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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릴 10년 | 경제경영 2011-11-15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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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부의 정석

최윤식,정우석 공저
지식노마드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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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재테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해리 덴트의 책은 한 권쯤 읽어봤을 것이다. 그의 책을 읽어보지는 않앗다 해도 많은 재테크책들이 그의 이론을 원용하기 때문에 왠만하면 그의 이론은 들어봤다고 생각하면 된다.

해리 덴트가 유명해진 것은 일본의 거품과 이번에 미국의 버블이 터지는 시점을 예측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런 예측에 사용한 논리는 간단했다. 경제는 인구라는 것이다.

해리 덴트의 이론은 물론 그보다는 복잡하다. 그러나 간단하게 그의 이론을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일본과 미국에서 거품이 터진 시점은 정확히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하기 시작한 때였다. 주택과 주식과 같은 자산의 최대 수요층이 퇴장하면서 거품이 터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이다.

이책은 마찬가지 논리가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입장이다. 한국에도 베이비붐 세대가 있고 그 세대의 은퇴는 이미 1,2년전부터 시작되었다. 당연히 자산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요즘 부동산시장이 붕괴한 것은 보통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악화된 금융사정의 직격탄으로 설명하지만 저자는 그런 논리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앞으로 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베이붐세대의 은퇴와 함께 붕괴만이 남았다고 저자는 본다. 지금 보고 있는 부동산 시장의 붕괴는 단지 시작에 불과하는 것이다.

문제는 부동산의 붕괴 다음이다. 앞으로 거품이 터지면 부동산의 가치는 2008년 정점에서 40~60% 하락할 것으로 저자는 본다. 알다시피 한국인의 자산구성은 부동산이 압도적이다. 그 자산이 반토막이 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경제의 붕괴가 시작된다.

“주택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하면 추가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주택담보 가치가 떨어지고 추가적인 소비여력이 상실되고 동시에 금융권의 자산상각이 발생하고 이는 다시 주택소유자들의 경제적 압박을 가중시켜 소비를 급격하게 위축시킨다. 그러면 내수경기가 침체하고 경기가 침체하면 기업이나 자영업자의 매출이 줄어 소득이 감소하게 되고 소득의 감소는 가계빚의 증가와 부실을 가속하하고 이는 다시 경제의 장기적 침체와 기업의 투자부진, 높은 실업률을 만들어낸다.”

거품이 터진다면 이런 연쇄반응이 보편적이다. 문제는 그것이 (일본과 같은 이유는 아니지만 ) 일본식으로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거품붕괴와 함께 한계상황에 있는 한국경제의 시스템이 붕괴하기 때문이라 저자는 본다.

일본도 한국도 고도성장이 가능했던 시기는 (노동)인구팽창의 시기였다. 한국과 일본에서 베이붐세대가 노동시장에 뛰어든 시기와 고도성장기는 일치했다. 경제성장은 자본량*노동량*생산성으로 계산된다. 세 변수 중 노동량이 증가했으니 그 증가분만큼 경제성장이 폭증한 것은 당연하다. 경제학에선 이를 인구배당효과라 한다. 문제는 이제 그 노동량이 줄어들면 어떻게 되는가이다. 세 변수 중 나머지가 동일하고 노동량만 변한다면 경제는 성장이 아니라 축소된다. 해리 덴트의 논리는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의 미래가 그렇다고 말한다. 거품 붕괴는 단지 경제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일뿐이며 그 근본 메커니즘은 경제의 붕괴라는 것이다.

그 붕괴를 막을 수는 없는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기를 놓쳤다고 저자는 말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세 변수의 나머지를 조정하면 된다. 이는 시스템의 문제이다. 나머지 두 변수가 노동의 감소를 완전히 상쇄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어느 정도 완화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와 같은 인구학적 변화는 쉽게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해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는 다른 말로 하면 저출산고령화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다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당장의 단기적 결과에만 시스템을 맞추느라 그런 문제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왜 저출산이 나타나는가? 애를 낳기 힘들고 키우기 힘들기 때문이다. 왜 힘든가? 부부가 아둥바둥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가계를 유지하기 힘든 소득분배 때문이다. 예전엔 한 사람만 벌어도 되던 구조에서 이젠 둘이 벌어야 겨우 적자를 면할까 말까 하는 소득분배에서 하나 낳는 것도 장하다. 더군다나 청년층의 실질 실업률이 20%이고 실업이 아니라도 상당수가 비정규직인 상황에서 가정을 꾸리는 것 자체가 힘들다.

소득분배의 왜곡은 저출산이란 문제만 낳은 것이 아니라 소비시장의 붕괴를 가져온다. 지금까지는 미국처럼 개인의 빚을 늘려주는 식으로 소득분배의 불균형을 가려왔다. “2008년 전까지 약 10년 동안은 부동산 버블 덕분에 소비를 늘린 40~50대, 적게 벌지만 소비중독에 걸린 20대, 빚을 내면서까지 막대한 사교육비 지출을 유지해왔던 30대로 인해 소비시장이 버텨왔다.” 그러나 거품붕괴와 함께 이번에 미국에서 일어난 것처럼 개인부채라는 폭탄이 터질 것이며 시장의 붕괴로, 경제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 저자는 본다.

“상황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나라를 2만달러까지 끌고 왔던 IT, 전기전자, 조선, 자동차, 석유화학, 건설 등 기존의 산업들이 1998년 외환위기 이후 빠른 속도로 글로벌시장에서 넛크래커 현상에 빠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부의 불균형분배가 가속화되면서 소비시장이 성장의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불어 주주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영시스템 때문에 그나마 벌어들인 순이익은 근로자의 임금을 올리거나 추가적인 일자리를 만들어내는데 활용하는 대신 고스란히 주주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가 버리게 된다. 결국 기업의 매출이 늘어다로 근로자들이나 일자리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 되는 셈이다.”

이런 문제는 경제의 불균형이 지나치기 때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한국은 “대기업이 전체 경제의 60~70%를 차지한다.” 이런 불균형이 지금의 문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대기업의 비중은 높은데 “고용비중은 전체 근로자의 18.%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머지 80%를 다른데서 메워줘야 한다. “대기업의 일자리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중소기업과 벤처기업들이 활발하게 만들어져 전체의 60~70% 정도 되는 일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산업구조가 지난 50녀녀간 대기업 위주로 흘러오면서 기업의 건전한 생태계가 망가져 버려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거품붕괴와 함께 일어날 시장붕괴는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이며 시스템의 문제이기 때문에 시장붕괴는 경제붕괴로 이어질 것이며 거품붕괴 이후 침체는 일본처럼 장기화될 것이라 저자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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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Jetlag | 수신/심리 2011-11-15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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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시간을 빼앗긴 사람들

틸 뢰네베르크 저/유영미 역
추수밭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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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성격은 입문서이다. 구체적으로는 시계생물학에 관한 입문서이다. 그러나 이 말만으로 이책이 무슨 내용을 다루는지 짐작할 사람은 많지 않다. 시계생물학이란 말 자체가 낯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계생물학이란 말 대신 바이오리듬이라 한다면 쉽게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이야 바이오리듬이라면 쉽게 누구나 아는 말이 되었지만 그 말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그 말을 다루는 분야인 시계생물학의 역사 자체가 짧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2차대전 직후가 이 분야의 탄생시점이었다. 그러다보니 서점을 뒤져보면 수면, 바이오리듬에 대한 책은 꽤 있지만 학문적인 기초개념으로서 바이오리듬이 무엇인지를 다루는 책은 드물다. 역사도 짧고 그 분야의 학자도 적은 마이너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책은 그 드문 책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지레 겁이 날지 모르겠다. 엄밀히 말하면 생물학, 과학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책은 과학책이다. 그러나 겁낼 필요는 없다. 학부생을 위한 교과서나 전문가 동료들을 위해 쓴 책이 아니라 교양서적이라 생각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책이 다루는 내용은 사실 우리가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점심 후 노곤할 때마다 누구나 경험하는 것들이다. 이책을 읽고 나면 왜 누구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데 누구는 반대인가, 왜 밤을 새면 피곤이 몇배가 되는가, 규칙적으로 자고 식사하는 것이 왜 건강에 (최소한 컨디션에) 좋은가 같은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다. 경험적으로 그렇더라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사람이 어떻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는 답을 할 수 있다.

이책의 구성 역시 교과서처럼 기본개념을 설명하고 학설을 소개하는 식으로 된 것이 아니라 그런 실생활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현상들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보자. 가장 일찍 일어나는 직업군을 들자면 학생과 교사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시간표가 바람직한가? 저자는 아니라 말한다. 왜냐하면 생물학적으로 인간에게 맞지 않는 시간표이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청소년기에는 올빼미형이 대다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밤 늦게까지 뭔가 하고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 그 나이 때이다. 학교의 시간표는 올빼미들에게 종달새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이란 말이다. 저자는 오전수업은 시간낭비라 말한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고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시간에 억지로 책상에 붙들어 놔봐야 졸기만 한다.

저자는 학교시간표처럼 생물학적 인간의 리듬과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강요된 리듬이 차이가 날 때 일어나는 문제를 사회적 시차증이라 말한다.

사회적 시차증의 다른 예는 섬머타임이다. 섬머타임은 강제로 생물학적 리듬을 교란하는 것으로 제트기를 타고 다른 시간대로 간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이책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감이 잡힐 것이다. 언제 자고 언제 먹을 것인가 언제 쉴 것인가 최상의 컨디션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실생활에서 누구나 결정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이책은 그런 결정을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기본원칙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드물면서 재미있고 유용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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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분함을 말한다 | 수신/심리 2011-11-07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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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권태

피터 투이 저/이은경 역
미다스북스(리틀미다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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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신세계의 낯선 환경을 견디는 것 못지 않게 “칼뱅주의 그 자체를 견뎌내기 위해서도 분투해야 했다. 자기혐오에 이를 정도의 자기반성과 끝없는 노력을 요구하는 칼뱅주의의 무게는 신도 개개인이 감당하기엔 벅찬 것이었다. 엄혹한 종교는 아이들을 겁에 질리게 했다. 17세기의 판사 새뮤얼 시월의 글에는 열일곱 살 난 딸 이야기가 나온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조금 뒤에 딸이 대성통곡을 했다. 아내가 이유를 물었지만 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딸이 입을 열고 한 말은 자기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에 갈까 봐 너무 무섭다는 것이었다.’ 그런 불안은 사람들을 병들게 했다. 칼뱅주의는 고통받는 영혼에게 오직 하나의 위안거리를 주었는데 그것은 물질적 세상 속에서” (바버라 에런라이크) 자신이 쓸모있는, 구원받을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힘들게 일하는 것이었다. 베버는 그런 위안을 자본주의 정신이란 말로 포장했지만 그런 위안을 찾아야 하는 사람에겐 결코 위안일 수 없다.

더군다나 그런 식으로조차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가정주부 같은 경우, “남은 것은 병적인 자기성찰이었다. 사람들은 소화불량, 불면증, 요통 등 신경쇠약 증세를 불러들이기에 딱 좋은 상태에 놓였다. 유행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몰라도 여성의 병약함은 강제된 나태함과 불필요한 존재라는 느낌에서 기인한 것이었고 실제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주었다. 수십 년 동안 병약함으로 고통을 겪었던 (핸리 제임스의 누이인) 앨리스 제임스는 유방암 판정을 받자 곧 죽을 수 잇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일상의 노동이 비정형적이며 많은 부분 여성의 노동과 겹치는 성직자들 또한 마찬가지엿다. 칼뱅주의를 믿는 영혼, 혹은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영혼은 진짜 일, 그러니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기혐오로 자신을 소진시킬 수 밖에 없었다.”

칼뱅주의의 음울함에 대한 반동으로 1860년대 신사상 운동이 막을 올린다. 신사상은 헨리제임스의 표현을 빌리면 “지옥불 신학과 관계된 병”에 대한 치료제였다. “신사상의 관점에서 보는 신은 냉담하고 무관심한 존재가 아니라 편재하는 전능한 정신 또는 영혼이다.” 신사상의 핵심은 “물질적 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있는 것은 오직 생각과 마음, 정신, 미덕, 사랑일 뿐이다. 따라서 질병이나 가난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이 세상의 실체는 해체되어 정신, 에너지, 진동으로 변하며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의식적 통제에 잠재적으로 복종한다. 이것이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과학’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 일체유심조니 고통은 마음에 달렸다는 말이다.

신사상운동은 ‘시크릿’으로 대표되는 미국식 성공학으로 변질된다: 세상은 마음 먹기에 달렸으니 돈도 성공도 멋진 애인도 내 마음에 달렸다는. 나중에 어떻게 변질되었든 신사상운동은 칼뱅주의가 정신에 가하는 고문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칼뱅주의는 그들의 머리를 ‘정신적 공허함, 고립감, 냉담함이라는 강렬한 감정’으로 채웠다.

그들이 겪은,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압박감을 사르트르는 ‘우연(Contingency)’이란 말로 요약한다. 나와 세상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필연적 관계가 없으니 세상은 나에게 선의를 갖지 않으며 나에게 무관심하다.

사르트르의 ‘우연’이란 개념은 하이데거의 실존적 권태란 개념에서 빌린 것이다. “하이데거는 권태를 단순한 권태와 실존적 권태로 나눈다. 그는 개인이 어떤 환경에 의해 완전한 무관심의 상태로 빠졌을 때 실존적 권태를 겪는다고 말한다. 이런 개인은 공허함을 느끼고 주변 세상으로부터 어떤 의미 있는 것도 기대하지 못하고 또 받지 못한다.”

그러나 저자는 청교도들이 겪었던 만성적 권태를 실존적 권태라 할 수 있는가 의문이다. 청교도들이 겪은 고통은 분명 자신과 세계의 관계가 부서지는 경험이었고 그 경험은 사르트르가 말한 ‘우연’이란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 “실존적 권태의 희생자들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청교도들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자살은 현실적인 대안일 수 있다. 나와 세계의 관계가 깨진 마당에 자살이 대수인가? 그러나 헨리 제임스의 누이는 죽을 수 있다고 기뻐했지 자살을 하진 않았다. “권태와 자살의 상관관계는 실생활보다 문학적인 텍스트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듯하다.” 저자는 실존적 권태란 개념은 그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한다. “한 예로 영국의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은 젊어서 룰렛 게임을 자주 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무사히 오래 살다 세상을 떠났다. 자살은 창조적인 사람들에게서 더 흔히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실존적 권태 때문이 아니라 병에 걸리거나 노쇠해졌기 때문에 죽는다. 그렇다면 엠마 보바리는 어떨까?”

보바리 부인의 탈선은 권태 때문이다. ‘보바리 부인’은 “19세기 프랑스 북부 지방의 순응적이고 관습에 얽매인 부르주아 계층의 만성적 권태에 대한 반발 속에서 주인공 엠마를 그려낸다. 이 소설에서는 관습 타파를 향한 개인적인 열망을 엿볼 수 있다. 관습 깨기의 목적은 평탄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에 다시금 기복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녀는 할 일이 별로 없었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된 딸마저 유모에게 맡겼기 때문에 엄마로서도 역할이 없었다”. 엠마에게 관습 타파의 목적은 그런 무위도식으로부터의 도피였고 그녀가 깬 관습은 성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따분한 삶 때문에 불륜관계를 시작했을지는 모르나 그녀가 자살한 이유는 치욕 때문이다. 실존적 권태의 희생자들은 자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살과 관계된 어떤 행위를 한다 하더라도 그건 대부분 글을 통해서다. 삶의 무의미함을 지적으로 깨닫는데는 죽음을 양산하는 고통이 따르지 않는다. 그런 깨달음이 고통스러운 우울증의 결과가 아닌 한, 그렇다.”

저자는 엠마가 겪었고 청교도들이 겪었던 고통을 만성적 권태라 말한다. 그 권태는 논리로 짜여진 실존적 권태가 아닌 생리현상이 원인이라 저자는 본다.

“동물을 키워봤다면 따분해하는 광경을 자주 목격했을 것이다. 동물들은 따분함을 느끼면 더 많이 잔다. 또 깨고 나면 놀이를 하거나 산책을 하자고 주인을 조르고 괴롭힌다. 만약 주인이 놀아주거나 산택을 시켜주지 않으면 풀 죽은 채로 집안이나 정원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하낟. 그 모습은 시무룩하니 축 늘어져 맥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동물이 느끼는 권태는 당연히 실존적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성격의 불안감이다.” 할 일이 없는 애완동물은 감금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감금 상태에서 그들이 느끼는 1차적 감정은 지금 상태에 대한 혐오이며 지금처럼은 좋지 않다는 불안감이다.

“감금 상태가 지속되면 동물은 우선 권태를 실질적으로 인식한다. 이는 관찰이 가능하다. 이후 좌절, 동요, 화 폭력 그리고 끝내는 우울증이 찾아온다. 감금된 동물은 권태에서 광적 반응 (동요하고 화를 냄)으로 그리고 우울 반응으로 옮겨간다.” 이 과정은 인간의 경우와 일치한다.

“권태는 분노에 찬 행동이나 광적인 행동은 물론 우울증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보다 권태는 감금, 고독감, 감각 상실이 지속되면서 시작되는 일련의 정서적 과정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라 할 수있다. 권태는 다른 여러 정서들과 함께 찾아온다. 권태는 이들 정서를 일으키는 원인이 아니다. 권태는 분노와 우울함이 차례로 나타느는 과정에서 첫번째로 나타나는 정서라 할 수 있다. 권태는 앞으로 나타날 보다 해로운 상태를 조기에 알리는 경고 신호이다. 권태는 태풍 전의 고요함 같은 건지도 모른다.”

권태와 우울함의 차이는 권태는 밖을 향하지만 우울은 안으로 자기 자신을 향한다는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상황을 바꿔야 한다는 신호가 권태이고 그럴 수 없어 포기했을 때 우울로 넘어간다는 말이다.

청교도들이 겪었던 고통은 권태가 만성화되고 그것이 우울로 진행된 것이다. 사르트르가 우연이라 불렀고 하이데거가 실존적 권태라 불렀던 것은 정확히는 우울이 맞다고 저자는 본다.

“신의 계획은 무엇일까? 신의 뜻에 어떻게 순응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신은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실존적 권태를 겪는 사람들과 같은 소극적이고 절망적이며 비관적인 태도로 이 착잡한 질문들에 반응한다. 루터교인인 한 동료는 그 느낌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루터교인들은 신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지. 그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하는 성직자들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하지만 그건 동시에 우리가 신을 대신해서 선을 행해야 한다는 말도 되지. 선을 행하는 건 그리 단순하지가 않아. 가끔은 막연히 선이 무엇인지 모를 때도 있어. 그럴 때면 무척 걱정괴도 불안해지지. 그럼에도 우리는 선을 행해야 할 책임이 있어. 아주 간단해. 그러나 쉽지는 않지.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천성적으로 어쩔 수 없이 무척 불안해하고 우울해 하는 거야.’”

이런 불안감은 ‘실존적 권태’란 말로 잘 요약된다. 그러나 저자는 실존적 권태는 “좌절, 식상함, 우울, 혐오, 무관심, 무감각, 갇혀 있다는 느낌 들의 서로 연관된 장애들을 두루 포함한 말’이라 본다. 다시 말해 만성적 권태로 시작되는 일련의 감정 메커니즘의 총합이라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저자는 본다. 그 시작은 단순한 권태다.

권태는 단순한 생리적 반응이며 오래가지 않는 기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만성적으로 권태를 자주 느끼는 사람은 근심과 우울증 내지는 약물, 알코올 중독에 빠지거나 분노와 공격적인 행동을 보일 위험이 크다.” 우리에 갇힌 동물과 그리 다르지 않은 메커니즘이다.

그러면 “권태가 18세기 계몽시대에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왜 나오는 것일까? 그런 주장은 “권태가 소외감이나 사회적 무질서라는 개념과 직관적으로 연되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따라서 권태, 소외감, 사회적 무질서는 모두 근대의 독특한 현상이다.” 물론 그런 주장이 권태가 언제 어디서나 있었다는 것을, 권태가 생리적인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18세기 이전까지 권태는 기껏해야 주변적인 경험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이성의 시대에 들어서야 개인의 지위가 중요해졌다. 이 시기에는 신탁 정치, 독재젗치, 전통적인 특권, 그리고 집산주의 전통의 맹목적인 고수에 도전이 가해졋다. 그러다보니 이 소용돌이치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개인과 개인의 감정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어 권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졋다.” 그리고 “후기 근대사회에 접어들어 여가 생활이 늘어나고 인간의 행복할 권리가 부각되었으며 기독교가 쇠퇴하는 대신 세속화가 뚜렷해졌다. (이를 ‘서양 문명 한가운데서 커져가는 형이상학적 허공’이라 칭하기도 한다) 또 개인의 권리와 더불어 내적 경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권태의 풍부한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여가는 늘었지만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개인의 소외감이 커졌고 그 시간을 제대로 보낼 책임은 개인이 모두 져야 했다. 그리고 증상에 대한 진단이 권태라 설명되고 나면 권태는 “’무의미함의 흔적’이 된다. 그 안에서 문제의 본질이 흐려진다. 분노에 이어 떠올라 근심으로 치닫는 권태 안에서 인간은 당연히도 모든 삶이 공허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실존적 권태는 허깨비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까? 실존적 권태라는 것이 있다면 정말로 잇는 것이다. 물론 나 같은 회의론자들은 실존적 권태를 각종 장애를 두루 나타내는 하나의 용어 내지는 그저 상대적으로 사소한 현상으로 여기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권태는 보편적인 경험이다. 대부분의 시대에서 사람들이 권태를 느껴왔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권태는 대개 이로운 정서다. 하지만 만성적인 단계로 넘어가면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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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의 철학 | 인문/사회/역사 2011-11-07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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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나는 장자다

왕멍 저/허유영 역
들녘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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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장자 내편에 대한 주석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주석서와는 다른 구성을 보인다. 이 책의 구성은 장자 본문을 따라가면서 본문에 대한 코멘트를 더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그 코멘트는 김용옥을 떠올릴 정도로 상당히 장황하다. 김용옥을 닮은 것은 양만이 아니다. 내용도 그렇다. 표지를 보면 ‘왕멍, 장자와 즐기다’란 말이 있는데 광고문구로 적당히 붙인 말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 저자는 장자라는 책을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장자라는 저자를 읽어내려 한다.

근대 이전에 성립된 주석서들은 자신의 의견을 자제하고 문구 자체의 의미를 밝히는 형식을 취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석은 자구 대 자구로 본문이 한줄이면 그 아래 두줄로 축자적으로 붙이는 형식이다.

그러나 저자는 책 자체의 글자 하나 하나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자신이 장자라는 책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 대만이나 본토에서 나온 책들을 보면 본문이 있고 그 다음에 백화 번역이 달린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냥 본문을 달아놓고 번역을 하는 대신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엄청난 의역을 한다. 그리고 나서 엄청난 길이로 ‘설’을 늘어놓는다. 게다가 본문을 전부 싣지도 않고 자신의 ‘설’로 연결이 되면 본문을 생략하기 까지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장자라는 책 자체보다는 왜 장자가 이런 말을 했는가를 묻는다.

새로운 형식이다. 분명 이책의 체제는 내편 6편의 주석 형식이다. 그러나 그 형식과는 달리 이 책의 내용은 장자라는 책에 대한 전반적인 입문서에 가깝다.

그러면 저자가 읽어낸 장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저자가 읽어낸 장자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이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것은 루루티아(ルルティア)의 음악이다.

20세기 음악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면 아마도 일렉트로니카의 등장이 아닐까 싶다. 일렉트로니카는 신디사이저가 보급된 1970년대에 성립했다. 지금은 공기같은 존재가 되어버렸기에 간단하게 키보드라 불리는 신디사이저는 음악에 혁명을 일으킨다. 구체적으로는 바로크 음악의 부활이었다.

클래식이라 하면 구체적으로 하이든 이후의 고전파를 말한다. 고전파 이후의 음악은 고전파에 의해 정립된 작곡논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고전파 이전의 바로크 음악과 고전파 음악은 사운드 레이어의 구성법이 달랐다.

서양음악의 사운드 레이어는 4개로 이루어진다: 리드, 백그라운드, 레퍼런스, 패턴. 밴드 구성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리드는 멜로디 레이어로 보컬이나 기타 등의 멜로디 악기를 말한다. 백그라운드는 리드 레이어의 화음을 연주하는 레이어로 역시 기타나 피아노 등의 화음악기와 백코러스를 말한다. 레퍼런스는 토닉과 기준이 되는 레퍼런스 화음의 레이어로 베이스 기타를 말한다. 패턴은 드럼이나 신디사이저로 어택감이나 공간묘사를 담당한다.

고전파 음악에선 리드 레이어를 중심으로 일치된 진행을 만든다. 그러나 바로크 음악에선 4개의 레이어가 서로 독립된 진행라인을 갖는다. 그런 진행을 대위법이라 한다. 댄스뮤직으로 출발한 일렉트로니카는 바로크적 진행을 부활시킨다.

댄스홀에선 화음진행이 아니라 리듬이 중요하며 대위법적 진행이 더 어울린다. 결국 일렉트로니카에선 레퍼런스와 패턴 레이어의 진행을 음악의 중심으로 삼아 분위기와 리듬감을 강조하게 된다. 4개의 레이어가 일치된 협화음적 진행이 아닌 대위법적 진행을 갖는 바로크적 논리는 80년대 드림 팝, 노이즈 팝 90년대 트립합, 고딕 메탈의 혁신을 일으켰다.

멜로디 진행과 독립된 대위법적 진행으로 모호해진 공간과 사운드 윤곽은 불안정한 느낌을 만들어 앰비언트와 같이 꿈꾸는 듯한 느낌을 연출하거나 스칸디나비아 메탈처럼 슬픔, 분노 등 부정적 정서의 배경을 만드는데 적합하다.

보통 루루티아의 음악를 '환상적이다' '신비감과 광기가 느껴진다'고 한다. 이런 인상은 바로크적 논리의 연출효과이다. 루루티아 음악의 의미는 곡의 분위기가 만드는 이미지이다. 루루티아의 음악에서 우선되는 것은 사운드가 만드는 '분위기'이며 분위기는 레이어의 대위법적 관계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바로크적 논리의 문제는 멜로디 라인이 거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댄스뮤직이면 모를까 아시아에선, 거의 멜로디만 듣는 아시아인들에겐 그런 음악은 호소력이 없다.

루루티아 음악의 특징은 바로 바로크와 고전파의 절충이다. 보컬이 아예 없거나 존재감이 약한 앰비언트나 스칸디나비아 메탈과 달리 보컬의 존재감이 강하고 멜로디가 아름다운 루루티아 음악의 정서는 보컬과 하위 레이어의 긴장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루루티아 음악의 매력 역시 그 긴장관계에서 나온다.

작곡가가 아닌 보컬로서의 루루티아는 특이하다. 그녀는 숨을 내쉬고 바로 삼키듯, 맑고 가는 달콤한 음색으로 언제나 소곤거린다. 웅얼거리듯 소곤거리는 것은 지금, 여기의 사건보다는 여기가 아닌 과거에 일어난 일을 회상하는데 적합하며 자기주장이 약하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사라져간 것에 대한 아픔과 슬픔이며 깨질 것 같은 덧없는 아름다움이다. 그녀 음악의 신비감은 이러한 보컬의 정서에 하위 레이어의 윤곽이 불분명한 텍스쳐가 대비되어 만들어진 효과이다. 그러나 바로크적 텍스쳐가 만드는 분위기에 멜로디 라인의 통일성이 더해져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은 그녀가 원용한 앰비언트나 스칸디나비아 메탈에선 보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그 통일감은 환상이다.

루루티아 음악의 정서와 사운드는 스칸디나비아 메탈에 가깝다. 시끄럽다는 말이다. 메탈의 정서가 그렇듯 루루티아 음악의 배경은 탐욕과 위선, 광기, 잔인한 폭력의 세계이며 그런 세계에 대한 분노, 슬픔, 절망, 좌절을 표현한다.

보컬과 백그라운드 레이어는 세계에 대한 정서를 멜로디로 표현하고 부정적 세계는 레퍼런스와 패턴 레이어의 어두운 노이즈로 표현한다. 루루티아 음악의 의미는 레이어의 긴장관계에서 만들어진다. 문제는 세계에 대한 정서를 표현하는 멜로디 레이어, 즉 보컬이다.

루루티아는 속삭인다. 보통 팝에서 whisper라 말하는 것으로 보사 노바에 잘 어울리지만 하위 레이어가 두껍고 시끄러운 메탈에선 묻혀버리는 목소리이다.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해법은 프로듀싱이다. 바로크적 텍스쳐에 묻히지 않게 편집한다는 말이다. 라이브로 들을 수는 없는 음악, 그것이 루루티아의 음악이며 루루티아의 음악이 환상인 이유이다.

저자는 장자의 세계가 그와 같은 환상이라 본다.

장자의 첫편은 소요유이다. 논어의 학이편 1장이 그렇듯 중국 고전에서 처음에 오는 장은 그 책 전체를 규정한다. “장자가 주는 첫인상은 ‘소요’라는 두 글자로 함축할 수 있다. 장자는 일생동안 줄곧 소요에 이르는 길, 즉 인간 내면의 초탈과 해방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소요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정신 상태이자 개인이 사회와 집단의 관념적 구속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내면 정신세계의 자유와 독립을 의미한다. 이것은 근현대에 서양에서 들어온 개인주의 관념과는 차이가 있다. 후자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중국의 소요는 사회와 집단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가치판단에 대한 주관적인 해방 또는 일시적인 망각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주관적인’ 해방과 ‘일시적인’ 망각이 장자가 지금까지 읽혀온 이유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 해방과 망각은 아Q정신과 닮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살다보면 실패할 때도 있고, 패배할 때도 있기 마련이다. 이유 없이 구박을 당하고 모욕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중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루쉰(魯迅)의 소설 『아Q정전』에 나오는 주인공 아Q는 그런 상황에서 매우 독특하게 대처한다. 시골에서 날품을 파는 아Q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주 멸시당하고 이유 없이 맞기도 한다. 현실에서 그는 늘 패배자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당한 멸시와 패배를 아주 간단한 방법을 통해 승리로 바꾸어 버리고, 마음의 평정을 회복한다. 아Q가 애용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하나는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이유 없이 자신을 때린 사람보다 자기가 훨씬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자신처럼 지체 놓은 사람이 하찮은 인간들을 상대해 무엇 하겠느냐고 생각한다. 무서워서 상대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고 생각하고는 자신의 패배와 굴욕을 잊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앞의 방법과 반대로 자신을 완전히 낮추는 방법이다. 자신은 형편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모욕을 당하거나 그런 패배를 당할 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Q가 애용하는 세 번째 방법은 자신이 당한 패배와 모욕을 자기보다 약하고 못한 존재에게 전가시키는 방법이다. 강자에게 뺨 맞고 약자에게 분풀이 하는 것이다.
소설에서 아Q가 늘 얻어맞고 모욕을 당하면서도 늘 즐겁고 낙천적인 것은 이처럼 현실의 패배와 굴욕을 그 나름의 조작법을 통해 정신적인 승리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Q는 늘 패배하지만 늘 승리자이다.” (이욱연)

장자는 어렵다. 그 어려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배운 사람 그것도 엄청나게 배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2천년이 넘도록 읽혀온 이유는 장자가 정신승리법을 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실에서 패배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선 한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는 “가련한 사람들, 특히 글 읽는 지식인들은 장자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거대함과 웅대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신승리법의 최고봉이 아닌가. 정신적인 승리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이렇게 확실하고 영원한 승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춘추전국시대부터 그들은 세상에 나아가 쓰이지 못하면 한평생 허송세월하고 어저다 운이 좋아 높은 벼슬에 앉는다 해도 느닷없이 재앙이 닥쳐 하루아핌에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곤 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여러 차례 남에게 모함을 당하기도 하고 큰 뜻은 품었으나 재주가 변변찮고 운이 없는 탓에 가난과 실의에 빠져 시름겨운 한세상을 살다 가기도 했다. 현실이 이러할진대 온전히 정신적이고 완벽하게 무조건적인 승리조차 얻을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장자가 기재이고 독특한 논리로 훌륭한 글을 썼다 해도 그의 글을 읽다보면 ‘아Q 정신’이 응집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울 것은 없는 말이다. 중국혁명 직후 장자는 철저하게 부정당했다. 중체서용이니 떠들며 너희가 힘은 셀지 몰라도 우리는 정신적으로 더 고귀하는 식으로 현실의 패배, 정신의 승리를 말하며 중국을 말아먹은 아큐정신의 궁극이라는 논리였다.

물론 지금까지 그런 논리가 살아남지는 않았다. 눈 감고 아옹하는 아Q가 되기에 장자는 지나치게 똑똑한 사람이었고 현실을 비참할 정도로 철저하게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면 장자가 보았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는가?

“노담의 제자 백구가 제나라에 도착하자 형벌을 받아 기시된 시체를 보았다. 시체를 밀어 바로 누이고 조복을 벗어 덮어주엇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곡하며 말했다.

오 그대여! 천하에는 피살자가 많은데 그대가 먼저 당했구려! 말끝마다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하지만 영욕으로 핍박하니 이런 병통이 나타났고 재화가 한곳으로 모이니 이런 쟁투가 나타났다. 지금은 사람을 몰아 세워 병들게 하고 사람을 모아 싸우게 하고 사람의 몸을 곤궁하게 하여 한시도 쉬지 못하게 하니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재물을 위해 간계를 부리고 지혜롭지 못하면 어리석다 하고 어려운 일을 시키고 감내하지 못하면 죄를 주고 무거운 임무를 맡기고 다하지 못하면 벌을 주고 먼 길을 가게 하고 이르지 못하면 죽인다. 그러므로 부득이 민(民)은 지혜와 힘을 다해 꾀로 죄를 모면하려 한다. 무릇 힘이 부치면 꾀를 쓰고 지혜가 부족하면 도둑질을 하는 것이다. 도둑이 횡행하는 것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옳은가?” (장자 잡편 칙양)

이런 세상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제자백가 모두가 물었던 질문이다. 제자백가의 아버지라 해야 할 공자는 성인의 질서로 돌아가자(복례 復禮)를 말하면 지배층의 질서를 바로잡아 천하를 바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논어 미자편의 5장에서 7장까지 나오는 은자들은 공자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탁한 물이 도처에 도도하게 범람하는데 누가 바꿀 수 있겠는가? 그대는 나쁜 사람을 피하는 사람을 따르는 것보다 세상을 피하는 사람을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하려고 하는’ 사람이란 은자들의 조롱에 대해 공자는 이렇게 자신을 변호햇다. “벼슬하지 않는 것은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어른과 어린이의 질서를 폐기할 수 없는데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어떻게 폐기할 수 있겠는가? 자기 한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중요한 사회관계를 파괴한 것이다. 군자가 벼슬하는 것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것이다. 도의가 행해질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다.” (리쩌허우의 해석)

공자와 은자들의 차이는 세상이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엿다. “새나 짐승과 함께 살 수 없지 않느냐? 사람의 무리가 아니면 누구와 함께 하겠느냐? 천하가 태평하다면 내가 바꾸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 신념을 지키기 위해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의지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에서 공자 자신이 항상 말한 사람에 대한 사랑 또는 사람다움이란 뜻인 인(仁)의 의미가 드러난다. 그러나 은자들은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자는 사회의 근간인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주와 신하는 오늘날 상급자와 하급자라는 직무상의 관계이고 그 원칙은 의(義), 즉 공평하고 정직하며 공적인 일을 받들고 법을 지키며 편을 들어 사사로움을 도모하지 않으며 윗사람을 속이거나 아랫사람을 억누르지 안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구별이 있다는 것은 가정 중심의 가치관이다. 사랑에 그치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서 피차에 언제나 돕고 이끌어주며 관용하고 양해하며 어른을 높이고 어린이를 어루만져주는 것” (리쩌허우) 공자가 하려한 것은 그런 당연한 도리가 천하에 행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자와 그를 조롱한 은자들이 살던 시대는 그것이 당연할 수 없는 시대엿고 시대가 그렇다는데 공자와 은자들은 이견이 없었다.

논어에서 공자는 자신을 조롱하는 은자들을 존경했다. 그러나 은자들은 그런 공자를 조롱하며 공자가 되돌아가자는 성인의 질서(예)를 조롱했다. 그 은자들은 도가 계열의 선구였을 것이다.

그 은자들의 맥을 잇는 노자는 전쟁과 살육, 착취와 억압은 권력의 본성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권력이란 것 자체가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러나 “노자는 사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부정하지 않았다. 입신출세를 철저하게 부정한 것은 장자가 처음일 것이다.” 치국의 도를 말하던 제자백가와 달리 장자는 “완전히 상반된 길의 극단에 있었다. 그는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노력을 모조리 부정했다. 왕후와 귀족을 부정하고 학문을 추구하고 논쟁하는 것 자체도 부정했다. 그가 자기 자신과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모델로 삼은 것은 왕후도 제자백가도 아니요 곤이나 붕새, 이백이나 베토벤 같은 천재도 아니었다. 바로 작디작은 뱁새와 두더지였다. 천재형 지식인들이 정신적 우월감을 느끼며 세상을 업신여기고 잘난 척했다면 장자는 자신에 대한 기준을 보이지도 않을만큼 낮춰서 뱁새와 두더지 같은 마음으로 세속의 명리와 권력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소요와 자유를 추구했다. 그는 밖에서부터 먼저 출발하지 않고 내부에서 먼저 모든 명리를 부정하고 세속에서 멀리 떨어져 화를 피하고 근심을 멀리했다. 세속에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얻기 위해 추구하는 모든 수단을 멀리했다. ‘자기 자신’의 편안함과 자유로움, 만족감, 다른 사물과 환경에 대한 무관심 외에는 그 어떤 감정도 인정하지 않았다. 장자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행동한 것은 자기 앞에 놓인 현실에 대한 무력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자의 소요는 절망이다.

공자가 천하를 유세한 것은, 도를 다시 세우려 한 것은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장자를 읽어보면 장자는 유가계열에서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공문에서 장자는 출중한 학생이었을 것이다. 그의 글에 엿보이는 “강한 자신감, 강한 자부심, 강한 사명감”은 천하를 논하는 유가 선비의 태도이다. 주자를 비롯한 송유들은 노자는 싫어해도 장자는 좋아했다. 자신들과 뿌리가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나왔을 때 천하는 무도(無道)했고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알아주는 이가 없어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엔 자살과 모험, 정신적 해탈의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막다른 길에 몰리면 사람은 위험한 모험을 하든가 자신의 지혜를 숨기고 어수룩한 것처럼 핻동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내편 전체를 통해 장자가 바라보는 공자에 대한 시선은 따뜻하다. 그러나 공자의 주장에 대해선 냉정하다. 공자의 논리에 대한 장자의 비판은 “결코 추상적인 부정이 아니라 그것이 당시의 시대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해서 나온 것이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비극적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결과를 분명히 알 수 있는 형국에서 한발 물러설 줄 모르니” (왕보) 지혜라 할 수 없다.

흔히 불난 집의 비유를 들어 공자와 장자의 차이를 설명한다. 이웃에 불이 났으면 물 한 통 가져다 뿌린다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공자는 마땅히 뿌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도리니까. 그러나 장자는 그것은 의(義)도 인(仁)도 아니라 말한다. 그것은 동정일 뿐이며 자기만족일 뿐이라는 것이다. 장자라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니 그냥 앉아 있겠다고 말한다. 장자는 냉정하다. 이 차가움을 장자는 ‘무정(無情)’이라 말한다. 대붕이 되어 소요하는 것은 무정해야만 할 수 있다.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인간세의 자잘함은 보이지 않을 때 소요는 가능하다.

무정을 말할 때 친구 혜시는 정(고대 중국에서 정은 감정을 말한다)이 없는 인간을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논박한다. 혜시가 옳다.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 물 한 통 뿌리는 수고도 하지 않는 사람은 인(仁)하지 않다. 인(仁)은 손익계산이 아니라 사람이면 마땅히 느끼는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공자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인(仁)할 수 있고 한 것은 그것을 말한다. 장자는 공자의 말을 잘 알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仁)해서는 천하의 불을 끌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불을 끄려는 마음 자체를 없애야 한다. 사람이 아닌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정이란 말은 소요란 말은 철저한 절망의 표현이다.

언뜻 장자의 소요, 좌망, 무정 등은 불교의 해탈, 무욕, 무아 등과 닮았다. 실제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 중국인들은 장자의 개념을 빌려 불교를 이해하고 불경을 번역했다. 그리고 선불교는 도가식으로 불교를 이해한 결과였다.

그러나 장자의 소요를 불교의 열반이라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의문이다. 그렇게 이해하기에는 장자의 논리에 자기모순이 많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다투지 않고 논쟁하지 않을 것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논쟁하고 다투었고 한편으로는 마른 고목 같은 몸과 식은 재 같은 마음으로 홀로 앉아 세상의 모든 외물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완전히 잊어버리는 ‘좌망(坐忘)’을 주장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모든 걸 꿰뚫을 듯 날카로운 기세와 현란한 언변, 웅대한 기백을 과시하며 자신을 드러내 자랑했다. 이런 글이 마른 고목 같은 몸과 식은 재 같은 마음에서 나왔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자기과시욕과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고 열정으로 잔뜩 격앙된 상태라야만 이런 글을 쓸 수 있다. 장자는 세속을 거부하고 거듭 반복해서 초월하고 또 초월하는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들에0서 수신제가평천하라는 이상을 하찮은 것으로 조롱하고 비웃었고 입신출세하려는 이상을 부정했다. 그랬던 장자가 왜 뒤에서는 ‘응제왕’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제왕과 유토피아에 대해 논했단 말인가? 그의 논리대로라면 비(非) 제왕과 무(無) 제왕을 쓰든가 최소한 망(忘)제왕을 썼어야 하는 게 아닌가?”

결국 장자의 소요란 자발적인 은퇴가 아닌 강제된 유배였다. 유배된 장자가 쓴 글을 저자는 ‘처연한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천하 속에서 천하를 떠나는 장자의 글은 ‘사변적 기능보다 심미적 기능이 훨씬 강하다. 이것은 철학이 괴로운 처지에 빠진 인간을 위해 찾아낸 아름잡지만 힘없고 속이 텅 비어 있는 열매와도 같다.” 장자의 글은 “훌륭하지만 읽는 이를 탄식하게 하고 감탄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씁슬한 건 어쩔 수가 없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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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케이스 북 | 경제경영 2011-11-0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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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킬링 자이언트

스티븐 데니 저/구계원 역
북하우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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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약자가 강자를 어떻게 꺾을 수 있는가를 말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사실 새로울 것은 없다. 중소기업의 전략에 관한 책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히든 챔피언이나 브레이크스루 컴퍼니 같이 양질의 책도 없는 편은 아니다. 물론 그런 책들은 말하자면 전략에 관한 것이고 이책은 전략 전술에 가까운 내용을 말하기 때문에 내용이 다르다. 그리고 이책은 꼭 중소기업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1등이 아닌 누구나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중소기업에 관한 책들과는 다르다 하겠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두책을 보았다면 이책의 내용이 낯설지는 않다. 예를 들어보자.

 

소규모 기업들은 고객 수가 많지 않다. 소수의 고객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더 이상의 비즈니스는 없을 것이고 회사가 망할 수 있다는 것을 직원들이 누구보다 더 잘 안다. 그렇기에 고객이 원하는 시기에 납품하고 불량품을 개선하고 설치문제를 해결해주는 등 직원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소규모 기업은 이렇게 고객만족을 위한 사후활동에 신경슬 여지가 많다.

 

소규모 기업은 제품의 조유도 많지 않다. 고객이 사지 않을 제품에 투자할 여력이 없다. 수요가 없다면 치명적이다. 그러나 점점 고객이 많아지면 기존의 제품 외에 새로운 제품으로 서비스 영역을 확장한다.” (키스 맥팔랜드, ‘브레이크스루 컴퍼니’)

 

간단한 예이다. 규모가 작다고 반드시 약하라는 법은 없다. 규모가 작기 때문에 고성과, 저비용구조 가능할 수 있으며 직원들의 소속감과 책임감이 높을 수 있다. 약점이 강점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책에서 말하는 10가지 전략 중 앞의 5가지는 위에서 인용한 예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책의 장점은 무엇인가? 스토리텔링이다. 물론 이책에서 말하는 전략(이라기보다는 전술0은 새롭지는 않더라도 기억하기 쉽고 다른 책에서 보는 것보다 더 구체적이다. 그러나 이책의 구조는 그런 전술 자체를 알려주는 것보다는 그 전술의 구체적인 예에 있다.

 

이책은 전략 하나 당 구체적인 케이스 3개씩을 할당한다. 흔히 경영서적에서 보는 케이스와 달리 이책을 읽어보면 잡지나 다른 책을 뒤지는 대신 저자가 발로 뛰면서 사례의 당사자를 찾아가 인터뷰하는 수고를 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당사자의 인터뷰가 상당량이 인용되기 때문에 생생하고 저자가 발로 뛴 결과이기에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저자의 스토리텔링 솜씨가 좋기도 하다. 재미있게 읽힌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책의 스토리텔링은 재미 이상이다.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은 등장인물이 특정한 행동을 취했을 때 일어나리라 기대하는 일과 그 행동을 취했을 때 실제로 일어나는 일 사이의 현실적인 간극을 열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놀라움의 순간에 등장인물과 그들의 역사, 사회를 꿰뚫어볼 수 있는데 이는 작가가 미리부터 준비해서 심어놓은 장치이죠. 이야기는 일차적인 의미대로 흘러가는데 그것도 충분히 이치에 맞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전환점에서 관객은 근간에 숨어 있는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차적 의미는 일차적 의미보다 더욱 심오하고 중요하지요. 일차적 의미는 다소 사소하게 보일지 몰라도 이차적 의미는 어떻게 왜 방금과 같은 일이 일어났는지 좀더 심오하고 강렬하면서도 포괄적인 방식으로 묘사하며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사건에 더욱 묵직한 무게감과 중요성을 부여합니다.”

 

이책에 인용된 시나리오 작가의 말이다. 이책의 장점은 저자가 자신이 인용한 말대로 스토리를 쓰고 있다는 데 있다. 저자가 말하려는 전술은 반상식적이다. 그런 전술을 아무리 말해봐야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만 못하다. 저자는 자신이 인용한 말처럼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독자가 일차적 의미에 이차적 의미를 자연스럽게 담아낸다. 그러면서 재미까지 있다. 오랜만에 재미있게 읽은 경영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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