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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평단 모집]『아이들의 계급투쟁』 | 이벤트 2019-10-31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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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계급투쟁

브래디 미카코 저/노수경 역
사계절 | 2019년 11월

신청 기간 : 116 24:00

서평단 모집 인원 : 5

발표 :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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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 음악에 빠져 영국으로 건너간 일본인 브래디 미카코가 영국 최악의 빈곤 지역 무료 탁아소에서 보육사로 일하며, 가난이 낳은 혐오와 차별, 배제의 격랑이 아이들의 일상을 무참히 침식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저자는 이 탁아소에서 일했던 두 시기, 즉 2008~2010년과 2015~2016년을 각기 ‘저변 탁아소 시절’과 ‘긴축 탁아소 시절’로 칭한다. 그 사이에는 영국의 집권 정당이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 바뀌면서 사회 전반의 복지제도가 축소되는 ‘긴축’이라는 큰 변화가 있었다. 복지제도가 밑바닥 사회를 어느 정도 지탱해주던 ‘저변 시대’에 비해, 생활을 위한 지원금이 모두 끊긴 ‘긴축 시대’에는 밥을 굶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인종차별을 넘어선 계급차별이 노골적으로 일어난다.


저자는 부모의 빈곤과 정서적 불안, 폭력과 무기력을 그대로 떠안은 유아들의 면면을 핍진하게 묘사하며 긴축이 사람의 마음을, 사회의 여유를 얼마나 쪼그라들게 하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살아가려 애쓰는 사람들과 밑바닥을 밑바닥으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며 손을 내미는 사람들, 국가의 손이 닿지 않는 세계를 꾸려나가는 아래쪽 공동체의 저력을 증명하며 그 힘은 끝내 서로를 존엄한 인간으로 대하는 것에서 비롯함을 역설한다.


긴축 시대, 탁아소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저변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워졌다. 노골적인 경멸을 숨기지 않는다. 그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긴축 시대의 불가촉천민이다. 이 시대에는 계급이 인종이 되었고, 계급에 따라 분리 정책이 실행되고 정당화된다. 내 아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말이다. 하층에 대한 혐오와 경멸은 정치적으로 완벽히 ‘옳은 것’처럼 실천된다.

그렇다면 과연 탁아소는 졌는가? 아니다. 저변 시대에는 로자리를 변화시켰고, 긴축 시대의 탁아소는 문을 닫기 전 비키를 변화시켰다. 이 탁아소에서 성장해 훗날 자원봉사자이자 보육사로 돌아온 로자리처럼, 전형적인 영국 하층 계급 청소년이었던 비키는 탁아소에서 그림책 낭독 자원봉사를 하며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탁아소가 이 둘에게 공간이 되어준 것이다.

한 사람을 존중하여 그 사람이 자신의 존엄을 깨닫고 삶의 다른 가능성에 눈을 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책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탁아소가 정치에 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람에게 존엄을 돌려주는 행위인 존중의 힘이다. 그리고 존중을 돌려받은 사람이 보이는 존엄의 힘이다. 존엄에 눈뜬 사람을 이길 방법은 없다.

- 엄기호(문화 연구자,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저자)


복지라는 것은 약자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이 책에서 배웠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책임을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사회적 상승의 기회를 확보해주어야 한다. 저자의 말처럼, 아이들과 젊은이를 키우지 못하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 우치다 타츠루(『어른 없는 사회』, 『하류 지향』 저자)


정치가 바뀌면 사회는 어떻게 바뀌는가. 이 책은 ‘가장 낮은 곳’의 시선으로 그 변화를 생생히 묘사하고, 그것은 무엇을 위한 대가인가 하는 질문으로 독자를 이끈다.

- 사이토 준이치(와세다대학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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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산, 「욕망의 분배」 | 시집 읽기 2019-10-27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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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초심

백무산 저
실천문학사 | 2003년 07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생존을 분배받기 위해 자본에 저항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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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배

 

 

 

  방금 헤어진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가다가 타이어 펑크가 났는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단다. 와서 좀 갈아 끼워 달란다. 그는 자동차 공장에서 10년 넘게 일해 온 사람이다. 그것도 생산직에서.

  그 공장에서 12년을 컨베이어 타고 볼트 조이기만 해온 한 친구는 저 혼자서는 알아서 할 줄 아는 일이 없어져버렸다고 한다. 혼자서는 집안 정리도 제대로 못해 마누라에게 등신 소리 듣는단다.

 

  그곳에서 차 유리 끼우는 일과 문짝 다는 일로만 15년 일한 사람은 자신이 기계 속에 있지 않으면 불안하단다. 언제나 모든 일이 컨베이어에 실려 왔으므로 자발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닥치면 두렵기까지 하단다.

 

  1년 강제 휴직을 받았던 한 친구는 자살을 할 뻔했단다. 라인 반복 작업만 18년을 해왔는데 일시에 중단하고 보니 마치 자기 몸에 전원 스위치가 내려져버린 것 같고 머릿속이 캄캄해지고 가슴이 시커멓게 정전되더라고 한다.

 

  그 공장에서는 아직도 고전적 파업을 하고 화염병과 쇠파이프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두고 말들이 많지만 더 많은 화염병이 나와야 한다고 나는 언제나 말한다. 대책 없이 변하라는 소리는 말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나는 걱정스럽게 말한다. 생존을 분배받기 위해 화염병으로 저항하고, 생활을 분배받는 일로 쇠파이프로 무장하는 일이 어쨌단 말인가. 그러나 욕망을 분배받는 일은 벼랑으로 가는 일, 노예 되기를 동의하는 일, 저 강물을 배반하는 일, 나무를 능멸하는 일, 저들과 공범이 되는 길. 이제 다시 물어야 한다, 왜 파업을 하느냐고, 다시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대답은 이제는 달라야 한다고.

  - 백무산, 「욕망의 분배」

 

 

백무산은 1980년대를 대표하는 노동자 시인이다. 불의 시대였던 1980년대를 뜨거운 정서로 수놓은 그의 시는 노동 혁명을 향한 순수한 의지로 빛을 발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그는 노동 세계를 넘어 인간의 욕망이라는 더 깊은 세계로 나아간다. 노동자가 꿈꾸는 세계는 자본가와는 분명 달라야 한다. 자본가의 욕망으로 노동자들이 혁명에 나서는 순간 노동 혁명은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문제는 욕망이다. 어떤 욕망을 지니고 어떤 세계로 나아가느냐에 따라 혁명의 결과가 달라진다. 백무산은 ?욕망의 분배?에서 욕망에 들뜬 세계를 이야기한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가 하는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이를테면 자동차 공장에서 10년 넘게 생산직으로 일한 사람이 펑크 난 타이어 하나 갈 줄 모른다. 자동차를 생산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자동차를 아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시인은 12년 동안 자동차 공장에서 컨베이어 타고 볼트 조이기만 해온 친구도 이야기한다. 그는 이제 저 혼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자조한다. 집안 정리도 제대로 못해 마누라에게 등신 소리를 듣기도 한다. 돈을 벌기 위한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이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차 유리 끼우는 일과 문짝 다는 일을 15년 동안 해온 사람은 자신이 기계 속에 있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이야기한다. 사람과 기계가 구분되지 않는다. 기계는 일을 위한 도구일 뿐인데도, 이 사람은 자신을 기계와 일치시킨다. 누군가 시키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자발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닥치면 두렵기까지 하단다. 노동이 사람들을 일에 얽매이게 한 결과다. 오직 한 가지 일만 반복하다 보니 다른 일에는 도통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날지 않아 날개 기능을 상실한 타조와 같다고나 할까?

 

1년 동안 강제 휴직을 했던 한 사내는 노동을 중단하고는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라인 반복 작업만 18년을 해왔던 사람이다. 자기 몸에 꽂은 전원 스위치가 내려가 머릿속이 캄캄해지고 가슴이 시커멓게 정전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얼마나 일에 집중했으면 이럴까 싶다. 하긴 몸은 반복되는 일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습관이라는 말로 해도 좋겠다. 죽지 않으면 몸에 배긴 습관을 벗어나기 힘들다. 노동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걸 우리는 익히 알 수 있다. 노동은 자기를 개발하는 도구가 아니라 생존을 유지하는 필요악으로 변해버렸다. 필요악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없는 노동자는 노동을 해야 생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노동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필요한 노동으로 하여 노동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시간이 흐르면 노동에 적응된 몸만 남는다. 노동은 말 그대로 필요악인 셈이다.

 

자동차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해마다 고전적 파업을 벌인다. 화염병과 쇠파이프가 사라지지 않은 파업을 두고 폭력이니 하는 여러 말들이 나온다. 시인은 더 많은 화염병이 나와야 한다는 입장이다. 시대가 변했느니 하는 사람들을 향해 대책 없이 변하라는 소리는 말라고외치기까지 한다. ‘귀족노조니 하는 말로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을 저열한 욕망으로 내모는 사람들을 보며 시인은 노동자들의 욕망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한다. 노동자는 어떤 욕망을 지녀야 하는 것일까?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노동자들에게 그 말은 죽으라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욕망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시인은 생존이나 생활을 분배받는 일과 욕망을 분배받는 일을 구분한다. 생존과 생활을 분배받기 위해 화염병으로 저항하고 쇠파이프로 무장하는 일은 가능하다.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게 아니다. 노동자의 생존을 거머쥐고 있는 세력에 맨몸으로 저항하기는 힘들다. 자본가는 공권력으로 노동자들을 밀어붙인다. 숱한 폭력에 휘둘린 경험을 한 사람들이니 자기 방어를 위해서도 최소한의 무장은 필요하다. 하지만 시인은 욕망을 분배하는 일은 벼랑으로 가는 일이라고 선언한다. 욕망은 생존과 생활을 넘어선 자리에 있다. 욕망은 노동자가 자본가 자리에 서려는 마음을 가리킨다. 자본가 마음을 지닌 노동자가 이 세상을 지배하면 어떻게 될까?

 

노예 마음을 지닌 사람이 주인이 된다고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자본가가 되어 강물을 배반하고 나무를 능멸하는 일을 계속 벌인다면 자본가보다 우위에 있던 노동자의 윤리도 땅에 떨어지고 만다. 시인은 저들과 공범이 되는 길을 벗어나 모든 생명이 두루 잘 사는 세상을 소망한다. 욕망의 분배가 아니라 생존의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다. 이런 세상은 과연 가능할까?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우리가 시나브로 다가가야 할 세계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무한 경쟁에 치여 제 살 길을 버리고 죽을 길로 들어선 현대판 노예들에게 시인은 자기 욕망과 당당히 맞서라고 주문한다. 생존의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는 바로 그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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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엄마의 말뚝」 | 소설 읽기 2019-10-26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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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엄마의 말뚝

박완서 저
세계사 | 2002년 05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엄마라는 말뚝을 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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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완서, 「엄마의 말뚝」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 연작은 엄마가 이 세상에 박은 말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말뚝은 달리 말하면 뿌리이다. 엄마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온 것일까? 「엄마의 말뚝 1」에서 작가는 박적골이라는 시골에서 서울 대처로 나온 엄마의 삶을 이야기한다. 박적골에서 엄마는 남편을 잃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맹장염 정도 되는 병일 텐데, 집안사람들은 민간요법이나 무당굿을 찾다가 허망하게 아들이면서 남편이자 아빠이기도 한 사람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냈다. 새집을 지은 지 3년 만에 일어난 일이라, 마을 사람들은 집터 동티가 난 거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이미 처녀 적에 문명의 소문에 접할 기회가 좀 있었던 엄마는 생각이 달랐다. 엄마는 대처의 양의사에게 보이면 쉽게 나을 수 있는 병으로 남편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엄마는 박적골을 벗어나 대처로 나가는 꿈을 꾸었다. 대처로 나가 사는 길만이 남편이 남기고 간 남매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아버지의 3년 상이 끝나기도 전에 오빠를 데리고 서울로 떠났다. 시부모가 엄연히 두 눈 뜨고 살아 있었지만, 이런 엄마의 집념을 막지는 못했다. 엄마는 시부모 봉양과 봉제사라는 의무를 포기하면서 재산상의 권리도 포기했다. 오로지 바느질 솜씨 하나만 믿고 엄마는 집안 장손을 데리고 박덕골을 떠났다. 나는 오빠와 친하고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막연하게나마 오빠가 걸머진 짐의 무게를 같이 느낄 수가 있어서 오빠가 안쓰럽고 불쌍했다.”(16)라는 진술에 나타나는 대로, 엄마는 어린 오빠를 서울에서 성공시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고단한 대처 생활을 버텼다. 오빠가 없었다면 엄마는 서울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빠는 엄마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끄는 매개였고, 오빠만 성공시킬 수 있다면 엄마는 어떤 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엄마는 딸인 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굶든 먹든 자식은 어미가 데리고 있어야 한다는 말로 엄마는 시부모를 설득했다.

 

엄마는 를 서울로 데려가 학교에 보내려고 한다. 공부를 시켜 를 신여성으로 만드는 게 엄마의 꿈이다. 시대는 일제 강점기다. 남자들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시대에, 엄마는 딸에게도 교육을 시키려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는 셈이다. 아무리 시부모라고 해도 엄마의 고집을 어찌 꺾을까? 제 자식 데려가 공부시킨다는 데야 달리 할 말도 없다. ‘는 어땠냐고? ‘는 사실 박적골을 떠나기 싫다. 박적골 집은 의 낙원이었다. 뒤란에는 앵두나무, 배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가 때맞춰 꽃 피고 열매를 맺었고 뒷동산엔 조상의 산소와 물 맑은 골짜기와 밤나무, 도토리나무가 무성했다. 게다가 박적골 집에 아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 수 있는 이 집을 떠나 낯선 대처로 나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느 날 엄마는 내 머리를 빗기는 척하며 뒤통수 언저리까지 머리를 쌍동 잘라버린다. 서울에 사는 아이들은 단발머리라는 게 이유이다. 를 반드시 서울로 데려가겠다는 의지를 엄마는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엄마는 에게 신여성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엄마가 얘기하는 신여성은 공부를 많이 해서 모르는 게 없는 여성이다. ‘에게는 참으로 두루뭉술한 얘기다. 뾰족구두니, 핸드백이니 하는 물건들도 에게는 여전히 낯선 대상일 뿐이다. 긴 머리꼬리에 금박을 한 다홍 댕기를 드리고, 같은 빛깔의 꼬리치마를 버선코가 보일 듯 말 듯 길게 입고 그 위에 자주고름이 달린 노랑저고리를 받쳐 입고 꽃신을 신고 싶은 아이는 도무지 서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차를 타고 싶다고 조르는 아이에게 엄마가 길가에서 파는 동그란 빵을 사서 내민다. 국화빵의 단맛에 현혹된 는 비로소 낯선 서울에 발붙일 계기 하나를 찾는다. 지게꾼을 대동한 엄마는 큰 한길을 걷다가 전찻길이 끝나는 데서부터 골목길로 접어든다. 지게꾼이 막걸리 값을 더 달라고 할 정도로 꼬불꼬불하고 높은 길이다. 박적골에서 엄마는 결코 가난한 티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딸을 끌고 엄마가 가는 길은 더럽고 뒤죽박죽인 길이다

  

지게꾼이 숨이 턱에 닿아 비명을 질렀다. 이상한 동네였다. 시골집의 한데 뒷간만한 집들이 상자갑을 쏟아부어 놓은 것처럼 아무렇게나 밀집돼 있었다. 내가 송도라는 대처에서 최초로 목격한 것도 사람과 집들의 이런 밀집상태였다. 그러나 나를 압도하고 주눅들게 한 건 밀집 그 자체가 아니라 그걸 다스리는 질서였다. 질서란 밀집에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것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 제멋대로 방목되었던 계집애를 한눈에 주눅들게 한 것도 사실이지만 한눈에 매혹한 것도 사실이었다. (28)

    

와 엄마가 걷고 있는 골목은 송도와 마찬가지로 사람과 집들이 밀집된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질서가 있었다. ‘는 처음 본 대처인 송도에서 그런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런데, 엄마와 오르고 있는 이 밀집 구역에는 도무지 질서란 게 없다. 번듯한 길 하나가 없고 사람 하나가 간신히 지나갈 좁고 더러운 길이 꼬불꼬불 나 있다. 엄마가 그토록 외치던 대처로서 서울은 어디에 있는가? 여기가 서울이냐고 묻는 아이 말에 엄마는 문밖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지금 모녀가 걷는 곳은 서울 문밖이다. 나중에 오빠가 성공하면 서울 문안에 들어가 살 거란다. 엄마의 얼굴에는 너도 반드시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강압이 보여 아이는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서울 문밖의 가난한 동네인 현저동에서도 상상꼭대기에 있는 초가집 문간방에 엄마는 세 들어 살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늘같은 시부모님한테도 다소곳한 채로 또박또박 할 말을 다하던 엄마가 안집 식구라면 코흘리개까지도 두려워하고 굽신대는 것이었다.”(29)

 

시골에서 서울로 나온 는 비로소 엄마가 지닌 두 얼굴을 본다. 엄마는 박적골에서 기원한 양반의식을 마음에 품은 채 서울 산동네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있다. 그녀는 이웃들을 언제나 상것으로 부른다. 이웃들과 부딪칠 때마다 엄마는 저런 상것들하고 상종을 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엄마가 상것이라고 부르는 그 사람들 역시 시골에서 대처로 나온 사람들이리라. 그들과 엄마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 엄마가 배신한 온갖 과수가 있는 후원과 토종국화 덤불이 있는 사랑뜰과, 정결하고 간살 넓은 초가집과 선산과 전답과 그 모든 것을 총괄하시는 비록 동풍은 했으되 구학문이 높으신 시아버지가 뒤에 있다고 믿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32)라고 어른이 된 나(서술자)는 말하고 있다. 서울에서 잃은 권위를 엄마는 박적골에서 길어 올린 기품으로 상쇄한다. 이웃을 상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엄마는 상것들은 들어갈 수 없는 세계에 어떻게든 말뚝을 박으려는 의지를 스스로 다진 셈이다.

 

엄마는 를 신여성으로 만들기 위해 내가 하지 말아야 할 목록부터 먼저 만든다. 안집에 들어가지 마라, 골목 앞에 나가지 마라, 안집 애하고 놀지 마라, 동네 애들하고 놀지 마라, 상종할 만한 집 자식 하나도 없더라.”(34) 엄마는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을 아이에게 그대로 투영한다. 돌려 말하면 엄마는 이러한 금지가 여덟 살 아이에게는 얼마나 끔찍한 형벌이 될 수 있는지 모른다. 엄마는 오직 성공한 아들과 신여성이 된 딸만을 생각할 뿐이다. 양반의 기품을 따지는 엄마가 왜 하루 종일 기생들의 옷이나 바느질하고 있겠는가. 가뜩이나 그들이 사는 집 아래쪽으로는 감옥소가 있다. 엄마는 이곳이 아이들을 제대로 기를 곳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안다. 하지만 어쩌랴, 돈이 없는데. 시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처로 나왔으니 엄마는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아들딸을 남부끄럽지 않게 키우려 한다.

 

열심히 일을 하는데도 앞날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아들이 안집 아저씨에게 후레자식이라는 소리까지 듣는다. 엄마가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아들이다. 엄마는 이불 속에서 울면서 시골에 편지를 쓴다. 집을 구할 돈을 보태달라는 얘기다. 박적골을 뛰쳐나오면서 엄마는 시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것은 엄마가 마음속에 깊이 숨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박적골에서 별다른 연락이 없는 사이 는 서울 문안에 있는 초등학교에 합격을 한다. 친척집에 주소까지 옮기면서까지 엄마는 를 이 학교에 집어넣는다. ‘를 마을 아이들과 떨어뜨리기 위해서다. 엄마는 초등학교 합격을 마치 과거급제처럼 부풀려 시골에 알렸고, 얼마 후 시골에서 집 사는 데 보탤 돈이 왔다. 이 돈에 금융조합에서 융자 받은 돈까지 합쳐 엄마는 세 들어 살던 집에서도 오르막길로 더 올라간 곳에 있는 기와집을 샀다. 여섯 칸짜리 기와집. 이사 간 첫날, 엄마는 서울에다 기어코 말뚝을 박았다며 감개무량한 얼굴로 말한다.

 

박적골에 살 때는 남편과 집안이 엄마의 말뚝이었다. 남편이 죽고 대처로 나올 결심을 했을 때 엄마는 하나뿐인 아들을 말뚝으로 삼았다. 현저동 꼭대기에 있는 여섯 칸짜리 집은 박적골에서 떨어져 나온 엄마를 대처에 뿌리 내리게 하는 또 다른 말뚝이었다. 이제 문밖에 있는 집을 문안으로 옮기는 일만 남았다. 그것은 아들이 성공하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엄마는 굳게 믿는다. 집을 옮기고서도 엄마는 여전히 이웃 사람들을 상것으로 부른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엄마가 상것으로 부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늙은 물장수가 그 중 한 사람이다. 엄마가 상것으로 치부한 사람들조차 물장수를 김 서방이라고 부르며 하대하는데, 엄마는 물 장수를 김씨 할아버지라 부르며 꼭 존댓말을 썼다. 오빠가 그 이유를 말해준다. 엄마는 물장수를 존경한단다. 왜냐고? 물장수 노릇을 해서 아들을 둘씩이나 전문학교에 보내서다. 물장수는 엄마가 그토록 하고 싶은 일을 미리 실천한 사람인 것이다.

 

시간이 흘러 전문학교를 졸업한 오빠가 큰 회사에 취직을 했지만, 문안에다 번듯한 집을 살 만큼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일제는 백성들의 삶을 한없이 조이기 시작했다. 엄마는 몸속에 곡식을 숨겨와 자식들을 먹였다. 징용이니, 정신대니 하는 흉흉한 말들이 오가는 상황에서 엄마는 솔선해서 시골로 피난을 떠났다. 피난살이 반 년 만에 해방이 되었고, 먼저 상경한 오빠가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서울 문안에 집을 장만했다. 엄마의 소원이 드디어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 후 살림은 순조롭게 늘어나 좀 더 나은 집으로 여러 번 이사도 다녔다. 묘한 건, 엄마가 현저동 여섯 칸 기와집을 잊지 못했다는 점이다. 엄마는 무엇이든 그 시절과 대보려고 했다. 거기다 엄마는 그때 한사코 바닥 상것들 취급을 하며 무시했던 이웃들을 진국이라며 재평가를 내렸다. 그런 엄마를 보며 어머니에게 지금 남아 있는 근거는 박적골 시절이 아니라 현저동 괴불마당집이었는지 몰랐다.”(58)고 생각한다.

 

엄마가 이 도시에 최초로 박은 말뚝을 또한 뜻 깊은 기념비로 기억한다. 태어난 곳, 그러니까 고향만이 말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엄마는 낯선 서울에 처음으로 마련한 괴불마당집을 말뚝으로 삼아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엄마에게 괴불마당집은 박적골을 대체하는 장소면서, 아들딸을 무사히 키워낼 수 있는 뿌리가 되는 장소였다. 이런 곳을 시간이 흐른다고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엄마의 이 마음은 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40여 년 만에 찾아간 괴불마당집이 연립주택으로 변한 걸 보고 는 가슴 속을 흐르는 소슬한 바람을 느낀다. 엄마의 말뚝은 뽑힌 것이다.”(59)라는 진술로 그녀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큰지 새삼 알 수 있다. ‘는 추억을 곱씹듯 어린 시절 통학로였던 길을 걷는다. 신축된 성벽이 가로막는다. 옛 길이 있던 곳에는 문이 나 있다. 문 안쪽으로 철조망이 쳐 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엔 푸르름만이 충충하게 괴어 있다.

 

엄마는 서울에서는 박적골의 풍모를 잊지 않으려 했고, 박적골에서는 서울에 사는 문명인으로 행동하려고 했다. 박적골을 잊지 못하면서도 한사코 박적골로부터 벗어나려는 모순에 빠져 있었다고나 할까. ‘는 엄마의 이런 마음을 영원한 문밖 의식(60)으로 표현한다. 안에 있으면 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밖으로 나가야 안이 비로소 보인다. 엄마는 서울에 있을 때는 박적골을 생각했고, 박적골에 있을 때는 서울을 생각했다. 엄마에게 서울과 박적골은 안이면서 동시에 밖이었다. ‘는 엄마의 영원한 문밖 의식이 자신의 현재를 지배하는 의식내용이라고 고백한다. 그러고 보니 나의 의식은 아직도 말뚝을 가지고 있었다. 제 아무리 멀리 벗어난 것 같아도 말뚝이 풀어준 새끼줄 길이일 것이다.”(60) 엄마의 말뚝은 엄마가 땅속 깊이 박은 말뚝이면서 동시에 내 마음에 깊이 박힌 말뚝이기도 하다. 엄마가 살아온 길은 그렇게 딸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면면히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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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 소설 읽기 2019-10-23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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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저/김욱동 역
민음사 | 2012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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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삶을 증명하려는 확고한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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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바다, 삶을 일깨우는 거울

 

여든 날 하고도 나흘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한 어부(산티아고)가 있다. 사람들은 그를 살라오라고 부른다. 살라오는 스페인 말로 가장 운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럴 만도 하다. 84일이나 고기를 못 잡았으면 생활을 어떻게 했을까? 처음 사십 일 동안은 소년(마놀린)과 함께 했지만, 고기를 못 잡는 어부에게 기꺼이 아이를 맡길 부모는 없다. 소년은 다른 배로 옮겼고, 어부는 이제 혼자서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예순이 훌쩍 넘은 어부 산티아고는 깡마르고 여윈 몸에, 얼굴에는 갈색 반점들이 가득하고, 목덜미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다. 소년은 다섯 살 때 처음으로 산티아고와 고깃배를 탔다. 지금도 그는 산티아고와 더불어 일하고 싶다. 하지만 부모가 허락하지 않는다. 가장 운이 없는 사람과 일을 했다가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는 게 이유이다.

 

소년은 산티아고를 가장 훌륭한 어부라고 생각한다. 노인은 그런 소년이 정말로 고맙다. 소년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커다란 고기를 잡아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다는 걸 그는 사람들 앞에 증명하고 싶다. 그러려면 반드시 고기를 잡아야 한다. 웬만한 고기로는 안 된다. 사람들이 입을 딱 벌릴 정도로 큰 고기를 잡아야 한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고기와 만나는 운도 따라야 하는데, 산티아고는 팔십 일이 넘도록 고기를 잡는 손맛을 못 보고 있다. 그는 이번에는 뭍에서 좀 더 멀리 나가볼 생각이다. 그만큼 고기를 잡고 싶은 열망이 강하다. 산티아고는 바다를 라 마르(la mar)’라고 부른다. 스페인 어에서 ‘la’는 여성형 명사에 붙는다. 상어 간을 팔아 번 큰돈으로 모터보트를 사들인 부류들이 바다를 엘 마르(el mar)’라는 남성형 명사로 부른 것과는 다르다.

 

바다를 엘 마르로 부르는 사람들은 바다를 경쟁자, 일터, 적대자로 부른다. 바다는 싸워서 이겨야 할 상대이고, 그 결과가 물고기를 잡는 일이다. 이에 비해 산티아고는 바다를 큰 은혜를 베풀어주기도 하고 고통을 안겨다주는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바다와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바다에 제 운명을 맡기고 그저 묵묵히 바다가 주는 것을 받을 뿐이다. 돌려 말하면 바다가 주지 않는 것을 그는 억지로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바다를 적대자로 생각하면 어떻게든 바다를 이겨야 한다. 적대자를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다를 적대자가 아니라 친구나 애인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바다는 반드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산티아고는 배를 타는 내내 이런 마음으로 바다를 대했다. 그에게 바다는 곧 자신을 일깨우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였던 셈이다.

 

거대한 물고기와 벌이는 사투

 

바다에서 해가 떠오른 지 두 시간이나 흘렀을까? 군함새 한 마리가 검고 길쭉한 날개를 활짝 펴고 상공을 맴돌다가, 날개를 뒤로 쭉 젖히고 수면으로 급강하해 내려왔다가는 다시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산티아고는 군함새가 무언가 큰 것을 찾아냈다고 직감한다. 징조가 좋다. 이번에 고기를 잡으면 가장 운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더 이상 듣지 않으리라. 물 위로 솟아 있는 초록색 막대기가 갑자기 물속으로 푹 잠긴다. 고기가 미끼를 건드렸다는 표시이다. 고기는 신중하다. 섣불리 미끼를 물지 않는다. 다시 낚싯줄에 가벼운 반응이 온다. 순간 산티아고는 뭔가 육중한 것이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여분으로 준비한 낚싯줄 중 하나를 아래로 풀어 고기의 움직임에 대비한다. 함부로 낚싯줄을 당겼다간 고기는 줄을 끊고 도망가 버릴 것이다. 어를 때는 어르고 칠 때는 쳐야 한다. 그래야 고기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미끼를 문 고기는 한결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배와 고기는 사이좋게(?) 잔잔한 바다 위를 한가로이 헤쳐 간다. 고기는 북서쪽으로 향해 간다. 뭍에서 멀어지는 방향이다. “나도 저놈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고 저놈도 나를 어떻게 할 도리가 없겠지,”라는 문장에 드러나는 대로, 사람과 고기는 드넓은 바다에서 서로 대치하는 상황에 있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격이라고나 할까. 함부로 움직이면 고기는 목숨을 빼앗길 수 있고, 어부는 오랜만에 잡은 기회를 허무하게 날릴 수 있다. 미끼를 문 고기는 그래서 하염없이 뭍에서 먼 쪽으로 헤엄쳐 나가고, 어부는 어부대로 고기가 움직이는 바를 온몸으로 느끼며 그에 대비한다. 낚시에 걸린 고기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라고 산티아고는 생각한다.

 

생명을 유지하려면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 자기 몸을 뜯어먹을 수 없으니, 모든 생물은 다른 생물을 먹으며 생명을 유지한다. 언제던가, 산티아고는 문득 청새치 한 쌍 중에서 한 마리를 낚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낚시에는 암놈이 걸려들었는데, 수놈이 계속 암컷 곁에 붙어서 낚싯줄을 넘기도 하고 암컷과 함께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수면을 맴돌기도 했다. 산티아고가 소년의 도움을 받아 암놈을 뱃전으로 끌어올릴 때까지 수놈은 따라왔다. 상황이 종결된 걸 눈치 챘는지 수놈은 마지막으로 암놈을 보기 위해 뱃전 옆에서 공중 높이 뛰어올랐다가는 이내 물속 깊이 자취를 감추었다. 산티아고는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수놈이 암놈을 사랑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모든 생물은 그렇게 태어나 사랑을 하고 죽는 것이다.

 

노인이 바다에서 세 번째로 떠오르는 해를 본 날 아침, 고기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 보았을 때는 마치 시커먼 그림자 같았는데, 배 밑을 통과하는데 시간이 너무 한참 걸리는 바람에 그 길이를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91) 산티아고는 지금까지 맞닥뜨리지 못한 거대한 고기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도와주는 소년도 없이 노인은 과연 이리 큰 고기를 잡을 수 있을까? 산전수전 겪은 어부라고 해도 한참 적을 지난 노인이 아닌가. 산티아고는 반드시 고기를 잡을 거라고 거듭 다짐한다. 이리 큰 고기를 잡아 뭍으로 돌아가면 한물갔다고 놀리는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다. 노인을 최고의 어부로 생각하는 소년은 또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그는 무엇보다 소년에게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어부라는 사실을 이 거대한 물고기를 잡음으로써 입증하고 싶다.

 

사투 끝에 노인은 자신의 가슴 높이까지 솟아오른 고기의 가슴지느러미 바로 뒤쪽 옆구리에 작살을 꽂아 넣는 데 성공했다. 작살의 날이 고기 몸 깊숙이 들어가는 느낌이 왔다. 길쭉하고 널찍한 몸뚱이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잠 한 숨 제대로 못 자고 무려 이틀 만에 잡은 고기였다. 바다는 고기의 심장에서 뿜어 나온 피로 온통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제 잡은 고기를 뭍으로 끌고 가는 일만 남았다. 이틀 동안 고기를 따라 먼 바다로 나온 터라, 얼마나 가야 뭍이 나올지 쉽사리 계산이 안 된다. 게다가 고기를 잡은 다음에 할 일도 많다. 일단 고기가 너무 커서 뱃전에 올릴 수 없다. 배에 매어 뭍까지 끌고 가야 하는 판이다. 이 고기를 뭍으로 가서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노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오른다. 꿈결 같은 이틀이었다. 배에 매인 커다란 고기를 보면 분명 꿈은 아니다.

 

상어 떼와 벌이는 또 다른 싸움

 

뭍으로 돌아가는 길은 순조롭다. 이대로 가면 사람들은 입을 딱 벌린 채 노인을 맞이할 것이다. 희망이 곧 현실이 되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한 시간 뒤 피 냄새를 맡은 상어들이 맹렬한 속도로 배를 따라온다. 크고 힘센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느라 산티아고는 이미 기진맥진인 상태이다. 상어들이 따라붙으면 고기를 지킬 방법이 없다. 노인은 다시 입을 앙다문다. 어떻게 잡은 고기이고, 얼마 만에 잡은 고기인가. 뭍까지 끌고 가 자신이 어부로서 뛰어난 사람임을 반드시 입증해야 한다. 그래야 소년과 함께 다시 낚시를 할 수 있다. 청새치와 싸운 것 이상으로 노인은 상어들과 사투를 벌인다. 사투를 벌이는 순간마다 고기 몸은 점점 줄어든다. 간신히 상어를 물리치면 얼마 후 다른 상어들이 피 냄새를 맡고 나타난다. 그럴수록 노인은 죽을 때까지 싸울 거라고 다짐한다. 상어는 상어의 일을 하면 되고, 어부는 어부의 일을 하면 된다. 상어가 이기면 어부는 맨손으로 뭍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어부가 이기면 고기는 전리품이 되어 어부의 삶을 빛낼 것이다.

 

자정 무렵 또 다시 상어는 떼로 몰려 왔고, 산티아고는 그제야 더 이상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밤중에도 그는 느낌과 소리에 의지해 필사적으로 몽둥이를 휘둘렀다. 승산이 없어도 싸움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어부로서 바다에 대해 예우를 지키는 길이다. 배에 매인 고기는 이제 머리만 남았다. 그 머리를 향해 마지막 남은 상어 한 마리가 돌진해 온다. 노인은 마지막 힘을 모아 키 손잡이로 상어 대가리를 내리쳤다. 손잡이가 부서지자 그 조각으로 힘껏 상어를 찔렀다. 몸속 깊이 상처를 입은 상어는 물었던 살점을 놓고 저 멀리로 물러갔다. 산티아고는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입속에서 구리 같은 들척지근한 맛이 느껴진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안 된다. 소년과 다시 낚시를 해야 한다. 노인의 마음을 안다는 듯, 배는 바다 위를 가볍게 미끄러져 달린다.

 

음식 부스러기를 찾는 상어들이 또 다시 달려들어도 노인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이 할 일은 이미 다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을의 불빛이 보인다. 늦은 밤이라 항구에는 아무도 없다. 노인은 돛대를 어깨 위에 걸머메고 언덕길을 오른다. 언덕 꼭대기에 이르자 힘에 부친 노인은 그대로 땅에 쓰러진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다시 걷기 시작한다. 다섯 번을 쉬고 나서야 판잣집에 이른다. 신문지에 얼굴을 파묻고 그대로 잠에 빠져든다. 일은 끝났다. 상어에게 고기를 빼앗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엄청나게 큰 고기를 산티아고 혼자 힘으로 잡아냈다. 한물 간 어부라고 비웃던 사람들을 향해 그는 비로소 자신이 왜 뛰어난 어부인지를 입증했다. 그것이면 된 것이다.

 

바다, 생명의 터전

 

이튿날 아침, 소년이 판잣집 문 안을 들여다본다. 항구에 정박한 배를 확인하고 올라온 참이다. 많은 어부들이 조각배 주위에 모여 뱃전에 매달린 것을 구경했다. 코끝에서 꼬리까지 무려 5.5미터나 되는 고기다. 사람들은 산티아고가 이 고기를 잡았다는 것을, 그리고 뭍으로 오는 도중 상어들과 사투를 벌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들 또한 어부들이 아닌가. 이렇게 물증으로 보여주는 바에야 산티아고가 뛰어난 어부라는 것을 그 누가 부정하겠는가. 육십이 넘은 나이에 이리도 큰 고기를, 그것도 혼자서 잡은 그를 바다를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들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소년은 잠에서 깬 산티아고에게 얼른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자기에게 고기를 잡는 모든 방법을 알려달라고 이야기한다. 노인도 원하던 바다. 소년과 함께 바다로 나가 커다란 고기를 낚는 꿈이 현실이 되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산티아고는 왜 이토록 고기잡이에 매달린 것일까? 제목 노인과 바다에 그 해답이 나와 있다. 사람들은 그를 노인이라고 부른다. 늙어서 더 이상 어부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얘기리라. 하지만 산티아고는 그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지금도 남들 못지않게 고깃배를 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소년만이 산티아고의 그 마음을 믿어준다. 노인은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더불어 사는 삶터인 바다를 향해 길을 떠난다. 그에게 바다는 친구이고 애인이고 가족이다. 생명과 생명이 뜨겁게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바다가 삶터인 그는 먹고 살기 위해 바다에 사는 고기를 잡는다. 고기를 통해 생명을 잇는다고나 할까? 이것은 고기가 없으면 산티아고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말도 된다. 노인에게 바다는 삶을 주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죽음에 이르는 공간이다. 산티아고는 천생 어부로서 삶을 바다와 더불어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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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 소설 읽기 2019-10-21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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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저/박병덕 역
민음사 | 2002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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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구도자가 걷는 지난한 깨달음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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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바라문의 아들인 싯다르타는 찬란한 미래가 보장된 젊은이였다. 어린 나이에 그는 삼라만상과 하나이자 불멸의 존재인 아트만(참된 자아라는 뜻)이 마음속에 있음을 알아챘다. 아버지는 지식욕에 불타는 싯다르타가 바라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구인 고빈다 또한 누구보다 싯다르타를 사랑했다. 그는 싯다르타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고빈다 뿐만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 누구나 싯다르타를 따랐다. 그가 하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마을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싯다르타는 그런 삶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고빈다도, 마을 사람들도 자신을 만족시켜 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승들은 경건한 의식으로 신에게 경배를 드렸지만, 그것만으로는 마음 속 영혼이 느끼는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다.

 

궁극적인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아트만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끝없이 싯다르타의 마음속을 맴돌았다. 가장 지혜로운 현인들은 그것이 살이나 뼈 속에 있는 것도 아니며, 생각 속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몸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 속에 있는 것도 아니라면 아트만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수없이 질문을 던졌지만 아무도 그 질문에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럴수록 싯다르타는 마음속에 불만과 불안을 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불만을 터뜨렸으며,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생을 마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빠졌다. 아무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사는 아버지는 늘 죄업을 씻어냈다. 이대로 간다면 싯다르타는 아버지처럼 날마다 죄업을 씻어내며 살아야 할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다른 길을 찾으려고 했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근원적인 영혼을 찾고 싶었다. 생각 끝에 그는 아버지 곁을 떠나 사문이 되기로 결심했다.

 

1. 바라문의 아들에서 사문으로

 

사문(沙門)은 머리를 깎고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도를 닦는 탁발승을 말한다. 최고의 바라문이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가 사문이 되겠다는 싯다르타의 뜻을 허락할 리 없다. 아버지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아들 또한 침묵으로 굳은 의지를 표현한다. 동이 틀 무렵까지 아버지는 여러 차례 싯다르타에게 무엇을 기다리고 있느냐고 묻는다. 아들은 아버지가 이유를 알고 있다고 대답한다. 죽을 각오로 달려드는 아들을 아버지가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햇살이 내리비치는 아침에 아버지는 결국 뜻을 굽힌다. 고요 속에 잠든 도시를 떠나려고 발걸음을 떼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 고빈다가 나타난다. 싯다르타는 미소로 그를 맞는다. 싯다르타가 선택한 길로 고빈다는 주저 없이 들어선다. 그만큼 고빈다는 싯다르타를 믿는다. 그가 가는 길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싯다르타는 입고 있던 옷을 가난한 바라문에게 주고 띠로 치부만을 가린 채 바느질도 하지 않은 베를 몸에 걸쳤다. 사문이 되려면 모든 것을 먼저 버려야 한다. 무엇보다 소유욕을 버려야 한다. 하루에 한 끼니만 먹어야 하고, 익힌 음식은 결코 입에 대지 말아야 한다. 몸이 좋아하는 것과 거리를 둠으로써 사문은 몸을 청결하게 해야 한다. 몸이 청결하다는 것은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과 같다. 마음이 청결하려면 몸에서 새록새록 피어나는 욕망을 일체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스무여드레 동안 단식을 하자 싯다르타의 몸은 눈에 띄게 살이 빠졌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몸으로 그는 사방을 떠돌았다. 떠돌면서 그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벌이는 온갖 삶들을 보았다. 모든 것이 속임수투성이였고, 모든 것이 악취를, 모든 것이 지독한 거짓의 악취를 풍겼으며, 모든 것이 그럴싸하게 속여 마치 참뜻과 행복과 아름다움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믿게 하였으며, 모든 것이 부패하여 있었다.”(27) 이토록 부패한 세상과 아예 인연을 끊어야 청결한 몸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세속에 물든 자아가 극복되고 사멸된다면 궁극의 경지인 아트만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싯다르타는 생각했다. 그러려면 욕망 덩어리인 몸에 굴복하면 안 되었다. 수직으로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서도 싯다르타는 고통을 감내하며 말없이 서 있었다. 고통이 극에 달해 아무렇지도 않은 순간까지 견디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일이었다. 깨달음은 인간이 생각하는 범주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 범주 바깥으로 기꺼이 나아갈 때 비로소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시작된다. 싯다르타는 이와 함께 호흡을 줄이는 방법 또한 배웠다. 욕망이 강해지면 숨 또한 거칠어진다. 온갖 물욕이나 식욕, 성욕에 빠진 몸을 떠올려 보라. 거칠어진 숨으로는 깨달음의 근처에도 다가갈 수 없다. 고요니, 적정(寂靜)이니 하는 세계는 한없이 고요해진 숨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는 장소인 셈이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 마음으로 싯다르타는 자기 초탈 수련과 침잠 수련을 하였다. 자기를 벗어나 다른 생명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훈련이었다. 그는 왜가리가 되어 하늘을 날아오르고, 물고기를 잡아먹고, 울음을 울었다. 죽은 재칼의 몸으로 들어가서는 하이에나들한테 갈가리 찢기고, 콘돌들에게 뜯겨 껍질이 벗겨지고, 뼈다귀만 남았다가 먼지가 되어 들판으로 흩날려가 버리는 경험을 했다. 그는 살아 있는 몸이면서 동시에 죽은 몸이었다. 한 몸에 삶과 죽음을 간직한 싯다르타는 틈이 날 때마다 다른 생명들 속으로 들어가 다양한 삶과 죽음을 경험했지만 매번 제 몸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 몸이 있는 한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싯다르타는 사문으로서 이제 한계를 느꼈다. 다른 생명에게로 침잠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로부터 도망치는 것일 뿐이다. 세속을 사는 사람들도 술을 마시면 일순간 망아에 빠지는 때도 있지 않은가.

 

사문 생활에 짙은 회의가 들 무렵 싯다르타는 고타마라고 불리는 성자의 소문을 들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서 세상의 번뇌를 극복하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정지시킨 세존, 부처라는 것이었다.”(36) 윤회의 수레바퀴를 정지시킨 부처라고? 싯다르타가 그토록 찾아 헤맨 길이었다. 그는 사문의 최연장자에게 떠날 결심을 알렸다. 그 사문은 힘에 담지 못할 욕설을 내뱉었다. 오랜 세월 쌓아올린 고요를 스스로 무너뜨린 것이다. 싯다르타는 욕망에 불타는 노인의 시선을 자신의 불타오르는 시선으로 제압했다. 노인은 싯다르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는 여러 차례 몸을 숙여 싯다르타와 고빈다 두 젊은이에게 축복의 말과 몸짓을 전해주었다. 몇 해 만에 다시 떠나는 길인가? 싯다르타는 사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배움을 바탕 삼아 그는 지금 고타마라는 새로운 스승을 찾아 길을 떠난다.

 

2. 사문에서 수도승으로

 

고타마는 부처의 길을 가는 자는 해탈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처의 길이란 번뇌를 끊는 길이다. 번뇌는 욕망이다. 고타마는 부드럽지만 확고부동한 목소리로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四諦)를 가르쳤고 팔정도(八正道)를 가르쳤다. 설법을 들은 순례자들은 교단에서 받아주기를 청했다. 고빈다도 기꺼이 제자가 되었다. 싯다르타는 세존의 가르침이 훌륭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고빈다처럼 세존의 제자가 되지는 않았다. 다음 날 새벽, 고빈다가 신참 수도승의 행렬에 들어간 사이, 싯다르타는 숲속을 거닐었다. 그곳에서 그는 세존 고타마와 우연히 마주쳤다. 싯다르타는 세존의 훌륭한 가르침에 탄복하면서도 또 다시 순례 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인과응보라는 영원한 사슬로 묶여 있는 이 단일성의 세계가 세존이 끌어들인 해탈에 의해 균열이 생겼다고 말했다. 해탈이 있다면 영원하고 단일한 세계 법칙의 전체 구조가 다시금 파괴되는 게 아니냐는 물음이다.

 

세존은 싯다르타를 지식욕에 불타는 그대여라고 부른다. 진리 앞에서 의견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번뇌(지식 또한 번뇌다)로부터 해탈하는 것만이 가르침의 목적이라고 세존은 강조한다. 싯다르타는 세존의 가르침에 다른 의견을 달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세존이 이른 해탈의 길은 가르침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깨달음의 경험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깨달음은 스스로 이르러야 하는 길이다. 싯다르타는 그래서 순례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모든 가르침과 스승을 떠나서 홀로 목표에 도달하든가 아니면 죽든가 하겠지요.”(55)라는 싯다르타의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부처의 가르침만으로는 자신의 가장 내면적인 곳까지 뚫고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길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게 될까?

 

고타마 곁에 고빈다를 남겨 두고 싯다르타는 다시 순례를 떠난다. 유랑을 하면서 그는 자아에 대해 생각한다. 자아로부터 벗어나 아트만에 도달하기 위해 그는 끔찍한 고행을 거듭해 왔다. 완전한 자라고 칭송받는 고타마를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들을 통해 수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는 결국 그들 곁을 떠나 이렇게 떠돌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문득 싯다르타는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쳐서 아트만을 추구하는 게 지금까지 그가 행한 모든 일이었다. 궁극적인 것을 찾기 위해 자아를 산산조각 부수어버리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본 세상인 듯 눈앞에 기묘한 세계가 펼쳐졌다. 파랑이 있고, 노랑이 있고, 초록이 있다. 하늘이 있고, 강이 있고, 숲이 있다. 그 가운데 싯다르타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이제 더 이상 마야의 요술도 아니었고, 이제 더 이상 마야의 베일도 아니었으며, 이제 더 이상 무의미하고 우연한 현상계(現象界)의 다양성도 아니었다. 다양성을 무시하고 통일성을 추구하며 깊이 사색하는 바라문에게는 무의미하고 우연한 현상계라는 것은 경멸스러웠다. 파랑은 파랑이고, 강은 강이었으며, 비록 싯다르타의 내면에 있는 파랑과 강물 속에, 하나이자 신적인 것이 숨어 있다 할지라도, 여기에 노랑, 여기에 파랑, 저기에 하늘, 저기에 숲, 그리고 여기에 싯다르타가 있다는 그 사실이야말로 바로 신적인 것의 본성이요 의의였던 것이다. 의의와 본질은 사물들의 배후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들 속에, 삼라만상 속에 있었던 것이다. (63)

 

싯다르타는 자아로부터, 현상계로부터 벗어나는 길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현상계는 감각을, 번뇌를, 욕망을 낳는 세계라는 인식을 떨치지 않으면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그는 완전히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햇다. 세존이 가르침을 베푸는 기원정사를 떠날 때만 해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어찌 고향에 돌아간단 말인가. 그는 더 이상 옛날의 자신이 아니다. 바라문이 아니며, 사문도 아니며, 승려도 아니다. 이제 그는 아무 데도 의지할 데가 없다. 부처 또한 탄생하는 순간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을 외쳤다던가. 모든 것을 끊어낸 존재만이,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존재만이 유아독존할 수 있는 법이다. 싯다르타라는 새로운 인간은 이렇게 새로운 세상을 여는 길을 스스로 열어젖힌 셈이다.

 

3. 수도승에서 상인으로

 

새로운 인간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찾아 길을 떠난 싯다르타는 운명처럼 카말라를 만난다. 카말라를 만나기 전 그는 배로 강을 건네준 뱃사공과 하룻밤을 지내게 되는데, 뱃사공은 모든 것은 다시 돌아온다는 말로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저곳으로 떠나는 싯다르타의 순례 여행을 표현한다. 그러니까 그가 카말라를 만난 곳은 저곳(동시에 이곳)이다. 카말라는 유명한 기생이다. 새로운 인간이 된 싯다르타가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기생이라는 게 참 재미있지 않은가? 싯다르타는 카말라에게 친구면서 스승이 되어달라고 말한다. 그는 카말라를 스승 삼아 쾌락의 기술을 알려고 한다. 쾌락을 멀리 해야 할 수도자가 기생에게 사랑과 쾌락을 배우겠다고? 카말라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세련된 신발을 신고, 머리카락에서는 좋은 향내가 나고, 지갑에는 돈이 두둑하다. 그 모든 것들을 손에 쥐려면 일을 해야 한다.

 

카말라가 싯다르타에게 무슨 일을 할 줄 아느냐고 묻는다. 어떻게 돈을 벌 것이냐는 물음이겠다. 그는 사색과 기다림과 단식을 말한다. 수도를 하는 과정에서는 필요한 것들이지만, 돈을 벌 때는 별다르게 필요 없는 것들이다. 싯다르타는 어린아이처럼 하나하나 배워나간다. 새롭게 태어난 인간이니 배울 게 수두룩하다. 그것이 왜 하필 세속이냐고 묻지는 말라. 새로운 인간 싯다르타는 현상계를 거부하지 않는다. 진리는 현상계 속에 있다고 그는 굳게 믿고 있다. 카말라에게 배울 사랑의 기술이 싯다르타를 세존과 같은 완전한 존재로 만들어 줄지 어찌 아는가? 카말라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싯다르타의 능력을 높이 산다. 그녀는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인 카마스와미를 소개시켜 주며, 그의 하인이 아니라 그와 동등한 사람이 되라고 싯다르타에게 말한다. 카말라가 베푸는 첫 번째 가르침이다.

 

카마스와미는 상인답게 싯다르타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고 단도직입으로 묻는다. 싯다르타는 다시 사색과 기다림과 단식을 말한다. 카마스와미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그 또한 카말라처럼 싯다르타의 읽기 능력을 높이 산다. 카마스와미가 꼼꼼하고 정열적으로 사업을 한다면, 싯다르타는 이 사업을 유희로 여겼다. 일을 마치면 싯다르타는 아름다운 옷과 멋진 신발을 입고 신은 채 카말라를 찾았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만나듯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싯다르타에게 그녀는 쾌락의 근본부터 가르쳤다. 쾌락을 주지 않고서는 쾌락을 받을 수 없다는 대원칙 아래 그녀는 몸짓 하나하나, 어루만짐 하나하나, 접촉 하나하나, 눈길 하나하나가 모두 제각기 비밀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쳤다. 그는 기꺼이 그녀의 제자가 되었다.

 

카마스와미의 사업을 도우면서 싯다르타는 당장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았다. 앞서 얘기한 대로 그에게 사업은 유희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익을 취하기보다 사람들과 더불어 좋은 관계를 맺기를 원했다. 카마스와미는 간혹 자신이 주인이고 싯다르타는 하인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얘기했지만, 싯다르타는 결코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든 이를 차별 없이 대하는 그를 사람들은 신뢰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았다. 사기를 치기 위해 그를 찾는 사람도 있었다. 세속 사람들과 관계를 맺다 보니 깨달음을 향한 꿈은 자연 가슴 깊은 곳으로 밀려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사람들을 만나 열심히 일을 했고, 밤에는 카말라와 더불어 깊은 쾌락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시간이 흘러 카말라는 싯다르타를 최고의 연애 대장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은근히 싯다르타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고백했다.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관능에 눈을 뜬 싯다르타였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사문의 삶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에게 어린애 같은 속세 사람들은 아직도 낯선 존재였다. 고타마의 곁을 떠난 후 싯다르타는 장사하는 법, 권력을 휘두르는 법, 여자들과 즐기는 법, 아름다운 옷을 입는 법, 하인들을 부리는 법,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물속에서 목욕하는 법을 배웠다. 한마디로 그는 세속적인 부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세속 사람들과 자기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 만용이 깃들기 시작하면서 그는 부자들이 잘 걸리는 영혼의 병에 걸렸다. 돈은 써도 써도 늘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늘 지친 기색이 감돌았다. 깨달음을 향한 열망 또한 스러진 지 오래였다. 그는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도박에 빠졌다. 하룻밤 사이에 엄청난 돈을 잃기도 하고 따기도 했다. 그럴수록 마음속 불안감은 더욱 더 심해졌다.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다시 도박을 하는 악순환 속에서 그는 지치고, 늙고 병들었다.

 

싯다르타가 고타마 이야기를 점점 잊어가는 사이 카말라는 반대로 고타마를 향한 열망에 불타올랐다. 그녀는 싯다르타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와중에도 언젠가는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할 것이라고 간절하게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카말라의 아름다운 얼굴에도 늙음이 찾아들었다. 그녀는 그 두려움을 물리치고 싶어 부처를 따르려고 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싯다르타는 묘한 꿈을 꾸게 된다. 카말라는 희귀한 새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 새가 죽은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꿈이었다. 싯다르타는 새를 살펴보다가 골목 밖으로 휙 던졌고, 그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며 꿈에서 깨었다. 마치 그가 이 새와 함께 자기의 내면에 있는 가치 있는 모든 것과 선()을 송두리째 내던져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온통 고통으로 뒤범벅이 되었다.”(121)

 

암담한 마음으로 싯다르타는 정좌(靜坐)를 한 채 죽음으로 도배된 마음과 마주했다. 바라문의 아들로 산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신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그 위로 가만히 맴돌았다. 정든 고향을 떠나 사문 생활을 시작한 때가 떠올랐고, 완성자 고타마를 만난 때도 떠올랐다. 그를 떠난 이후로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다. 돈을 벌었고, 카말라와 더불어 쾌락에 빠졌다. 돈과 쾌락으로 궁극적인 곳에 이르렀던가? 아니다. 그곳에서 더 멀어졌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유희야말로 바로 윤회라고 부르는 것이다.”(124)라는 생각에 싯다르타는 이른다. 윤회를 반복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싯다르타는 비로소 유희가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길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그는 망고나무 아래 앉아 사람들과 맺은 관계를 청산했다. 그리고는 훌쩍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떠났다.

 

4. 상인에서 현자(賢者)

 

싯다르타가 말없이 떠난 후, 카말라는 금빛 찬란한 새장에 갇힌 새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그녀 또한 그렇게 싯다르타를 마음에서 내보냈다. 하지만 뱃속에 이미 자리 잡은 싯다르타의 씨앗만은 내버리지 못했다. 싯다르타와 마지막 밤을 보냈을 때 생긴 씨앗이었다. 카말라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긴 것도 모르고 다시 길을 떠난 싯다르타는 큰 강가에 이르렀다. 예전에는 이 강을 건너 이곳(그때는 저곳이었다)에 왔다. 지금은 이곳을 떠나 저곳(그때는 이곳이었다)으로 가려고 한다. 저곳으로 가면 지금 마음을 헤집고 있는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는 물속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침을 뱉었다. 차라리 물속에 빠져 죽는 게 낫다. 두 눈을 감고 죽음을 향해 한 발을 내디디는 순간, 마음 저 깊은 곳에서 경련하듯 한 마디 말이 울려나왔다. ‘이라는 소리였다.

 

소리가 온몸으로 퍼지는 바로 그때 싯다르타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절망에 빠진 자기와 마주쳤다. 몸은 지금 소리를 내고 있다. 살아 있다는 표시겠다. 마음 깊은 자리에서 밀려나오는 이 몸의 소리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는가? 싯다르타는 옴을 웅얼거리다가 그대로 야자나무 밑동에 풀썩 쓰러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도 없는 잠이었다. 나지막이 울리는 강물 소리를 들으며 그는 눈을 떴다. 경이로운 마음으로 나무들과 하늘을 바라보았다. 죽음 속으로 몸을 내던지려는 순간에야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신성(神性)이 반응을 했다. 몸을 곧추 일으키자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승려였다. 오래 전에 헤어진 친구인 고빈다가 승려가 되어 맞은편에 앉아 졸고 있다. 기척을 느낀 고빈다가 눈을 뜬다. 그는 싯다르타를 알아보지 못한다. 뱀이 자주 나오는 곳에 사람이 누워 있어 지켜줄 겸 일행을 보내고 여기에 남았다고 한다. 싯다르타 입장에서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고빈다는 다시 순례 길을 떠나고, 싯다르타는 강가에 남아 뱃사공을 찾아가기로 한다. 뱃사공을 기점으로 싯다르타의 새로운 인생길이 시작된다. 뱃사공의 이름은 바주데바다. 그는 오랜 세월 뱃사공을 하며 많은 사람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건네주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묵묵히 강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으려고 했다. 강이 들려주는 침묵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듣다보니, 사람들이 하는 말 또한 묵묵히 들어주는 습관도 자연스레 그의 몸에 새겨졌다. 싯다르타는 바주데바를 따라 뱃사공이 되기로 한다. 시간의 흐를수록 싯다르타의 웃음은 바주데바의 웃음을 닮아갔다. 그의 미소는 뱃사공의 미소와 거의 마찬가지로 밝은 발하였고, 거의 마찬가지로 행복으로 밝게 빛났으며, 그 뱃사공의 미소와 꼭 마찬가지로 수천 개의 잔주름으로 빛을 발하고, 꼭 마찬가지로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꼭 마찬가지로 노인다워 보였다.”(159)

 

어린아이와 노인의 얼굴을 공히 품고 있는 뱃사공은 저녁이 되면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몇 해나 흘렀을까, 부처 고타마를 신봉하는 제자들이 강가로 모여들었다. 세존이 위독하다는 것이었다. 죽어가는 부처를 향해 순례 길을 떠난 여자도 있었다. 카말라였다. 그녀는 오래 전에 기생 생활을 청산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한 상태였다.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순례 길을 떠났다가 그만 독사에 물렸다. 도와달라고 외치는 모자의 소리를 듣고 바주데바가 급히 그리로 갔다. 오두막으로 오는 세 사람을 싯다르타는 보았다. 맨 먼저 소년의 얼굴이 보였다. 옛날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었다. 동시에 그는 뱃사공의 팔에 안겨 있는 카말라를 보았다. 고요해진 줄 알았던 그의 마음이 마구 요동을 쳤다.

 

카말라는 눈을 떴지만 독이 몸속에 퍼져서 살 가망이 없는 상태였다. 그녀는 싯다르타의 눈빛을 보고 예전의 그가 아니라는 것을 금세 눈치 챘다. 고타마 부처에게로 가는 길은 이미 끊겼다. 그녀는 싯다르타를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 했다. 카말라가 떠난 자리에 소년 싯다르타가 남았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한 마음을 싯다르타는 아들에게서 느낀다. 하지만 아들은 이미 세속에 물들어 있다. 게다가 아들은 자신을 보호해주던 엄마까지 잃었다. 싯다르타는 온 마음을 기울여 아들을 보살폈지만, 그럴수록 아들은 엇나가기만 했다. 바주데바는 아들을 도시로 돌려보내라고 싯다르타에게 충고했지만, 그는 아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혈육만큼 사람을 안타깝게 만드는 이들이 어디에 있을까? 자신을 억압하려 드는 아비를 향해 아들은 증오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해댄다. 어떤 경우에도 아들은 아비와 같은 길을 갈 수 없다.

 

그예 아들이 배를 타고 강 저편에 있는 숲으로 도망을 친다. 싯다르타는 아들에게 별다른 일이 없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쉬지 않고 아들이 간 곳을 향해 달려갔다. 붙잡으려는 게 아니다. 한 번만 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놓을 수 없어서이다. 어느덧 카말라가 살던 곳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싯다르타는 자신이 욕망에 휘둘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깨닫는다. 아들로 해서 생긴 마음속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본 채로 그는 침잠 상태에 빠져들었다. 거리에서 일어나는 먼지를 흠뻑 뒤집어 쓴 채로 그는 마음속에서 울릴 한 소리를 듣기 위해 여러 시간 동안 귀를 기울였다. ()의 상태가 되어야 들릴 소리였다. ‘소리였다. 무감각 상태에 빠진 그를 깨우는 손길이 느껴졌다. 바주데바의 손길이었다. 해맑은 두 눈이 부딪쳤다. 두 사람은 강가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아이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엄청난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싯다르타는 다시 고요한 강가로 돌아온 것이다.

 

5. 아빠와 현자 사이

 

아들을 잃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아이와 대동한 부모를 볼 때마다 싯다르타는 부러움을 느꼈다. 이제 그는 예전과는 다른 눈으로 사람들을 보았다. 오만을 떨쳐낸 따뜻한 눈으로 그는 세상 사람들을 보았다. 아빠의 눈이었다. 아빠의 눈으로 보자 세속을 사는 사람들의 욕망이 더 이상 어리석은 어린애 같은 짓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그런 욕망에서 생동하는 불멸을 보았다. 싯다르타가 그들보다 유일하게 앞서 있는 것이라면 생명의 단일성을 의식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아들로 인한 상처만은 도무지 아물지를 않았다. 참다못한 그는 어느 날 그리움에 사무쳐 강을 건넜다. 배에서 내린 순간 싯다르타는 강물이 웃는 소리를 들었다. 그냥 웃는 게 아니라 비웃음 소리였다. 그는 강물 위에 비친 제 얼굴을 보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자신이 아들 때문에 마음 아파한 것처럼, 아버지 또한 그때 그 시절 자신 때문에 마음이 아팠으리라.

 

윤회다. 똑같은 일의 반복이다. 강은 싯다르타가 벌이는 행동이 얼마나 오래된 습관인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다. 오두막으로 돌아온 싯다르타는 바구니를 짜고 있는 바주데바 앞에 앉아 속마음을 하나하나 털어놓기 시작했다. 바주데바는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말을 들어주었다. 싯다르타의 마음에 쌓인 고통과 불안이 그를 향하여 서서히 흘러들어갔다. 바주데바의 마음속으로 흘러든 고통과 불안은 은밀한 희망으로 세척되어 싯다르타의 마음으로 다시 돌아왔다. 바주데바는 바로 그 순간 그의 마음에 신으로 자리 잡았다. 신은 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 있음을, 그래서 진심을 고백하면 신은 곧바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걸 싯다르타는 깨달았다. 동시에 그는 자신 또한 바주데바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신이 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진실이다.

 

바주데바는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이야기한다. 강물은 온갖 소리를 내며 흐른다. 강물이 내는 소리를 들으려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 세상에 일어나는 온갖 소리들이 몸속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마음을, 나아가 몸을 텅 비워야 한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어제도 흘렀고, 오늘도 흐르며, 내일도 흐를 것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듯한 모습으로 여여하게 흐르는 이 강물에서 싯다르타는 흐르면서 멈추고, 멈추면서 흐르는 생명의 단일성을 엿본다. 인생이란 물처럼 흐르는 것이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을 수밖에 없다. 수많은 생명이 하나로 어울릴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흐름을 지속하기 때문이다. 썩지 않기 때문이다. 싯다르타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 바주데바는 기다렸다는 듯 환한 빛을 발하면서 숲속으로 길을 떠난다. 깨달음에 이른 현자가 온몸으로 내는 빛이다.

 

바주데바를 떠난 나루터를 홀로 지키며 사람들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네준 싯다르타는 친구인 고빈다와 마지막으로 해후한다. 싯다르타도 늙었고, 고빈다도 늙었다. 싯다르타가 수많은 곤경을 겪으며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듯, 고빈다 또한 세존의 가르침을 몸속 깊이 받아들여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다. 하지만 고빈다는 뱃사공이 곧 세존이라는 이치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싯다르타는 고빈다에게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이야기한다. 한편으로 그는 모든 진리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이다!”(206)라고 말한다. 선이 진리라면 악도 진리다. 신이 진리라면 악마도 진리다. 선을 실천하라는 성자의 말은 모두 거짓이란 말인가? 현실은 마야에 불과하다는 부처의 말 또한 거짓이란 말인가? 아니다. 그것은 말이 지닌 한계일 뿐이다. 깨달음을 얻은 자가 깨달음을 얻지 못한 자들을 말로 깨우치는 데서 비롯된 한계 말이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은 가르침을 받는다고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깨달음은 스스로 깨쳐야 가능한 일이다. 마음속에 아트마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다. 강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음으로써 깨달음을 얻은 바주데바는 바로 그것을 알았다. 그를 따른 싯다르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바주데바의 깨달음과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부처는 부처의 깨달음을 얻었고, 바주데바는 바주데바의 깨달음을 얻었으며, 싯다르타는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부처라는 스승=허상을 잡고 있는 고빈다에게 이 점을 말하려고 하지만,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말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도 고빈다는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답게 싯다르타가 깨달음에 이르렀음을 인정한다.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혀 싯다르타에게 절을 올린 고빈다는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간다. 싯다르타는 강가에 남는다. 이곳과 저곳은 이렇게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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