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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마지막 한 방, 《네메시스의 사자》 by 나카야마 시치리 | 기본 카테고리 2018-10-26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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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네메시스의 사자

나카야마 시치리 저/이연승 역
블루홀6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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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기준으로 믿고 보는 작가 반열에 등극한 나카야마 시치리 작가님의 '와타세 경부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복역중인 무차별 살인사건의 범인의 어머니가 같은 수법으로 무참히 살해당한다. 살해현장에 남아있는 '네메시스'라는 글자. 피해자는 거의 즉사였을 것이므로 다잉메시지라기보다 범인의 메시지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네메시스는 의분을 의미하는 그리스 신화 속 여신이다.

범죄자의 가족을 향한 의분, 더 나아가 온정 판결로 가해자의 마음의 응어리를 더 굳히는 사법체제와 경찰을 향한 복수가 아닐까 하는 와타세 경부의 불길한 예감대로 두 번째 사건이 발생하고 세 번째 사건을 향해 간다.

철면피 같은 가해자의 모습, 피해자 가족의 붕괴된 모습, 현대사회의 심판의 권위를 부여받은 사법체계의 주자들, 즉, 판사, 검사, 경찰들의 모습을 클로즈업하여 비춰준다. 그리고 사형의 존재가치에 대해 묻는다. 사실상 일본인의 80퍼센트 이상이 사형의 존치를 지지한다.

인간의 반성과 갱생이 가능한가? 바꿔 말하면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변할 수 있는가?

범죄의 대가로서 응당 받아야 할 형벌을 시행해야 하는가? 다시 기회를 주어야 하는가?

감정적으로는 전자를 택하게 된다. 쉽지 않은 문제이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자리에 선다는 것은 정말 보통일은 아닌 것이다.

그건 그렇고 작가님의 마지막 한 방, 역시 좋았다. 왠지 너무 술술 이차원적으로 평면적으로 사건이 종료되나 조금 실망하려 했는데 역시 뒤통수를 쳐주시니 맞고도 '그럼 그렇지.'하며 유쾌해지니 이건 무슨 조화인지...

와타세 경부님, 앞으로도 활약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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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읽은 세계사,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미술 이야기] by 안용태 | 기본 카테고리 2018-10-10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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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미술 이야기

안용태 저
생각의길 | 2018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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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잘 모르지만 미술관이 주는 특유의 분리감,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듯한 고요하고 흰 이미지가 좋아서 찾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정동길을 거닐다 서울 시립미술관에 들어가 전시회 보고 그 뜰에 앉아 광화문, 시청 일대가 어둑어둑해지는 것을 보는 것을 참 좋아했다. 동물원 옆 미술관인 과천 현대 미술관의 널찍한 뜰의 조각상들, 실내의 웅장하고 고전적인 느낌이 좋았다.

또한, 도쿄는 미술 혹은 미술 좋아하는 사람들의 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크고 작은 많은 미술관, 그리고 무척이나 다양하고 풍부한 레파토리들로 연중 심심할 틈이 없다. 이젠 꽤 오래된 건물로 인식되지만 롯폰기의 고층에 자리잡은 모리 미술관은 작품을 봐야 할지, 통유리창 밖의 야경을 봐야 할지 망설여질 정도로 공간 자체가 멋지다. 여의도 같은 분위기의 빌딩가인 신주쿠 서쪽 출구에 위치한 솜포재팬은 고흐의 해바라기를 소장하고 있어 장맛비 쏴쏴 내리던 날 굳이 찾아갔던 기억이 있다. 바깥은 회색빛이지만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면 갤러리 조명이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준다.

좋아하기에 더욱 잘 알고 싶고 제대로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잘 모르면 기껏해야 색감이 아름답거나 사실적이고 웅장한 묘사이거나 기존에 알고 있던 그림들 외엔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었다.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미술 이야기>는 가벼워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선사시대에서부터 현대 미술 직전까지 철학, 신화, 종교, 시대상, 미학 등 인류의 전 분야를 망라하여 미술의 역사를 설명해 주는 인문학 서적으로 손색이 없었다.

미술 하면 보통 보편적으로 많이 알려진 인상주의, 고전주의 정도를 떠올리는데 동굴에 소를 그리던 선사 시대부터 인간에게 표현의 욕구가 있었었고 주술의 의미를 담은 벽화들도 엄연한 미술 작품이라는 것을 배웠다. 인간의 문화의 산물이므로 그 시대의 인간들의 정치사상, 사회제도가 미술작품에도 반영되어 그 시대를 엿볼 수 있는 역사적 사료가 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깊이있지만 어렵지 않은 미술사를 공부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인물 중심, 즉, 화가 중심으로 미술을 바라보면 더욱 다채롭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좋아하는 미술을 더욱 제대로 즐기기 위해 앞으로도 공부할 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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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이성적이지만 규칙성 있는 행동패턴, [상식 밖의 경제학] by 댄 애리얼리 | 기본 카테고리 2018-10-0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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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상식 밖의 경제학 (10주년 기념 리커버 에디션)

댄 애리얼리 저/장석훈 역
청림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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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에, <괴짜 경제학> 시리즈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책도 비슷한 맥락의 행동경제학 책이다. 작년(2017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넛지>의 저자 리차드 탈러 교수도 행동경제학자이다. 인간이 완전히 이성적이며 의사결정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경제학의 대전제가 얼토당토않은 비현실이라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책에는 경제학적 결정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많은 의사결정에 활용할 수 있는 유용한 정보들이 많다. 인간의 비이성적이지만 일정한 규칙성과 일관성을 가지고 나타나는 인류 공통적인 특성이므로 나와 타인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유용한 것 같다. 저자가 제시하는 특징들이 내 삶에 여실히 나타난 것들을 떠올리며 실소가 터지기도 했고 무릎을 탁 치게 되기도 했다. 몇 가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비교를 좋아하는 사람들
: 사람 속에는 어떤 것의 절대적인 가치를 가격으로 측정할 수 있는 천부적인 기제가 없으므로 비교 대상이 있을 때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 가격대가 여러 개 있을 경우 중간 정도의 가격대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선택한다.

가족 식사를 할 때, 부모님의 40주년 결혼기념일, 아빠의 칠순 축하 등의 특별한 행사일 경우에는 가격대 중에서도 최고급을 선택한다. 가령, 조선호텔 뷔페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생신이나 가족 모임에서는 한정식이나 중식 코스에서 최고보다 한 단계 아래 정도의 코스를 항상 선택해 왔다. 왜냐하면 가장 비싼 코스에는 우리가 택한 코스에 한두 가지 특이한 요리가 추가되었을 뿐, 식사에 대한 만족도는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추가 비용을 더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공짜의 거역할 수 없는 마력
: 15센트짜리 린트 초콜릿과 1센트짜리 허쉬 키세스를 선택하는 비율이 7:3이었는데 1센트씩 할인하여 14센트, 0센트(즉, 공짜)가 되었을 때 같은 비율이 아니라 4:6 정도로 공짜 초콜릿을 선택하는 비중이 커졌다.

공짜의 거역할 수 없는 마력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원하지도 않는 물건들을 많이 구입하는가? 온라인 서점인 알라딘에서 포인트를 차감하여 주는 알라딘 굿즈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명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결코 귀가 얇지 않고 마케팅 상술에 잘 넘어가지 않는 나조차도 단 한 번이긴 하지만 알라딘 굿즈에 혹했던 적이 있다. 바로 올해 여름 대히트를 쳤던 '책라디오'이다. 사실 이건 공짜도 아니다. 이벤트 대상 도서를 포함하여 5만원 이상 책을 사야 하고 또 포인트를 몇 천 점 차감해야 받는 굿즈였음에도 불구하고 재화가 주는 감상적인 요소를 무시하지 못하고 결국 5만원 이상 책을 끌어모아 구입하여 라디오를 받았는데 그야말로 이건 '예쁜 쓰레기'이다. 소리는 찌직거려서 쓸 수도 없고 다른 지인 말로는 고장도 잘 나고 고치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예쁘긴 하다.)

이 부분을 꼭 적용하고 싶은 부분이 65세 이상 고령자 무료 전철 표이다. 우리 부모님도 모두 65세 이상이고 고령자 혐오에서 이런 생각은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 500원, 단 200원이라도 값을 지불하고 표를 받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경제력이 없는 고령자를 위한 복지로 이동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은 무척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남용과 악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금액을 필히 징수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사회 규범 vs 시장 규칙
: 장모님의 근사한 저녁 대접에 감사하다며 사위가 돈을 지불한다면 장모님의 얼굴이 일그러질 것이다. 또한 퇴직자를 위해 저렴한 비용으로 법률 상담을 해 달라고 하면 변호사는 거절할 것이지만 무료로 해 달라고 하면 흔쾌히 수용한다.

예전에 회사에 다닐 때 함께 일하던 부서에서 나와 자주 일하던 담당자가 꽤 어려운 영어 문서를 번역해야 했던 일이 있다. 법률 문서에 준하는 약관이었기 때문에 만만한 작업은 아니었다. 나 역시 주 7일 근무하며 괴로워하던 때였지만 그 동료가 부탁해 왔을 때 흔쾌히 하룻밤을 머리를 쥐어짜며 해서 주었다. 그 동료는 어차피 회사 일이고 나도 아주 관계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한 건지, 별다른 감사의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끝냈다. 그 부분은 사회 규범, 즉 동료가 부탁을 했던 부분이었기 때문에 돈과 상관없이 할 수 있었다. 지금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대표적으로 임금이 박한 분야에서 '을' 입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보니 정말 심정이 괴로울 때가 많다. 내 노동과 시간의 대가가 이 정도인가? 누군가 부탁을 하거나 '자원봉사'로 일을 할 때는 그것이 명분이 되기 때문에 그리 마음에 저항감이 없으나 시장규칙에 의해 값이 매겨지는 일을 하다 보면 여간 마음이 부대끼는 게 아니다. (그래도 내 책값, 아이들 간식값 정도는 충당하고 싶기에 열심히 한다.)

포기할 수 없는 다른 가능성
: 사람들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도 가능하면 많은 문을 열어두고자 한다. 배수진을 치려 하지 않는다. 어장관리 하는 사람들의 심리이다. 돌아갈 다리를 끊으려고 하지 않고 다른 가능성을 '보험'처럼 항상 확보한 채로 있고 싶어 한다.

회사에 다닐 때 나의 주요 업무들이 있었지만 영어와 일어를 인증시험 900점 이상으로 가능한 나의 역량은 꽤 유용했다. 가끔이지만 필요할 때 남의 도움 없이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다. 무작정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건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회사를 그만두고 두 언어 모두를 잡아야 할지 어느 한쪽을 택해서 프리랜서 일을 찾아봐야 할지 고민이 됐다. 가능성을 완전히 끊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나의 이 고민이 다른 가능성을 끊어야 하는 영역인지는 모르겠다. 둘 다 어느 정도 병행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전업주부라는 입장상 노력만 하면 두 가지를 갈고 닦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기대감과 고정관념
: 어떤 것에 대한 기대감, 비록 포장되어 있는 고정관념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그런 것을 품으면 음식 맛도 더 좋게 느껴진다.

이에 맞는 예를 바로 책을 읽으면서 발견할 수 있었다. 예전 회사 후배와 오랜만에 만날까 하고 카페를 검색했다. 그런데 검색어로 '손열음 케이크'라는 게 뜨는 것이다. 좋아하는 젊은 예술인이기에 클릭해 봤다. 강남의 어느 카페의 케이크에는 모두 음악인들의 이름이 붙여져 있는 것이다. 생크림 케이크가 아니라 손열음 케이크, 무화과 타르트가 아니라 줄리니, 블루베리 치즈 케이크가 아니라 아바도 등등. 다른 빵류에는 미술가들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이다. 뭔가 케이크에서 음악이 흐르고 빵에서 화려한 색채가 펼쳐질 것 같은 상상을 자극하는 것이다. 맛이야 어떻든 그 발상에는 무릎을 탁 쳤다. 다만 생크림 케이크와 손열음... 제대로 된 매치인지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팬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남다른 감성과 정열의 소유자로 피아니스트 손열음 하면 왠지 붉은 색이 떠오른다. 빨간색 코팅이 위에 반짝반짝 입혀진 산딸기 무스의 비주얼과 매치가 되는데, 나만의 생각인가??? 손열음 씨에게 물어보고 싶다.

어쨌든 이외에도 읽으면서 존재할 것이기에 정말 재미있게 자신을 분석해 가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정통 경제학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 하는 독자들에게는 이단과 같은 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을 이해하고 그들의 의사결정, 그 중에서도 돈이 나가는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인 경제 및 소비활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없이 좋은 책인 것 같다. 10년 전에 나온 책의 개정판인데 정말 개정판이 나올 만큼 좋은 책 같다.

그리고 10대 후반이라는 가장 민감한 시절에 온몸에 3도 화상을 입어 3년 간의 고통스러운 화상 치료, 이후 5년 동안도 후속 치료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도 이렇게 지성의 대가로 우뚝 서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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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국수와 분짜, 《차별의 언어》 by 장한업 | 기본 카테고리 2018-10-06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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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차별의 언어

장한업 저
아날로그(글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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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에 반대한다. (아마 대놓고 차별에 찬성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유는 첫째, 나의 양심에 따라서, 둘째, 성경에서 나그네와 과부, 아이를 선대하라고 하였으므로, 셋째, 내가 미국과 일본에서 따뜻한 대우를 받은 것을 갚아주고 싶으니까.

어떤 언어와 사고방식이 차별인지 알고 싶었고 변화하는 인구 구조 속에서 현명하게 대처하고 싶어서 읽어본 책이다.

역사라는 시간과 전세계라는 공간을 관통하여 차별이라는 문제를 다뤘다. 현상으로만 알고 있던 것들의 근원을 밝히는, 학자다운 면모가 돋보였다. 예를 들어, 고려인이라 불리는 중앙아시아의 동포들의 역사, 조선족의 역사, 미국 이민의 역사, 하와이와 멕시코 농장에서의 노동의 역사, 독일 파견 광부와 간호사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세계에 흩어지게 된 계기들과 그때 받은 차별로 인한 서러움 등을 알 수 있다.

'차별'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인간의 본성과도 관련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식의 전환과 법적, 사회적 제도 정비로 서서히 개선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한다.

다만 미래지향적으로 그리고 피부에 와닿는 이유로 왜 차별을 하면 안 되는지 설명해 줬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너무 과거지향적이다. 논조가 거북하다.

과거 역사를 언급하며 폐쇄적이고 미개하고 뒤떨어져 있던 우리나라에 타국 사람들의 선진적 문물로 개화되었는데 왜 차별하냐는 식의 느낌. 고마운 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라는 건지. 지금 시각으로 보면 어떡하나? 그때는 그때의 논리가 있는 건데.

우리나라 외의 사람들은 양놈, 왜놈, 떼놈으로 부른다며 심지어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들이라고... 깜도 안 되는 게 누구 무시하냐는 건가? 그럼 우리보다 못하면 '놈'이라고 불러도 조금은 용서되는 건가?

중국 무시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을 거라고 한다. 그거야말로 저자가 지적한 일반화의 오류 아닐까? 어떤 근거로 우리만 중국 무시한다고 하는 걸까? 조사해 봤나? 무시하는 게 잘했다는 게 아니다. 미국에도 일본에도 중국 싫어하고 무시하는 사람들 있다. 중국은 부상하는 나라고 우리나라는 아닌데 어디 무시하냐는 건가? 60-80년대 안 살아 보셨나? 그때 우리나라의 고도 경제성장기였다. 지금은 어느 정도 성숙한 시장이 된 거다. 그때는 그럼 정체된 공산국가 중국(중공이었죠)을 무시해도 용인이 되는 건가?

이탈리아는 잘 사는 나라라서 스파게티를 스파게티라 부르고 베트남은 못 사는 나라라서 퍼(pho)를 쌀국수라고 부른다는데... '차별'이라는 프레임 안에 갇혀서 다 그렇게 보이는 거 아닌가? 스파게티는 외관이나 조리법 등에서 그에 상응하는 말을 찾기가 모호했을 수도 있다. 쌀국수는 쌀로 만든 면을 육수에 담가 먹는 비교적 우리나라에서 친근한 국수 형태이니 칼국수 등과 다르게 쌀로 만든 국수라는 점에서 그렇게 명명했을 수도 있다. '분짜'라는 베트남 요리가 있다. 이건 왜 못 사는 나라 음식인데 왜 '분짜'라고 할까? 카레는 왜 카레일까?

우리나라가 외국 출신 국민을 차별하는 게 잘했다는 게 아니다. 똘레랑스를 외치던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의 우경화, 근간의 미국의 자국 보호주의 등을 보면 신변의 안전의 위협을 느낄 때 개인으로서의 인간이든, 집합체로서의 국가이든 모두 배타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통틀어 반도 국가로 중국, 일본이 시도때도 없이 호시탐탐 노리며 못살게 구니 안전의 욕구를 침해받지 않으려고 배타적인 태도를 유전자에 새겼을 수도 있다. 누구나 어느 민족이나 본성적으로 그럴 수 있는 것이고 우리나라도 그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왜 어떻게 차별하지 않아야 할지를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만 유별나게 단일 민족 이데올로기에 빠져서 차별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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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생각하다, [죽음과 죽어감] by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 기본 카테고리 2018-10-05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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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죽음과 죽어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저/이진 역
청미 | 2018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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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유명한 고전 중의 고전에 대한 서평을 쓰려니 오히려 마음이 갑갑해져 온다. 내 스타일대로 독후감을 진솔하게 쓰는 것이 나의 독서의 기록으로서의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출간된 지 아홉 달, 뱃속에 아이를 품듯이 열 달을 품고 이제야 읽은 책이다. 굳이 변명을 할 필요는 없지만 이제 읽을 때가 됐다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나의 관심은 사회복지학도였던 학부생 때부터 고령자, 노인, 노후의 삶이었다. 그 중에서도 경제와 심리 면이었다. 국제학대학원에서 일본지역을 전공하면서 쓴 석사 논문도 '일본의 고령자 재고용 정책(소득보장과 삶의 보람 측면에서)'에 관한 것이었다. 즉, '삶'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 '죽음'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이, 삶에 관한 관심은 죽음에 관심일 수도 있건만 죽음은 역시나 무거운 주제였다.

이 책은 1969년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스위스 출신인 저자는 결혼 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62년에 콜로라도 주립대학으로 적을 옮겼고 1963년에 정신의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65년에 시카고 대학 의대로 옮기면서 환자들에 대한 의료진의 비인간적인 처우에 충격을 받는다. 500명 이상의 말기 환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로스 박사는 <죽음과 죽어감>이라는 책을 써냈고 유명한 죽음의 5단계 모델을 소개하고 있다. '죽음의 5단계 모델'이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접할 때 사람들은 '부정과 고립 --> 분노 --> 협상 --> 우울 -> 수용'이라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인터뷰 형식을 취하고 있기에 삶의 종말로 향해 달려가는 환자들의 육성을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다. 그들의 분노, 고독, 절실함과 절망, 그리고 반면에 그들의 희망과 구원에 대해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인간의 존엄이란?

이성과 지성, 또한 집합체로서의 지식의 축적과 계승, 발전이라는 거대한 인류의 업적이 인간의 존엄이 아니었다.

배변의 문제를 제때, 또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것.
등이 가려울 때 긁을 수 있는 것.

이런 것이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검사의 일정, 치료의 일정에 맞춰 순조롭게 굴러가야 하는 병원의 시스템이라는 톱니바퀴의 일개 톱니로서 취급받으며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도 못 가고 실수할까 봐 노심초사 방광을 조이며 비참함과 자괴감을 느끼는 환자의 모습에 감정이입이 됐다.

정보의 전달과 공감

종말기를 맞이하는 환자라고 해서, 혹은 아주 어린 환자라고 해서 자기결정권이 없는 것이 아닌데, 환자를 소외하고 의료진과 가족이 의사소통을 하며 앞으로의 진료 방향과 죽음의 형태(연명치료, 호스피스 및 존엄사)를 결정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를 전달하고, 심리, 정서적인 두려움과 막막함에 공감해 주고 동행해 주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공인지도 모르겠다.

초판 발간이 1969년이니 50년이 지난 지금, 그나마 많은 부분에서 개선이 이루어진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2018년 2월부터 법적으로 존엄사가 허용되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개별적인 의료 현장에서 얼마나 원활히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의료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굳이 말하면 시스템의 문제랄까? 첫째, 의료인들은 너무 바쁘다. 둘째, 소송 등의 위험을 떠안고 있다. 셋째, 실제로 괴물 같은 환자 보호자도 있다. 그렇기에 심리적 거리를 두고 최대한 보신(保身)을 꾀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 아니겠나? 무조건 사명과 도의만을 강조한다고 될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설명은 좀 잘 해 주면 좋겠다. 그건 환자의 기본 권리이다. 병의 예후,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치료의 종류, 앞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는 몇 가지 치료의 방침과 그 장단점, 부작용 등등... 난 가끔 생각했다. 의료인이 문과가 아니어서 말을 잘 못 하나? 자꾸 말을 반복해야 해서 귀찮아서 그러나? 등등...

난임치료로 몇 년을 고생한 지인이 난임치료로 유명한 서울의 한 클리닉을 찾아갔을 때,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바로 시험관 하실 거죠?"라는 질문을 들었다고 했다. 여러 경로로 고생하다가 결국 최종적으로 찾는 곳이라 당연히 그럴 거라고 '닫힌 질문'을 했을지 모르겠지만 환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선택이 가장 좋은지 상의도 없이 다짜고짜 그런 질문에 얼마나 위축이 될까?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될지라도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일천한 병원 경험 속에서도 뭐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르고 휩쓸리는 경험도 많았다. 평생 무척이나 건강하게 살아 오다가 큰 아이를 임신하고 병원의 세계를 아주 폭넓고 깊게 경험하게 되었다. 유산 위험으로 입원해서 링겔을 맞고 있으면서도 뭘 맞고 있는지, 왜 맞고 있는지 등등 모르고 그런가 보다 하면서 지나갔었다. 바쁜 의료진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진상 환자로 찍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 등 나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일 테지만 질문하기도 좀 힘들었다. 한 나흘 지나니 링겔 꽂은 자리가 너무나 아픈데 괜한 엄살인가 싶어서 버티다 버티다 간호사에게 말했더니 한 사흘 지나면 아픈 게 맞아서 보통 바늘을 바꿔 다른 곳에 꽂는다고 했다. (괜히 참고 있었다. 이런 성격이라...)

반면, 큰 아이가 결국 미숙아로 태어나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에서 정기 검진을 받았을 때의 경험은 정말 좋았다. 큰 아이가 소아 탈장으로 간단한 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의 담당 교수님, 이젠 칠순도 훨씬 넘으셨을 소아 외과의 대모라고도 불리던 선생님은 세세한 설명을 해 주시고 질문이 있냐고 물어봐 주셨다. 그리고 수술 당일, 40분쯤 지나자 직접 나오셔서 걱정할 것 같아서 나오셨다며 아주 잘됐으니 걱정 말라고 하고 다시 들어가셨다. 그리고 미숙아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 중 하나인 시력 때문에 검진 다니던 소아 안과의 선생님과 전공의 선생님들은 정말 감동의 연속이었다. 15분 간격에 4~5명의 환자가 예약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환자에 대해 공부를 해 두시는지 친밀하게 말을 걸어 주시고 상태에 대해 예를 들면서까지 설명해 주셨다. 소아 안과의 젊은 대가로 알려져 있는 분인데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다른 병원에서 거의 실명 선고를 받은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괜찮아 질 거라는 말을 듣고 울었다는 부모도 있었다. 물론 일방적으로만 말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나로서는 인생의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얻었던 도움이었기 때문에 인상에 깊이 남아 있다.

종교와 영성의 역할

인생에 있어 어떤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대처하는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영성' 혹은 '종교'라고 생각한다. 죽음의 5단계가 영성에 의해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나의 경험이지만 큰 아이가 막 7개월차에 접어든 시점에, 태어나 버렸을 때 온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말 그대로 풍전등화 같은 어린 생명 앞에 모든 어른들이 할말을 잃었다. 남편과 나는 굳이 분류를 하자면 스무 살 대학시절부터 헌신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다.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이자 삶을 끌어가는 동력이다. 아이가 인큐베이터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믿지 않으시는 시아버님께서 약주를 한잔하시고, "너희는 그렇게 잘 믿고, 봉사도 많이 하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냐."라고 한숨과 눈물섞인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죽음의 5단계라고 하지만 어떤 받아들이기 힘든 어떤 사건에든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는 5단계에서 3단계인 협상부터 시작됐던 것 같다. '불행'이라 여겨지는 것이 사람을 골라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뭐 특별한 사람이라고 나를 피해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고루 햇빛을 비춰주신다고 하셨기에 죽음의 1단계 고립과 2단계 분노는 존재하지 않았다. 3단계 협상을 치열하게 했다. '아이를 살려 주시기만 한다면...'이라는 협상 카드를 얼마나 많이 들이밀었던가? 그러고 나서 아이가 그렇게 된 원인을 마구 찾아 4단계인 우울에 빠졌다. 의사도 모르고 아무고 모른다는데, 보는 사람마다 왜 그렇게 된 거냐고 물었고, 나도 그게 제일 궁금했다. 임신 6~7주 되는 시점에서 미국에서부터 10시간 비행기를 타고 왔던 것이 무리가 되었던 걸까, 의사 선생님이 안정기에 들어섰다고 해서 시댁에 잠시 인사 다녀오느라 몇 시간씩 차에 앉아 있던 게 무리가 되었을까 등등 자책에 빠졌었다. 그러고 나서는 5단계 수용에 이르렀다고 해야 하나, 이르지는 못했었나,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아이가 어떤 상태가 되든 아이와 함께 그 짐을 나눠지고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결심에 이르렀던 것은 사실이다. 그게 사람들 보기에는 가시밭길이더라도 그게 내 삶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이라면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나 나름의 정리였다. 내 인생의 평가 또한 사람들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으로 이루어질 것이기에 내려놓게 되었었다. 그게 수용이라면 수용이랄까?

로스 박사가 만난 인터뷰 대상자들 중에서도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태도는 확실히 다르게 느껴졌다. 결국 종말을 얘기할 때 종교와 영성을 배제하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

누구나 그렇겠지만 밝은 듯, 어두운 듯 양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스무 살쯤에는 염세적인 성향이 더 강했던 것 같다. 함께 기독교 동아리를 했던 언니들, 친구들과 이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죽으면 어떻겠냐?

나는 조금도 미련이 없다 했다.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기왕 태어났으니 열심히 보람있게 세상에 유익이 되게 살고자 했지만 죽는다고 해서 아쉬울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곧 결혼을 앞두고 있던 20대 후반 언니의 대답이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 자기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결혼을 앞두고 보니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오래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지금 내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죽어도 못 죽을 것 같다. 가치관이 바뀌어서가 아니다. 상황이 바뀌었다. 책임져야 할 어린 아이들이 두 명이나 있다. 남편이야 슬퍼해 주겠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그대로 두고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로스 박사님의 인터뷰에도 아이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엄마와의 인터뷰가 나온다. 그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을 자아낸다. 우리나라에 군대가 없었다면 고교만 마치면 사실상 성인으로 슬프긴 하겠지만 미련 없이 떠날 수는 있을 것 간다. 그런데 군대가 있으니 군대를 마칠 때까지는 있어주고 싶다는 나 혼자 아무 의미없는 계산을 해 보게 된다.
 
50년 전, 로스 박사님이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는 거센 반발과 비난도 받고 연구의 진척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연구의 필요성을 알고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연구해 온 소수의 연구자들 덕분에 이렇게 가치 있는 인류의 지적 유산이 이룩됐다. 50년이 지나서 이 책을 읽는 나 같은 독자들도 빚을 진 기분이다.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성찰을 얻게 되어 우리의 삶의 모습이 더 가치있는 것이 되길 바란다.

이 책의 후속편인 <죽음과 죽어감에 답하다>도 깊어가는 가을에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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