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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천, 「침묵의 언어」 | 시집 읽기 2019-08-31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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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최종천 저
창비 | 2007년 02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나무는 나무의 언어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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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반짝이는 것은

  사람으로 치자면 말을 하는 것일까?

  이 그늘 아래서라면 나는 입을 다물고

  나무들이 읽어주는 경전을 들어보리라

  해마다 수천권의 책이 출판되고

  영화와 연극이 공연되는 대명천지에

  지금은 헤어진 그녀도 나더러

  주둥이 하나로 먹고살 생각을 하라고

  이제 노동을 그만하라고 넌지시 충고하는

  눈부신 지식산업과 문화의 세기에

  나무들은 부는 바람에 춤을 추는구나

  일을 하는구나 일을 하는구나, 땅을

  깊고 넓게 일구고 있구나.

  말이야말로 기술적으로 해야하는 것이다

  최소한 신에게 변명을 하기 위해 맨 처음

  입을 열어 핑계를 댄 아담 정도는

  되어야 말을 하는 것이다.

  나의 말을 훔쳐간 한 권의 시집을

  지금 누군가가 읽고 있으리라

  내가 생산한 의미를

  누군가가 써먹고 있을 것이다

  나무 그늘 아래서 나무가 쓴 경전을 읽어본다

  나무의 언어는 나무 자체이다

  나무의 언어는 나무로 실존하고 있다

  나무의 언어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인간의 언어는 사물의 말을 듣기 위한 방법이다

  노동은 본래 그런 침묵의 언어였다

  나는 인권 대신 물권(物權)을 주장하리라

  사물이 나에게 증여한 이 언어로

  - 최종천, 「침묵의 언어」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걸 보며 시인은 나무들이 내뱉는 말을 보고 듣는다. 생김새가 모두 다른 나뭇잎이다. 같은 듯 다른 나뭇잎들이 저마다 말을 해대면 나무는 온몸으로 그 말들을 표현하느라 바쁘게 움직인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은 움직임으로 나무가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한다. 햇빛과 바람이 어울려 만들어낸 그늘 아래서 시인은 나무들이 읽어주는 경전을 듣는다. 경전은 나무들이 나뭇잎들로 쓴 책이다.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로 이 경전을 썼을까? 얼마나 많은 햇빛이 나뭇잎을 물들였으며, 얼마나 많은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었을까? 시인은 그 모든 생명들이 이룩한 경전을 그늘 아래서 듣는다. 대명천지에 출판되고 공연되는 책이나 영화나 연극에서는 쉬이 들을 수 없는 소리이다. 인간이 만든 문명에서는 느끼기 힘든 기운을 나무는 제 몸으로 온전히 드러낸다.

 

문명은 눈부신 지식산업과 문화의 세계를 낳았다. 지식과 문화를 이끄는 게 말이다. 말이 없는 문명을 상상해 보라. 오죽하면 지금은 헤어진 그녀가 시인더러 주둥이 하나로 먹고살 생각을 하라고 했겠는가. 주둥이로 먹고살라는 말에는 이제 노동은 그만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노동을 하지 않고 사는 삶이 과연 가능할까?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춤을 추는 나무들을 보며 시인은 일을 하는구나 일을 하는구나,”라고 중얼댄다. 바람은 부는 행위로 일을 하고, 나무는 춤을 추는 행위로 일을 한다. 바람은 불고, 나무는 춤을 춘다. 바람은 나무를 위해 불지 않고, 나무는 바람을 위해 춤을 추지 않는다. 바람이 부니 나무는 춤을 추는 것이다. 그게 나무에게는 일이고, 바람에게도 일이다. “땅을/ 깊고 넓게 일구는일 또한 나무에게는 바람을 맞으며 춤을 추는 것만큼이나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노동은 그러니까 지식산업과 문화의 세기가 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다. 지식과 문화 자체가 노동이 일구어낸 산물이다. 시인은 말이야말로 기술적으로 해야하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기술은 기법이나 요령이 아니다. 그것은 아담의 언어처럼 사물과 아주 가까이 있는 언어를 가리킨다. 바벨탑이 아닌 언어로 그는 신에게 변명하기 위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무가 나뭇잎들로 속삭이는 언어를 들으려면 우리는 바벨탑 이전에 아담이 쓴 언어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우리는 사물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것이고, 나뭇잎이 흔들리면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이다.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 상황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인간은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일 능력도 없지만, 그렇게 할 생각도 없다. 스스로를 자연 위에 세운 종족이 아닌가.

 

시인은 나의 말을 훔쳐간 한 권의 시집을말하고 있다. 시집에는 당연히 나의 말이 담겨 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이 말을 시집에 빼앗겼다고 이야기하는 점이다. “내가 생산한 의미는 시집이 시인에게 빼앗아간 말과 다르지 않다. 시인은 사물이 들려주는 말을 그냥 내뱉는 존재가 아니다. 한 권의 시집이 훔쳐간 말에는 이미 시인이 생산한 의미가 깊이깊이 스며들어 있다. 지금 그 시집을 누군가 읽으며 써먹고 있다. 의미는 언제나 또 다른 의미를 낳는다. 하나로 확정된 의미는 이 세상에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시인은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의미의 책을 한 권의 시집에 담아 세상에 내놓았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는 오로지 그 시집을 읽는 이들의 몫이다. 나무 그늘 아래서 나무가 쓴 경전을 읽는 일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나무는 사방으로 말을 쏟아낸다.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의미다.

 

나무의 언어는 나무 자체이다라는 진술을 시인은 무엇보다 앞세운다. 이 말은 곧바로 나무의 언어는 나무로 실존하고 있다는 구절로 이어진다. 나무는 언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언어를 산다. 나무의 언어가 따로 있고, 나무의 실존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나무에게 언어는 곧 실존이다. 시인은 나무의 언어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라는 진술로 이 상황을 표현한다. 아담은 최초의 언어로 사물에 이름을 부여했다. 그가 나무라고 부르면 그 사물은 나무가 되었다. 언어와 사물이 따로 분리되지 않은 이 세계는 지금은 신화로 남아 있다. 그 신화로 다가가려면 우리는 인간의 언어를 써야 한다. 시인의 말마따나 인간의 언어는 사물의 말을 듣기 위한 방법이다”. 사물의 말로 신화가 만들어진다. 인간은 신화에 깃든 사물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한다.

 

중요한 것은 사물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쓰는 인간의 언어가 노동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이다. 땅이 숨긴 언어를 들으려면 땅과 더불어 땀을 흘려야 한다. 땅은 땀을 흘리지 않는 자에게는 결코 제 말을 들려주지 않는다. 시인은 노동은 본래 그런 침묵의 언어였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노동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다. 노동은 몸으로 하는 것이다. 인간은 노동을 함으로써, 달리 말하면 침묵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물로 들어가는 길을 힘껏 열어젖힌다. 노동이 없으면 침묵의 언어가 있을 수 없고, 침묵의 언어가 없으면 사물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인간은 깨우칠 수 없다. 지식산업과 문화에 물든 사람들은 노동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를 말하고 있지만, 사실 노동은 지식산업과 문화가 발달할수록 더욱 더 필요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은 인간과 사물을 이어주는 언어라는 시인의 이 선언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노동과 단절된 언어는 사물로 들어가는 길을 열지 못한다. ‘이데아를 안다고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시인은 그래서 인권 대신 물권(物權)”을 주장한다. 물권은 말 그대로 사물의 권리를 의미한다. 인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물권 속에 인권이 있다. 인권은 물권의 하위 개념인 것이다. 돌려 말하면 물권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하나로 묶는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사물을 잇는 이 근원에 시인은 노동이라는 침묵의 언어로 다가선다. “사물이 나에게 증여한 이 언어로시인은 시 쓰기라는 노동을 한다. 사물은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시인에게 언어를 증여한다. 그 자체가 목적인 이 언어로 시인은 시를 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를 읽는다. 시를 쓰고 읽는 일이 증여로 이어져 있는 것을 시인은 정확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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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자신의 호모 사케르 | 생각들 2019-08-31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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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저/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 2012년 03월

 

 

 

 

성과주체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로우며 그것에 의해 노동을 강요당하지도, 착취의 희생자가 되지도 않는다. 성과주체는 오직 자기 자신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외적 지배기구의 소멸은 강제구조의 제거로 이어지지 않고, 다만 자유와 강제의 통합을 가져올 뿐이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착취한다. 자기 착취는 기만적인 자유의 느낌을 동반하는 한에서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기도 하다. 착취는 지배 없이 관철된다. 여기에서 자기 착취의 효율성이 생겨난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더욱 가속화된 발전을 위해 타자에 의한 착취에서 자기 착취로 전환한다. 이러한 역설적 자유로 인해 성과주체는 가해자이자 희생자이며 주인이자 노예가 된다. 자유와 폭력이 하나가 된다. 자기 자신의 주권자, 호모 리베르를 자처하는 성과주체는 호모 사케르임이 밝혀진다. 성과사회의 주권자는 자기 자신의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 성과사회에서도 주권자가 호모 사케르를 낳고 호모 사케르가 주권자를 낳는 역설적 논리가 성립한다. (10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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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 「패배는 나의 힘」 | 시집 읽기 2019-08-29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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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패배는 나의 힘

황규관 저
창비 | 2007년 12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패배가 패배가 아닌 이유는 끝까지 싸울 힘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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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

 

 

 

  어제는 내가 졌다

  그러나 언제쯤 굴욕을 버릴 것인가

  지고 난 다음 허름해진 어깨 위로

  바람이 불고, 더 깊은 곳

  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을 보았다

  오늘도 나는 졌다

  패배에 속옷까지 젖었다

  적은 내게 모두를 댓가로 요구했지만

  나는 아직 그걸 못하고 있다

  사실은 이게 더 큰 굴욕이다

  이기는 게 희망이나 선()이라고

  누가 뿌리 깊게 유혹하였나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시 싸움을 맞는 일

  이게 승리나 패배보다 먼저 아닌가

  거기서 끝까지 싸워야

  눈빛이 텅 빈 침묵이 되어야

  어떤 싸움도 치를 수 있는 것

  끝내 패배한 자여,

  패배가 웃음이다

  그치지 않고 부는 바람이다

  - 황규관, 「패배는 나의 힘」

 

 

자본주의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사람을 자본주의는 우대한다. 강자는 약자를 착취함으로써 더 많은 자본을 움켜쥔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괜히 일어나겠는가? 부자는 자본의 논리를 따른다. 자본은 오로지 이익이 되는 것만 광장으로 받아들인다. 이익이 되지 않는 모든 생명은 가차 없이 자본이 세운 광장 밖으로 쫓겨난다. 피라미드의 끝에 이르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밑으로 떨어진다. 피라미드라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사람들의 무덤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라미드는 더욱 더 높아진다. 황규관은 아득한 하늘로 치솟은 피라미드 사회에서 어제는 내가 졌다고 인정한다. 자본이 없이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서기는 힘들다. 자본은 엄청난 돈을 투자하여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공고한 성채를 쌓는다. 단시일 내에 허물어질 장벽이 아니다.

 

시인은 그러나 언제쯤 굴욕을 버릴 것인가라고 쓰고 있다. 언제나 어디서나 패배할 수 있다. 그것은 약자가 감당해야 할 필연적인 몫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굴욕은 다르다. 굴욕은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이다. 더 이상 적수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패배가 아니라 굴욕을 당한 사람이 어떻게 다시 자본 앞에 설 수 있을까? 싸움에 지고 난 다음 시인은 허름해진 어깨 위로 바람이 부는 것을 느낀다. 바람은 더 깊은 곳/ 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으로 들어간다. 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은 패배를 모른다. 숱한 패배들로 이루어진 이 심연을 건너려면 어깨에 와 닿는 바람을 온몸으로 기꺼이 맞이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오늘도 나는 졌다는 시인의 말을 눈여겨 들어보라. 어제는 졌고, 오늘도 졌다. 그럼 내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 물음은 의미가 없다. 지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 싸움에서 져도 굴욕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굴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내일이면 다시 일어나 다시 싸움을 벌인다. 패배에 속옷까지 젖으면 어떤가? 속옷은 갈아입으면 그만이다. 알몸으로 싸워도 굴욕을 느끼지 않는 싸움이 있다. 정당한 싸움을 할 때 그렇다. 적은 패배한 사람들에게 모두를 대가로 요구한다. 모두를 내주는 게 곧 굴욕이다. 모두를 내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사실은 이게 더 큰 굴욕이다라고 시인 또한 말하고 있지 않은가. 모두를 내주려면 적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 적이 원하는 대로 아무 말 없이 살아야 한다. 입을 다물고 적이 만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언어가 닿지 않는 저 심연을 품은 채로 적이 만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시인은 심연이 들끓어 오르는 것을 느낀다. 다시 싸우러 나가라는 신호이다.

 

누군가는 이기는 게 희망이나 선()이라고 말한다. 어떻게든 이겨서 희망이나 선을 지키라는 얘기겠다. “유혹이라는 시구에 드러나는 대로,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지독한 욕망과도 같은 것이다. 날마다 패배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기는 것은 얼마나 큰 유혹일까? 하지만 지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듯, 이기는 것 자체도 문제가 아니다. 시인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시 싸움을 맞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싸움의 결과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다음을 준비하는 길이 승리나 패배보다 먼저 생각할 일이다. 승리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패배가 거듭되면 쉽게 좌절을 한다. 패배에 젖은 사람은 적이 원하는 모두를 내주고 깊은 좌절감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들은 승리와 패배가 주는 결과에만 집착한다. 승리한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패배한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으면 승리와 패배는 무의미한 결과가 되어버릴 뿐이다.

 

시인은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점을 내세운다. 싸움은 과정이다. 결과는 그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될 따름이다. 승리든 패배든, 싸움의 결과에 안주하면 흐르지 않는 물이 곧바로 썩는 현상이 일어난다. 민주화 과정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승리를 얻어냈는가. 4.19가 그랬고, 6.10이 그랬고, 촛불집회가 그랬다. 우리는 늘 결과에 안주했다. 결과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새로운 싸움을 시작하지 않았다. 시인은 눈빛이 텅 빈 침묵이 되어야/ 어떤 싸움도 치를 수 있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결과는 새로운 과정=싸움으로 나아가는 한 점에 불과하다. 계속해서 싸우지 않으면 인간은 결국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에 목덜미를 잡힐 수밖에 없다. 눈빛이 텅 빈 침묵으로 빛나는 사람은 이러한 결과주의와 치열하게 맞선다. 스스로 썩은 물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길을 낸다.

 

승리를 해도 패배가 되고, 패배를 해도 패배가 되는, 그래서 승리와 패배가 곧 과정 속에서 거듭나는 싸움을 시인은 자본이 여전히 권력을 휘두르는 지금 이곳에서 벌이려고 한다. “끝내 패배한 자여,”라고 시인은 외치고 있다. 끝내 패배하는 자는 권력에 굴복한 자가 아니다. 굴욕을 당한 자가 아니다. 끝내 패배하는 자는 계속해서 물길을 트는 자이다. 물길을 터서 이 세상에 샘이 깊은 맑은 물을 한시도 쉬지 않고 공급하는 자이다. 이런 사람에게 승리와 패배는 의미가 없다. 승리와 패배는 다음 길로 가기 위한 정거장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패배가 웃음이다라는 시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뻗어 나온다. 패배한 사람은 왜 웃을 수 있을까? 다시 싸우면 되기 때문이다. 그치지 않고 부는 바람을 맞으며 시인은 마음속 심연을 들여다본다. 썩지 않는 맑은 물이 그곳에서 출렁인다. 패배가 으로 거듭나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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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와 독수리 | 생각들 2019-08-29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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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저/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 2012년 03월

 

 

 

 

  카프카는 대단히 난해한 단편 ?프로메테우스?에서 몇 차례에 걸쳐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재해석 작업을 수행한다. 첫 번째 재해석 시도에 따르면 신들은 지쳤고 독수리도 지쳤으며 상처도 지쳐서 저절로 아물었다.” 나는 또 하나의 재해석을 통해 이 프로메테우스 전설을 내적 영혼의 장면으로, 즉 오늘날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며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성과주체의 심리적 기구에 관한 묘사로 파악하고자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과 함께 노동도 가져다주었다. 성과주체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묶여 있다. 끝없이 다시 자라나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먹는 독수리는 성과주체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제2의 자아Alter Ego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프로메테우스와 독수리의 관계는 자기 착취의 관계인 셈이다. 피로란 스스로는 고통을 느낄 줄 모르는 간의 고통이라고들 한다. 따라서 자기 착취의 주체인 프로메테우스는 엄청난 피로에 빠지고 말 것이다. (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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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평단 모집]『걸리버 여행기』 | 이벤트 2019-08-29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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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클럽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저/이종인 역
현대지성 | 2019년 09월

신청 기간 : 92 24:00

서평단 모집 인원 : 5

발표 :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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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조지 오웰이 극찬한 최고의 풍자문학 완역본

환상적인 모험에 숨겨진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 


풍자문학의 대가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걸리버의 환상적인 모험담을 통해 당대의 정치사회와 인간 문명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스위프트는 “이 작품의 의도는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화나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걸리버 여행기』는 1726년 출판되었을 때부터 엄청난 인기와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켰으며, 신랄한 묘사로 인해 내용이 삭제되거나 금서로 지정되기까지 했다. 


19세기 초 『걸리버 여행기』는 원작의 거친 표현과 풍자 등을 삭제하고 아동문학으로 발행되었는데, 이런 판본들이 지금까지도 수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다. 그러나 아동용 『걸리버 여행기』를 접한 사람은 원전의 풍자를 이해할 수 없다. 현대지성 클래식의 『걸리버 여행기』는 완역본으로 풍자문학의 진수를 느낄 수 있으며, 일러스트의 대가 아서 래컴의 삽화로 재미를 더했다. 또 꼼꼼한 해제를 수록해 작품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구성했다. 


조지 오웰은 『걸리버 여행기』를 두고 “이 책은 아무리 읽어도 지겹지 않으며, 다른 모든 책들을 파괴하고 오로지 여섯 권만 골라야 한다면 그 중의 하나로 이 책을 고를 것이다.”라고 했으며, 영국 문학사가 조지 세인츠베리는 “스위프트는 세계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 가장 완전한 재미의 원천이다.”라고 평했다. 당대의 부패한 사회와 짐승보다 못한 인간의 행태에 날리는 스위프트의 독설은 몇백 년의 세월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다. 그의 날카로운 풍자는 오늘의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즐거움과 깨달음을 줄 것이다.


완역본으로 만나는 역사상 최고의 풍자문학 『걸리버 여행기』


『걸리버 여행기』가 1726년 처음 출간되었을 때 독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초판은 일주일 사이에 매진되었고 그 후 3주가 지나지 않아 1만 부가 판매되었으며, 2년 이내에 프랑스어로 두 번, 독일어와 네덜란드어로 한 번씩 번역되었다. 스위프트는 “이 작품의 의도는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화나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걸리버 여행기』는 1726년 출판되었을 때부터 엄청난 인기와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켰으며, 신랄한 묘사로 인해 내용이 삭제되거나 금서로 지정되기까지 했다. 


풍자문학의 대가 스위프트는 걸리버의 환상적인 모험담을 통해 부패한 당대의 정치사회와 인간 문명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걸리버 여행기』를 아동문학으로 기억한다. 이는 많은 판본들이 원전의 인간 혐오적인 태도와 사회 비판적인 부분을 잘라내고 신나는 모험만 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걸리버 여행기』로는 원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제 현대지성의 완역본 『걸리버 여행기』로 스위프트가 그려낸 진정한 풍자와 해학의 세계를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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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여러분께

1. 수령일로부터 2주 이내 리뷰 작성 부탁 드립니다(★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기 어려우실 경우!)

2. 도서를 받아 보실 기본주소를 꼭 확인해주세요! (http://blog.yes24.com/document/4597770)

 3. 해당 서평단 모집 포스트를 본인 블로그로 스크랩 해주세요^^!

 페이스북을 사용하신다면 포스트를 페이스북에 공유하신 뒤 댓글로 알려주세요!

 4. 리뷰에 아래 문구를 꼭 넣어주세요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5. 리뷰를 쓰신 뒤 함께 쓰는 블로그 ‘리뷰 썼어요! 게시판에 글을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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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9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