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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설아 소설집 『고양이 대왕』 | 소설 읽기 2019-07-30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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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고양이 대왕

김설아 저
작가정신 | 2019년 07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고양이 대왕처럼 제멋대로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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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대왕처럼 제멋대로 살아라!

- 김설아 소설집 『고양이 대왕』

 

 

 

김설아 소설은 현실과 환상을 오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작가는 현실 속에서 펼쳐지는 환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현실 공간과 환상 공간을 나눈다면, 김설아 소설에는 현실 공간과 환상 공간이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현실이 환상이고 환상이 현실이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작가는 현실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묘사한다. 「외계에서 온 병아리」를 먼저 보자. 제목에 나타나는 대로 이 소설은 외계에서 온 병아리에 심취된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외계라고 했지만, 사실 병아리는 인간이 만든 기계인형이다. 외계는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다르지 않은 셈이다. 사건은 파고다 공원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한 노인에게서 시작된다. 일몰이 다가오고 있지만, 노인을 반겨줄 곳은 아무데도 없다. 눈물이 고인 눈으로 금색으로 일렁이는 빛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불쌍한 할아버지.”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다. 환청이라도 들은 것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노인의 눈에 조그만 물체 하나가 보인다. 물체는 노인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병아리이다. 말하는 병아리라니? 병아리는 노인이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다. 노인은 지금 말할 친구가 필요하다. 한 끼 밥을 같이 먹어줄 친구가 필요하다. 병아리는 노인에게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말한다. 노인은 그 말에 감동을 받아 길바닥에 모로 누워 병아리와 눈을 맞추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은 너밖에 없구나(11)라는 말에 병아리를 대하는 노인의 진심이 담겨 있다. 병아리는 시름에 빠진 청년에게도 나타나고, 토익 점수가 오르지 않아 고민하는 처녀 앞에도 나타난다. 병아리는 노인을 대하는 것처럼, 상대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접근한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은 사람들은 병아리의 위로 섞인 말에 마음을 활짝 연다.

 

노인처럼 모로 누워 병아리와 대화를 하는 사람들로 종로 일대는 교통이 마비된다. 신기한 일이 벌어지니 매스컴이 가만있을 리 없다. 매스컴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보도하지 않고, 그저 사람들과 병아리가 대화를 하는 신기한 상황에만 보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학자들이 매스컴에 출연하여 이런저런 논리를 펴가며 이 상황을 진단한다. 하지만 뾰족한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선전하기에 바쁘다. 진행자는 상황과는 상관없이 지식만 늘어놓는 지식인들을 향해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만, 지금의 현상과 관련이 있습니까?”(20)라는 질문을 반복한다. 지식으로는 이 상황을 타개할 대책을 내놓을 수 없다. 경찰이 나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애꿎은 병아리 장사들만 잡아들인다. 하긴 달리 방법도 없다. 이 병아리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아야 대처 방법을 찾을 것 아닌가?

 

결국은 누리꾼들이 병아리의 실체를 알아낸다. 병아리는 생명이 아니라 기계였다. 병아리가 기계라면 만든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연구자들의 말이 심상찮다. 지금 기술로는 이런 병아리를 만들 수 없단다. 그렇다면 이 병아리는 어디서 온 것인가? 병아리 공급이 갑자기 끊기면서 병아리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인터넷 게시판이 도배된다. 가격이 수천 배 뛰어도 병아리를 구할 수 없자 사람들은 점점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그런 와중에 한 중학생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병아리에 빠진 중학생이 걱정돼 어머니가 병아리를 팔아치우자, 화가 난 중학생이 어머니를 살해한 것이다. 중학생은 병아리형 외톨이였다. 오로지 병아리와 대화를 하는 외톨이. 병아리 문제로 살해까지 일어났으니 이제는 뚜렷한 대책이 필요하다. 긴급 조직된 병아리 희생자 모임에서 대책을 발표한다. 병아리를 떼어놓는 것은 힘들다는 건 이미 밝혀졌다. 그럼 어떻게 하나? 모임에서는 강도가 약한 무언가로 그들을 사로잡기로 한다. 강한 마약대신 그보다 약한 마약을 투여하는 식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 병아리 중독을 약화시켜 나갔지만, 충직한 중독자들은 여전히 병아리에 집착했다. 이들은 왜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작가는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전에는 게으름이라곤 한 번 피워 본 적 없이 충실하게 살았던 이들이었다.”(29)라고 쓰고 있다. 개인의 행복보다는 사회적 성공을 위해 열심히 산 사람들일수록 병아리에 대한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는 얘기다. 드디어 공식적인 첫 사상자가 나왔다. 파고다 공원에서 병아리를 처음 만났던 그 노인이다. 노인은 만족한 미소를 띤 채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다. 나머지 중독자들도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인간관계는 이제 지쳤다는 말을 남긴 채 병아리를 보며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다. 가족이나 친구에게서 느끼지 못한 마음을 사람들은 기계인 병아리를 통해 느낀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는 황폐한 장소라는 것을 에둘러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표제작인 「고양이대왕」은 고양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행복을 느끼는 한 가장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은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 회장 집에 가족이 초대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회장 집에 초대를 받은 사원들은 정신이 이상해져서 곧바로 회사에서 내쫓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회장 초대는 가족의 생사 줄을 준 공포의 사건으로 묘사되는 셈이다. 이곳에서 회장과 카드놀이를 한 아버지는 그 벌칙으로 식탁 위에 놓인 모자 안에 손을 넣게 된다. 모자에 손을 넣자마자 아버지가 비명을 지른다. 모자 안에 들어 있던 흰 고양이 한 마리가 아버지 손을 물어뜯은 것이다. 이 일이 벌어진 후로 아버지 행동이 이상해진다. 사람으로 행동하지 않고 고양이처럼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이면서 고양이처럼 행동하는 직원을 어느 회사에서 고용할까? 회사를 나와 집에서 지내다가 발정이 난 아버지는 어머니는 버려두고 흰 고양이와 바람이 나서 가출을 한다. 일주일이 지나 아버지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불룩하던 배가 쏙 들어가 예전보다 훨씬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그날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밤만 되면 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면 감쪽같이 조용해지곤 하던 게요. 그래서 아버지처럼 발소리를 내지 않고 살금살금 까치발로 걸어 거실로 나가봤습니다. 창문 커튼을 살짝 젖히자 담벼락에 앉아 있는 아버지가 보였습니다. 조금 더 젖히자 옆에 있는 고양이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나 그 새까만 털하며 샛노란 눈하며, 한눈에도 불길하게 생긴 녀석이 아버지와 함께 시시덕거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달빛을 받은 그들의 모습은 사이좋은 한 쌍의 악마 같았습니다. 나는 베란다 문을 확 열어젖혔고 놀란 그들은 일제히 나를 보았는데 네 개의 눈동자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아버지의 눈동자는 고양이와 흡사했습니다. 살이 빠져 예전보다 훨씬 커진 눈의 동공은 세로로 길게 늘어나 있었고 홍채는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났습니다. (110~111)

 

이런 일은 주인공 집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아버지와 같은 회사를 다니던 주리 아버지도 회장 집에 초대받고 와서는 비둘기처럼 행동한다. 주인공은 아버지 소문이 동네와 학교에 퍼지면서 소위 왕따가 된다. 그런 에게 주리가 다가와 자기 아버지 또한 비둘기처럼 행동한다고 고백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고양이와 비둘기인 듯 행동하는 가장들이 정말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점이다. 주리는 아버지가 비둘기처럼 날고 싶어 한다며,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날 수 있도록 할까 고민하고 있다. 아무 데서나 함부로 날았다가는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주인공이 나선다. 집 근처에 넓은 공터가 있는데, 거기서 한참을 걸어가면 비탈진 곳이 있다. 새파란 풀이 잔뜩 깔려 있어 넘어져도 덜 아픈 곳이다. 주리 아버지는 깍깍 하고 걸으며 가끔 두 팔을 푸드득거리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며 주인공은 문득 고양이가 되어 집을 떠난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 소식은 소문으로 들려온다. 커다란 고양이 한 마리가 고양이 족속을 이끌고 어딘가로 달려갔다는 소문.

 

주인공은 아버지를 찾지 않으려고 한다. 고양이가 된 아버지는 한결 활기찬 모습으로 생활을 했다. 눈빛은 늘 반짝거렸고, 더없이 도도하고 당당하게 걸음을 걸었다. 한마디로 고양이가 된 아버지는 회장 앞에서 굽실대며 어떻게든 회사에 다니려던 그런 못난(?) 아버지가 아니었다. 문명사회에서 잃어버린 야성을 회복한 아버지라고나 할까? 그리 변한 아버지를 찾아 집으로 데려온들 무엇이 달라질까? 아버지는 다시 고양이 시절이 그리워 집을 나갈 것이다. 그러느니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고양이로 살고, 가족은 가족대로 사람으로 사는 게 낫다.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살든 잘 살기만 하면 되지 않는가? 이 작품에도 작가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잘 드러나 있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우리는 정작 행복이 무엇인지조차 생각하지 않으며 살고 있다. 인간으로 사는 것보다 고양이로 사는 게 더 행복하다는 작가의 말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화에도 진실이 있는 법이다. 그 진실이 무엇인지 거듭 새겨둘 필요가 있겠다.

 

우리 반 좀비」 또한 참으로 특이한 소설이다. ‘진구스라 불리는 학생이 있는데, 좀비로 소문이 났다. 좀비라니? 삼주 전 소풍날 진구(진구스의 원래 이름)는 화장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 여자에게 사타구니를 물려 죽었다. 주인공이 사건을 목격했지만, 다른 목격자가 없는 관계로 사건은 자살로 처리되었다. 장례까지 다 치렀는데, 사흘이 지나 죽은 진구가 학교에 나타난다. 나사가 하나 빠진 듯 멍한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예전보다 더 멋진 모습으로 등장한 진구를 여학생들은 열렬하게 환영했다. 그는 교실에서 여학생과 키스를 하고 농도 짙은 스킨십도 서슴지 않았다. 여학생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던 얼음왕자가 색골로 변신한 셈이다. 소위 모범생이었던 진구는 틈만 나면 선생들과 대립각을 세운다. 아이들이 마음속에 품은 저항 욕망을 진구는 하나하나 현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진구를 숭배했다. 진구처럼 되고 싶어 했다. 진구는 그런 아이들을 체육 비품을 보관하는 창고로 끌어들였다.

 

창고를 갔다 온 아이들은 모두 진구처럼 변했다. 학교에는 나날이 어둡고 야한 분위기를 풍기는 학생들로 넘쳐났다. 한마디로 학교가 학교로서 기능을 상실한 셈이다. 창고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영어 시간에 진구가 회화 동영상 대신 창고 동영상이 담긴 새로운 테이프를 튼다. 동영상 속 아이들은 한 사람의 동작을 모두 따라하는 사치기 놀이를 벌인다. 진구는 아이들을 하드코어 포르노에 나오는 장면으로 이끈다. 한층 음산하게 들려오는 사치기의 중독적인 주문과 함께 신음소리가 서라운드로 교실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자 흥분해 몸을 꿈틀거리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바지의 것을 꺼내 자위하는 녀석까지 있었다. 도중에 서로를 물어뜯거나 마구 찌르고 싸대는 통에 화면에 온통 피와 정액이 튀어 스플래터 무비 수준이었다.”(136) 진구를 따라 아이들은 점차로 진구가 되어 갔다. 주인공 와 친구들은 진구를 진구스라고 부른다. 진구이되 진구가 아닌 것 같아서 붙인 이름이다. 영어 소유격으로 진구의 것이라는 의미란다.

 

진구스가 학교에서 벌이는 난동을 정작 부모들은 모른다. 하긴 장례까지 치른 마당이다. ‘와 친구들은 진구스를 미행한다. 그는 집이 아니라 예전에 소풍을 갔던 곳으로 간다. 여자 괴물에 물려 죽은 곳 말이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바닥까지 끌리는 생머리에 누더기 같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어이없을 정도로 키가 큰 여자를 본다. 진구의 사타구니를 물어뜯은 여자이다. 귀밑까지 찢어진 새빨간 입속에 바늘처럼 뾰족한 이빨들이 박혀 있다. 꿈에 나올까 무서운 괴물. 여자가 재빠르게 손으로 친구 윤식을 거머쥔다. ‘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뺀다. 간신히 살아 돌아온 나는 친구 민수와 함께 진구스를 없앨 방도를 꾸민다. 학교는 이미 전염병이 돈다는 이유로 폐쇄된 상태다. 아랑곳없이 학교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교실에서 진구스를 발견한다. 민수가 가방에서 큰 도끼를 꺼내든다. 도끼를 치켜들어 목을 내려치려는 순간 책상에 엎드려 있던 진구스가 그 상태로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어서 내려치라고 말한다. 진구스는 죽고 싶은 것이다. 지쳤단다. 끝을 보고 싶단다. 도끼를 내리치려는 찰나 다른 좀비들이 달려들어 민수의 목을 물어뜯는다. 난장판이다.

 

내 눈을 봐. 그 이유를 보여줄게.”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피할 곳이 없어 그가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시커먼 굴 같던 두 눈에 점점 희미하게 빛이 들기 시작했다. 빛은 더욱 넓게 퍼져나가더니 한 세계를 비추었다. 그 세계는 매우 광대하고, 어둡고, 찌를 듯이 높은 건물로 이루어진 세계였지만 쇠락해가고 있었다. 모든 건물들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붕괴하고 있었다. 그 광경은 공허하고 우울하고 추웠다. 진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봐라,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다. 뭘 하건 모든 것은 죽고 사라지고 멸망하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죽기 위해서지. 그것 말고 이 세계는 아마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다. 그러니까 부디 네 멋대로 살라고.” (151)

 

다른 좀비들은 밖으로 뛰쳐나가고 둘만 남은 상황에서 진구스가 에게 꾸역꾸역 학교를 다니며 사는 이유를 묻는다. 대학, 직장, 결혼 등이 생각나지만 그것 때문에 사는 것 같지는 않다. 인용문은 대답을 망설이는 에게 진구스가 환상으로 보여주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이다. 쇠락해가는 문명세계가 보인다. 모든 건물들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붕괴하고 있다. 진구()는 외친다. 생명으로 태어난 모든 존재는 죽는다고! 그러니 규칙에 매여 살지 말고 네 멋대로 살라고! 진구는 좀비인 진구스가 됨으로써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살았다고 이야기한다. 진구스를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좀비가 되어야만 삶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진구스의 말은 풀지 못할 여운을 남긴다. 좀비가 되기 전 진구는 모범생이었다. 학교 성적도 최상위권이었다. 한마디로 사회적 성공을 할 확률이 높은 학생이었다. 그런 아이가 좀비가 되어 사회가 원하는 길과는 반대 지점으로 거칠게 달려간다.

 

누구는 병아리에 의지하고, 누구는 고양이나 비둘기가 되려 하고, 또 누구는 좀비가 되어 답답한 세상을 벗어나려고 한다. 작가는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글을 읽는 이들에게 자꾸만 묻는다. 지금 당신이 사는 삶은 어떠냐고? 병아리가 들려주는 자상한 말에 감동받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고? 고양이나 비둘기에 손가락을 물려도 고양이나 비둘기가 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고? 좀비가 되어 문명세계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싶지 않으냐고? 작가는 질문을 던질 뿐이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작가가 던진 질문에 조금이라도 충격을 받았다면, 지금 자신이 사는 삶을 돌아다보는 것이 좋다. 병아리에 의지하지 않으려면, 고양이나 비둘기나 좀비가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살아온 삶을 되돌아봐야 한다. 허무주의에 빠지라는 말이 아니다. 허무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제 마음을 들여다보라는 얘기다. 네가 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붉어진 눈으로 거듭 외치는 진구스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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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벤 브링크만, 『철학이 필요한 순간』 | 인문사상 2019-07-28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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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철학이 필요한 순간

스벤 브링크만 저/강경이 역
다산초당 | 2019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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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우리를 반성적 성찰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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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를 넘어 자유와 윤리를 여는 철학

- 스벤 브링크만, 『철학이 필요한 순간』

 

 

 

지은이는 이 책의 시작하며에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질문에는 두 가지 뜻이 함의되어 있다. 첫째는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지금 우리는 삶의 의미를 잃었다는 것이다. 영화감독 우디 앨런의 경우처럼 삶을 의미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허무주의자들은 의외로 많다. 삶에 의미가 없으므로 우리는 그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삶을 즐기면 된다. 즐기며 사는 삶이라, 얼마나 좋아 보이는가? 하지만 지은이는 이러한 주장에는 세상 모든 것을 도구로 바라보는 도구적 이성이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도구적 이성은 생명을 목적으로 보지 않고 수단으로 본다. 수단이란 효용성, 곧 쓸모 있음을 가리킨다. 쓸모가 있으면 받아들이고 쓸모가 없으면 가차 없이 버린다. 효용성으로 인간을(나아가 생명을) 판단하면 이 세상은 물건의 지옥이 되어버린다.

 

삶에는 과연 의미가 없을까? 이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삶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꼭이 이렇게 따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오늘 한 일을 반성하며 내일을 기획하는 경우가 많다. 반성을 한다는 것은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다는 얘기다. 우주에 비하면 먼지보다 더 작은 100년이라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은 인간에게 엄청난 깨달음을 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100년 동안 깨우치지 못한 것을 우리는 죽기 바로 1초 전에 깨달을 수 있다. 삶이란 그만큼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 당장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 10년이 지나고, 100년이 지나면 우주를 뒤바꿀 만한 의미로 나타날지 모른다. 도구적 이성은 지금 이 순간만 중시한다. 지금 쓸모가 있으면 좋은 것이고, 지금 쓸모가 없으면 나쁜 것이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 미래를 버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알려고 하는 삶의 의미는 지금 당장의 쓸모 있음을 넘어선 자리에서 뻗어 나올 텐데 말이다.

 

제가 심리학을 비판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심리학은 개인이 다양한 심리학적 도구를 활용해 자기 자신을 찾고 계발하도록 돕는 일에는 도움을 줄지 모르지만, 개인을 윤리적-사회적으로 성숙시키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심리 치료가 시작된 이래로 100년간 우리 삶이 나빠지고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심리학은 우리가 자기계발을 하거나 무언가를 배우거나 자아실현을 추구할 때는 지나칠 정도로 유용하지만, 쓸모없는 것은 완전히 무시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심리학, 적어도 심리학의 일부는 우리 사회의 도구화 현상뿐 아니라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문화, 더 나아가 노골적인 나르시시즘을 심화시키는 데도 기여합니다. (25~26)

 

지은이는 심리학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 전공 분야를 비판한다. 심리학은 자기계발에는 유용하지만, 개인을 윤리적으로 성숙시키지 못한다는 게 그 이유이다. 자기가 전공한 분야를 이렇게 가차 없이 비판하는 지식인은 드물다. 지금 시대는 지식이 곧 돈=도구가 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심리학 또한 도구적으로 유용하다는 것을 밝혀야 대학에서 학문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요즘 대학에 개설되는 학과들을 보라. 도저히 학문과 연관되지 않는 단순 기술이, 단지 돈을 벌 목적으로 개설되고 있다.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학문의 이름으로 기술을 도구화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지은이 말마따나 우리는 지금 개인 윤리를 성장시키기 위해 공부하지 않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공부를 한다.

 

자기계발이란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말 그대로 자기를 계발하는 것이다. 요즘 시중에 많이 나도는 자기계발 도서를 보면, 개인의 성공을 위한 수단을 제시하는 내용을 다룬 책들이 많다. 겉으로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 이런 책들은 개인이 어떻게 하면 개인을 이용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관심이 있다. 요컨대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개인들은 서로를 도구로 이용하는 존재들로 전제된다. 이런 책들은 사회에서 성공하는 방법은 알려주지만, 사회적으로 성숙하는 길은 알려주지 않는다. 성공을 곧 성숙이라고 생각하니 알려줄 수가 없다. 이들 생각처럼 성공이 곧 성숙인 것일까? 지은이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도구적 이성을 사용하면 성공에는 이를 수 있지만, 성숙에는 이를 수 없다. 성숙은 상대를 도구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목적으로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지은이가 도구적 이성을 벗어나는 대안으로 윤리 철학을 제시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철학은 성공이 아니라 성숙을 지향한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열 명의 철학자를 소개하고 있다. 열 명의 철학자들을 다루면서 지은이는 열 개의 질문을 던진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를 다루는 1강에서 지은이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이 우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도구적 이성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없다. 도구적 이성은 언제나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의 쓸모 있음을 따라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도구적 이성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이 질문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접근한다. 그렇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도구적 이성을 넘어서는 윤리 철학이 담겨 있다는 얘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그 자체를 위해 하는 것이 선이다라고 선언한다. 선한 행동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행복의 핵심 요소이다. 우리는 이익을 얻기 위해 선을 행하지 않는다. 이익으로 따지자면, 선을 행하는 사람은 늘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선을 행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래야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칸트의 존엄성을 다룬 2강에서 지은이는 쓸모없기 때문에 쓸모가 있는 목적의 왕국을 이야기한다. 목적은 수단과 반대편에 있다. 칸트가 말하는 목적의 왕국에는 쓸모로 대해야 할 대상과 쓸모를 따지지 말아야 할 존재가 구분된다. 일상 물건을 살 때는 쓸모를 따져야 한다. 하지만 생명을 볼 때는 쓸모를 따져서는 안 된다. 생명은 생명 자체로 존엄하다. 쓸모가 없기에 쓸모가 있다는 발상은 노자나 장자의 생각과 닮았다. 물론 칸트와 이들은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자본주의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교환가치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교환할 가치가 있으면 유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유용하지 않다. 철학과 같은 인문학이 왜 찬밥 신세가 되었겠는가? 칸트 입장에서 보면 인문학은 쓸모가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 쓸모가 생기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을 굳이 옹호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쓸모가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도구가 된다. 그러고 보면 인문학은 이 세상에서도 쓸모가 있다.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니체의 사상을 되살려, 우리가 약속하고 이를 어겼을 때 죄책감을 느끼는 능력을 토대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버틀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본질을 주체개념을 통해 설명하는데, 그 핵심은 사람이 자기 행동에 근거를 대거나 해명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여겼습니다. 적어도 언어를 습득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이지요. 그런데 버틀러는 주체가 주로 도덕적 관계를 통해 창조된다고 말합니다. 개별 주체가 완전히 형성된 뒤에 도덕적인 관계가 정초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이지요. 버틀러는 도덕성에 앞서 있거나, 그와 별개로 존재하는 주체성 같은 건 없으며, 권력()에 앞서거나 힘과는 별개인 주체성 또한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푸코의 주장도 이와 같지요. (99~100)

 

3강에서 지은이는 니체의 약속 개념과 관련하여 지키지 못한 것들에 왜 죄책감 느끼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약속은 인간만이 한다. 개와 내일 만나기로 약속해 보라. 개가 그 자리에 나올까? 약속은 반성적 자의식을 가진 존재만이 한다는 말이다. 약속은 서로를 향한 신뢰를 표현하는 것이다. 위에 인용한 버틀러의 주장처럼,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 관계는 곧 약속과 같은 맥락을 지니는 셈이다. 버틀러는 도덕성과 별개로 존재하는 주체는 없다고 말한다. 주체는 권력이나 도덕과 같은 환경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는 것이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하면 된다. 늑대와 함께 자란 아기는 성장해서도 늑대처럼 울부짖는다. 늑대의 본능은 알지 모르지만 주체니, 권력이니, 언어니 하는 것은 모른다. 인간이라는 주체가 사후 효과라는 것을 잘 알려주는 예시다.

 

인간을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은 약속을 쉽게 저버린다. 약속은 나와 상대 사이에 대등한 관계가 이루어질 때 성립되는 것이다. 상대를 도구로 보는 사람은 언제나 상대와 약속을 깨뜨릴 준비가 되어 있다. 도구는 이익이 되지 않으면 버려도 되는 물건과 같다. 상황이 좋지 않으면 버려도 되는 물건과 굳은 약속을 맺는 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도구적 관계는 이렇게 인간관계를 황폐화시킨다. 전쟁 상황을 생각하면 쉽다. 전쟁은 남을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는 상황을 가리킨다. 상대를 도구로 생각하는 방식은 이렇게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이는 상황을 정당화한다. 결국 문제는 상대를 도구로 다루지 않아야만 나 또한 도구가 되지 않는다는 데로 모인다. 상대를 도구로 다루지 않는다는 건 상대를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칸트의 정언명령이 우리 앞에 뚜렷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7강에서 지은이는 내가 아닌 존재에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아이리스 머독은 사랑은 우리 자신 외에 다른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가능한 무척 어려운 깨달음(161)이라고 이야기한다. 두 가지 점을 주목할 수 있다. 하나는 자신 외에 다른 존재가 실재한다는 사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머독이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표현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존재의 실재를 믿는 것은 달리 말하면 다른 존재를 도구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른 사람을 도구로 대하면, 다른 사람 또한 자신을 도구로 대한다. 도구와 도구가 관계를 맺는 이상한 사회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런 상황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깨달아야한다고 말한다. 인식에는 자기중심성이 깊게 배어 있다. 자기를 중심에 놓으면 타자를 도구로 판단하기 쉽다. 깨달음은 이와 달리 자기중심성을 벗어난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자기중심성을 내려놓아야 자기 밖에 있는 타자가 비로소 보인다.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일이다(183)라는 자크 데리다의 언명 역시 자기중심성을 허무는 자리에서 비롯된다.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란 얘기.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해야 비로소 용서가 될 수 있다는 이 모순 섞인 말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말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과 그대로 닮았다. ‘환대의 철학가로도 유명한 데리다는 무조건적인 환대를 주장했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을 환영하는 것은 환대가 아니다. 환대는 이방인과 연결된다. 모르는 사람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게 환대다. 화대에는 가정법(칸트로 따지면 가언명법)이 없다. 환대해야 하기 때문에 환대해야 한다는 동어반복이 거기에는 있다. 칸트로 따지면 정언명법이다. 이방인 그 자체를 환대하는 것. 내란으로 내쫓긴 난민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것. 데리다는 바로 이런 마음으로 용서를 말한다. 어떤 조건을 내걸고 하는 용서가 아니라 용서 그 자체를 용서하는 것.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욕망이 들끓는 인간의 마음을 지니고는 이 길로 접어들기 힘들다. 지은이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예수처럼 말하는 것은 쉽지만, 예수처럼 십자가에 매달리기는 어렵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몸으로 실천했다. 타자를 이야기하고, 환대를 이야기하는 철학자들조차 실제 상황에서는 한 발을 빼는 경우가 많다. 지은이가 알베르 카뮈를 빌려 적극적인 자유를 말하고, 몽테뉴를 빌려 죽음을 얘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유와 죽음에 처한 존재는 자기를 끊임없이 돌아본다. 상대를 도구적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지은이는 자유가 없는 행복한 세계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단언한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가상세계에서 인간은 자유를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찰이 없는 삶은 사람들을 허무주의에 빠뜨린다. 지은이는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철학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책 제목인 철학이 필요한 순간은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펼쳐진다. 우리는 지금 철학을 해야 제대로 된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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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애덤스, 『나무의 모험』 | 인문사상 2019-07-25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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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나무의 모험

맥스 애덤스 저/김희정 역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07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나무와 함께 한 인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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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함께 한 인간의 역사

- 맥스 애덤스, 『나무의 모험』

 

 

 

나무의 역사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길고도 길다. 날아다니는 곤충이 나오기 이전부터 나무는 지구상에 존재해 왔다. 땅에 뿌리를 박고 사는 나무는 어떻게 생존을 유지한 것일까? 나무는 자연을 대표한다. 나무가 없는 산을 떠올려 보라. 나무가 없으면 나무에 깃들어 사는 생명들이 먼저 사라진다. 자연은 독불장군으로 혼자서 사는 생명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무는 뭇 생명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 것이다. 이리 보면 나무를 알면 자연 속 사물이 사는 이치를 아는 것과 같다. 인간은 스스로를 자연보다 위대한 존재로 내세우지만, 사실 인간만큼 자연에 의존해 사는 동물도 없는 듯싶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자연을 숙주로 하는 바이러스인지도 모른다. 한갓 바이러스에 불과한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라고 외치는 모순을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지은이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제시한다. 지은이는 1996년 아내와 함께 숲으로 들어갔다. 숲으로 들어가 나무를 연구하며, 나무와 더불어 살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숲속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온몸을 열고 들었고, 숲속이 전해주는 소리를 온몸을 열고 들었다. 4차 산업시대라고 하지만, 나무는 여전히 고유의 기능을 유지한 채 지구상에 살아남아 있다. 나무는 너무도 복합적이고, 동물과도 너무 달라서 나무에 대한 과학자들의 이해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인간이 지적인 만큼이나 나무 또한 지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적인 삶은 물론 인간의 이성과는 상관이 없다. 나무는 오랜 세월 지구라는 환경에 스스로를 적응해 왔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문명을 건설했다면, 나무는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숲을 이루었다. 인간이 나무에게 배워야 할 것은 생명과 공존하는 법이다. 나무를 배우지 않으면 인간은 머지않아 지구상에서 멸종할지도 모른다.

 

 

나무가 미세한 박테리아에서 나왔듯, 인간 또한 바다 속 미세한 박테리아가 성장해서 이루어졌다. 나무의 삶에는 인간이 살아야 할 삶이 드리워져 있다는 얘기다. 지은이는 다양한 측면에서 나무가 살아온 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수동적으로 보이는 나무를 사실은 적극적으로 싸우는 전사라고 얘기하는가 하면, 나무가 지닌 지혜로 신화 세계를 일군 영웅들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단군신화만 해도 신단수(神檀樹)가 나오지 않는가. 나무는 이렇게 인간의 삶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인간 문명을 이끌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나무를 비롯한 자연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나무가 살아온 삶을 잊은 결과다. 지은이는 나무가 살아온 삶에서 인간이 살아갈 삶을 엿본다. 나무를 다루면서 인간은 서서히 문명을 일으켰다. 돌려 말하면 나무가 사는 방식을 알면서 인간은 이전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었다. 이만하면 인간 역사를 나무와 더불어 이어진 역사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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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백승종 저
사우 | 2019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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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수양 서적”, 『중용』 

이 한 권의 책은 조선의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나


역사가 백승종이 안내하는 조선의 역사를 읽는 새로운 방법


중용은 조선의 왕과 선비들이 가장 사랑한 책이다. 이 책은 『중용』이라는 한 권의 책이 조선의 역사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실례를 통해 밝히고 있다. 저자는 『중용』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역사가로서 조선 500년의 역사 속에서 『중용』이 어떻게 시대의 필요에 따라 이용되었는지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한다. 각 시대마다 중용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같은 내용이라도 입장에 따라 어떻게 해석이 달라졌는지, 중용에 대해 선비들이 품었던 의문은 무엇인지, 중용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역사적 사건을 따라가며 생생하게 들려준다. 


이 책은 『중용』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정치 사상사를 정리한 보기 드문 역작이다. 500년 동안 이 책을 두고 펼쳐진 선비들의 토론을 경청하고, 그들의 치열했던 성찰과 사색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의 흐름이 파노라마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중용』의 역사를 읽는 것은 조선 역사를 읽는 새로운 방법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중용』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으며, 한국사를 이해하는 더 폭넓은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최고의 수양 서적”, 『중용』 

이 한 권의 책은 조선의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나


2,400여 년 전 중국에서 만들어진 『중용』이라는 책은 조선을 ‘성리학의 나라’로 만든 주인공이다. 아직까지도 이 책을 “최고의 수양 서적”으로 꼽는 이들이 많다. 『중용』은 조선의 왕과 선비들이 가장 사랑한 책이자 조선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다. 조선의 왕과 선비들은 『중용』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시대가 당면한 과제를 『중용』을 통해 해석하고자 노력했다. 


이 책은 『중용』이라는 한 권의 책이 조선의 역사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실례를 통해 밝히고 있다. 저자는 『중용』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역사가로서 조선 500년의 역사 속에서 『중용』이 어떻게 시대의 필요에 따라 이용되었는지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한다. 


이 책은 『중용』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정치 사상사를 정리한 보기 드문 역작이다. 500년 동안 『중용』을 두고 펼쳐진 선비들의 토론을 경청하고, 그들의 치열했던 성찰과 사색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의 흐름이 파노라마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중용』의 역사를 읽는 것은 조선 역사를 읽는 새로운 방법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중용』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으며, 한국사를 이해하는 더 폭넓은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중용』이라는 책은 애초에 중국에서 이념투쟁의 도구로 탄생했다. 유교는 초기부터 도가, 묵가, 법가, 불교와 사상적으로 싸워야 했다. 사상투쟁을 치르면서 유교의 논리는 더욱 세련되고 정교해졌다. 조선에서도 『중용』은 사상투쟁의 무기로 활약했다. 조선 초기 선비들은 『중용』을 이용해 불교세력을 공격했다. 두 진영 간에 공방전이 치열했으나 세종과 성종 대를 지나면서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 수준이 크게 높아져 불교세력은 완전히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조선의 사회문화적 주도권은 성리학자들이 쥐게 되었다. 


16세기 조선에는 성리학을 위협할 만한 ‘이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조선의 왕과 선비들은 『중용』의 새로운 역할에 주목했다. 『중용』에서 이상국가를 건설할 토대를 발견한 것이다. 큰선비 이언적은 『중용』 20장에 나오는 ‘구경설(九經設)’에 주목했다. 구경설이란 공자가 정치를 하는 아홉 가지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수신(修身)이 가장 먼저고, 어진 이를 존중하고(尊賢), 나와 가까운 이를 친애하고, 여러 신하를 내 몸처럼 여기고, 백성을 자녀처럼 대하는 것 등이다. “공자가 말한 통치의 요체는 자신을 바로잡고 근본에서 시작하여 말단에 이르며, 가까운 데서 출발하여 먼 곳까지 두루 미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언적과 같은 선비들은 구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면 성리학적 이상세계가 실현된다고 믿었다.” 17세기 후반까지 선비들은 구경설을 통치 철학의 핵심이라고 확신했다. 


개인의 수양이 더 중대하다고 여기는 선비들도 『중용』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정치적으로 혼탁한 조정을 떠나 초야에 머무는 선비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군자가 되기 위한 수신의 철학을 『중용』에서 발견했다. 저자는 조익 같은 선비들이 시종일관 마음을 보존하고 성찰하기 위해 『중용』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준다. 


16세기 말부터 조선 사회는 총체적 위기를 맞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연달아 겪으면서 선비들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들은 앞선 세대가 이루어놓은 형이상학과 수양론을 결합해 예학(禮學)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만들어냈다. 김장생 등은 『중용』에서 ‘예禮’의 중요성을 발견해 예학적 질서를 수립했다. 


중용 열풍, 그리고 중용이 드리운 그림자


15세기 이후 『중용』의 열풍은 대단했다. 율곡 이이는 주희의 『중용장구집주』에 오류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조익 같은 학자는 주희의 학설과 다른 주장을 폈다. 당시만 해도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기에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17세기 후반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전쟁을 거치면서 사회문화 전반에 보수화 경향이 심해졌다. 일상적으로 엄격한 사상 통제가 이루어졌다. 주류 선비들은 주희의 주장을 글자 하나도 의심하지 않고 철저히 신봉했다. 그들에게 주희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윤휴는 주희의 『중용장구집주』를 새롭게 저술했다. 윤휴는 『중용』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일상으로 끌어내렸다. 평범한 일상을 다루고 있는 경전을 굳이 복잡한 형이상학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윤휴의 이러한 시각은 송시열과 같은 보수적인 선비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당시 대부분의 선비들은 주희의 저작을 숭배했고, 한 치라도 벗어나면 마녀사냥을 당했다. 윤휴를 비롯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몇몇 선비들은 결국 ‘사문난적’으로 몰려 고난을 면치 못했다. 


정조 대에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사회의 갈등이 심해졌다. 정조는 천주교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 성리학을 더욱 강조했다. 성리학적 이념을 강화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였다. 정조는 『중용』에 큰 기대를 걸었다. 신하들과 『중용』을 공부하기도 하고, 경전에 대한 논술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정조는 주희의 주석을 그대로 따랐다. 초야에 묻혀 주희의 주석서를 깊이 연구한 시골 유생들을 발굴해 높은 벼슬을 주기도 했고, 그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어전에서 『중용』에 관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급기야 문체를 검열하고 중국에서 서적을 구입하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리게 된다. 정조는 특정한 이념을 강화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저자는 중용이 조선 사회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살펴본다.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짙었다. 이를 통해 저자는 한 사회가 특정 이념에 몰입할 때 어떤 폐단이 생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멀지 않은 때에 이런 경우가 있었다. “1990년을 전후해 와르르 무너진 동구권 국가들, 즉 현실사회주의 노선을 걷던 소련,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의 패망 원인을 뒤돌아보는 것이 좋겠다.” 


때로 진취적이고, 때로 구태의연했던, 

선비들의 다양한 해석


유교 경전 가운데서 『중용』은 가장 난해한 책으로 손꼽힌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중용』을 해석하는 관점은 실로 다양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중용』의 개념을 철학적 관점에서 소개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선비들의 다양한 해석을 충실하게 소개한다. 장유, 윤증, 김창협, 이덕무, 홍대용 등 뛰어난 선비들이 『중용』에 관해 품었던 의문과 대답을 들어보면 『중용』의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17~18세기 조선 사회는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유로운 경전 해석을 탄압했다. 그럼에도 개성 있는 선비들은 경전을 무비판적으로 숭배하지 않았다. 윤휴는 주희의 『중용』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중용』을 편찬했다. “윤휴가 편찬한 새로운 『중용』은 주희의 것보다 논리적으로 세련되었다. 그의 설명에는 군두더기가 없고, 주장도 체계적이고 일관적이었다.”


윤휴의 연구는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성호 이익과 정약용이 대표적이다. 성호 이익은 실증적이고 비판적으로 『중용』을 연구해 『중용』의 역사를 새로 썼다. 잘못 알려진 통념과 개념에 대해서도 바로잡았다. 일례로 이익은 4대를 제사 지내는 조선의 풍습이 잘못된 것임을 입증했다. 공자와 맹자가 어려서 아버지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 밖에도 이익은 철저한 문헌 연구를 통해 많은 학문적 결실을 거두었고, 이단으로 몰릴 수 있는 분위기임에도 용감하게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당대 최고 수재로 손꼽힌 실학자 정약용의 견해는 어떠했을까. 저자는 정조가 실시한 친시(임금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된 시험)에서 정약용이 작성한 답안지를 옛 문헌에서 발견했다. 문제지와 답안지를 통해 저자는 출제자 정조의 의도와 정약용의 학문적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중용』의 핵심을 묻는 45개 문제가 남아 있는데, 이 책에서는 주희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답안은 제외하고 정약용의 독특한 의견을 담은 답안 5개를 소개한다. 그리고 저자의 논평을 덧붙여 두었다. 


과연 정약용은 어떤 답안을 제출했을까. 저자는 정약용의 답안지를 꼼꼼히 살핀 결과 그가 깊이 갈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조정은 보수적이었고, 창의적인 대안보다는 주희의 학설을 더 철저히 익히도록 독려했다. 정약용은 대체로 보수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지만, 성호 이익을 계승한 학자로서 형이상학에 거부감을 갖고 있기도 했다. 또한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사람들이 절대자를 믿지 않기 때문에 타락한 생활에 빠지기 쉽다고 서술했다. 


“정약용의 답안지를 들여다보면 모순적이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주류 성리학계의 가르침에 순응하는 듯하면서도, 거기에서 이탈한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자신의 갈등을 명백한 언어로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내면은 이미 혼란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왜 『중용』에 주목해야 하는가 


18세기 이후 지배층의 보수성이 더욱 완고해지자 새로운 이념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정감록’ 반란 사건이 자주 일어났고, 여러 지식이 융합해 동학이 태동한다. “동학은 『중용』의 하늘을 새롭게 해석했다. 그들에게는 사람이 곧 하늘이었다. 최시형은 만물이 다 하느님이요, 너도 하느님, 나도 하느님, 사람도 물건도 본질적인 차이나 구별이 없다고 선언했다. 『중용』에 언급된 하늘과 사람이 하나 된 경지(천인합일)가 새롭게 정의되었다고 하겠다.” 


『중용』은 조선 선비들에게 가장 권위 있는 책이었다. 16세기 이후 조선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회 변화의 이면에는 항상 『중용』이 숨어 있었다. 모든 것이 그 한 권의 책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새로운 변화가 요구될 때마다 선비들은 『중용』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해답을 찾아냈다. 


그렇다면 지구 생태계가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고,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 『중용』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제야말로 또 한 번 중용의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한다. 


“지난 2천 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중용은 위기의 시대마다 늘 새롭게 해석되었다는 점이다. 21세기라고 무엇이 크게 다를까. 새 시대의 중용 해석은 소수의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생명을 존중하는 모든 이의 평화를 위한 헌장을 되새기는 작업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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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산, 「강철은」 | 시집 읽기 2019-07-22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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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강철의 기억

이철산 저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9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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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기억을 험난한 사회에 뛰어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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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

 

 

 

  골목 어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강철은 고철의 기억을 가지고 산다

  위험하다고 말하는가

  수많은 벼림 속에서 비로소 달구어져 빛나는

  강철의 기억 속에는 망가지고 부러진 채

  무너진 자신조차 숨길 수 없는

  고철의 질긴 생명이 숨어 있다 되살아 있다

  부끄러움을 녹여내는 아픔 속에서

  달구어질수록 뜨거워질수록

  고철의 쓰라린 추억을 기억하고 있다

  패배 속에서 슬픔의 언저리에서

  무너지고 쓰러지고 비로소 지키는 사랑

  강철은 아름답다

  - 이철산, 「강철은」

 

 

사람들은 강철 같은 신념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신념이 강철 같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 신념이 변하지 않을 만큼 단단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골목 어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강철은 어떻게 이런 단단한 신념을 온몸으로 표현하게 되었을까? 시인은 강철에 서린 고철의 기억을말하고 있다. 고철은 아주 낡고 오래된 쇠를 의미한다. 그 자체로는 쓰지 못하는 철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달리 말하면 고철은 제련을 해서 써야 한다. 용광로에 고철을 녹여서 새로운 철을 만들어야 고철은 비로소 쓸모 있는 강철이 된다. 마음에 고철을 품고 있는 강철을 누군가는 위험하다고 이야기한다. 무엇이 위험하다는 것일까? 강철이 되면 고철은 잊어야 한다는 것일까? 자기가 살아온 역정을 잊은 채 어떻게 강철이 된 지금을 긍정할 수 있을까? 강철은 고철에 근원에 두고 있다. 고철을 잊지 않아야 강철은 강철로서 삶을 살 수 있다.

 

시인은 수많은 벼림 속에서 비로소 달구어져 빛나는/ 강철의 기억이라고 쓰고 있다. 강철의 기억은 고철이 수없이 벼려지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고철은 벼리고 벼려져야 비로소 달구어져 빛나는 강철이 된다. 시뻘건 쇳물이 되려면 고철은 망가지고 부러진 채/ 무너진 자신조차 숨길 수 없는상황에 이르러야 한다. 고철은 기꺼이 자기를 망가뜨리고 부러뜨린다. 스스로를 죽여 새로이 태어나는 고철의 이 희생정신을 시인은 고철의 질긴 생명이라는 시구로 표현한다. 고철은 자기를 지키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자기를 지키는 생명의 역설을 이룩한다. 고철에 담겨 있는 뜨거운 생명성이 강철을 낳는 근원이라고나 할까. 시인의 말마따나 고철은 용광로에 들어가 지독한 아픔으로 부끄러움을 녹여낸다. 부끄러움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부끄러움과 맨얼굴로 대면하는 사람만이, 그래서 온몸이 끊어질 듯한 아픔에 시달린 사람만이 부끄러움을 저 멀리로 내던질 수 있다.

 

달구어질수록 뜨거워질수록달아오르는 고철의 쓰라린 추억은 이렇게 강철을 낳는 쇳물이 된다. 뜨거운 불길에 제 몸을 맡기면서 고철은 패배 속에서 슬픔의 언저리에서피어나는 희망만은 어떻게든 간직하려고 한다. 고철로 사는 인생은 언제나 패배할 수 있다. 자본은 이익이 되는 고철들만 광장으로 받아들인다. 수많은 고철들이 자본의 광장에서 자본을 증식하는 일에 동원되고 있다. 자본 증식에 기여하는 고철은 살고, 자본 증식에 기여하지 못하는 고철은 죽는다. 시인은 자본이 만든 용광로를 온 힘으로 견뎌내고 강철이 된 고철들에 주목하고 있다. 강철은 고철이 살아낸 쓰라린 추억을 가슴 깊이 품고 있다. 패배한 자리에서 고철들이 흘린 눈물을 강철은 기억하고 있으며, 무너지고 쓰러진 자리에서 고철들이 끝까지 지키려고 한 사랑을 강철은 마음 깊이 새기고 있다.

 

강철은 고철이 남긴 사랑을 먹고 자란 존재이다. 고철은 달콤한 사랑만을 남기지 않았다.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 자기를 버린 고철은 쓰디쓴 사랑을 강철의 붉은 마음에 심어주었다. 고철을 기억하는 강철들이 왜 무너지고 쓰러진 자리를 지탱하는 투사가 되겠는가? 강철은 달구어질수록 뜨거워질수록 더욱 단단하게 여물던 고철의 감각을 본능처럼 몸에 새기고 있다. “강철은 아름답다는 시인의 선언은 바로 이 지점에서 뻗어 나온다. 강철은 고철을 기억하고 있기에 아름답다. 돌려 말하면 강철로 하여 고철이 지닌 아름다움이 시간을 넘어 이 세상으로 불려나온다. 죽음을 넘어선 고철은 지금 강철로 돌아와 냉혹한 자본과 맞서고 있다. 자본은 이익이 되지 않으면 노동자의 목숨도 서슴없이 빼앗는다. 자본이 증식되는 자리에서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다.

 

화려한(?) 황무지가 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인은 고철의 기억을 가슴에 품고 태어난 강철을 상상한다. 그냥 강철이 아니라 아름다운 강철이다. 아름다운 강철은 아름다운 신념으로 황무지에 희망의 첫 걸음을 내딛는다. 시인은 무너지고 쓰러지고 비로소 지키는 사랑이라는 시구로 강철이 내딛는 첫 걸음이 곧 사랑을 실천하는 길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사랑은 머릿속으로 하는 게 아니다. 사랑은 늘 행동을 동반한다. 사랑이 없는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일만큼 힘겨운 일이 어디에 있을까? 사랑을 외치던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지금도 어디선가는 고철의 기억을 품은 강철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고통을 견디며 자본과 싸우고 있다. 시간이 걸려야 끝나는 싸움이다.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은 자본의 용광로는 자본에 저항하는 강철들을 무차별적으로 녹여버린다.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고철의 심장을 품은 강철로 사는 것은 이토록 어렵고도 힘겨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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