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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토피아

지그문트 바우만 저/정일준 역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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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성 이론의 대가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작!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운 시대
다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바우만의 마지막 성찰과 통찰

난민 문제, 경제적 격차, 인종차별, 정치에 대한 불신, 우파 포퓰리즘의 등장 등은 우리 사회가 세계와 함께 앓고 있는 병이다. 『레트로토피아』는 모두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해 버린 현장에서, 두 차례의 전체주의를 온몸으로 겪어낸 노학자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띄우는 희망의 편지다.


책 속으로


‘진보’라는 이념을 삶의 개선 추구의 사유화 및 개별화에 팔아넘긴 것은 권력자들이었으며 대다수 국민들은 이를 해방이라고 받아들였다. 해방이란 사회복지사업과 국가보호라는 대가를 치르고 복종과 규율이라는 엄격한 요구에서 벗어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계속 늘고 있는 숱한 사안들에서 이런 해방의 희비가 교차한다는 사실이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서문-향수鄕愁의 시대] 중에서, p.29

현대 국가들이 모방하려고 분투하는 목표인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무겁고 거대해 움직이지 않는 본체가 땅에 굳게 고정된 형태로 그려졌다. 본질적으로,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반反이동성’ 장치였던 것이다. ‘치고 빠지기’가 가능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도록 설치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구멍투성이에 쉽게 침투 가능한 영토의 경계를 지닌 리바이어던이란 조화되지 않는 용어 상의 모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국경의 다공성과 침투성은 단지 특정 지역과 파견단의 일탈이 아니라, 정치의 영구적인영토성과 결부된 권력의 세계화가 꾸준히 진행되는 과정에서 잉태된 새로운 세계 (무)질서의 규범이나 마찬가지다.
[1-홉스로의 회귀?] 중에서, pp.56~57

미래라는 타국을 방문해 탐험하기를 고대하는 관광객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이제는 우리 중에서 가장 낙관적이고 모험심이 강한 (그리고 일부 사람들에 따르면, 가장 걱정이 없고 태평한) 사람들로 국한되어버렸다. 연달아 살아남은 현재보다 훨씬 즐거운 경험으로 가득 찬 미래를 발견하기 바라며 서둘러 미래로 떠나는 사람들의 수는 훨씬 더 빨리 줄어들 것 같다. 그 결과 공상과학 영화와 소설이 공포영화와 괴기 소설로 분류되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있다.
[2-부족으로의 회귀] 중에서, pp.106~107

브레흐만은 우리에게 ‘복지국가’식 사고방식의 유산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라고 촉구한다. 이 사고방식이 ‘일하는 사회’의 시대에 전개되었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오늘날에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안전감과 자신감을 불어넣어야 할 복지국가는 의심과 수치심을 안겨주는 제도로 변질됐다.”(p. 69) 덧붙이건대, 타성에 젖어 여전히 ‘복지국가’라고 불리는 방식은 부를 재분배하지 않고, 이제 ‘생활보호를 받는 처지’라는 조건을 사회적 오명으로 낙인찍는 일을 맡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적절한 조치가 필요했던 비통한 상황에서 행해진 사회불평등을 묵인하는 데 (그리고 가중시키는 데) 한몫을 했다는 모든 죄책감을 공공의 양심에서 덜어냈다.
[3-불평등으로의 회귀] 중에서, pp.180~181

우리 중 일부는 다가올 시대가 새롭고 더 전망 좋은 시작이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부터 인내심을 얻는다. 하지만 좌절감에 중독된 희망으로 인해 환상이 깨지면서, 격분한 다른 사람들은 과거로의 회귀 움직임에 열망을 투자한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미래든 과거든) 어느 한쪽 방향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작지만?날마다?만족감을 주는 도구를 사용해 감당할 수 없는 예측을 무력화시킬 방법을 찾느라 바빠 보인다.
[4-자궁으로의 회귀] 중에서, pp.194~195

홉스로든, 부족으로든, 불평등으로든, 아니면 자궁으로든, ‘회귀하려는’ 흐름을 노련하게 힘도 들이지 않고 빠른 속도로 막아낼 수 있는 지름길은 없다. ……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지구의 인간 거주자들은 양자택일의 상황에 처해 있다. 우리는 서로 손을 맞잡을 것인지, 아니면 같이 공동묘지로 갈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맺음말-변화를 기대하며] 중에서, pp.256~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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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줄다리기

신지영 저
21세기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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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한 칼끝으로 정조준한 과녁, ‘차별과 비민주적 표현이 가득한 우리 언어’ 

“우리의 언어 속에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유지?확대?재생산하는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그런 언어들은 대단히 위험하고 폭력적이다.” 


강렬한 메시지로 전하는 우리 언어에 대한 ‘서릿발 비판’

이 책의 메시지는 강렬하다. 차별과 비민주적 표현을 담은 단어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득하다고 강하게 일침을 놓는다. 그러면서 언어 표현 속에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가 은연중 우리의 생각과 관점을 지배한다고 지적한다. 이 지점이 저자가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계기가 된다. 민주적이고 아름다운 가치를 담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의 이데올로기를 품고 있는 언어는 매우 위험하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낡고 차별적인’ 뜻이 강한 언어임에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일상 언어로 쓰이고 있는 우리 현실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 


오랜 기간 대통령 뒤에 붙었던 ‘각하’라는 경칭은 권위주의 시대의 상징 같았던 단어다. 그런데 이 단어는 사실 봉건 신분사회의 귀족 호칭 중 하나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고 천명한 헌법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단어다. 각하가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봉건 시대처럼 신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자는 반민주적 가치이다. 저자는 ‘대통령’ 이라는 단어 역시 헌법이 명시하는 민주적 가치를 전혀 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크게 거느리고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는 이 언어 표현은 ‘국민을 주권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과거 우리 사회에서 봉건군주제의 왕처럼 대통령이 국민 위에 군림해도 된다는 인식을 사실상 강제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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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외, 『이효석문학상 수장작품집 2018』 | 소설 읽기 2018-10-29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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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18

권여선 등저
생각정거장 | 2018년 10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우리가 모르는 타자의 영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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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은 언제나 모르는 영역을 남겨둔다

- 권여선 외, 『이효석문학상 수장작품집 2018』

 

 

 

사람들 누구에게나 모르는 영역이 있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사랑할수록 모르는 영역은 더 많아질지도 모른다. 상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정작 상대를 모르는 역설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18』(생각정거장, 2018)을 읽으며 타인들을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낀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더 많은 모르는 영역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상 수상작인 권여선의 모르는 영역은 아버지와 딸 사이에 드리워진 미묘한 관계를 들려준다. 8년 전에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두 사람 관계는 멀어진다. 딸은 딸대로 일에 빠져 있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쉬움을 가슴에 묻은 채 살고 있다. 어떻게 하면 두 사람은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을까? 아버지가 딸이 일하는 곳을 찾는다. 서로 만나지 않으면 갈등은 풀리지 않는다. 소설이란 결국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핵심으로 다루는 이야기인 셈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낮달의 이미지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낮달은 말 그대로 낮에 뜬 달이다. 작가는 해는 늘 낮달만 만나고, 그러니 해 입장에서 밤에 뜨는 달은 영영 모르는 거지(43)라고 말한다. 해가 지면 달이 뜬다. 달이 지면 해가 뜬다. 밤에 뜬 달을 해는 볼 수 없다. 해는 오로지 낮달만 볼 수 있다. 해에게는 밤에 뜬 낮달은 모르는 영역이란 얘기다. 아버지와 딸은 모르는 영역을 자꾸만 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먹다 남은 걸 절대로 먹지 않는 아버지를 위해 딸은 밤에 버스를 타고 과일과 치즈를 사온다. 그것을 모르는 아버지는 딸이 자신을 외면했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영역을 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멀게 하는 원인은 언제나 사소하다. 터놓고 말을 하면 의외로 쉽게 풀릴 일이 마음을 닫아 꼬인 실타래가 되는 경우가 많다. ‘모르는 영역을 스스로 판단하는 습관 때문이다. 자기 마음도 모르는 사람이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 알까?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 관계는 많이 달라질 수 있다. ‘모르는 영역을 인정하면 사람들은 더욱 가까워질 거라는 역설.

 

김봉곤은 컬리지 포크에서 동성애에 얽힌 사랑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이성애자에게 동성애는 모르는 영역이다. 동성애자에게도 이성애가 모르는 영역인 건 마찬가지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남자가 남자에게 느끼는 사랑과 남자(여자)가 여자(남자)에게 느끼는 사랑을 구별하는 게 얼마나 보잘것없는 일인지 알게 된다. 이성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을 혐오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이성애가 정상처럼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은 마녀 심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퀴어 축제를 무슨 전염병을 퍼뜨리는 행사로 낙인찍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이들에게 동성애는 모르는 영역이 아니라 박멸해야 할 영역일 뿐이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명감으로 무장해서 병균들을 박멸하는 길로 나선다. 무슨 사명감일까? 종족 보존에 대한 사명감일까?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폭력임을 인정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그들은 반복한다. 다수라는 이유로 소수를 박해해도 된다는 사회법칙이라도 있는 걸까?

 

작가는 이 소설에서 동성애자인 롤랑 바르트를 거론하고 있다. 내게는 바르트가 쓴 글의 대부분이 자신의 존재, 동성애자인 자신의 존재 증명을 뒷받침하는 작업으로 보였다. 자기를 알아봐달라는 상냥하고 끝없는 시그널.”(154)에 나타나는 대로, 작가는 바르트의 글쓰기에서 동성애라는 자기 정체성을 내보이는 존재를 발견한다. 은유의 숲으로 숨은 바르트와 달리 작가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글쓰기로 자기를 드러내려고 한다. 그래서일 것이다. 작가는 남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성애 장면을 가감 없이 묘사한다. 두 사람이 느끼는 감정의 결 또한 수사법 뒤로 숨지 않고 분명하게 표현한다. 작품 속 주인공 또한 레이어를 걷어낸 글을 쓰려고 한다. 수사법 뒤로 숨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롤랑 바르트가 수사법 뒤에 숨어 자기 정체성을 은근히 드러내는 방법을 취했다면, 작가는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내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그게 모르는 영역을 드러내는 작가의 방식이다.

 

김희선이 지은 공의 기원은 축구공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이 소설에서 공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다. 하나의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소설에 대한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작가는 사람들이 들은 이야기를 다양하게 전달한다. 187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 이야기는 2010년대를 넘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축구공 하나로 작가는 사람들의 꺼지지 않는 욕망을 요령 있게 표현한다. 공의 기원에는 폭력이 있고, 상상이 있다. 사람들은 상상으로 폭력을 가리는 한편으로, 이야기로 그 폭력을 세상에 알린다. 다양하게 갈라지는 이야기들에는 진실과 거짓이 동시에 들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가 모르는 영역을 남기기 마련이다. ‘모르는 영역이 없이 어떻게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작가는 모르는 영역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이야기를 만든다.

 

공의 기원을 찾는 이야기는 그러므로 모르는 영역을 상상하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필연 같은 우연과 우연 같은 필연이 번갈아가며 일어난다. 우연적으로 벌어진 일에서 누군가는 필연을 발견하고,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에서 누군가는 우연을 발견한다. 증조부와 할아버지, 아버지로 이어지는 일이 아들 대에 와서는 우연이 되기도 하고, 필연이 되기도 한다. 일어나는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언제나 의미는 달라지는 법이다. 이리 보면 작가는 모르는 영역과 조우하는 과정에서 소설=이야기를 상상하는지도 모른다. 상상이란 게 현실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게 아닌가. ‘공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작가는 기원이 없는 사물(축구공)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사물의 기원을 따지는 일은 사물이 지닌 단 하나의 의미를 따지는 일만큼이나 부질없는 일이다. 사물은 어떤 경우에도 모르는 영역을 그 안에 지니고 있다. 사람들이 소설을 쓰고, 읽는 까닭은 무엇보다 이 영역으로 들어가고 싶은 호기심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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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요코, 『왜 전쟁까지』 | 사회사상 2018-10-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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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왜 전쟁까지

가토 요코 저/양지연 역
사계절 | 2018년 09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일본에 전쟁을 일으킨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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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일어나는 정치 논리

- 가토 요코, 『왜 전쟁까지』

 

 

 

2015년은 대한민국이 일본에서 해방된 지 70주년이 된 해이다. 우리는 이 해를 해방과 광복으로 기념하지만, 일본은 이 해를 전쟁 패배로 기억한다. 2015년을 대하는 양국 국민들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 가토 요코는 『왜 전쟁까지』(사계절, 2018)에서 국가 혹은 개인이 과거 역사를 지금 시점에서 어떻게 호명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2015815일 전국전몰자추모식에서 일본 천황은 그 전과는 다른 내용의 추모사를 낭독한다. 지은이는 평화의 존속을 염원하는 국민의 의식과거의 전쟁을 깊이 반성한다는 두 문구에 주목한다. 이전에는 쓰지 않았던 문구를 일본 국가를 상징하는 천황이 공식적으로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로 평화의 존속을 원하고, 과거의 전쟁을 반성하기 위해 이런 문구를 사용한 것일까? ‘군 위안부문제에 대응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를 보면, 천황이 진심으로 이런 말들을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 겉으로는 평화를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고나 할까?

 

2015814일 일본 내각은 전후 70년의 소회를 담은 담화를 발표했다. 지은이는 담화문에서 막부 말기의 구미 열강과 일본의 차이를 기술력으로 정리한 점에 주목한다. 구미 열강은 압도적인 기술을 무기로 자유무역주의를 내세우며 일본에 개국을 강요했다. 군사력이 뒤처지는 아시아 국가들은 어쩔 수 없이 개국을 해야 했다는 식으로 역사를 파악한 것이다. 지은이는 일본이 경제적인 측면에서 서구 열강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밝혀낸다. 1937년을 기점으로 일본은 수출액이 영국을 능가한다. 영국과 프랑스가 자국과 식민지의 경제를 블록화하고 자국의 이익만을 고려하며 타국을 따돌린 결과 일본이 손해를 입었고, 그래서 일본은 협력의 길에서 이탈해 국제사회에 등을 돌렸다는 주장(49)이 허상이라는 게 드러난 것이다. 요컨대 일본 내각은 과거 역사를 자기 식으로 해석해서 일본의 전쟁 참여를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으로 기록한다. 일본 국민의 반이 담화문 내용을 긍정적으로 판단했다. 일본 내각의 역사 해석이 일본 국민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라고 봐도 좋은 셈이다.

 

일본이 자의적으로 전쟁을 선택한 증거는 만주사변을 조사한 리튼 보고서에서도 명확히 나타난다. 국제연맹이사회가 1931918일에 일어난 만주사변의 사실관계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한 조사위원회를 일본에서는 리튼 조사단이라고 부른다. 이 조사단은 193210월에 국제연맹이사회에 보고서를 제출하는데, 이것이 리튼 보고서이다. 만주사변은 일본이 만주를 소련의 육군력과 미국의 해군력에 대항하는 거점으로 삼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다. 리튼은 보고서에서 일본이 세계의 길을 벗어났다고 주장한다. 리튼은 만주에 대한 일본의 권익은 인정하면서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행위는 인정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세계의 길은 국제협조의 길을 가리킨다. 만주사변은 일본과 중국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치고, 이는 소련을 자극하여 동아시아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일본군의 행동은 자위로 인정할 수 없다. 만주국은 지역민의 자발적인 욕구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라고 일본을 비판하면서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의 태도를 침략 행위로 정의하지 않은 부분에서 리튼의 정치적 노련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110)라고 정리한다.

 

국제연맹은 연맹에 가입한 국가들의 정치논리를 무시할 수 없다. 일본의 만주 침략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도 리튼은 이를 침략 행위로는 규정하지 않는다. 리튼은 채텀하우스 강연에서 일본은 분명 만주에서 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고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보증하며 조약과 의무를 이행할 만한 정부 설립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111)라고 인정한다. 만주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인정하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일본이 리튼 보고서에 근거한 협상안을 받아들여 세계의 길을 취했다면 이후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일본은 세계의 길을 버리고 세계를 정복하는 길로 나섰다. 지은이는 이를 트버스키가 말한 확실성 효과Certainty Effect’로 분석한다. 일본은 만주를 손아귀에 넣으면 소련을 제어하는 확실한 힘을 얻는다. ‘세계의 길을 받아들이면 얻게 되는 이익보다 만주를 정복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더욱 확실하다고 일본은 판단한 것이다. 국제관계가 협력이 아니라 이익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걸 우리는 여기서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은 세계의 길이라는 막연한 미래보다는 만주 획득이라는 확실한 현실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지은이는 독일-일본-이탈리아가 맺은 삼국동맹에도 이와 동일한 원리를 적용한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인 1940년이 되어서야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을 맺는다. 그리고 6개월 후 미국과 따로 협상을 시작한다. 미국은 표면적으로 중립국 입장을 취했지만 전체주의에는 분명히 반대하는 입장을 내보였다.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경우 영국과 프랑스 등으로 이루어진 연합국이 독일을 이기기는 힘들었다.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어 미국을 견제하려고 했다.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을 견제하면 전쟁에서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 또한 독일에 편승하여 대동아 지역을 식민지로 삼는 꿈을 꾸었다. 국가 간 동맹은 언제나 이익을 따라 움직이기 마련이다. 이것은 일본과 미국이 협상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은 미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 했고, 미국은 일본을 통해 공산주의를 견제하는 힘을 얻으려고 했다. 전체주의든, 전체주의에 반하는 세력이든 자국 이익을 따라 움직인 점에서는 다르지 않은 것이다.

    

독일과 영국,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시작한 배경에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독일과 영국이 그렇게까지 대립으로 치달았던 이유는 유럽의 질서를 둘러싼 규칙, 자원 분배 규칙, 그리고 그런 규칙을 누가 만들 것인가를 둘러싼 경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의회제민주주의로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파시즘과 전체주의로 할 것인가라는 식으로요. 파시즘은 국내외 문제에 관한 국민의 위기감을 선동하면서 결정에 시간이 걸리는 의회의 권한 없애고 일당독재, 테러, 폭력 행사를 통한 공포의 지배로 국가를 운영하는 시스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전 일본과 미국이 바라던 사회의 기본질서에 차이가 있었음은 미일교섭양해안을 둘러싼 소통 과정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국가이자 세계 최강의 자본주의국가였기 때문에 누구라도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자유무역을 표방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길이었습니다. 일본은 근대에 들어와 만들어진 천황제를 국체로 하는 한편 뒤처지기는 했지만 입헌국가로 나아가 아시아에서는 가장 강한 자본주의국가, 식민지 제국이 되었습니다. 식민지와는 폐쇄적인 무역 관계를 구축하는 한편, 자원의 수입과 공업제품의 수출이라는 점에서는 개방된 자유주의 경제규칙을 만끽한 복잡한 양면성을 지닌 국가였습니다. (386~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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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총기 난사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 ‘나’,
참사 1주기 다음 날, 그 하루 동안의 여정


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 원작자이자 『합체』『맨홀』『양춘단 대학 탐방기』『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등으로 한국 문단에 독보적 발자취를 남긴 박지리 작가의 마지막 작품 『번외』가 사계절1318문고 115번으로 나왔다.

이 작품은 고교 총기 난사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인 주인공 소년이 참사 1주기 추도식 다음 날, 학교를 벗어나 하루 동안 배회하는 이야기이다. 참사 이후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모든 것에서 예외 취급을 받는 ‘나’는 삶 자체가 번외가 된 기분이다. 주인공이 무작정 길을 나서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낯선 이들이지만 이들은 내가 입은 교복을 알아보고 참사에 대해, 추도식에 대해 말한다. 나는 이들이 보내는 관심이 버겁기도 하고, 혼자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과 함께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 K와 공범 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삶과 죽음의 욕망이 교차하는 소년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심리는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가 불분명한 속에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총기 난사 사건과 K에 대한 기억을 환기한다. 삶이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는 소년의 독백을 통해 우리는 인간 존재의 모순을 발견한다. 동시에 불가해한 인간 존재에 대한 탁월한 서사를 끌어낸 박지리 작가의 천재성에 또 한번 놀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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