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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함과 잔재미가 백미, 《라스트 레터》 by 이와이 슌지 | 기본 카테고리 2020-07-31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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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라스트 레터

이와이 슌지 저/문승준 역
하빌리스 | 202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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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이와이 슌지 감독이었다. <러브 레터>가 23년 전 영화였다는 것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카야마 미호의 흰 피부와 오타루의 거리 풍경, 향수를 자아내는 회상 장면들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겨울연가> 등의 한국드라마에서 시작된 일본 내 한류 등으로 양국 관계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우호적이었던 시절이었다. 이 영화를 통해 동경하던 오타루를 2003년 가을에 찾았다. 신치토세 공항에서 바로 오타루로 향했다. 오타루 근처로 갔을 때 바다 쪽에 바로 붙어 달리던 전차는 마치 바다에 떠서 달리는 느낌이었다. 오타루는 그때 이미 조금 관광지의 면모를 띠고 있어 생각만큼 감성 충만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소도시의 낭만이 없지 않았다. 당일여행으로 신청했던 홋카이도 내륙의 후라노와 비에이가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

 

편지를 매개로 하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새 책을 마주하니 참 감회가 새롭다. 20년 전, 중학교 동창생이자 첫사랑인 미사키에 관한 사소설로 작은 신인상을 타며 소설가로 데뷔했으나 이후 변변한 작품 하나 내지 못하는 40대 중반 남성 오토사카 교시로는 중학교 동창회에서 혹시나 미사키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하며 고향으로 내려온다. 그런데 동창회 자리에는 미사키의 동생 유리가 참석하여 미사키인 척을 하고 있다. 좀 일찍 자리를 뜬 교시로와 유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얘기를 나누지만 유리는 여전히 미사키인 척을 하며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 실은 미사키는 한 달 전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치 않게 유리로부터 편지가 오기 시작한다. 미사키인 척하고. 아직도 널 사랑한다는 교시로의 핸드폰 메시지를 불 같은 성질의 남편이 발견하여 휴대폰을 박살내버린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유리의 편지.

 

한편 유리의 딸 소요카는 사촌언니 즉 미사키의 딸 아유미를 지켜주고 싶어 장례식 이후 외할머니 댁에서 아유미와 함께 머문다. 한편 아유미의 남동생 에이토는 이모인 유리의 집에 와서 지낸다. 혹시나 해서 예전 미사키의 부모님 집으로 편지를 보낸 교시로에게 미사키에게서 답장이 온다. 유리의 필체와 조금 다른 그 편지는 또 무엇인지 어리둥절한다.

 

 

*

 

이와이 슌지 감독의 책과 영화는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지 머리로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남편이 스마트폰을 부쉈다고 스마트폰 없이 살며 편지를 쓴다는 설정 자체에는 무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이 많은 감성적인 소설이었다.

 

인간관계도 세상 풍조를 따라 변하는데 한 여자를 이렇게 지고지순하게 사랑하고 그리워할 수 있을까? 아마 제대로 종결을 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다. 자신을 두고 다른 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한 여인이었기에 그랬을까?

 

유리 부부의 살벌한 부부싸움을 구경하는 잔재미가 있었다. 참 그 남편에 그 부인이다 싶었으나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했나, 결국 훈훈하고 따숩게 화해가 일어난다.

 

무엇보다 아유미와 에이토의 마음의 고통이 내 마음을 저몄다. 내가 엄마라는 입장이어서일까? 세상 그 무엇보다 비빌 언덕이 되어 주는 엄마. 그 엄마가 모든 것, 자기들까지 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세상을 등졌다는 것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될까? 이모에게도 말은 하지 않지만 초등학교 5학년 에이토의 몸부림이 너무 안쓰러워서 꼭 안아주고 싶었다. 이들에게도 엄마를 그렇게 사랑했던 교시로의 존재는 한 줄기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언젠가는 이해할 수는 없어도 수용할 수 있기를... 그래서 건강하고 다부진 어른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읽었다.

 

그리고 고향을 방문하고 일련의 편지 소동을 통해 덜 자란 듯한 어른인 교시로 역시 맘추었던 시계바늘이 이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아서 흐뭇했다.

 

이 작품 역시 영화로 제작되었다. 일본의 정우성이라고 불리는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주인공 교시로 역을 맡고, <4월 이야기>의 여주인공 마츠 다카코가 유리 역을 맡는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핫한 신인 히로세 스즈가 미사키를 맡는다. 상당히 어울리는 캐스팅 같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고향인 미야기 현에서 촬영이 되었다고 한다. 자연이 무척 아름다워서 치유가 있는 이야기와 어울리는 배경이 될 것 같다. 왠지 40대가 된 미사키 역에는 이시다 유리코가 자꾸 오버랩되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운 배우라서 그런 것 같다.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라도 몇 자 쓰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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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을 위한 희망과 성장의 노래, 《기린의 타자기》 by 황희 | 기본 카테고리 2020-07-27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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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기린의 타자기

황희 저
들녘 | 202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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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읽으면서 울컥하고 잔상이 오래 남는 소설은 드물 것이다. 시작부터 무척 음울하고 피 냄새 진동한다. 거기에 타임워프라니, 내가 두려워하는 SF물이라서 정신 바짝 차리고 읽었다. 하지만 술술 읽혔고 빨리 결말을 보고 싶었다. 다 읽고 나서 이틀 정도는 그 잔상을 곱씹으며 묵혀두는 편인데 역시 더 잔잔히 마음 속에 스며들었다. SF의 옷을 입은 철학소설이자 성장소설이라고 하고 싶다.

 

 

당신의 아이에게 백일몽을 꾸는 방법을 가르치세요.

 

 

"백일몽은 겉으로 보기엔 시간을 죽이는 게으른 행동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창조성과 학습의 숨겨진 원천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두 개의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데 일하는 뇌와 백일몽을 꾸는 뇌다. 두 가지는 동시에 작동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일하는 네트워크를 작동시킬 땐 상상에 잠긴 네트워크를 차단한다."(302쪽)

 

이런 철학이 이 소설의 기본이 되었다고나 할까? 백일몽이 주인공 지하에게는 구원이 되었다. 발을 땅에 붙이지 않고 붕 떠서 백일몽에 빠져 있는 현실을 도피하는 듯하지만 가장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에 변화를 일으킨 것은 지하였다. 그리고 백일몽의 힘이었다.

 

 

백일몽... 언젠가부터 나와는 상관없는 단어가 되었다.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자투리 없이 seamlessly 잇고 채우고 그것이 가장 보람된 것처럼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인일기백... 말은 좋지만 남들보다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남들 1의 노력을 할 때 100의 노력을 해야 한다며 나 자신을 들볶고 채근해왔다. 이 영향은 육아에까지 미쳐서 아이들이 심심하다고 하거나 마루바닥에서 뒹굴거리면 정말 환장하겠다. 아이들을 탓하지는 않는다. 나를 탓한다. 엄마로서 뭔가를 제대로 안 해 주고 있는 것 같다는 자책이다.

 

 

하지만, 어떤 글에서 봤다. 아이들이 책만 읽으면 바보가 된다고, 멍하니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멍하니 있으며 '엄마, 아빠가 죽으면 어떻게 돼?' 이런 사유에도 빠지고 철학을 할 여백이 생긴다는 의미의 글이었다. 그후로는 마음이 좀 가볍다. 멍하니 있는 시간을 아이들에게 허락하고 있고 정말 아이들이 기상천외한 발상을 할 때가 있다.

 

 

청각장애인이자 가정폭력의 희생자인 지하가 쉴 수 있는 것은 백일몽에 빠질 때였다. 지하를 단단하게 하고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게 했던 것도 백일몽이었다.

 

 

모성이란? 산후우울증이란?

 

 

지하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산후우울증이 뭐길래 자기가 낳은 자녀를 죽일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일까? 지하만큼 안쓰러운 건 냉소로 가슴 속에 고통을 묻어버린, 지하의 동생 지민이다.

 

아이를 10개월 몸속에 품으면 모성이 절로 생기나? 아이 둘을 낳았지만 그건 잘 모르겠다. 모성에 관한 신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은 익숙한 '엄마'라는 호칭도 어찌나 어색하고, 뭐든지 서투르고 어설픈 나 때문에 아이가 행여 죽기라도 할까 봐 툭하면 가슴에 귀를 대 보고 코 앞에 손가락을 대보곤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 다 건강하게 아이를 잘도 낳는데 난 26주가 지나자마자 큰아이를 조산했다. 1kg로 태어난 아이는 점점 체중이 빠져서 860g까지 간 지경까지 경험했다. 83일간의 인큐베이터 생활을 거쳐 집에 온 아이를 어떻게 해 줘야 할지 몰라서 망연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몰두했기에 산후우울증 걸릴 새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83일간도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전철을 갈아타고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아이를 면회 다니며 가슴을 졸였던 것 같다.

 

 

벌써 13년 전, 산후우울증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동아리 언니가 생각난다. 결혼을 며칠 앞으로 앞둔 나에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결혼 앞두고 있다고 장례식장 같은 데 가는 거 아니라고 다들 말렸지만 미신 따위 믿지 않고 마땅히 가서 조의를 표해야 했기에 꽤 먼 거리였지만 장례식장에 갔었다. 그때 태어난 언니의 딸아이가 이젠 14살이 되었겠다.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으셨는데 너무나 따뜻하고 궂은 일은 도맡아 하시던 분이었다. 기독교 동아리였기에 대부분 좋은 분들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언제나 말 없이 챙기시던 분이었다. 늦게 배우자를 만나셔서 늦게 낳은 귀한 아이였는데 많이 힘드셨나 보다. 언니의 결혼식 때 뵙고 그 다음이 장례식이었다.

 

 

지하의 엄마는 누가 보더라도 우울증에 걸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너무나 안쓰럽고 가장 속이 상했던 캐릭터였다. 그녀를 어찌 비난하랴. 그녀의 착한 심성을 이용한 친정 식구들과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인 시집 식구들 탓이지. 어린 코끼리를 묶어놓고 길들이면 어른이 되어서도 아무 결박도 하지 않더라도 도망하지 않는다고 한다. 바로 그런 엄마에게 물꼬를 터주고 제2의 인생을 선물해 준 것이 바로 지하였다.

 

 

언제든 성장의 기회는 있다

 

 

지하는 자신이 선택하여 자립했고 자신의 길을 개척했으며 꿈이었던 소설을 쓰고 또 쓰며 성장했다. 어른이 되었다. 모든 괴롭힘과 무시를 이겨내고 승자가 되었다. 그리고 <조용한 세상>이라는 소설을 써서 엄마에게 보냈다. 엄마는 소설을 읽으며 여태까지 자기 눈을 가리웠던 깍지를 떼어내고 자신의 손과 발을 결박했던 것들을 스스로 깨뜨리고 세상으로 나온다. 같이 살고 싶지만, 여태까지 나누지 못했던 마음을 나누고 싶지만, 지하는 미국으로 떠나겠다고 한다. 엄마에게 혼자 다시 일어설 기회를 준 것이다. 젊음이 지나버렸지만, 엄마에겐 성장의 기회가 눈앞에 펼쳐져있다. 늦은 때는 없는 것 같다.

 

매력적인 소설적 장치

 

인물 하나하나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개성적으로 설계되었는지 모른다. 주인공과 주변인물, 특히 악역들까지도 손에 잡히고 눈앞에 펼쳐지듯 선명하다. 시나리오 작가들이 쓴 책들은 믿고 보는데 저자의 시나리오 작가 경력이 빛을 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타임워프도 무척 매력적인 장치로 사용되었다. 복잡해 보였지만 독자가 따라 가기 어렵지 않도록 친절하게 구성한 것 같다.

 

 

뒷표지에 실린 추리소설가님들의 극찬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이 작품은 2019년 제7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중장편 부문에서 심사위원들의 극찬을 받으며 우수상을 수상했다. 장치들만 훌륭하다고 되는 것이 아닐 텐데, 매끄러운 글 솜씨와 표현력 역시 마구 수집하며 읽었다. 아름다운 우리말로 쓰인 우리 소설은 나에게 좋은 참고서이다. 어휘를 다룸에 있어서 가장 살아있고 풍성한 밭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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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세계, 《언더커버》 by 아마릴리스 폭스 | 기본 카테고리 2020-07-27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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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언더커버 (UNDERCOVER)

아마릴리스 폭스 저/최지원 역
세종서적 | 202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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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이 있다면 바로 저자 아마릴리스 폭스의 삶이 아닐까 싶다. 20대 초반에 CIA 요원으로 발탁되어 본부에서 공작팀을 지원하는 분석팀을 거쳐 공작팀 요원으로 활동하다가 예술품 사업가라는 위장 신분으로 가장 비밀스럽고 위험한 작전을 펼치는 비공식 요원으로까지 활약했던 1980년생 여성의 회고록이다. 왜 출생연도를 굳이 언급했는가 하면 이 비범한 삶을 살았던 주인공과 동시대인으로서 그때 나는 무엇을 했는지 하나하나 생각해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아래 여동생이 1980년생이라서 더욱 실감이 났다.

 

아는 역자님이 회고록 장르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나 역시 생생하고 촘촘한 사실의 기록인 회고록을 좋아한다. 자서전이라 해도 좋고 논픽션이라 해도 좋다. 이 저자는 필력 또한 보통이 아니다. 사건의 묘사와 함께 실제로 모든 일을 겪었던 당사자이기에 가능한 심리적인 갈등과 철학까지 허구의 문학이라면 이렇게 사실적으로 기록해낼 수 없었을 것 같다. 사실 너무 자세한 묘사와 설명으로 인해 이슈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스파이물, 특히 언더커버 즉, 잠입이나 변장이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에 열광하는 타입이고 게다가 여성으로서 뛰어난 지력과 신체 능력, 배포까지 겸비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스파이의 비일상적인 삶을 엿보고 싶었다. 어린 시절부터의 성장배경, 그리고 대학 합격 후 아마도 Gap year를 버마에서 보내면서 저자의 사상을 형성했던 남다른 경험들, 그리고 옥스포드와 조지타운 대학 대학원을 거쳐 CIA 요원으로 발탁되어 훈련을 받으며 어엿한 첩보요원으로 거듭나는 모습이 너무나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멋지고 대단했다. 그러나 그녀가 한 인간으로서, 한 여성으로서, 더 나아가 한 엄마로서 고뇌하고 얻게 된 신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테러와 파괴의 의외의 원인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관한 매우 통찰력 있는 일화가 있었다. 테러의 원인이 거창한 정치외교적, 혹은 군사적 이유가 아니라 아끼는 펜을 빼았겼거나 소중한 식구에게 선물받은 것을 짓밟히는 등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소중한 것, 자신의 인격을 무시당하고 짓밟힌다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개인적인 삶에서나 국가적인 운명에 있어서나 깊이 새겨볼 만 한 부분이라고 생각됐다. 피와 살이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 이성과 신념과 함께 감정을 가진 다면적인 존재에 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매일의 삶 속에서 누군가를 경멸하거나 얕보거나 소중한 것을 짓밟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며 숙연해졌다.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세계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해주는 건 이렇게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가는 하루하루였다. (329쪽)

 

우리가 취직 걱정을 하고 연애를 하고 가정을 꾸리는 일상의 삶을 살아갈 때 누군가는 핵전쟁을 막고 핵테러를 막기 위해 생명을 거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그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과 희생으로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가는 하루하루'를 누릴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평소와 그리 다를 것 없었던 2001년 9월 11일, 그 누구도 상상도 하지 못할 테러가 세계의 경제 중심지 뉴욕에서 발생하여 전 세계를 큰 충격에 빠뜨렸던 것을 기억한다. 그 전날과 그리 다를 바 없었던 날이었는데 한순간 세계는 통곡에 빠졌다. 어제의 평화가 오늘의 평화를 보장하지도 않고, 오늘의 평화가 내일의 평화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어제, 오늘의 평화 역시 한순간에 빼앗길 수 있었는데 누군가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으로 지켜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테러범들은 테러를 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더없이 소중하고 애틋하게 느껴진다.

 

가슴 찡한 인간애와 모성의 위대함

 

공작원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취약성'을 파고든다. 즉, 경제적 어려움, 가족의 질병 등 제안을 거절할 수 없는 약한 부분을 가진 사람을 타겟으로 하지만 저자는 그보다 더 '고매하고 휴머니즘적인 인간의 본질적인 선의'를 믿으며 그런 '초자아(superego)'적 측면에서 호소한다. 진심은 통한다고 믿는다.

 

예술품 사업가라는 위장 신분으로 상하이에서 거주할 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중국인 도우미 '아이' 씨와도 위장 생활 중에 드러낸 진심이 마주쳐 공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테러를 꾀하는 집단의 리더를 만나서 대면했을 때는 그의 4개월 된 자녀가 천식을 앓고 있는 듯하자 정향유를 내밀며 부모 대 부모로 진심을 보여준다. 그 상대 역시 그 마음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정말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장면 중 하나이다.

 

정말 거의 머신 수준에 가까웠던 주인공은 딸 조이의 임신, 출산, 육아와 함께 첩보 작전을 병행했다. 그리고 조이와 같은 아이들이 위협받지 않고 그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으로 딸을 떼어놓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작전을 수행하러 떠난다. 같은 엄마로서 가슴이 찡했다.

 

*

 

CIA를 떠난 후 그녀는 저널리스트이자 방송인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게다가 <캡틴 마블>의 히로인 브리 라슨 주연의 영화로 제작된다고 하니 더욱 기대가 된다.

 

부디 우리의 특별한 일 없는 아름다운 일상이 지켜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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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 도시씩 골라보는 재미,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by 조 지무쇼 (편저) | 기본 카테고리 2020-07-26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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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조 지무쇼 편/최미숙 역/진노 마사후미 감수
다산초당 | 202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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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도시를 사랑했다. 도시의 역동성, 편리함, 익명성 모두 사랑한다. 어렸을 때는 자연과 아름다운 풍경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가로운 남부 프랑스의 전원풍경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대학교에 진학하고 외국에 나가보고 경험하면서 나는 도시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자연이 잘 가꿔진 도시면 금상첨화이다. 서울과 도쿄와 같은 메가시티, 시애틀과 고베 같은 중형 도시, 그리고 싱가포르 같은 도시국가까지 매료되었다.

 

 

이 책은 서른 개의 도시를 중심으로 그 도시를 둘러싼 세계사의 흐름을 짚어볼 수 있는 책이 있다. 하루에 한 도시씩 골라볼 수 있으며,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을 필요도 없이 먼저 읽고 싶은 곳부터 골라볼 수 있다는 즐거움과 편리함도 있다.

 

 

1년 전쯤, 이 책이 일본에서 출간되자마자 아마존재팬에서 원서로 보고 이 책을 번역 기획해보고자 하는 생각도 했으나, 대형 출판사에서 발 빠르게 나올 것이라는 예감이 이미 들었다. 우리가 학교에서 교과서를 통해 시계열로 배우는 정통 세계사의 시각과는 좀 다른 앵글에서 한 가지 주제를 통해 세계사를 바라보는 책들이 트렌드가 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도시를 주제로 삼다니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목차를 보면 서른 개 도시와 표제어들이 나온다. 아무래도 가본 곳을 찾아보게 되는데 몇 곳 없다. 교토, 베이징, 상하이, 싱가포르 정도이다.

 

 

 

동경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뉴욕의 이야기를 읽어보았다. 세계 최첨단의 패션과 금융의 도시로서의 뉴욕의 위상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대서양 건너 유럽을 마주보고 있는 연안의 항구로서 뉴욕을 통해 유럽인들이 유입되었고 복잡다단한 유럽과의 관계 속에서 최초의 미국 수도였다가 지금은 경제 중심지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뉴욕에 관해 아는 게 많지 않았다. 9/11 테러, 자유의 여신상, 센트럴 파크, 수많은 미술관 등 가게 된다면 가보고 싶은 여행지만 머릿속에 새겨져 있을 뿐, 그 도시의 역사는 피상적으로밖에 알지 못했다.

 

 

싱가포르는 여행갔던 곳 중에서 가장 좋은 인상을 준 곳이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 세 곳, 시애틀, 도쿄, 싱가포르 중 앞의 두 곳은 '거주'를 해봤던 곳이지만 싱가포르는 단 3박 4일 여행을 갔을 뿐인데 너무나 즐겁고 행복했다. 아래 사진처럼 마천루가 늘어선 깨끗한 도심, 활기찬 도시 분위기, 편리한 교통수단, 친절한 사람들 모두가 맘에 들었다. 싱가포르의 평균인구가 젊어서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에스컬레이터가 무지하게 빠르게 오르내렸던 기억이 가장 신기했다. 저래서야 노인들이나 아이들은 무사히 계단에 올라타고 내리려나 싶었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만난 여고생이 너무 친절하여 이런저런 얘길 하며 점심 먹을 만 한 곳도 소개받았고 다들 영어를 잘하여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싱가포르에서는 '래플스'가 들어가면 일단 최고급이라고 보면 된다. 이 책을 보면 그 답이 나온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토마스 래플스가 처음 싱가포르의 잠재력에 주목하고 싱가포르를 동남아시아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시킨 사람이었다. 싱가포르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남동생에게 언뜻 들었던 것 같은데 책을 통해 역사를 볼 수 있으니 더욱 흥미로웠다. 싱가포르가 영국의 식민지였는지도 몰랐으니 나의 무식함이 부끄러울 뿐이다. 그저 싱가포르의 표면만을 봤던 것 같다.

 

 

과거에 영화를 누렸으나 지금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도시들, 우리에겐 익숙치 않지만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여러 도시들을 간접 경험한 것 같다. 곁에 두고 심심할 때 한 도시씩 읽어도 좋을 듯하고, 여행 계획이 있다면 사전 조사 겸하여 도시의 역사를 공부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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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나무의 말』 by 레이첼 서스만 | 기본 카테고리 2020-07-22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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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나무의 말

레이첼 서스만 저/김승진 역
윌북(willbook) | 202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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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나무는 나에게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디 가든 나무를 유심히 살피고 아무도 묻지 않지만, '나의 나무'를 한 그루씩 정해놓곤 했다. 특히, 외국에 나가면 우리나라의 식생과 달리 이국적인 나무들을 보면 매료되어 바라보곤 했다. 그렇기에 '나무의 말'이라는 제목과 '2,000살 넘은 나무가 알려준 지혜'라는 부제에 자석에 이끌리듯 끌렸다.

 

 

이 책은 저자가 남극에서 사막까지 10년간 세계를 다니며 2,000살이 넘은 나무들, 때로는 이끼, 잡목 등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긴 책이다. 예술과 과학을 날실과 씨실로 수 놓듯이 경계를 넘나들며 기록한 귀중한 자산이다.

 

 

어떤 나무들이 나오나 궁금하여 목차를 살펴보는데 성경에 감람나무로 기록되어 있는 중동의 대표적인 나무인 '올리브 나무',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원령 공주>의 모티브가 된 야쿠시마의 '조몬 삼나무',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오밥 나무', 그리고 독이 있으나 코알라는 그 독을 해독할 수 있다고 하는 이름도 예쁜 '유칼립투스 나무' 정도만 아는 이름이었다.

 

                            

영원이라는 거짓 감각, 불멸이라는 환상

 


"굉장히 긴 수명을 가진 생물들은 우리가 영원이라는 거짓 감각을 믿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변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장기적인 생각 없이 현실의 일상에 쉽게 파묻혀버린다. 하지만 오래 살았다고 해서 불멸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회가 있다 해도 그 기회가 마냥 기다려주는 것도 아니다." (111쪽)

 

 

생물이지만 동물과 같은 역동성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식물, 특히 크게 오래된 나무는 우리에게 영원과 불멸을 꿈꾸게 하는 것 같다. 아니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을 거라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3천 살까지 살았다고 해서 3천 5살까지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약에 취한 젊은이들의 실화로 인해 3천 년의 역사를 가진 나무가 한 줌의 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상원의원 나무를 죽게 했느냐고? 필로폰에 취해 공원에 몰래 들어와 나무 안으로 들어간 20대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마약을 더 잘 보려고 성냥(어쩌면 라이터)를 켰고 갑자기 상원의원 나무의 몸통은 굴뚝이자 땔감이 되었다." (113쪽)

 

 

이 부분을 읽으며 정말 울고 싶었다. 그들에게 따지고 싶었다. 자연과 공존하는 것이 청지기된 우리 인간의 책무이자 권리일 텐데 훼손하고 파괴하는 주된 범인이 인간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허무함.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었기에 내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는 것 같다. 끝이 있다는 것. 그 끝이 언제일지 모른다는 것. 유한한 인간이 겸손해야 할 이유인 것 같다. 다행히 이 나무는 나뭇가지 일부를 잘라내어 접붙이기에 성공하여 제2의 삶을 살 기회를 얻었다고 하니 한 줄기 위안으로 삼아본다.

 

극단적인 조건 '덕분에'

 


"브리슬콘은 극단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생존해온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조건 '덕분에' 생존했다." (57쪽)

 

우리의 짧은 식견과 감상에 젖은 피상적인 시각으로는 눈물이 날 만큼 척박한 환경일지라도 그 척박한 환경이기에 생존했던 식물들이 존재한다. 예전에 애국가가 나올 때 나오는 영상 속의 바위를 뚫고 뿌리를 내린 동해안의 소나무처럼 전 세계의 식물들도 극단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생존한 것이 아니라 그 조건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생존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숭고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되새겨보게 된다.

 

 

남극에서 사막까지

 


저자는 집세 낼 돈이 없으면서도 이 취재를 위해 전 세계를 종횡무진 발길을 옮겼다. 바다 속 생물을 보기 위해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고 남극에서 맨 몸으로 바다에 뛰어들고 산호에 찔리고 목숨을 위협하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깨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2천 살이 넘는 지구상의 가장 오래된 식물들을 찾아다니는 이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 노력과 투지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인류 역사에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쉽게 방에 앉아서 읽어도 되는 걸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모험 정신이라고는 약에 쓰려 해도 없는 사람이지만 나의 분야에서 저자와 같은 투지를 발휘해 보고 싶다는 소망을 감히 품어보았다.

 

 

"고령 생물들은 우리를 심원한 시간에 연결시켜준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찰나적인 감각, 생각, 감정에 묶여 있고 그것들로 구성돼 있다."(186쪽)

 

 

찰나적이고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영원과 불멸의 존재는 아니지만 2천 살이 넘은 나무들을 보며 그 말을 들을 수 있어 다행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이렇게 인생의 10년 이상을 투자한 매개자의 역할을 해 준 저자에게도 무한한 감사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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