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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랑은 어떻게 잃어버려야 하는가? -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 | 정혜윤 2008-12-29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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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 정혜윤 PD의 어느 날 …을 알게 되었다
가장 아름다운 신화들조차 불길함을 풍기는 이유, 그건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그 불안은 개인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한 사회가 은밀하게 함께 만들어내고 나누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개성이다. 어느 날 깊은 밤을 날아온 에로스가 프시케에게 말한 것은 딱 하나, ‘눈을 뜨지 마세요, 눈을 뜬다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난 어려서 이 이야기를 읽고 기겁을 했다. 어떻게 눈을 뜨지 않을 수 있겠어요? 보고 싶은걸요. 내가 에로스와 프시케 이야기를 읽고 교훈을 얻어 눈을 뜨지 않았더라면 뭔가를 찾아 헤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돌아보지 않았더라면 눈물 흘리는 소금기둥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했겠는가? 내가 믿지 않은 것은 불안이었고 내가 믿은 것은 고생담이었다. 내가 두려워한 것은 순수함이었고 내가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개성이었다. 내가 싫어한 것은 공허였고 내가 좋아한 것은 긴 손가락과 손을 꽉 잡는 공모와 획책이었다.

『순수의 시대』의 올렌스카 백작부인이 눈을 뜨고 본 것은 고르곤(메두사)의 눈이다. 신화 속에서 메두사를 본 사람들은 누구나 돌이 돼버린다.

“아 그래야만 했어요, 난 고르곤을 보아야만 했어요.”
“흠 그것이 당신을 눈멀게 하지는 못했소. 당신은 고르곤이 별 볼일 없는 늙은 요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던 거지.”
“고르곤은 아무도 눈멀게 하지 않아요. 하지만 사람들의 눈물을 말려버리죠.”

- 올렌스카 백작부인과 뉴랜드 아처의 대화 중에서

영화 <순수의 시대>(1993)의 한 장면

『순수의 시대』를 휙 던져버릴 수 있는 사람은 뭘 모르는 사람이거나 행복한 사람이거나 내부의 균열이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살면서 아직 그런 사람들을 한 명도 만나 보지 못했다. 이 글은 상상력의 힘으로 읽는 글이 아니지만 읽는 동안 상상으로 채워야 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평온하게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이 글은 사람을 행동하도록 자극한다기보다는 슬픔에 젖어 사색하게 하는 글인데 그 근본 감정은 애절함이다. 엄밀히 말하면 사랑의 애절함이라기보다는 사랑을 잃는 ‘방법’의 애절함이다. 이 글은 원하는 것을 절대 갖지 못하게 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인데 가장 비통한 것은 누구라도 그런 일을 겪고 난다면 자주 눈을 감아야 한다는 것이다. 즐겁게 웃는 사람들 속에서, 어스름 풍경 속에서, 예의 바른 대화 속에서, 기차역에서, 백화점에서, 눈밭에서, 극장에서, 브라운관 앞에서, 그러다 결국은 인생에 눈을 감게 되는 것이다.

1870년대 1월 어느 날 뉴욕, 파우스트 공연 날, 뉴랜드 아처는 오페라 하우스 박스석 문을 열고 들어설 순간을 마음속으로 정해 두었다. 마르그리트가 “그는 날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라고 영혼으로 절절하게 노래 부르며 데이지 꽃잎을 뿌리는 바로 그 순간이 아니라면 도대체 다른 어떤 순간일 수 있겠는가?

뉴랜드 아처는 명문가의 아들인데 머리글자 이니셜을 푸른색 에나멜로 새긴 은빗 두 개를 사용해 가르마를 타고, 사람들 앞에 나타날 때는 반드시 단춧구멍에 꽃을 꽂고 나타나는 수려한 용모의 멋쟁이 변호사다. 그는 조용하고 자제할 줄 아는 젊은이로 작은 사회에서 규범에 순응하는 것이 제2의 천성이 된 지 오래라서 지나치게 감성적이거나 튀는 행동은 기품있게 조절할 줄 안다. 오페라 하우스엔 그의 사랑스러운 약혼녀, 뉴욕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메이가 조각처럼 앉아 있었다. 그가 메이를 몹시 사랑하긴 하지만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은 개성적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표정이라서 그리스 여신의 모델로 포즈를 취하도록 선택된 인간 같았다. 그녀의 사물에 대한 관점은 늘 변함없이 똑같았는데 그것은 그가 자라온 세계의 모든 사람들의 관점이었고 그가 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속으로는 무시해 왔던 바로 그 관점이었다. 메이는 대단히 단순하고 평범한 결혼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항상 성실하고 용감하게 잘 해나갈 것이다. 그녀는 전통을 따르고 옛날부터 이어받은 사고방식으로 판단하는 것의 수호여신 같았다. 뉴랜드 아처는 가끔은 메이가 그를 전혀 꿰뚫어보지 못해서 실망했다.

그런데 그날 밤 오페라 하우스의 뉴욕 상류층들은 한 인물의 등장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고 술렁댔다. 그 언짢은 소동의 주인공은 메이의 사촌 언니인 엘렌 올렌스카 백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수 년 전 파리 튈를리 궁전의 무도회에서 대단히 부유하고 유명한 올렌스카 백작을 만나 결혼했는데 몇 년 뒤에 비서의 도움을 받아 궁궐과도 같은 집을 탈출했고 그리고 어쩌면 그 비서랑 동거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추문이 돌고 있었다.

뉴욕 사교계는 그녀의 등장에 일사분란하게 행동했다. 남부끄러운 꼴이 되는 것은 명문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용납할 수 없었다. 자기가 속한 부족의 관습과 예절 하나가 온 세상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문제인 그들에게 가장 상상할 수 없는 일은 누군가가 예법을 어기는 것이었고 예법을 어긴 자는 추방되어야 한다. 뉴랜드 아처만큼은 주위 사람들이 그런 문제로 복닥거릴 동안에 어딘가에 진짜 사람들이 살고 있고 진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 좀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메이의 부탁을 받고 엘렌 올렌스카를 돌봐주던 뉴랜드 아처는 엘렌 올렌스카 백작 부인의 말이나 행동, 반응이 그의 가치를 뒤집고 있으며 그에게 놀라움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아처가 속으로 혼자 동경하고 적절히 타협하던 정열에 몇 마디 말로 간단히 인간의 얼굴을 부여해 버렸다. 어느 날 밤 그가 책장을 뒤적이며 매 페이지마다 엘렌 올렌스카란 여인의 환영을 부여하는 장면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겐 낯익은 풍경이다. 그녀가 아름다웠을까? 글쎄 어쨌든 그녀는 다르다고 아처는 생각했다. 어느 날 사교계의 견고한 벽에 부딪혀 외로움에 지친 올렌스카 백작 부인은 아처에게 이곳의 모든 사람들과 똑같아지고 싶다고 말을 한다. 그러자 아처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은 아무리 해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지지는 않을 거예요.”

뉴랜드 아처와 엘렌 올렌스카는 서로 사랑했다. 올렌스카 백작부인이 경이로울 만큼 서슴없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세계에 있는 것을 흥분감으로 지켜보던 아처는 그녀 때문에 자신의 인생 전체가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생각했고 올렌스카 백작 부인은 아처가 불성실과 무관심, 잔인함으로 얻은 행복을 싫어한다는 점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 그의 친절함을 사랑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던 올렌스카 백작부인의 주장대로 뉴랜드는 메이와 결혼한다. 결혼식장에서 그는 하객들을 보면서 ‘이건 오페라 하우스랑 똑같잖아!’라고 생각한다. 신혼기간 동안 뉴랜드 아처는 훌륭한 남편이자 사위였다. 정해진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안 봐도 환히 알 수 있는 집이 그의 집이었다. 그 문을 열면 메이와 습관, 명예, 그와 주변 사람들이 한결같이 믿어온 오래된 예의범절이 그득했다. 메이는 평화, 안정, 도망칠 수 없는 의무가 주는 안정감을 상징했다. 메이는 남편을 위한 내조라면 하나라도 빠트리지 않는 여자였다. 살면서 겪은 경험이 그녀 얼굴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고요히 사라져 버리는 게 놀라웠지만 최고의 경지에까지 이른 세련됨은 내면에 커튼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순수를 상징했다. 그 순수는 훈육과 전통의 결과였기 때문에 견고했다. 메이의 투명에 가까운 순수한 푸른 눈동자는 세상을 담거나 반영하는 반사창이 아니라 도덕, 윤리, 예법을 반영하는 반사창이었다. 뉴랜드는 끝없이 공허한 시간을 견디면서 아무런 사건도 겪지 않은 채 늙어갈 남자가 될까 두려웠지만 자기 역할을 잘했다.

결혼 후에 올렌스카와 아처 둘이서 스치듯 만나 나눈 사랑의 대화들은 혼자서 수 만 번 상상하고 되뇌 본 것이다. 선언문 같고 단 한 번뿐인 올렌스카의 키스 장면은 너무 짧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치맛단의 사그락거리는 소리, 눈빛, 웃음소리, 마차 소리, 파도 소리, 포크 소리까지 모조리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 모든 소리들이 오로지 그들의 마음속의 격렬한 격정을 대신 전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당신은 나에게 진짜 삶을 처음으로 엿보게 해주었으면서 동시에 가짜 삶을 계속 살라고 부탁했소. 그건 인간이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 거요.”
“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난 견디고 있는데….”
“당신도 그랬다고… 당신도 지금까지 죽 견디고 있었다고? 그렇다면 당신의 인생은 뭐란 말이요?”
“아, 내 삶이 당신 삶의 일부인 한….”
“그러면 내 삶은 당신 삶의 일부가 되고?”
“그러면 완전해진다. … 어느 쪽에게나?”
“예.”


(이 말을 들은 아처는 세상 천지에 자기 홀로 있던 것 같은 외로움을 싹 잊어버렸다.)

“왜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는 거지?”
“당신 때문인 것 같아요.당신은 적어도 이런 지루함 속에 아름답고 섬세하고 정교한 어떤 것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내게 일깨워 주었어요. 내가 다른 삶에서 가장 좋아했던 것조차도 그에 비하면 싸구려로 보일 정도였어요. 당신에게는 아주 솔직해지고 싶어요. 저 자신에게도 오랫동안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어요. 당신이 나를 어떻게 도와줬는지, 당신이 나를 어떻게 바꿔 놨는지 말할 수 있도록.”


(사람의 핏속까지 바꿔놓지 않는 사랑은 사랑도 아니다. 핏속까지 바꿔놓지 않은 윤리는 윤리도 아니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서로 가까이 있는 거예요. 그때는 우리 자신으로 있을 수 있죠.”

(이 말을 하고 올렌스카 부인은 떠날 생각을 한다.)

올렌스카 백작 부인이 갑자기 몸을 돌려 양팔을 벌려 아처를 부둥켜안고 그의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포갰을 때 바로 그 순간 가스등 불빛이 창문 안까지 비추고 깜짝 놀란 그들이 순식간에 떨어져 앉던 것만큼이나 애틋한 장면들은 책 속에서 모두 낮고 희미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다. 올렌스카의 얼굴이 창 너머로 휘날리는 눈발과 함께 짙어가는 어스름을 배경으로 점점 흐릿해져가는 것, 아처의 눈물이 겨울바람 때문에 얼어버리는 것, 아처가 어스름이 깔리는 황량한 정원, 쓰러져 가는 집, 떡갈나무 숲을 보면서 올렌스카 부인을 꼭 찾아낼 것만 같은 장소라고 생각하는 것, 아처가 침대에서 메이의 옆에 누워 창으로 비스듬히 새어 들어온 달빛을 보면서 달빛이 희미하게 빛나는 해안을 지나 홀로 마차를 타고 귀가했을 엘렌 올렌스카를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것, 서재에 혼자 앉아 있는 것, 낮은 등불이 있던 올렌스카의 거실을 생각하는 것.

영화 <순수의 시대>(1993) 포스터
‘사랑한다.’ 환희에 넘친 마르그리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메아리치는 파우스트 공연을 다시 보러갔을 때 뉴랜드 아처는 그 옛날의 뉴랜드 아처가 아닌데, 마르그리트가 파우스트의 팔에 쓰러질 때 예법을 벗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기 때문이다. 올렌스카는 가문의 보이지 않는 압력과 음모로 파리로 떠나게 되는데 뉴랜드 아처는 올렌스카 백작부인을 따라 파리로 가고 싶어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을 알고 있던 메이는 임신임을 알린다. 메이가 연 올렌스카 백작 부인을 위해 연 작별 만찬 풍경은 정확히 이렇다.

그들은 아직 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수단을 써서 그와 불륜 상대자를 성공적으로 갈라놓았다. 이제 일족 전체가 그런 내막은 알지도 못하고 상상해본 적도 없다는 듯이 시치미를 뚝 뗐다. 그것이 피를 흘리지 않고 목숨을 빼앗는 옛 뉴욕식의 방식이었다.

미셀 파이퍼가 올렌스카 백작부인으로 나오는 영화 <순수의 시대>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백작부인이 유럽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작별 만찬장을 나와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대형 란다우 마차 안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앞만 똑바로 보는 그녀의 목의 힘줄과 안간힘이 내 눈에 보이는 듯해 내 혈관이 터지는 줄 알았지만 책에서 아처는 그저 그녀의 갸름한 얼굴과 빛나는 눈을 희미하게 보았다고만 말한다.

삼십 년이 흐른 뒤 뉴랜드 아처의 삶은 이렇게 표현된다.

그는 선량한 시민이었다. 뉴욕에서 지나간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자선 활동이나 시정, 예술에 새로운 움직임이 있으면 언제나 그의 의견을 구했고 그의 이름을 빌리고 싶어 했으며 장애 아동을 위한 최초의 학교개교, 미술관 개편, 새 도서관 건립, 새 실내악단 구성 등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물어봤고 그의 매일 매일이 고상한 일로 빽빽이 채워졌다. 남자라면 누구나 살아볼 만한 삶이었는데 그가 놓은 것은 인생의 꽃이었다. 엘렌 올렌스카를 생각하면 책이나 그림 속 가공의 연인을 생각할 때처럼 막연하고 평온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그가 놓친 것 전부를 한데 뭉뚱그린 환상이 되었다.

나는 뉴랜드 아처가 남자라면 누구나 살아볼 만한 삶을 살았다고 회상될 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의 삶은 결과적으로 수월한 타협이었고 중요한 어떤 것을 포기한 것이 명백한 것이기 때문에 내 맘이 복잡했다. 갈망에 가득 찼던 남자들이 어느 날 윤리나 도덕에 기댈 때 그가 찾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변명거리이다. 욕망은 포기하지 않는 게 제일 좋고 포기해야 하더라도 시련을 극복해낸 성공 스토리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모름지기 진짜 아름다운 여자란 남자의 가슴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 여자이고 남자를 어떤 확신에 사로잡히게 하는 여자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여자를 잃어버린 남자에게 세계는 의무와 예법으로 가득 찬 낯선 집이 된다. 나는 그래서 자주 길을 잃는 남자들에게 무척 관대하게 굴 수밖에 없다. 『순수의 시대』에서 사회적인 외벽을 통과해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즉, 삶보다 위대한 개인은 없었고 모두 자기 삶에 충실했다. 위대한 개인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엘렌 올렌스카겠지만 아마 그녀는 열정 때문에 무척 고독했을 것이다. 나는 왜 둘이서 단 하룻밤도 같이 보내지 못했을까 불만스럽다. 그들은 왜 하룻밤도 고함을 지르며 싸우지 않았을까? 비밀만이 영혼을 키운다는 것을 믿는 나는 그들이 단 하루도 피 흘리는 짐승이 되지 않고 선선히 받아들여서 안타까웠다. 그것 또한 사회적 예법이었을까? 궁금하다.

올렌스카 부인이 말한 사람들의 눈물을 마르게 하는 오늘날의 고르곤은 무엇일까? 순수? 갈망? 사회적 추방? 윤리? 전통?

어쨌든 한 번 사랑한 것을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 덕택에 역설적으로 세계는 별 큰 일 없이 해피엔드이다.

소설에서 잊지 못할 두 장면을 꼽는다면 다음의 두 개다. 첫 장면은 정체성의 상실과 사랑 혹은 사회적 연결망의 상실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 말해주기 때문에 좋다. 우리 모두 사랑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한정 치산자가 되는 영광과 모욕을 누려야하니까.

아처는 자기 마음 속에 일종의 성소를 만들어놓고 비밀스러운 생각과 열망 가운데 그녀를 간직해 두었는데 그곳이 그의 삶이자 이성이 활동하는 유일한 장소가 되었다. 거기에 읽은 책, 정신의 자양분이 되는 생각과 감정, 판단과 공상을 가져다 놓았다. 바깥의 실제 삶이 펼쳐지는 무대에서는 갈수록 비현실적이고 불만족스러운 느낌만 커져갔고 넋을 잃은 사람이 자기 방에서도 가구에 여기저기 부딪히듯이 익숙한 편견과 전통적인 관점과 이리저리 충돌했다. 넋이 나갔다. 가장 현실적인 것과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서조차 마음이 떠나 버려서 그들이 아직도 자기가 거기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서 올렌스카 백작부인의 파리 아파트 창문 바람에 펄럭이던 흰 커튼을 보면서 아처가 돌아서는 장면.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 사랑을 잃어야 하는가, 곰곰이 생각해 봤다. 한 번 사랑한 것을 영원히 사랑하는 방식으로만 잃어버리고 싶다. 혈관 안에 피만 흐르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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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학창 시절의 상처가 모두 치유되는 것 같은 행복감 - 『창가의 토토』 | 한울 2008-12-07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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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생활에 지쳐 있는 성인들이 그리움 가득한 눈빛으로 흔히들 입에 담는 것 중 하나가 “학창 시절 때가 가장 좋았지.”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든 포근한 미소로 훌륭한 조언을 해주실 것 같은 선생님과 눈빛만으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좋은 친구들, 봄향기 가득한 햇살이 비추는 창가의 가장 좋은 자리, 사랑과 행복의 기운이 가득한 점심 시간, 당시에는 세상 끝에서나 존재할 것 같았던 무거운 고민거리들…… 모두가 그립고 소중한 추억들인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전 “학창 시절에 좋은 기억 따위는 전혀 없어.”라고 말하고 다닐 만큼 좋은 추억 따위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무언가 아쉽고 서글픈 일이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신기하고 재밌을 것 같은 생활의 시작과 함께 선생님에 대한 공포와 선입견이 생기게 되었죠. 1학년 때 담임이던 선생님의 교육 방법 같은 건 전혀 기억에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벌을 주는 행위에 대해선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8살짜리 꼬마 아이는 사고에 대한 판단에 옳고 그름이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주 잘못을 합니다만, 그에 따르는 선생님의 벌은 너무 잔인하고 변태적인 행위였는데요, 비닐봉지를 머리에 씌우고는 뒤에서 입구를 꽉 조여서 숨을 못 쉬게 한다든지, 어른 힘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꼬마의 손목을 붙잡고 책상을 세게 내리친다든지, 자신의 손바닥만 한 아이의 얼굴을 인정사정없이 때리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죠. ‘사랑의 매’라는 행위에 대해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당시의 한참 잘못된 방식의 처벌에 대해선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 잔인한 방법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내가 잘못해서 벌을 받는다는 기분보단 ‘아,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라는 공포가 훨씬 더 컸으니까요. 4,5학년 때 담임선생님도 매를 많이 때리시긴 했지만 ‘정말 좋은 분이셨지.’라는 기억이 있습니다만 나머지 4년의 초등학교 생활은 정말 지긋지긋했습니다.

성인이 되고 구로야나기 테츠코의 『창가의 토토』를 읽으면서 ‘아, 난 정말 슬픈 학창 시절을 보냈구나.’ 하는 생각에 몹시 서글퍼졌습니다만, 이와사키 치히로의 너무도 예쁜 그림과 도모에 학원의 따뜻한 이야기가 담긴 책 한 권에 당시 받았던 상처들이 모두 치유되는 것 같은 행복감이 몰려왔습니다. 뭐 물론 잠시 잠깐 동안의 여운이였지만 말이죠.

『창가의 토토』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진실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눈이 있어도 아름다운 걸 볼 줄 모르고 귀가 있어도 음악을 듣지 않고 또 마음이 있어도 참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감동하지도 못하며 더구나 가슴속 열정을 불사르지도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

형편없는 기억들과 상처뿐인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아직까지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동할 줄 알며, 좋은 음악에 행복해하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으니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이렇게 변치 않고 조금씩이라도 성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창가의 토토
구로야나기 테츠코 저/이와사키 치히로 그림/김난주 역 | 프로메테우스 | 2004년 01월

도모에 학원이라는 초등학교에서 이 책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저자가 겪은 아름다운 한 시절을 그리고 있다. 물질은 넘쳐나지만 모진 학업과 과외에 시달려 머리와 가슴이 비쩍비쩍 말라 가는 우리 아이들을 포근하게 보듬는, 풍요롭지는 않지만 여유롭게 시간이 흐르던 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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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좀 더 괴로워하고 방황해도 괜찮아. 스무 살이라는 건 그러라고 존재하는 거니까.” | 한울 2008-12-07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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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근처에 작업실을 얻은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갑니다만, 한강으로 산책을 나가본 건 단 한 번. 서울 시내를 직접 운전해서 이동해본 건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이 근방에 작업실을 얻은 이유와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만, 공짜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너무 간과하고 사는 건 아닐까란 생각에 조깅을 좀 해볼까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 자우림의 <ashes to ashes> 앨범을 들고 드라이브를 하러 나갔습니다.

서울의 낮과 밤은 매우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벽의 강변북로는 너무 평화롭고 여유가 넘쳤으며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차들과 호흡하며 한강 특유의 정취가 느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운전하자니 기분 좋은 멋진 밤이 되어 있었습니다.

맑고 투명한 밤하늘과 작은 불빛 하나 놓치지 않고 빛내주는 한강 그리고 자우림의 무겁고 몽환적인 <ashes to ashes> 앨범은 실로 탁월한 선택이었음에 즐거움 가득한 발동작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는 도중 문득 10년 전 내 자신에겐 조금 미안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20대 초반 저에게 삶의 지침서는 자기개발서나 경제경영서 같은 책이 아니라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같은 책들이었습니다. 책의 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다른 언어를 쓰고 있으며 연관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인생이었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세상과 환경에 크게 휘둘리며, 방황하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방치하는 행동들은 동경의 대상이었고, 존재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사치라 여겨지는 것들과 부르조아의 형식주의에 대해 거칠게 비판했으며 저항과 피카소 클럽 안을 가득 채운 담배연기만이 진실이었고 날 이해해주는 건 나 자신과 음악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밤하늘과 한강 드라이브라는 명제는 '허풍이나 떠는 위선자들이 하는 부르주아적 취미생활'로 치부하는 직설적이고 좀 어딘가 막힌 친구였단 이야기입니다.

재떨이를 가득 채운 담배꽁초와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맥주병들, CD와 스케치북 그리고 책들로 가득 찬 가방…… 모두 소중하고 진지한 것들이었지만, 근사한 밤하늘과 한강 그리고 드라이브가 가져다주는 평온이 이런 행복인 줄 알았다면 그렇게 미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스무 살이라는 숫자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방황’과 ‘저항’으로 가득 차야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너무 미래지향적이라 스무 살이 스무 살 같지가 않아요.)

<ashes to ashes> 앨범엔 ‘죽인 자들의 무도회’란 노래가 있습니다. “망각의 강을 떠다니는 건 흔해빠진 무용담”이란 소절이 있는데 한강을 달리는 도중 ‘아아… 그렇지, 그렇지.’ 하며 지금 하는 생각들에 대해 무릎을 탁탁 치며 합리화 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ashes to ashes> 마지막 곡인 ‘샤이닝’엔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별이 내리는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바보처럼 나는 그저 눈물을 흘리며 서 있네.
이 가슴 속의 폭풍은 언제 멎으려나.
바람 부는 세상에 나 홀로 서있네.

풀리지 않는 의문들, 정답이 없는 질문들
나를 채워줄 그 무엇이 있을까.
이유도 없는 외로움, 살아 있다는 괴로움,
나를 안아줄 사람이 있을까.

스무 살 때 이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면 좀 더 친밀하고 진지하게 공유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맘 같아선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나 자신에게 선물하고 싶어요.

“좀 더 괴로워하고 방황해도 괜찮아. 스무 살이라는 건 그러라고 존재하는 거니까. 시간이 지나보면 조금은 성장했다고 느낄 수 있을 거야.” 라며 등 두드려주고 말이죠.

자우림 6집 - Ashes To Ashes
자우림 노래 | 티엔터테인먼트 | 2006년 10월

자우림의 이번 앨범은 자우림이 그간 발표했던 앨범들과는 달리 완전한 밴드 악기 사운드를 과감히 탈피하여 일렉트로닉 리듬을 사용하는등 사운드적인 차별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음악적인 궤적을 일치시키고 있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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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 그럼, 시작해볼까?” - <GO> | 한울 2008-12-07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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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 한울의 그림으로 읽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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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들을 자막도 없이 몰래 보던 시기를 지나고, 일본문화가 개방되면서 처음 접했던 영화는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의 <GO>였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괴상한 머리의 쿠보즈카 요스케를 보고는 좋은 눈을 가진 캐릭터란 생각에 흥미가 생겼고, 인트로 부분의 지하철 씬에서부턴 연출에 압도당해 영화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어 처음부터 끝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봤었죠. 원작이 소설이라는 이야기에 가네시로 가즈키에 대해 알게 되었고 원작 소설인 『GO』도 무척 재밌게 보았습니다.

평소 문학을 영화로 옮기는 과정은 매우 힘들고 터프한 작업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문학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나, 문체가 가지고 있는 힘, 단어 하나하나에 실려 있는 감정의 움직임은 스크린으로 옮기는 과정에선 많은 부분 소멸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설령 잘 옮겨진 영화라 하더라도 그건 일란성 쌍둥이와 같이 외모는 거의 같지만 다른 내면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전혀 별개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GO>는 원작에 굉장히 충실한 영화였던 것 같습니다. 텍스트를 눈으로 좇는 동안 영화의 장면들이 계속 오버랩 되며 지나갔고 캐스팅도 좋아서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느낌과 상당히 매치가 잘 되었습니다. 뭐 물론 소설을 먼저 보고 영화를 본 케이스였다면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양쪽 다 박수 칠 수 있을 만큼 좋은 결과였다는 것엔 변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GO>와 연관해서는 여러 가지 생각나는 것이 많습니다만, 그중에서 역시 백미는 이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네 주먹이 그린 원의 크기는 대충 너란 인간의 크기다. 그 원 안에 꼼짝 않고 앉아서, 손닿는 범위 안에 있는 것에만 손을 내밀고 가만히 있으면 넌 아무 상처 없이 안전하게 살 수 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겠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너는 그런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늙은이 같이.”

아버지는 싱긋 미소 지은 후 말했다.

“권투란 자기의 원을 자기 주먹으로 뚫고 나가 원 밖에서 무언가를 빼앗아오고자 하는 행위다. 원 밖에는 강력한 놈들도 잔뜩 있어. 빼앗아오기는커녕 상대방이 네놈의 원 속으로 쳐들어와 소중한 것을 빼앗아갈 수도 있다. 게다가 당연한 일이지만 얻어맞으면 아플 것이고, 상대방을 때리는 것도 아픈 일이다. 그런데도 넌 권투를 배우고 싶으냐? 원 안에 가만히 있는 편이 편하고 좋을 텐데.”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배울 겁니다.”

아버지는 또 싱긋 웃고 말했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것은 굉장히 두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한 발자국만 내딛으면 시작할 수 있지만, 그 무거운 한 발자국을 내미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지요. 새장 속에 갇혀 지내던 새는 새장 문을 열어줘도 나갈 수 없는 것처럼 지금 존재하는 내 삶의 울타리에서 나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해보는 건 굉장히 흥미로우면서도 두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요즘처럼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며 걱정이 많을 때는 이 대화를 생각하며 용기를 얻곤 합니다.

인간 정신의 근본은 새로운 경험에서 나온다는 말을 되새기기도 하면서 말이죠.

GO
유키사다 이사오 | 스타맥스DVD | 2002년 08월

이 이야기는 나의 연애이야기이다. 나는 초급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젊은 시절 열혈 마르크스주의자로 조총련 활동을 한 아버지덕분에 조총련계 초중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하와이를 가겠다는 아버지의 엉뚱한 발상으로 온 가족이 한국 국적으로 옮긴 후 내 나름의 뜻을 품고 일본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일본에 사는 사람이다.

GO
가네시로 가즈키 저/김난주 역 | 북폴리오 | 2006년 02월

프로복서 출신이자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전향’으로 조총련계에서 민단계로 옮긴 재일동포 3세 고교생이 일본인 소녀와의 연애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하고 일본사회에 내재한 민족차별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자전적 성장소설. 재일한인들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자칫 무거운 주제를 기발한 유머감각으로 경쾌하게 풀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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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Heart shaped-box가 아닌 Heart box로 느.껴.봐.” - 『이방인』 | 한울 2008-12-07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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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연찮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The Mamas & The Papas의 〈California Dreamin'〉을 듣고 있자니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향수에 사로잡혀 흥얼흥얼 열심히 따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문득, 서랍 속 깊숙이 숨겨두었던 연애편지를 발견한 기분으로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 떠올랐는데요. 숨 가쁘게 흘러가는 빛과 카메라의 움직임, 감각적인 대사들 그리고 작은 스테레오 기기에서 줄기차게 나오던 〈California Dreamin'〉이 말이죠.

13년 전 처음 영화를 접했을 땐 대사 하나하나, 배우들 몸짓 하나하나에 보이지 않는 화살이 가슴 속 깊숙이 박힌 것처럼 격렬히 반응했고 양조위와 금성무의 표정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아 보고 또 보고를 수없이 반복했던 기억이 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94, 95년도엔 저의 어설픈 인격이 성장하는 데 영향을 주었던 양질의 컨텐츠를 많이 접한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나우누리의 존재와 그곳에서 알게 된 여러 사람들, 명동과 압구정의 수입서점, 자신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겨버린 커트 코베인, 왕가위의 <중경삼림>과 타란티노의 <펄프픽션>, 장 피에르 주네의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그리고 하루키와 알베르 카뮈까지 말이죠.

사실 카뮈의 『이방인』<중경삼림><펄프픽션>의 비디오테이프를 구입코자 나섰던 종로의 중고책방에서 구입한 책이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원고의 분량은 150페이지 정도로 중편이라 보기에도 좀 짧은 편인데 책을 다 읽고 덮을 때의 그 비현실적인 허무는 몇 번이나 책을 다시 펴게끔 만드는 마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롤랑 바르트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두고 ‘건전지의 발명’과 같다고 비유하며, 이상적인 글쓰기 전범이라 했다는 말에 ‘아아, 정말 근사한 표현이다.’라고 감동했었고 말이죠. 주위의 많은 사람에게 『이방인』을 추천했었지만 죄다 읽지 않으려 해서 슬퍼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가끔 어떤 특정적인 소설이나 영화 또는 음악을 ‘어렵다’는 표현을 빌려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분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독자나 관객이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보이고 들리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찾기 위해 너무 깊숙이 파고드는 건 자칫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을 잃어버리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이해하려는 관점보단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자세로 받아들이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물론 취향의 차이에서 오는 갭은 존재하겠지만 너무 군중심리에 이끌려 두리번거리며 방황하기보단 자신의 심장이 이끄는 대로 말이죠.

사춘기 시절, 음악이나 책 그리고 영화에서 본질적인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고민했을 때 누군가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거나 복잡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Heart shaped-box가 아닌 Heart box로 느.껴.봐.”

이방인
알베르 까뮈 저/김화영 역 | 책세상 | 1999년 09월

실존주의 문학의 정수, 이방인. 살인동기를 '태양이 뜨거워서'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는 주인공은 그의 삶과 현실에서 소외된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죽음이라는 한계상황 앞에서 인간의 노력이란 것이 얼마나 부질없으며 한편으로는 그 죽음을 향해 맹렬히 나아가는 인간존재가 얼마나 위대한지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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