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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의 미래 | 경제경영 2011-10-08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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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달러제국의 몰락

배리 아이켄그린 저/김태훈 역
북하이브 | 2011년 09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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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국제체제는 중심부와 주변부 경제로 나뉜다. 중심부는 대외 준비금으로 사용되는 통화를 발행하는 엄청난 특권을 누리며 자신들의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중심부를 따라잡기에는 한참 멀리 떨어진 주변부는 저평가된 환율 유지를 바탕으로 수출주도성장에 몰두한다. 그 결과는 중심부 국가가 자국 통화표시로 발행한 저수익 대외준비금의 대규모 축적이다. 1960년대에 중심부는 미국이엇고 주변부는 유럽과 일본이었다. 이제는 아시아 신흥시장이라는 새로운 주변부가 등장했다. 중심부는 여전히 미국이고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하는 경향 역시 여전하다.

미국은 적자를 계속 내면서도 달러의 가치는 주변부 통화에 대해서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주변부 국가들이 미국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변부 중앙은행들은 자국 환율이 절상되지 않도록 시장에 개입하여 달러를 매입한다. 1990년대 외환위기를 통해 얻은 교훈, 즉 세상은 위험한 곳이며 대외 준비금 축적을 통해 정부는 금융흐름의 갑작스런 변동에 대비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인해 이런 경향이 더 강화되었다. 준비금을 늘리려는 아시아 중앙은행들이 미국이 쏟아내는 달러표시 증권을 기꺼이 흡수해가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공공지출을 억제해야 하는 압력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 미국은 다른 채무자에 비해 낮은 금리를 지불하면서 외국 중앙은행과 정부에 채권을 매각했다. 그 결과 달러는 별로 절하되지 않는다. 이는 프랑스가 1960년대에 불평햇던 ‘과분한 특권’이엇다.

이 상황은 1950-60년대와 흡사하기 때문에 이 시기를 제2의 브래튼우즈라 부른다. 본래의 브레튼우즈 체제가 20년의 좋은 시절 동안 존재햇다면 신브래튼우즈도 마찬가지엿다.

시장에 맡겨두면 후발경제의 통화가치는 오른다. 생산성이 신속하게 오르기 때문에 통화의 가치는 오른다. 통화절상은 고도의 생산성이 고도의 생활수준으로 전환되는 방식이다. 시장의 압력은 영원히 병속에 머물러 잇지 않는다. 본래의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시장의 압력은 1970년대 초에 폭발햇다.” (저자의 ‘글로벌 불균형’)

신브레튼우즈 체제가 유지된 이유는 아시아 중앙은행들이 달러를 샀기 때문이다. 유일한 국제통화인 “달러를 사들이면 대미환율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환율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면 아시아 지역 내의 부품교역에서도 상당한 혜택을 누릴 수있었다. 대부분의 교역이 달러로 정구되고 결제되기 땝문에 대미환율을 안정시키는 일은 대단히 중요했다. 환율방어는 달러의 축적을 촉진했다. 또 다른 요인은 미국 채권시장이 자랑하는 풍부한 유동성이었다. 유동성이 풍부하면 낮은 비용으로 쉽게 매매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유동성을 해외투자자들이 제공했다는 점에서 달러는 보유통화와 국제통화로서 특권을 누리는 셈이엇다.”

그러나 신브레튼우즈 체제 역시 2008년 폭발했다. 팍스 브리태니커의 아름다웠던 시절, 벨르 에포크가 그랬던 것처럼 신브래튼우즈, 또는 글로벌 불균형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벨르 에포크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절은 끝났고 앞으로 팍스 아메리카가 어떻게 될지 세계경제가 어떻게 될지는 불확실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미국의 패권은 끝났다는 것이다. 팍스 브리태니카를 지탱하는 세 기둥은 군사력과 산업력, 금융력이었다. 팍스 아메리카나를 떠받쳤던 것 역시 그 세가지였다. 그러나 영국이 그랫던 것처럼 산업경쟁력이 먼저 흔들렸고 이라크에서 군사력이 흔들린 다음 금융위기로 금융력도 흔들렷다.

“안정성은 국제거래에 널리 쓰이는 통화가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이다. 용도가 지급수단이든, 회계수단이든, 가치저장수단이든 간에 안정성은 수출자와 수입자 그리고 투자자가 가장 먼저 찾는 조건이다. 금융위기만큼 통화의 지위에 치명적인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일은 없다. 금융위기가 불거지면서 달러의 국제적 역할에 대한 의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되었다. 미국이 고품질 금융상품의 발행국으로서 경쟁우위를 가진다는 주장은 이제 농담으로 치부되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고품질의 상품을팔고 우리는 그들에게 고품질의 금융자산을 판다’라는 말은 ‘그들은 우리에게 유독성 장난감을 팔고 우리는 그들에게 유독성 채권을 판다’는 말로 대체되었다.”

저자는 지금의 미국이 1차대전 직후 영국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16-17세기 유럽 최강국이었던 스페인 제국은 한때 세계 금과 은 총량의 80%를 가진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다른 국가들은 모두 스페인을 위해 일했다. 그러나 한 국가가 이토록 많은 부를 가지면 그 국가는 부를 창조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쉽게 돈을 벌게 된 ‘스페인 제조업자들은 더 이상 힘든 생산활동을 하지 않았다. 손에 들어온 주문을 다른 국가에 대량으로 하도급을 주었다. 영국의 방직업, 네델란드의 조선업, 이탈리아의 농장업과 북유럽의 어업이 스페인을 대신해 제품을 만들었다. 스페인을 부를 믿고 무절제한 소비와 대외 확장만 추구하다 생산이 위축되고 재정이 파탄나고 실업률이 급증했다.

세계의 맹주 자리를 차지한 영국은 스페인 제국과 같은 기로에 섰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노동으로 계속 부를 창출할 것인가 아니면 군사패권과 금융패권으로 다른 사람의 노동성과를 나눠가질 것인가? 이미 많은 부를 거머쥔 영국인들은 스페인처럼 후자를 선택했다.

역사는 놀랄만큼 반복된다. 미국은 200년 동안 고통스런 노동을 통해 거대한 부를 창조한 후 스페인과 영국처럼 점차 부의 창조능력을 상실했다.미국은 달러 발행 특권을 행사하면서 세뇨리지 수익과 자본 투자수익을 얻는 데만 혈안이 돼 귾임없이 자국 산업을 외국에 수출하고 있다. 미국인은 거액의 이익을 얻는 대가로 부의 창조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쑹홍빙)

패권의 세 기둥 가운데 경제력은 나머지 둘의 뿌리이다. 그러나 경제력이 흔들린다고 나머지 둘이 당장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1차대전 이전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은 1870년에는 총생산에서, 1912년에는 총수출에서 영국을 따라잡았다. 그래서 미국이 계속 런던의 무역금융에 의존하고 달러가 국제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그 나라의 금융력은 그 나라 통화에 대한 수요에 기초한다. 그 나라 통화의 수요가 있다는 말은 그 나라에서 사올 것이 많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규모가 크고 경쟁력있는 경제라면 그 국가의 통화에 대한 수요가 많을 수 밖에 없고 통화에 대한 수요는 그 나라 금융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낳는다. 영국이 금융패권을 쥘 수 있었던 것도 산업혁명 이후 월등한 경제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왜 유럽 국가들은 줄지어 1870년대에 금본위를 채택했는가?” 답은 간단하다. “세계적 경제대국이자 해외금융의 주요원천인 영국이 금본위제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영국이 금본위를 채택했기 때문에 최대교역국이었던 “유럽 2위의 산업국 독일도 영국을 따라 1871년 금본위제를 채택했”고 다른 나라들도 그 뒤를 따랐다. (저자의 ‘글로벌라이징 캐피털)

2차대전 이후 달러가 파운드의 지위를 대신한 것은 당연했다. “2차대전 후 25년 동안 달러는 최고의 지위를 누렸다. 2차대전을 통해 국력이 강화된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미국경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으로 성장햇다. (고립된 소련을 빼면) 미국은 세계 산업생산의 절반을 차지했다. 달러는 전 세계에 걸쳐 자유롭게 거래되는 유일한 통화가 되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1차대전 후에도 미국은 그런 위치였다는 점이다. 왜 달러는 파운드의 지위를 더 일찍 차지하지 못햇는가? 저자는 그 이유를 닉슨 쇼크 이후에도 달러가 패권을 유지한 까닭과 같다고 말한다. 미국의 금융력, “런던에 비해 뒤떨어지는 경쟁력이었다. 런던에는 쉽게” 깊고 넓은 “투자시장이 있었다. 그래서 리스크가 줄고 이율은 낮아졌다. 투자자들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에 은행들은 안정된 가격에 매매할 수 있었다.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런던 시장은 풍부한 유동성을 제공한 셈이다.” 시장에 유동성이 풍부하면 그에 비례해 불확실성이 줄어든다. “이러한 투명성은 더 많은 투자자를 런던으로 끌어들여 유동성을 늘렸다.”

그러나 뉴욕은 전혀 그런 시장을 갖고 잇지 않았다. 그 때문에 “미국의 월등한 경제규모에도 불구하고 1차대전 전까지 프랑스 프랑, 독일 마르크, 스위스 프랑, 네델란드 길더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리라, 벨기에 프랑, 오스트리아 실링이 달러보다 나은 대접을 받았다. 또한 외환보유고 점유율을 보면 파운드가 약 절반, 프랑스 파랑이 30%, 독일 마르크가 15%였다. 달러는 보유통화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조차 못했다.”

런던의 경쟁력 때문에 경제규모에서 미국과 독일이 영국을 추월한지 오래엿지만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영국의 파운드였다.

그러나 금융력은 경제력을 따라가게 마련이다. “1차대전 동안 미국은 세계의 순수창과 곡물창 역할을 하면서 엄청나게 수출을 늘렸다. 미국의 다국적기업들은 남미와 아시아로 사업영역을 넓혔다. 덕분에 미국은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또한 1차대전은 유럽 무역금융시장의 수급을 왜곡했다. 유럽정부들이 전시동원체제에 돌입하면서 무역금융시장을 운영할 자본이 귀해졋다. 독일과 영국 은행들은 수입에 필요한 환어음을 인수해달라고 뉴욕은행들에게 요청했다. 뉴욕은행들은 신용을 제공했다. 국제금융시장의 지형이 바뀐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1915년부터 금 대비 파운드의 가치가 심하게 요동쳤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파운드의 매력을 크게 떨어트렷다. 여전히 금에 확고하게 연동된 달러라는 대안을 감안하면 파운드이 매력은 더욱 떨어졌다. 그래서 미국뿐만 아니라 남미와 아시아의 무역업자들도 달러로 거래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기에 달러 표시 해외 환어음의 액수는 파운드 표시 액수보다 두배나 많았다. 1924년에는 다른 나라들의 달러 보유액이 파운드 보유액을 앞질렀다.”

같은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1차대전 전만 하더라도 파운드의 지위는 확고하게 보였고 런던의 경쟁력은 절대적이었다. 국제통화로서 파운드의 현직 프리미엄은 절대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파운드가 1차대전으로 타격을 받은 것처럼 달러도 고질적인 재정적자로 타격을 받았다. 또한 연준이 뉴욕에 환어음시장을 육성하려고 노력했듯이 중국정부도 상하이를 국제금융중심지로 육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 의문점은 왜 달러가 1970년대가 아니라 지금 몰락의 징후를 보이느냐이다. 신브레튼우즈 체제가 흔들리는 이유인 미국의 적자는 브레튼우즈 체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상황은 지금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현재의 중국과 인도처럼 빠르게 성장하던 유럽과 일본은 불가피하게 달러를 축적하기 시작햇다. 그들은 달러가 계속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그러나 “지금이 1960년대와 다른 점은 달러의 대안이” 없었다는 것이다. 닉슨 쇼크 이후에도 “환율은 달라졌지만 국제통화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른 통화들은 여전히 달러에 연동되었다.” 1970년대는 달러에 유리하지 않았다. 연이은 “평가절하, 인플레 등은 달러의 위상을 전혀 높이지 못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달러로부터의 이탈은 일어나지 않았다. 석유거래 통화를 늘리겠다는 OPEC의 논의도 흐지부지되었다.해외 정부와 중앙은행들도 다른 통화로 옮겨가는 실질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달러의 지배가 계속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최대의 경제대국이자 교역국이었으며 가장 큰 금융시장을 갖고 잇었다. 주요 경쟁통화인 마르크를 발행하는 독일의 경제규모는 미국에 비하면 작은 수준에 불과했다.” 경제규모가 작다는 것은 그 경제의 통화로 가능한 금융시장의 크기도 작고 금융시장이 작기 때문에 그 통화로 살 수 있는 금융상품도 작다는 말이다. 독일은 “그래서 중앙은행과 해외투자자들에게 매력적인 시장이 아니었다.”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대안이 없다면 달러가 어떤 어려움을 겪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무너진 이후에 그랫듯이 달러에 대한 우려는 기우에 그칠 뿐이엇다.”

그러나 1999년 유로와 함께 사정이 달라졋다. 경쟁자가 나타난 것이다. “지금이 1960년대와 다른 점은 달러의 대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외 정부와 중앙은행들이 보유고를 점진적으로 분산시키면서 부드럽게 전환 과정을 진행할 수 있다. 유럽중앙은행은 해외 정부와 중앙은행들에게 유로를 공급할 수 있다. 중국인민은앻 역시 위안을 공급할 수 있다. 전환과정에서 변동환률제로 묶인 유로와 달러의 상대적 가치도 조금씩 조정될 것이다. 이 경우 달러는 국제금융시장과 국제통화체제의 안정성을 위협하지 않고도 절하될 수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달러의 국제적 역할이 거의 줄어들지 않앗다는 것이다. 국제거래에서 다른 통화의 사용은 뚜렷하게 늘어나지 않았다. 외환시장에서도 달러의 지위는 굳건하다. 달러는 85%의 외환거래에 사용된다.”

아직 신브레튼우즈 체제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예를 들어 “중앙은행들이 보유통화를 다변화하려면 달러 외 다른 통화로 표시되는 채권시장과 예금시장이 미국만큼 풍부한 유동성을 가져야 한다.” 유력한 경쟁자인 유로 채권시장은 “미국보다 작고 유동성도 부족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유로가 나라 없는 통화라는 것이다. 단일 정부의 부재는 달러에 대항하는 유로의 힘을 약화시키는 주요인이다. 유럽에 경제적 문제가 생기면 회원국 사이의 복잡한 의견조율을 거쳐야 한다. 가령 한 나라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은 재정위기에 빠지면 회원국들이 힘을 모아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원국들이 부담을 어떻게 나눌지 합의한 다음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신속하게 이루어지기 어렵고 합의가 결렬될수도 있기 때문에 예상 밖의 사태에 대한 우려가 처진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중앙은행들은 섣불리 유로를 축적하기 어렵다. 그리스에서 발생한 금융위기가 단적인 예다.”

그러면 위안화는 어떨까? 현재로선 위안이 달러의 지위는 고사하고 지역통화로 자리잡는 것도 힘들어보인다. 중국은 전후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지속적인 무역흑자를 내는 동시에 위안의 국제적 활용도를 높이려 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이 위안을 확보하려면” 미국정부가 전후 마셜플랜으로 유럽에 달러를 공급하고 미국기업들이 해외투자를 했던 것처럼 “중국도 대출이나 투자를 해야 한다. 실제로 중국은 이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잇다. 중국정부가 앞으로 어떤 변화가 올지 알고 잇다는 증거다.

위안화가 국제거래에 폭넓게 사용되면 중국은 국제수지를 관리하기 위해 굳이 외환보유고를 둘 필요가 없다. 미국처럼 필요한만큼 위안화를 더 찍어내면 그만이다.” 중국정부는 2020년까지 위안화를 국제통화로 자리잡게 할 생각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많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중국이 위안화의 위상을 높이려면 자본시장을 개방하고 풍부한 유동성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면 상품거래뿐만 아니라 금융거래에서도 자유롭게 위안화를 사용할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냐다. 금융시장의 안정성과 자유화를 조화시키려면 까다로운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금융시장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또한 은행을 영리화하고 감독과 규제를 강화하고 합리적인 통화정책 및 재정정책을 추진하며 더 큰 규모의 자본흐름을 수용할 수 잇도록 환율의 유연성을 확대해야 한다. 다시말해 중국은 은행대출과 고정환율제에 기반을 둔 성장정책을 포기해야 한다. 이일은 결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상하이에 전면 개방된 위안 표시 채권시장이 열린다면 중국정부가 자금흐름을 관리하는데 지장이 생긴다. 중국인들은 위안화로 수익이 보장되는 채권을 예금의 매력적인 대안으로 볼 것이다. 그려면 중국식 성장모델의 기반이 위협받게 된다.” 쉽지 않고 빨리 되기도 힘들다. 그러므로 “위안이 달러를 대체한다는 것은 예상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다”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이다. 그러나 1차대전 전후로 “미국이 10년이 안되는 기간에 달러를 국제통화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중국정부가 세운 목표는 이미 달성한 전례가 있다.” 그리고 달러가 국제통화로 데뷔한 때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저자는 위안이 지역통화 이상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2020년까지 10년동안 연 7%로 “성장한다 해도 GDP가 미국의 절반에 불과하다 결국 위안화는 2020년에도 달러보다 작은 도약대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위한표시 채권시장의 유동성도 달러 표시 채권시장에 견줄 바가 못될 것이다. 그만큼 위안화의 국제보유고 비중은 제한될 것이다. 결국 유로 보유고가 유럽지역에 집중되듯이 위안 보유고는 아시아 지역에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국제통화체제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저자의 답은 “국제통화의 다변화다. 세계경제가 갈수록 다극화되면서 달러의 독점체제를 허물고 잇다.” 언제 그렇게 될지는 달러의 “현직 프리미엄의 정도에 달렸다. 국제통화를 향한 경쟁은 현상유지 편향의 영향을 받는다. 수출자와 수입자 그리고 채권 발행자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통화를 쓰는 것이 이득이다. 물론 현상 유지의 대상은 달러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달러의 독점은 깨질 것이다. “21세기의 세계경제 규모는 풍부한 유동성을 가진 복수의 금융시장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달러 유로 위안이 주요 국제통화로 나서겟지만 시장을 전부 차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세개의 국제통화를 수용할 여지가 있다는 것은 곧 더 많은 국제통화를 수용할 여지가 있다는 뜻도 된다.” 저자는 그 후보로 인도의 루피와 브라질의 헤알을 (조심스럽게) 추천한다.

물론 복수통화가 달러의 몰락일 필요는 없다. 파운드 시절에도 파운드는 독점을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약화시킨 근본적인 요소가 달러의 국제적 위상도 약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세계의 다극화다. 더 이상 세계 총생산의 대다수를 차지하지 않는 나라의 통화인 달러를 국제교역의 청구와 결제에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지 않다. 달러가 외환보유고의 대다수를 차지해야 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계경제가 다극화됨녀 통화체제도 다극화되는 것이 논리적이다.”

지금까지 “미국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무역적자를 감당할 수 있었다’. 해외의 상품과 기업을 사들이는데 필요한 자원을 그냥 찍어낼 수 있는 능력은 데스텡 프랑스 재무장관이 불평했던 바로 그 과분한 특권(이책의 원제목)이었다.” 그러나 경쟁은 더 이상 그런 특권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달러가 경쟁에서 이기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역사적으로 대표적 국제통화는 언제나 대표적 강대국이 발행했다. 강대국은 국제관계를 결정할 군사력과 통화를 뒷받침할 정치력을 가진다. 미국은 2차대전 후 연합국들에게 달러를 떠받치라고 요구할 수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더 이상 그런 힘을 가질 수 없을 것이며 달러의 특권은 사라질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달러는 국제통화로 남을 수 잇겠지만 그러기 위해선 예전과 달리 “재정 건전성을 회복해야 할 뿐만 아니라 경제 전반의 기초체력을 강화해야 한다. 영국이 2차대전 후에 초강대국의 지위를 잃은 것은 순채무국이 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 경제적 성과가 빈약하여 국가재정이 곤궁해졌기 때문이다. 지정학적 영향력을 근본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실상 환율이나 대외부채가 아니라 경제의 기초체력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현명하게 대처하면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다. 좋은 소식은 달러의 운명이 중국이 아니라 미국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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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십니까? | 인문/사회/역사 2011-10-08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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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신의 역사 1

카렌 암스트롱 저/배국원,유지황 공역
동연출판사 | 1999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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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동기 중에 신학생이 있었다. 군대에 있을 때 서로 많은 말을 했었는데 그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중세에 고명한 수도승이 있었다. 어느 날 지나다 그 수도승이 기도하는 것을 들으니 이런 내용이더라는 것이다. “신이시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같은 말만 계속 반복되는 기도였다고 한다. 지금도 그 친구가 신앙의 길을 걷고 잇는지는 모르겠다. 그 친구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며 하고 싶었던 말은 그 질문은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며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17살에 수녀가 된 저자를 떠나지 않았던 의문이기도 했다.

“나는 결코 선지자와 신비주의자들이 묘사하였던 그 신을 만나지 못하였다. ‘신’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언급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도 내게는 고대 말기와 밀접하게 연된 전적으로 역사적인 인물로만 생각되엇다. 나침내 나는 아쉬워하며 수녀원 생활을 떠나야 했고 좌절과 부적응이라는 짐을 벗어버리자 신에 대한 신념이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수녀원을 떠난 이후 저자는 인간은 종교적 인간이라는 것을, 종교는 인류에게 자연적이라는 것을, 신이란 인간 스스로 언제나 다시 창조되어온 잠정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을 삼십여년 전 내가 수녀원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배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지게 되었다. 만약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세 종교의 탁월한 신앙가들로부터 하늘 위에서 세상으로 강림하는 신을 기다리는 대신 내 자신을 위하여 신에 대한 감각을 의식적으로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더라면 나는 많은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토록 감동을 선사하는 시나 음악처럼 신이 창조적 상상력의 산물임을 일깨워 주었을 것이다. 종교는 극히 실용적이다. 우리는 앞으로 어느 특정한 신 개념이 논리적, 과학적으로 건전한 것인지보다 얼마나 유용한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더 이상 효능이 없어지자마자 신 개념은 변화하며 어떤 때는 아주 급진적으로 달라지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시대 이전의 대부분 유일신론자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진의 신 관념들이 신성불가침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잠정적이라는 것을 알고 잇었기 때문이다. 신 관념은 전적으로 인간이 만든 것이고 그 관념들이 상징하는 표현불가능한 실재와는 전혀 분리된 것이다.”

이책은 그 관념의 역사이다. 아브라함과 모세 그 후의 선지자들의 신 그리고 예수의 신은 모두 다른 신이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신은 인간으로선 표현불가능한 것이기에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인간이 초월을 경험한다는 것은 삶의 진리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주요 종교는 이 초월성을 일반적인 언어 개념으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유일신론자들은 이 초월성을 ‘신’이라고 부르면서도 중요한 단서조항을 덧붙였다. 예를 들어 유대교는 신의 신성한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금했고 이슬람은 신을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그리는 것을 금했다. 이러한 규율은 곧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실재가 인간의 모든 표현을 초월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징표였다.”

저자는 묻는다. “미국인의 99%가 ‘신을 믿는다’고 답했다. 문제는 과연 그들이 믿는다는 신이 어떤 ‘신’인가 하는 점이다. 신들을 창조하는 작업은 인간이 항상 해 왔던 일인 듯하다. 어떤 종교적 관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면 곧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 왔다.” 그 예가 지고신 또는 천신이라 저자는 말한다 (이 예는 저자의 이후 저서에도 반복되어 언급된다) 그러나 만물의 창조자로 여겨진 그 신은 인간에겐 너무 먼 존재였다 (중국의 天, 한국의 하느님도 그 예라 생각된다)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이런 신은 너무나 소원하고 너무 고귀한 탓에 결과적으로 열등한 영들과 더 접근가능한 신들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신화를 만들고 신들을 경배했던 것은 자연현상에 대한 어떤 실제적인 설명을 찾고자 함이 아니다. 상징적 이야기나 동굴 속의 벽화나 조각들은 그들이 경험한 경탄을 표현하고 이 압도적인 신비를 자신들의 삶과 연결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종교는 거룩함(聖)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신화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너무 복잡하고 파악하기 어려워 다른 방법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실재를 묘사하기 위한 비유적 노력이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고대인들은 이러한 신적인 삶에 참가함으로써만 자신이 진정으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같다.”

그러나 하늘님이나 天 또는 고대 팔레스타인의 만신전에 기록된 최고신 엘은 너무 먼 존재였다. 팔레스타인에 널리 받아들여진 신은 그보다 실제적인 힘을 가진 더 낮은 위계의 얌-나하르(바다와 강의 신)나 바알(비를 내리는 폭풍의 신) 등이었다.

“가나안에서 엘은 결국 최고신 대부분과 같은 운명을 맞아 기원전 14세기에 엘 숭배는 시들해지기 시작햇다. 대신 사람들은 역동적인 폭풍의 신이자 신성한 전사인 바알을 섬기기 시작했다. 기원전 6세기까지 이스라엘의 종교가 사실상 이 지역의 다른 민족들이 섬기는 종교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축의시대) “이스라엘의 종교는 실용적이어서 우리가 걱정하는 것 같은 사변적인 구체적 사항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오늘날 우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그들의 신을 믿었으리라 가정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초기 족장이었던 아브라함, 그의 아들 이삭, 그의 손자 야곱이 단 하나의 신을 섬긴 유일신론자였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같다. 실제로 이들 초기 히브리인은 차라리 가나안의 이웃들과 여러 종교적 신념을 같이 나눈 ‘이방인’이라고 하는 편이 더욱 정확할 것같다. 그들은 분명히 마루둑, 바알, 아나트 등과 같은 신의 존재를 믿었다. 혹은 그들이 모두 동일한 신을 섬기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의 신, 이삭의 ‘무서운 자’나 친족’, 야곱의 ‘전능한 자’는 모두 다른 세명의 신이었을 수도 있다.”

저자는 아마도 아브라함의 신은 가나안의 최고신인 엘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엘은 최고신일 뿐이므로 하위신인 바알 등의 다른 신을 배척할 필요가 없다. “이 신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엘 샤다이(산악의 신)라고 소개하는데 이는 엘의 전통적 칭호 중 하나다. 엘은 그들에게 족장이나 두목처럼 자상한 충고를 하고 방랑생활을 인도했으며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를 말해주며 꿈속에 나타나 계시했다. 가끔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을 보았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이스라엘인에게 저주받을 관념이 되고 만다.” 후대 8세기 무렵의 성서기자들이은 “그 누구도 신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보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이 충격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족장들이 신과 가까웠다는 옛날 이야기들이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현현에 담긴 의미는 신과의 은밀한 접촉을 신성모독으로 생각했던 후대 유대교의 유일신론보다는 오히려 일리아드의 정신과 더 가깝다고 할 수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에 더 가까웠던 아브라함의 신은 출애굽의 신과 다르다. “출애굽의 신은 잔인하고 편파적이며 살인적인 신이며 ‘야웨 사바오트(군대의 신)’라고 알려지게 될 전쟁의 신이기도 하다. 이 신은 심히 편협한 성격이어서 그가 좋아하는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동정하지 않는 단적으로 부족적인 신이다. 오늘날의 일부 학자들은 출애굽 이야기가 이집트의 (팔레스타인) 종주권과 가나안의 그 동맹자들에게 대항하여 일으킨 농민들의 성공적인 반란을 신화적으로 각색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출애굽에 대한 이런 해석은 저자의 이후 저작에 반복된다.

저자는 ‘축의 시대’에서 엘에서 전쟁의 신 야웨로 신도 신의 성격도 바뀐 이유를 암흑시대 때문이라 본다 (암흑시대에 대해선 ‘축의 시대’ 리뷰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암흑시대에는 축의 시대 민족 가운데 둘이 나타났다. 미케네의 폐허에서는 새로운 그리스 문명이 탄생했으며 가나안의 고지대에서는 이스라엘이라 부르는 부족 동맹체가 나타났다. 가나안의 붕괴는 매우 점진적이었다. 기원전 15세기 이후 이집트 제국의 일부였던 해안 지대 평원의 넓은 도시 국가들은 이집트가 물러나면서 하나씩 붕괴했다. 이 도시들의 몰락으로 기원전 1200년 직전 고지대에 새로운 정착지 네트웤이 형성된다. 이 네트웤은 북쪽으로 갈릴리 남부, 남쪽으로 베르셰바까지 뻗어있었다.” (축의 시대)

출애굽은 이집트 땅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이집트가 가나안에서 물러나는 과정을 그렇게 신화화했을 뿐이라는 것이며 이스라엘인은 해안지대의 혼란을 피해 고원지대로 이주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집트 대탈출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대체로 합의를 보았다. 성경의 가장 오래된 부분들은 야훼가 원래 남쪽 산들의 신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다른 부족들이 남쪽에서 고지대로 이주하면서 야훼를 데려왔을 가능성이 있다. 해안의 도시 국가들에서 이집트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던 이스라엘인은 자신들이 실제로 이집트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인이 원래 가나안 원주민이면서 외지인이라 주장한 것은 그들이 가나안 사회에서 주변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라 저자는 추측한다. “고고학자들은 고지대에서 상당한 사회경제적 분열, 심한 인구변화, 경쟁하는 종족집단들이 200년에 걸쳐 펼친 사활을 건 투쟁의 증거를 발견했다.” 이스라엘인을 만든 집단과 부족들은 “모두 숙고 끝에 가나안의 오래된 도시 문화에 등을 돌리겠다는 용감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진실로 외부인들이었으며 주변부에서 산 경험은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외부 기원설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반가나안 논쟁에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가족에서 신참자였으며 (암흑시대의) 트라우마와 격변의 산물이었고 늘 주변으로 밀려날 위협에 시달렸다. 이스라엘인은 이에 반발하는 정체성과 서사를 발전시켜 나갔다.” (축의 시대)

그들이 이주한 고원의 삶은 그들이 떠나온 해안지대만큼이나 폭력적이엇다. “초기의 정착자들은 자신들이 식민지로 만들려는 땅을 차지하려고 싸워야 했을 것이다. 성경에는 요르단 강변에서 거둔 위대한 승리의 기억이 보존되어 있다. 남쪽으로부터 이주하여 모압의 영토를 통과하려던 부족들은 그들이 강을 건너는 것을 저지하려던 현지의 집단과 싸워야 했을 것이다. 정착민들은 일단 한 마을에 자리를 잡으면 이웃들과 공존하려고 노력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갓 태어난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람들에 대항하여 단결해야 했다. 포위를 당한 상태에서 늘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전쟁을 준비하며 살게 된 사람들은 전투적 믿음을 발전시켯다.” (축의 시대)

이런 환경에서 그들이 섬긴 야훼는 당시 가나안에서 유행했던 바알과 별 다를 것이 없었다. 당시 인도로 침입한 아리아인들이 그랬고 그리스인들이 그랫듯이 폭력이 난무하는 영웅시대(또는 암시대)의 신은 힘과 전쟁의 신이엇다. 폭풍의 신인 바알은 “전차를 타고 하늘의 구름 위를 돌아다녔으며 다른 신들과 싸움을 했고 생명을 주는 비를 내렸다. 초기에 야훼 숭배는 바알 숭배와 아주 흡사햇다. 성경의 아주 오래된 텍스트에서는 야훼도 바알처럼 신성한 전사로 등장한다. 이 시절 부족들은 폭력적이고 위험한 삶을 살았으며 그들의 신의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축의 시대) 그렇기에 야훼는 그 당시의 다른 신들처럼 잔인하고 편협한 신이었다.

“유월절 축제는 예리코 공격에서 시작된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성전을 준비하는 행사였다. 예리코의 성벽은 기적적으로 허물어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소건 양이건 나귀건 모조리 칼로 쳐 없애버렸다.’ 야훼는 전쟁의 신이었다.” (축의 시대) “야훼가 진정 아브라함의 신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 신은 분명히 아브라함과 친구처럼 마주 앉아 함께 음식을 나눴던 신과는 다른 모습이다. 야훼는 공포를 자아내게 하고 인간과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함을 주장한다. 고대의 천신들이 인간의 관심사를 돌보기에는 너무 멀리 잇는 듯 여겨졌기에 새로운 신들인 바알, 마르둑, 대지의 여신은 인간과 친근하도록 개념화되었는데 이제 야훼는 다시 한 번 인간과 신의 간극을 벌려 놓은 것이다.” 이스라엘인이 아직 일신교도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야훼는 특별한 신이었지만 그들은 다른 신들의 존재도 인정하고 그들을 섬겼다. 야훼가 유일한 신이 되는 것은 기원전 6세기 말이다. 최기에 야훼는 신들의 모임에 속한 ‘신성한 자들’ 또는 ‘엘의 아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축의 시대) “그들은 전쟁 때 야훼의 능숙한 군사적 보호가 필요할 때는 그 언약을 기억했으나 평온한 시절에는 옛 관습을 쫓아 바알, 아나트, 아쉐라를 섬겼다.”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신성함을 하나의 신적인 존재에만 한정짓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을 것이다. 다수는 다른 형태의 신성함도 원했다. 이는 결국 야훼만을 섬기고 싶어하는 소수와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이스라엘과 인도에서도 새로운 적대적 땅에서 하나의 사회를 유지해 나가는 일의 불안정성과 어려움 때문에 믿음에 폭력과 호전적 이미지가 들어왔다. 그러나 사람이란 높은 수준의 긴장을 무한히 유지하며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축의 시대)

미치광이 율법학자 엘리야가 등장하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야훼 종교가 결국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이방종교에 흡수될 위험이 언제나 존재했다.” “야훼는 전사신이었다. 그는 농업이나 다산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따라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풍년을 보장받으려고 당연하게 바알과 아나트의 고대제의를 거행했다. 바알은 땅을 비옥하게 하는 신이엇기 때문이다.” (축의 시대)

엘리야가 바알과 야훼의 신성력 대결에서 바알의 사제 450명을 학살한 사건은 유명하다. 미치광이 율법학자라 불릴 충분한 이유이다. 엘리야가 대표한 것은 ‘야훼 유일 운동’이었다. 그가 바알을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페니키아의 신이지 이스라엘의 신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면 엘리야가 만난 신은 어떤 신이었는가? 저자는 그것을 ‘감추어진 신성’이라 부른다. “’ 이제 곧 나 주가 지나갈 것이니, 너는 나가서 산 위에 주 앞에 서 있어라, 크고 강한 바람이 주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깨서 계시지 않았다. 그 바람이 지나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서도 주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 엘이야는 그 소리를 듣고서 외투 자락으로 얼룩을 감싸고 나가서 동굴 어귀에 섰다.’ 광충과 노도와 같은 거친 자연 현상 속에 거한다고 여겼던 이교의 신들과 달리 야훼는 초연한 영역에 거하는 신이었다. 즉 야훼는 말로 표현되 ㄴ침묵이라는 역석처럼 거의 감지할 수 없는 미세한 바람 소리를 통해 경험되엇다.” “이것은 초월의 순간이다. 야훼는 자연 세계에 내재한 신성을 드러내는 대신 분리되어 다른 존재가 되었다.”

저자는 엘리야의 신은 당시 달라진 사회조건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새로운 번영이 구가되면서 상인계급이 출현했다. 왕과 사제, 신전과 왕궁으로부터 시장으로 권력이 이동했다. 새로 형성된 부는 지성적 문화적 융성으로 이어졌고 개인 양심의 발달로도 이어졌다. 도시에서 변화의 행보가 가속화됨에 따라 불평등과 착취가 더욱 두르러졌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던 흐름이 축의 시대를 형성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야훼 유일 운동은 그중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엘리야의 야훼는 “다른 신들이 사회적 정의라는 근본적 의무를 게을리 했다고 비난햇다. 엘리야도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자들에 대한 동정과 배려를 강조햇다.” 그러나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발전도 아니었으며 이스라엘과 유다에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약자 보호는 오래 전부터 고대 근동 전역의 공통된 정책이었다. 중동 전역에 걸쳐 정의는 종교의 핵심적인 기둥이었다.” 오히려 엘리야의 야훼는 그 초월성 때문에 구분된다. 이는 저자가 축의 시대의 ‘초월적 돌파’라 말하는 성격을 선취하는 것이다.

“오늘날 거룩이란 말을 도덕적으로 탁월한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한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카도쉬는 도덕성 그 자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타자성 곧 철저한 분리를 의미한다. 시나이산에 나타난 야훼의 현현은 인간과 신적 세계 사이에 갑작스럽게 벌어진 엄청난 간극을 강조했다. 이제 천사들은 ‘야훼는 다르시다! 다르시다! 다르시다!’라고 외쳤다. 이사야는 인간에게 주기적으로 강림하여 황홀과 두려움으로 인간을 압도하는 바로 그 초자연적 감정을 경험했다. 이러한 전율하는 경험은 ‘두렵고 황홀한 신비’이다. 두려운 것이란 그것이 일상적인 위안으로부터 우리를 갈라 놓는 심각한 충격으로서 찾아오기 때문이고 황홀한 것이란 그것이 역설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이 압도적인 경험은 음악이나 성적인 것에 비교되며 말이나 개념으로 표현될 수 없다. 실재에 관한 우리의 일상적인 도식에 기초하지 않는 ‘전적인 타자’에 대한 이런 감각은 어떻게 보면 있다고 표현될 수조차 없다. 축의 시대에 새롭게 정립된 야훼는 아직도 군대의 신이엇지만 더 이상 단순히 전쟁의 신은 아니었다. 또한 야훼는 이스라엘만을 열정적으로 편애하는 단순한 부족신도 아니었다. 이제 야훼의 영광은 더 이상 약속의 땅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에 가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초월해야 할 대상인 탐욕, 증오, 자기 중심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초월해서 나아가야 할 목표인 신을 규정하는 데 집중하면 공격성과 호전적인 배외주의를 드러낼 위험이 생긴다. 자유는 축의 시대의 핵심 가치였다. 따라서 훗날 축의 시대 현자들 가운데는 엘리야의 고압적 전술을 ‘해롭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도 않은 영성응ㄹ 강요하는 것은 역효과를 낳았다. 본진적으로 규정불가능한 초월을 두고 교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축의 시대)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인은 이러한 신을 받아들였고 그들은 신의 실재에 대한 “아주 독창적인 개념”을 발전시킨다. “그것은 이 신과의 경험이 곧 한 인격과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타자성에도 불구하고 야훼는 말을 건네고 이사야는 대답할 수있었다. ‘우파니샤드’의 현인들에게는 이런 일을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대화를 나눈다거나 만난다는 생각은 신을 지나치게 의인화하는 부적절한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에게 야훼와의 계약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으로 재정의된다. 그리고 “일신숭배는 예배협정이엇다. 야훼유일운동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훼에게만 희생을 드리고 다른 신들에 대한 신앙은 무시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신성한 자원이 축소되고 친숙하고 사랑하던 신성한 의무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제 중동의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합의와 단절하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여행을 떠나는 길에 나설 참이엇다.” (축의 시대)

그리고 그렇게 외로운 길로 그들을 이끈 야훼는 이전의 야훼가 아니었다. 헤브라이 예언자들은 “신을 파열, 뿌리 뽑기, 박살내는 타격으로 경험하고 한다. 아모스는 신을 자신에게 익숙한 모든 것을 낚아채 가는 파괴적인 힘으로 경험햇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느꼈다. ‘사자가 으르렁거리는데 겁내지 않을 자 있겠느냐? 주 야훼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 전하지 않을 자 있겠느냐? 헤브라이 예언자들은 신비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도의 현자들처럼) 스스로 시작한 규율잡힌 오랜 탐구 끝에 내부로부터 깨달음을 경험한 것이 아니었다.아모스의 경험은 인도나 중국의 축의 시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잇는 깨달음과는 매우 달랐다. 그는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힘에 사로잡힌 느낌을 받았다. 이힘은 그의 의식적인 삶의 정상적인 질서를 헝클어놓앗다. 이제 그는 자기 삶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엇다. 야훼가 목적을 가지고 통제하는 에고의 자리를 차지하여 아모스를 완전히 다른 세계에 던져버린 것이다.” (축의 시대)

그렇게 자신의 말이 아니라 야훼의 말을 해야 했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불의”에 분노했다. “이사야는 외면적으로 제의를 준수하는 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다. 이스라엘인은 그들 종교의 내면적 의미를 발견해야만 했다. 야훼는 희생보다도 공감(compassion)을 더 원한다. 선지자들은 스스로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하는 공감이라는 의무를 발견했다. 바로 이것이 축의 시대에 형성된 모든 주요 종교의 특징이 된다.

아모스는 사회정의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초의 선지자였다. 아모스의 계시를 통해 야훼는 억눌린 이들을 위해 대변하며 말 못하고 무기력하고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아모스 예언의 첫째 줄에서 야훼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도 모든 나라의 고통을 생각함녀서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성전에서 사자후를 발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만큼이나 사악했다. 그들은 잔혹함이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압제를 모른 척했으나 야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계약은 신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했음과 따라서 모두가 온당하게 취급되어야 함을 말하고 잇다. 신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정의를 위하여 역사에 개입하신 것이다.” 그래서 야훼는 이스라엘을 부수기로 결정한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둘 다 이스라엘 종교에 중요한 새로운 영역을 도입햇다. 그들은 올바른 윤리적 행동이 없으면 제의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더 이상 참지 않는 야훼의 분노와 함께 “기원전 6세기에 이스라엘은 본격적으로 축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번에도 변화의 촉매는 걷잡을 수 없는 충격적인 폭력의 경험이엇다. 새로운 축의 시대 전망을 창조한 사람들은 처음으로 바빌로니아에 끌려간 사람들이엇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공허를 들여다보앗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었기에 몇몇 사람은 슬픔, 상실 모욕의 경험에서 새로운 전망을 창조할 수 있었다.” (축의 시대)

이 시대의 예언자는 예레미야이다. “그는 선지자가 되는 것을 싫어했고 자신이 사랑하는 백성을 저주해야 하는 것에 심히 부담을 느꼈다. 예레미아는 아모스나 호세아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자신을 장악했다고 느꼈다. 관절을 마비시키고 심장을 쪼개고 마치 주정뱅이마냥 비틀거리게 만드는 고통으로서 신을 채험했다. 선지자가 느꼈던 두렵고 황홀한 신비라는 이중적 체험은 동시에 거친 폭력과 달콤한 유혹으로 경험된다. 선지자들의 신은 이스라엘인에게 중동의 신화적인 사고 방식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하고 당시 주류적 흐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갈 것을 종용했다. 예레미야의 고뇌를 통하여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충격과 혼란을 의미햇는지 볼 수 있다. 야훼의 종교는 아직 내재적인 신적 원리인 아트만과 비교할 만한 것이 나타나지 않앗다. 야훼는 외부의 초월적인 실재로 경험되었던 탓에 덜 이질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어떻게든 인간화될 필요가 있었다.”

“예레미야는 뒤에 남은 사람들이 아니라 기원전 597년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시련의 시기를 견디면 그들은 더 내적인 영성을 얻게 될 터였다. 야훼는 그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을 것이다. 이번에는 모세와 맺은 낡은 언약처럼 언약이 돌판에 새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내면으로 향했다. 각 개인은 자신을 책임져야 했다. 그들은 축의 시대의 더 내적이고 직접적인 앎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욥기가 이 당시에 쓰여졌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유없이 잔인해지는 신, 단지 재미삼아 내기 승부를 위해 인간을 갖고 노는 신, 그 신은 무엇인가? 바빌로니아에 끌려간 유대인 중 상당수가 믿음을 잃엇다. 그들에게 신은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에스겔의 환상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에게 건네진 두루마리에는 ‘신명기’ 저자들의 율법의 서와는 달리 분명한 지침이 없었다. 확실한 것은 전혀 없고 정리되지 않은 슬픔과 고통의 외침뿐이엇다.

성전 신앙에서 피는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제 에스켈은 피를 살인, 무법, 사회적 불의의 상징으로 바꾸엇다. 제의는 이제 축의 시대의 새로운 도덕적 의무에 따라 해석되었다. 이 사회적 범죄들은 우상숭배만큼이나 심각했으며 이스라엘은 임박한 재난을 두고 남을 탓할 수 없었다. 에스겔이 그리고 아마도 추방당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도 고통을 소화하고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심장이 부서지는 것을 감수했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제 성전은 사라졋지만 이스라엘은 세계 나머지 땅과 다른 삶을 살아 여전히 신성함에 참여할 수 있었다. 회복된 공동체를 보여주는 이환상은 미래를 위한 세밀한 청사진도 아니고 설계도도 아니었다. 인도 사람들이라면 만다라, 즉 명상응ㄹ 위한 이콘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서 신을 중심에 둔 제대로 질서 잡힌 생활의 이미지였다. 야훼는 자신의 백성이 추방당했을 대도 함께 있었다. 따라서 이 백성은 이교도와 구분되어 마치 여전히 성전 옆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이교도와 친하게 사귀거나 동화되지 말고 영적으로 야훼 주위에 모여야 한다. 성전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내적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추방당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이 다시 돌아와 머물 수 잇는 공동체를 창조할 수 있엇다. 그들 모두가 고대 제사장의 율럽을 따라 삶으로써 가능한 일이엇다. 이것은 놀라운 혁신이었다. 민족의 성전이 파괴된 이스라엘은 사제들의 나라다. 모든 사람이 성전에서 신성한 존재를 섬기듯 살아야 한다. 아느님이 여전히 그들 가운데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P 기자의 율법은 삶 전체를 제의화하는 것이엇지만 그는 이 고대의 성전 율법을 이용하여 추방의 경험에 기초한 새로운 윤리적 혁명을 개시했다.

삶의 모든 세세한 면에서 하느님의 다름을 모방하면 야훼가 신성한 만큼 신성해질 수있으며 하느님이 있는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신성한 삶을 살지 않았으며 그것이 그들이 지금 추방을 당한 이유다. 하지만 회개를 하면 야훼는 적의 땅에서도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이것은 공감에 기초한 율법이었다.” (축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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