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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 『루쉰의 광인일기, 식인과 광기』 | 인문사상 2020-02-27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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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루쉰의 광인일기, 식인과 광기

이주노 저
21세기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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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의 근대인과 광기의 탈근대인이 벌이는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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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과 광인 사이에 서 있는 근대인의 초상

- 이주노, 『루쉰의 광인일기, 식인과 광기』

 

 

 

이 책은 식인광기를 키워드로 하여 루쉰의 「광인일기」를 분석하고 있다. 전체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이 소설의 다양한 맥락을 문학 안팎의 다양한 문제들을 통해 이끌어내고 있다. 광인을 다룬 세계문학을 통해 이 작품의 의미를 되짚어 보고, 문학 연구자들을 위해 이 소설의 연구 현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이 작품이 발표된 역사적 상황을 재구함으로써 작가가 왜 광인식인에 주목했는지 정리하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한 마디로 이 책은 ?광인일기?를 전방위적으로 분석한 책이라고 하겠다.

 

지은이가 키워드로 삼은 식인광기는 근대사회의 탄생과 이어져 있다. ‘식인은 무엇보다 근대의 야만적 폭력성을 나타낸다. 식인이라고 해서 실제로 사람을 먹는 게 아니다. 식인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근대인의 위상을 에둘러 표현한다. 즉 역사책 속 인의도덕이라는 기표는 새로운 세계 인식에 눈을 뜬 에게는 식인의 기호로 읽히지만, 타인에게는 글자 그대로 인간이 지켜야 할 행위규범으로 받아들여진다.”(36)라는 언급에 드러나는 대로, 지은이는 식인을 근대를 나타내는 기호로 풀이하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광인의 입장에서 보면, 인의도덕이니 하는 것이 식인을 의미하는 기호가 될 수 있다. 누군가를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식인이라는 기호는 이 지점에서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모든 것을 상징하게 된다. 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라면,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불행쯤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 또한 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개발을 위해 폭력적으로 자연을 파괴하는 것 또한 근대인의 식인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광인은 이러한 폭력적인 세계와 거리를 두려고 한다. 돌려 말하면 폭력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려는 권력자들과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식인을 비판할수록 는 그래서 세상 바깥으로 내쫓길 수밖에 없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우리는 광인이라고 하지 않는가.

 

관점에 따라 광인은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회에 사물을 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공하는 선지자로도 볼 수 있다. 지은이는 말한다. ?광인일기?의 광인은 결코 루쉰의 관념적 세계에서 돌연 뛰쳐나온 산물이 아니다. 광인은 바로 루쉰의 오랜 독서 경험, 국민성 개조 및 인간 확립이라는 사유체계, 그리고 당시의 문화담론이 결합하여 빚어낸 독창적인 예술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57)라고. ‘광인이나 광기라는 기호 자체에 이미 반사회성이 내포되어 있다. 광인은 세상 밖에서 세상을 보려고 한다. 당연히 세상 안에서 세상을 보려는 사람들과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아내를 애도하는 장례식장에서 장자는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슬픔을 표하지 않는 장자를 욕했다. 장자를 미치광이로 판단한 것이다. 장자는 왜 슬픔을 드러내지 않은 것일까? 장자는 삶과 죽음에 연연하지 않는다. 삶이 끝난 자리에 죽음이 있는 게 아니라, 삶이 끝난 자리에서 죽음이 새로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죽음은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지점인 셈이다. 이것을 명백히 아는데, 어찌 아내의 죽음을 슬퍼할까. 아내가 아니라 자신이 죽어도 장자는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진리를 광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실천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 있지 않을까?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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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균, 「추일서정」 | 시집 읽기 2020-02-27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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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김광균 시선

김광균 저/김유중 편
지식을만드는지식(지만지) | 2012년 08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도시인의 고독을 감각적 이미지로 표현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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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세로팡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 김광균, 「추일서정」

 

 

김광균은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도시 문명을 노래한 시인이다. 도시 문명을 통해 사람들은 풍요로운 삶을 이룩했지만, 그 결과로 인간관계가 단절되는 불운을 맞았다. 도시 문명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한다. 예로부터 내려온 공동체의 도덕으로부터 벗어나 그들은 개인이 중심에 서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한다. 당연히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에도 사물을 바라보는 개인의 눈을 중시한다. 시인의 독창적인 이미지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모더니즘 시학은 도시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현대시를 대표하는 특성으로 떠오른다. 김광균의 시는 이러한 모더니즘 미학을 바탕으로 도시인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 시는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는 아주 낯선 이미지로 시작한다. 시인은 낙엽이라는 시어로 가을날의 쓸쓸함을 표현한다. 쓸쓸한 가을을 표현하는 낙엽이 왜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와 연결되는 것일까? 망명정부가 낸 지폐는 쓸모가 없다. 근거가 없는 지폐이기 때문이다. 자기 근거를 잃은 이미지는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로 이어진다. 뿌연 연기가 맑은 가을 하늘을 뒤덮는다. 포화는 전쟁 상황을 가리킬 테니,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은 지금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제 이미지를 잃어버렸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길을 구겨진 넥타이로 표현하고, 그마저도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는 상황을 묘사한다.

 

저 멀리서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급행차가 달려온다. 지금까지 살펴온 대로, 김광균의 시에는 시각적인 이미지가 넘쳐난다. 시인은 이미지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사물(혹은 상황) 밖에서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요컨대 김광균은 도시 문명의 외로움에 빠진 화자의 상황을 이미지로 드러낸다. 저 멀리서 달려오는 급행열차를 바라보던 시선은 이내 포플라 나무의 근골(筋骨)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흰 이빨을 드러낸 공장의 굴뚝으로 이어진다. ‘근골은 잎이 떨어져 외로운 포플라 나무의 상황을 나타내고, ‘흰 이빨은 황량한 공장 건물을 표현하는 이미지로 제시된다. 잎이 떨어진 가을날의 쓸쓸한 풍경을 시인은 주변 사물들을 묘사함으로써 다채롭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공장을 감싸고 있는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은 바람에 나부끼며 황량한 풍경을 더욱 강화한다. 하늘에는 세로판 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떠서 쓸쓸함을 더욱 부추긴다. 구슬픈 풀벌레 소리까지 들려오는 상황에서 시인은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허공에 돌팔매 하나를 띄운다. 시인의 마음이 쓸쓸한 것일까? 아니면 주변 환경이 쓸쓸한 것일까? 모든 사람이 가을을 쓸쓸함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테니, 핵심은 가을날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 시 제목에 드러나는 대로, 시인은 가을날의 서정을 쓸쓸함과 외로움의 정서로 표현하고 있다. 생명의 근거를 서서히 잃어가는 계절로 가을을 인식하고 있다고나 할까.

 

허공으로 던진 돌 하나는 고독한 반원을 그으며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으로 사라진다. 시인만 고독한 게 아니라 돌마저도 고독하다. 외로운 돌은 고독한 반원을 그리고 저쪽으로 사라진다. 무생물인 돌마저도 외로운데, 살아 있는 풀벌레가 어떻게 외롭지 않을 수 있을까? 세로판 지로 붉게 물든 저녁 하늘 또한 외로워 보이는 건 마찬가지다. 시인은 사물들이 내보이는 외로움을 가슴 깊이 받아들인다. “호올로 황량한 생각을 차마 버리지 못한다. 시인이 이미지로 묘사하는 외로움이 잘 느껴지는가? 그러면 이 시를 잘 읽은 것이다. 김광균은 외롭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외로움을 이미지로 표현한다. 모더니즘 시의 특성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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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한, 「모래톱 이야기」 | 소설 읽기 2020-02-25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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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사하촌/모래톱 이야기/추산당과 곁사람들/수라도

김정한 등저
창비 | 2005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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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퍼센트 가진 사람들이 1퍼센트를 채우기 위해 가난한 이들을 착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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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한, 「모래톱 이야기」

 

 

 

보고 싶은 건우에게

 

건우야, 너와 헤어진 지도 어느덧 이십 년이 흘렀구나. 강산도 두 번이나 꼴을 바꾼 이 시간을 너는 어떻게 살아왔니? 너도 이제는 서른 중반의 나이가 되었겠구나. 서른 중반이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너무나 잘 알 나이지. 하긴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너는 이미 그 시절에 느꼈겠지. 돈이 있으면 있는 죄도 없어지는 세상이 아니더냐. 이십 년 전 나는 K라는 소위 인류 중학에서 너를 만났지. 비가 억수로 내리던 날 첫 시간이 생각나는구나. 나는 네게 지각한 이유를 물었지. 너는 울상이 된 얼굴로 나릿배 통학생이라고 말했다. 처음 듣는 술어였다. 명지면(鳴旨面)에서 통학하는 아이라고 다른 학생이 말해주었다. 명지면이라면 낙동강 하류의 김해 땅이다. 강을 건너야 부산으로 나올 수 있는 곳이었지. 네가 아버지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다는 걸 알고 나는 네게 좀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학기 초 네가 자기 자신에 대해 써낸 글을 읽게 되었지. 그 글에서 너는 자기가 사는 조마이섬을 소유자가 도깨비처럼 바뀌는 섬이라고 써놓았어.

 

일제 때는 일본 사람의 소유였던 조마이섬은 해방 후에는 어떤 국회의원의 명의로 둔갑이 되었고, 그 뒤에는 또 조마이섬 앞강의 매립 허가를 얻은 다른 유력자의 앞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런 내용을 너는 날카롭고 냉랭한 필체로 표현하고 있었지. 가정방문이 있는 주간에 오전수업만 하고 네 집을 찾았다. 나루터에서 내려 반시간이나 더 걸어야 했지. 아버지는 육이오 때 돌아가셨다고 했고, 홀어머니와 할아버지와 더불어 산다고 했다. 두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겠고. 해가 얼마만큼 기운 뒤에야 네 집에 도착했지. 농사집 치고는 유난히 말끔한 마루청,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지 않은 장독대,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길찬 장다리꽃들……을 보니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부지런한지 알겠더라. 그제야 농촌 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입성이 항상 깨끗했던 네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네 공부방을 둘러보다 섬 얘기라고 쓰인 두툼한 책 한 권을 발견했는데, 네가 쓴 글이었다. 책에 실린 글들에서 너는 서민들의 삶을 돌보지 않는 정치인들을 매섭게 비판했다. 나는 희망을 잃지 말고 꾹 참고 살아야 한다는 뻔한 말을 네게 들려주었어. 어른들이 죽으면 너와 같은 아이들이 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절로 감정이 격해지기도 했지. 조마이섬에 사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도 모르면서 내뱉은 말이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윤춘삼 씨를 만난 게 기억나는구나. 그와는 감옥에서 만났어. 육이오 때 나는 몇몇 대학 교수들과 함께 육군 특무대에 갇힌 적이 있는데, 바로 거기서 송아지 빨갱이라고 불리는 윤춘삼 씨를 만났단다. 그가 정말로 빨갱이였느냐고? 아니, 그는 빨갱이가 아니었어. 남에게 배내를 준 송아지를 청년단 사람들이 잡아먹었는데, 청년단에 그걸 따지다가 그만 특무대에 잡혀 왔다고 했다. 이념을 등에 업은 청년단을 아무도 당해낼 수 없는 시절이었지.

 

윤춘삼 씨와는 인연이 있었던지 나루터에서 다시 그 사람과 마주쳤다. 윤춘삼 씨 옆에는 털보 영감이 있었는데, 그 분이 바로 네 할아버지였지. 셋이서 술을 마시며 조마이섬에 얽힌 기막힌 얘기들을 들었다. 갈밭새 할아버지는 국권이 침탈되면서 일본인에게 땅을 빼앗긴 내력부터 시작해서 해방 후 국회의원, 하천 부지의 매립 허가를 받은 유력자로 섬 소유자가 변하는 과정을 꺽꺽한 목소리로 설명했어.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섬을 가로챈 유력자들을 섬사람들이 얼마나 미워하는지 알 수 있었지. 나는 일부러 섬사람들도 힘을 모아 싸워보라는 말을 던졌다. 윤춘삼 씨는 섬에 문둥이 떼를 싣고 왔을 때 유력자들과 한번 싸워보기는 했다고 말했어. 섬사람들은 유력자가 문둥이를 이용해 섬을 집어삼킬 요량이라고 생각했지. 그때 앞장을 선 사람들이 갈밭새 부자라고 윤춘삼 씨는 말했다. 피는 속일 수 없다고, 네 아버지도 아마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나 보구나.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 조마이섬에 폭우가 내렸지. 육십 년래 처음이니 뭐니 하는 말로 매스컴이 떠들어댈 정도로 많은 비가 내렸다. 비가 좀 뜸해지자 사람들이 사립 밖으로 꾸역꾸역 기어 나왔어. 나는 걱정이 돼서 버스를 타고 네 집으로 향했지. 길과 논밭이 분간이 안 되는 길을 버스는 어림해서 달렸다. 나루터에 도착했지만 배가 있을 리 없었다. 주변에 있는 접낫패에게 나는 조마이섬 소식을 물었어. 그저 눈가림으로 해놓은 둑을 섬사람들이 달려들어 무너뜨렸다고 하더군. 본대대로 물길을 터 놨다나. 이럴 거면 뭐 하러 돈을 들여 둑을 만들었는지. 예나 지금이나 관청에서 하는 일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조마이섬으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이리저리 떠돌다가 뜻밖에 윤춘삼 씨와 마주쳤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그에게 조마이섬은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어. 윤춘삼 씨는 한숨을 내쉬며 남은 건 물바다뿐이라며 나를 주막집으로 데려갔어.

 

한동안 말을 않다가 나는 네 가족 소식을 물었다. 윤춘삼 씨의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사람들이 다행히 목숨을 건졌는데, 그 바람에 갈밭새 할아버지가 경찰서에 끌려갔다고 했다. 사람들을 구한 할아버지를 경찰이 끌고 갔다고? 바로 어제 있는 일이라며 윤춘삼 씨는 무겁게 입을 열었어. 연 사흘 비는 쏟아지는데, 실하지도 않은 둑이 터지기라면 하면 섬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할 판이었다. 마침 배에서 돌아온 할아버지가 사람들을 설득해 둑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인명 피해는 전혀 없었다. 할아버지가 잡혀간 이유는 너도 잘 알고 있으리라. 섬사람들이 한창 둑을 파헤치고 있을 때 웬 깡패같이 생긴 청년 두 명이 현장에 나타나 노발대발 화를 내며 사람들을 방해했다. 유력자들이 보낸 사람들인 게지. 허술한 둑을 이대로 놔두면 섬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말해도 그들은 도통 들으려고 하지 않았어. 그러기는커녕 눈이 치째진 친구가 되레 할아버지의 괭이를 와락 빼앗아 물속으로 집어던지기까지 했지.

 

가만있을 할아버지가 아니지. 사람의 목숨이 중하냐, 네 놈들의 욕심이 중하냐? 하는 말을 외치며 할아버지는 그 자를 덜렁 들어 물속에 태질을 해버렸어. 그 자는 아이고 소리도 내보지 못하고 탁류에 휘말려 가버렸지. 이내 경찰이 둘이나 들이닥쳐서는 할아버지를 경찰서로 데려갔다. 경찰은 할아버지에게 살인죄를 적용했어. 살인죄라니?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겠지. 하지만 상황이 어디 그런가 이 말이야. 윤춘삼 씨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거기까지 말하고는 말을 그쳤다. 법은 언제나 유력자의 편이지. 유력자가 법을 방패로 배짱을 부리면 선량한 다수야 힘이 없으니 어떻게 하느냐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면서까지 힘이 있는 사람들은 욕심을 부리고, 법은 언제나 그 욕심을 합법으로 만들어주는 거지. 참 이상하고도 이상한 세상이다. 소수의 유력자를 위해 다수의 서민들이 죽음 길로 내몰리는 경우라니!

 

섬사람들의 애절한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결국 기약 없는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사람들을 구하고도 감옥에 갇히는 이 상황을 건우, 너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새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너는 학교에 오지 않았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려도 너는 끝내 학교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지. 그리고 얼마 후 조마이섬의 황폐한 모래톱을 군대가 정지를 하고 있다는 소문들을 들었다. 유력자가 섬사람들을 이긴 셈이지. 유력자는 꼭이 이 섬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는데도, 왜 이리 섬에 욕심을 부린 걸까? 하긴 사람들의 욕심에 어디 한계가 있더냐. 학교를 그만두고 너는 무엇을 하며 지냈니? 할아버지 옥바라지를 했니? 아니면 시아버지마저 잃고 시름에 빠진 어머니와 더불어 다른 살 길을 찾아 길을 나섰니? 그 이후로도 네가 일기를 썼는지 모르겠구나. 그 일기에는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는지.

 

이십 년이 넘어서야 네게 이 글을 쓰는구나. 조마이섬과 관련된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내고 보니 새삼 너에 대한 추억이 새록새록 돋는구나. 조마이섬을 집어 삼킨 유력자들은 지금도 어디선가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겠지? 그들이 잘 사는 만큼 가난한 서민들은 더욱 더 힘든 삶을 살 테고. 서른 중반에 들어선 네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꽤나 궁금하구나. 중학생 때부터 너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지. 지금도 그러니? 어디선가 사회적 불의와 맞서 싸우고 있을 네 모습이 그려지기도 하는구나. 어린 나이에 엄청난 고통을 겪은 네 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한 게 지금도 한스럽다. 하지만 어쩌겠니.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니. 지금도 이 사회 곳곳에는 너처럼 유력자들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넘쳐난다. 하긴 권력을 지닌 사람들의 욕심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는 없겠지. 우리는 또 우리대로 그런 사람들과 끈질기게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고.

 

정의는 언제나 부정의가 있는 곳에서 생성된다고 한다. 정의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부정의와 싸우는 과정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거지. 갈밭새 할아버지만 해도 그렇지 않니. 할아버지의 정의는 유력자들의 부정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유력자들을 비호하고, 정작 사람들을 구한 할아버지를 감옥에 가두는 법()도 마찬가지고. 험난한 이 세상을 살아보니까 부정의가 있는 곳에서 정의가 피어난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겠더구나. 어디선가 할아버지처럼 싸우고 있을 너를 생각하다 보니 정의니, 부정의니 하는 말까지 나왔다. 나는 네가 겪은 일을 글로 써서 세상에 알리는 작업을 계속하련다. 그게 글 쓰는 자의 직무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다 보면 너와 나는 어느 지점에서 반드시 만나게 되겠지. 갈밭새 할아버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 모습을 다시 떠올리며 너에게 닿지 못할 이 편지를 쓴다. 내게는 거울과도 같은 두 사람을 마음 깊이 간직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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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의 사랑법 - 춘향전 | 소설 읽기 2020-02-22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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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춘향전

송성욱 편역/백범영 그림
민음사 | 2004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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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 사랑을 쟁취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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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 사랑을 쟁취하다

- 춘향의 사랑법

 

 

 

춘향이라는 사랑의 아이콘

 

춘향과 이 도령의 그 유명한 사랑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미가 기생인 춘향은 사또의 자제인 이몽룡을 만나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어미의 신분에 따라 자식의 신분이 결정되었습니다. 아비가 양반이어도 어미가 천인이면 그 자식은 천인으로 낙인찍혔지요. 황 진사의 딸인 황진이가 그랬고, 홍 판서의 아들인 홍길동이 그랬습니다. 춘향의 어미인 월매는 기적(妓籍)에 오른 기생이었습니다. 기생 어미를 두었으니 춘향 또한 기생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도령과 사랑을 나눈다고 해도, 신분상 그녀는 이 도령의 정실이 되지 못합니다. 첩실이 되어 살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면 그녀와 이 도령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천민이라는 신분의 굴레를 쓰고 살아야 합니다.

 

조선 후기의 백성들은 글을 알지 못했으므로 저자에 나가 강담사(講談士, 이야기꾼)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즐거이 들었습니다. 강담사는 당시 유행하던 소설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읽어주었는데, 특히 인기가 있는 이야기가 <춘향전>이었답니다. 춘향전은 무엇보다 춘향과 이 도령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들은 사랑 이야기에 목말라 합니다.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받고 싶은 것이 사랑이라지요. 사랑에 웃고 사랑에 우는 풍경은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드라마치고 사랑이 없는 이야기가 있던가요. 현실감이 없는 자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막장 드라마라고 욕하면서도, 대중들은 그 속에 담긴 애절한 사랑을 외면하지 못합니다.

 

당대 백성들은 왜 춘향을 좋아했을까요? 춘향이 이 도령과 첫날밤을 보낼 때 백성들은 달콤한 상상에 빠졌을 것이고, 춘향과 이 도령이 이별을 할 때 백성들은 눈물 콧물을 짜며 슬퍼했을 것입니다. 변 사또가 춘향을 감옥에 가두고 가혹한 벌을 내릴 때는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며, 암행어사가 된 이 도령이 마패를 높이 쳐들고 암행어사 출도를 외칠 때는 가슴을 쭉 펴고 이야기꾼을 따라 암행어사 출도를 외치기도 했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춘향을 통해 꿈을 꾸었습니다. 춘향이 기뻐하면 백성들도 기뻐했고, 춘향이 슬퍼하면 백성들도 슬퍼했습니다. 춘향은 저 먼 구중궁궐에 사는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춘향은 기생의 딸이었지요. 천한 신분인 춘향을 변 사또는 제 마음대로 다루려고 했습니다. 기생의 딸은 기생이라는 논리로 수청을 거부하는 춘향을 핍박했습니다.

 

변 사또가 춘향을 괴롭힐수록 백성들은 더욱 더 춘향을 마음속에 품었을 겁니다. 백성들은 늘 권력의 횡포 아래 놓여 있지 않은가요. 그들은 어서 이 도령이 나타나 춘향을 구해주길 간절하게 바랐습니다. 춘향이 구원을 받는 날이 곧 자신들이 구원을 받는 날입니다. 이야기꾼 또한 백성들이 원하는 이 지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반응을 엿보며 이야기의 수위를 조절합니다. 백성들이 소망하는 바를 이야기 속에 담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춘향의 사랑을 방해하는 변 사또를 물리칠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백성들 스스로 민란을 일으켜 변 사또를 몰아내는 것입니다. 홍길동이나 임꺽정을 생각하면 되지요. 이렇게 되면 이 도령의 역할이 애매해집니다. 이야기꾼은 변 사또보다 더 강한 인물을 만들어냅니다.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된 이 도령입니다.

 

암행어사가 된 이 도령을 받아들이려면 춘향은 절개를 지켜야 합니다. 춘향이 절개를 굽혀 변 사또를 받아들이면 이 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돌아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도 춘향은 절개를 굽히지 않습니다. 거지꼴로 나타난 이 도령을 보고서도 춘향은 자신의 죽음보다 이 도령의 앞길을 걱정합니다. 어미인 월매에게 거지가 된 이 도령을 구박하지 말라는 말까지 하지요. 춘향이 이 도령에게 부탁한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이 도령의 선산발치에 묻어달라는 것. 춘향은 죽어서도 이 도령 집안의 귀신이 되려고 합니다. 정실이 아니니 선산에 묻힐 수는 없습니다. 춘향은 그 누구보다 자기 신분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춘향의 이 서글픔을 마음 깊이 받아들입니다. 그녀가 걷는 고난의 길을 더불어 걸으려고 합니다.

 

절개를 지키는 춘향의 모습을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것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춘향이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여자였다면, 굳이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지 않았을 겁니다. 기생의 딸로 태어난 춘향이 기생 신분으로 사는 삶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당장 퇴기인 어미의 외로운 삶을 그녀는 늘 보고 살았을 테니까요. 이 도령의 정실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변 사또의 첩실이 되어 뒷날을 대비하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춘향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첩실이 되느니 차라리 죽으려고 합니다. 그 길이 춘향에게는 절개를 지키는 길입니다. 요컨대 춘향은 이 도령을 위해 절개를 지킨 게 아니라 자신을 위해 절개를 지킨 것입니다. 권력자에 휘둘리는 삶을 사느니 그녀는 깨끗이 목숨을 버리려고 했습니다.

 

절개와 자유 사이

 

김주영이 지은 <외설 춘향전>이라는 소설에는 이 도령이 바람둥이 한량으로 묘사됩니다. 사또 자제인 이 도령은 단옷날 그네를 뛰는 춘향을 보고 첫눈에 반하지요. 방자를 시켜 춘향을 데려와서는 이런저런 수작을 하다가, 결국에는 춘향의 어미인 월매의 허락을 받고 처음 만난 그날 춘향과 첫날밤을 치릅니다. 이팔청춘 두 사람이 그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판소리 ?사랑가? 등에 잘 나타납니다. 퇴기인 월매는 딸인 춘향이 번듯한 양반을 만나 살기를 원합니다. 정실은 언감생심입니다. 이 도령이 정실 약속을 해도 집안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지요. 월매는 춘향이 능력 있는 양반가 남자의 품안에서 한 송이 꽃으로 편안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기생으로 한 세상을 풍미한 어미 입장에서는 이 길만이 춘향을 지켜주는 일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춘향 또한 처음에는 어미와 같은 생각으로 이 도령을 맞았을 겁니다. 월매는 꿍쳐두었던 돈을 풀어 이 도령을 극진히 접대합니다. 사또의 아들이니 투자한 만큼 이익이 돌아올 것이라 생각한 겁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이 도령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면 상황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 도령의 아버지가 벼슬이 승차해 한양으로 올라가는 바람에 두 사람은 헤어집니다. 이 도령은 춘향을 한양으로 데려가고 싶지만, 아버지가 그것을 허락할 리 없습니다. 춘향은 남원에 남고 이 도령은 쫓기듯이 한양으로 올라갑니다. 이 도령이 남원을 다시 찾지 않는 한, 춘향이 이 도령을 만날 길은 사라졌습니다. 만약 이 도령이 돌아오지 않으면 춘향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 도령과 보낸 시간은 이미 남원 고을에 쫙 퍼졌습니다. 다른 남자와 쉬이 맺어질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도령을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변 사또가 나타납니다. 춘향에게 다른 선택지가 생긴 겁니다. 춘향은 기생의 딸이므로, 변 사또 수청을 든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도령이 춘향을 잊지 않겠다는 글을 적어 남기기는 했지만, 종이쪽 한 장에 한 생을 거는 게 온당한 일인가요. 이 도령이 과거에 급제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설사 급제한다고 해도 춘향을 어찌 대할지는 그때 가봐야 압니다.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춘향은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고 절개를 선택합니다. 변 사또의 수청을 들면 몸 하나는 편할 겁니다. 어미인 월매 또한 노후를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겠지요. 춘향이 이 도령을 기다리는 험난한 길을 선택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 됩니다.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절개가 개인의 자유로 변화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가부장제는 여자가 한 남자를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자는 물론 양반가 여자를 가리킵니다. 권력은 양반가에 몰려 있는 법이니까요. 가부장제는 왜 여성에게 절개라는 제도를 강요했을까요? 자기 피를 받은 아들에게 안전하게권력을 양도하기 위해섭니다. 여자가 절개를 지키지 않는 사회라면, 여자가 낳은 아들이 누구의 피를 받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남자에서 남자로 이어지는 순수 혈통을 지키기 위해 가부장제는 여자를 안채에 가두고, 절개를 강요합니다. 재가한 과부가 있는 집안에는 10년 동안 벼슬을 주지 않는다는 법규가 생길 정도였습니다. 10년 동안 벼슬길이 막힌 집안은 망할 수밖에 없지요. 집안을 중시하는 가부장들은 그래서 여자를 어떻게든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절개라는 제도는 곧 여성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이용된 셈입니다.

 

변 사또는 이 도령에 대한 절개를 지키는 춘향을 향해 기생이 무슨 절개냐고 반문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절개는 양반가 여성에게나 강요되던 풍습입니다. 지킬 권력이나 돈이 없는 여자들에게까지 사회적으로 절개가 강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생의 딸인 춘향이 절개를 들먹이며 고을 사또의 수청을 거부합니다. 변 사또는 명령을 거부한 춘향을 호되게 다룹니다. 인정상으로는 못된 일을 한 것이지만, 당대의 신분 제도를 보면 변 사또의 행위를 비판할 수만은 없습니다. 만약 변 사또가 선치(善治)를 베풀었다면 이 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돌아와도 춘향을 구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다행히(?) 춘향을 괴롭히는 변 사또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못된 사또였습니다. 춘향이 절개를 지킬수록 변 사또는 더욱 더 악당이 되는 상황이 자연스레 마련된 것입니다.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돌아온 이 도령은 춘향을 두 번이나 시험합니다. 첫 번째 시험은 앞서 말한 감옥 장면에서 일어납니다. 거지꼴로 나타난 이 도령을 춘향이 매몰차게 외면했다면, 암행어사 출도가 일어난 이후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춘향은 자기 패물을 찾아 거지가 된 이 도령을 극진히 대접하라고 어미에게 부탁합니다. 이 도령의 마음을 얻은 것입니다. 두 번째 시험은 암행어사 출도가 일어난 이후에 이루어집니다. 마당으로 끌려나온 춘향에게 동헌 옥좌에 앉은 이 도령이 묻습니다. 자기처럼 젊은 남자에게도 수청을 들지 않겠느냐고요? 춘향은 단호히 거부합니다. 한양에서 내려오는 수령들마다 개개이 명관이로구나 하며 비꼬기까지 합니다. 이 도령은 바로 이 시점에서 자기의 신분을 밝힙니다. 춘향의 절개를 인정한 것이지요.

 

춘향에게 절개는 변 사또로 대변되는 권력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방법이었습니다. 변 사또가 기생의 절개를 부정할수록 춘향은 이 도령을 향한 절개를 강조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지킨 절개를 인정받기 위해 숱한 고난을 견뎌야 했습니다. 변 사또는 물론이거니와 이 도령 역시 춘향의 절개를 의심하고 시험했습니다. 조선 시대의 대다수 여성들이 절개를 지킴으로써 자기를 버리는 길로 나아갔다면, 춘향은 절개를 통해 자기를 지키는 길로 나아간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가 여전히 춘향의 사랑을 기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사랑을 선택했고, 스스로 그 사랑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자기 뜻을 허물려는 권력자와 맞서기도 했습니다. 백성들은 사회 통념에 젖은 춘향이 아니라 그 바깥으로 기꺼이 나아간 춘향을 좋아했습니다. 끝까지 제 뜻을 밀어붙인 춘향은 이렇게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여성 인물로 거듭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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