹은 저항의 힘을 표상하는 것이 있습니까?

푸코: 나는 어떤 것은 ‘해방’의 층위에 속하고 또 어떤 것은 ‘억압’의 층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강제수용소처럼 확신을 가지고 그것이 해방의 도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주어진 체계가 얼마나 공포를 부추기든 간에, 어떠한 저항도 사전에 막아버리는 고문과 처형을 제외한다면, 언제나 저항과 불복종, 대항 세력화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이는 일반적으로 간과되는데-고려해야만 합니다.

반대로 나는 기능상 근본적으로-그 진정한 본질에 있어서-해방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고도 믿지 않습니다. 자유는 실천입니다. 따라서 언제나 이런저런 제약들을 조정하고 더 유연하게 만들거나 심지어 깨부수고자 하는 많은 기획들이 있지만, 이러한 기획 가운데 어떤 것도 단순히 그 본성상 사람들에게 자동적으로 자유를 보장해줄 수는 없으며, 기획 그 자체만으로 자유가 확립되게끔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의 자유는 결코 그것을 보장해주는 법이나 제도에 의해 확보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법과 제도는 거의 모두 반대의 목적으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그것들이 모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는 행사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72-73쪽.

 

 

책 마지막 부분은 푸코 생전에 20년간 푸코의 연인이었던 사회학자의 해제를 덧붙였다. 이 필진은 푸코가 한창 주목을 받고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할 때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헤테로토피아’ 논의와 관련해 그가 보고 들어 기억하고 있는 내용들을 덧붙여 이 글에 대해 설명하고 있어서 푸코 논의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다. 요 며칠 “성의 역사 2”를 읽고 있어서 아래 내용이 눈에 잘 들어왔다. 작년 2학기에 호네트, “인정투쟁: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 http://blog.yes24.com/document/10869216 을 읽는 동시에 대학원 강의를 들으면서 현대 정치에서 (그런 시각이나 거기 따른 방식의 옳고 그름을 접어두고) ‘정체성’을 빼놓고 논의하기란 점점 어려워질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미국이나 한국 정치 논의에서 ‘녹(환경)보(페미니즘)’ 문제가 매우 중요한 이슈이며 그 문제들에 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의 정치적 성향을 유추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 주에 읽은 “위험하지 않은 몰락”: http://blog.yes24.com/document/11021095 에서 강상중과 우치다 타츠루는 앞으로 국민국가가 액상화 되면서 같은 종교+문화를 오래 유지해온 나라들이 손을 잡고 ‘제국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보고 있다. 푸코 자신이 성소수자이기도 했으니 그가 남기고 간 논의들은 그 자신이 원치 않을지라도 후대 사람들에 의해 아래와 같이 읽히기도 하는 듯하다. 크게 보면 ‘이런 식으로 (과도하고 부적절하게) 통치당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삶을 자유로운 주체로 만들어가기’ 위해 최전선에서 저항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고, 푸코 논의는 그들 투쟁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모양이다. 

 

“... ”성의 역사“ 2, 3권의 번역이 그와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고는 이 이력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책들에서부터 푸코는 미국인들이 ‘정체성의 정치학’이라고 이름 붙인 것의 참조점으로 삼는 저자가 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운동, 동성애 운동, 소수민족 집단들은 헤테로토피아 개념이 다시금 기입되고 평가받는 새로운 그물망을 구성했다. 푸코가 개시한 주체화 양식의 역사는... 과 같은 텍스트를 가로지른다.”, 123-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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