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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어디나 있을 수 있되 아무데도 없는 - 유토피아 | 서평 2010-09-02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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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 최성일의 기획리뷰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의 『유토피아(Utopia)』(주경철 옮김, 을유문화사, 2007)가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9-1536)의 『바보 예찬(Eloge de la Folie)』(문경자 옮김, 랜덤하우스중앙, 2006)에 견줘 덜 흥미로운 것은, 내가 읽은 한국어판 「옮긴이 서문」의 어떤 명토 박음 때문이다.

옮긴이는 “이 책의 메시지를 너무 단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며, “유토피아 사회의 핵심을 재산공유제로 규정하고 모어를 최초의 공산주의 사상가로 받아들인 카우츠키 식의 해석이 대표적인 오독의 사례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옮긴이의 카우츠키 식 해석에 대한 ‘단죄’가 영 불편했다.

본문 제2부 16번 각주를 통해 “땅을 경작하지 않은 채 방치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자연법칙에 따라 그 땅을 이용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는 유토피아 사람들의 주장을 ‘제국주의 논리’로 규정한 것은 적절하다. 하지만 “이상적인 독자는 곧 이 책을 통해 영적인 가치에 눈뜨는 사람”(「해제」)이라는 데에는 다소 회의적이다.

사실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 5년간 머물렀던 포르투갈인 뱃사람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의 입을 빌려 수시로 사유재산제를 비판한다.

“그런데 모어 씨, 내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사유재산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돈이 모든 것의 척도로 남아 있는 한, 어떤 나라든 정의롭게 또 행복하게 통치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것들이 최악의 시민들 수중에 있는 한 정의는 불가능합니다. 재산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한정되어 있는 한 누구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수는 불안해하고 다수는 완전히 비참하게 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토머스 모어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곳에선 사람들이 잘살 수 없다고 반박한다.

“모든 사람들이 일을 안 하려고 할 텐데 어떻게 물자가 풍부하겠습니까? 이익을 얻을 희망이 없으면 자극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려 하고 게을러질 것입니다.”

제1부의 간략한 소개에 이어 제2부에선 유토피아의 지형, 강, 도시, 사람들, 관습, 제도, 법 등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가 유토피아의 이모저모를 설명한다.

“유토피아 사람들은 하루 24시간 중 여섯 시간만 일에 할당합니다. 이들은 오전에 세 시간 일하고 점심을 먹습니다. 점심식사를 한 후에는 두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고 다시 나머지 세 시간 일을 하러 갑니다. 그 후에 식사를 하고 8시에 취침하여 여덟 시간을 잡니다.”

「해제」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에라스무스의 『바보 예찬』에 화답한 작품이다. “이 텍스트에 모어는 라틴어 식으로 ‘누스쿠아마Nusquama(아무데에도 없는 곳)’라는 제목을 붙였고, 에라스무스와 모어는 서신교환을 하면서 이 저작을 ‘우리의 누스쿠아마’라고 불렀다. 모어는 영국으로 돌아온 다음 라틴어 식 이름인 누스쿠아마를 그리스어 식 이름인 유토피아Utopia로 바꾸었다.”

유토피아는 ‘아무데에도 없는 곳’이지만, 어디에나 있다. 우리는 소장 국문학자 서신혜의 『조선인의 유토피아』(문학동네, 2010)에서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동양의 이상사회는, 모든 것이 천부적으로 충족된 신화적 이상공간인 산해경형(山海經型), 도교적 이상공간이되 인간이 거주할 수 없는 신국(神國)인 삼신산형(三神山型), 인위적 권력을 배제하여 현실 속에 이룬 이상공간인 무릉도원형(武陵桃源型), 현실 속에 이룩한 유교적 이상공간인 대동사회형(大同社會型)으로 나뉜다.”

우리 옛 선조들의 문집이나 각종 설화에도 이상향을 가리키는 표현은 숱하다. “옥야(沃野)는 비옥한 땅을 나타내는 말이니 뛰어난 생산력을 강조한 용어이고, 복지(福地)는 아름다운 계곡이나 동굴 속 세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낙토(樂土)는 낙원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세상 힘든 것이 없는 즐거운 땅이라는 의미이며, 부산(富山)은 물자가 풍족하여 가난이 없다는 의미를, 선경(仙境)은 신선이 살 만큼 깨끗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이상향을 나타내는 또 다른 이름으로는 청학동(靑鶴洞), 이화동(梨花洞), 동천(洞天), 단구(丹邱), 회룡굴(回龍窟) 등이 있다. 한편 다산 정약용이 소개한 미원(薇源)은 우리 선인들이 그려온 이상세계와 그리 다르지 않다.

“세상과 단절하여 오가지 않으면서, 누구나 땀 흘려 일하며, 최소한의 예의범절로 사회의 규칙을 지켜가는 소규모 가족 공동체가 바로 우리 선인들이 그린 이상세계요, 또한 미원이라는 이상세계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꿈꾼 세계’에서 안평대군과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의 비중은 높다. <몽유도원도>는 안견(安堅)이 안평대군의 명을 받들어 그렸다. 안평대군이 꾼 꿈 이야기를 토대로 안견은 사흘 만에 <몽유도원도>를 완성했다. 그런데 안평대군의 꿈속에 등장한 인물들의 엇갈린 행보는 꽤 시사적이다.

프랑스 과학자 알베르 자카르(Albert Jacquard, 1925- )에게 유토피아는 ‘바람직한 미래상’이다. 또 그걸 제시하는 것은 일종의 당위다. 알베르 자카르의 『나의 유토피아(Mon Utopie)』(채계병 옮김, 이카루스미디어, 2009)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것이 하나의 의무인 나이가 되었다.”

본질적으로 그의 “유토피아는 교육에 관한 계획”이다. 하지만 “실현할 수 없는 꿈을 묘사하는데 그치는 유토피아는 유용하기보다는 해롭다.” “반면 ‘왜 안 되는데?’라는 반문으로 받아들여질 때 유토피아는 역동적 창조력의 근원으로 새롭게 힘을 얻을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알베르 자카르는 오늘날 현실과의 괴리에도 불구하고 근본적 변화 계획이 ‘왜 안 되는데?’라는 반문으로 받아들여지는 영역들 중 몇 가지를 든다. 그중에서 “치료가 행해져야 하는 것은 치료로 인해 앞으로 사회에 발생할 수익 때문이 아니라 환자가 치료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공동체는 당연히 그에 대한 도움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치료받을 권리」)

「정보에 대한 권리」의 측면에선 “첨단 정보과학 기술의 행복한 귀결은 중요하지만 그 영향이 너무 새롭고 광범위해 그 위험성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알베르 자카르가 제시하는 유토피아의 틀은 다음과 같다.

“진화의 고리 한마디를 보태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인간, 어떤 종도 이제까지 탐험하지 못한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는 인간,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 인간, 특히 자신이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고 이해하는 인간이다.”

일견 비슷해보여도 ‘유토피아 이야기’ 세 권의 구색은 제각각이다. 과학평론가 이인식이 쓰고 엮은 『유토피아 이야기』(갤리온, 2007)는 “이상사회를 묘사한 대표적인 저술을 문학작품 위주로 골라서 그 내용을 간추려 놓은 유토피아 길라잡이”다. 플라톤의 『국가』부터 조지 오웰의 『1984』까지 유토피아 걸작 아홉 편에 대해서 저자와 줄거리를 살피고 중요한 내용을 발췌했다.

서양의 이상사회는 코케인, 아르카디아, 천년왕국, 유토피아의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먼저 코케인(Cockayne)은 가장 환상적이다. “도처에 꿀과 포도주 강물이 넘쳐흐르고 누구나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는 지상낙원이다. 모든 사람이 성과 노동에서 해방되어, 환희와 열락으로 세월 가는 줄 모르는 환락향이다. 코케인은 농민과 노동자 등 가난한 사람이 꿈꾸는 천국이다. 세계 각국의 민담과 설화에는 코케인에의 소망이 담겨 있다.”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앙의 산악지대를 가리키는 아르카디아(Arcadia)는 “아름다운 풍광과 순박한 인정을 지닌 목가적 이상향을 뜻한다.” 무한한 풍요의 세계라는 점에서 코케인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코케인이 무절제한 쾌락을 추구하는 반면 “아르카디아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인간의 절제가 있다.” 아르카디아는 “자연적 풍요의 개념에 도덕적 의미가 첨가된 이상사회”다.

천년왕국(Millennium)은 성서의 「요한계시록」에서 유래한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예수가 재림하여 그의 왕국을 건설한 후 최후의 심판이 오기까지 천 년 동안 지배하게 되어 있다. 천년왕국은 역사의 종말이 오기 전에 의롭고 착한 사람들만이 살 수 있는 이상향이다.” 유토피아는 세 유형에 비해 현실적이지만, 이들의 핵심 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

“네 유형의 이상사회는 성격을 달리한다. 코케인과 아르카디아는 과거에 속하지만 천년왕국과 유토피아는 미래에 존재한다. 코케인이 인간의 욕구 충족이 포화 상태인 환락원이라면 아르카디아는 욕망이 절제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안식의 고향이다. 천년왕국은 신의 섭리에 의해 실현되지만, 유토피아는 인간의 의지로 성취된다.”

‘유토피아 이야기’의 원조 격인 루이스 멈퍼드(Lewis Mumford, 1895-1990)의 『유토피아 이야기(The Story of Utopias)』(박홍규 옮김, 텍스트, 2010)에선 유토피아를 도피 유토피아와 재건 유토피아로 구분한다.

“도피 유토피아는 외계를 그대로 방치하는 반면, 재건 유토피아는 외계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재건 유토피아는 사람들이 그 생활 조건 위에서 유토피아와 교섭할 수 있게 된다. 도피 유토피아는 사상누각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고, 재건 유토피아는 측량사나 건축가나 벽돌공과 상담하여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집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루이스 멈퍼드는 유토피아라는 분리된 현실을 탐구한다. “이상국으로 분류되는 유토피아 그 자체는, 훌륭한 도시라는 형태의 공동체와 함께 ‘좋은 생활’을 과감하게 추구하는 하나의 독립된 세계다.” 개인의 유토피아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행위로 충분히 알 수 있다. “유토피아는 그것을 낳은 세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적이고 따뜻하며 즐거운 곳”이며, “우리가 유토피아를 여행하는 유일한 이유는 유토피아를 넘어서기 위해서다.”

문학평론가 임철규의 『왜 유토피아인가』(민음사, 1994/한길사, 2009)는 ‘유토피아, 문학, 이데올로기에 관한 비평’이다. 여기선 이 책의 표제 글만 살펴본다. 먼저 유토피아의 뜻풀이다. “이 말은 그 어원 자체가 어원상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뜻 때문인지 부정적인 동시에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 어디에도 없는 곳’은 부정적인 측면으로 “비현실적이고 실현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긍정적인 측면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꿈이 실현되는, 그리고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는 모든 것이 제거되어 욕망과 그 성취 사이에 그 어떤 긴장과 대립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곳’”이다.

“어떤 개념에 기대든 간에 유토피아는 이상사회를 표방하는 까닭에 당위의 세계이며, 현실에 대한 제도적인 비판과 개혁을 위한 제안을 하므로 또한 규범의 세계”다. 유토피아적 비전은 미래를 지향한다. “유토피아는 도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역사와 유토피아는 일치하지 않는다. “지금 현재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유토피아로 향하는 노력이지 그 성취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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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귀화 한국인 - 박노자의 사회비평 에세이와 한국 근대사 발견 | 서평 2009-09-08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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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 최성일의 기획리뷰
박노자 교수(이하 직함 생략)의 책은 두 갈래다. 사회비평 에세이와 한국 근대사의 발견이다. 여기에 허동현 교수와의 역사 논쟁이 더해진다. 사회비평 에세이로는 박노자라는 이름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킨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신문사, 2001)을 위시해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한겨레신문사, 2002), 『하얀 가면의 제국』(한겨레신문사, 2003), 『당신들의 대한민국 2』(한겨레출판, 2006)가 있다.

사회비평 에세이도 둘로 나뉘는데 『당신들의 대한민국 1, 2』가 우리 사회 내부에 초점을 맞춘다면, ‘북유럽 사회 탐험’과 ‘오리엔탈리즘, 서구 중심의 역사를 넘어’를 주제로 하는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하얀 가면의 제국』은 나라 바깥의 사정에 비춰 우리 사회의 현실을 짚어본다.

한국 근대사의 발견은 박노자의 매우 뛰어난 우리말 구사력과 더불어 우리를 놀라게 하는 그의 특장과 관련이 있다. 『나를 배반한 역사』(인물과사상사, 2003)에서 박노자는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지난날에 대해 이야기한다. 박노자의 한국 근대사 발견은 ‘구한말’, ‘개화기’, ‘애국계몽기’ 등으로 불리는 1900년 전후에서 혜안을 발휘한다. 『나를 배반한 역사』의 속편에 해당하는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인물과사상사, 2005)는 전편과 함께 고품격 대중역사서로 볼 수 있다. 『우승열패의 신화』(한겨레신문사, 2005)는 학술서의 성격이 짙다.

박노자-허동현 논쟁은 우리 사회에서 보기 드문 생산적인 논쟁으로 학계와 독서계에 두루 화제를 모았다. 한국 근∙현대 100년을 둘러싼 두 사람의 논쟁은 『우리 역사 최전선』(푸른역사, 2003)과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푸른역사, 2005)에 담겨 있다. 역사논쟁의 속편은 박노자와 허동현을 ‘국제적 진보주의자’와 ‘민족주의적 시민주의자’로 맞댄다.

박노자의 근간 『당신들의 대한민국 2』는 그의 명성에 값한다. 성리학적 금욕주의와 개신교적 순결주의가 뒤섞인 도덕주의의 허상을 드러낸 것부터 그렇다. 대한민국 지배층이 “들먹이는 ‘도덕’의 실제 모습은 위선과 강압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들이 그런 가치관을 사회에 강요하려 하는 진짜 이유가 궁금하다.

그것은 “예전 사회의 선례를 이용하여 도덕군자의 탈을 쓰는 것이다.” 그래야 “‘아랫사람’의 인격을 짓밟음으로써 그 신분적 위치를 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학생을 성추행한 교수가 기껏해야 몇 개월 정직 처분을 받아도 ‘야한 글’을 쓴 교수는 징역살이를 해야 하는 역설이 생겨난 것” 또한 억압적 신분제의 잔영이라는 것이다.

나는 박노자 덕분에 ‘호국불교’가 형용 모순임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진보적 교수’가 형용 모순적 표현이라고 지적한다. “교수란 ‘하고 싶은 공부’만 하는 것을 뜻하지 않”아서다. 우리가 박노자의 우리말 능력에 감탄하는 것은 단지 그의 어휘력과 표현력이 풍부해서만은 아니다.

우리는 그의 적확한 한국어 구사력에 놀란다. 소위 ‘이라크 재건과 민주화’를 “이라크 자원의 약탈과 재식민화”로 교정하는 것도 그렇지만,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라는 표현이 어이없다는 지적은 통렬하기 짝이 없다. 신종 용어 ‘좌파 신자유주의’보다는 덜 부적절하나,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역시 실체가 불분명한 표현이다.

“곰을 ‘밀림의 주인’으로 부르면 참 멋지게 들리듯이 3공과 5공 출신의 극우 관료군과 재벌가들을 ‘산업화 세력’으로, 자신의 운동 경력을 팔아 우파 진영에 편승한 중산계급, 귀족 대학 출신의 정객들을 ‘민주화 세력’으로 부르면 참 멋져 보이는 모양이다.”

박노자 책의 애독자로서 나는 그의 시각에 대체로 동의하고, 그의 관점을 존중한다. 다만, 특정 사안에 대해선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는데 군과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에 대한 견해가 그렇다. 또한 이것은 논의의 결을 세밀하게 따져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자칫 사소해 보이는 세부사항의 오류나 무리한 일반화로 인해 박노자가 펼친 논지의 타당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점들이 산발적으로나마 발견되는 것은 가장 아쉽게 생각되는 대목이다. 문헌 자료에 의존하는 경우보다는 박노자가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을 일반화할 때 무리수를 두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박노자 교수가 군 복무의 폐해를 지적한 대목은 무리한 일반화의 사례로 볼 수 있다.

“한국의 대학교 교수로서 내가 느낀 것은, 군복무가 학생들의 학습능력과 학습효과를 가차없이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학생은 특전사 복무 이후에 신경박약증, 악몽, 손떨림, 대인관계 기피 등 구타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외국어 공부를 아예 중단하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가지 않더라도, 군대에 갔다 온 남학생들은 대부분 교수를 공포의 대상인 ‘장교’들과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여 교수와 접촉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느끼고 최소화하려 한다.”

군복무가 학습능력과 학습효과를 저하한다는 주장도 동의하기 어려우나, 이른바 ‘예비역’이 교수와의 접촉을 꺼리는 이유는 설득력이 떨어지며 선입견의 산물로 보인다. 학생 다수는 군에 가기 전, 초중고교에서 이미 ‘스승’과의 관계가 틀어진다. 적어도 내게는 초중고교에서 만난 선생님의 대부분이 극히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가 대학에서 가르친 학생들의 초중고교에서의 학교생활이 다들 윤택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글 쓰는 자에게 필화는 숙명이다. 그런 점에서 『당신들의 대한민국 2』를 읽으며 박노자에게 동병상련을 느꼈다. 법무부 산하 출입국관리사무소를 반한단체인 양 묘사한 그의 <한겨레> 칼럼이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한 모양이다. 이 칼럼은 신문 지면에서 읽은 바 있는데 박노자의 칼럼을 접하기 전에도 외국인 노동자가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겪는 고초는 알음알음으로 알게 된 중앙아시아 출신 귀화인의 전언을 통해 나도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아무튼 고소 취하의 명목이 된 박노자 사과문의 내용이 짠하다.

나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와 관련한 박노자의 의견을 전폭 지지한다. 반면, 민족주의와 폭력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그의 자세를 모두 수용하진 않는다. 그의 비폭력 노선은 근본주의 성향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어떤 형태의 민족주의도 해롭다는 명제가 성립한다면, 모든 근본주의는 악하다는 명제 또한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당신들의 대한민국 2』 ‘서문’에서 국가보안법과 혁명을 언급한 대목은, 사태 파악이 분명하고 논지가 적절하다는 것과는 별개로 박노자의 비폭력 평화주의와 맞서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 못하는 이유를 들어보자.

“한마디로 한국 지배계급에게 ‘이념적 타자를 때려잡는 법’이 여전히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모든 것을 빼앗긴 자들의 인내가 한계점에 도달할 때쯤, 결코 무뎌지지 않는 한국 지배자들의 ‘전가의 보도’ 국보법은 그 효력을 만천하에 보일지도 모른다.”

다음은 혁명을 언급한 구절이다. “혁명이란 모든 객관적인 조건들이 두루 성숙되고 특별한 대내외적 계기가 주어질 때만 일어난다. 그런데 그꾷한 일이 가능하려면 수많은 준비 작업들이 필요하고, 그중의 하나가 바로 ‘의식의 준비’다.” 혁명이 ‘의식화’에서 출발하지만, 혁명은 끝내 피를 요구하지 않던가?

박노자는 인터뷰에 잘 응하는 저자다. 『21세기를 바꾸는 상상력』(한겨레신문사, 2005)에 실린 인터뷰는 그 중 하나다. 강연에 이어진 질의응답에서 어떤 질문자가 철저한 이상주의자와 철저한 현실주의자 친구 사이에 끼인 자기 신세의 고달픔을 호소한 데 대한 박노자의 답변이 흥미롭다.

“제 동창 한 명이 모스크바에 있는 삼성 지사(支社)에 취직한 적이 있습니다. 저와 같이 1991년에 고려대학교에서 유학도 한 친구인데, 이건희 회장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었을 때는 저를 만나줄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회사에서 얼마 안 있다가 보스하고 트러블이 있어서 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래요. 제한적이나마 제 개인적 경험으로는 그런 곳에 계신 분은 아마 만나고 싶어도 만날 시간이 없을 텐데 차라리 수배당한 친구가 더 만나기 편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이 인터뷰는 박노자가 필명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아시다시피 박노자는 귀화인이다. 하지만 이름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라는 본명을 그대로 쓰고 있다. 본관을 창본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러시아어로 ‘발로자’는 블라디미르의 애칭이다. 송영 소설집 『발로자를 위하여』(창작과비평사, 2003)의 표제작은 박노자를 모델로 한다.

작중인물과 실존모델을 하나로 여기는 촌스러운 소설 독법을 무릅쓴다면, 박노자는 “그가 나고 자란 그 도시에 대해 다소 지나칠 정도로 자부심을 갖고 있”고, “기회 있을 때마다 폭력에 대한 자기의 혐오감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여기서 그 도시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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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캐나다 작가의 새로운 소설 -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와 『셀프』 | 서평 2009-09-08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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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 최성일의 기획리뷰
어떤 책이 많이 팔리고 널리 읽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런데 많이 팔렸다고 다 읽히는 건 아니다. 책을 사는 것과 구입한 책을 읽는 일이 별개일 수 있어서다. 캐나다 작가 얀 마텔의 장편소설 『파이 이야기』(공경희 옮김, 작가정신, 2004)는 잘 팔리고 많이 읽히는 책이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얀 마텔(Yann Martel)
소리 소문 없이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기 때문이다. 한국어판을 펴낸 출판사는 이 책의 마케팅 포인트로 세 가지를 내세웠다. 제34회 부커상 수상작,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그리고 영화화가 진행 중인 점을 들었다. 그러나 이 세 요소는 우리 독자들이 이 책을 구입하여 읽는데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도 약발이 안 먹히는 판국에 영어권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문학상으로 우리 독자들을 유인하는 건 무리다. 외국에서 베스트셀러였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걸 시사할 따름이다. 영화의 원작 소설은 영화가 개봉되어야 독자의 관심을 끈다.

『파이 이야기』가 소리 소문 없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소설 자체의 매력 덕분이다. 흥미진진한 내용의 『파이 이야기』는 단숨에 읽힌다. 아주 재미있다. 그런데 나는 이 작품의 내용을 살피기에 앞서 이 소설의 형식에 먼저 주목하고 싶다.

모두 100장으로 이뤄진 소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는 과거와 현재―작중인물인 화자와 소설을 쓰기 위한 취재를 하는 작가의 시점―가 교차하고 있으나, 프롤로그라기보다는 작품의 전사(前史, prehistory)라고 할 수 있다. 2부와 3부는 본론과 에필로그로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2부와 3부의 몇 장은 독자를 안심시키는 1부의 마지막 구절이 반어적 표현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태평양에서의 기나긴 표류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90~92장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90장은 실어증이 환각상태의 대화로 표현되는 듯하다. 한 페이지에 불과한 91장은 “끔찍한 상태였다.”

거대한 해초 덩어리 섬의 상륙기라고 할 수 있는 92장은 그 내용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기보다는 전반적으로 모호하고 흐릿하다. 마치 꿈결이 아닌가 싶다. 식충 섬에 서식하는 “독특한 식물”은 소설의 기괴함을 더하는 구실을 한다. 그러나 그로테스크함의 절정은 아직 남아 있다.

1부에선 주인공의 이름과 종교가 눈길을 끈다. 소설의 주인공은 인도 소년 피신 몰리토 파텔이다. ‘피신 몰리토’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수영장 이름을 딴 것이다. 이름과 관련한 또 하나의 특이사항은 사티시 쿠마르가 매우 흔한 이름이라는 점이다. 파이 파텔이라고도 하는 소년은 세 가지 종교를 한꺼번에 믿는다.

“힌두교도들도 사랑의 용량에 있어서는 대머리 기독교도들과 같다고, 이슬람교도들이 모든 사물에서 신을 보는 방식이 수염 난 힌두교도와 같고, 기독교도들이 신에게 헌신하는 마음은 모자를 쓴 이슬람교도와 같은 것 아니겠느냐고.”

인도의 폰디체리에서 사설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 파텔네 가족은 기르던 동물들을 동반하고 캐나다 이민 길에 오른다. 하지만 그들을 태운 파나마 선적의 일본 화물선 ‘침춤 호’는 필리핀 마닐라를 떠나 태평양으로 접어든지 나흘 째 되던 날, 미드웨이 제도로 가던 중 침몰하고 만다.

“책벌레에 신앙심 깊던 열여섯 살 순진한 소년” 파이 마텔은 태평양에 가라앉은 화물선에 탔던 유일한 생존자다. 소년의 극적인 생환은 소년이 세 종교를 섬긴 덕분일까? 그런 측면이 전혀 없는 것 같진 않다. “신을 믿는 것은 마음을 여는 것이고, 마음을 풀어놓는 것이고, 깊은 신뢰를 갖는 것이고, 자유로운 사랑의 행위다.”

아무튼 에필로그에서 화물선 실종사고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소년을 만나러온 일본 운수성 해양부 관리들은 소년의 생환과정을 못 믿는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년은 227일간이나 버텨 이 분야의 신기록을 세웠다.

“로버트슨 일가는 바다에서 38일간 버텼다. 선상 반란으로 유명한 ‘바운티 호’의 블라이 선장과 선원들은 47일간 버텼다. 스티븐 캘러한은 76일간 살아남았다. 허먼 멜빌에게 영감을 받아 포경선 에섹스 호의 침몰기를 쓴 오웬 체이스는 두 명의 동료와 83일간 버텼다. 중간에 무시무시한 섬에서 일주일간 머물긴 했지만, 베일리 일가는 118일간 버텼다. 1950년대에 ‘분’이라는 한국 상선의 선원이 173일간 태평양에서 버티다 목숨을 구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소년이 극한상황에서 살아남은 비결은 뭘까? “바쁘게 지냈다. 그게 생존의 열쇠였다. 구명보트에서, 또 뗏목에서, 언제나 할 일이 있었다.” 그러나 “구명보트에서의 삶은 생활이라고 할 게 없다. 그것은 몇 개 되지 않는 말을 가지고 하는 체스 게임의 마지막 판과 같다. 구성 요소는 더할 수 없이 간단하고, 판돈도 크지 않다. 생활은 육체적으로 너무나 힘들고, 정신적으로 죽어간다. 살아나고 싶다면 적응해야 한다.”

게다가 조난자가 되는 것은 “계속 원의 중심점이 되는 것과 같”고, “우울하고 지친, 상반된 것들 속에 붙잡힌 것과 같다.” 그리고 “상반되는 것 중 최악은 권태와 공포다.” 그런데 소년의 “가장 큰 바람은―구조보다도 큰 바람은―책을 한 권 갖는 것이었다.”

“절대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가 담긴 책. 읽고 또 읽어도 매번 새로운 시각으로 모르던 것을 얻을 수 있는 책. 아쉽게도 구명보트에는 성서가 없었다. 나는 크리슈나의 말이라는 은혜 없이 부서진 전차에 탄 서글픈 아르주나 꼴이었다. 처음 캐나다 호텔 방에서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성서를 봤을 때, 난 울음을 터뜨렸다.”

일본 운수성 관리들이 소년을 믿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소년과 함께 표류한 대상 때문이다. 소년은 벵골 산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구명보트로 태평양을 건넜다. “나를 진정시킨 것은 바로 리처드 파커였다.” 소년은 자신과 함께 한 호랑이에게 진한 애정을 느낀다.

“정말로 사랑해. 사랑한다, 리처드 파커. 지금 네가 없다면 난 어째야 좋을지 모를 거야. 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 못 견뎠을 거야. 희망이 없어서 죽을 거야. 포기하지 마, 리처드 파커. 포기하면 안 돼. 내가 육지에 데려다줄게. 약속할게. 약속한다구!”

끝까지 못 믿는 일본 관리들에게 소년이 들려준 “말이 되는 이야기”, 곧 다른 버전의 간추린 생환과정은 엽기적이다. 작가는 왜 이렇듯 그로테스크하고 기괴하며 엽기적인 장치들을 만들어 놨을까? 소설은 동화가 아니라서? 독자의 감정이입을 억제하기 위해? 현실은 냉혹하기 때문에? 속도에 대한 성찰을 옮겨 적는 것으로 『파이 이야기』에 대한 리뷰를 마무리하겠다.

“화물선에서는, 태평양이 지나가는 물고기 떼 외에 다른 생명이 살지 않는 물의 황무지라고 생각했다. 화물선이 물고기 떼를 보지 못할 만큼 빨리 달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후 알았다. (중략) 야생동물을 보고 싶으면 걸어야 한다. 조용히 걸어서 숲을 탐사해야 한다. 바다도 마찬가지다. 태평양에 사는 풍요로운 바다생물을 구경하려면, 걷는 속도로 천천히 노닐어야 한다.”

얀 마텔의 또 다른 장편소설 『셀프』(황보석 옮김, 작가정신, 2006)에도 특이한 형식이 보인다. 두 장으로 구성됐는데 1장은 400쪽이 넘지만 2장은 단 1쪽에 불과하다. 그리고 원문(영어가 아닌 외국어)과 번역문(영어)을 나란히 맞댄 대목이 적잖다. 이 소설에 관한 내용은 ‘역자 후기’의 신세를 지겠다.

번역자는 『셀프』를 “진지한 독자가 아니라면 읽지 말아야 할 소설”로 간주한다. “첫머리에서부터 독창적이고 매혹적인 서술로 놀라우리만큼 재미있게 전개되어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기발한 문체와 구성, 그리고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 통찰로 독자들을 휘어잡는 이 작품은, 소설의 주된 목적이 재미와 감동이라면, 그 목적을 완벽하게 충족시키고 있다.”

또 “한마디로, 『셀프』는 사회란 무엇이며 무엇이 누구를 현재의 그로 만들었는가 하는 질문들을 통해 한 인간의 여정을 탐구하는 소설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버리는 그 엄청난 비극의 힘을 다룬 이 소설에서 비극적인 사건들은 주인공의 성을 바꾸고, 따라서 세상에 대한 인식과 상호작용까지도 바꾼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더 이상 잘 표현될 수가 없을 만큼 절절히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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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통기한’ 지난 ‘대한민국’ 체류기 - J. 스콧 버거슨의 불유쾌한 한국 탐색 | 서평 2009-09-08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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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 최성일의 기획리뷰
나는 이웃이 싫다

이웃을 잘 만나야 한다. 중간층에 껴 사는 아파트와 다세대 주택 거주자는 위아래 이웃을 잘 만나야 한다. 나는 평균에 약간 못 미치는 이웃을 만난 것 같다. 한 번은 늦은 시간에 아파트 경비아저씨 두 분이 초인종을 눌렀다. 아래층에서 위층이 시끄럽다는 항의가 들어왔다는 거다.

오늘은 우리 아이들이 유별나게 놀았나, 하는 생각과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듦과 동시에 짜증이 났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층간 소음에 아주 취약하여 아래 위층의 약간 큰 소리는 웬만하면 다 들린다. 내가 글을 쓰는 방에선 이따금 아래층의 누군가가 듣거나 연주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아래층 할머니가 아래층은 안방 옆 작은 방 베란다를 텄으니 아파트 구조를 바꾸지 않은 우리 집 작은 방 베란다를 물청소하지 말아 달래서 집사람이 그러겠다고도 했다. 우리 딸내미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래층 할머니가 손자들이 썼던 초등학생 물품을 몇 개 가져오셨다. 나는 괜찮다, 필요 없다며 받지 않았다.

위층은 강적이다. 십대 중후반의 세 딸이 서로, 딸들과 엄마가 자주 싸운다. 아침저녁으로 아주 시끄럽게. 직접 찾아가 조용히 해달라고 해도 소용없다. 한 번은 승강기에서 그 집 딸(몇째 딸인지 모름)을 타이르며 훈계하다가 본전도 못 건졌다. “아저씨네도 싸우던데요, 뭐.” 며칠 전 경비실에 피아노 소리가 시끄럽다는 ‘민원’이 접수됐다는 인터폰을 받았다.

나는 경비아저씨에게 누가 민원을 넣었느냐고 물었다. 위층이라고 했다. 정말 몹시 화가 났다. 경비실까지 내려가 그 사실을 재확인한 다음, 분을 삭이며 윗집 초인종을 눌렀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 집 딸(역시 몇째인지는 모름)이 죄송하다는 말을 거듭했다. 나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 앞으론 가만있지 않겠다고 했다. 윗집의 앞집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개인 교습을 한다.

도대체 뭘 각성하라는 건지

올 초 입주를 시작한 우리 집 바로 뒤편의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는 위층보다 더한 강적이 몇 입주한 모양이다. 어느 날, 그 아파트 단지 정문에 목불인견의 현수막 세 개가 나붙었다.

“입주민의 재산을 갈아먹고 있는/ ○○○ ○○은 각성하라”
“○○○ ○○ 이용하지 않는/ 자랑스런 △△△ 입주민”
“우리의 얼굴인 정문을 막는 ○○○ ○○(슈퍼)/ 조그만 물건 하나라도 팔아 드릴 수 없습니다

이러는 게 자기 얼굴에 똥칠하는 짓인지는 아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모르겠지. 현수막 두 개에는 친절하게도 “경고: CCTV 작동 중 무단 철거 시 형사 고발 조치함”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갈아먹고’는 ‘갉아먹고’의 오자? 슈퍼 주인에게 이건 명백한 영업방해고 명예훼손으로 고소해도 된다 했더니, 주인은 그래서 현수막을 내건 주체를 전혀 안 밝혔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놈의 집값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정상적인 영업을 하는 슈퍼마켓을 이런 식으로 매도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민주화운동의 부작용도 심각하다. 아무튼 가급적 먼 곳에 거주하는 이웃을 사귀어야 할 것 같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선 옆 동의 이웃을, 아파트 단지는 좀 떨어져 있는 단지의 거주자를 말이다. 그런데 우방(友邦)이라는 나라는 가깝거나 멀리 있거나 다 조심해야 한다.

너희들의 ‘대한민국’

내게 J. 스콧 버거슨(J. Scott Burgeson, 1967- ) 의 『대한민국 사용 후기』(안종설 옮김, 갤리온, 2007)는 ‘유통기한’이 지난 느낌이다. 그것도 꽤 한참. 표지의 경고문구가 눈길을 끈다. “고집스럽게 대한민국을 사랑하시는 분들은 절대로 이 책을 읽지 마십시오.” 국가관이 트릿한 나는 아무 상관없겠네. 책 내용에 대한 공감도는 낙차가 크다. 전반적으로는 수준 이하다.

스콧 버거슨의 한국과 한국인 비판은 따분하다. 그 이유는? 우선, 그의 시각은 지나치게 표피적이다. 무리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에게 우리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박노자의 깨우침은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그의 장점은 현장체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약 10년의 체류기간은 어떤 나라에 대해 단정을 내리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이나마 그는 줄곧 머물지 않았고, 이 나라 저 나라를 왔다 갔다 했다. 내 말은 신중해야 한다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재단을 하기 쉽다. 스콧 버거슨뫀 우리를 재단한다는 혐의가 짙다.

또한 그는 자신이 미국 출신 백인 남자라는 사실을 잊은 듯하다. 나는 그를 차별대우한 한국인을 모두 찾아서 최소한의 자긍심을 지킨 것에 대해 공치사를 하고 싶다. 특히, 남한에서 미국인 백인 남자를 박대한 것에 대해. 그에게 주한 미국대사관과 대사관저의 위치가 왜 거기에 있는지 톺아보라는 것은 애당초 무리다.

한동안 하루에 두 번 넘게 미 대사관 직원 관저의 높다란 담벼락 길을 지나다닌 서평전문지 기자의 씁쓸한 기분을, 그는 알기나 할까? 나는 그 모퉁이에 있던,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진 백상미술관 언저리에서 백인 남자와 한국인 여자 커플을 볼 때마다 심한 부조화를 느꼈다. 그들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정말 이상하다

다음은 스콧 버거슨이 『발칙한 한국학』(주윤정·최세희 옮김, 이끌리오, 2002)의 앞부분에서 나열한 그가 우리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는 목록의 일부다.

“한국인들은 굉장히 민족주의적이지만, 해방 후 두 강대국에 의해 두 동강 나 끔찍한 전쟁을 치른 것도 참 이상하다. 오늘날의 적지 않은 한국인이 통일보다는 차라리 분단을 선호한다고 한다. 진정한 민족주의의 목표는 조국통일이 아닌가? 하여튼 참 이상이다.”

이상할 것도 되게 없다. 한국인은 굉장히 민족주의적인 게 아니라 다소 민족적이다. 식민지배, 분단, 동족상잔의 비극은 힘이 없어서 강대국에 휘둘리느라 그리됐다. 우리는 여전히 선택의 여지가 좁다. 주어진 대로 그냥 사는 거다. ‘민족적’인 것의 진정한 목표가 뭔지는 나도 모르겠다.

『맥시멈 코리아(개정판)』(자작나무, 1999)는 미니멈 코리아다. 이 책에 실린 1998년의 비무장지대 ‘견문기’는, 휴전선 인근에서 군 복무를 하고 그 중 서너 달을 DMZ 안의 GP에서 지냈던 나로선 하품만 나온다. 스콧 버거슨은 「한국인에 대한 10가지 주의사항」이라는 글에서 짐짓 우리의 둔한 시간감각을 헤아려주는 척한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실제보다 30분 이른 일본의 표준시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모르는 듯싶다.

스콧 버거슨은 우리를 조롱한다. 더욱이 그는 자신을 “바보스런 외국인” 따위로 낮추면서 조롱을 정당화한다. 그가 태어난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개판인지”는 내가 알 바 아니다. 한국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다. 다만, 나는 그의 한국에 관한 책 세 권을 혐한 서적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이 나라의 구멍가게 주인아저씨, 술집 점원, 호텔 프런트데스크, 은행원, 관광안내센터 등의 불친절은 내외국인을 구별하지 않는다. 보통의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대략 불친절하다. 또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글을 쓰는 직업과 책을 엮는 작업에 대해 일반적으로 무관심하다. 어쨌든 ‘기획 리뷰’를 모아 엮는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넷째 권에 이 글은 넣지 않겠다(마음이 바뀔지 몰라 다짐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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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불의에 대한 의식이다" - '민주적 사회주의자' 조지 오웰 | 서평 2009-09-08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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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 최성일의 기획리뷰
기억력이 시원찮다. 1984년 새해 벽두, 당시로선 매우 드문 위성‘이원’생중계로 접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두고 하는 말이다. 1월 2일 오전에 KBS에서 중계방송을 한 것 같은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최근 ‘새 시대 큰 인물’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한국이 낳은 천재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규희 글·문진화 그림, 랜덤하우스코리아)의 이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84년 1월 1일 제야의 종이 울리고 이제 막 새해가 시작되었을 때였습니다. 미국,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 사람들은 모두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았습니다. (…) 눈이 하얗게 내린 새벽 두 시, 한국인들도 잔뜩 궁금한 얼굴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 백남준의 시작 신호가 나가자마자 뉴욕의 스튜디오와 파리의 스튜디오에서는 동시에 여러 예술가들의 모습이 위성을 통해 화면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쨌든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소문난 잔치였다. 볼 게 없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의 눈에 비친 ‘비디오 아트’는 판독 불가였다. 여기에 원활하지 못한 위성중계와 국내 스튜디오 사회자와 해설자의 답답한 진행이 더해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얼마 보다 말았다.

Back to the 1984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
그래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의 『1984년』(김일엽 옮김, 지혜, 1984)을 읽을 단초가 된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잠깐 1984년을 돌아보자. 이 해에 열린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반쪽 대회였다. 구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빌미로 미국과 그 세력 아래 있는 나라들이 모스크바 올림픽 참가를 거부하자, 이번에는 구소련과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LA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로또 복권 1등 당첨번호가 2회 연속 나오지 않은 직후에 개최된 거나 진배없는 88서울올림픽의 대박은 예정된 것이었다. 아무튼 1984년 어느 주말의 나른한 오후, KBS가 틀어준 TV 영화로 보이는 소품의 여주인공에게 내 마음을 빼앗겼다. 하지만 나는 구소련 국적의 체조선수로 설정된 이 여배우의 이름도, 상대역 남자배우의 경기종목도, 영화의 제목도 모른다. 영화는 미·소 두 나라 남녀운동선수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다.

1984년의 학교생활은 끔찍했던 1학년 때보다는 한결 나았다. 1학년 때 급우를 의자로 내리쳐서 정학처분을 받아 도서관에서 안면을 익힌 녀석과 한 반이 되었다. 그것도 앞뒤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런데 겪어보니 그 녀석은 심성이 착했다. 학교생활이 나아진 것은 담임선생님을 잘 만난 덕분이다.

이 선생님은, 앞서 존 테일러 개토 편에서 밝혔듯, 다시 뵙고 싶은 분이다. 선생님은 내가 다닌 학교에서 서울에 있는 명문 사립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기셨다. 다시 그 학교를 그만두고 학원 강사가 되셨다고 한다. 이후 선생님의 거취에 대해선 모른다. 그런데 선생님이 사립학교를 그만둔 이유가 어떤 학생을 때렸기 때문이라 들었다. 교사를 쫓아낼 힘이 있는 학부모의 자제를 우리 선생님이 잘 혼내줬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부와 언론과 운동을 안 믿는다

『1984년』은 ‘빅 브라더’와 언어의 착종으로 기억된다. 빅 브라더는 물샐틈없는 감시체제를 상징한다. 가상국가인 오세아니아 진리성(眞理省)의 흰 건물 벽에는 이런 구호가 나붙어 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에리히 프롬은 오웰이 ‘이중사고(double think)’라는 새로운 말을 창조해냈다고 지적하는데, “이중사고란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신념을 마음속에 품고서,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이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나는 여론조사 결과를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 여론조사는 특정한 이해관계의 소산이다. 조사기관의 입맛에 따라 좌우되기도 한다. 스포츠중계 해설자의 해설 또한 편파적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때로는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특정 팀과 선수를 편들거나 까댄다. 너도 똑같은 놈 아니냐? 그래서 나는 어떤 사안에 대해 좋고 나쁨을 말할 때 ‘나는’을 앞세운다.

여론조사의 결과가 언론에서, 특히 신문지면에서 왜곡되는 걸 보면 정말이지 ‘왕짜증’이다. 아래는 ‘당신은 성공하셨습니까?’라는 주제를 다룬 모 방송사 프로그램에 관한 2007년 6월 4일자 어느 신문 기사의 일부다.

“제작진은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해 한국인의 성공 모델에 대한 인식을 조사했다. 그 결과 한국인은 자기 자신에게 사회 통념적 성공의 기준에서는 56.8점, 개인적 성공의 기준에서는 58.5점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삶의 만족도 조사’에서 평균적으로 나타나는 수준인 65점보다 낮은 수치다. 또 우리 국민 3명 가운데 2명은 ‘과거처럼 성공하기 어려워졌다’고 답했다.”

성공의 기준과 삶의 만족도를 숫자로 나타낸다는 것부터 극히 의심스럽긴 하다. 그런데 이 신문은 그런 기사 내용을 갖고서 이런 제목을 뽑았다. 「한국인 56% “난 사회적으로 성공”」 점수가 비율로 둔갑한 것이다. 기사 내용에서 보듯이 사회적 통념이나 개인적 성공의 기준에 따른 삶의 만족도는 그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56%가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꽤 높은 비율이다.

성공한 인물이나 존경하는 인물로는 번번이 거대재벌 총수와 재임기간이 가장 길었던 대통령이 손꼽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돈을 많이 모으고 권력을 오래 누린 것을 높게 평가하는 듯하다. 예전보다 신문·출판 면의 영향력이 감소했어도 출판사들은 여전히 자사가 펴낸 책이 신문에 나는 것을 중요시한다. 사회운동단체들마저 내실을 다지기보다는 홍보를 우선시하는 것 같아 아쉽다.

‘풍자 우화’ 소설의 진수

『동물농장』(도정일 옮김, 민음사, 1998)은 ‘풍자 우화’ 소설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냉전 체제의 와해 덕분에 ‘반공 소설’의 굴레가 벗겨져 다행스럽다. ‘작품 해설’에 나타난 대로 소설의 등장 동물과 실존인물의 연결고리는 뚜렷하다. 동물농장의 우두머리인 ‘나폴레옹’은 스탈린이고, 나폴레옹과 적대관계인 ‘스노볼’은 트로츠키다.

“토론 때는 스노볼과 나폴레옹이 가장 활발했다. 그러나 다들 곧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두 수퇘지가 서로 합의에 도달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한쪽이 무슨 안을 내놓으면 한쪽에서는 어김없이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또 “스노볼이 뛰어난 연설로 자주 다수 지지를 받곤 했지만 막간 교섭으로 지지를 얻어내는 데는 나폴레옹이 한 수 위였다.” 동물농장 방어를 둘러싼 두 수퇘지의 의견 대립은 스탈린과 트로츠키가 각기 주장한 ‘일국사회주의론’과 ‘영구혁명론’을 반영한다.

“나폴레옹의 주장은 우선 무엇보다도 동물들이 총기를 구입해서 사용법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노볼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더 많은 비둘기들을 밖으로 파견해서 다른 농장들에서도 반란이 일어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폴레옹은 동물들이 자체 방어에 실패할 경우 농장은 인간들 손에 정복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고 스노볼은 반란이 도처에서 일어난다면 구태여 방어에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혁명의 교시를 설파한 늙은 수퇘지 ‘메이저’에게는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레닌의 측면이 있다. “과수원의 메이저 무덤에서 이제는 살점이 다 씻겨나가고 없는 메이저의 두개골을 파다가 깃대 밑동에 존즈의 총과 나란히 안치했다. 깃발 게양이 끝나면 동물들은 헛간으로 가기 전에 한 줄로 서서 메이저의 두개골 앞을 지나가며 존경을 표시해야 한다는 명령이 있었다.”

스노볼의 발언에서도 레닌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 있다. “전기가 있으면 마구간마다 전깃불, 온수와 냉수, 전열기 등을 공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외에도 탈곡기, 쟁기, 써레, 땅 고르는 롤러, 수확기, 건초 묶는 기계 등을 돌릴 수 있다고 말했다.” 레닌은 ‘공산주의는 전력(電力)’이라 강조했다.

짐수레 끄는 말 ‘복서’는 프롤레타리아와 연결된다. 우직하게 일만 하는. 그런 점에서 복서는 정해진 채탄량의 14배에 이르는 석탄 102톤을 캐낸 구소련의 광부 A. G. 스타하노프이고, 사회주의 중국의 국민적 영웅인 레이펑(雷鋒,『뇌봉』, 진광생 지음, 최성만·박태순 얿김, 실천문학사, 1993)이다.

다른 것이 지시하거나 상징하는 대상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생산하지 않으면서 소비하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은 ‘자본가’다. 돼지는 ‘혁명의 전위대’이자 ‘노멘클라투라’이고, 돼지들이 다른 동물을 깨우치는 것은 ‘의식화 활동’이랄 수 있다. <잉글랜드의 짐승들>이라는 노래는 인터내셔널 가(歌)다. 일곱 가지 계율의 내용이 변질하는 것은 ‘배반된 혁명’을 말한다.

어리석은 양(羊)들은 집권자와 선전원의 입맛에 맞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독재자의 지지기반이다. ‘나폴레옹빠’라고 하겠다. 무엇보다 오웰은 『동물농장』에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허구성을 앞서서 보여준다. “농장의 삶은 고되었다.” 식량 분배에 지나치게 엄격한 평등을 적용하는 것은 동물주의에 어긋난다는 것이 선전원의 설명이었다. “농장은 그 자체로는 전보다 부유해졌으면서도 거기 사는 동물들은 하나도 더 잘살지 못하는 (물론 돼지와 개들은 빼고) 그런 농장이 된 것 같았다.” 개들은 돼지들을 섬기는 ‘비밀경찰’ 체카(Cheka)다.

민주적 사회주의자

이러면 오웰을 흔하디흔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그의 하나쯤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웰은 투철한 민주적 사회주의자다. 「나는 왜 쓰는가」(도정일 번역)라는 글을 통해 오웰은 “1936년 이후 내가 진지하게 쓴 작품들은 그 한 줄 한 줄이 모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해’ 씌어졌다”고 말한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 의식, 곧 불의(不義)에 대한 의식이다. 책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 나는 나 자신에게 ‘자, 지금부터 나는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책을 쓰는 이유는 내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쓰는가」에서 오웰은 그의 작품을 거론한다. 『동물농장』은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 보고자 한, 그래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의식하면서 쓴 첫 소설이었다.” 『제국은 없다(Burmese Days)』(박경서 옮김, 서지원, 2002)는 그가 쓰고 싶었던 자연주의적 성향이 다소 배어있는 작품이다. “불행한 결말로 끝나고 미세한 묘사와 인상적인 직유로 가득 찬, 그리고 말이 소리 그 자체를 위해 사용되기도 하는 화려한 문장들 투성이의 그런 자연주의 소설”말이다.

“스페인 내전에 관한 나의 책 『카탈로니아 찬가』는 물론 솔직히 정치적인 소설이다. 그러나 그 소설 역시 어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리고 형식을 존중하면서 씌어진 것이다. 나는 그 작품에서 나 자신의 문학적 본능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진실의 전부를 이야기해 보려고 무척 노력했다. 그러나 우선 그 작품에는 신문 기사 등을 인용한 긴 장이 하나 있는데 그 장은 프랑코와 공모했다는 비난을 받은 트로츠키파를 변호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었다. 일이 년 시간이 지나면 보통의 독자들로선 흥미를 느끼지 못할 이런 장이 거기 끼어 있다는 것은 소설을 망칠 것이 분명했다. 내가 존경하는 비평가 한 사람은 그 장을 놓고 내게 훈계하기를 ‘왜 그런 장을 거기 넣었는가? 좋은 소설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저널리즘이 되고 말지 않았는가.’ 그 말은 옳았지만, 그러나 나로선 그렇게 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나는 당시 영국에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한 가지 사실―무고한 사람들이 엉뚱하게 비난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내가 분노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예 그 책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오웰이 처음으로 펴낸 책은 자전적 성격이 강한 소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신창용 옮김, 삼우반, 2003)이다. 이 작품은 1928년부터 1932년까지 겪어본 5년간의 밑바닥 삶이 바탕이 되었다. 무명작가이기에 필명을 써달라는 출판사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는 ‘조지 오웰’을 필명으로 삼는다. 그의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er Blair)다.

그가 나중에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다 “나는 30년이나 걸려서야 에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게 되었다”라고 쓴 걸 보면, 오웰은 그의 본명에 대해 불만이 없지 않았던 모양이다. 산문선집 『코끼리를 쏘다』(박경서 옮김, 실천문학사, 2003)에 수록된 「서점의 추억」에서 오웰은 헌책방에서 일하면서 느낀 가장 강한 인상으로 “진정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적다는 사실”을 든다.

“우리 가게에는 재미있는 책들이 많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책을 찾던 고객 중 10퍼센트 정도도 좋은 책과 나쁜 책을 쉽게 구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 서점에는 문학애호가들보다는 잡지의 창간호 따위를 구하려는 속물들이 더 많이 들락거렸고, 또 싼 책값조차 깎으려고 드는 동양 학생들도 자주 드나들었고, 조카들에게 생일 선물용으로 책을 사주려고 하는 멍청한 여자들도 꽤 많았다.”

오웰 산문선집을 우리말로 옮긴 박경서 교수는 ‘e시대의 절대문학 006’ 『조지 오웰-읽기의 즐거움』(살림출판사, 2005)에서 오웰의 “사회주의 사상의 본질은 스스로를 ‘반제국주의자’이자 ‘반파시스트’이며 ‘평등의 신봉자’라는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제국주의와 계급체계를 반대하고 영국 중산 계급의 다양한 사회주의자들을 공격하면서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사회주의 건설을 강조한다.”

평전 『자유_자연_반권력의 정신 조지 오웰』(이학사, 2003)에서 박홍규 교수는 오웰이 “분명 좌익이었으나,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좌익이었다”고 평한다. 오웰은 권위적인 좌익에게도 우익에 겨눈 잣대를 똑같이 들이대 비판했다. 박홍규 교수는 소련식 사회주의와 영미식 자본주의를 동시에 반대한 오웰의 사회주의를 ‘decency’라는 단어로 집약한다.

“흔히 ‘인간다운 품위’ 정도로 번역되는 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으나, 나는 ‘본질적인 품위, 무엇보다도 솔직한 관대함’으로 이해한다. 이는 어떤 도그마나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치적 교조주의나 계획적 사회 개혁 또는 종교적 절대주의 등에 반대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론총서 11’ 『오웰과 1984년』(김병익 편역, 문학과지성사, 1984)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영문학자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조지 오웰 작가론이 실려 있다. 결론의 한 대목이다.

“우리는 그의 솔직함, 그의 정력, 그의 자발적인 참여 없이는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시점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들은 우리가 어떤 다른 결론에 이르더라도 계속 그에게 존경을 보내야 할 자질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것들이 독립적이고 적극적일 때에만 진정한 가치를 갖는 자질들이다. 그의 작품과, 그의 생애와의 관계를 맺는 것은 그것을 읽어내는 것이지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거기에 실체로서, 목에 상처를 갖고 슬프고도 강한 얼굴로, 견고하면서도 노골적으로 씌어진 평범한 언어로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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