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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자, 「원미동 시인」 | 소설 읽기 2019-09-25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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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원미동 사람들

양귀자 저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0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아름답고 먼 동네에 사는 서글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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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귀자, 「원미동 시인」

    

 

 

양귀자의 「원미동 시인」은 연작소설 『원미동 사람들』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제목에 나타나는 대로 이 연작소설은 원미동 사람들의 일상을 묘사하고 있다. ‘원미동(遠美洞)’은 서울에서 살기 힘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요즘으로 따지면 서울 근교의 신도시에 해당되는 셈이다. 1980년대에 발표된 이 소설은 산업화의 그늘에 드리워진 한국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원미동 사람들을 중심으로 펼쳐낸다. ?원미동 시인?에는 일곱 살짜리 서술자가 나온다. 마흔이 넘은 엄마의 몸에서 태어난 이 아이는 딸만 다섯인 집안의 막내딸이다. 아들이 아닌 것에 실망한 엄마가 차일피일 출생 신고를 미루어 아이의 실제 나이는 여덟이나 아홉이란다. 어쨌든 작가는 아이의 시선으로 원미동 사람들을 바라본다. 아이는 보이는 대로 말하고 생각한다. 어른들처럼 자기 주관에 파묻혀 사건을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는 아이의 시선을 차용하여 원미동 시인이 겪는 시대적 고통을 가감 없이 드러내려고 한다.

 

사람들에게 원미동 시인은 어떻게 비쳐질까? “원미동 시인에게는 또 다른 별명이 있다. 퀭한 두 눈에 부스스한 머리칼, 사시사철 껴입고 다니는 물들인 군용점퍼와 희끄무레하게 닳아빠진 낡은 청바지가 밤중에 보면 꼭 몽달귀신 같다고 서울미용실의 미용사 경자 언니가 맨 처음 그를 '몽달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원미동 시인을 경멸한다. 머리가 약간 돌았다는 게 그 이유이다. 어른들 눈으로 보면 원미동 시인은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이다. 당연히 그가 하는 행동도 바보가 저지르는 행동으로만 해석될 뿐이다. 스물일곱 몽달씨가 일곱 살 아이와 친구가 될 수 있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어른들은 몽달씨를 어른으로, 그러니까 자신들과 같은 수준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일곱 살 아이만 몽달씨를 친구로 생각할 수 있다. 왜냐고? 아무도 몽달씨와 말을 섞지 않기 때문이다. 몽달씨는 오로지 아이인 와만 속에 품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는 형제슈퍼를 운영하는 김 반장도 친구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몽달씨와는 다른 이유에서 그렇다. 김 반장은 셋째 언니인 선옥에게 마음이 있어서 에게 잘해주는 것이다. 김 반장은 몽달씨 편이 아니라 몽달씨를 바보로 생각하는 사람들 편인 것이다. ‘의 아버지는 청소부이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쓰레기통만 뒤지고 다니는 직업이라 아버지 몸에서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냄새가 난다. 큰언니는 농사꾼의 아내가 되었고, 둘째언니는 버스안내양, 여 공원, 다방 종업원 등을 전전하다가 지금은 구로동 어디에서 대포집을 열었다. 중학교도 간신히 나온 여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를 마친 셋째언니는 서울로 올라가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산다. 소도시 구석에서 슈퍼나 운영하는 김 반장이 눈에 들어올 턱이 없다. 내 친구들은 이미 학교에 입학했고, 나보다 어리지만 그래도 놀 만한 아이들은 죄다 유치원에 다닌다. 한마디로 나는 동네에서 놀 사람이 없다. 자연 몽달씨처럼 사람들이 외면하는 바보와 친해질 수밖에 없다.

 

올 봄에 와 몽달씨가 친구가 되었다. 형제슈퍼 앞에서 어슬렁거리던 내 이름을 몽달씨가 부르더니 '너는 나더러 개새끼, 개새끼라고만 그러는구나…….'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는다. 나는 몽달씨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데 한 번 놀라고, ‘개새끼라는 말에 또 한 번 놀란다. 나는 결코 몽달씨에게 개새끼라고 한 적이 없다. 정말로 머리가 돈 사람인가? 사람들 말을 따라 몽달귀신이라고 부른 적은 있다.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런 내 마음과 상관없이 몽달씨는 개새끼가 들어간 말을 계속해서 중얼댄다. 몽달씨가 왜 이러는 거냐고? 몽달씨는 지금 자신이 쓴 시를 읊고 있는 것이다. ‘개새끼가 들어간 말이 시라고? 몽달씨가 쓴 시가 아니라, 어느 유명한 시인이 쓴 시를 베낀 거란다. 몽달씨가 시를 쓴다고 하니, 김 반장이 그럼 멋있는 시 한 수를 지어보라고 했고, 순박한 몽달씨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형제슈퍼 앞에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김 반장은 이게 무슨 시냐며 빈정댔지만, 나는 이때 몽달씨와 친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시인과 친구가 되는 게 참으로 근사해 보여서다.

  

시를 빼고 나면 나와 마찬가지로 몽달씨도 심심한 사람이었다. 낮 동안에는 꼼짝없이 젊은 새어머니와 한집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동네를 빙빙 돌면서 시간을 때워나갔다. 내가 김 반장과 마주앉아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 샌가 슬쩍 다가와 약간 구부정한 허리로 의자에 주저앉곤 하는 몽달씨는 나보다 훨씬 강렬하게 김 반장의 친구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들은 제법 뜨거운 한낮 동안 각기 편한 자세로 앉아 신문을 읽거나 졸거나 하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가 막걸리 손님이라도 들이닥치면 몽달씨와 나는 재빨리 의자를 비워주곤 김 반장이 바삐 설치는 모양을 우두커니 바라보곤 하였다. 김 반장은 몽달씨가 시가 어쩌구 하며 이야기를 꺼내기라도 할라치면 대번에 딴소리를 해서 입막음을 하기 때문에 몽달씨도 김 반장 앞에서는 도통 시에 대한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에 내가 원미동 시인의 ??시적 대화??를 끊임없이 듣는 형편이었다.

    

몽달씨는 김 반장과 친하게 지내고 싶지만, 김 반장은 언제나 거리를 둔다. 몽달씨야 부자 아버지를 두어 먹고사는 데 걱정이 없지만, 김 반장은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김 반장은 몽달씨를 바보 취급하는 사람들 편이다. 몽달씨가 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김 반장은 대번에 딴소리를 해서 입막음을 한다. 원미동 시인의 시적 대화를 들어줄 사람은 밖에 없는 셈이다. 셋째언니를 향한 마음을 접지 않은 김 반장은 나를 경옥이 처제라고 부르며 잘 대해주지만, 셋째언니 마음을 한결같다. 간혹 집에 들어오는 셋째언니는 애인이라도 생긴 듯 요상하게 생긴 팬티를 보여주면서는 선물로 받았다고 자랑을 한다. 이때만 해도 김 반장을 좋게 생각하던 나는 김 반장이 불쌍해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형제슈퍼 앞에서 죽치고 있는 몽달씨를 보며 대학 다닐 때까지는 저러지 않았다며 혀를 끌끌 찬다. 학교에서 잘리고 곧장 군대에 갔는데, 제대하고부터 저리 바보가 되었단다. 몽달씨는 아마도 대학을 다닐 때 데모대에 가담한 모양이다. 한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형제슈퍼 앞에 그냥 앉아있자니 심심해서 두 사람은 김 반장 일을 조금씩 돕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길에 고무호스로 물을 뿌려주는 정도였는데, 차츰차츰 몽달씨 하는 일이 늘어났다. 몽달씨가 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김 반장은 더욱 의젓해지고 몽달씨는 자꾸 초라해진다. 몽달씨로 해서 일이 편해진 김 반장은 언젠가 정색을 하고 자네는 확실히 시인은 시인이야.”라고 외치듯이 말한다. 바쁘지 않을 때는 정말로 시를 찬찬히 읽어볼 거라는 말까지 한다. 진심이냐고? 그럴 리가! 바보 같은 몽달씨는 시를 읽어준다는 말에 신이 나서 생선 잘라주는 통나무 도마까지 깔끔히 씻고, 널브러져 있는 채소들까지 다듬는다. “몽달씨가 짐짓 아직 자기 시는 읽을 만하지 못하니 유명한 시인들의 시나 읽어보지 않겠느냐고 구깃구깃 접은 종이를 꺼낼라치면 김반장은 온갖 핑계를 다 대서라도 줄행랑을 치면서 그가 보지 않은 틈을 타 머리 위에 대고 손가락으로 빙글, 동그라미를 그려보였다.” 김 반장은 그저 몽달씨를 심부름할 꼬마처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는 몽달씨보다 김 반장을 더 따랐다. 그가 셋째 형부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까지 품었다. ‘가 김 반장을 멀리하는 사건은 보름 전에 일어났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김 반장을 형부감에서 제외시킨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사건은 초여름 10시가 넘어서 일어났다. 낮부터 엄마와 아버지가 티격태격 말싸움을 벌였고, ‘는 엄마의 분풀이 대상이 되어 낮부터 적잖이 욕설도 들어먹었던 차였다. 낮에 시작된 말싸움이 저녁때는 주먹다짐으로 이어졌고, ‘는 집에서 몰래 나와 형제슈퍼 앞에 노천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날 따라 유난히 한산했다. 지물포나 사진관은 일찌감치 간판에 불을 꺼둔 채였고, 정육점은 휴일인지 셔터까지 내려져 있다. 미용실 불도 꺼진 채여서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공단쪽으로 가는 어두운 길에서 뭔가 비명 소리도 같고 욕지기를 참는 안간힘 같기도 한 소리가 들렸다. 깜빡 졸고 있던 내가 그 소리에 움찔 놀라며 눈을 떴을 때 누군가가 어둠을 뚫고 나와 필사적으로 가게를 향해 덮쳐왔다. 젊은 사내 둘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 사람을 쫓아왔다. 도망자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뒤를 쫓는 사람들도 그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나는 가게 옆구리의 샛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새 사내의 발길에 채여버린 도망자가 바닥에 엎어져 있었고 김 반장이 만약을 위해 사내 주변의 맥주박스를 방안으로 져나르면서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김형, 김형…… 도와주세요.”

쓰러진 남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가느다랗게 흘러나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빨간 셔츠의 사내가 다시 쓰러진 자의 등허리를 발로 꽉 찍어눌렀다.

??이 새끼, 아는 사이요? 그러면 당신도 한번 맛 좀 볼 텐가???

맥주병을 거꾸로 쳐들고 빨간 셔츠가 소리질렀다. 김반장의 얼굴이 대번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 무슨 소리요? 난 몰라요! 상관없는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으니까 나가서들 하시오."

    

어린아이인 를 제외하면 슈퍼에는 김 반장밖에 없다. 사내의 발길에 채인 도망자가 바닥에 엎어져 있는데도 김 반장은 사내 주변의 맥주박스를 방안으로 져나르기 바쁘다. 도망자가 김 반장을 김형!’이라고 소리친다. 김 반장과 아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빨간 셔츠의 사내가 쓰러진 자의 등허리를 발로 찍어 누른 채, 맥주병을 거꾸로 쳐들고는 김 반장에게 이놈과 아는 사이냐고 묻는다. 김 반장의 얼굴은 하얗게 질린다. 그는 사내들이 두렵기도 하지만, 괜한 일에 끼어들기가 싫다. 어차피 동네에서 바보로 소문난 놈이 아닌가. 그렇다. 도망자는 몽달씨였다. 바보인 몽달씨는 왜 깡패 같은 사내들에게 얻어맞고 있는 것일까? 사내가 김 반장과 말하는 틈을 타 몽달씨가 가겟방을 향해 튀었다. 방 저쪽에 바깥쪽으로 나가는 문이 있다는 걸 몽달씨도 알고 있다. 그러나 몽달씨보다 더 빨리 방문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김 반장이었다. “나가요! 어서들 나가요! 싸우든가 말든가 장사 망치지 말고 어서 나가요!”

 

김 반장이 외면한 사람을 어린아이가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사내 둘 다 술기운이 벌겋게 올라 몽달씨를 슈퍼에서 개처럼 질질 끌고 나온다. 김 반장은 어지러워진 가게를 치우느라 바깥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끌려가지 않으려는 몽달씨를 사내들은 구둣발로 사정없이 짓누른다. 지나가던 행인들도 속수무책이다. 도리어 그들이 경찰서를 들먹이며 몽달씨를 끌고 간다. 몽달씨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가며 자기한테 무슨 잘못이 있느냐며 울부짖는다. 사내가 몽달씨의 얼굴을 구둣발로 짓밟기 시작한다. ‘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원미지물포로 뛰어들었다. 지물포 주씨 아저씨는 아랫목에 길게 누워 텔레비전을 보느라 바깥에서 일어나는 소동은 모르는 듯했다. 깡패가 몽달씨를 죽인다는 아이 말을 듣자마자 건강한 체구의 주씨 아저씨가 밖으로 뛰쳐나간다. 마침 지물포 앞을 지나는 몽달씨의 꼴을 보고 그는 냅다 소리를 지른다. 사내들이 김 반장에게처럼 이놈을 아느냐고 묻는다. 주씨 아저씨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이 아저씨가…… 이 새끼 아는 사람이오?”

잘 아는 사람이니 이카제. 이 착한 청년이 무신 죄를 졌다꼬 이래 반 죽여놨노? 무슨 일이라?”

그제서야 빨간 셔츠가 슬그머니 움켜쥔 머리칼을 놓았다. 몽달씨가 비틀거리며 주씨 곁으로 도망쳤다.

아무 잘못도…… 없어요…… 지나가는 사람 잡아놓고…… 느닷없이 때리는데.”

더듬더듬, 입 안에 괴어 있는 피를 뱉어내며 간신히 이어가는 몽달씨의 말을 듣노라고 주씨가 잠시 한눈을 판 것이 잘못이었다. 멀찌감치 서서 구경을 하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어이, 저봐요. 저 사람들 도망쳐요!”

정말 눈깜짝할 사이였다. 벌써 공단 쪽 길로 튕겨가는 모양으로 발자국 소리만 어지럽고 녀석들은 어둠 속에 파묻혀버린 뒤였다.

    

김 반장이 몽달씨를 모르는 척했다면, 주씨 아저씨는 몽달씨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빨간 셔츠가 그제야 움켜쥔 머리칼을 놓는다. 몽달씨는 비틀거리며 주씨 곁으로 도망친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는 느닷없이 때리기 시작했단다. 만만해보이는 몽달씨를 사내들이 재미 삼아 때린 것이다.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묻지마 폭행이겠다. 주씨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두 사람은 잽싸게 도망친다. 공단 쪽으로 난 어두운 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발자국 소리만 어지럽게 들린다. 그런데, 도망친 사내들을 보며 유독 흥분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 김 반장이다. 가게에서는 모른 척해놓고 이제 와서 생색을 내는 것이다. 김 반장이 몽달씨를 부축해 일으킨다. 몽달씨는 김 반장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간다. “세상에 밸도 없지,”라는 말로 작가는 이 상황을 표현한다. 밸이 없는 사람은 김 반장일까, 몽달씨일까? 상황에 따라 얼굴을 바꾸는 김 반장도 김 반장이지만, 그런 김 반장이 내민 손을 덥석 잡는 몽달씨도 참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다.

 

이 일 이후로 는 김 반장과 서먹한 사이가 된다. 김 반장이 예전과 다름없이 굴어도 나는 자꾸만 김 반장을 멀리한다. 위험에 빠진 몽달씨를 외면한 것도 모르고 동네 사람들은 겉으로는 몽달씨를 아낌없이 챙기는 김 반장을 칭찬한다. 김 반장을 추켜세울 때마다 사람들은 몽달씨를 꼭 미친놈으로 부른다. 어른들이 이럴 때마다 는 속이 상한다.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는 아이는 입을 꾹 다문 채, 상황도 제대로 모르고 떠들어대는 어른들을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본다. 한편으로 는 몽달씨를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열흘 만에 만난 몽달씨는 형제 슈퍼에서 음료수 박스들을 차곡차곡 쟁여놓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는 밸이 없는 것인가? 얼굴이 마주보기 어려울 만큼 핼쑥한 얼굴로 몽달씨는 뭐가 좋은 히죽히죽 웃고 있다. 몽달씨는 그날 밤을 잊은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는 몽달씨를 이해할 수 없다.

 

일을 끝낸 몽달씨는 비치파라솔 밑의 의자에 앉아 뭔가를 읽고 있다. 또 시를 읽느냐고 내가 묻자 몽달씨는 아주 슬픈 시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핼쑥한 얼굴을 쳐들어 행복하게 웃는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나는 몽달씨 옆에 그날 벌어진 일을 다 보았다고 고백한다. 아주 잠깐 몽달씨의 까만 눈이 반짝인다. 김 반장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자 몽달씨는 팔뚝을 탁 치며 아니라고 응수한다. 아무리 다그쳐도 소용없다. 몽달씨는 그저 팔뚝만 문지를 뿐이다. 그리고는 슬픈 시가 있다며 들어보란다. “……마른 가지로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들이는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 받는 순교자 같다. 그러나 다시 보면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고 싶어 하는 순교자 같다…….” ‘박해 받는 순교자박해받고 싶어 하는 순교자이다. 순교자는 진리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들이다. 몽달씨는 왜 이 시를 아주 슬픈 시라고 말한 것일까?

 

1980년대라는 시대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원미동 시인이 읊은 시에 나오는 순교자의 의미를 헤아리기 힘들다.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아침이슬처럼 사라져 갔다. 몽달씨는 아마 미치지 않고는 이 세상을 살아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광기가 지배하는 세상을 어떻게 제정신으로 살 수 있단 말인가? 광기의 시대를 광기로 맞선 몽달씨는 어찌 보면 민주화를 이루겠다는 신념으로 목숨을 바친 순교자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순교자를 미친놈으로 치부한다. 이룰 수 없는 세상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몽달씨라고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일곱 살 아이조차 바보같이, 다 알고 있었으면서……라고 말하지 있지 않은가. 모든 걸 알면서도 몽달씨는 기꺼이 순교자의 길을 걷는다. 박해받고 싶어 하는 순교자는 어찌 보면 순교자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을 향한 경고인지도 모른다. 일곱 살 아이는 어른들이 외면하는 이 진실을 직관적으로 느끼지 않았을까.

 

작가가 아이의 시선으로 순교자를 다룬 것은 시대적 상황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1980년대는 군사정권의 오만이 극에 달했던 시대이다. 민주화를 외치던 시민들을 폭력으로 제압한 전두환이 정권을 쥐던 시절이 아닌가. 두려움에 떠는 어른들은 김 반장처럼 상황에 맞춰 움직였다. 자기에게 유리하면 받아들이고, 자기에게 불리하면 냉정하게 내쳐버리는 기회주의. 군사정권은 사람들의 이런 심리를 알기에 틈만 나면 폭력을 행사했다. 몽달씨만 해도 대학에서 쫓겨나 강제로 군대에 가야 했다. 온갖 감시와 멸시를 받으며 군 생활을 보내고 사회로 나온 몽달씨를 권력은 그냥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미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을 몽달씨는 정말로 미쳐서 살아냈다. 그는 바보처럼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순교자는 신념을 따라 자기가 갈 길을 갈 뿐이다. 몽달씨처럼 바보 같은 순교자가 있어 지금 우리가 이만큼의 자유를 누리며 산다는 걸 알고 있는가? 때가 되면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기 마련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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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 소설 읽기 2019-09-23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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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지성 | 2019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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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국과 소인국은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의 거울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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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소인국과 거인국

  

  

걸리버에게 소인국과 거인국은 상대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소인국에서 걸리버는 거인으로 보인다. 소인국 사람들은 키가 불과 15센티미터이다. 소인국에 있는 모든 것들은 사람 키에 비례하여 걸리버가 사는 세계보다 작아진다. 소인이 15센티미터라면 개미는 과연 어느 정도의 크기가 되는 것일까? 걸리버 눈에는 개미처럼 아주 작은 동물들은 보이지 않는다. 땅을 걷는 사람들도 주의를 기울여야 보일 터인데, 개미가 어떻게 보일 것인가? 소인들 눈에는 당연히 개미가 보인다. 소인들은 걸리버보다 한없이 작지만, 걸리버가 볼 수 없는 사물들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은 걸리버보다 더 먼 곳을 볼 수 없다. 소인들은 그들의 생각대로 세상을 그리고, 걸리버는 자기 생각대로 세상을 그린다.

 

두 세계 중 어느 곳이 합당한지 묻는 것은 그러므로 의미가 없다. 만약에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면, 두 세계 모두 합당하다고 말해야 한다. 걸리버는 이런 진실을 소인국이 아니라 거인국에서 깨닫는다. 소인국만 경험한 걸리버는 자기를 중심으로 소인들을 생각한다. 거인국을 경험한 걸리버라야 소인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거인국에서 걸리버는 한없이 작은 동물에 불과하다. 걸리버가 소인들을 바라보던 그 시선으로 거인들이 걸리버를 바라본다. 걸리버는 작은 세계에 살고, 거인들은 큰 세계에 산다. 20미터가 넘는 거인들과 기껏해야 2미터를 넘기는 걸리버를 떠올려 보라. 거인국에서는 9미터 사람도 난쟁이로 불린다. 20미터 거인 입장에서 9미터 사람은 난쟁이가 될 수 있지만, 2미터인 사람에게 9미터인 사람은 말 그대로 거인이다.

 

걸리버는 소인국에 있을 때, 소인 친구들이 자기 얼굴의 땀구멍까지 보는 것을 알고는 한없이 놀란 적이 있다. 같은 비율의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소인들 눈에는 아주 정확히 보인다. 걸리버는 소인들의 이 말이 진실이었음을 거인국에서 비로소 알게 된다. 거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걸리버는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눈으로 개미를 보면 그저 작은 생물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소인들이 보는 개미는 어떨까?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이 소인들의 눈에는 그대로 보일 것이다. 우리는 손가락 하나로 간단히 개미를 제압할 수 있지만, 소인들을 결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어린 시절에 보던 운동장이 성인이 되어 봤을 때의 운동자보다 한없이 크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몸이 작으면 운동장이 커 보이고, 몸이 크면 운동장이 그만큼 작아 보인다.

 

소인국에 있을 때 걸리버는 소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양의 음식을 먹었다. 거인국에서 걸리버는 자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음식을 먹는 거인들을 보고 놀란다. 거인들을 통해서 걸리버는 소인들을 이해한다. 소인국에서 걸리버는 전쟁의 영웅이 될 수 있지만, 거인국에서 걸리버는 단순히 놀이 대상에 불과하다. 소인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 오면 어떨까? 구경거리가 될 뿐이다. 거인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 오면 어떨까? 우리는 벌벌 떨며 거인들을 상대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시선으로 이 세상을 보면 그 시선 밖에 있는 사물들은 보이지 않는 법이다. 걸리버는 소인국과 거인국을 오갔기에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진다는 걸 온몸으로 깨닫는다.

 

꼭이 소인국과 거인국을 몸의 차이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상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 또한 소인국과 거인국의 차이로 들여다볼 수 있다.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에만 빠지면 다른 생각이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 바깥으로 나가야 사회주의가 보이고, 사회주의의 바깥으로 나가야 자본주의가 보인다. 자본주의 논리에 집착하는 사람 눈에는 사회주의가 보일 리 없고, 사회주의 논리에 집착하는 사람 눈에는 자본주의가 보일 리 없다. 한국사회만 해도 자기 눈에 보이는 세계만 인정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소인국에 간 걸리버는 자신을 거인으로 생각하지만, 거인국까지 갔다 온 걸리버는 자신을 소인이면서 거인으로 생각한다.

 

공직에 사람을 뽑을 때에는 후보의 능력보다는 도덕성을 더 중시한다. 그들은 정부의 행정 업무가 인류에게 꼭 필요하다고 보면서 어떤 지위가 되었든 인간의 평범한 이해력만 있으면 이를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의 섭리는 공직 수행을 신비한 업무로 보지 않고, 그래서 천재의 재능을 가진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놓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실 천재는 한 시대에 세 명이 나올까 말까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진리, 정의, 절제 등의 미덕을 지킬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경험과 좋은 의도의 도움을 받아가며 이런 미덕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나라의 공직에 나설 수 있다. 단 특별한 연구 과정이 필요한 공직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70)

    

위 인용문에는 소인들이 공직자를 어떻게 뽑는지 나와 있다. 그들은 공직 후보자의 능력보다 도덕성을 중시한다. 도덕성이라고 해서 특별한 게 아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진리, 정의, 절제 등과 같은 미덕을 지킬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공직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도덕성을 지닐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들은 공직자를 뽑을 때 줄 잘 타는 사람과 같은 특이한 능력을 중시한다. 줄을 잘 타면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다. 줄을 잘 타는 사람들은 계속 생겨날 것이므로, 이미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들 또한 틈틈이 줄 타는 연습을 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고시와 같은 과정을 통과해야 고위 공직자가 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등용 제도로 본다면, 이것은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기는 하다.

 

고시를 통과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좋다. 이런저런 공부를 잘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이 도덕성을 겸비하고 있느냐 하는 점에 있다. 한국사회를 예로 든다면,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중시한다. 자기를 중심에 세우고 다른 사람을 주변으로 내모는 사고방식에 익숙한 그들은, 중심에 올라서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한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부자들과 정치인들을 보라. 그들은 국민들을 개돼지로 생각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돈을 벌거나 공부하는 재능은 있을지 몰라도 내면 윤리를 쌓지는 못했다. 도덕성을 상실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도덕적인 인물이 인정받을 리 없다. 법과 도덕을 무시하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는데, 그 누가 법과 도덕을 따라 삶을 살겠는가

  

자네가 해준 말을 미루어볼 때, 자네 나라에서는 공직을 얻기 위해 완벽한 자질은 필요 없는 것 같아. 사람들은 미덕의 힘으로 귀족 작위를 얻는 게 아니고, 사제는 종교적 경건이나 학문으로 승진하는 게 아니야. 군인들은 행동과 용기, 법관들은 성실성, 상원의원은 애국심, 고문관은 지혜로 인해 그 자리에 보임되는 것 같지 않아. 자네가 생애의 많은 부분을 여행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기에, 지금껏 자네 나라의 수많은 악덕을 피해 왔으리라 생각하고 싶네. 그러나 자네가 내게 해 준 이야기와 내가 어렵사리 자네로부터 뽑아낸 대답들을 종합해 볼 때, 나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네.

자네 나라의 국민들 대부분은 가장 해로운 자그마한 벌레 같은 족속일세. 자연이 일찍이 땅 위에 기어 다니도록 허용한 벌레들 중에서 말이야. (162)

    

거인국의 왕이 걸리버에게 하는 말이다. 걸리버가 사는 세계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들은 왕은 그 세계를 가장 해로운 자그마한 벌레 같은 족속들이 사는 세상으로 평가한다. 거인국 왕이 말한 것 가운데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전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거인국에도 물론 군인들이 있지만, 그들이 하는 임무는 극히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걸리버가 사는 세계에서는 전쟁이 마치 일상처럼 벌어진다. 날마다 새로운 전쟁이 벌어지는 격이다. 걸리버는 거인국 왕에게 화약을 제조하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한다. 화약을 제조하는 방법을 안다면, 거인국 왕은 지금보다 훨씬 넓은 땅을 차지할 수 있다. 거인국 왕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걸리버의 제안을 들은 거인국 왕은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러면서 그는 그렇게 비인간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할 수 있느냐고 걸리버에게 묻는다.

 

거인국 왕은 예술과 자연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즐겁게 여기겠지만, 이렇듯 끔찍한 무기의 비밀을 아는 것은 결코 즐기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 비밀을 아느니 차라리 왕국 절반을 포기하겠다고 그는 강조한다. 어떤 생각이 드는가? 거인국 왕이 참으로 소심하다고 생각하는가? 국민을 위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가? 거인국 왕은 폭력으로 세상을 다스리기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세상을 다스리려고 한다. 폭력으로 세상을 다스리면 영토를 지금보다 더 확장할 수 있다. 거인국 왕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는 차라리 예술과 자연을 즐기며 사는 삶이 전쟁을 일으켜 영토를 넓히는 삶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정치인들이 한번쯤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말이 아닐까.

 

소인국 사람들도 싸우고, 거인국 사람들도 싸운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규칙을 어기지 않는다. 같은 종족을 대량으로 살상하는 끔찍한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소인국과 거인국은 이리 보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와 대칭 쌍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무한 경쟁을 도덕처럼 받들고 있다. 무한 경쟁은 다른 사람을 이겨야 자신이 사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나를 뺀 모든 사람은 반드시 이겨야 할 이다. 만인이 만인에 대해 적이 되는 사회를 지금 우리는 만들고 있는 것이다. 생명을 위해 써야 할 돈을 생명을 죽이는 무기를 만드는 데 쓰는 사회에서 무슨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책을 지은 조너선 스위프트는 소인국과 거인국을 거울삼아 자신이 살던 사회를 풍자하고 있다. 이 책이 1726년에 발표되었으니, 작가가 산 시대는 근대문명이 한창 발아하던 18세기이다. 이 책 곳곳에는 근대인에 대한 자부심이 나와 있지만, 그렇다고 작가가 근대를 무조건 옹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소인국과 거인국의 경우에 나타나는 대로, 근대이성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플러스가 될 수도 있고,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 전쟁광이 근대이성을 사용하면 근대세계는 전쟁터로 돌변할 것이고,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이 근대이성을 사용하면 근대세계는 사람들이 손잡고 나아가는 평등한 세상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과연 어느 세상을 살고 있을까? 전쟁터를 살고 있다면, 우리는 전쟁광이 만든 세상을 살아가는 게 된다. 작가가 말한 도덕성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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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용, 「나주집에서의 만남」 | 시집 읽기 2019-09-22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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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거짓말의 탄생

정한용 저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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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20년 후의 나로부터 만나자는 문자가 왔다

  20년 전의 나를 데리고 나가겠다고 답을 보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났다

  늙은 나주댁 아지매가 아직도 술상을 거들고 있었다

  십구공탄에 삼겹살을 구우며

  어린 나는 빨간딱지 진로소주를 마시고

  지금의 나는 조껍데기 막걸리를 마시고

  늙은 나는 이젠 술을 못한다고 콩나물국만 홀짝거렸다

 

  우리는 각자 가져온 기억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아내와 아이들 이야기는 빼자고 했다

  서로 조금씩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긴 했지만

  망각과 불안이 우리 생의 기본이 아니겠냐고 서로 위로했다

  어린 나는 마르크스를 읽는다고 했다

  지금의 나는 여행서적을 읽는다고 했다

  늙은 나는 책 같은 건 보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담화는 애매모호하게 시작되었다

 

  삼겹살 불판을 두 번 갈고 소주잔과 막걸리잔이 섞이고

  식은 콩나물국을 다시 데워오는 사이

  나는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 언제인지 물었다

  어린 나는 원래 행복한 현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조금 건방지다 싶자 늙은 내가

  현재란 과거의 심연이며 늘 새로운 탈로 위장하는 것이니

  겨우겨우 인생은 견뎌가는 것이 아니겠냐고 했다

  그 순간 누군가 술잔을 엎었다

   

  이후 세 시간 동안 끊어진 필름 조각을 이어보면

  어린 나는 진실사실의 차이를 아냐고 악을 써댔고

  지금의 나는 우리 회사 이 부장 썩을 놈이라고 욕을 해댔고

  늙은 나는 오래 전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자꾸 꺼냈다

  나주집 아지매가 결국 등을 밀어낸 것은 알겠는데

  우리가 어떻게 헤어졌는지는 기억이 없다

  우리 중 누군가가, 다시 또 만나면 개새끼라고

  꿈속에서인 듯 말한 것 같기도 하다

  - 정한용, 「나주집에서의 만남」

 

 

20년 후의 나가 지금의 나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오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누구나 미래를 궁금해 한다. 흐르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시인도 미래의 모습이 궁금했을까? “20년 전의 나를 데리고 나가겠다고 답을 보냈다”. 지금의 나를 기점으로, 20년 전의 나와 20년 후의 나가 한 자리에 모인다. 20년 후의 나가 연락을 했으니, 만나는 장소 또한 지금의 나로 따지자면 20년 후의 술집이 되리라. 20년이나 흘렀는데도 늙은 나주댁 아지매가 아직도 술상을 거들고 있다. 십구공탄에 삼겹살을 구우며 세 사람은 술을 마신다. 어린 나는 소주를 마시고, 지금의 나는 막걸리를 마신다. 늙은 나는 이젠 술을 못 한다며 콩나물국만 홀짝거린다. 삼대가 한 자리에 모여 가족 모임을 하는 것만 같다.

 

늙은 나는 지금의 나와 어린 나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지금의 나야 적응이 되어도, 어린 나는 아무래도 생소하지 않을까. 지금의 나는 누구에게 친근감을 더 느낄까? 아무래도 젊은 20년 전의 나일까? 아니다. 그 시절의 시행착오를 생각하며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럼 지혜가 많아졌을 늙은 나에게 친근감을 느낄까? 어린 나는 이미 지나온 시절을 나타내고, 늙은 나는 앞으로 맞닥뜨려야 할 시간을 나타낸다. 지금의 나는 어린 나를 기억할 수 있을 뿐,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추억으로 간직해야 한다는 말이다. 늙은 나는 다르다. 지금의 나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늙은 나의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 어린 나는 지금의 나와 늙은 나를 보는 게 그저 신기하지 않을까? 20년 후도 까마득한데, 40년 후의 모습까지 함께 만나다니.

 

우리는 각자 가져온 기억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기억은 살아온 시간만큼 쌓일 것이니, 어린 나가 당연히 적을 수밖에 없다. 돌려 말하면 어린 나는 앞으로 무수한 경험을 하며 차근차근 기억들을 쌓아가게 될 것이다. 늙은 나는 이미 살 만큼 살았으므로 기억해야 할 것 또한 많다. 늙은 나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기억을 바탕으로 어린 나가 살아갈 길을 제시하려고 한다. 어린 나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늙은 나는 경험했다. 늙은 나는 경험을 통해 어린 나를 장악하려고 하지만, 어린 나는 늙은 나가 말한 경험을 신뢰하지 않는다. 늙은 나가 살아온 세상과 어린 나가 사는 세상은 다르다. 당연히 지금의 나가 사는 세상 또한 다르다. 세 사람은 서로 조금씩 의심의 눈초리를보낸다. 같은 존재라고 해도, 시대를 달리 산 사람들이다. 한 몸에 세 개의 사상이 모여 있는 격이라고나 할까.

 

망각과 불안이 우리 생의 기본이 아니겠냐고 서로 위로를 해도, 그들이 생각하는 망각과 불안은 살아온 시간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어린 나는 마르크스를 읽는다. 지금의 나는 여행 서적을 읽는다. 늙은 나는 책 같은 건 보지 않는다. 어린 나는 마르크스를 빌려 말을 할 것이고, 지금의 나는 즐겨 여행한 곳을 말할 것이다. 늙은 나는 무엇을 얘기할까? 저마다 관심사가 다르니 저마다 얘기하는 것 또한 다르다. 마르크스의 시선으로 보면 여행을 즐기는 지금의 나는 부르주아적 삶을 살고 있고, 책을 읽지 않는 늙은 나는 자기 생각에 빠진 고집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나는 늙은 나의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을 테고, 늙은 나는 어린 나의 치기어린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중간에 낀 지금의 나는 여행한 곳을 얘기하며 자기만의 말 세상으로 빠져들 것이다.

 

소통이야 되든 말든 시간은 흐른다. 삼겹살 불판을 두 번 갈았고, 소주잔과 막걸리잔도 이리저리 섞였다. 무언가 어색함이 감도는 분위기를 살리려고 지금의 나가 가장 다른 두 사람에게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 언제인지 묻는다. 어린 나가 대뜸 원래 행복한 현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린놈이 얼마나 살아봤다고 저리 말하는가 생각하며 늙은 나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현재란 과거의 심연이며 새로운 탈로 위장하는 것이니/ 겨우겨우 인생은 견뎌가는 것이 아니겠냐. 늙은 나가 말을 끝낸 순간 누군가 술잔을 엎었다. 아직 말을 하지 않은 지금의 나일까? 어린 나는 과거를 살고 있고, 늙은 나는 미래를 살고 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은 지금의 나뿐이다. 그들이 현재를 부정하면 지금의 나는 무엇이 되는 것일까? 하나면서 동시에 셋인 사람들은 이렇게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싸움을 벌인다.

 

시인은 세 시간 동안 끊어진 기억의 필름을 어렵게 복원한다. 그 속에서 어린 나는 진실사실의 차이를 아느냐며 악을 써대고, 지금의 나는 회사 부장을 썩을 놈이라고 욕하고, 늙은 나는 오래 전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자꾸만 꺼낸다. 지금의 나가 욕하는 회사 부장은 진실과 사실로는 판명할 수 없는 인물이다. 회사 부장은 지금의 나가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썩은 놈일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어찌 밝힐 수 있으며,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은 또한 어찌 밝힐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의 나에게 중요한 것은 회사 부장이 썩을 짓을 하는 썩을 놈이라는 사실이자 진실이다. 사회생활에서 물러난 늙은 나는 어머니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이니 시간적으로 과거에 사는 어머니이다.

 

어린 나는 미래를 위해 진실과 사실을 구분하고, 지금의 나는 지금 이 순간인 현재를 중시하며, 늙은 나는 과거에 매여 틈만 나면 눈물을 흘린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시간을 산다. 저마다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수 있을까? 세 사람 중 누군가가 다시 만나면 개새끼라고 말한 것을 시인은 꿈결인 듯 어렴풋이 떠올린다. 늙은 나는 왜 애초부터 어린 나와 지금의 나를 만나려고 했을까? 늙은 나가 되어 얻은 지혜를 어린 나와 지금의 나에게 알려주고 싶었을까? 아니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후회스러워 두 사람을 부른 것일까? 무엇이 됐든, 어린 나는 어린 나대로 살 것이고, 지금의 나는 지금의 나대로 살 것이다. 늙은 나가 늙은 나로 사는 것처럼. 이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세 사람이 다시 만나도 변할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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