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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복되는가? | 경제경영 2010-10-31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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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실크로드의 부활

벤 심펜도르퍼 저/홍순남 역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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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집트 지식인이 서구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더 강한 유대감을 작고 잇죠. 기술을 수입할 곳으로 서구를 지목하고 원조나 차관을 받을 곳도 서구라 생각하죠.” 이집트 외교관의 말이다. 그러나 9.11 사건을 지적하면서 상황이 변했다고 그는 말한다. “맞습니다. 9.11 사건은 이집트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서구는 테러리즘을 이슬람과 연결시키는 오류를 범햇습니다. 이집트 엘리트들은 속았다고 느낍니다. 그들은 서구에 등을 돌린 적이 없는데 말이죠. 그들은 이제 서구에 열광하지 않습니다.”

이책의 저자는 거의 10년동안 아랍권에 살앗고 홍콩의 외환거래소에서 일한 경력을 갖고 잇다. 아랍권과 중국에서 보내면서 그는 이책의 제목대로 실크로드가 다시 부활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아랍권과 중국이 옛날처럼 다시 연결되고 잇다는 것이다.

아랍권과 중국이 다시 옛날의 관계로 돌아가는 계기가 된 것을 저자는 9.11 사태라 말한다. 9.11 사태가 일어나면서 아랍권 사람들이 미국이나 유럽에 가기가 어려워졌다. 불가능하지야 않지만 비자를 받을 때의 어려움과 공항에서의 불쾌한 기분은 대단한 비용이 된다.

그들에게 대안이 된 것이 중국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책을 이우라는 중국의 도시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우는 상하이에서 가까운 작은 무역도시이다. 이 도시의 주력은 흔히 말하는 보따리 장수들을 상대하는 도매업이다.

미국과 유럽에 들어가기 힘들어지면서 중국제 물건으로 거래선을 옮기기 시작했고 이슬람 상인들이 이우시에 넘쳐나게 된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문제는 그런 흐름이 전혀 서구 언론에는 비쳐지지 않는다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소규모 거래는 헤드라인이 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과 아랍권의 거래는 그런 소소한, 통계에 거의 드러나지 않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우 시에 넘쳐나는 아랍 무역상들은 세계경제의 재편을 보여주는 한가지 예일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두바이가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실크로드 부활의 상징으로 본다. 두바이는 실크로드가 번성하던 시절 무역거점으로 중요한 곳이엇다. 두바이가 다시 부활하는 것은 다시 예전의 실크로드를 따라 돈과 사람이 움직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아랍에미리트 항공은 최근 가장 빠르게 성장한 항공사이다. 이 항공사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를 이어주는 중심에 두바이가 잇기 때문이며 세 대륙간에 돈과 사람의 흐름이 그만큼 늘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러나 서구언론 그리고 서구 언론을 받아 쓸 뿐인 대부분의 언론들은 이런 움직임들을 놓치고 있다. 최근 아랍권에 관해 가장 많이 보도된 것은 국부펀드이다. 고유가로 떼돈을 번 아랍 산유국들은 70년대처럼 그돈을 써버리지 않고(당시에는 번돈의 70%를 써버렸다) 75%를 저축하기로 했다. 그렇게 저축한 돈의 규모는 1조4천억 달러에 달한다. 국부펀드들은 그돈을 미국과 유럽의 자산에 투자하고 회사를 사들이는데 썼다.

그들이 그만한 돈을 벌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중국의 부상이다. 중국경제가 고속성장을 하면서 먹어치우는 석유수요 때문에 유가가 앙등햇다.

저자가 말하는 세계경제의 재편의 배경은 바로 중국과 아랍권의 부상이다. 돈을 번 아랍권이 중국에 돈을 쓰기 시작한 것을 저자는 실크로드의 부활이라 말하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것은 단순히 무역관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정치적 관계도 따른다.

석유수요를 채우고 석유안보를 지키기 위해 중국은 아랍권과의 관계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한 것이나 이란제재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인 것은 석유때문이다.

중국이 아랍권과 가깝게 지내려고 하기 때문에 교류가 많아졌다. 아랍권으로서도 중국은 매력적으로 보인다. 아랍국가들에게 중국은 역할모델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빈털터리에서 지금처럼 빠르게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을 아랍국가들은 배우고 싶어한다.

더군다나 중국의 모델은 서구 모델과 달리 정권교체 없이 정치적 안정을 누리면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내정치가 그다지 안정되지 않은 아랍국가들에겐 매력적인 대안이다. 중국과 오랫동안 교류해온 시리아는 실제 중국식 모델을 따라 개혁을 시작했다.

이책의 논의를 정리하면 대충 위와 같이 정리된다. 그외에도 저자는 실크로드가 부활한다는 신호로 여러가지를 들고 잇지만 우선 눈에 띄는 변화는 위와 같이 정리될 것이다. 물론 위에서 정리된 것을 보면 그리 뚜렷한 증거라 말하기 힘들다. 저자도 실크로드가 부활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이슬람 회랑’이 다시 살아나는 신호가 잡힌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책은 이미 부활한 실크로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부활의 조짐이 보인다고 말하는 것이다. 중국의 부상과 아랍권의 회복세를 보면 저자의 말은 그리 상식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그럴만한 여건에서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아랍권과 중국을 오가며 발로 뛰면서 본 것들과 직접 인터뷰를 통해 얻은 것을 근거로 아주 실감나는 글을 쓰고 잇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책을 읽으면서 과연 그럴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엇다. 어디까지나 아랍권의 부활은 고유가에 힘입은 것이다. 석유가 천년만년 나온다면 모르지만 아랍권이 언제까지나 석유에 의존할 수는 없다. 석유는 물론 어떤 1차산업에 기대서도 경제력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 대해선 이책의 저자는 그리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불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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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틸라의 뿌리를 찾아서 | 인문/사회/역사 2010-10-31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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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흉노제국 이야기

장진퀘이 저/남은숙 역
아이필드 | 2010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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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을 기억할 것이다. 그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암흑 군대가 내뿜는 장엄하면서 압도적인 암울한 기세이다. 그러면 그 모델은 무엇이었을까? 톨킨은 그 원형을 로마제국을 무너트린 훈족의 침략에서 얻었다.

“로마제국을 무너트린 힘은 바로 중앙아시아에서 온 갈리아와 이탈리아를 침략한 아시아의 야만족들이다. 로마를 무너트린 것은 로마제국에 입성한 게르만족이엇지만 그들 역시 피난민 신세에 불과햇다. 고트족이 로마군단보다 더 두려워한 존재는 따로 있었다ㅓ. 바로 중앙아시아에서 말을 타고 바람처럼 나타난 난폭한 전사들이다. 그들은 매우 위협적인 존재로 곧 로마군대의 방어를 뚫고 로마 각 전역에 퍼져나갓다.”

“흉노족(훈족)이 처음 유럽에 나타났을 때 두터운 갑옷으로 무장한 채 자신들이 최고라 자신하던 로마 군사들은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말을 제 몸 다루듯하는 륭노와 같은 민족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흉노를 보며 신화에 나오는 켄타우루스보다 더 신기해햇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신기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가공할 전쟁기술로 게르만족과 로마군을 무너트렸다.

그들의 주무기는 말 위에서 쏘는 활이었는데 그들의 활은 조선시대에도 사용햇던 복합궁으로 사거리가 200미터에 달했다.

“당시 로마 군사들의 무기를 살펴보면 그들이 왜 흉노군을 두려워했는지 그 이유가 쉽게 이해될 것이다. 로마군이 사용하던 원거리 무기는 투창인데 치명적인 약점은 사정거리에 한계가 잇다는 것이다. 로마군의 화살 역시 최대사거리가 30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로마군이 적들의 정체를 파악도 하기 전에 흉노의 화살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고 로마군의 갑옷을 종이 뚫듯 뚫어버렸다.”

당시 기병은 보병 20명과 맞먹는 전력이엇다. 후에 몽골군이 그랬듯이 복합궁을 사용한 타격력에 더해진 기병을 활용한 전격전에 게르만족은 물론 로마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유럽에 간 것일까? 그 이유는 쫓겨났기 때문이다.

유럽에선 훈족이라 불린 그들을 중국에선 흉노라 불렀다. 그들은 몽골고원의 첫번째 주인이었고 그 이웃인 중국인들은 역사 이전부터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진시황은 그들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세웠다. 연나라, 조나라, 진나라가 이전에 쌓았던 방벽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한 것이니 흉노의 위협은 진시황 때도 상당히 오래된 것이었다.

흉노는 몽골고원의 주인으로서 제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유목민이 하나의 정치체를 이루어 통일되었을 땐 칭기스칸이 그랬듯이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진의 뒤를 이은 한나라 역시 흉노제국 때문에 고생을 했고 저자세로 조공이란 뇌물을 바치고 신하를 자칭하며 자존심을 구겨야 햇다.

흉노에 대해 이를 갈 수 밖에 없었던 한나라는 조용히 칼을 갈았고 한무제에 이르러 힘이 갖춰졌을 때 흉노와 전쟁을 벌인다. 한무제와의 전쟁은 그리 대단한 타격은 아니었다.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대패하는 경우도 잇었지만 대개는 그리 큰 패배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한무제는 물론 그 후의 황제들도 흉노와의 전쟁을 계속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일어나는 피해는 눈덩이가 되어 감당하기 힘들게 되었다. 소모전에 지친 흉노제국의 권위는 무너져 갔고 유목민들의 고질병인 분열증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흉노제국은 내분으로 더욱 약화되고 분열되어 마침내 한나라에 속국이 된다.

한나라와 속국의 관계가 되면서 둘의 관계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된다. 그러나 전한이 망하고 신나라가 들어섰을 때 신나라는 얌전히 있는 흉노를 완전히 꺾어버릴 생각을 하게 되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흉노로선 살기 위해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새로 시작된 적대관계에서 흉노는 패하게 되고 속국이 될 때 그랫던 것처럼 내분이 일어나 한 무리는 한나라에 붙어 남흉노가 되고 북흉노와 대리전을 벌인다. 고립된 북흉노는 점점 몽골고원에서 쫓겨나 서쪽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이후 남흉노는 5호16국 시대의 동란에 참여해 나라를 세우지만 그 동란에 참여했던 다른 호족들과 마찬가지로 민족 자체가 중국에 동화되어 사라진다.

서쪽으로 간 북흉노는 400년간 서쪽으로 서쪽으로 근거지를 옮기다 우크라이나에 도달한다.

“20년 동안 매일같이 로마인의 선혈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알프스 산맥으로 흘러들어갔다. 훈족은 알란족을 알란족은 고트족을 고트족은 다시 타이팔리족과 사르마트인을 공격했고 일리리아에서 쫓겨나온 고트족은 또 다시 우리 로마를 공격햇다. 이 전쟁의 끝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엇다.” 당시 로마의 역사가 암브로시우스의 기록이다.

훈족의 위세는 대단했다. 아틸라의 대에 훈족은 흑해에서 라인강까지의 영토를 차지하고 로마제국을 압박하며 조공을 챙기는 유럽 최강의 제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훈족의 제국은 아틸라가 죽고 바로 무너진다. 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성숙한 관료체제가 형성된 로마제국과 비교하면 훈족의 정치체제는 지나치게 단선적이엇다. 심지어 그들의 선조들보다도 못햇다. 좌현왕이 선우의 공인된 후계자가 되는 최소한의 제도조차 아틸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시행한 것은 전형적인 영웅 정치로 만약 피라미드 맨 위의 지도층이 무너질 경우 전 제국이 한순간에 와해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물 형태의 통치체제만이 정권의 장기적 안정을 보장할 수 있지만 아틸라는 이러한 시스템을 유지하지 않았고 잠재 후계자들 중에도 정권의 핵심계층에 속한 자들이 얼마 없었다. 아틸라가 죽은 후 훈제국이 급속히 붕괴한 것도 이 때문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스스로 자초한 결과엿다.”

“말 위에서 세계를 정복할 수는 잇지만 말 위에서 세계를 다스릴 수는 없다.” 칭기스칸 때 나온 말이다. “말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채찍을 휘두르며 방목하는 것과 칼을 휘드르며 사람을 죽이는 것 고작 이 두 가지 뿐이다. 정복 후에는 어땠을까? 비록 크나큰 영토가 수중에 들어왔건만 언어도 종교도 다르고 각기 다른 생활방식을 지닌 민족들이 섞여 있는 고아활한 영토를 무슨 수로 다스린단 말인가? 각 민족에게 골고루 이익을 배분하여 균형 잡힌 세력을 유지하는 일은 영웅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였다. 이럴 때 고ㅝㄴ력 유지와 원활한 통치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각 민족 사이에 경제적 유대관계와 정신적 유대감을 만드는 것이다. 초원 제국은 군사정복으로 형성된 하나의 결과물로 초원지대를 생활의 근거지로 삼고 잇었지만 지형이 복잡하여 경제 여건과 발전 속도는 제각기 달랐고 따라서 통일된 국내시장을 형성하기가 불가능햇다. 통일된 시장이 없다보니 자연히 경제적인 유대관계가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그래서 광활한 초원을 다스리는 영웅은 두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간섭이나 참견 없이 조공만 열심히 관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예 농경지를 유목지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합리적인 통치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초원제국의 영토가 넓어질수록 분열과 붕괴의 속도는 그만큼 빨라졋다.”

말 위에서 어떻게 내려올 것인가가 언제나 유목민족의 제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엿다. 훈족의 제국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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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의 희망 | 경제경영 2010-10-31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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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Small Giants 스몰 자이언츠 대한민국 강소기업

이장우 저
미래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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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는 혁명을 겪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변했다. 이책은 그 변화 중에서 기업생태계의 가장 뚜렷한 변화에 관한 것이다.

“’99, 88’이란 구호가 있다. 중소기업이 대한민국 전체 기업 수의 99%, 종업원 수의 88%를 차지한다는 말이다. 대기업들이 한국의 수출과 GDP를 선도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소기업이 없는 대기업은 존재할 수 없고 중소기업이 취약하면 대기업도 취약할 수 밖에 없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다. 중소기업은 경제의 뿌리이며 줄기이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대기업은 중소기업이란 뿌리없이 줄기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중소기업은 대기업을 위한 부품 공급처에 지나지 않았고 서자 취급을 받아왔을 뿐이다. 없는 살림에 투자대비 효과를 따질 수 밖에 없었고 대기업을 우선 지원해 경제의 규모를 키울 수 밖에 없었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을 보조하는 차원에서 키워졌을 뿐이다.

그래도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대기업들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정작 경제에 떨어지는 것은 없다. 고용도 늘지 않고 소득도 늘지 않는다. 더 문제는 소수의 대기업에 의존하는 식으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처럼 기업 역시 수명이 잇다. 지금 잘 나가는 대기업이 앞으로도 잘 나간다는 보장이 없다. 지금 잘 나가는 소수의 대기업에 국가의 명운을 거는 것은 위험천만한 도박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업 생태계를 건강하게 해야 한다. 거목이 쓰러져도 빈 자리를 메울 나무가 얼마든지 자라는 숲처럼 기업 생태계 역시 다양성이 있어야 건강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1990년대 중반 드디어 강한 중소기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코스닥과 벤처기업 육성제도가 갖춰지면서 새로운 유형의 중소기업이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이 정책들이 시작된 지 만 10년 만에 2만개의 기술집약적 벤처기업들이 생겨나리라고는 누구도 쉽게 예측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다시 10년이 지난 오늘날, 스몰 자이언츠라는 더욱 강력해진 중소기업들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1997년 1천개의 벤처 인증 기업 수가 2007년에는 1만 4천 개가 되었다. 코스탁 시장의 시가 총액도 1997년 7조에서 2007년 72조 원으로 급상승햇다. 매출액 1천억 원이 넘는 벤처기업들도 이 기간 동안 200개가 넘게 생겨났다.”

이책은 9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스몰 자이언츠 즉 강소기업들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를 유형으로 나눠 분석하고 그들이 앞으로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한가를 분석한다.

이책이 대상으로 하는 강소기업은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갖추고 차별화에 성공한 업체들이다. 이들이 경쟁력을 갖추고 차별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원천에 따라 저자는 4가지 유형을 제시한다.

강소기업들은 기술, 마케팅, 비전 3가지 원천에서 경쟁력을 얻는다. 시장에서 생존하려면 3가지 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세가지를 다 고루 갖춘 기업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시작할 때는 어느 하나가 특출하다. 그리고 그 하나를 받치는 하나가 더 있으면 성장이 가능하다. 세가지 중 어느 것이 지배적인가는 그 기업의 DNA가 되고 앞으로 그 기업이 어떤 성장경로를 밟을 것인가를 결정한다. 저자는 경쟁력의 3가지 원천에 따라 강소기업을 4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기술개척자. 혁신적인 제품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목표이다. 기술개척자로서 제품 혁신 능력을 기반으로 새로운 성능과 앞선 기술을 먼저 적용함으로써 차별화를 만들어내며 새로운 시장을 선점함으로써 경쟁우위를 확보한다. 저자는 이 유형의 대표적 예로 애플을 들며 TLI, 잉크테크, CNS테크놀로지 등이 예이다.

“혁신은 그야말로 그들의 유전인자이다. 그러나 신기술을 창출하는 능력은 시장우위를 점하기에 유리하지만 점차 혁신 자체를 위한 무리한 투자로 이어지면서 소비자를 무시한 비현실적인 돈키호테형 기업으로 전락한다.. 신제품 개발에만 집중된 경영은 마케팅이나 원가 관리에는 취약한 체질로 만든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이노베이션의 귀재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다. 초기에 그는 퍼스널 컴퓨터 개발에 주력하여 애플 검퓨터를 만들었고 이는 IT 업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켯다. 성공한 스티브 잡스는 만족하지 않고 모든 기술력과 자금을 동원하여 매킨토시를 발표햇다. 하지만 매킨토시는 다른 소프웨어와의 호환성에서 IBM에 밀려 판매 부진을 면치 못한다. 매킨토시의 실패와 스티브 잡스의 독선적인 경영 방식으로 애플은 한동안 경영난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스티브 잡스는 이사회로부터 애플을 떠나라는 통고를 받는다.”



둘째 장인기업. 이 유형 역시 기술 드라이브형 기업이지만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보다는 기존 틈새시장에서 설계와 생산기술의 우위를 축적하여 품질과 가격을 경쟁력으로 핵심역량을 구축한다. 대부분 B2B 부품 전문 기업들이며 글로벌 시장에서 점유율 1,2위를 차지하는 히든 챔피언들은 대부분 이 유형에 속한다. 안철수연구소, 에이스테크놀로지, 바이오스페이스 등이 예이다.

“장인 기업은 품질에 대한 열정으로 시장에서 인정받고 원가절감에 대한 남다른 노력으로 가격 경쟁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품질에 대한 몰두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때 큰 실패로 이어진다. 자질구레하고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거나 틀에 갇혀 오직 기존의 것을 지키는 데만 집중하면 결국 시대에 뒤떨어진 제품을 만드는 유아독존 기업으로 전락할 수 있다. 애초에 기업의 성공요인이었던 전략목표들이 집착으로 변하면서 쇠퇴의 원인으로 작동한다. 성공한 장인 기업은 기존에 했던 틀 안에서 매우 제한적인 마케팅 활동을 펼치며 기술 혁신마저도 등한시하기 쉬운데 이런 상황을 ‘집중형’ 성공 함정에 빠졌다고 말할 수 있다.”

셋째 마케팅 기업. 시장기회를 포착하는 능력과 마케팅 노하우를 가지고 시장에서 새로운 틈새를 발굴하거나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에 진입해 자리를 잡는다. 이들의 경쟁력은 기술보다는 시장기회 포착력이다. 진입한 시장에서 사업기반을 확보한 후에는 다른 분야로 사업을 확장해 성장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연관성이 없는 분야로의 다각화도 망설이지 않는다.

이들의 힘은 뛰어난 마케팅과 브랜드 이미지 창출 능력, 공세적인 시장전략이다.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 전략, 광고와 매력적인 홍보 마케팅은 경쟁에서 유리하다. 그러나 마케팅만 잘하면 시장을 지배할 수 있다는 식의 자만은 상품의 내용보다 광고라는 외양에 집중하게 만들고 고객에게는 과도한 상술 정책으로 결국 스스로를 위기에 빠뜨린다. 비슷한 상품을 대량 출시하여 판매 부실을 초래하거나 너무 많은 시장에 눈을 돌리고 과도하게 매장을 개설하는 등의 확장 욕심으로 시장표류형 기업이 될 수 있다. 무리한 마케팅 전략과 이어지는 리더십 부재, 매너리즘에 빠진 조직 시스템은 서로 악영향을 미치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ㄷ. 시장 니즈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시장으로부터 괴리되어 실패를 자초하는 것이다.”

넷째 건설가 기업. 이들의 힘은 기술도 마케팅도 아닌 비전이다. 저자는 아이폰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며 국내에선 인터파크와 김영사를 그 예로 든다. 이들의 차별화 원천은 비전과 경영철학에 있다. 남들이 보지 못하거나 도전할 수 없었던 시장에 과감하게 뛰어든다. 모르는 분야하도 비전으로 투자자, 수요자, 공급자를 설득하여 자원과 시장기회를 얻는다. 이런 유형은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에서 기회를 잡는다.

“건설가 기업들은 사업적 상상력이 풍부하다. 게다가 뛰어난 자금 조달과 투자 관리 능력도 갖고 잇다. 재무 능력을 토대로 사업확장을 위해 인수합병과 사업 다각화에도 관심이 많다. 인터파크는 사내 벤처팀으로 출발해 국내 최고의 인터넷 쇼핑몰이라는 설득력 있는 사업계획서를 가지고 불과 창업 2년 만에 코스탁 입성에 성공했다. 코스닥 시장에서 조달한 자금을 가지고 인터넷 쇼핑몰뿐만 아니라 여행 사업과 공연 사업에도 진출했다. 코스닥 등록 이후에는 시장 점유율 확보를 위해 무리하게 투자한 여파로 오랫동안 적자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투자자들에게 비전 잇는 사업 계획을 제시해 외부 자금 조달에 또다시 성공했다.”

“건설가 기업은 재무 분야에 관심이 많고 자본을 늘리기 위해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기업을 팽창하는 유형이다. 일단 사업의 기초를 잡는 데 성공하면 계속해서 인수 합병이나 사업 확장의 기회를 꾀하려 한다. 그러나 때 이른 성공은 그들을 지나치게 과감하게 만들어 브레이크 없는 질주가 계속된다. 마치 제국주의와 같은 오만하고 통제가 힘든 기업으로 전락한다. 이것이 모험형 위헙이다.”

저자는 이렇게 4가지로 강소기업들을 분류한 후 자신이 직접 조사한 기업들을 이 유형에 따라 분석해나간다. 이책의 장점은 간단 명료한 유형과 그 유형이 실제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다양한 케이스 스터디로 그것도 한국의 사례를 분석하며 보여준다는 데 잇다.

저자는 단순히 자신의 유형론을 적용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런 유형이 있고 그런 유형이 실제 시장에서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유형의 기업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장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바로 그 장점이 어떻게 약점이 될 수 있으며 그 약점이 어떻게 그 기업들에 나타나는가 그리고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가를 다루는 것이 이책의 내용이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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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직도 고현정인가? | 경제경영 2010-10-29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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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미디어의 진화가 경제 지도를 바꾼다

고종원 저
새빛에듀넷 | 2010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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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연예인들은 장동건, 고현정처럼 1990년대 초반부터 왕성하게 지상파 TV를 통해 활동했던 40세 전후 나이의 탤런트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데뷔 2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정상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왜 그럴까? 사람들의 취미가 갑자기 ‘노땅’을 좋아하게 바뀐 것일까? 사람들의 취향이 갑자기 중후한 연기력을 높이 사는 것으로 바뀐 것일까? 이런 현상은 한국만의 것은 아니다.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가장 판매량이 많은 팝 아티스트들은 마찬가지로 90년대 초반까지 명성을 확립한 사람들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잊혀지게 마련인 연예계의 시계가 갑자기 수십년 동안 고장난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의 장기집권은 뛰어난 역량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을 대체할 슈퍼스타들이 출현하지 못한 것도 그 원인이다.”

왜 슈퍼스타가 출현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2000년대 들어 등장한 배우들은 1990년대처럼 TV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압도적으로 노출될 기회가 없었다. 전체 국민과 연령대를 통틀어 높은 인지도를 얻은 ‘전국구’ 탤런트로 성장할 수 있는 통로 자체가 좁았다. 지상파 방송이 지닌 힘이 약화됐기 때문이다.”

지상파 방송의 힘이 약화되었다는 것은 TV를 사람들이 예전만큼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90년대의 스타들이 데뷔했을 때만 해도 채널은 AFKN까지 5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케이블 TV, 위성방송 등이 있기 때문에 채널을 고르는데만 해도 시간이 한참 걸린다.

지상파 방송을 괴롭히는 것은 경쟁매체만이 아니다. 매출의 절대치가 갈수록 줄어들면서 생존이 위협당하고 있다. 광고의 감소는 방송만 겪는 것이 아니다.

“1997년 우리나라 전체 광고 시장의 왕좌는 신문이 차지했다. 광고 수익을 놓고 볼 때 신문이 신문이 국내 광고 수입의 39.5%를 차지해 지상파 TV(28.8%)를 압도했다. 라디오는 4.3%, 잡지는 4%, 케이블 TV는 2.4%, 인터넷은 0.7%였다.

그로부터 약 12년 뒤인 2009년에는 이 비율이 큰 폭으로 바뀌었다. 우선 신문은 광고 비중이 20.7%로 떨어졌다. 절반 가까이 하락한 셈이다. 지상파 방송은 2002년을 전후로 37.7%까지 늘어나는 파격적인 성장세를 보이다가 신문보다 더 급속하게 줄어들기 시작해 2009년에는 23.3%까지 감소햇다. 라디오는 3.1%, 잡지는 65로 줄어들었다. 반면 케이블 TV는 10.7%로 늘어났고, 인터넷은 광고수입이 없다시피 하던 상황에서 17.1%나 성장햇다.”

광고수입 변화를 보면 90년대와 2000년대의 미디어 지형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방송은 미디어의 왕이었다. 그러나 그 왕조차 인터넷의 위력을 체감하고 있고 신문은 음반산업처럼 멸종을 생각해야 할 처지로 몰려있다.

신문, 방송, 라디오, 잡지, 출판, 영화, 게임, 음반은 서로 다르면서 같다고 볼 수 있다. 모두 미디어 산업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갖고 잇지만 결국 소비자의 입장에선 자신의 시간을 쪼개 미디어를 소비하는 것이므로 이들 미디어는 서로 경쟁관계이다. 그리고 인터넷과 같이 어느 한 매체가 두드러지면 위에서 본 것처럼 다른 미디어가 심각한 피해를 본다.

이책은 2000년대 들어 미디어 산업의 지형도가 어떻게 변했는가를 개관하는 것이 목적이다. 물론 새로울 것 내용이다. 인터넷의 충격은 2000년대 내내 이야기 된 것이고 지금은 모바일까지 더해져 논의의 초점은 인터넷을 넘어 모바일로 옮겨가고 잇고 두개의 충격에 미디어의 지형도가 어떻게 바뀌었는가는 수많은 책들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신문/방송 같은 전통적인 산업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책도 드물지 않다.

그러면 이책의 가치는 무엇인가? 내용의 폭에 있다. 다른 책들과 달리 이책은 미디어 산업에 속한 매체들을 모두 포괄하여 개관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사전식 책자들은 폭은 넓을지 모르지만 깊이가 부족하지 않은가? 그렇긴 하다. 이책은 다루는 내용에 비해 분량이 많은 편이 아니다. 오히려 내용의 폭에 비하면 내용의 양은 빈약하다.

그러나 한권에 미디어 산업 전체를 개관하면서 산업 전체를 시야에 넣을 수 있게 쓰여진 책이 없다는 점, 그리고 한국의 산업을 그렇게 개관한 책은 더더욱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미디어 산업에 관심이 있다면 그리고 한국의 변화를 알고 싶다면 읽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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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처럼 지다 | 인문/사회/역사 2010-10-28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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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쇼와사 2

한도 가즈토시 저/박현미 역
루비박스 | 2010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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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전쟁 책임을 질 것인가?
천황: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할 이야기가 있다.
맥: 좋다. 말해라.
천: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하건 상관없다. 나는 모든 책임을 지겟다. 당신이 대표하는 연합국의 결정에 나를 맡기기 위해 찾아왔다. 나를 교수형에 처해도 상관없다(You may hang me).

그러나 나는 전쟁을 바란 적은 없다. 왜냐면 나는 전쟁에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군부에 불신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으며 일본 국민의 리더로서 신민이 취한 모든 행동에 책임을 질 생각이다.

“맥아더는 이때 매우 놀랐으며 감동했다. 전쟁에 패한 나라의 원수가 직접 찾아와 ‘나에게 책임이 있으니 처분을 받겠다’고 말한 것이니까. 역사를 살펴보면 대개 망명이나 목숨을 구걸하거나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고 버티지 스스로 ‘You may hang me’라고 말한 예는 없는 것 같다. 맥아더는 천황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회상록’에도 적었고 자기 입으로도 자주 이야기했다.”

천황에 대해 감동한 것은 맥아더 뿐만이 아니었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정부는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고 연합국에 통보했다. 단 연합국이 요구하는 무조건 항복이 아니라 단 하나의 조건을 내건다: 천황제의 보호를 보증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전보를 받은 미국은 무척 곤란해한 것 같앗다. 육군장관인 스팀슨은 ‘일본인은 어찌 되었든 끝까지 천황을 좋아하는구나’라며 말할 수 없이 감동했다고 나중에 글을 남겼다.”

천황과 첫만남에서 “맥아더는 처음에 아주 거만하게도 천황을 맞으러 나오지도 않았지만 돌아갈 때는 현관 입구까지 배웅을 하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이후 맥아더는 천황을 목 매달라는 연합국들의 여론에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맥아더가 보호한 것은 ‘천황’이지 ‘천황제’는 아니었다. 미국의 일본점령 정책의 목표는 군국주의의 해체였고 다시는 군국주의가 부활하지 않도록 일본의 체제를 바꾸는 것이었다. 군국주의의 해체에는 천황제도 포함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천황은 자신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인간선언을 한다. 이후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신앙처럼 일본인을 지탱해왔던 정신구조는 전부 다 날아가 버렸다. 그러면 그 대신에 무엇이 일본인의 정신을 지탱해 온 것일까? 그것은 미국식 민주주의일 것이다. 그때부터 일본은 미국식 민주주의에 의해 재건되어야만 했다.”

이후 미국이 만든 소위 ‘평화헌법’에서도 여전히 천황은 국가원수였다. 그러나 메이지 헌법과 달리 국가의 주권은 천황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었고 천황은 정치에 관여할 권한이 없는 상징에 불과하게 되었다.

천황이 국가의 상징이라는 것은 미국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다. 이후 1958년 미치코가 황태자비로 간택되었을 때의 ‘미치붐’과 국가적 행사로 성대하게 치뤄진 황태자의 결혼식 때 천황의 지위에 대한 문제는 사실상 결론이 난다. 천황제를 상징으로 만들고 그를 계속 중요한 존재로 떠받든다는 것이 결혼식을 둘러싼 열광으로 사실상 합의된 것이다.

천황은 상징으로 군림할 뿐 지배하지 않는 국민주권의 원칙이 만들어지면서 민주주의는 형식을 갖추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형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군국주의의 기둥들을 없애야 햇다.

GHQ는 가장 먼저 군대를 해체했다. 그리고 재벌도 해체되었다. “GHQ의 주장은 ‘일본의 산업은 일본의 지지를 받았고 그 덕분에 소수의 강화된 재벌의 지배하에 있었다. 산업지배권의 집중은 독립 기업가의 창업을 방해하고 일본의 중산계급의 진흥을 방해한다.’는 것이었다.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려면 경제도 민주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지주들도 없어져야 햇다. “이 농지개혁이 성공한 덕분에 일본의 농촌이 어느 정도 빈곤에서 해방이 되었고 그 덕분에 지금의 일본이 만들어졋다.”

그리고 자본가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으로 노조를 만들었다.

전전 일본의 시스템은 국가의 주권을 가진 천황을 정점으로 군부와 재벌, (정치 엘리트를 배출하는) 지주계급이 떠받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천황은 허수아비가 되고 군부와 재벌 그리고 지주계급이 거세되었으며 전전의 정치인들 역시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정치권이 진공상태가 된 것이다.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은 천황의 ‘관료’들이었다. 그리고 그 관료들을 이끈 것은 요시다 시게루 수상이었다. 전직 외교관 요시다 시게루는 전전에 태평양전쟁을 반대한 것이 훈장이 되어 공직추방에서 제외되었다. 전전의 거물 정치가들이 공직추방을 당해 진공상태가 된 정치권을 장악한 요시다 수상은 관료출신들을 문하생으로 키워 후에 자민당 ‘보수본류’를 만들었고 전후 일본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의 비전을 보통 ‘요시다 독트린’이라 부른다.

전후 일본의 원형을 결정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의 방침은 비군사화, 민주화였고 미국이 떠난 후에도 ‘평화와 민주주의’란 원칙으로 일본의 방향이 된다.

그러나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는 슬로건일 뿐이다. 슬로건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 해석에 따라 일본이 어떤 국가가 되어야 하는가는 4가지 견해가 있었다고 저자는 정리한다.

“첫째는 전쟁 전과 같이 천황을 제일 윗자리에 앉혀 육해군을 정비한 이른바 ‘보통 국가’가 되는 것이다. 두번째는 좌익이 주장하는 사회주의 국가이다. 세번째는 경무장을 한 통상무역국가이다. 경제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풍요로운 국가를 만든다는 선택지이다. 그리고 네번째는 소일본이다. 분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 문화국가로 동양의 스위가 되는 것이다.”

요시다 독트린은 세번째를 말한다. 그러나 1949년 공직추방이 해제되면서 복귀한 전전의 정치가들은 요시다 독트린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보통국가였다. 이후 요시다 독트린과 보통국가론이 자민당 내에서 충돌한다.

요시다 독트린은 ‘군비는 미국에 맡기고 일본은 경제를 다시 부흥시켜 무역국가로 살아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상적인 국가인가? 국가도 사람처럼 제 앞가림은 할 수 있어야 한다. 군대도 없이 집 지키는 일을 다른 나라에 맡기고 하라는 대로 뭐든 하는 자존심도 긍지도 없는 나라가 제대로 된 국가인가? 보통국가론자들의 질문이다.

같은 질문을 던졌던 사람이 1970년 자위대 건물에서 할복자살한 작가 미시마 유키오이다. “경제는 부흥했을지 몰라도 패전으로 상실한 일본인의 전통적인 문화와 정신은 전혀 부흥하지 않았다. 돈을 버는 것에만 만족하겠는가? 모두 그렇게 얼빠져 있어도 좋은가?”

“’나는 코를 막고 전후를 살아왔다.’고 말하며 이런 전후는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해왔던 미시마 유키오는 자위대의 이치가야 주둔지에서 연설을 한다. 11월 25일의 일이다. ‘자위대 제군들이여, 한심한 정부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켜라. 일본의 정신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라고 외치고 헌법개정, 천황친정의 부활을 큰소리로 호소랬지만 아무도 박수를 보내는 이가 없고 단지 어안이 벙벙해져서 바라만 볼 뿐이엇다. 미시마는 처음부터 예상을 하고 있었고 죽을 생각으로 들어왔으니 자기가 할 말을 다 하고 할복자살을 하고 만다. 이것은 텔레비전을 통해 전 일본에 중계되었다.”

후의 미시마처럼 국가의 자존심을 외치는 보통국가주의자들이 권력투쟁에서 이긴 후 50년대 후반은 보통국가론자들이 정치를 장악한다. 요시다 내각을 무너트리고 수상이 된 (전전의 거물) 하토야마는 선거에서 ‘헌법개정, 재군비, 공산권과의 외교’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지금까지처럼 미국이 시키는 대로 공산권 국가와는 외교를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버리고 우리는 독립국이므로 일본의 자주적인 외교정책으로 공산권과도 외교 관계를 맺자는 말이었다.”

문제는 보통국가론이 전후의 대원칙인 평화와 민주주의에서 평화를 깨는 것으로 들렸다는 것이다. 아직 그때만 해도 일본인들에게 만주사변부터 태평양전쟁까지의 ‘15년 전쟁’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었다. 그런데 전전에 그 전쟁을 일으켰던 정치가들이 주장하는 보통국가론은 다시 그때로 돌아가자는 말로 들렸다. 이후 평화란 슬로건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아 총대를 맨 것이 사회당이다. 전쟁포기를 명기한 ‘평화헌법’ 수호 단 한가지가 사회당의 존재이유가 된다. 사회당의 존재는 헌법개정을 불가능하게 했고 하토야마 내각 출범한 3쇼와 30년부터 쇼와 31년(1956)까지 평화운동을 명분으로 한 유혈사태가 종종 일어난다.

헌법개정과 재군비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토야마에게 남은 것은 자주외교 한 가지였다. 그는 소련과의 국교정상화에 매달린다. 소련과 국교가 회복된 후 일본은 UN 가맹국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하토야마는 할 일을 다했다며 물러난다.

하토야마의 퇴진 후 역시 기시가 수상이 된다(1957). 그 역시 하토야마 이상으로 강경한 헌법개정과 재군비론자였다. 그러나 평화주의가 강력한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던 기시는 안보조약 개정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는다. 그가 말하는 안보조약 개정은 미국과 일본이 대등해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기지를 빌려간 이상 미국은 제대로 일본의 방위를 할 의무가 있고 대신에 일본도 전면적으로 협력을 하겠다는 것이다.” 반대할 것이 없는 주장이다. 그러나 문제는 ‘극동의 국제평화 및 안전 유지를 위해 일본은 협력한다’는 부분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일본을 반공의 성채에 지나지 않았던 단계에서 이제는 공산주의에 맞서는 유력한 동맹으로 인정해달라는 말이다. 일본은 미국과 하나가 되어 열심히 싸울 테니 미국은 일본을 제대로 그리고 의무적으로 지켜주어야 한다는 계약을” 하자는 말이다.

미국으로선 불감청 고소원이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의 악몽을 떠올렸다. “전후 일본에서는 미국이 강요한 것라고는 하지만 신헌법에서 정해놓은 대로 평화주의적인 국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때 나온 안보개정이 개헌, 재군비로 이어지지 않을까 의심햇고 국내는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시는 강행돌파했다.

“이후 약 1개월은 정말로 끊임없이 데모가 벌어졌으니 매일매일 데모와 함께 시작해 데모로 끝났다. 경찰과의 싸움도 더욱 험악해졌다. 절정은 (1960년) 6월 15일 밤이엇다. 데모대가 의사당 문을 부수고 안으로 돌입했다. 그리고 경찰들이 데모대를 습격하였으니 수만 명의 대난투극이 벌어졌다. 그날 오후 7시 도쿄대생이었던 간바 미치코가 사람들에게 짓밟혀 사망했다. 사망 후에도 불을 피우고 라이트가 비춰져 하룻밤 내내 전쟁과 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후에 소방청이 발표하길 중상 43명을 포함하여 589명이 부상했다고 하는데 그보다는 좀 더 많았을 것같다.”

그러나 기시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임시각료회의에서 치안을 이유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일을 중지하기로 결정했다. 데모는 계속 이어져 조약 개정이 자동으로 성립하는 6월 19일이 왔다. 시각이 12시를 지나자 그 순간 국회를 둘러싼 35만명의 데모대의 마음속에서 커다란 한숨이 새어나왔다고 한다.

기시는 그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관을 덮으면 모든 일이 가라앉을 것이다.’ 자신이 죽고 나면 이해해줄 것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출처는 중국의 ‘진서’라고 한다. 그런 말을 남기고 관저를 나와 사저로 돌아갔다. 이렇게 기시 내각의 사명이엇던 안보조약 개정이 성립되었다.”

“이들은 백지상태에서 전전의 군국주의, 대일본제국시대에 대한 혐오감과 반발심을 계속 주입받으면서 자랐다. 그러니 그토록 혐오스러운 도조 내각의 각료였고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던 기시가 군사화 노선으로 달려가는 법안을 강행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안보파동은 군사대국 일본에 대한 결별이자 평화국가 일본에 대한 강한 기원을 의미했다.

소동은 기시가 퇴진하는 순간에 놀랍게도 뚝 끝나고 말앗다. 쇼와 3년에는 ‘더 이상 전쟁이 아니다’가 유행어가 되었다. 일본이 정말로 전후 기분을 졸업한 것은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안보소동은 전후의 불만을 전부 날려버린 이른바 가스 빼기라고 할 수 있으며 ‘전후 일본의 장례식(다나카 미치타로가 한 말)이었다.”

그 후 자민당은 다시 요시다 독트린으로 복귀했고 요시다 문하생들이 연이어 수상이 되었다.이후 보통국가론은 쇼와 연간에 다시는 제기되지 않았다. 저자는 안보파동 이후를 요약하는 말로 당시 유행했던 ‘데모는 끝났다. 이제 취직이다’를 내세운다.

기시의 뒤를 이은 요시다의 우등생 이케다 수상은 “일본 국민의 소득은 미국인의 1/8, 서독의 1/3입니다. 이 소득을 두 배로 만들겠습니다. 즉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월급을 두 배로 만들겠습니다.”고 선언한다. 소득배증운동 또는 ‘월급 두배론’이다.

“실제 쇼와 30년부터 35년까지 5년간 GNP 연평균 성장률은 8.8%를 상회하여 연간 10.4%로 성장하였으니 한 사람당 급료가 2.7배가 될 정도였다. 일본인의 생활면에서는 쇼화 20년대의 전후사가 여기서 일단 마무리되고 쇼와 30년대 이후의 진정한 전후사가 시작된 것이다.” 저자는 이때부터 일본의 고도성장이 개막되었고 국민들은 이때를 출발선으로 달리기 시작했다고 본다.

쇼와 39년(1964)엔 신칸센이 개통되었다.

“지금도 때때로 도쿄역에서 도카이도 신칸센을 탈 때 18번과 19번 선 계단 밑의 막다른 벽에 구리판으로 새겨진 문구를 읽곤 한다.

도카이도 신칸센
이 철도는 일본 국민의 지혜와 노력에 의해 완성되었다.
도쿄와 신 오사카 간 515킬로미터
기공 1959년 4월 20일
운행개시 1964년 10월 1일

허황됨이나 교만함, 흥분을 배제한 산뜻하고 깔끔한 문장이다. 운송대신이나 국철총재의 이름 따윈 없다. 일본 국민 모두가 만들었다고 적혀있을 뿐이다.”

그리고 도쿄 올림픽이 그해에 있었다. “당시 일본인이 마음속으로 느낀 것은 ‘이걸로 겨우 패전국에서 빠져나와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선진국의 일원이 되었다’라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올림픽은 일본인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 큰 역할을 햇다.

올림픽은 전후 국가건설 과정에서 커다란 변화를 이룬 중간지점이 되엇다. 점령으로 한번 전환이 찾아왔었고 안보소동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이제 다시 올림픽으로 한 획을 긋게 되었으니 여기서 다시 한 번 또 다른 전후가 시작되었다.”

올림픽 폐막식이 치러진 후 암으로 투병하던 이케다는 은퇴하고 역시 요시다 우등생인 (그리고 기시의 동생인) 사토내각이 성립한다.

“이케다는 드골이 ‘트랜지스터 라디오 세일즈맨’이라고 비웃을 정도로 경제성장에 전력을 다햇지만 정치적 외교적 문제에는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사토는 정치적 문제에도 맞대응할 각오를 한다.” 사토는 “오키나와가 조국으로 복귀하지 않는 한 전후는 끝난 것이 아니다’며 오키나와 문제를 자신의 사명으로 삼는다.

“생각해보면 전후 일본의 내각은 각각 자신이 수상이 되기만 하면 ‘이것만은 반드시 이루어내겠다’라는 커다란 명제를 안고서 그걸 달성하는 형태를 계승했다. 요시다 시게루는 (재군비를 하지 않는다는 것도 물론 중요한 일이었지만) 강화조약을 맺엇고 하토야마는 소련과의 국교를 회복했다. 기시는 맹렬한 반대에도 미일이 비교적 평등한 입장에 설 수 있는 안보조약의 개정을 이뤄냈다. 이케다는 고도성장을 실현시켰다. 그러므로 사토는 자신이 이룰 대사업으로 오키나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선언한 것같다.”

요시다 독트린이 부활한 이 시절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전체적으로 살기 좋은 시절이엇다. 이 시절을 에도 중기의 번영기에 빗대어 ‘쇼와 겐로쿠’리 한다.

그러나 풍요와 함께 체제가 굳어졌고 “아직 사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사람들은 그 굳어져 버린 체제의 어디에도 들어갈 여지가 없다는 생각이 든 것같다. 혼돈의 시기는 매우 먼 옛날 이야기가 되었고 빈부의 차가 뚜렷해졌으며 세상은 완성되어 버렸다. 남은 것은 폐쇄감뿐이었다. 그래서 젊은이들의 반역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68세대의 시작이엇다. “의기소침해 있었던 일본의 학생들이 쇼와 43년 가을 무렵부터 힘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이 힘의 중심을 이룬 것은 단카이 세대이다. 쇼와 22-25년 사이에 태어난 약 7백만의 베이비부머들이다.

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늘 경쟁을 해야 했다. 이들보다 조금 전인 쇼와 21년(1946)에 태어난 마쓰모토 겐이치는 자신이 초등학생이었을 때는 1학년이 4개였는데 다음 해는 8개가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10개반이 되었다고 했다. 학생 수가 너무 많아 한 명 한 명의 개인은 소홀하게 취급받았다. 모두 평등하게 그런 취급을 받았다면 몰라도 차별을 받게 되었으니 차별은 바로 불만이나 갈등으로 이어지고 반발심이 생겨 금방 화를 내는 성격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이 대학생이 된 것이다. 마침 그때 수업료 인상 문제로 충돌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는 쇼와 겐로쿠로 만사태평하게 지내온 교수들이 빛바랜 30년 전의 노트로 강의를 하고 잇었다. 몇 년전의 노트를 빌렸는데 ‘여기서 교수가 농담을 했다’는 메모가 적힌 곳에서 그대로 농담을 들여주는 강의도 있었다. 그런 일을 포함해 이 상황을 용서할 수 엇다는 생각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를 굳이 들자면 단카이 세대는 고도성장기에 철이 들었을 테니 치열한 경쟁을 겪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다. 지그시 뭘 참은 적이 없었다. 자신들의 생활이 풍족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부족한 건 참을 수 없다는 의식이 근저에 깔여 있었다.

한편으로는 단카이 세대의 아버지들은 정말로 열심히 일했고 게다가 조직에 소속되어 관리를 받고 잇었다. 회사중심의 회사 봉건 시대라 할 수 있다. 당시 자주 하던 말 중에 쇼와의 전쟁 때는 군국 봉건주의 시대였고 전후는 회사 봉건주의 시대라는 말이 있었다.

젊은이들은 그런 관리 사회에 대한 불만을 터트린 것이다. 그리고 대학수업은 지겹기만 했다. 공해나 환경문제, 세계각지의 혁명과 학생운동, 그런 것이 겹쳐져 세상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이 증대되어 반역이 시작되엇다.”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한 학생은 전체의 2할 정도엿다고 한다. 6할은 무관심햇다. 그러나 베이비부머의 2할이면 상당한 숫자엿다.

경찰 기동대와 학생 시위대의 난투가 일상이 되어가는 와중에 클라이막스인 도쿄대 야스다 강당 점거사건이 일어난다. 야스다 강당이 전쟁터가 된 후 “묘하게도 수많은 일반 학생이 투입되었던 대대적인 학생운동은 마치 자취를 감춘 것처럼 조용해졋다.” 이후 요도호 납치사건, 아사마 산장 농성, 텔아비브 공항 난사사건이 있었지만 신좌익은 고립되고 갈수록 소수가 되엇다.

1972년 오키나와가 반환된다. 저자는 오키나와 반환으로 일본의 전후는 일단 끝났다고 말하며 이책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1989년 쇼와 천황이 죽기까지의 나머지 쇼와사를 간략하게 돌아보면 이렇게 결론으르내린다.

“쇼와 천황이 사망한 그해의 12월29일 경제대국 일본은 최고로 빛나는 날을 맞이했다. 도쿄 증권 거래소의 평균주가가 3만 8915엔으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아니 영원히 나올 것같지 않은 사상 최대의 기록이었다. 이 기록이 나온 때가 쇼와 천황이 사망한 해였다는 점이 아이러니처럼 느껴지지만 전후 일본이 만들어온 경무장 경제제일의 통상국가가 이때 완성되었고 최고로 빛났던 순간이엇다.

그리고 쇼와 시대가 막을 닫는 것을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세계정세가 격변했다. 냉전의 종결은 일본의 버블을 터트렷다. 큰 번영도 일장춘몽이 되어 버렸다. 정말로 허망한 거품이엇다.

40년마다 일본이란 국가는 변해왔다. 전후 일본은 쇼와 27년(1952)에 독립국으로 발족한지 40년이라면 1992년인데 이 전년에 버블이 붕괴되었다. 모두가 열심히 노력해서 만들어 놓은 전후 일본은 40년 후에 주가가 최고치를 기록하고 세계 2위를 자랑할 정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근대국가를 만들고자 열심이엇던 일본이 러일전쟁에 이겨(1905) 국가건설에 성공하자 우쭐해진 나머지 점점 국제사회에서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결국에는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국가를 멸망시킨 것이 40년 후의 일이었다. 이것과 똑같았다. 전후 일본도 독립해서 국가건설을 시작한 후 40년 만에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리고 커다란 번영을 구가하여 다시 의기양양해 하더니 버블이 붕괴되어 우스운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이 이후의 일본은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 앞으로 어떤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목표조차 없이 부유ㅗ하고 있으니 다시 멸망의 40년이 시작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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