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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 시집 『희망이 외롭다』 | 시집 읽기 2017-08-31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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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희망이 외롭다

김승희 저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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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수도사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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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곳없이, 희망하다

 

 

 

 

김승희의 아홉 번째 시집 『희망이 외롭다』(문학동네, 2012)에는 으로 나가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을 벌이는 존재의 삶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노리개로 전락한 여성의 삶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는 상황(?서울의 우울 10-장자연의 꽃송이?)에 표현되듯, 시인은 무엇보다 여성의 삶을 무겁게만드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 예리한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 ?서울의 우울? 연작시를 가로지르는 우울-멜랑콜리의 정조는 제 정신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한 현실을 분명히 드러낸다. 서울은 마른 뼈 가득한 도시”(?서울의 우울 6?)이다. 마른 뼈가 층층이 쌓여 산마루를 이루면 누군가는 오늘 칼날 능선에서 떨어져 죽는다. 오늘은 누군가가 죽었지만 내일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 “서울은 칼날로 이루어진/ 칼날 능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칼날 능선에 찔려 장자연이라는 꽃송이가 덧없이 떨어졌다(?서울의 우울 10?). 가진 자들의 노리개가 되기 싫다며 자살한 한 연예인의 서글픈 이야기는 강한 자=남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본의 생리를 예시적으로 표현한다. 문제는 유서 한 장 달랑 남기고 죽은 이 여인의 찢어진 옷고름/ 피 묻은 흰 치마너머로 그러면 그럴수록 하늘만 푸르르고/ 그러면 그럴수록 깨끗이 면도한/ 아침 서울의 면상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꽃송이가 떨어지면 다른 꽃송이로 대체하면 된다는 것일까? 핏빛 치마와 선명하게 대조되는 푸른(그래서 차가운) 하늘의 이미지는 겉으로는 한없이 푸른(자본주의 이외의 대안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한 번 빠져들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비열한 욕망의 세계를 에둘러 드러낸다고 하겠다.

 

물론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자본주의는 욕망의 바퀴를 굴려야만 돌아간다. 무언가를 향한 한없는 욕망이 자본주의의 동력이라는 말이다. 저 푸른 하늘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자본주의를 낳았다면, 이제 자본주의라는 짙푸른 하늘이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긴다. 인간의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자본주의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면, 자본주의의 바깥으로 나아갈 길은 애초부터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본주의의 생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산다면 마음만은 편할 수 있겠지만, 이미 바깥을 본 시인에게 그것은 죽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다시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승희의 시가 바깥을 향한 욕망으로 여전히들끓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 곧 자본주의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길을 희망하고 있다. 마음속으로는 숱하게 그 밖으로 뛰쳐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몸은 여전히이 사회에 묶여 있다는 걸 그녀는 절절하게 확인할 뿐이다. 서럽게 죽은 여인들의 피 묻은 치마를 들고 푸른 하늘을 향해 여전히휘두르고 있지만, 푸른 하늘은 더욱 깨끗한 얼굴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저 푸른 하늘 밖에는 다른 무엇이 있을까? 표제작인 ?희망이 외롭다 1?을 바탕으로 이 질문에 접근해 보자.

 

 

사전에서 모든 단어가 다 날아가버린 그 밤에도

나란히 신발을 벗어놓고 의자 앞에 조용히 서 있는

파란 번개 같은 그 순간에도

또 희망이란 말은 간신히 남아

그 희망이란 말 때문에 다 놓아버리지도 못한다,

희망이란 말이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왜 폐허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느냐고

가슴을 두드리기도 하면서

오히려 그 희망 때문에

무섭도록 더 외로운 순간들이 있다

- ?희망이 외롭다 1? 4

 

 

희망은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굳이 판도라의 상자를 떠올릴 필요는 없겠지만, 희망은 판도라의 상자 속에 유일하게 남은 신의 선물이었다. 판도라의 상자 속에는 왜 희망만이 남게 되었을까?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를 벌하기 위해 제우스가 지상으로 보낸 판도라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희망이라는 유산을 불어넣었다. 돌려 말하면 제우스를 배신한 대가로 인간에게 주어진 희망이 도리어 세계의 폐허를 가로막는 계기가 되었던 셈이다. 제우스는 왜 인간의 마음속에 희망의 불씨를 살아남게 했을까? “오히려 그 희망 때문에/ 무섭도록 더 외로운 순간들이 있다는 시적 진술에서 그 이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요컨대 희망으로 하여 인간은 새로운 생()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되었지만, 바로 그 희망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내면과 대면하는 무섭도록 더 외로운 순간들에 직면해야 했다. 희망이라는 싹을 통해 내면을 발견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꿈틀대는 또 다른 나를 인식해야 했다. 하나가 되고 싶지만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새로운 의 탄생. 희망이 외로운 이유는 무엇보다 이러한 자아의 분열 속에서 그 맥락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희망의 전도사(傳道師)피가 철철 흐르도록 아직, , 벅차게 사랑하라”(같은 시 5)고 신도(信徒)들에게 명령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희망은 그러한 명령이 결코 실현될 수 없으리란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이 시의 2연에 표현된 대로, 약이 잘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으면서도, 희망에 부푼 존재는 바람에 흔들리는 찬란한 햇빛 한 줄기를 따라저 멀리 약을 구하러 떠난다. 폐허가 되어가는 세상의 이면에서 아직폐허가 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자의 비애가 희망의 정서에는 스며들어 있다. ?희망에는 신의 물방울이 들어 있다?를 참조한다면, “꽃이 피어 있을 땐 보지 못했던/ 검붉은 씨가 눈망울처럼 맺혀 있다”. 꽃이 떨어져야 보이는 희망의 씨는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시간적 계기를 이룬다. 희망이 미래로 뻗어나가는 까닭은 바로 여기서 알 수 있는바, 그리하여 그것은 현실에서 이룩될 수 없는 일을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상상하는 작업을 항상 동반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희망의 이러한 특성을 희망의 연옥”(?희망의 연옥?)이라는 시구로 표현한다. 연옥은 감옥 그 너머의 감옥, 절벽 그 너머의 절벽, 최후 그 너머의 최후의 장소에 있다. 그 희망-연옥의 장소에서 시인은 나치를 피해 피레네산맥을 넘다가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벤야민을 시의 세계로 호명한다. 산맥 너머에는 산맥이 있고, 그 산맥 너머에는 또 산맥이 있다. 저 산맥을 넘으면 길이 보일 거라고 희망에 들뜬 존재는 생각하지만, 산맥 너머에 산맥이 있는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것은 산맥 너머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존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벤야민은 왜 스페인 작은 마을/ 안전지대에 도착한 뒤/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을까? 산맥 너머에 펼쳐진 안전지대가 그가 꿈꾸었던 최후의 희망을 놓게 한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어디에도 희망의 장소는 없다는, 그래서 희망은 항상 산맥 너머에 산맥이 있어야만 꿈꿀 수 있다는 역설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이 폐허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희망의 이면에는 폐허가 있다는, 이 외면하지 못할 진실 앞에서 벤야민은 자살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는 희망을 버려야 한다는 논리가 자연스레 성립한다. 김승희는 이번 시집에서 묻고 있다. 당신은 희망을 버릴 수 있느냐고. 희망을 품은 사람은 이 세상이 폐허라는 걸 인정해야 하고, 그것이 죽음과 대면하는 길이라는 점 또한 인정해야 한다. 죽은 아내를 살리려는 헛된 희망을 품고 저승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한 번 아내를 잃는 비극적 상황에 빠져버린 오르페우스처럼, 희망을 꿈꾸는 자의 이면에는 항상 죽음을 향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아직이미사이, 그 어딘가에 희망의 장소가 있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그래서 미래를 향하지만), 이미 지나가버렸을 수도 있다(그래서 죽음을 동반한다). 시인의 말마따나 아직이라는 말에는 입천장 가득 활짝 일어서는 향기로이 넘치는 반원의 무지개”(?아직이라는 말?)가 펼쳐져 있고, ‘이미라는 말에는 언제 찬란했냐는 듯/ 겨울의 눈송이가 다 녹아 스며들”(?이미라는 말?)어 있다.

 

그런데, 찬란함의 과거형인 이미라는 말에서 시인은 덜어내고도 다시 고이는 힘!”, 돌려 말해 사라지지 않는 자연의 힘을 발견한다. 이미 죽은 존재는 다른 존재로 다시살아난다. 그것이 자연의 힘이라면, 최소한 자연의 광장에서 이미라는 말은 분명 아직이라는 말을 본래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살아 있는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 자연이다. 죽은 것은 또한 언젠가는 다른 존재의 몸을 빌려 살아난다. 자연이다. 이처럼 시간의 횡포-폭력에 아랑곳없이제 생을 불태우는 자연의 힘을 시인은 이 시대의 희망을 매개하는 시적 단서로 수용한다. 세상은 이미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세상은 아직폐허가 되지 않았다. 에두르지 말고 말하자. 세상이 이미 폐허가 되었든, 아직 폐허가 되지 않았든, 그와는 아랑곳없이 우리는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

 

 

이상은 그렇게 위독의 문학을 했다,

나는 이렇게 위독하다고,

김유정도, 카프카도 그런 위독의 문학을 했다,

폭설이 가혹해지면

봉쇄 수도원처럼 침묵과 폐쇄의 자리가 된다,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고

극한의 맹지, 봉쇄 추위 속에 누워

백 년 전쯤 태어난 이상, 김유정, 윤심덕, 백석 들의

고독과 위독을 생각하고 있는데

멀리 제주도에서부터 수선화와 유채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샛노란 소식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수선화와 유채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는……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수선화가 무리 지어 꽃을 피워

싱그러운 향기를……

, 제발,

아랑곳없이……

그런 말

- ?아랑곳없이라는 말? 2

 

 

시는 위독의 문학이라고 시인은 선언한다. 위독(危篤)하다는 것은 병이 들어 죽을 만큼 아프다는 것이다. 몸속에서, 마음속에서 가혹한 폭설이 내린다. 폭설에 갇혀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고” “고독과 위독을 생각하고 있는데”, 저 멀리 제주도에서 수선화와 유채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샛노란 소식들이 들려온다. 시간은 시인을 위독하게 만든다. 한편으로 시간은 시인에게 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소식-희망을 전한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 드리워진 시간의 힘은 고독-위독에 빠진 시인-주체의 상황과는 아랑곳없이제 갈 길을 간다. 시간의 그런 힘을 자연의 힘이라고 말해도 좋다. 이상과 김유정, 카프카는 그러한 시간의 힘을 느끼며 문학을 했다. “나는 이렇게 위독하다는 선언은 그러므로 그래서 나는 문학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읽힌다. ‘~할 수밖에 없다는 운명이 아랑곳없이문학을 하는 자의 내면에 숨어 있다. “폐결핵 3기에서도/ 심장에서 더운 김이 펄펄 나고/ 구름도 얼어붙은 차디찬 하늘에 링거 병을 매달고/ 아랑곳없이……”(같은 시 4) 그들은 글을 쓰고, 시를 쓴다.

 

아랑곳없이라는 말은 여전히 희망하고 있는 자의 언어이다. “코드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모차르트의 엉~덩이 4?)는 걸 알면서도, 모차르트는 가발사회에 천진의 폭탄을 던졌고, “코앞에서 빵~ 터지는 찬란한 방구”(?모차르트의 엉~덩이 1?)로 떠들썩한 웃음을 터뜨렸다. “기내식 같은 삶”(?모차르트의 엉~덩이 5?)으로부터 벗어나 울퉁불퉁한 삶을 스스로 선택한 모차르트는 코드 안에서 코드 밖을 지향한 존재의 형상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자본주의 바깥은 없을지 모르지만, 그 바깥을 상상하는 일만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바깥을 상상하는 것은 (자아)분열을 인정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도대체 분열되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위독한 상태로 시의 응급실”(?시의 응급실에서?)에 입원한 시인은 이미써왔던 시를 아직도쓰고 있는 것이다.

 

?진주 기르기 2?를 참조한다면, 그 시는 여름날 오후의 폭염을 온몸으로 받으며 구루마 위에/ 화덕 두 개를 올려놓고/ 하얀 김이 펄펄 날리는 옥수수를/ 찌고 있는 노점상 아줌마의 모습과 그대로 빼어 닮았다. “사람마다 자기 아우슈비츠를 갖고 있다”. 돌려 말하면 누구나 위독한 상태로 자신의 삶을 산다. 노점상 아줌마가 그랬고, ()난설헌이 그랬으며, 장자연도 덕혜 옹주도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 한없이 나열할 수 있는 그들의 삶이 모여 김승희의 시가 이루어졌다. “가장 낮은 의 옥타브로 들려오는 그녀의 시는 아리랑처럼 유장하게 흐르고 흘러 희망의 종신형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시를 쓰는 순간부터 시인은 이미 아팠고, 아직도 그 아픔은 지속되고 있다. 시인의 아픔을 비웃기라도 하듯 세상은 한층 더 험악해지고 있다. 이 시대에 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시인은 여전히 아우슈비츠라는 희망을 껴안으려고 한다. 그것은 칼날이 되어 시인의 몸을 헤집는다. 아프다. 다른 이와 공유할 수 없는 아픔, 운명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김승희는 절대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그 길을 수도사처럼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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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비극과 예술적 감각 | 소설 읽기 2017-08-31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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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현의 노래

김훈 저
문학동네 | 2012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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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는 국경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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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비극과 예술적 감각

- 김훈 󰡔현의 노래󰡕 읽기

 

 

 

󰡔현의 노래󰡕는 전쟁의 비극 속에서 예술적 감각을 지키려는 한 예술인(우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약한 나라 가야의 백성으로 태어나, 지켜야 할 무언가를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음악가인 우륵은 소리는 왕의 것도, 나라의 것도 아니다.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라고 생각하지만, 한 나라의 통치자(가야를 정복한 신라의 진흥왕)에게 음악은 천하의 민심을 가지런히 하는 수단일 뿐이다. 소리는 가지런한 것도 아니고, 소리는 다만 살아서, 들릴 때만이 소리이다.”라는 우륵의 신념은 한 개인의 신념으로만 인정될 수 있다. 망해가는 가야를 뒤로 하고 신라로 귀순하는 우륵의 마음속에는 오직 살아남아 음악을 하려는 의지가 내재되어 있다. 살아야 소리를 듣고, 살아야 소리를 연주할 수 있지 않은가.

 

 

소리는 귀로 들어왔고 입으로 들어왔고 콧구멍과 땀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우륵의 몸은 소리에 젖었고, 몸속에서 바람이 일고 숲이 흔들렸다. 우륵은 밤바다를 향해 아아아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마도 이것은 새로운 시간이 사람에게 달려와 스며드는 소리일 것이다…… 우륵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별과 물 사이를 불어가는 이 알 수 없고 나눌 수 없는 소리가, 나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을 이 거친 소리가 내 몸속으로 흘러 들어와 몸속에 바람이 불어가는 것은 아마도 시간이 새롭기 때문일 것이다……. 아 그 새로운 시간이 모든 소리들의 고향이겠구나……. 소리들의 고향은 늘 스스로 무너져서 사라지지만, 소리들은 늘 그 고향에서 울리는구나……

 

 

소리들의 고향은 새로운 시간이고, 몸이 살아 있어야 새로운 시간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소리에 대한 우륵의 근본적인 생각이다. 끊어질 듯 이어지며 퍼져 나가는 소리의 화음은 살아 있는 몸이 체험하는 신비로운 감각과 다를 수 없다. 신라에 귀순한 후, 신라 장군 이사부에게 우륵은 주인 있는 나라에서 주인 없는 소리를 펴게 해주시오.”라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가야는 가야이고 신라는 신라일 뿐, 소리는 그 어느 나라에도 귀속될 수 없는 자유로움을 지향한다. 민심을 가지런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소리는 이러한 소리의 자유로움을 침해하고, 소리를 한 나라(임금)의 소유물로 바꿔버린다.

 

나라가 망해도 그 나라의 소리가 살아남는 이유는, 사람이 죽어도 그 사람의 소리가 살아남는 이유는 이처럼 소리는 새로운 시간의 도래 속에서 살아 있는 몸을 통해 표현되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가 없어야 전쟁이 끝나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우륵은 소리를 자유로이 표현함으로써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시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소리도 살아남는다. 소리는 시간 속에서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들의 추억을 말한다. 가야금의 열두 줄 현 위에서 펼쳐지는 소리의 향연은 한 존재의 운명을 넘어서는 소리의 운명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현의 노래󰡕에는 김훈의 예술적 감각이 그 어느 작품보다 돋보이게 표현된다. 소리를 소설화하고 있는 특이한 내용의 이 소설은 소설 전편이 감각의 묘사로 빚어졌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감각적인 묘사들로 넘쳐난다. 김훈이 우륵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소리는 살아 있는소리이다. 죽은 사람들에게 소리는 들리지 않기에 무의미하다. 소리는 오로지 살아 있는 존재에게만 들리는 소리이고, 살아 있는 존재만이 연주할 수 있는 소리이다. 시간 속에서 떨려 나오는 소리의 울림이 살아 있는 몸의 울림=떨림과 맞물려 피워내는 새로운 소리의 세계는 살아 있는 자의 감각이 아니면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세계이다. 삶과 죽음이 뒤섞인 혼란한 세계의 중심에서 우륵은 살아 있는 자의 감각을 믿고 있는바, 우륵의 이러한 신념이 실상 김훈의 역사소설을 통어하는 감각의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에서 김훈은 젊은 여인들이 내보이는 몸의 감각을 소설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늙은 왕과 젊은 시녀들의 대립적 이미지가 소설 곳곳에 나타나는 󰡔현의 노래󰡕에서 살아 있는 몸의 감각은 아라라는 여성 인물을 통해 본격적으로 표출된다. 늙은 왕의 죽음과 함께 순장자로 바쳐질 운명이었던 시녀 아라는, 왕이 죽던 날 대궐에서 도망친다. 왕이 묻지 않으면 말 한 마디 못하는 젊은 여인에게 삶은, 죽음은 무엇이었을까? 늙고 병든 왕을 시중 들고, 왕이 죽으면 산 채로 순장되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여인을 묘사하며 작가는 어떤 상황에서도 숨길 수 없는 몸의 욕망을 드러낸다. 임금의 침전 뒷숲에서 오줌을 눈 후 아라는 고개를 들어 궁궐 너머의 아득한 세상을 쳐다본다. 능선 위로, 왕들의 무덤이 어둠 속에서 뚜렷했다. 봉분들의 둥근 윤곽이 끝없이 출렁거리며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무덤들은 하늘에 가득 찼고, 그 위로 별들이 빛났다. 뱀들이 풀 속에서 버스럭거렸고, 벌레들이 일제히 울어댔다.”

 

아라는 죽음을 생각하기엔 너무 젊은 여인이다. 오줌을 누는 순간 몸속 깊은 곳이 떨리고, 살의 떨림이 오줌 줄기를 타고 몸 밖으로 뻗칠 만큼 건강한 여인이 아라이다. 이런 여인에게 죽은 왕을 따라 들어가야 하는 구덩이 속의 세상은 달빛과 벌레소리만이 고즈넉하게 들리는, 외롭고 황폐한 세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생명은 살아 있는 상태를 지향하기 때문에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몸속의 떨림을 간직한 채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일 사람들은 없다. 아라는 그래서 궁전을 나온다. 본능적인 생명의지가 죽음의 저편에서 벗어난 삶의 공간으로 아라를 이끌고 나온 셈이다. 김훈은 아라의 몸의 감각을 따라가며, 아라의 몸으로 느껴지는 세상의 감각을 묘사한다.

 

 

아라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달이 능선 아래로 내려앉았다. 아침 안개를 걷어가며 민촌에 햇살이 퍼졌다. 마을은 물감이 배어나듯 안개 속에서 드러났다. 아라는 강가의 오리나무 숲을 따라 걸어갔다. 강물이 갈대숲을 적시며 철썩거렸다. 비스듬한 해가 강물에 비쳤다. 강물의 먼 쪽이 붉게 깨어났다. 붉은 강은 푸르게 바뀌면서 다가왔다. 바람결에 물비린내가 퍼졌다. 나뭇가지에서 새들이 짖어대며 푸드덕거렸다. 나뭇잎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어둠의 구렁에서 빠져 나온 아라가 보는 세상은 저마다의 사물들이 뿜어내는 감각으로 넘쳐난다. 붉은 해와 강이 있고, 물비린내가 사방으로 퍼진다. 새들은 지저귀고, 물방울은 나뭇잎에서 떨어진다. 짧은 문장으로 묘사되는 세상의 풍경은 전쟁터의 피비린내가 스며들 수 없는 절대적인 공간으로 나타난다. 보이는 대로 보는 세계, 그저 있는 대로 있는 세계를 아라는 열린 감각으로 받아들인다. 우륵이 이야기한 살아 있는 소리는 아라에게서 살아 있는 몸의 감각으로 변주된다. 소리가 한 나라()의 소유물이 아닌 것처럼, =생명도 어느 누구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누군가의 소유물로서 몸이라면 이미 살아 있는 감각을 상실한 몸이라고 할 수 있다. 감각은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나의 감각인 것이다.

 

김훈에게 감각은 존재의 개별성을 드러내는 확실한 표지이다. 열린 감각으로 세상과 대면하는 아라가 그렇고, 소리의 살아 있는 감각으로 고통스런 세상을 관통하려는 우륵이 그렇다. 자신을 속박하는 세상의 구조와는 다른 방식으로 감각은 자유롭게 숨 쉬고 움직인다. 이 점이 아마도 역사소설에서 김훈이 감각을 중시하는 이유라 할 것이다. 그러나 존재의 개별적인 감각은 부조리한 세상의 중심으로 흘러들지 못한다. 우륵이 혼탁한 세상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깨끗한 지조로 그 감각을 내면적으로 갈무리한다면, 아라는 우륵의 제자 니문과 인연을 맺은 후 가야로 돌아왔다가, 사람들의 눈에 띄어 순장을 당하는 불행을 겪는다. 개별적인 주체는 감각을 통해 세상의 사물들과 행복하게 만날 수 있지만, 감각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김훈의 철저한 개인주의=감각주의가 생성되는 이 지점이 이 시대 독자들의 내면을 자극하는 궁극적인 장소이다. 부조리한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독자들은 이순신과 우륵의 감각적인 삶을 꿈꾼다. 물론 그 감각이 세상의 경계를 넘어설 수 없는 감각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즐기되 개별적으로 즐겨야 한다는 점을 그들은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부조리한 세상과 생명의 감각이 만나는 이 경계 위에서 김훈의 역사소설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사색의 힘으로 빚어진 아름다운 문체는 그러한 경계를 넘나드는 김훈의 역사소설에 문학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허깨비와 같은 말들의 세상이 자리하고 있다. 말들의 세상을 이러한 개별적인 감각으로 뚫고 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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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아함의 기술』 서평단 모집 | 이벤트 2017-08-30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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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리벼C입니다.

『우아함의 기술』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신청 기간 : ~9월 4일(월) 24:00

모집 인원 : 10명 
발표 : 9월 5일


신청 방법 : 댓글로 신


우아함이란 무엇인가?

세련된 행동이나 잘 다듬어진 장식만으로 우아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일상에서 우아함을 너무나 잊고 사는 건 아닐까?


우리는 우아함의 공백기라 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늘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눈과 귀에 장치들을 연결한 채 마음이 저 멀리 가 있어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는지 알지 못한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할리우드 황금기까지를 사례로 삼아, 우아함의 본질적인 특성과 역사뿐 아니라 대중문화・스포츠・예술・철학・과학・종교 등 인간의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드러나는 우아함의 차원과 속성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우아함은 겉치레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적인 습관들을 통해 얻어지는 일상의 처신 방식임을 강조하며 

 

우리 삶에 지금 필요한 덕목으로 “우아함”을 제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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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상황에서 부르는 생의 노래 | 소설 읽기 2017-08-30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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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칼의 노래

김훈 저
문학동네 | 2014년 01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전쟁터에서 삶의 감각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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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상황에서 부르는 생()의 노래

- 김훈, 󰡔칼의 노래󰡕

 

 

 

김훈의 역사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는 고통스런 상황에 처해 있다. 전쟁 속의 인간이라는 말로 정리되는 인물들의 비참한 상황은 역사라는 보편적 공간에서 개별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예시한다. 전쟁이라는 상황은 적과 적이라는 보편자만 존재할 뿐, 개별적인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별적인 인간이 존재하는 순간, 전쟁은 살육의 공간이 되어 전쟁의 주체들을 윤리적인 딜레마에 빠뜨린다. 인간의 존재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전쟁의 공간에서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보편적인 과 개별적인 존재사이에서 내적인 고민을 거듭한다. 왜군 특공대에게 죽은 셋째 아들 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죽어가는 젊은 왜군들이 개별적인 존재들로 겹쳐질 때,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지점은 소멸해 버린다.

 

소설 곳곳에서 이순신은 적의의 근본을 알 수 없다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토로한다. 적과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적을 적으로 느낄 따름이다. 포로가 된, 젊은 왜군들의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적의를 느끼면서도 이순신은 여전히 적의의 근원을 헤아릴 수 없었다라는 의문을 떨쳐내지 못한다. 운명으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적대적인 관계는 아군과 적군의 관계가 개별적인 존재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새로이 정립될 수 있는 관계임을 암시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순신에게 은 왜군뿐만이 아니다. ()과 의()라는 헛것에 기대어 쓸모없는 언어를 낭비하며 자신을 심문하는 위관들도 적일 것이고, 장려한 언어 수사와 울음으로 전쟁을 수행하며 이순신의 목을 죄는 임금 역시 적일 것이다. 적군과 아군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이순신의 칼의 노래는 헤쳐 나갈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한 존재의 운명을 대변한다 하겠다.

 

이순신은 세상은 칼로써 막아낼 수 없고 칼로써 헤쳐 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칼이 닿지 않고 화살이 미치지 못하는 저쪽에서, 세상은 뒤채이며 무너져갔고, 죽어서 돌아서는 자들 앞에서 칼은 속수무책이었다"라고 고백한다. 보이는 적은 칼로 베면 되지만 칼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혀 막아낼 수 없다. 이순신의 고독은 여기서 연유한다. 헛것인 충과 효로 지켜지는 조선의 사직(구조)은 이순신이라는 개별적인 영웅보다는 사직의 구조를 지켜내는 충의 화신으로서의 정치적 상징물을 원한다. 그래서 적이 물러가지 않을 때 이순신은 정치적인 상징물로 살아남을 수 있지만, 적이 물러갈 때 이순신은 임금의 자리를 넘보는 인물로 낙인찍혀 살아남을 수 없다. 삶과 죽음의 자리가 적이 있음으로써 생겨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강한 신하를 두려워하는 임금의 칼에 죽기 싫다는 이순신의 내면심리는 전쟁터에서 죽음의 장소를 찾으려는 행동으로 현실화된다. 전쟁은 그에게 이기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잘 죽기위한 전쟁으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적과의 화친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말아야 한다. 화친이 이루어진다면 전쟁은 끝날 것이고, 그러면 그가 죽어야 할 전쟁의 공간 역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철수하는 왜군을 상대로 벌이는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노량해전)는 전쟁에서 반드시 죽어야 하는 존재가 펼쳐내는 마지막삶의 몸짓으로 표출된다. 죽어야 나라의 충신으로 영원히 살 수 있는 정치적 상징물로서의 운명을,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죽음으로써 씻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순신은 임금과 적 사이에 외롭게 낀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알고 있다. 충과 효로 구성된 사직의 구조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자의 비극적 운명이 죽음의 허무의식과 맞물려 김훈 역사소설의 독특한 소설문법을 생성하고 있다. 허무의식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론의 하나이다. 세계와의 불화를 기반으로 전개되는 허무의식은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인식적 힘을 제공한다. 분석적인 사유에 능한 김훈의 사고구조를 생각할 때, 세상을 허무의식의 관점으로 파악하는 그의 역사소설은 현실의 냉혹한 구조를 그 무엇보다 분명하게 드러낸다. 전쟁의 상황이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역사소설에서, 전쟁은 개인이 휘말리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깊숙이 개입해야 하는 비극적 공간으로 나타난다 하겠다.

 

극한적인 상황에 처한 존재들의 도저한 허무의식의 이면에는 삶에 대한 예민한 감각들이 살아 있다. 무의미하게 전개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도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살아가야 한다. 산다는 것은 곧 감각적으로 산다는 것이 아닌가. 늙어 죽는 사람들의 뒤편에서 젊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감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죽음의 향연이 펼쳐지는 전쟁터에서도 사람들의 삶의 감각은 변함없이 살아 움직인다. 김훈의 역사소설은 죽음의 공간에서 감각의 향연을 벌인다.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여진의 날비린내를 느끼며 평화로움에 빠져드는 이순신의 몸의 감각을 생각해 보라. 감각은 죽음의 저편에서 불어오는 생의 희열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러한 감각이 피로 낭자한 전쟁터를 꿰뚫는 길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칼로써 적을 치고, 죽을 자리를 찾아야 하는 그에게 평화로움의 감각은 현실화될 수 없는 꿈으로만 비쳐지는 셈이다.

 

그럼에도 꿈이되 결코 꿈으로만 남을 수 없는 점에 감각의 매력이 존재한다. 감각을 향한 김훈의 남다른 애착은 감각만큼 죽음의 세계를 들뜨게 하는 요소는 없기 때문이다. 비장한 마음으로 죽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이순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한 여인(여진)의 냄새이고, 기억 속에 아련하게 남아 있는 아들 면의 어린 시절 젖냄새이다.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감각의 세계에서 이순신은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그 기억으로 오랜만에 행복한 느낌에 젖어든다. 죽음으로 가는 길을 끝없이 지연하게 하는 감각의 세계는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사람의 표지로 나타난다. 김훈은 이런 감각의 묘사를 통해 세련된 허무주의에 들뜬 독자들을 더 깊은 허무주의의 세계로 인도한다. 죽음 저편에서 피어오르는 생의 감각을 목도하는 순간, 독자들은 역설적으로 죽음의 감각에 더 깊이 경도된다.

 

 

그날 밤, 나는 두 번째로 여진을 품었다. 그 여자의 몸은 더러웠다. 그 여자는 쉽게 수줍음에서 벗어났다. 다리 사이에서 지독한 젓국 냄새가 퍼져나왔다. 그 여자의 입 속은 달았고, 그 여자의 몸 속은 평화로웠다. 그 평화에는 다급한 갈증이 섞여 있었다.

나는 내 몸을 그 여자의 몸 속으로 밀어넣듯이, 그렇게 칼날을 여자의 몸 속으로 밀어넣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이 여자를 안는 힘으로 세상의 적을 맞을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몸을 떨었다.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때 나는 무인이 아니었다.

 

 

감각은 살아 있는 상태를 열망한다. 여자의 다리 사이에서 퍼져 나오는 지독한 젓국 냄새는 그것이 살아 있는 상태를 지향하고 있기에 이순신의 몸속으로 평화롭게 섞여든다. 전쟁터에서 죽을 자리를 찾는 존재가 이 이상의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인용문 에 드러나는 바, 이순신은 여자를 안는 평화로운 힘으로 세상의 적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권력(폭력)이다. 폭력의 힘으로 밀고 오는 적들과의 싸움은 여인을 안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사는 반()-감각(생명)의 상황이 바로 전쟁의 상황이다.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감각의 세계를 향한 열망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터와 같은 비극적 세계를 오롯하게 부각시킨다. 그곳에서 이순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억으로 감싸여져 있는 감각의 세계는 현실과 동떨어진 채 이순신의 관념 속에서 끊임없이 부풀려지고 있다. 감각으로 묘사되는 미학적 세상의 아름다움(소설의 끝은 기억 속의 감각을 이순신이 회상하는 것으로 끝난다)은 이순신의 현실적 삶을 허무적으로 채색하는 근본적인 바탕으로 작용하는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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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임 시집 [도요새 요리] | 시집 읽기 2017-08-30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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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도요새 요리

최광임 저
bookin(북인) | 2013년 12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인어의 전설을 가슴에 품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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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계의 내력, 눈물의 감각

 

 

최광임의 두 번째 시집인 ??도요새 요리??(북인, 2013)에는 인어의 전설을 가슴에 품고 사는 여인이 나온다. 인어는 내 생의 근간”(?인어?)을 형성한다. 내 생의 뿌리에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는 전설 속의 인어를 현실로 불러냄으로써 최광임은 그녀만의 독특한 감각의 세계를 구축한다. “여자 남자 구분 없이 그곳에서는 모두 물이고 그녀이다”. 그곳에서는 물이 흐르고, 그녀 또한 흐른다. 정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대처로 나온인어는 어둠에 수몰된 모계의 내력이 무던해질 즈음다시 물이 있는 모계의 세계로 돌아온다. 모계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감각이다. 생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는 한 인어는 수몰된 모계의 내력 속으로 제 몸을 들이밀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어의 운명이라면, 최광임 시는 정확히 이러한 인어의 운명을 현실(물론 시적 현실이다)로 불러내는 어려운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표제작인 ?도요새 요리?를 보도록 하자. “세상은 온통 흐르는 것들이다라는 의미심장한 시구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시인은 흐르고 흐르던 유목민의 삶에 시안(詩眼)을 집중하고 있다. 유목민은 무엇보다 직선의 시간을 거부한다. 우비가 내리면 푸른 초원을 따라 오래도록 그들은 길을 걷는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꼭이 이유가 있을 필요는 없다. 가야 하기 때문에 가는 것이고,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자연이라는 말의 의미처럼, 그들은 스스로 그러하기에움직인다. 이성-논리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리에 자연이 있다면, 최광임은 이러한 자연의 속성을 그녀 특유의 감각으로 표현한다. 이를테면 정갈하게 씻은 부드러운 내 목을 기억하는 여인은 한편으로 맹렬하나 밀림을 내달리던 치타나 기린의 슬픔을 떠올리고 있다. 자기에게 집중되는 시선이 자기 밖으로, 다시 말해 타자의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나와 타자 사이에는 어떤 내밀함이 생성되기 시작한다. 오랜 유목 생활을 통해 터득한 세상을 향한 더듬이는 이러한 내밀함의 근원으로 작용하고 있는바, 최광임은 인류의 감각에 드리워진 내밀성의 미학을 포착함으로써 인류의 탄생 이래 변함없이 진행되어 온 감각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요리의 감각은 저명한 산술가의 계산과는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계산하는 자의 이성 너머에 요리를 하는 여인의 감각이 있다. 그녀는 초원 아버지로부터 배워온 양념을 골고루 넣는 대신/ 전설에도 드문 진실이란 양념을 즐겨 사용한다”. 아버지의 너머에 어머니가 있고, 현실의 너머에 전설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어머니-전설이 여전히 지금 이곳의 진실을 드러내는 시적 단서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시의 말미에서 최광임은 오랜 유목에 지친 도요새 무리는/ 진실의 처마에 깃들기 위해 오늘도 한 대륙을 횡단한다고 쓰고 있다. 죽음마저도 넘어서는 도요새의 이러한 횡단에는 전설의 세계를 뛰어넘는 어떤 운명이 존재한다. 인간의 눈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곳에 도요새의 운명이 있다. 도요새의 전설은 도요새의 현실이다. 현실의 너머에 전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설이 곧 현실이라는 아이러니를 최광임은 도요새의 거대한 상상력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내 앞에 앉은 그대가 죽은 누이 이야기를 할 때

당신에게서 나 태어나기 전 죽었다는 오라비를 보네

당신 부모 당신 낳고 내 부모 나를 낳았는데

나는 왜 당신이 아플까 아파서 가슴 먹먹해지나

당신의 눈빛은 왜 그리 붉어지나

 

당신과 나 사랑보다 먼저,

깜깜한 저 외로움으로 만난 것인데

 

어쩌면 우리 알록달록 어느 화엄에 들었을 때, 이미

오늘에 당도하도록 예견된 것은 아니었을지 생각하는 것이네

- ?신 재망매가? 전문

 

 

전설은 현실 속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아니, 무한하게 반복된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다. 그대가 죽은 누이의 이야기를 하자마자 시인은 곧바로 나 태어나기 전 죽었다는 오라비를생각한다. 죽은 누이와 죽은 오라비가 하나로 합쳐지면, 그들이 살아낸 시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누군가의 시간이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아픈 시간이 있는 것이라는 시인의 말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당신의 아픔에 가슴 먹먹해하는 그 마음이 있어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이라면, 아픈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이 세상은 시인의 말마따나 우리 알록달록 어느 화엄에 들었을 때의 그 세상인지도 모른다. 아프다는 건 말 그대로 감각이다.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감각의 세계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상황으로 뒤바뀐다. 이성의 눈으로 눈물의 배후”(?눈물의 배후?)를 탐색하긴 힘들지만, 감각의 눈으로는 눈물의 배후를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다. 눈물은 감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떨림에 대하여?를 참조한다면, 눈물은 나이 마흔이 되어도 가라앉지 않는 멀미와 같은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울리는 떨림과 같은 것이다. 그 떨림이 있어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기는 고목일수록/ 어린 잎들 틔워내는 혼신의 힘을 발산한다. 어떻게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생에 대한 절실한 의지가 바로 울음의 배후라는 이 엄청난 진실 앞에 시인은 맨몸으로 서 있는 것이다. “노래가 아닌 구업口業”(?휴일, 붉은 혹은 검은?)의 이름으로 불리는 그녀의 노래는 이렇게 생의 아픔이라는 감각만으로 하나의 시적 세계를 이룬다. 생의 근간에는 고통이 있고 감각이 있다. 그 감각이 시를 낳는다. 최광임의 시에 감각이 넘쳐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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