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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역사 | 인문/사회/역사 2010-11-2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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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저/안진환,이수경 공역
한국경제신문사(한경비피)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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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을 골랐다면 아마도 저자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출간된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가 쓴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책처럼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교양서를 기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목적이라면 틀린 선택이 아니다. 그러나 이책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학부의 전공강의를 책으로 펴낸 ‘정의란 무엇인가’는 간단히 말해 ‘정치철학 101’이라 할 수 있다. 정치철학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학부생을 위해 정치철학의 ABC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백과사전식으로 나열하기 보다 저자는 현재 영미권의 정치철학에서 유의미한 3가지 학파를 소개하는데 강의를 집중하고 있다.

이책 역시 마찬가지로 3 학파가 책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강의에선 소개에 집중했다면 이책에선 그 학파들이 실제 정치에서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정치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영미권에서 정치철학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본격적으로 대학의 학과로서 받아들여진 것은 19세기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정치철학의 역사는 종교의 위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영미권에서 종교의 위기는 1859년 ‘종의 기원’이 출간과 함께 시작되었고 1867년 영국인의 참정권을 노동자들에게까지 확대한 2차 개혁법으로 공식화되었다.

신의 죽음과 대중민주주의의 시작은 종교가 정당화 해주었던 개인의 행위와 사회질서가 어떻게 정당화될 것인가란 문제를 낳았다. 무엇이 종교를 대신한 신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 대안은 두가지였다. 이책에서 다루어지는 칸트주의적인 직관주의와 공리주의이다.

두 철학을 간단히 말하자면 ‘선한 동기에 기초한 철학’과 ‘선한 결과를 추구하는 철학’이다. 직관주의는 행위의 정당성을 양심에서, 인간 이성의 직관에서 찾았다. 그러나 그 직관은 어떻게 정당화될 것인가? 직관주의와 공리주의의 논쟁은 빅토리아식 타협을 낳는다.

“직관주의자들은 효용을 교의와 행위의 최종 시금석으로 확신하게 되었고 공리주의자들은 그들대로 기존의 사회제도들도 결국은 일정한 공리주의적 정당성을 지닌다는데 동의했던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융합을 통해 진보적 보수주의라는 영국 특유의 전통이 지적 정당성을 얻었으며 산업시대와 성공적으로 타협할 수 있었다.”(스키델스키)

이러한 공리주의적 타협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롤스의 ‘정의론’이 이전까지 공리주의적 합의를 뒤흔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공리주의적 타협이 가능했던 것은 효용이란 개념이 ‘공동체’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엇다. 다시 스키델스키의 말을 들어보자.

“지적 종합이 결코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철학적 합의는 논의의 대상이 사회일 때만 가능했다. 문제는 사회적 행위와 개인적 행위의 관계에 있었다. 결국 사회철학과 도덕철학을 비신학적안 하나의 틀 안에서 결합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판명되엇다. 사회철학은 공리주의 없이 성립될 수 없었고, 도덕철학은 공리주의와 함께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회철학과 도덕철학의 균열은 공동체가 정치의 근거일 때는 문제가 없엇다. 미국의 맥락에서 보자면 카운티를 단위로 주민의 자치가 이루어지고 그 카운티들의 합산이 미국이란 연방일 때는, “사람들이 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동질감을 느끼는 공동의 삶에 참여하여 자신의 운명을 통제한다고 느낄 때는” 사회철학과 도덕철학의 균열, 다시 말해 사회와 개인의 균열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균열이 표면화된 것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갈 때엿다. 시장의 힘이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 초창기 공화주의 분권정치를 구닥다리로 만들었을 때 균열은 표면화되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대규모 제조업에 반대햇다. 농업이야말로 고결한 시민들을 위한 것이며 공동체의 자치를 실현할 때 가장 적합한 생활방식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땅을 일구며 사는 것이 진정한 미덕의 구현이라고 주장햇다. ‘종속관계는 아첨과 굴종을 낳고 미덕의 싹을 짓밟는다.’며 제퍼슨은 대규모 제조업이 독립성이 결여된 무산계급을 낳을 것이라고 우려햇다.”

그러나 19세기 말 제퍼슨이 우려한 대로 “거대기업이 지배하는 국가경제는 지방공동체의 자치권을 축소시켰다. 그러는 동안 점점 더 증가하는 이민자들과 빈곤, 무질서, 비인간적인 도시의 성장은 많은 이들에게 국가를 통치하는 데 필요한 도덕성과 결집의식이 부족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앗다. ”

제퍼슨이 우려한 대로 “독점자본은 직접적으로 민주제도를 압박하고 그 통제를 무시하며, 간접적으로는 노동자들이 한 명의 시민으로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훼손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윌슨의 진보주의 시대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은 그러한 도전에 대한 응답이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던 시대에 진보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살아남으려면 경제적 힘이 집중된 것처럼 정치적 힘도 집중되어야”한다고 생각햇다. 그러나 정부의 중앙집권화만으로 민주주의가 구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 역시 국가 단위가 되어 정치공동체 역시 국가적 규모로 커져야 햇다(정치의 전국화). 경제적 삶이 전국화되면서 사회도 전국화되었고 그에 맞춰 정치도 전국화되어야 했다.

정치의 전국화는 뉴딜에 의해 완성된다. “작은 규모의 민주적 공동체들로 이뤄진 고결한 공화국이 가능하지 않다면 민주주의의 차선은 하나의 국가를 만드는 것이엇다. 그것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공동선을 지향하는 정치였다. 국가의 역할은 서로 경쟁하는 이해관계들을 위해 중립적인 틀이 되어주는 존재가 아니다. 현대의 사회, 경제에 부합하는 공동의 삶을 만드는 공동체엿다.”

그러나 저자는 ‘정치의 전국화’ 프로젝트는 실패햇다고 말한다. “20세기 중후반에 이르자 국가 공화국은 소멸했다. 전쟁처럼 극도로 예외적인 순간을 제외하면 국가는 그 전반에 걸쳐 공동체에 필수적인 자기 이해를 배양하기에는 너무 광대한 규모인 것으로 드러났다.”

정치현실이 더 이상 공동선을 위한 것이 되지 않을 때, 효용의 기준이 되는 공동선이 모호해졌을 때 공리주의적 합의는 무너졌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공동체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은 환상에 불과해졋을 때 정치현실은 “선의 정치에서 권리의 정치로, 국가 공화국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로 옮아”갔고 정치철학은 “공동의 목적을 지향하는 공공철학에서 공정한 절차를 지향하는 공공철학으로 옮겨간다.”

저자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다루엇듯이 정치철학의 주류가 공리주의에서 (칸트주의적) 자유주의로 옮겨간 것은 공공의 삶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자유주의가 그리는 삶은 대중사회의 삶이다. 그러면 그 삶은 어떤 모습인가?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한다. “대중사회를 견디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그 구성원들의 수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그들을 결집시키고 관계시키고 분리시키는 힘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 공동체주의자들의 공격이 시작된다. 자유주의자들도 공동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동체는 개인들의 합의에 의해 루소의 ‘사회계약’에 의해 만들어지는 공동체이다. 그러나 그런 ‘인공’의 공동체가 과연 현실적인가? 더군다나 자유주의가 그리는 개인이란 어떤 개인인가를 말할 때 상황은 더 끔직하다. 그 개인은 “자유로운 이성적 행위자가 아니라 개성과 도덕적 깊이가 전혀 없는 사람이 그려진다.” 마치 대중사회의 모래알 같은 개인들처럼 말이다.

삶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린 시대, 자신을 뛰어넘는 무엇과의 동질감을 느낄 수 없는 시대, 그런 시대에 가능한 철학은 무엇인가? 공동체주의자들의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반론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이다. 저자는 두 철학 모두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 생각하는 것같다.

그리고 그런 실패가 예정된 시대에 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이책을 읽으며 생각해볼 주제일 것이다. 그런 주제를 생각할 때면 로마제국의 역사가 떠오른다. 명예를 말하고 조국을 말하고 충성을 말하고 의무를 말하던 공화정 시대에서 제정시대로 옮겨갔을 때 로마의 예술은 개인주의화되엇다. 더 이상 제국은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크기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은 더 이상 명예나 국가의 운명 같은 것을 말하지 않았다. 오직 사랑 만을 말했다. 개인을 넘어설 수 없을 때 가능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사랑만이 구원일 수 밖에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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