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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마리오네트 | 경제경영 2012-04-20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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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천재 자본주의 vs 야수 자본주의

하워드 블룸 저/김민주,송희령 공역
타임북스 | 2011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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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받는 많은 경제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1987~1990년 사이 주식시장에 거품이 터지기 시작하자 1990년대에 제2의 대공황이 나타날 것이라 예측햇다.” 그러나 그들의 예측은 모두 크게 틀렸다. 1990년대에 대공황이 나타날 것으로 예측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58~60년 주기의 큰드라티예프 사이클을 추적했다. 콘드라티예프 사이클은 1700년대 말부터 대단히 안정적인 모습을 나타냈다.” (해리 덴트)

 

모든 예측이 그렇지만 경기예측은 찍기보다 나을 것이 없다. 오히려 못하다. 근본적으로 경제 시스템은 복잡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복잡계라도 일정한 패턴은 있기 마련이고 단기는 모르지만 장기의 패턴은 어느 정도 적중률이 있게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콘트라티예프 사이클은 그 패턴을 어느 정도 잘 맞춰주었다. 그러면 왜 콘트라티예프 사이클이 맞아들어가지 않게 되었는가? 먼저 콘트라티예프 사이클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이겠다.

 

콘트라티예프 파동을 해석해놓은 한 설명에 따르면 붐은 우리가 새로운 기술을 선보일 때. 이 기술이 대대적으로 히트를 칠 때, 그리고 우리가 이 신기술과 관련된 제품을 부지런히 공급할 때 일어난다. 반대로 붕괴, 즉 불황은 이렇게 공급된 기술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이 기술이 내리막길을 걸을 때, 그리고 우리만의 기술이라 생각했던 것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때 초래된다. 콘트라티예프의 파동론에 따르면 경제불황을 딛고 일어나 세계를 지배했던 국가는 반드시 특정 시대를 지배하는 신기술을 좌지우지했던 국가라는 것이다. 반대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국가는 과거의 기술에 집착했던 나라였다.”

 

콘트라티예프 자신이 산업혁명 이후의 데이터를 분석하다 발견한 것이 이 사이클이기 때문에 콘트라티예프 사이클에 가장 잘 들어맞는 예는 19세기 영국이다. 산업혁명 이후 70년 동안 세계 6대륙의 사람들은 영국 상품 즉 면직물, 의류, 섬유, 철로, 기차, 증기엔진을 사 가기 위해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그런 식으로 영국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 콘트라티예프 파동이론에 따르면 영국인들이 셰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국이 당시 최고 히트를 친 신기술들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국이 점령하고 지배하던 기술은 그 정점에 도달했다.” 시장이 포화상태가 되었고 그 시장마저도경쟁자와 혈투를 벌여야 했다.

 

그 결과는 19세기 후반의 대공황이엇다. 1873년 이후 20년 동안 영국은 대공황에서 헤어나질 못햇다. 그 큰 문제는 대공황이 끝났을 때 영국은 신기술의 사이클을 놓쳤다는 것이다. 더 이상 섬유와 증기기관은 사이클을 일으킬 힘이 없었다. 사이클을 일으킬 신기술은 철강, 전기, 화학이었다. 모두 영국이 창조한 기술이다. 그러나 그것을 활용해 상업화한 것은 영국이 아니라 후발국이었던 독일과 미국이었다. 신기술을 지배하면서 독일과 미국은 다음 세기를 지배한다.

 

신기술이 사이클을 일으키는 이유는 콘트라티예프에 따르면 투자주기때문이다. “콘트라티예프는 자본의 과잉투자로 사이클을 설명했다. 자본의 과잉투자가 공급과잉으로 이어지고 이후에는 새로운 기술이 마침내 새로운 투자열기로 이어질 때까지 침체가 계속된다.” (라스 트비드) “지난 400여년간의 역사를 분석해보면 경기침체는 4.75년마다 한번씩 오고 경제대공황은 67년마다 한번씩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콘트라티예프 이론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1929년부터 1939년까지 10년간 지속된 경제대공황은 이 파동 모델과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보유한 기술이 낡았거나 쇠퇴해 경제대공황의 늪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1929년 미국에는 무려 다섯개나 되는 최고의 신기술-자동차, 비행기, 라디오, 전자, 전기-이 막 부상하고 있었다. 신기술 숫자가 한두개도 아니고 다섯개나 되었다. 이 신기술과 관련된 모든 분야는 경제대공황이 끝난 후 극적일 정도로 대비상을 했다. 그리고 이들 다섯개 신기술의 비상을 중단시킨 것은 바로 세계적인 경제위기였다

 

콘트라티예프의 논문이 인쇄된 것은 1926년이었다. 그가 논문을 발표했을 때 사이클은 정점을 향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이클은 몇 년도 지나지 않아 돌연사해버린다. 그 이유는 투자주기가 콘트라티예프 사이클을 일으키는 유일한 원동력이 아니라는데 있다. 신기술 투자는 주기의 상승을 일으키는 방아쇠 역할만 한다.” (라스 트비드) 다시 말해 사이클의 진폭은 다른 변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해리 덴트는 그 변수가 무엇인가에 착안하여 20세기 이후부터 왜 안정적이던 콘드라티예프 사이클이 빗나갔는가를 이렇게 설명한다. “산업혁명이 성숙단계로 접어들면서 1900년대 초반에서 중반 이후 지금까지 중산층 소비자들이 더 많이 소비하고 경제력도 보유하게 되어 새로운 40년 주기의 사이클이 만들어졋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엄청난 숫자의 베이비 붐 세대는 새로운 사이클의 영향력이 더 커지도록 작용했다. 세대파동 사이클은 현재 40년주기의 호황-불황 사이클과 80년 주기의 신경제 사이클로 바뀌었다. 우리는 세계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경기 호황 국면을 지나욌다. 지금과 같은 버블 붐은 세계 각국의 베이비 붐 세대들이 가계소비를 크게 늘린데다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기술혁명 덕에 주류경제가 급격히 성장했기에 나타날 수 있었다. 미국에서 베이비붐 세대는 1937~1961년에 이르는 동안 출생률이 큰 폭으로 급증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전개된 컴퓨터와 기술혁명, 1994~2008년말까지의 인터넷 혁명으로 주류경제가 바귀었으며 베이비붐 세대의 생산성, 기업의 수익성, 소득은 더욱 증가했다. 이 같은 두가지 추세, 즉 베이비 붐 세대의 소비증가와 S 커브를 따르는 기술혁명으로 인해 버블에 이어 버블이 만들어지는 버블 붐이 전개되었다. 이 같은 현상은 80년전인 1900년대 초반, 1914~1928년까지 포드 세대가 성장하여 자동차, 전기, 전화, 석유 혁명을 이끌었던 상황과 대단히 유사하다.” (해리 덴트)

 

지금까지 해리 덴트의 실적으로 보아 그의 이론은 상당한 설명력을 갖는다. 원래의 콘트라디예프 사이클이 공급경제학으로만 사이클을 설명한 것이 예측력을 떨어뜨렸고 수요측면을 보완하면 설명력이 복원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다른 접근법을 취한다. 콘트라디예프 모델의 오류는 다른 식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불황은 기술의 변화 때문에 유발되는 것이 아니다. 결제불황을 유발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타고난 생물학적 유전자이다. 경제불황은 우리 인간의 감정과 인식에 의해 유발된다.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경제불황은 우리가 속한 집단의 생체 사이클이 변할 때 유발된다. 경제불황은 특정 사회의 집단적 사고의 움직임에 의해 만들어진다.”

 

무슨 말인가? 케인즈의 야성적 충동을 말하는가? 언뜻 들으면 콘트라티예프가 투자주기를 언급한 것을 보완하는 것으로 들린다.

 

기업가와 경제학자들은 언제나 과열경기를 이애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 이유는 과열경기가 근본적으로 그들이 대체로 인정하지 않는 개념인 야성적 충동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언론에서 폭넓게 사용하는 과열경기라는 개념은 의미로 충만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그 개념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대개 대중경제학을 비판할 목적으로 드물게 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감이 정상적인 수준을 넘어서고 경제에 대한 일상적인 회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기활황에 대한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상황을 가리켜 과열경기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광란의 1920년대는 안정적인 경제성장 속에 사교활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사회분위기가 밝았던 평화와 번영의 시기였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주가가 크게 상승하여 1929년에 주식시장이 붕괴하기 전까지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후 세계는 1930년대의 대공황으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과정을 이해하려면 야성적 충동 이론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

 

이상과열은 주가 상승으로 낙관적인 신시대 이야기가 증폭되어 전염병처럼 퍼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투자자들의 흥분 자체가 그와 같은 이야기를 퍼트린다. 그것이 아마도 1920년대의 실상일 거이다. 1929년에 주식시장이 붕괴하자 사회적 이야기의 성격은 완전히 바뀌었다. 주요 국가의 경제는 깊은 불황에 바졌고 이야기의 방향은 불공정성과 부패, 기만으로 흘러갔다.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실질적 공포를 야기한 자신감의 상실은 대공황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자신감을 상실한 결과 기업투자는 극히 낮은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기업의 확장계획은 중지될 수 밖에 없었다.” (애커로프, 쉴러)

 

저자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저자는 단지 경제심리학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붐과 버블의 이야기를 경제를 넘어 우주적 진화의 드라마 중 일부로 봐야 한다고 제안한다.

 

붐과 붕괴의 사이클은 인간 세계에만 존재하는 현상이 아니다. 상승과 추락, 붐과 붕괴는 생명체가 시작된 38 5000만년 전부터 이미 존재해왔다. 붐과 붕괴 현상은 다른 동물 세계, 조류, , 그리고 군락 및 집단생황을 하는 다른 모든 야생동물들에서 한결같이 존재했다. 그렇다면 왜 모든 집단에 붐과 추락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붐과 붕괴의 리듬이 특정 사회의 생태 생체 리듬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집단생활을 하는 모든 것들은 새로운 정보의 탐색, 그렇게 수집한 정보들의 통합, 그리고 용도변경(오래 사용해왔던 무엇인가를 새롭게 사용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다시 말해 배우고 생각하고 창조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사실 이 3단계 변화가 발생하도록 만드는 진화 탐색엔진을 작동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신뿐이라 믿던 시기가 있었다. 진화 탐색엔진의 기능에는 새로운 창조물을 탄생키시는 기능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화 탐색엔진은 신의 영역과 상관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세속적 창조장치라 할 수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저자가 말하려는 것은 진화의 메커니즘이다. 저자가 용도변경 진자라 말하는 것은 어떤 의도가 있는 행위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의 누적으로 어떤 시스템이 창발하는 메커니즘을 말한다. 그러한 진화의 메커니즘은 생태계는 물론 빅뱅 이후 우주의 진화에도 적용된다. 다시 말해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것에는 모두 적용된다는 말이다. 그 중에서 저자는 붐과 버블의 사이클이 그 메커니즘의 작동방식 중 한가지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박테리아는 여러분과 나 즉 인간처럼 놀라울 정도로 사회성이 뛰어나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박테리아 군집은 절대 멍청하고 수준이 낮은 원시적 집단이 아니다. 박테리아 군집은 이 지구가 탄생시킨 가장 크고 가장 복잡한 사회들 중 하나다. 박테리아 개체드은 모든 일을 협력적으로 추진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각자 지닌 재능을 살리고 자신만의 데이터 정보에 의해 일을 처리하며 화학적 용어로 서로 대화를 한다. 어느 순간 어느 날 발생ㅎ산 문제를 즉각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박테리아들은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시도한다. 그리고 새로운 먹이를 찾기 위해 협력을 시도한다. 또한 경쟁군집을 이겨내고 뛰어넘기 위해 경쟁이 전쟁으로 변했을 때에 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발명해낸다. 이러한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박테리아 메갈로폴리스 자체가 하나의 탐색엔진이며 하나의 돌파구 발견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과장으로 들리지만 그리 틀리지는 않다. 저자는 집단지성을 말하는 것이다. 박테리아 개체 하나는 별것이 아니지만 집단으로서는 뇌를 지닌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

 

&버블은 하나의 탐색엔진으로 군집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라 저자는 본다. 예를 들어 박테리아 군집이 먹이가 풍부한 곳을 차지하고 번식을 한다. 시간이 지나면 먹이는 고갈된다. 그러면 이제 굶어죽어야 할까? “우리를 죽으로부터 구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붐과 붕괴이다. 용도변경 진자가 작동하는 것이다. 여러분과 나 즉 우리 구세대 박테리아들은 그저 한군대에 사는 것을 좋아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호시절을 즐기며 살도록 태어난다. 그저 붐을 즐기면서 살면된다는 현실지향적 유전자를 타고 태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먹이공급사슬이 무너지면 우리는 그 위기 상황에 잘 대처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후손들 즉 신세대는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신세대는 위기대처 능력을 타고났다. 우리 구세대가 일구어놓은 현실사회에 불만을 품고 그저 현재의 영역에만 안주하려고 하는 생활방식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반항적 성격으로 태어난다. 그렇기 땨문에 우리 신세대 후손들은 한군데 가만히 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다닌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러분과 나 같은 구세대는 한곳에 뿌리를 내리고 먹이를 흡수할 수 있는 줄기를 가지고 태어난 반면 신세대 박테리아는 프로펠러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신세대 박테리아들은 채찍처럼 돌아가는 편모 프로펠러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고속으로 돌아가는 편모 프로펠러를 이용하여 신세대 박테리아들은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할 수 있다. 신체 구조상 우리 구시대 박테리아들은 한곳에 정착하여 살도록 태어났지만 신세대       박테리아는 몰속 이곳저곳을 헤엄쳐 다니고 새로운 먹잇감과 새로운 영토를 찾아 개척하도록 태어난 것이다.참을성이 없는 젊은 박테리아 무리,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는 젊은 탐험가 박테리아 덕분에 우리 군집은 영토를 점점 확장하게 된다.”

 

 붐과 붕괴의 사이클 용도변경 사이클은 아주 오래전 박테리아 경제 사이클과 함게 시작되엇다. 붐과 붕괴의 사이클은 가장 원시적인 수준의 생명체부터 가장 복잡한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에 존재하는 공통 현상이다. 개체 증가 붐과 급감 현상은 원생동물, 연체동물, 양서류, 파충류, 곤충, 어류 그리고 포유류 모두에서 다 나타난다. 영국에 사는 붉은 뇌조는 4년에서 8년을 주기로 붐과 붕괴 사이클을 탄다. 붉은 뇌조를 먹고사는 트리키오스트론길루스 테누이스라는 이름의 기생충은 먹이인 붉은뇌조 집단의 증감에 따라 붐과 붕괴의 주기를 탄다. 캐나다에 사는 설피토끼는 10년을 주기로 군집 팽창과 수축을 경험한다. 당연히 설피토끼를 먹고사는 스라소니도 같은 주기를 탄다.”

 

저자는 생태계의 경제 사이클과 인간의 경제 사이클이 다를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경제붕괴는 일부 악당들이 잘못을 저지르거나 신용제도나 모기지 같은 것이 잘못되어 유발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타고난 생물학적 유전자에 경제 붕괴를 유발하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제 붕괴를 몰고 오는 것은 군중의 인식 변화를 촉발하는 장치인 군중 인식 엔진 때문이다.” 줄기를 갖느냐 편모를 갖느냐 선택하는 스위치가 사람에게도 있다는 말이다. 편모를 단 박테리아 처럼 경제붕괴는 스스로의 가능성을 끝없이 찾아 헤메는 우리 유전자 속 탐색엔진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떠한 문제에 직면하고 그 문제의 돌파구가 필요할 때 그 문제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초월엔진이라는 것이 작동되는데 바로 그 초월엔진에 의해 경제는 붐이 일어나기도 하고 붕괴되기도 한다. 신기술이 새롭게 부상하여 그 기술이 절정에 도달하려면 몇십년이 더 있어야 하는 시기에 초래된 경제대위기 즉 붕괴는 우리 마음속 내부 스위치가 작동이 되어 우리를 공포 속으로 밀어넣기 때문에 발생한ㄴ 것이라고 보면 된다.”

 

구체적으로 경제 탄생 과정을 우선 최초의 기업들, 최초의 경영인들, 최초의 금융인들, 최초의 투기꾼들, 최초의 비영리단체들이 극소수 탄생하는데 그 숫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증가한다. 그런데 그 이후 태어나는 신세대는 유전적으로 새로운 기회가 존재하는 미지의 세상에 관심을 갖도록 태어난다. 새로운 토지, 새로운 기술, 새로운 습관, 새로운 개념, 새로운 사회 형태가 보여주는 가능성을 탐색해보도록 하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ㄹ이다. 사회의 안테나에 해당하는 이 탐험가 세대 기업 중에는 원래 정해진 목표만이 아니라 그 이상을 겨냥하는 야심찬 회사들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그러다가 경제 붕괴가 발생하는데 파격적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도했던 회사들 중 매우 뛰어난 선택을 한 것으로 드러나는 회사들도 있다. 이처럼 붕괴를 거쳐서 과거에는 볼 수 엇었던 새로운 형태의 기업, 새로운 권력 조직, 새로운 정부 조직이 탄생한다. 그리고 새로운 기업, 새로운 조직이 이끄는 경제 사이클은 다시 붕괴에서 붐을 향하여 달려간다. 물론 이 새로운 사이클을 이끄는 차세대 기업, 차세대 투자자, 투기꾼들은 자신들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이 큰 경제하는 몸체를 형성하는 하나의 세포라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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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죽음으로 | 인문/사회/역사 2012-04-2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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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성배와 칼

리안 아이슬러 저/김경식 옮김
비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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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스테이아는 가장 자주 공연되는 그리스 비극 중 하나다. 이 작품에서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살해한 이유로 재판을 받고 있을 때 아폴로 신은 아이들이 그들의 어머니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며 오레스테스를 변호한다. ‘어머니란 자기 아이라고 불리는 자의 부모가 아니다. 단지 새로 심어져 자라나는 씨앗의 보육자일 뿐이다.’ 오직 아버지만이 자녀들과 관계 있다.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여신 아테네는 나를 낳은 어머니는 없다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결혼을 제외하고 나는 항상 진심을 다해 남성과 내 아버지를 따른다라고 덧붙인다. 그때 코러스-옛 질서를 대표하는 에우메니테스 혹은 분노의 신-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젊은 신들아, 너희 가 옛법을 짓밝고 내 손안에 있던 법을 찢어발기다니라고 외치고 아테네 여신은 결정적인 표를 던진다.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를 살해안 죄를 모두 용서받는다.”

 

이 비극의 발단은 선단을 움지이기 위해 순풍을 얻기 위해 아가멤논이 딸, 이피게니아를 희생제물로 바친 것에서 시작된다. 돌아온 아가멤논을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단죄한다. “그녀는 아가멤논을 죽인 명분에 대해 물론 개인적인 슬픔과 증오도 있었지만 희생된 친족을 위해 복수할 책임이 있는 씨족의 우두머리로서 내린 결단이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간단히 말해 그녀는 모계 사회에서 정한 규범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사회적 책임이 있는 여왕으로서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저자는 오레스테이아란 고전극에서 모계 문화가 부정당하고 부계 문화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시점을 읽어낸다. “클리타임네스라 사선이 정의로운 결단이었다느느데 수긍하게 한 다음 그녀의 딸이 잊혀지고 그녀의 유령이 사라지고 마침내 사건이 완전히 잊혀지는 지점까지 이른다. 그때 여성은 이미 주장할 권리도 자질도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클리다임네스트라 같은 막강한 존재가 딸이 살해당하는 도발적인 상황에서 복수할 권리가 없다면 과연 어떤 여성에게 그런 권리가 있겠는가?”

 

이 고전극에서 저자가 읽는 것은 공동체 사회 혹은 가계가 여성을 중심으로 이어졌던 씨족이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던 체제에서 남성이 재산과 여성을 사적으로 소유하게 된 변화이다. “아테네 인들은 오레스테이아를 통해 과거 분노의 여신 퓨리와 운명의 여신들이 굴복당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후 남성 지배 질서와 새로운 규범이 확립되었다.” 그 굴복은 절대 평화롭지 않았다. 절대적인 폭력에 압도당한 결과였다. 패배한 신들은 아크로폴리스 아래 동굴로 피신했다. 그때 아테네 여신은 그들에게 아테네에 머물라며 설득했다. 그 와중에도 아테네 여신은 변함없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은 친족이 피를 흘린 것이 아니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을 되풀이했다. 비굴해진 그들은 아테네 여신을 도와 최고 권력자인 제우스와 아레스가 통치하는 이 도시를 지키는일에 봉사하헸다고 약속한다.”

 

아버지가 딸을 죽여도 방관해야 하고 어머니와 자식은 가족이 아니라 말해도 인정해야 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가? 이것이 이책의 질문이다.

 

고고학자 김부타스는 신석기, 청동기 시대에 남동 유럽에 존재했던 다양한 문화집단들의 집단적 동질성과 성취를 인정하면서 고대 유럽 문영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등장했다고 지적했다. 7000년전 남동 유럽에 살았던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는 윈시 정착민이 아니었다. 기원전 7000년경에서 3500년경 사이에 초기 유럽인들은 복합적인 종교 기구와 정부 기구들을 만들었고 청동이나 금으로 장식품이나 도구를 제작했으며 특히 청동이나 금으로 장식품이나 도구를 제작했으며 특히 문자로 보이는 기호를 개발했다.”

 

당시 근동의 문명들과는 독자적으로 발전한 고대 유럽 문명은 근동과 마찬가지로 평화로웠고 계급이 없는 평등한 사회였으며 가부장제가 아닌 모계 사회로 남녀차별이 없었다.

 

신석기 시대 예술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것이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신석기 시대 예술에서는 무장한 군대, 잔임함, 폭력에 기초한 권력을 이상화한 주제가 없다. 이 시대에는 고매한 전사들혹은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이 없다. 사로잡은 포로들을 사슬에 묶어 여기저기 끌고 다니는 영웅 정복자나 노예제를 묘사한 증거도 없다. 또한 초창기와 가장 원시적인 남성 지배 사회의 정복자들이 만든 유물과 달리 유독 여신을 숭배한 신석기 사회에서는 특이하게도 사치스럽게 꾸민 족장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모든 곳에서-사원과 집에서, 벽화에서, 항아리에 새겨진 장식 문양들에서, 입체 조각상에서, 진흙 입상에서 얕게 양각한 세공품에서- 자연에서 모방한 상징적인 배열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다시 여신 숭배와 연관되어 삶의 아름다움과 신비에 대한 경외심과 놀라움을 증명해주었다. 여신의 몸은 탄생과 기적과 윤회, 재생같이 죽음을 삶으로 바꾸는 신비로운 능력을 지닌 신성한 성배로 표현된다. 신석기 예술에는 여신으로 의인화된 생명체들이 상징하는 화합의 주제가 두드러진다. 여기에서 우주를 지배하는 최고 힘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물질적이고 영적인 양분을 공급하며 심지어 죽은 뒤에도 아이들을 자신의 우주적 자궁으로 다시 데려간다고 믿는 신성한 어머니다.”

 

신석기 예술이 보여주는 세계관은 정복하거나 약탈하고 노략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구를 가꾸고 물질적, 영적 자원을 공급함으로써 만족스런 삶을 추구한다. 전체적으로 신석기 예술은 우주를 지배하는 신비로운 힘의 주된 기능이 복종을 강요하고 처벌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고 축배를 들고 접대하는 것이라는 세계관을 담고 있다.”

 

선사시대는 마치 절반 이상이 찢어지거나 없어진 거대한 퍼즐같다. 완전하게 재구성하기는 불가능하다. 너무 많은 조각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재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우리가 갖고 잇는 조각들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을 막고 조각이 들어맞는 진정한 모델을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장벽은 인간관계의 차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선사시대 문화에서 인간관계의 전형은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이다. “더 크고 강한 어른인 어머니는 분명 위계질서의 관점에서 ㄷ더 작고 약한 어린아이보다 우월화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아이가 열등하다거나 가치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힘은 억압과 특권, 두려움이 아닌 책임고하 사랑으로 승화되어 사회를 안정시켰다.” 여신으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세계관은 우리에게 익숙한 사회조직돠는 매우 다른 사회조직을 반영하는 것이 분명하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마찬가지로 파악되엇다. “싢롸적이고 고고학적 증거들은 지배 중심 사회 이전에 팽배했던 정신 중 가장 특기할만한 특징은 인간과 자연이 하라나는 일체감을 자각한 것이라는 시실을 알려준다. 이것이 신석기 시대와 크레타  인들이 여신을 숭배한 본질적인 이유였다. 고대사회에서는 우주를 지배하는 힘을 모든 것을 내어주고 양육하는 어머니라고 여겼다. 그런 만큼 남성신들이 추구하는 인과응보의 관념보다 심리적 사회저긍로 안정감을 주엇다. 수천년동안 서구역사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 성모 마리아가 상징하는 동정적이고 자비로운 어머니에게 매달려 끈질기게 숭배함으로써 안정을 추구햇다. 다른 역사적 수수께끼처럼 이 끈질긴 숭배 역시 선사 시대에 수천년동안 여신을 숭배환 오랜 전통의 문맥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이러한 신석기 문명은 크레타에서 절정에 이른다. 크레타 사회에는 “’삶의 모든 영역이 창조와 조화를 가져다주는 자연의 여신을 향한 열렬한 믿음으로 충만해 있었다. 크레타는 역사 기록상 여성과 남성이 서로를 대등한 동반자로서 조화를 이루어 줄겁게 지낸 마지막 세상같다. 크레타 문명의 예술적 전통에 유유히 빛나는 것도 바로 조화의 정신이아. 플라톤은 크레타 문명이 미적 가치와 우아함, 역동성에서 또한 삶의 유희와 자연과의 거리에서 매우 독특했다고 강조한다. 어떤 학자들은 미노아 인들의 생활상을 설명하면서 호모 루덴스의 삶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잇다고 지적한다. 다른 학자들은 크레타 문명을 감수성’ ‘우아한 삶’ ‘아름다움과 자연의 사랑같이 짧은 문장으로 표현한다. 크레타 섬을 연구해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랍다는 말로 감탄과 충격을 나타낸다. 그들은 동화 같은 세상에 대한 동경이나 이 세상에서 우아한 삶을 가장 완벽하게 누린 곳같은 표현으로 이 문명을 찬양했다.”

 

크레타 사회는 다른 고대 고등 문명 세계와는 달리 부를 공평하게 나누었다. 플라톤은 이 점을 지적하며 심지어 농부조차 생활수준이 상당히 높았던 것같다. 지금가지 발견된 어떤 집에서도 아주 가난했다는 증거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기본경제는 농업이 중심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축 사육과 산업, 그리고 무엇보다 무역-거대한 상업 선단을 타고 전 지중해를 항해하며 무역을 장악했다-이 경제발전에 크게 공헌하면서 가치를 더했다. 사회조직은 처음에는 모계 씨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중앙집권화되엇다. 크레타에도 부유한 지배계층이 있었지만 그들이 거대무장세력을 소유하며 권력을 유지했다는 증거는 없다.”

 

남자와 여자 모두 운동과 스포츠에 참가했고 유희로 즐겼다. 음악, 노래, 춤을 향유하면서 삶을 더욱 즐겼다. 행진, 잔치 등 공식 행사가 잦았고 극장이나 원형 경기장에서는 종교의식을 마치면 곡예가 공연되엇다. 또한 유흥과 종교가 뒤섞이곤 했는데 크레타인에게 종교의식은 즐거운 행사였다. 종교는 여가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크레타 문명에서는 삶이 창조와 조화의 근원인 자연의 여신에 대한 열렬한 믿음으로 충만했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고 독재를 싫어하며 법을 존중했다. 지배층조차 개인적인 야망을 품는 일은 드물엇던 같다. 어디서도 작자의 이름이 새겨진 예술품을 보지 못했고 지배자의 행적을 기리는 기록 한 줄 본적이 없다. 크레타 예술은 권력이 지배, 파괴, 억압 등과 동의어가 아닌 사회를 반영한다. 크레타 사회에서 권력은 물리적인 힘을 휘두르거나 위협을 가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남성 지배자인 엘리트에게 복종을 강요하기보다는 모성의 책임감과 동일시되는 점이 많다. 바로 이것이 공동 협력 사회를 특징짓는 권력의 정의다.” 그리고 이 시대 다른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력한 남성 지배자를 표현한 작품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로 미루어왕좌를 차지했던 사람이 여성이었으리라 가정할 수 있다. 크레타에서는 여성이 예술품과 공예품에서 가장 빈번하게 다루어지는 중심 주제였으며 특히 공적인 영역에 주로 나타났다. 기원전 3500년경 남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사회계층 구분이 엄격해지고 전쟁이 계속되면서 여성의 지위가 추락했다. 미노아에서도 도시화가 진행되고 ㅅ하회계층이 존재했지만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여성의 지위도 변함없엇다.”

 

다른 모계 사회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지위가 높다는 것은 성에 대해서도 자연스러웠다는 말이다. “성을 폭력보다 더 죄악시하는 현대 종교적 교리의 지배적 패러다임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스포츠와 춤에 대한 열정, 창조성, ,리고 삶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개방된 성 문화가 삶에 깊숙이 스며 크레타인들이 자유와 평화와 조화를 지향햘 수 있었던 듯하다. 아놀드 하우저가 말했듯이 미노아 문화는 그 정신이 동시대 다른 문화의 정식과 근본적으로 달랏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크레타 문명은 고대 유럽 문명이 어떤 곳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 문명은 아리아인들에 의해 잃어버린문명이 되었다.

 

7000년전 근동에서 고대 신석기 문화가 붕괴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여러 지역에서 압박이 거셌던 듯하다. 침략이나 자연재해 혹은 때때로 두 재앙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증거도 보이는데 엄청난 파괴와 대대적인 피난이 따랐을 것이다. 여러 지역에서 오래된 도자기 그림 양식이 사라지는 등 신석기 문화는 서서히 붕괴하더니 마침내 후퇴와 정체기로 접어들었다. 혼란이 격심해지는 동안 꾸준히 발전하던 문명은 완전히 멈췄다. 이후 2000년이 훨씬 더 지나고 나서야 수메르와 이집트에서 문명이 등장한다.”

 

김부타스는 그 단절의 이유를 쿠르칸족의 대이동이라 말한다. 인도-유럽어족의 조상인 이들의 침략과 뒤따르는 문화적 충격 그리고 인구 이동은” 3차례 일어났다. “1차 대이동은 기원전 43000년에서 4200년 사이, 2차대이동은 기원전 3400년부터 3200년에, 3차 대이동은 기원전 3000년부터 2800년에. 그들은 강력한 남성 사체와 전사들의 인솔하에 전쟁의 남성신과 함께 이동했다. 그리고 인도의 아리안족 지중해 연안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정착한 히타이트와 미타니족, 아나톨리아의 루위족, 동부 유럽의 쿠르칸 족, 그리스의 아케이아 족 그리고 나중에 동참한 도이스족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정복지에 자신들의 이념과 생활방식을 강요했다.” 셈족도 그 대이동의 하나였다.

 

아리안과 셈족 두 종족에게 공통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사회적, 이념적 체제 구조다. 두 종족은 모두 지배 중심 체제에 기초한 사회였다. 남성 지배와 남성적 폭력, 그리고 위계질서가 분명한 권위적 사회였다. 또한 그들은 처음 서구 문명에 기반을 놓았던 사회와는 달리 생산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가 아니라 훨씬 더 효과적인 파괴력을 바탕으로 물질적 부를 축적했다.”

 

그들은 이렇다할 기술도 문화도, 문명이라 부를 것도 없는 야만인에 불과했다. 그들은 야금술도 주변의 농경인들게 배웠다. 그 농경인들에게 구리 도끼는 나무를 자르는 도구였지만 이들에겐 사람의 목을 자르는 무기가 되고 힘의 상징이 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럽의 농부들에게 파괴기술은 사회적 특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남쪽 사람에서 올라온 무리뿐 아니라 북쪽 메마른 땅에서 내려온 전쟁을 좋아한 무리에게 파괴력은 중요하고 유용한 권력이엇다. 철기가 인간의 역사에서 치명적인 역할을 한 시기도 바로 이때다. 이제 철기는 일반적인 기술 발전의 도구가 아닌 죽이고 약탈하고 노예를 만드는 도구가 되엇다. 김부타스는 가늘고 날카로운 청동 도끼, 준보석으로 만든 철퇴, 전투용 도끼, 부싯돌 화살촉 등과 함께 청동무기가 등장한 것은 우연히도 쿠르칸 족이 이동한 경로와 일치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파괴 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서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갔던 고대 유럽의 고고학적 풍경은 이제 몰라볼 정도로 변햇다. 김부타스는 수천년동안 이어지던 전통이 단절되고 도시와 마을은 붕괴되고 훌륭한 그림이 새겨졌던 도가기는 사라지고 사원도 프레스코화도 조각도 가징도 문자도 모두 사라졌다.’고 지적햇다.

 

야만적인 침략자긍릉 그들에게별 의미가 없고 가치도 없는 집, 사원, 뛰어난 공예품과 예술품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햇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노예로 사로잡혔고 운이 좋으면 달아났다. 이후 역사에서 인구 이동은 연쇄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살아있는 전쟁무기가 새로 도입되었는데 바로 무장한 기마병이다. 당시에 그들은 오늘날 탱크나 비행기보다 더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쿠르칸족이 파괴를 서슴지 않으며 이동한 흔적을 좇으면서 전사-족장의 무덤을 발견하고 그안에서 무덤 주인을 둘러싸고 있는 희생당한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의 유해, 동물 뻐 르리고 무기들을 출토햇다.”

 

전쟁이 잦아지면서사회의원리는 평등에서 지배로 바뀌었다. “남성이 공동체를 지배했고 그 결과 여성들은 사회적 지위를 잃었다. 나아가 이전 시대에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던 여성 입상이 이후에는 더 출토되지 않았다. 과거의 이념은 바뀌었다. 모계 중심에서 부계 중심으로 사회구조가 바뀌엇다. 이제부터 잡종문화가 김부타스가 부르는 현상이 등장한다. 이 문화는 남아있는 고대 유럽 문화를 복종시키고 쿠르칸 족의 유목 경제와 부계 혈통의 계층화된 사회에 빠르게 동화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잡종문화는 이전 문화보다 기술적 문화적으로 훨씬 뒤떨어졌다. 이제 경제는 주고 가축 사육에 의존했고 고대 유럽의 기술이 잔류하고 있어 도가지는 놀랍도록 모양이 비슷했지만 질이 나빴다.”

 

쿠르칸 족의 말발굽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던 곳에서도 문화충격이 나타낫다. “점차 날카로운 칼로 지배하고 파괴하는 권력이 생명을 지키고 부양하는 능력을 대신했다. 무장한 정복자들은 초기 공통 협력 문화를 단절시켰고 겨우 파멸을 면한 사회들도 변화의 흐름을 완전히 피할 수 없었다.”

 

크레타 섬은 대륙과 바다로 떨어진 덕에 참화를 비켜갔고 자신들의 문화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이 증언하듯 지진과 해일로 크레타는 멸망햇고 그 잔해에 아케이아인들이 들어선다. “크레타의 종말은 본토에서와 비슷하게 시작되었다. 아케이아인이 지배했던 미케네 기간 동안 크레타 예술은 소극적이고 자유롭지 않았다. 그리고 죽음을 걱정하며 강조했다. 아케이아인에게 영향을 받기 전까지 크레타인들은 죽음과 장례 제의를 중요시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아케이아인 엘리트들은 달랐다. 아케이아인들은 문명화된 미노아 양식에서 많은 부분을 취하기도 햇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삶보다 죽음에 ㅇ릭숙했다.”

 

과거의 잔해에서 재조립된 미케네 마저 또다른 쿠르칸인인 도리아인들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후 그리스 본토와 주변 섬들 그리고 크레타에서 고도로 발달했던 문명은 서서히 사라졌다. 이 시대를 그리스사에선 암흑시대라 부른다.

 

고대신화들은 기록되지 않은 이 시대의 변화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이에 대해선 자아폭발리뷰에서 다루었다)이 그 예이며 헤시오도스의 타락 이야기도 그 중 하나이다.

 

암흑시대가 끝날 무렵 살았던 헤시오도스는 한 때 황금종족이 있었다고 주장햇다. ‘좋은 것은 모두 그들이 차지햇다. 풍요로운 땅은 맣은 과실을 무한정 쏟아냈다. 평화롭고 평안한 가운데 그들은 땅을 가꾸었고 가축을 사육했다. 그 모습은 하늘에서 신들이 내려다보기에도 사랑스러웠다.’ 헤시오도스가 순수한 영혼들, 악을 물리치는 사람들이라 일컬었던 이 종족 이후에 그들보다 지위가 낮은 은의 종족이 나타났고 다시 그들은 은의 종족과 전혀 다른 재료로 만든 창에서 튀어나온 무섭고 힘센 청동의 종족으로 대체되었다. 헤시오도스는 이 민족이-청동기시대의 아케이아 인이라 알려진- 전쟁을 들여온 과정을 설명하면서 모두가 슬퍼하는 아레스의 죄스런 작업이 그들의 주 관심사였다’;라고 지적했다. 그들은 앞선 두 종족과 달리 평화를 추구하는 농경민이 아니엇다. ‘그들은 곡식을 먹지 않았으며 마음은 단호하고 정복당하지 안는 돌처럼 냉혹했다.’ 헤시오도슨 ㄴ 아케이아인과 그들이 정목한 미케네 인들의 자손들을 독립된 네번째 종족으로 구분하면서 이들은 먼저 있었던 종족보다 더 정의롭고 고상했다고 덧붙ㅋ였다. 그들은 본래 타고났던 야만서을 어느 정도 벗고 고대 유럽인들이 누리던 더 문명화된 관습을 많이 채택했다. 이 무렵 다섯 번째 종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헤시오도스 시대에 이미 그리스를 ㄹ지배하고 있었다. 헤시오도스는 이들의 후손이었다. 그는 내가 다쇼ㅓㅅ 번째 종족과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떤 사람은 다른 도시를 강탈화곤 한다. 옳다고 주장할 수 있으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이제 경건함은 존재하지 않는다.’”다섯번째 철의 종족은 도리아인들이었다.

 

우리가 문명의 시작이라 알고 잇던 수메르 문명은 야만인들의 정복 이후에 태어났다. 인도 문명도 그렇게 태어났으며 이집트 문명도 그렇게 태어났고 그리스 문명도 그렇게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 문명은 그들이 파괴한 이전 문명의 잔해를 모아 복원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을 뿐이다. 그들 문명이 필요로 하는 물질적 사회적 기술실제 지배 중심 사회 이전에만들어진 것들이다. , 정부, 종교, 문자, 야금술, 건축기술, 도시, 예술, 문학, 제의, 상하수도, 광장, 신전과 같은 도시계획 등 모두 지배와 전쟁과 무관했던 문명에서 태어났다. 신화는 문명의 선물을 준 것이 남성신이 아닌 이전 문명의 신들인 여신이라 인식한다. 실제 농경, 직조기술, 도자기, 문자 등 물질적 기술의 대부분은 여성이 발명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뿐 아니라 이집트나 유럽에서 발견된 증거들을 살펴보면 여성을 정의, 지혜, 지성과 연관 짓는 일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칼을 든 야만인들과 함게 모든 것이 바뀌었다. ‘오레스테이아가 공연되던 시절까지도 쿠르칸족에게 정복당한 선주민들의 후예들은 이전 사회가 어떠했다는 기억이 생생했다. 야만인들의 폭력이 낳았던 암흑시대가 끝나고 문명은 다시 복구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문명에서 다시 살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지배와 그 지배의 수단인 폭력을 부정하는 평등주의와 평화주의였다.

 

자손이 어머니를 따라 계보를 잇고 여성이 씨족의 우두머리그리고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존경받는 제사장이었던 사회에서 사회화된 사람들이 부계 혈통과 함께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은 분명 부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들은 어머니를 살해한 아들이 처벌받지 않는 것을 아이스클로스의 에우메니데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결코 이해할 수 없ㅇ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상할 수도 없고 정말로 신성모독적인 일은 우주를 지배화는 최고권력이 무장한 복수심에 가득찬 신들로 의인화되고 인간들이 일상적으로 살인과 약탈, 강간을 저지르는데도 그 신들이 묵과할 뿐 아니라 심지어 정의와 도덕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명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은 바뀌어야 했다. 신의 이름으로.

 

지배 중심 체제가 옛 공동 협력 체제 위에 포개어져 두 체제가 함게 지속되는 것은 엣 체제가 다시 힘을 얻을 가능성이 있단 점에서 대단히 위험했다. 모계 씨족 사회의 우두머리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땅을 관리하는 옛 사회 경제 체제는 분명 위협적이었다. 새로운 엘리트 지배층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성들에게서 의사결정권을 빼앗고 동시에 여 사제들에게서 영적 권위를 빼앗았다. 심지어 피정복민들은 익숙한 모계 전통을 빼앗기고 부계사회에 적응해야 햇다. 실제로 고대 유럽, 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 가나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한줌의 정복자들은 새로운 부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정복지에서 부를 파괴하거나 빼앗음으로써 지배력을 획득했다. 이제 군사력과 위협으로 경제적 부를 분배하는 통로를 조절할 사람을 정해야 했다. 지위를 정하는 것은 사회조직을 유지하는 확실한 원칙이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 위에 나머지 절반인 육체적으로 더 강한 남성이 올라선 것에서부터 모든 인간관계가 이 유형을 따르기 시작했다.”

 

먼저 지배자가 된 야만인들은 미토스를 장악해야 했다. 고대인들은 미토스와 로고스로 세상을 이해했고 각각은 다른 진실을 알려준다고 생각했다. 미토스를 통해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수용하고 혐오해야 하는지 신이 정한 것은 무엇이며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인정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배운다. 또한 사람들은 의식과 제의를 통해 신성한이야기에 참여한다. 그 결과 그 이야기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은 ㅇㅇ인간정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신성한 불면의 진리로 인정받으며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

 

사회의 원칙을 평등에서 지배로 바꾸는 것은 천붕지열의 변화이다. 그런 변화를 정당화하려면 미토스를 장악해야 했다. 그러므로 성경에도 나오듯이 헤브루 족과 훗날 기독교도, 회교도들은 사원을 무너뜨렸고 벌목으로 신성한 숲을 파괴했으며 이교도 우상들을 살해했다. 또한 영적 파괴도 함게 감행했다. 책을 불사르고 이단자를 처단함으로써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살해하거나 개종했다. 고대 사제들이 신성한 이야기들에 행사했던 중앙집권화된 통제방법을 이해하기란 힘들다. 종교나 국가의 검열이나 대중매체의 방해공작을 제외하면 오늘날에는 매우 다양한 관점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대중이 읽고 듣는 것을 매우 제한했다. 주로 공인된 견해만 읽고 들을 수 있었다. 더구나 공인된 이념에 위협이 되는 주장은 결코 전파할 수 없었다. 수천년 동안 사회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 중 하나는 고대 사제들이 이용한 영적교육이다. 고대 사회에서 사제는 국가권력을 유지하는 필수 요소였다. 그들은 민중을 지배하고 강탈했던 남성 엘리트들을 위해 봉사했다. 그리고 그들 또한 남성 엘리트였다. 사람들은 점차 폭력적이고 위계질서에 기초한 남성 지배 사회를 정상적이고 옳은 것으로 믿기 시작했다.”

 

수천년 전에 고대 유럽을 유린했던 쿠르간 족과 마찬가지로 남쪽 사막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을 휩쓸었던 헤브루 족은 전쟁의 신, 곧 사납고 질투심 많은 야훼 혹은 여호와를 찬양하는 신앙을 동반했다. 구약성서를 통해 우리는 여호와가 파괴하고 약탈하고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으며 실제로 이 명령들이 충실하게 수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헤브루 사회도 쿠르간 족이나 다른 인도-유러피언들과 마찬가지로 위계질서가 엄격하며 모세의 종족 곧 레위 족이 지배했다. 코나트 혹은 코헨 집안의 몇몇 엘리트가 사회를 지배햇다. 그들은 아론에게서 지위를 물려받은 사제들이었고 실질적인 권력을 소유했다. 구약성서를 보면 그들은 여호와에게서 직접 권력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했다. 더군다나 성경학자들은 바로 이 사제 엘리트 계급이 그들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화와 역사를 다시 작성하는 일을 상당 부분 담당했다고 주장했다.구약성서에서 폭력과 권위주의, 남성 지배라는 지배 중심 사회의 외형을 완성하고 지지함으로써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라고 노골적으로 선언했다. 유럽과 소아시아에서 대규모 파괴를 자행했던 쿠르간 족이나 다른 인도-유러피언 침약자들처럼 고대 헤브루 족도 남성 지배 체제가 엄격한 사회를 세웠다.”

 

그들의 지배를 축성한 신 이외에 다른 신은 우상이 되어야 했고 부정되어야 했다. 특히 지배 원리를 부정하는 옛 체제의 미토스는 더더욱 부정당해야 했고 그 주인공들인 여신은 사라져야 했다. 예를 들어 상직적으로 공공연히 신성시된 성경에서 여신을 언급하지 않은 까닭은 여성을 보호화고 남성이 여성에게 가한 부당한 처사를 복수해줄 신성한 힘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유대교 이전 고대 헤브루 종교는 사회에는 폭력의 지배를 선언하고 가정에선 가부장제를 선언한다. “구약성서에서도 나타나듯이 남성 지배계급은 새로 만든 법률에서 여성을 자유롭고 독립된 인간이 아닌 남성의 소유물로 정의한다. 처음에 여성은 아버지에게 속하고 나중에는 그들이 출산하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남편이나 주인에게 속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구약을 보면 여자의 정절을 대단히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여성은 남성 가부장의 재산이기 때문에 보호해야 한다. “신명기 22 28절과 29절 사이에는 만일 남자와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만나 동침하여 정을 통하던 중 발각되면 남자는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50세켈을 주고 그녀를 아내로 맞아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처녀가 아니라면 그녀는 더 이상 그녀의 아버지가 보상받을만한 가치 있는 재산이 못 된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가치를 상실하게 만든 남자가그 값을 물어야 하고 그녀를 가져가야 된다는 말이다.

 

신명기 22 13절에서 21절은 더 노골적이다. “남자가 자기 부인이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그 녀를 미워하고심지어 그녀를 제거하고 싶어하는 사건을 다룬다. 만약 신부의 순결이 만족스럽게 증명되지 않는다면 남편은 원하는대로 그녀를 제거할 수 있다. 법률에서는 그 여성을 그녀의 아버지가 사는 집 문 앞으로 데려가라 그러면 도시 남자들이 그녀가 죽을 때까지 돌로 칠 것이다.’가고 명시한다.”

 

죄없는 자 돌로 쳐라는 예수의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은 간통에 대한 율법이다. 간통자는 둘 다 죽이도록 되어 잇다. 그 이유는 도둑(다른 남자의 재산을 훔친 남자)을 처벌하고 훼손된 재산(남편에게 불명예를 안겨준 아내)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여전히 중동에서 살아있다. 소위 명예살인이 그것이다.

 

다른 예를 더 보자. “판관기 19장에서 성경을 기록하는 사제는 처녀인 딸을 만취한 폭도에게 내어준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상류층 레위 족 출신인 남자가 손님으로 왔다. 베냐민족 깡패 한무리가 손님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위협했다. 분명 폭행을 가하려는 것이다. 그때 집주인 남자가 나서며 잠깐만 내 말을 들어보시오. 여기 내 딸이 있고 이 아이는 처녀요. 그리고 저 손님의 첩도 여기 있다오, 내가 그들을 글어낼 테니 그들을 욕보이든 어지하든 당신들 마음대로 하시오. 대신 이 사람만큼은 해치지 마시오.’라며 부탁했다.이 이야기는 볗ㄹ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듯 대수롭지 않게 서술되어 있다. 그 뒤에 이야기가 좀더 진행되면 손님이 첩을 데리고 깡패들 앞으로 나가고 그들이 그녀를 행음하고 밤새도록 욕보이는내용이 나온다. 나중에 그녀는 자기 주인이 잠든 문지방 앞에 엎드린채 쓰러졌고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다여자를 주인은 그만 일어나서 가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죽은 뒤엿다.

 

딸과 첩의 신뢰를 배반하고 심지어는 집단 성폭행과 힘없는 여성을 살해한 잔인한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어디에도 동정하는 말 한마디 없으며 도덕적으로 분노하거나 격분하는 언급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 딸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 할 수 있는 처녀성과 목숨까지 희생하겠다고 제안한 아버지에게 아무 법적 제재가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레위 족 남자의 부인이라 할 수 있는 여성을 집단 성폭행하고 고문하고 결국 살해했으리라 추정되는 깡패들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책은 겉으로는 성스런 율법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괴상망측한 도덕성을 전제하고 있다.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아버지와 남편들에게 이끌려 강간당하거나 폭행당하거나 고문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도록 다른 사람에게 넘겨지는 것을 합법화할 뿐 아니라 가해자를 처벌하려 하지도 않고 심지어 비난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선행으로까지 추겨세워진다. 롯에 과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롯은 당연하다는 듯 처녀인 두 딸을 집을 방문한 두 남자 손님을 위협하는 깡패들에게 내어준다. 이것은 당시 널리 용인되던 관습이었던 듯하다. 여기에서도 위법에 대한 언급은 없다. 딸들이 분노했다는 이야기도 없다. 오히려 롯을 찾아온 두 손님은 하나님이 보낸 천사로 밝혀진다.”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파괴되었을 때 하나님이 살려준 유일한 의인이었다.

 

다른 사람을 노예로 하는 것도 당연하고 오히려 자랑일 뿐더러 여성을 심지어는 자기 딸까지 사람이 아닌 재산으로 보는 그런 사회는 신의 이름으로 세워진 사회였다. 그 신이 명령한 사회에선 권위에 불복하고 독자적으로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구하는 일을 가장 큰 죄악으로 간주하여 매우 엄하게 다스리지만 동료를 죽이고 노예로 삼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고 약탈하는 일은 묵인한다. 전장에서 벌어지는 살상은 성스러운 일로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전리품을 얻기 위해 약탈을 일삼고 여성과 어린아이를 강간하며 도시 전체를 파괴하는 일 역시 성스럽다고 용인한다.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에서 나중에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신성국가에서 전쟁과 전제적 지배, 여성의 예속화는 새로운 지배 중심의 도덕성과 사회적 핵심이 되었다. 간단히 말해 문화적 진화의 행로를 성공적으로 돌림으로써 이후 현실은 완전히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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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stretch: 돈이 문제다 | 인문/사회/역사 2012-04-16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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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로마제국 최후의 100년

피터 히더 저/이순호 역
뿌리와이파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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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이 왜 무너졌는가에 대해선 많은 말들이 있어왔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다. 문제는 왜 로마제국이 그것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을 막지 못했는가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두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로마제국 자체의 문제 때문에 그랬다. 둘째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막기엔 로마제국 자체의 역량이 부족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내생적 원인과 외생적 원인 두가지라 할 수 있다.

 

내생적 원인으로 보는 대표적인 견해는 기번의 것이다. “에드워드 기번은 잘 알다시피 서로마제국 멸망의 원인을 내부적 요인에서 찾았다. ‘로마의 쇠퇴는 터무니없는 거대함이 빚어낸 당연하고도 불가피한 결과였다. 번영의 이면에는 부패 요소가 만연해 있었고 파괴의 원인은 정복의 크기로 증대되었다. 그러다 세월 혹은 재난에 의해 인위적 토대가 허물어지자 그 비대한 구조물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주저앉은 것이다.’”

 

기번의 견해는 덕의 상실이라 요약할 수 있다. 로마는 지배계층의 자제력과 같은 덕 때문에 거대한 제국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성공은 그 덕을 깎아내렸다. 지배층의 타락과 함께 성공의 원인이엇던 덕은 사라졋고 제국은 무너졌다. 기번의 논리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기번이 멸망의 원인으로 기독교를 말하는 것은 그 논리의 연장선이앋. “기독교의 교리논쟁으로 로마제국에 내분이 일어났고 수도승이 될 것을 권장함에 따라 사회지도급 인사들의 정치참여가 줄어들었으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정책을 옹호하여 로마의 전쟁기계가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저자는 의문을 던진다. “5세기 서로마제국의 붕괴는 동로마의 상황과 반드시 함께 고려해야 한다. 동로마제국은 6세기에도 존속했고 나아가 융성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서로마 시스템 속에서 죄악으로 간주된 모든 요소는 동로마에도 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동로마가 더 기독교적이었고 교리논쟁도 더 심했다. 동로마는 또 서로마와 같은 경제적 토대 위에서 서로마와 같은 정부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동로마는 살아남았고 서로마는 멸망했다. 따라서 그것만을 보더라도 제정 후기 서로마의 시스템에 고유의 내적 결함이 있어 스스로 멸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식의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

 

오히려 4세기까지도 로마제국의 시스템은 잘 돌아가고 잇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팍스 로마나의 본질은 로마화였고 로마화가 제국 시스템의 근간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로마제국이 수립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의 피지배민족은 그들의 모국어외에 제국의 두 언어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런 현상은 특히 부유층에서 두드러졌고 초기만 해도 어느 정도 필요에 따라 생긴 것이었다. 그런데 곧 제국의 많은 도시들에서 라틴어 문법학자들이 급속도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학교들을 시작으로 라틴어와 라틴 문학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유사교육기관이 제국 전역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4세기 무렵에는 제국 어디서나 문법학자로터 라틴어 교육을 받는일이 가능해졌다. 이로써 우리는 다른 모든 것들의 바탕이 되는제국의 발전, 즉 가장 근본적인 변화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탈리아 이외의지역에 로마의 농촌과 도시를 닮은 풍경이 만들어졌는가 하면 로마와 로마 원로원을 무색케 할 절도로 광범위한 정치사회가 조성되었다. 라틴어와 라틴 문학이 로마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간 것은 로마의 가치쳬게 전반을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고 거기에는 그런 교육만이 올바른 인간-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우월한 인간-을 양성할 수 있다는의미가 담겨 있었다.” 올바름, 우월함의 기준은 정치였다. 제국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인간이란 의미이다.

 

로마화로 방대한 지역의 주민 모두가 로마인이 된 것이다. 로마는 더는 지리적 개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구나 이용가능한 문화적 개념이었다. 그로써 로마제국의 성공에 따른 가장 중요한 결과가 나타났다. 새로이 로마성을 획득한 로마인들이 정치적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초대형 국가가 만들어내는 힘과 이익의 분배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문법학자에게 7-8년동안 교육을 받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지 않았다. 상당량의 돈이 드는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지주계급이엇다. 로마화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이들이었다.

 

로마제국은 부유한 지주층만이 시스템에 진입할 수 잇었다. 제정 초기에 그 집단ㅇ속하려면 (지자체의 실권을 쥔) 참사회원이 될 정도의 토지와 개인적으로 문법학자를 두고 자녀를 교육할만한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것은 상당한 수입을 필요로 했다. 정치에 적극 참여한 지주층은 전체 인구의 5%를 넘지 못했을 것이다. 인구의 태반은 아직도 정치참여에서 배제된 농부들이었다. 그들에게 국가는 자신들의 초라한 수확에 세금이나 터무니없이 매기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마라타쿠르레니라는 이름의 산적 때는 제국의 징세원을 가장하여 농부들 재산을 갈취하는 식으로 북부 시리아에서 악명을 떨쳤다. 그들의 행위가 먹혀들었다면 국가의 세금징수가 어떠했을지 조금은 상상이 간다. 제국 인구의 태반은 시스템의 혜택으로부터 베제되거나 혹은 사소한 ㅎ택밖에 받지 못했다, 그것은 로마제국은 언제나 상류층의 이익 위주로 움직였다. 로마제국은 인구의 5%도 안되는 사람들이 부의 80% 아니 그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불평등의 중심에 바로 법으로 지주층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보호해준 중앙정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실제로 로마법의 상당부분은 재산문제에 관련돼 있었다. 기본적 소유권, 소유권의 활용방법(매각, 장단기 임대, 소작을 주는 일 등) 그리고 혼인 재산계약, 상속, 증여 등을 통해 세대 사이에 이루어지는 6재산의 양도 같은 문제가 그런 것들이었다. 서슬퍼런 로마의 형법도 소유권 보호에 단단히 한몫을 하여 좀도둑 이상의 도둑질은 거의 사형으로 다스렸다. 훗날 로마 못지않게 농업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불평등한 토지분배에 기반을 둔 영국의 양반도 이와 비슷했다. 제인 오스틴이 사랑, 결론, 재산 양도에 관한 고상한 소설을 쓸 무렵의 영국도 도둑질한 자는 채찍형(10페니까지) 낙인형(4실링 10페니까지 교수형(5실링 이상)에 처했다.”

 

대체로 국가는 정부기구의 모든 분야에서 속주 지주계급의 행정력에 크게 의존했고 징세문제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세금의 효율적 징수는 지주계급의 세금납부 의지에 달려있었다다.” 무산자들이 막대한 수적 우세의 이점을 누리는 상황에서 모종의 다른 기구가 그것을 막지 않았다면 그 상황은 분명 부의 재분배로 이어졌을 것이다. 4세기에 이 모정의 다른 기구는 지난 몇세기와 다를 바 없이 로마국가였다. 지주들 뒤에는 그들에게 유리하게 법을 집행하여 수적 열세를 만회하게 해줄 능력을 지닌 국가가 버티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지주들이 로마 시스템에 참여한 방식은 조구받기식 등식에 입각한 것이엇다. 지주들이 국고에 돈을 넣어주면 국가는 엘리트 지위의 기반이되는 그들의 부를 보호해주었다. 4세기에는 받는 비율이 주는 비율을 훨씬 웃돌았다.”

 

로마제국은 지주를 위한 지주에 의한 지주들의 국가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전히 4세기까지도 그 시스템은 지주들을 위해 잘 돌아가고 있었고 지주들의 지지는 확고했다. 로마제국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징후는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기독교가 제국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는 관점도 설득력이 없다. 로마제국은 언제나 종교와 이데올로기적 통합을 쉽게 이루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래로 로마 제국주의는 로마야말로 주신들에 의해 세계를 정복하고 문명화할 운명을 지녔다는 일관된 신조를 펼쳐왔다. 신들은 로마제국에 인류를 최상의 상태로 만들라는 사명을 부여했을 뿐아니라 활제를 직접 뽑고 영감을 불어넣는 일에도 관여했다. 국가와 신의 관계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신속히 그리고 놀랄 만큼 쉽게 조정되었다. 그에 따라 로마의 주신은 기독교 신이 되엇고 기독교로의 개종과 구원이 인류가 구가할 최상의 상태로 여겨졌다. 제국이 세상에서 신의 뜻을 집행하는 신의 도구라는 주장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달라진 것은 신의 종류엿다.”

 

저자는 모든 문제는 지정학의 문제였다고 말한다. 동로마에 비해 서로마는 지정학적으로 불리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양제국이 맞닥뜨린 서로 다른 운명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동로마가 소아시아로부터 이집트에 이르는 기다란 띠 모양의 비옥한 속주들을 북동쪽의 침입자로부터 지키기는 어렵지 않았다. 반면에 서로마는 위태롭기 짝이 없는 라인강과 도나우강으로 이어진 국경지역을 지켜야 했다.”

 

그런 조건은 제정 초기부터 같았지 않은가? 문제는 3세기에 지정학적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제국의 기초는 군사력이다. 제국이 건설될 수 있는 것도 제국이 유지되는 것도 제국이 멸망하는 것도 군사력에 달렸다. 군사력이 강하면 제국을 건설할 수 있고 군사력이 충분하다면 제국은 유지되며 군사력이 약해지면 제국은 무너진다. 제국의 운명은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모든 힘이 그렇듯 무력은 상대적이다. 그 무력이 강한지 충분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지정학적 환경이 결정한다.

 

로마의 위기는 3세기에 찾아왔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등장하면서 로마제국의 지정학적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산 왕조으이 탄생은 결코 현대 이라크와 이란 역사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질서가 열렸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사산 왕조의 흥기로 로마는 100년 동안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던 동방에서의 헤게모니를 완전히 상실했다. 로마제국의 전략적 위치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친 것이다. 페르시아의 새로운 초강대국 사산왕조는 3세기에 로마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주저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4세기 로마인들에게 제국의 안전에 가장 큰 위협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두말없이 동방의 페르시아를 지목했을 것이다.”

 

전략적 환경의 변화는 로마제국의 능력을 쥐어짜게 만들었다. “로마는 동방의 적을 상대하면서 제국의 다른 국경들도 방어해야 하는이중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런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군사력 강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4세기 말 로마는 몸집도 불어나고 체질도 바뀐 새로운 군대를 조직햇다.”

 

전략적 환경의 변화는 정치의 중심을 원로원에서 군대와 관료층으로 옮겨놓앗고 정치의 무대를 로마에서 국경에 가까운 변경도시로 옮겨놓았다. “제국의 정치적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곳은 더 이상 로마의 원로원이 아니었다. 제국의 운명은 국경지역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기동야전군의 사령관과 제국 수도의 고위관료들이 좌우했다.” 지정학적 압력이 증가한 결과였다. 군대는 언제나 로마 정치게임에 끼어왔지만 그 비중은 더 높아졋다. “군대와 정치의 놀라운 협조체계는 로마제국의 권력의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그로 인해 군대. 황제, 관료들이 이탈리아를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황제도 여러 명 필요해졋다. 안티오키아와 콘스탄티노플은 라인강 국경지역과 너무 멀고 트리어와 밀라노는 동방과 너무 멀어 황제 한 사람이 3대 국경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다. 징치적으로도 황제가 한곳에서만 부를 베풀어서는 그 많은 군지휘관과 관료들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제위 찬탈의 위험이 상존했다. 3개 지역 군대 모두 황제에게 공정한 떡고움을 기대했다. 따라서 황제 한 사람이 장기간 단독 지배를 하면 반드시 분란이 일어났다.”

 

3세기의 위기로 로마의 정치구조는 급변했고 늘어난 군대와 관료는 제국의 재정에 압박을 가했다. “학자들은 제정 후기 로마군 병력을 40만명에서 60만명 사리오 본다. 그보다 규모를 낮춰 잡는다 해도 3세기 초에서 4세기 중반 사이 로마군은 애초의 30만명에서 10만명이 늘어나 최소한 40만명은 되었을 것이다. 로마의 재정지출 비붕이 가장 큰 항목은 언제나 군비엿다. 따라서 군비가 1/3만 늘어나도 제국이 거둬들여야 하는 세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재정압박에 시달린 제국은 3세기말에서 4세기 초 재정개혁에 들어간다.

 

국가개조의 효과는 그 즉시 나타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3세기 말에 로마는 전략의 안정화를 어느 정도 기할 수 있게 되엇다. 동방전선의 증강된 병력에 급여를 지급할 여력이 생긴 것이다.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가 들어선 뒤로 로마가 재무구조의 안정을 기하는데만 무려 5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또 그 과정을 감독하느라 중앙 행정기구도 몹시 비대해졋다.”

개혁은 성공적이엇다. 개혁 이후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은 저지되었고 동방은 안정되엇다. 그러나 마른 수건까지 쥐어짠 그 개혁으로 제국의 재정력은 한계에 달한 상태가 된다. 한계에 달한 제국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대응할 수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로마의 영토확장은 라텐 문화와 야스트로프 문화라는 두 물질문화권의 중간지역에서 멈추었다., 두 문화는 일반적인 삶의 55ㅓㅇ격에서 몇가지 중요한 차이저을 보였다. 로마에 정복도기 전 유럽의 라텐 문화권은 마을 그리고 도시라고 해도 좋은 그보다 조금 규모가 큰 거주지를 형성했다. 그 문화권의 일부 지역에서는 주화가 사용되기도 했고 문자해독능력을 갖춘 사람도 있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도 그가 정복한 라텐 지역들 가운데 적어도 몇몇 부족 특히 갈리아 남서부 지방의 아이두이족들 사이에 복잡한 정치조직이나 종교조직이 보현화되더 있었다는 내용이 기록돼있다. 이것은 라텐 문화권이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전사, 사제, 장인계급을 부양할 식량생산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와 달리 야스토르프 문화는 낙농업을 영위하며 빠듯하게 살아가는 생활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주화도 사용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문맹이었으며 서기 1세기까지도 번듯한 거주지는 물론 마을조차 형성하지 못했다. 분화된 경제활동이 이루어졌다는 증거도 남아있지 않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통 야스트로프 문화권은 게르마니아와 대체로 일치한다. 이런 경제권에선 투자효율이 절대 좋을 수 없다. 무력은 공짜가 아니다.

 

중국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제국은 농업과 목축을 겸하는 중간지대에서 농업에 의존하여 안정을 기하려는 경향이 짙다. 중간지대의 현지 생산력만으로는 주둔군이 필요로 하는 군량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게르마니아는 정치적으로 심하게 분열돼 있어 로마에 정복된 비옥한 지역의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에서 배제된 것은 군사적으로 강대해서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라텐 문화권과 야스트로프 문화권은 기후학적으로 볼 때 지중해성 기후대와 대륙성 기후대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브라이언 페이건은 로마제국의 팽창과 멸망을 기후대의 변화란 변수로 해석한다.

 

로마는 야만족과의 투쟁과 함께 성장했다첫번째 적은 켈트족이었고 켈트족을 제압하면서 로마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페이건은 켈트족과 로마의 대결을 기후대의 대항으로 해석한다. “켈트족의 농경은 대륙성 기후대에 적합했다대륙성 기후대가 남하할 때 켈트족도 같이 남하했고 로마는 이탈리아로 남하란 그들과 만났다그러나 “기원전 300년경 대륙성 기후대와 지중해성 기후대 사이의 추이대가 이동하기 시작해 지금의 부르고뉴까지 북상했다그 결과 켈트 지역의 남쪽에 온난건조한 여름과 습한 겨울의 지중해성 기후가 자리를 잡았다많은 도시 인구를 위해 밀과 기장 같은 몇가지 작물을 광범위하게 재배하는 로마식 농경은 건조한 남유럽 환경에 매우 적합했다추이대가 북상함에 다라 고마의 힘이 급격히 증대했다. ‘로마의 평화’는 북상하는 추이대를 따라가며 꾸준히 켈트족의 땅을 잠식햇다기원전 2세기 중반 켈트족의 땅은 로마의 속주가 되엇다온난한 기후 조건은 로마 제국의 전성기 내내 지속되었다로마의 장점은 3가지,즉 잘 조직된 군대도로와 해로 같은 기반시설군대와 도시 주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효율적인 농업생산력이었다이집트와 북아프리카를 비롯한 모든 속주들은 로마인들을 부양했다결국 모든 것은 사회의 주식이 된 곡물을 대량생산하는 능력에 달려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국가와 튼튼한 경제에 어울리지 않게 기후에는 놀랄만큼 취약했다문명의 조직도가 낮았더라면 오히려 제국은 기후의 압박을 거뜬히 이겨냈을 것이다일반적인 추위와 가뭄주기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대규모 엘니뇨도 마찬가지였다그러나 유럽의 기후대가 크게 변동하고 그에 따라 기온과 강우량이 달라지자 로마의 지배는 큰 타격을 받았다. 500년에 서유럽의 날씨는 더 추워지고 습해졌으며 갈리아는 곡식의 대량생산이 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다대륙성 기후대와 지중해성 기후대의 경계는 또다시 북아프리카로 내려갔다. (브라이언 페이건)

 

대륙성 기후대의 확장과 함께 그에 맞는 야스트로프 문화권의 게르만족이 남하한 것이라 페이건은 해석한다. 물론 단순히 기후의 변화만으로 게르만족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1세기에서 5세기까지 유럽의 게르만족은 인구는 큰폭으로 증가했다. 인구 규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식량인데 게르만족의 경우 농업혁명으로 곡물생산이 크게 늘어나면서 인구가 증가한 것이다.” 곡물생산의 증가는 다른 경제분야도 촉진해 철의 생산, 도기, 유리, 귀금속 제품 의 생산 등도 증가했다. 4세기 무렵 게르마니아에선 경제혁명이 일어났다고 저자는 말한다. 경제혁명은 사회혁명으로 이어졌다. “게르만 유럽에는 지배적인 사회 엘리트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혁명은 사회적 분화를 촉진했다. “경제혁명으로 창출된 부는 고르게 분배되지 않고 특정 집단에 편중돼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근대의 산업력명이나 최근의 세계화로 창출된 부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부는 집단 사이에 치열한 경쟁을 유발했을 것이다. 또한 그 부가 막대할 경우 그것을 차지한 집단은 기존 권력구조와는 다른 새로운 권력구조를 창출했을 것이다.” 그 결과 정치적으로 사분오열되어 있던 게르만족은 서서히 몇몇 집단으로 통합되어 갔다. “게르만 동부나 서부 모두 새로운 부가 증가하자 종주권을 차지하기 윟나 쟁탈전을 벌였고 그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직업군대도 필요해졋다. 그 과정에서 4세기 게르마니아의 특징인 보다 규모가 큰 정치연합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4세기까지도 게르만족은 위협이 아니었다. 켈트족과 마찬가지로 단합할 줄 모르는 특성때문이다. 고만고만한 크기의 정치연합에 그친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의 시스템에서 병력을 제공하는 동맹자이거나, divide and rule의 전략에 따라 로마의 계략에 따라 자기들끼리 싸우는 장기말일 뿐이엇다.

 

그러나 훈족과 함께 모든 것이 변했다. 동쪽에서 훈족이란 당구공이 날아오면서 하나씩 하나씩 게르만족을 서쪽으로 밀어냈다. 게르만 부족이 하나씩 서로마의 영토로 들어올 때마다 제국은 납세자들이 학살당하고 농토가 황폐화되어 세입을 잃었고 게르만족이 영토를 차지하면서 납세자를 뭉텅이로 떼어주어야만 했다.

 

로마가 상대해야 했던 외부의 무장세력은 총 11만에서 12만명 정도였다. 이 외부침입자들이 불러일으킨 원심력 때문에 5세기 말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 신생왕국으로 하나둘씩 분열돼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세력을 개별집단으로 헤아려보면 각 집단의 병력은 수십만명이 아닌 수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전혀 압도적 병력이 아니다. 375년 서로마는 적어도 30만의 병력은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면에서는 그것이 바로 서로마제국 붕괴의 실상을 보여주는 요소가 될 수있다. 서로마제국은 13세기 몽골족의 침략을 받은 중국과 달리 한순간의 정복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만족들은 당초 자신드르이 정주지를 세울 정도의 군사력만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 점차 세력을 키우면서 로마제국의 힘을 소진시켰고 그로ㅓ부터 독립왕국을 수립하는데는 적어도 2-3세대의 기간이 걸렸다.”

 

로마제국은 일시적인 상실이거나 영구적 상실이거나에 상관없이 영토를 잃을때마다 국가의 생혈인 세수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그에 따라 제국이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역량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렇게 서서히 제국은 말라죽어야 했다.

 

동로마는 서로마가 그냥 죽게 놔두지는 않았다. 40%의 병력을 항시 페르시아 전선에 묶어두어야 하고 그외의 변경도 방어해야 하는 형편에서도 할 수 있는 지원은 모두 할만큼은 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서로마를 지키기엔 턱없이 부족햇다. 4세기에 이미 한계까지 올라간 재정부담은 서로마는 물론 동로마의 발목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한계는 제국 붕괴에 필요요건은 될 수 있을지언정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5세기 서로마제국은 만족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제국이 흔들리자 제국의 기둥인 속주의 지주들 또한 불편한 진실에 맞닥뜨려야 했다. 국력의 약화는 그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기득권을 위태롭게 했다. 토지에 기반을 둔 지주들로서는 새로운 지배세력과 손을 잡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한 도모할 수 있는 길이었다.”

 

로마에 이어 유럽에 등장한 제국, 즉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제국이 9세기 말에 붕괴하는 과정은 서로마제국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카롤링거 왕조의 위대한 정복이 이루어진 뒤에도 항상 재원부족에 시달렸고 그런 상태가 2-3세대 넘게 지속되었다. 프랑크 제국은 특히 서로마제국을 500년동안 떠받쳐준 요소였던 재분배적 과세권을 결코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지방 엘리트들의 지원을 얻는 일에 중앙의 돈을 스게 되어 국가재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 결과 지방엘리트들은 프랑크 제국 수립 후 100년만에 자치를 도모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때로는 격렬한 투쟁 없이도 그것이 수월하게 얻어졌다. 몇세기 동안 보유했던 조세기반을 외부세력에게 빼앗긴 서로마제국과 달리 프랑크 제국은 통제할 자산이 처음부터 적었기 때문에 재정의 파탄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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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거품 | 경제경영 2012-04-16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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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중국경제의 진실

셰궈중(앤디시에) 저/홍순도 역
지식트리 | 2012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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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성공비결은 간단하다. “가격경쟁을 통해 OEM 시장 점유율을 늘리는 것이다. 대량의 잉여 노돌력, 낮은 임금 밎 풍부한 에너지, 저렴한 공업용지 및 환경을 무시한 원가 등은 중국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미국이 창출하는 부는 혁신에 의한 것이 많다. 결코 자본 누적에 의한 것이 아니다. 또한 미국 기업은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해 세계적 범위에서 생산과 판매의 최적화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S&P 500 지수 통계에 잘 나타난다. 통계를 보면 미국 상장기업 수입 중 50%는 해외 시장에서 거두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과 완전히 반대의 경우에 속한다. 중국은 여전히 자본축적과 취업확대를 통해 부를 창출한다. 예컨대 다국적기업이 생산라인을 중국으로 얾겨 낮은 인건비와 인프라건설의 혜택을 볼 때 중국은 더욱 많은 수입을 올린다. 휘업률 역시 상승한다. 중국의 발전 전력은 이처럼 간단하다.”

 

간단하게 말해 중국은 세계의 공장, 즉 하청공장이었기에 성공했다는 말이다. 하청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다. 무조건 싸야 된다. 물론 저임금이라면 중국이 최고는 아니다.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중국은 지속적으로 고속도로, 정보통신, 전력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네트웤이 구축되면서 생산 원가는 더욱 낮아졌고 생산 효율 또한 크게 업그레이드되었다. 한마디로 인프라 건설의 발전은 저임금과 마찬가지로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지탱한 요인이다.”

 

그러나 이제 한계이다. 저임금도 이젠 옛말이다. 게다가 왠만한 인프라는 다 갖춰졌기에 더 이상 원가절감의 효과도 없다. “지난 10년동안 중국의 주요 생산 요소 즉 노동력과 원재료, 토지, 환경통제, 세금 등의 원가는 모두 증가했다. 특히 노동자들의 임금과 원자재 가격은 두배 이상 증가했다. 아시아 금융위기 이전 중국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은 동남아 국가 노동자3들의 절반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의 두배나 된다.”

 

그러나 저가를 내세운 하청 외에는 별다른 재주도 없다. “대다수 중국의 수출 기업들은 원시적 시설의 생산자들이다. 저렴한 가격을 토대로 한 경쟁을 통해 수출 오더를 받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은 최종소비자와 접촉도 하지 못한다.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에 독립적 생존 역시 어렵다. 다국적 기업의 부속 공장 역할에 만족할 뿐이다. 그러므로 중국 기업들은 자신드르이 고객인 다국적 기업들과의 현상 때에도 불리하다. 원가가 상승할 때 다국적기업들은 생산업체들이 절감된 원가를 받아들이도록 압박을 가한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될 경우 주욱ㄱ의 수출기업들은 도산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기업들의 어려움은 주가에 잘 반영되고 있다. 2006년과 2007년 홍콩에 상장된 중국 수출 기업들의 주식은 이미 50%에서 80%까지 하락했다. 사실 이런 주식들은 과거에도 오른 적이 없다. 금융시장은 이미 이런 기업들의 경영모델이 더 이상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저자는 앞으로 과거와 같은 두자리 수 성장은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 본다. “향후 10년 동안 중국 수출의 연간 성장률은 6% 내지 8%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 모든 요인들에도 역전 현상이 일어나 고속성장을 유지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저자는 경제모델을 수출에서 내수로 바꿀 때라고 말한다. 저자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정부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문제는 정부의 대책이 대규모 경기부양이라는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현재 중국은 유동성으로 경제를 이끈다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이로 인해 유동성이 기업과 정부 부분에 대대적으로 흘러들어가고 잇다. 효율이 어떠하든간에 적극적인 소비증가가 경제를 회복시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중국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가 다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2010년의 성장세가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으로 본다. 경제 자극 정책이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때 2차로 경제가 바닥을 치는 상황은 2012년에 나타날 것이다.2010년의 성장세가 경제 자극 정책과 상대적으로 비교적 낮은 금리 때문에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극 정책의 힘을 고려해보면 경제회생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금융위기가 보여준 구조적 문제는 자극 정책으로 해결될 수 없었다. 그저 은폐되었을 뿐이다.” 결과는 고물가 저성장의 스태그플레이션이 될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문제는 대량으로 풀린 돈이 생산적인 곳이 아니라 부동산 투기로 몰려갔다는 점이라 저자는 말한다. 이는 중국 경제구조를 취약하게 만들고 장기적으로도 악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라 저자는 말한다.

 

우선 부의 불평등을 더욱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사회가 안정된 국가의 부동산 시세는 연소득의 약 8배 정도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에서는 이 비율이 15배에서 심지어 20배에 이른다.” 이건 분명한 거품이다. 이 정도로 거품이 부풀 수 있었던 것은 토지가 정부 소유라는 점이 크다고 저자는 말한다. “지방정부 재정 수입이 토지 매매 수입이나 부동산 세수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 부동산을 건설하거나 판매하는 과정에서 토지세가 부동산 총 거래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거품 이전에 소득 재분배 측면에서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주택 구입자들은 일반적으로 중산층으로 봐야 한다. 만약 이들이 주택 구입에 모든 수입을 쏟아 부을 때 사회경제적 지위가 하락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한 높은 집값은 부의 양극화를 초래해 부자와 가난한 자는 늘되 중산층의 규모는 작아져 매우 불안한 사회구조가 된다.” 이는 내수성장모델로의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부정적이다. “높은 부동산 가격을 비롯해 자동차 가격과 소득세는 떨어질 기미가 없다. 중국의 정책은 소비자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출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소비의 위축이 초래됐다고 불수 있다.”

 

단기적으로도 문제는 심각하다. “현재 중국 경제의 최대 위험은 고성장을 위한 부동산 투자 정책이다. 부동산은 생산성 자산이 아니다. 부동산의 단기적 성장은 장기적인 경제성장을 희생으로 지탱하는 것이다. 그 자본의 ㅍ평균 생산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락할 수 밖에 없다. 중국 지방정부의 업적은 주로 GDP와 재정수입으로 대표된다. 부동산 개발은 지방정부를 도와 이 두가지 지표가 신속하게 성장할 수 있게 한다. 이 경우 부동산의 가격과 총면적은 빠른 속도로 성장한다. 부동산 산업이 자본의 분배에 미치는 영향력과 점유율 역시 크게 늘어난다. 이는 한마디로 정치적 요인으로 초래되는 거품이다. 부동산으로 시작된 경제성장 거품은 대단히 방대하기 때문에 개선하기도 어렵다. 지방정부에 대한 평가 메커니즘의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향후 2년 동안 자산거품은 더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될 가능성이 높다. 거품은 2012년에 터질 개연성이 높다. 이때가 되면 중국 사회와 정치적 안정이 크게 위협을 받을 것이다.”

 

지방정부들이 부동산거품을 조장하는 이유는 재정수입 때문이기도 하지만 금융위기 이후 제조업체들의 부진때문이기도 하다. “원가상승과 수요의 위축은 제조업의 이윤을 감소시킨다. 자본투입역시 느슨해지고 있다. 이것은 설비 수입의 속도가 완화되는 현실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대다수 지방정부들은 부동산을 경제성장의 구세주로 여긴다. 과잉자본 역시 부동산 시장에 투자하고 있다.”

“’공장이 이윤을 내지 못한다. 부동산에 투자하는 수 밖에 없다. 부동산 투기는 많아야 30%의 손해를 볼 뿐이다. 그러나 시장은 그보다 더 불확실하다. 최악의 상황이 오면 주택을 은행에 넘겨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주식은 다르다. 잘못화게 되면 70-80%의 손해를 보게 된다.’ 그때 만난 적지 않은 기업가들이 내 친구와 비슷한 말을 했다. 자본이 제조업에서 유실돼 부동산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현재 중국 거품의 중요한 원인이다. 현재의 부동산 구매 열풍은 2009 3월부터 시작됐다. 대체로 중국 자체 정책으로 조성된 열풍이다. 여기에 달러 약세는 자본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주고 있다. 자본 이윤으로 자산 거품을 부추기는 것이다. 자본이 제조업으로부터 부동산으로 흘러가면서 인플레이션 관()에 마지막 못질을 하고 있다. 매우 낮은 영업이익과 계속 상승하는 부동산 가격으로 인해 제조업체들은 투자를 줄이고 있다. 장기적으로 보면 과잉생산으로 억제하고 잇는 인플레이션은 점차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거품경제 하에서의 자원은 더욱 많은 거품을 재생하는데 이용된다. 이런 자원은 완전히 허공으로 사라져버린다. 시간과 노력을 투기 시장에 쏟아부으면 결론은 뻔하다. 향후 중국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회사를 소유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중국은 지난 30년동안 고속성장을 이뤄왔으나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한 기업은 극히 적다.”

 

그리고 거품이 꺼질 시간은 그리 멀지 않앗고 말한다. “빠르면 2012년 인플레이션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이 경우 미국 연준은 금리를 신고하게 인상할 것이다. 만약 중국이 부동산 시장 지탱을 위해 금리를 올리지 않는다면 자금은 중국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은행은 유동성 위기에 직면하고 금리는 최종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즉 중국의 부동산 거품은 2012년에 붕괴될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다.”

 

저자는 대책으로 우선적으로 금리를 대폭 올리고 필요하다면 위안화를 대폭 평가절상해아 한다. 만약 소폭 평가절상을 자주 단행한다면 부동산 거품과 인플레이션 압력을 더욱 가속화시켜 심각한 경제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중국의 GDP를 상기할 경우 이 거품은 미국의 부동산 거품보다도 더 심각하다. 나는 현재의 중국무역 흑자가 절대로 위안화의 저평가 때문에 초래된 결과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곡된 국내의 물가 시스템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 예를 들어보자. 성숙한 경제체제에서 부동산 가격의 상승은 소비를 촉진한다. 대부분의 중산계급은 대체로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잇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다르다. 이 때문에 중국의 부동산 거품은 소비를 억제한다. 국내 소비가 축소된다는 것은 무역 흑자를 낼 가능성이 높다. 또 중국의 중산계급에게 상품이나 서비스의 가격은 대단히 높다. 자동차의 가격은 중국산이라도 국제가격과 비슷하다. 만약 수입차라면 가격은 두배가 되낟. 그러나 중국 중산계급의 수입은 고작 선진국의 20-30%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중산계급은 세금부담 역시 대단히 높다. 최고소득세율은 45%에 이른다. 이외의 소득세율 역시 17%. 이 세금은 투자로 이어진다. 따라서 과중한 세금은 소비를 억제한다. 그렇다면 중국의 부동산 가격과 소비 가격 세율이 국제평균수준으로 떨어질 경우 중국은 무역 흑자 기조를 이어갈 수 있을까? 만약 대답이 부정적이라면 정확한 정책은 가격을 조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환율을 조정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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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시간 | 인문/사회/역사 2012-04-1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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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페르낭 브로델 저/김홍식 역
갈라파고스 | 2012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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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의 대상은 무엇인가?’ 브로델의 경력은 이 질문과 함께 시작했다. 아날 학파 이전까지 역사학의 대상은 사건들이었다. 브로델은 정치와 외교를 비롯한 사건 중심의 역사를 고집하던 기성 소르본학파에 강력하게 반발했고 그의 휘하에 젊은 역사학도들이 모여들어 아날학파 2세대를 형성했다. 브로델은 사건이 아니라 구조 즉 장기지속을 역사학뿐 아니라 모든 사회과학 방법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로델은 역사를 시간지속의 변증법이라 표현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과 천천히 흐르는 시간, 이 둘 사이에는 활발하고 밀접한 대립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우리 역사가들이 보기에 이러한 대립이야말로 사회적 실재의 핵심에 존재하며 다른 어느 요소보다도 중요하다. 우리의 세계를 파악하려면 세계를 움직이는 갖가지 힘과 조류, 움직임의 계층적 질서를 정의;해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합쳐서 다시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연구하는 각 순간마다 오래 이어지는 움직임과 짧은 움직임을 구분해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역자는 이렇게 풀이한다. “과거의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생기면 오랜 시간 관성을 얻은 힘과 새로 등장한 힘 사이에 충돌과 반목이 생기기도 하고 절충과 타협이 일어나기도 한다. 옛것을 유지하려는 힘은 긴 시간대의 힘이라 볼 수 있고 새것으로 바꾸려는 힘은 짧은 시간대의 힘이라 볼 수 있다.” 역자는 이런 예를 든다. “쓰레기를 분리수거한지는 얼마 되지 않으니 재활용 기준에 다라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은 짧은 시간의 힘이고 아무렇게나 버려 한꺼번에 매립하는 것은 오랜 시간의 힘이다. 한동안 분리수거 체계가 확대되는 듯하더니 얼마전부터 각 생활거점에서 분리수거한 쓰레기들도 중간처리과정에서 다시 섞여 매립장으로 간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처음에는 짧은 시간의 힘에 밀리는 듯했던 오랜 시간의 힘이 다시 승리하는 형국이다.”

 

브로델은 이렇게 역사를 시간의 지속에 따른 레이어로 나눠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통 우리 눈에 잘 띄고 우리의 관심이 쏠리는 대상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새로운 것들, 즉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브로델은 그러한 단기적 시간대에 주목하는 역사를 표층의 역사라 본다. 그러나 이 세계의 배후에는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장기지속하는 심층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고 본다.” ㅜ심층의 역사는 밑바닥에서 표층의 역사를 떠받치고 또 제약하면서 천천히 밀고 나가는 육중한 힘을 행사하는 실체라고 브로델은 생각한다.”

 

브로델이 말하는 심층의 역사는 아날 학파에서 장기지속이란 말로 통일되어 쓰인다. 장기지속은 사회과학에서 흔히 말하는 구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브로델이 말하려는 것은 어떤 시스템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것은 무언가의 결합이고 건축물과 같은 모습이겠지만 그보다는 시간이 흘러도 마모되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는 무언가의 실재를 뜻한다.”

 

브로델은 표층을 조건짓는다는 의미에서 심층을 장기지속하는 감옥이라 부르기도 한다. 심층이 구조와 다른 점은 시간만이 아니다. 브로델이 말하는 심층은 기든스 말하는 practical consciousness와 비슷하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수천 가지에 달하지만 아무도 결정할 필요없이 그것들 스스로 완수된다. 사실 이러한 일상적 관행은 우리가 충분히 의식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내 생각에 인류의 삶은 절반 이상이 일상생활에 묻어서 굴러간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수없이 많은 행동이 뒤죽박죽 누적되고 무수히 되풀이되면서 우리 시대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습관적 행동은 우리가 삶을 영위하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옥죄기도 하면서 우리가 사는 내내 우리를 대신해 결정한다.”

 

기든스는 무의식이란 용어를 재정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실상 우리가 무의식이라 부르는 것은 자동화된 루틴을 말한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핸들을 돌리고 브레이크와 액셀을 왔다갔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운전하면서 의식하는 것은 전화도 받고 잡담도 하고 음악도 듣는 의식의 표층에 떠있는 행동들이다. 그러나 갑자기 핸들이나 브레이크가 이상할 때 의식(discursive consciousness) 아래에 가라앉아 스스로 돌아가던 운전 루틴이 의식의 표층에 떠오른다. 일상어법에서 무의식이라 부르는 것들은 대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의식 표층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기든스는 이것과 (의식으로 떠올릴 수 없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구분하여 불러야 된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기든스는 사회과학에서 구조라 부르는 것들이 자리잡는 곳이 바로 그가 practical conscioussness라 부르기를 제안한 곳이라 말한다. 그가 구조라 부르는 것은 시스템과 다르다. 시스템은 지금 여기에 실제하는 것이며 구조는 그 시스템을 짜기 위한 재료에 가깝다. 그가 구조라 부르는 것은 소쉬르가 말하는 langue에 가깝다. 언어의 통사, 음운구조, 의미론들이 그렇듯, 기든스가 말하는 구조는 역사적으로 켜켜이 쌓인 시간위에 형성된다.

 

브로델이 장기지속을 심층 또는 무의식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기든스와 비슷한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가 심층, 무의식으로 부르는 것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오래된 것들이 많다. 이처럼 수백년 전의 과거는 아주 오대된 것이지만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현재로 흘러온다. 마치 아마존 강이 엄청난 물줄기에 토사를 실어 대서양으로 쏟아내는 모습과 비슷하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물질생활이란 편리한 용어로 파악하려는 내용이다. 물질생활은 인류가 이전의 역사를 지나오는 동안 자신의 삶 아주 깊숙한 곳에 결합ㅎ해온 것이다. 마치 우리 몸속의 내장처럼 깊숙한 곳에 흡수되어 잇는 삶이다. 그래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게 된다. 이것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권을 써나가는 길잡이다.”

 

여기서 브로델이 말하는 심층으로서의 물질생활은 기든스가 구조에 대해 말하듯 이중성(duality)을 갖는다. 하나는 조건으로서 구속하는 의미, 둘째는 구조 자체를 만들어내고 또 움직이는 거대한 동력을 뜻하는의미이다. 역자는 이렇게 말한다. “’장기지속은 곧 구조를 뜻한다라고만 아해하기 곤란한 딜레마 같은 것 있다. 오랜 세월의 무게가 누적되어 형성되는게 구조라면 그 런 구조를 만들어내는 오랜 세월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 세월의 무게와 그로부터 형성된 구조가 아무리 무겁고 단단하더라도 세대를 거듭하는 긴 시간대의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역사를 창조하는 원동력은 어느 한두 세대의 행위나 그들이 처한 조건을 뛰어넘는 훨씬 장기적이고 심층에 있는 힘에서 비롯된다는 말로 읽힌다.”

 

역자는 장기지속에 한가지 의미가 더 있다고 말한다. “브로델은우리는 심층의 역사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단지 우리의 생각으로 비추어 볼뿐입니다.’라고도 말한다. 장기지속이라는 개념은 역사를 기술하는 내용이나 결과라기보다는 역사를 기술하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 또 한 그러한 방법으로 찾을 수 잇는 여러가지 비체계적인 재료를 가리키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무언가의 구조랄지 어떤 역사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듯하낟. 오히려 그렇게 찾아낸 여러가지 재료에서 읽어내야 할 과제가 구조나 법칙이 될 것이다.”

 

여기서 브로델은 베버의 이념형을 도입한다. “그의 핵심논지는 이 세상에 언제 어디서나 즉 시공을 초월해 적용가능한 보편타당한 모덿은 없다는 것이다. 즉 모델은 관찰자가 눈여겨본 사회 환경에서 추출한 실재를 반영해 만든 일종의 가설이고 설명체계인데 다른 시간과 공간에 얼마나 잘 적용되는지 시험해봐야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모델을 배에 비유하는 브로델은 일단 모델이라는 배를 만들면 역사적 시공의 물줄기에 띄워보는 시험항해를 한다고 말한다. 시험항해란 모델이 상정하는 실재, 즉 사료를 찾아 검증하는 일이다. 여기서 브로델은 역사적 시공의 구체성에서 이탈하는 보편타당한 모델을 배격함과 동시에 어느 정도 장기적인 연속성을 찾아 나서지 않고 단기적 사건에만 주목하느 태도도 배격한다. 브로델은 모델의 내용보다 모델을 활용하는 방법을 중시했다고 볼 수 잇다. 또 모델과 사실 사이의 지속적인 왕래를 위해 정밀한 개념의 모델보다는 되도록 많은 사실을 담아 비교해볼 수 있는 다소 느슨한 모델을 역사서술의 준거로 삼았다고 이애할 숭 ㅣㅆ다. 브로델이 역사 기술에 활용하는 모델들이 엄밀한 개념 정의 면에서 느슨한 혹은 과소결정된 것들이라는 점을 알아두는 것은 분량이 엄청난 그의 저서를 읽어나갈 때 유용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15-18세기 서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이 시공속에서 자본주의란 것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브로델은 두개의 모델을 시험한다. 첫째는 물질생활-시장경제-자본주의란 삼층집 모델이다. “브로델은 물질생활을 물질문명이라고도 표현한다. 이러한 삶의 차원들은 아무 말 없이 저절로 굴러가는 듯하지만 이것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토대이다. 또 아주 오랜 세월동안 장기지속하면서 형성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삼층집에서 일층에 위치함은 바로 그런 의미다. 물질생활은 거의 다 자급자족에 가까운 사용가치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브로델은 자급자족에서 탈피해 교환가치의 문지방을 넘으면서부터 경제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물질생활의 거대한 등판을 딛고 경제생활이 시갖된다. 여기서부터 삼층집의 일층 위로 이층이 올라서기 시작한다.”

 

브로델이 말하는 경제생활은 교환의 세계란 제목의 2권에서 다뤄지는 내용이다. 그 내용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시장과 그리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브로델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다르다 본다.

 

역자는 처음엔 브로델이 경제생활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라는 두층으로 나눤다고 본 것같다고 한다. 그러다 경제와 시장경제를 같은 것으로 보고 자본주의는 별개의 한층으로 본 것으로 생각이 바뀐 것같다고 생각한다.

 

시장경제와 자본주의가 다른 이유로 브로델은 중국을 예로 든다. “기초적 시장 단계에서 가장 놀라운 형태로 시장을 조직한 곳은 분명 중국이다. 시장이 거의 수학에 가까울 정도로 정확한 지리에 바탕을 두고 조직되었다. 가령 장이 서는 읍내나 작은 도시를 백지 위에 찍은 점이라 치면 그 주위로 뺑 돌아가며 여섯에서 열개의 마을이 위치한다. 이 마을들은 모두 농부가 읍내 시장에 갔다가 당일 내에 돌아올만한 거리에 자리잡고 잇다. 윌리엄 스키너는 중국농총의 생존을 결정하는 곳은 촌락 자체가 아니라 촌락을 아우르는 시장권이라고 했는데 옳은 지적이다. 이와 같은 읍들도 도시를 적절한 거리에서 감싸며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도시의 위성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브로델은 중국은 자본주의가 없었다고 말한다. 교환의 상층이 없었기 때문이다. 브로델이 말하는 자본주의는 이 교환의 상층이다.

 

“18세기까지 시장경제자본주의이 두형의 활동은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그 무렵까지 인류가 영위하는 생활의 대부분은 여전히 거대한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생활속에 잠겨 있었다.” 자본주의라는 실재는 화려하고 섬세하지만 비좁은 층위에 속해 있었고 경제샐활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했다.” 그 뿐 아니라 보통 상업 자본주의라 일컫는 구체제하의 자본주의는 시장경제 전체를 장악하지도 못했고 마음대로 주무르지도 못했다.”

 

브로델은 삼층집 모델을 이렇게 묘사한다. “시장경제는 그 본성상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역할에 불과하니 전체를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19세기 이전에는 광대한 일상생활의 대양이 아래쪽에서 시장경제를 떠받치고 있었고 자본주의 메커니즘은 두번에 한 번 정도의 빈도로 위쪽에서 시장경제를 조작햇다. 즉 시장경제는 이 두층 사이에 끼어 있는 하나의 층에 불과했다.”

 

그러면 왜 브로델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나누어 보는가? 그 이유는 자본주의가 반시장적이기 때문이라 브로델은 말한다.

 

시장에서의 거래는 투명해서 놀랄만한 사태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시장에 참여하는 사람들 각자가 거래에 관한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잇고 이익도 항상 왠만한 정도엿기 때문에 사전에 개략적인 계산이 가능했다. 읍내에서 열리는 시장이 이러한 교환의 좋은 사례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거래는 다르다. “중개인이 끼어들게 된다. 이 중개인은 기회를 노렸다가 상품을 사재기하고 재고 물량을 조작해서 시장을 교란하거나 지배하고 가격에 영향을 미쳤다.”

 

브로델은 교환의 세계는 수직적 위계로 나뉘어진다고 본다. “대체로 아래층에 속하는 동네에서는 시장경제의 모습처럼 투명한 경쟁이 이루어진다. 그 수직 사다리의 위로 올라갈수록 이러한 시장경제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교환의 영역이 펼쳐진다는 것이 브로델의 논점이다. 이 상층영역에서는 소수의 덩치 큰 선수들이 영악한 술수와 힘을 휘드르며 법규와 규볌을 우회하거나 무시하고 높은 이익을 독차지한다. 브로델은 경쟁의 힘이 작용하지 안ㅇㅎ는 이 별세상 같은 교환의 상층부를 반시장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영역의 활동을 도저히 시장경제로 봐줄 수도 없고 경쟁과 규범이 아니라 독점과 지배가 힘을 행사하는 곳이니 시장경제와는 정반대라는 이야기이다. 바로 이 영역이 예나 지금이나 산업혁명 이전이나 이후나 자본주의란 실체가 존재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브로델이 자본주의라 부르는 곳에선 소의 시장경제의 핵심법칙인 경쟁이 별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다음로 상인이 누렷떤 두가지 이점을 들 수 잇다. 하나나는 상인이 끼어들면서 생산자와 최종적인 상품 수요자의 관계가 끊어짐에 따라 시장의 양쪽 사정을 다 아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상인이 이득을 볼 가능성이 많았다. 다른 하나는 그의 주된 무기인 현금이 항상 수중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생산과 소비 사이에 기다란 상거래망이 형성된다. 이러한 상거래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분명히 그 효율성 덕분이엇다. 특히 대도시에 물자를 공급하는데 효율적이었고 그 덕분에 정분에 정부 당국의 양해를 얻거나 적어도 규제를 느슨하게 풀어주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거래 경로가 아주 먼 장거리로 늘어날수록 그만큼 통상적 규제와 간섭에서 벗어나기가 더욱 쉬워졌고 자본주의적 과정이 더욱 선명하게 발생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과정은 원거리 무역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원거리 무역은 원하는대로 활동할수 있는 자유공간 그 자체였다.” 자유공간은 초과이윤의 공간이었다. “이처럼 두둑한 이익에서 상당한 규모의 자본이 축적된다. 특히 원거리 무역은 소수의 사람들만 참여했으니 자본축적이 빠르게 진행됐다. 이런 사업에는 아무나 참여할수없었다. 이슬람 세계에서든 기독교 세계에서든 이러한 자본가들이 군주와 가까운 사이였고 국가에 협조하면서 또 국가를 이용하는 존재엿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들은 오래전 아주 일찍부터 국가의 경계를 넘어섰고 해외 상거래 중심지의 상인들과 손발을 맞추며 거래했다. 또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게임을 왜곡할 수천가지 방법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이들은 지식, 정보, 문화 면에서 누리는 우위를 바탕으로 주변에서 값나가는 것이면 무엇이든 장악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진보의 동력이라 볼 수 없다고 브로델은 말한다. 오히려 모든 것이 물질생활의 거대한 등판을 딛고 서 잇다. 물질생활이 팽창하면 모든 것이 앞으로 나아간다. 시장경제는 물질생활을 희생시키면서 그 자신은 빨리 팽창하고 또 자신의 관계망을 확장한다. 이렇게 시장경제가 팽창할 때 자본주의는 항상 이득을 본다. 나는 기업가를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해결사인 양 내세우는 슘페터의 생각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은 어디까지나 결정적인 것은 전체의 운동이며 자본주의는 어떤 형태의 것이든 간에 우선은 그 밑에서 받쳐주는 경제를 바탕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제국시대 중국정부들이 자본주의를 용인하지 않았고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없엇던 이유가 분명해진다. 독점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며 그것은 힘의 논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국가와 한 몸을 이룰 때에만 즉 자본주의가 국가가 될 때만 승리한다.” 자본주의는 권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권력이 될 수 없을 때 자본주의는 성공할 수 없다. “명나라와 청날 때의 중국이 그러한 경우이다. 중국만큼 선명하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구체제의 프랑스 왕정도 그러한 경우이다. 프랑스 왕정은 상인들에게 특권적 역할을 주지 않았고 귀족으로 구성되는 지배적 위계를 가장 중시했다.”

 

자본주의가 권력현상이라는 것은 부르주아지의 역사 자체가 증명한다고 브로델은 말한다. “서구에서 개인이 홀로 성공하는 경우가 드물지는 않았지만 역사는 똑 같은 교훈을 되풀이해 보여준다. 즉 개인의 성공은 언제나 악착스럽게 재산과 영향력을 야금야금 키워가는 신중하고 세심한 가문의 자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재산과 권세가 축적되는 과정을 눈여겨보면 유럽에서 봉건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넘어가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봉건체제에서는 영지를 차지하는 영주들의 가문이 혜택을 누렷다. 가장 기본적 재산인 토지를 봉건 영주들끼리 나워 갖는 것이 부를 안정적으로 할당하는 형태이기도 했고 봉건 사회의 맥락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방편이기도 햇다. 부르주아지는 수백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특권계급에 붙어 기생했다. 그들 가까이에 서식하면서 그들의 실수와 사치, 게으름과 어리석음을 이용해 이 특권계급의 재산을 빼앗아간다. 그러다 결국 그들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스스로 특권계급이 된다. 이러한 유형의 사회는 봉건 사회에서 싹트기 시작해 여전히 절반은 봉건적인 채로 남아있기 때문에 소유권과 사회적 특권이 비교적 잘 보호되기 마련이다. 그만한 지위에 오른 가문들은 비교적 별 탈 없이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소유권은 신성불가침으로 취급된다. 그래야만 화폐경제를 배경으로 자본주의가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유럽을 벗어나면 그런 특권의 안정성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엿다고 브로델은 말한다. 중국의 경우는 과거제도 때문에 특권계급의 문호가 열려 있었고 사회적 이동성이 훨씬 컸다. 특권계급이 되면 재산을 모으게 되지만 그 재산이란 것 유럽에서처럼 커다란 가뭊ㄴ을 일으킬 만한 것은 되지 못했다. 더욱이 재산이 아주 많거나 권세가 큰 가문은 원칙적으로 국가의 감시를 받는 표적이 되엇다. 국지적으로 상인과 부패한 관리가 공모하는 일이야 늘 있었지만 중국의 국가는 언제나 자본주의 확산에 적대적이엇다.중국의 진정한 자본주의는 중국 밖에서만 존재했다. 예를 들어 동남아 군도에서는 중국 상인이 완전히 자유를 누리며 행동하고 군림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는 수직적 위계를 필요로 한다. 즉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성공하려면 일정한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자본주의에 필수불가결한 그 사회적 조건이란 사회적 질서가 어느 정도 안정적이어야 하고 국가가 자본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중립적이거나 아니면 허약하거나 호의적이여야 한다. 긴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밤의 손님이다. 모든 것이 다 갗춰졌을 때 자본주의가 당도한다. 달리 말하면 수직적 위계라는 문제 자체는 자본주의 너머의 문제이고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문제이며 자본주의가 출현하기에 앞서 존재하며 자본주의를 통제한다.”

 

이렇게 본다면 맑스주의자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당신이 자본주의라 부르는 것은 생산양식인가?” 브로델은 자본주의란 용어 자체를 마지 못해, 달리 쓸 말이 없기에 쓸 뿐이다. 아마도 그런 물음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대답을 한다면 자본주의는 자신의 고유한 요소들을 스스로 번식해가는 독자적인 생산양식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역자는 그말을 이렇게 풀이한다. “브로델은 자본주의라는 것은 생산양식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밖에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브로델 식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생산양식의 바깥보다는 위에 존재하면서 생산양식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존재. 즉 그가 말하는 최상층의 존재일 것이다. 따라서 브로델은 19세기 들어 자리를 잡은 산업자본주의가 진짜 자본주의이고 이전의 상업자본주의는 가짜 자본주의라고 생각하는 시각에 반대한다. 상업자본주의가 아닌 자본주의는 없었으며 19세기 이전이든 이후이든 19세기 중에든 금융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 상업자본주의는 늘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 말한다. 어디에서 높은 이익이 생기느냐에 따라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우선적 분야나 투자가 변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3층집 모델을 지리적 공간에 횡적으로 펼치고 그 공간에 중심부-중간부-주변부라는 계층적인 지배-종속 관계를 더하면세계-경제(World-economy 역자는 경제계란 번역어를 제시한다.) 모델이 된다. “중심부에도 자본주의-시장경제-물질생활의 삼층집이 있고 중간부와 주변부에도 각각 삼층집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브로델의 논의를 따라가보면 결국 중심부의 최상층에 위치한 자본주의가 경제계 전체를 조직하는 힘을 발휘화는 곳이 된다.”

 

삼층집 모델과 경제계 모델로 자본주의의 역사를 살펴본 후 브로델은 자본주의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로 세가지이다. 첫째 자본주의는 여전히 국제적 자원과 기회를 활용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는 세계적인 차원과 세계적인 규모에서 존재한다. 적어도 세계 전체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현재 자본주의가 처한 커다란 관심사가 무엇인가? 바로 이 세계주의의 판을 다시 짜는 것이다.

 

둘째 자본주의는 법에 근거한 것이든 관행에 근거한 것이든 여전히 독점에 의존한다. 독점이라는 문제를 놓고 격렬한 반대가 빗발쳐도 자본주의는 집요하게 독점을 유지한다. 조직이 여전히 시장을 우회하고 있다는 말이 오늘날에도 들여온다. 이런 문제가 정말로 새로운 사실이라고 여긴다면 잘못된 것디다.

 

셋째 사람들이 늘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자본주의는 결제 전체와 사회적 노동 전체를 포괄하지 못한다. 자본주의는 결코 자신의 완벽한 시스템 속에 이 두 가지-경제 전체와 사회적 노동 전체-를 다 주워 담지 않는다. 앞에서 물질생활과 시장경제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로 구분하는 삼중 구조를 제시했다. 이 모델은 서로 다른 것을 구분하고 설명하는 놀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에 대한 브로델은 총평은 이러하다. “최악의 오류는 자본주의를 경제 시스템이라고만 여기고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사회질서를 이용해 생존하고 애초부터 육중한 상대자였던 국가와 대등한 지위에서 맞서기도 하고 공모하기도 하는 존재이다. 또 사회구조를 지탱해주는 문화의 역할도 이용한다. 소수의 특권으로서 존재하는 자본주의와 사회와 능동적으로 공모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사회질서의 한 실재이고 정치질서의 한 실재이기도 하며 문명의 한 실재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경제 영역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특수한 형태이다. 그 실체는 인접한 영영과 그 영역들에 침투한 모습을 비추어 보지 않고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을 것이고 그때에야 자본주의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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