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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만의 '천문지식 대중화', 누굴 위한 것인가 | - 신라 시대 2009-09-30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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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만의 '천문지식 대중화', 누굴 위한 것인가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선덕여왕>
09.09.07 10:46 ㅣ최종 업데이트 09.09.07 10:46 김종성 (qqqkim2000)
신라 차원에서는 최초의 여왕, 동아시아 차원(여기서는 한·중·일)에서는 두 번째의 여왕에 도전하는 덕만(이요원 분)의 정치행보가 가속화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라고 한 것은, 선덕여왕(재위 632~647년)이 등극하기 전에 일본의 스이코(推古, 재위 593~628년)가 최초의 여성 일왕(천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측천무후는 690년에 신생국 주나라의 황제가 되고도 후대 역사학자들의 해석에 의해 '황제가 아니었던 인물'로 격하되었다. 기원 7세기는 측천무후까지 포함하여 한·중·일 3국에서 도합 7명의 여왕이 나와 '여왕의 세기'라고 할 만하다. 기원 7세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비록 픽션이 상당히 가미되어 있기는 하지만, 덕만은 미실(고현정 분)을 상대로 한 정치투쟁을 통해 신라 최초 혹은 동아시아 두 번째 여왕의 자리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고 있다.  

 

'천문지식' 대중화를 놓고 벌이는 논쟁

 

  
드라마 <선덕여왕>.
ⓒ MBC
덕만

8월 31일과 9월 1일에 방영된 <선덕여왕> 제29부 및 제30부에서 덕만은 이른바 '천문지식의 대중화' 문제를 놓고 미실과 한바탕의 정치논쟁을 벌였다. 일식 등에 관한 천문지식의 독점을 무기로 그동안 정치권력을 유지해온 미실 시대를 청산하기 위해 드라마 속의 덕만이 "천문지식을 누구든지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천명함에 따라, 두 여인 사이에서 불꽃 튀는 정치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 논쟁에서 덕만은 "천문지식의 대중화는 권력의 독점을 막고 일반 백성의 복리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 데에 비해, 미실은 "나한테서 그걸 빼앗았으면 네가 가지면 될 일이지, 왜 그것을 백성들에게 주려 하느냐?"며 "그것은 동업자 간의 상도덕을 깨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물론 실제의 역사에서는 덕만과 미실을 두 축으로 하는 정치구도가 형성된 적이 없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논쟁이 벌어졌을 리도 사실상 만무하다. 하지만, 덕만과 미실의 정치논쟁은 천문지식의 대중화와 정치권력의 관계에 관한 화두를 시청자들에게 던졌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비록 허구적 설정이기는 하지만 고대 동아시아 정치권력에 대한 일반 시청자들의 인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덕만과 미실이 논쟁한 천문지식의 대중화와 정치권력의 관계를 한번쯤 검증하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 속의 논리대로 정치권력이 천문지식의 독점을 포기하고 그걸 과감히 '대중화'하는 것이 과연 백성들을 위한 일인가 하는 점을 말이다.

 

물론 정치권력은 자신의 행위를 모두 다 '백성을 위한 일'이라고 포장한다. 하지만, 정치권력의 행위가 본질적으로 그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점은, 출생일로부터 만 18년 정도만 정치권력의 지배 하에서 살아보면 누구나 다 자연스레 알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하다못해, 국가의 보건정책 혹은 복지정책도, 엄밀히 말하면, 납세자들의 건강상태를 최적으로 유지하여 조세수입의 안정성을 기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드라마 속의 덕만이 단행한 천문지식의 대중화 역시 결코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것은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은 정치권력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인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월령' 공개에 숨은 뜻

 

정치권력이 단행하는 천문지식의 대중화가 결국에는 정치권력 자신을 위한 것임을 보여줄 만한 적절한 사례로서, 우리는 고대 중국왕조의 월령(月令) 공개를 들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정치권력이 동아시아의 주요 고전 중 하나인 <예기>에 월령 편을 넣음으로써 천문지식을 대중과 공유한 이유를 살펴보면, 천문지식의 대중화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선덕여왕>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중국의 사례를 드는 것은, 잘 알다시피 신라에 관한 역사기록이 몇 권 되지 않아서 그런 기록만으로는 이 문제에 관한 신라 정치권력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 한나라 때(BC 202~AD 8년)에 편찬된 <예기>의 앞부분에 보면 '월령'이란 항목이 나온다. 월령 편은 1년 12개월의 기후는 어떠하고 각각의 달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등을 적어놓은 기록이다. 어느 달에는 태양과 별들이 어느 위치에 있고, 그 달에 황제는 무슨 일을 하고 백성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등등을 적어놓은 것이다.

 

양력 9월경에 해당하는 음력 7월 즉 맹추지월(孟秋之月)에 관한 월령의 기록에서는, 맹추지월에는 태양이 어느 위치에 있고 어느 별은 어느 위치에 있다는 식으로 꽤 복잡한 천문지식을 나열한 뒤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하얀 이슬이 내리며 쓰르라미(저녁매미)가 운다"는 식으로 대체적인 기후를 소개했다.

 

그리고 몇 문장 넘어가면 "입추에 천자(황제)는 재계하고 삼공·구경·제후·대부들을 직접 거느리고 서쪽 들판에 나가 가을을 맞는다"라고 했고, 또 몇 문장 더 넘어가면 "이 달에 농부는 새 곡식을 천자에게 바친다"라고 했다.

 

위와 같이 고대 중국 왕조가 <예기> 월령 편을 통해 백성들에게 천문지식을 공개한 것은 이를 통해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장악하고 나아가 황제의 통치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황제 중심으로 시간을 운행함으로써 시간의 주재자 즉 우주의 주재자로서의 황제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그것은 백성들로부터 비교적 수월한 방법으로 물질적 자원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어느 달에는 씨를 뿌리고 어느 달에는 황제에게 새 곡식을 바쳐야 한다는 등등의 내용은, 황제의 조세 징수를 우주의 당연한 이치인 듯이 주입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고대 중국 왕조가 천문지식을 공개한 동기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보여주고도 남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보면 "천문지식의 대중화는 백성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낯 뜨거운 일인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예기> 월령의 내용을 이처럼 구체적으로 검토하지 않더라도, 월령에 관한 내용이 <예기>라는 책 속에 편입된 사실만 갖고도 우리는 월령의 공개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예기>라는 책의 근본취지는 예법을 통해 정치질서를 구현하는 데에 있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차별을 전제로 한 예법을 통해 차별적인 정치질서를 정당화하는 데에 <예기>의 본질적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예법의 핵심은 인간됨됨이나 공손함 같은 게 아니라 바로 '차별'의 정당화였다. 

 

그런 <예기> 속에 월령이 들어갔다는 것은, 고대 중국의 정치권력이 천문지식의 공개를 통해 황제와 신하와 백성의 차별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차별적 정치질서 속의 황제의 위상을 구축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예기>는 중국뿐만 아니라 역대 한국 왕조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일례로, 조선시대의 외교부서가 '예'조라고 불린 것도 바로 <예기>의 영향 때문이었다.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차별이 정당하듯이 상국과 속국의 차별도 정당하다는 <예기>의 논리에 기초하여 국가 간의 관계도 차별적인 '예'로써 규정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조니 예부니 하는 표현들이 외교부서를 가리키게 된 것이다.

 

<예기>의 예법이 역대 한국 왕조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역대 한국 왕조들이 행한 천문지식의 공개 역시 사실은 <예기> 월령 편의 기본취지에 입각한 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왕조들 역시 백성들과 함께 권력을 분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은 백성들의 일상을 정치권력의 시간표에 묶어두고 왕과 신하와 백성의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천문지식을 대중화했던 것이다. 

 

선덕여왕도 '노련한 정치꾼'이 아니었을까?   

 

  
공주의 신분을 회복한 덕만(이요원 분).
ⓒ MBC
덕만

위와 같이 한국과 중국 등의 고대 동아시아 정치권력이 천문지식의 대중화를 통해 백성에 대한 장악력을 제고하려 했다는 점을 볼 때에, '천문지식의 대중화는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드라마 속 덕만의 논리가 고대 동아시아의 정치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를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의 행위는 본질적으로 소비자가 아닌 기업 자신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이치를 생각하면, 미실처럼 천문지식을 독점하든 아니면 덕만처럼 그것을 백성과 공유하든 간에 천문지식과 관련된 고대 정치권력의 행위는 본질적으로 그 자신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이치를 다시 한 번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신라 차원에서는 최초의 여왕이요 동아시아 차원에서는 두 번째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의 정치행위 역시 지고지순하고 고결한 어떤 천상(天上)의 이상을 위한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정치권력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는 대(大)전제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선덕여왕 시대의 본질에 결코 다가설 수 없을 것이다.

 

신라 최초의 여왕이라고 하여 오로지 '순수' '순결' 코드로만 선덕여왕 시대를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신라 최초인 동시에 동아시아 두 번째의 여왕이 된 인물이라면 왠만한 남자 정치인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노련한 '정치꾼'이었을 것이라는 당연한 이치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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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미실에서 반 선덕여왕으로... 비담은 이중인격자? | - 신라 시대 2009-09-3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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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미실에서 반 선덕여왕으로... 비담은 이중인격자?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선덕여왕>
09.08.27 12:24 ㅣ최종 업데이트 09.08.27 17:40 김종성 (qqqkim2000)
  
<선덕여왕> 비담.
ⓒ MBC
선덕여왕

천명공주가 갑자기 '하차'하고 덕만의 신분이 판명된 뒤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에게 대항하는 팀의 인적 구성이 바뀌었다. 종래에는 천명-유신-덕만 3총사가 반(反)미실 캠프를 형성한 데에 비해, 최근에는 덕만-유신-알천-비담-월야 '5형제'가 반미실 캠프를 구성하고 있다.

 

과거의 캠프에서는 3총사가 공주·화랑·낭도라는 신분에서부터 각각 확연하게 구별된 데에 비해, 현재의 캠프에서는 5형제가 다들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지라 신분상으로는 각각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잘못하다가는 자기 자신이 그냥 파묻혀 버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인지, 반미실 캠프의 멤버들은 저마다 색다른 캐릭터를 무기로 시청자들에게 자신을 적극 어필하고 있다.

 

저마다 제각각의 캐릭터를 선보이고 있는 다섯 명의 반미실 전사들 가운데, 지난 24일과 25일에 방영된 제27부 및 제28부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등장인물은 비담이었다. 일식 문제를 놓고 미실 측을 교란하기 위해, 비담이 가면을 쓰고 스스로 미실캠프에까지 끌려갔던 것이다.

 

평소에는 아무 때나 실실 웃고 꽤 건방지다는 인상을 풍길 뿐만 아니라, '시청자'들 앞에서 아무 주저 없이 손가락과 콧속의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던 비담이었다. 그러던 비담이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도사 흉내를 내며 미실 측을 헛갈리게 할 때는, 상당히 진지했을 뿐만 아니라 목소리까지 꽤 무게가 있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비담이었다. 만화 캐릭터 같다던 종래의 평가를 그저 무색하게 하는, 점잖은 정극(正劇) 캐릭터의 이미지였다. 물론 가면을 쓰고 있을 때만….

 

실제 역사에서 비담은 어떤 캐릭터였을까?

 

이처럼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독특한 캐릭터를 앞세워 시청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는 비담. 그는 실제로는 선덕여왕 말기에 상대등으로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김유신에게 진압되어 그 자신은 물론 구족의 멸문지화를 초래한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 속에서 비담은 어떤 인물로 묘사되었을까?

 

<삼국사기>에 3회, <화랑세기>에 1회 나오는 비담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다 선덕여왕 16년(647)의 반란사건에 관한 것들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담의 캐릭터가 이렇다 저렇다 하는 내용들이 사료에 따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록이 거의 없다는 난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료상의 행간(行間)으로부터 비담의 캐릭터를 제한적으로나마 일정 정도는 추출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에 관한 기록들이 모두 다 동일한 반란사건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기록이 매우 상세한지라 그로부터 일정 정도는 비담의 캐릭터를 뽑아낼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반란이나 혁명을 시도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 개인의 캐릭터가 반란·혁명에 압축적으로 반영되기 쉽다. 1패 뒤에도 몇 번이고 더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스포츠 경기와 달리, '1패'가 곧바로 사실상 '죽음'을 의미하는 반란·혁명의 경우에는 그것을 준비하는 사람의 역량이 그 안에 죄다 투입되기 마련이다. 사회 전체의 역량이 압축적으로 투입되는 전쟁을 통해 국가의 칼라가 드러나듯이, 그래서 일본이 벌이는 전쟁과 미국이 벌이는 전쟁이 우리에게 서로 다른 이미지로 다가오듯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담처럼 반란·혁명을 시도한 인물의 경우에는, 그 개인의 캐릭터가 그런 사건 속에 상당 정도로 녹아들어가기 마련이다. <삼국사기>의 비담 반란사건을 통해 그의 캐릭터를 일정 정도로 추출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이 비담의 모든 것이 그 사건에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왕이 되고자 했던, 자기중심적인 인물

 

  
<선덕여왕> 비담.
ⓒ MBC
선덕여왕

그럼, 서기 647년에 발생한 반란사건으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비담의 캐릭터는 어떠한 것일까? 사료상에 나타나는 비담의 캐릭터 중에서 주요한 것으로는 대략 세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비담은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사기> 권41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그는 선덕여왕을 폐하고 자신이 직접 왕이 되고자 했다.

 

그런데 국가해체의 조짐이 명확히 드러나는 시기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국가전복을 꿈꿀 수도 있겠지만, 신라의 국력이 한창 왕성해지던 때에 '되지도 않을' 국가전복을 꿈꾼 사람이라면 '체질적'으로 무언가를 뒤집기 좋아하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볼 수 있다.

 

혼란기에 나타나 세상을 뒤엎는 사람들은 객관적 분위기 혹은 남들에게 떠밀려 억지로 무대에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비담처럼 '멀쩡한' 안정기에 나타나서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세상을 뒤엎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개 타고날 때부터 자기중심적인 기질이 많은 사람이라고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전봉준처럼 객관적인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에 혁명을 일으킨 사람의 경우에는 반란의 원인을 내면보다는 객관적인 환경에서 찾게 되지만, 비담처럼 참 생뚱맞은 시기에 나타나서 국가전복을 시도한 사람의 경우에는 반란의 원인을 환경보다는 주관적인 내면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징 조작으로 전세를 바꾼 '기획력'의 대가

 

둘째, 비담은 기획력이 탁월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정부군과의 교전이 10일간 계속되었는데도 승부가 판가름 나지 않자, 비담이 전격적으로 뽑아든 카드는 상징조작이었다. 한밤중에 정부군 진영에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큰 별을 '여왕이 패전할 조짐'이라고 선전하면서 군사들의 사기충천을 유도한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던지 반란군 병사들의 기세가 "땅을 진동"시키고, 그로 인해 선덕여왕까지 무서워서 어쩔 줄 몰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열흘간 칼과 활로도 판가름 나지 않던 승부가 하룻밤 새에 이런 선전전 때문에 판가름 날 뻔했던 모양이다.

 

이는 비담이 상징을 적절히 조작했고 또 그런 조작의 결과를 병사들에게 효과적으로 각인시킬 만한 능력을 보유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담이 탁월한 기획력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싸움은 결국 상징조작 대 상징조작의 대결로 결판이 났다. 비담이 상징조작을 통해 전세를 바꾸려고 하자, 이를 간파한 김유신 역시 동일한 카드를 꺼내들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비담이 미실의 흉내를 냈듯이, 실제 역사에서는 김유신이 비담의 흉내를 냈던 것이다.

 

불붙은 연을 하늘로 날린 뒤에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도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문을 퍼뜨린 김유신의 역(逆)선전이 주효하여 정부군의 사기가 '천정'을 치고 반란군의 사기가 '바닥'을 침에 따라, 군사대결은 결국 정부군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인 김유신 때문에 결국 실패하기는 했지만 비담의 상징조작이 한때 승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뻔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에, 우리는 비담이 상당한 기획력의 소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볼 수 있다.

 

상대등을 지내면서 역모 꾀한, 이중적 성격의 소유자

 

  
<선덕여왕>
ⓒ MBC
선덕여왕

셋째, 비담은 이중적 성격의 소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여 반드시 이중적 성격의 소유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비담의 경우에는 그렇게 평가해도 괜찮을 만한 근거들이 있다.

 

선덕여왕의 남편 겸 국정총괄자였던 용춘과 을제의 사례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선덕여왕과 정치적으로 가장 가까운 남자는 동시에 선덕여왕의 연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측근을 애인으로 만드는 이런 방식은, 위작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여성이라는 정치적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 공주 시절부터 선덕여왕이 구사해온 방법이었다. 이런 사례들을 고려할 때에, 상대등을 지낸 비담 역시 선덕여왕과 이성적으로 가까웠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자신과 정치적으로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이성적으로도 가까웠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상대로 그토록 대규모의 군사반란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은, 웬만큼 이중적인 성격을 소유하지 않고는 쉽게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한편, 상대등이라는 지위는 누구보다도 정권유지 혹은 체제유지와 깊은 이해관계를 갖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재야를 배경으로 왕조에 도전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이중적 성격 여부를 운운할 여지가 없겠지만, 왕조 수호의 책임을 지는 상대등의 직무를 보는 동안에 왕조 파괴를 위한 군사반란까지 은밀히 준비했다는 점은 비담이 이중적 성격의 소유자였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부군과 10일 이상 대치하면서 한때 주도권을 잡은 사실은, 비담이 상당히 치밀하게 반란을 준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대등 집무실에서 정부 사무를 보는 와중에도 반란 준비를 꼼꼼히 체크하는 비담의 모습으로부터 우리는 치밀함보다는 이중성을 더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의 비담도 드라마 속의 비담처럼 평소에 아무 때나 실실 웃고 꽤 건방지게 행동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개인적 역량이 총집중된 반란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비담의 캐릭터는 위와 같이 자기중심적이고 기획력이 높으며 이중적 성격의 소유자였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었다고 판단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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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고의 '꽃미남 풍월주'는 누구였을까 | - 신라 시대 2009-09-30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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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고의 '꽃미남 풍월주'는 누구였을까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선덕여왕>
09.09.21 10:08 ㅣ최종 업데이트 09.09.21 10:08 김종성 (qqqkim2000)
  
풍월주 경합 제3라운드의 결승전에 진출한 유신(엄태웅 분)과 비담(김남길 분).
ⓒ MBC
김유신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제15세 풍월주(대표 화랑) 선발전이 거의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제3라운드인 검술 심사의 결승전에서 유신(엄태웅 분)과 비담(김남길 분)의 시합이 '이상하게' 질질 끄는 양상을 보이자 '이미 1승을 확보한 유신에게 1승을 보태주려는 승부조작이 아닌가?'라고 의심한 칠숙(안길강 분)이 '타임'을 걸고 나오는 바람에 결승전이 잠시 중단되고 말았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드라마 속의 풍월주 경합에서는 관찰력(제1단계), 지식(제2단계), 검술(제3단계)이 핵심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서는 후보들의 외모 역시 무시 못할 기준으로 작용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준수한 외모를 가진 배우들이 드라마 <선덕여왕>의 화랑 역을 맡는 데에는 크게 2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최근의 '꽃미남' 혹은 '꽃남' 열풍을 드라마가 반영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어느 시대든지 간에 화랑을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는 기본적으로 배우의 얼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다. 왜냐하면, 화랑(花郞)이란 말 자체가 꽃미남 혹은 꽃남으로 번역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라의 화랑들, 그중에서도 '화랑 중의 화랑'인 풍월주들 가운데 드라마 속의 배우들처럼 정말로 꽃미남이었던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그리고 그 꽃미남 풍월주들 중에서도 누가 최고의 꽃미남이었을까? 이 점을 살펴보기 위해, 드라마 <선덕여왕>이 핵심 준거로 활용하고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를 열어보기로 하겠다.

 

서기 540년부터 681년까지 재임한 역대 풍월주 32명의 외모에 관한 <화랑세기>의 묘사를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아래 내용은, 풍월주들의 특성을 요약한 부분 가운데에서 외모에 관한 표현만 따로 발췌한 것이다.

 

  
<화랑세기>의 각 편에 소개된 풍월주들의 외모.
ⓒ 김종성
풍월주

꽃미남 풍월주는 몇 명이었으며 그중에서 누가 최고의 꽃미남이었는지를 가리기에 앞서, 위의 표에서 얻을 수 있는 세 가지의 흥미로운 사실을 먼저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첫째, 전반기(제1세~제16세) 풍월주들의 경우에는 외모에 관한 묘사가 꽤 많은 데에 비해, 후반기(제17세~제32세) 풍월주들의 경우에는 그에 관한 묘사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라는 점이다. 해당 풍월주의 외모가 준수한 경우에만 그 외모를 소개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외모에 관한 묘사가 없다는 것은 해당 풍월주의 외모가 '별로'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전반기 풍월주들의 외모가 상대적으로 더 나은 것은, 이 시기에는 나이 어린 10대들을 중심으로 조직이 구성된 탓에 후천적 요인(정치력·업무능력 등)보다는 선천적 요인(신분·외모 등)이 조직 안에서의 출세에 더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후반기로 갈수록 조직이 복잡해지고 현실 정치와 깊이 연루되다 보니 풍월주들의 나이도 훨씬 더 많아지고, 또 그러다 보니 선천적 요인보다는 후천적 요인들이 출세에 더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제8세 풍월주인 문노 이후로 풍월주의 외모에 관한 묘사가 뜸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시쳇말로 하면, 문노 이후로 풍월주들의 '물'이 안 좋아진 셈이다. 문노 이후로 화랑도 조직 안에서 외모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문노 시대에 화랑도의 제도가 정비된 점, 문노가 검술과 화랑도 정신을 중시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에, 문노 이후로 조직운용 능력이나 검술·정신 등의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외모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이른 바 '미실의 남자들'의 외모에서 공통분모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제5세~제7세 풍월주인 사다함·세종·설원의 외모에서 공통적인 것은 다들 한결같이 풍채가 좋았다는 점이다. 특히 남편인 세종의 경우에는 단아하면서도 풍채가 아름다웠다고 했다.

 

이는 미실의 남자 취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실은 얼굴이 잘 생긴 남자보다는 풍채가 좋은 남자, 다시 말하면 전체적인 느낌이 좋은 남자를 더 선호했던 것이다.

 

다시 본래의 논의로 돌아가서, 풍월주들 중에서 몇 명이나 꽃미남이었으며 그중에서 누가 '미스터 화랑' 혹은 '미스터 풍월주'였는지를 가려보기로 한다.

 

표에 따르면, 외모에 관한 기록이 남은 풍월주는 전체 32명 가운데에서 총 15명이다. 전반기에 10명, 후반기에 5명이었다.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외모에 관한 기록이 남았다는 것은 해당 풍월주의 외모가 꽤 준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32명 가운데에 15명의 외모가 준수했다면, 풍월주들의 절반가량은 꽃미남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화랑도 조직 안에서 얼굴이 상당히 중시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관공서나 학교에 걸린 역대 단체장이나 교장·총장들의 사진을 둘러보면서 '이 중의 절반은 꽃미남이구나'라는 느낌을 갖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역대 풍월주들의 경우에는 그중 절반이 꽃미남이었으니, 화랑도 조직 안에서 얼굴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노 이후로 외모의 중요성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풍월주 중에서 꽃미남의 비율은 훨씬 더 높아졌을 것이다.

 

그럼, 15명의 꽃미남 풍월주들 중에서도 누가 최고의 꽃미남이었을까? 이를 가리기 위해 <화랑세기>의 표현을 좀 더 세밀하게 검토해 보기로 한다.

 

꽃미남 풍월주 15명의 외모에 관한 기록을 읽다 보면, 우리는 크게 4가지의 인상적인 표현에 접하게 된다. 첫째는 옥(제1세·제4세·제16세·제18세), 둘째는 꽃(제4세·제24세), 셋째는 풍채(제5세·제6세·제7세·제17세·제26세), 넷째는 태양(제15세)이다.

 

그런데 제15세 풍월주인 유신의 외모가 "태양과 같았다"는 표현은 그의 얼굴이 잘 생겼다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풍모가 태양처럼 빛났다는 뜻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태양'을 '풍채'에 포함시켜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신라인들이 남자의 외모를 평가할 때에 사용한 표현 중에서 옥·꽃·풍채라는 요소가 가장 중요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옥·꽃·풍채 중에서 풍채는 얼굴보다는 몸 전체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꽃미남을 가리는 데에 사용된 표현은 옥과 꽃 두 가지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옥과 꽃 중에서는 어느 쪽이 더 중요했을까?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고대 동아시아인들에게 옥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중요했다는 점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 이후로 옥은 중국에서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예를 들어, 하나라 수도였던 은허에서 발굴된 하나라 왕후의 무덤에서 755개의 옥기(玉器)가 발견된 사실은 옥이 고대 동아시아에서 가진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꽃보다는 옥이 상대적으로 더 좋은 표현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에, 우리는 '얼굴이 옥과 같았다'라는 평가를 받은 네 명의 풍월주에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제1세 위화, 제4세 이화, 제16세 보종, 제18세 김춘추가 바로 그 '최후의 4인'이다. 이들 중에서 보종과 김춘추는 현재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런데 '얼굴이 옥과 같았다'는 평가를 받은 네 명 중에서 제4세 이화의 경우에는 얼굴이 옥과 같았다는 게 아니라 피부가 옥과 같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얼굴 전체가 옥과 같았다는 평가를 받은 위화·보종·춘추가 '최후의 3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 명을 놓고 굳이 순위를 매긴다면, 아무래도 제1세 풍월주인 위화에게 시선이 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얼굴이 백옥 같았을 뿐만 아니라 입술은 붉은 연지 같고 눈동자는 맑고 이는 하얗다'라는 화려한 평가를 받은 위화가 최고의 꽃미남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고의 꽃미남 풍월주' 위화에 관한 <화랑세기>의 묘사는, 수많은 사랑 노래 중에서 가장 으뜸이라는 솔로몬의 사랑 노래 즉 성경 아가서의 시를 연상케 한다. 아가서 제4장에서 솔로몬은 자신의 연인을 두고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라면서 '네 눈은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염소 같고 네 입술은 홍색 실 같으며 네 뺨은 석류 한쪽 같다'고 한 뒤에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라며 정말로 대단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만약 위화의 연인도 솔로몬 같은 시인이었다면, 그 역시 위화의 얼굴을 이처럼 아름답게 묘사하지 않았을까. 같은 남자가 평가했기 때문에 '고작' 얼굴은 백옥 같고 입술은 붉은 연지 같고 눈동자는 맑고 이는 하얗다 하는 정도의 평가밖에 받지 못한 게 아닐까. 이처럼 적어도 기록에 의거할 때에는, 초대 풍월주인 위화가 신라 최고의 꽃미남 풍월주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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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 앞에 무릎 꿇은 유신, 진짜였을까 | - 신라 시대 2009-09-30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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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 앞에 무릎 꿇은 유신, 진짜였을까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선덕여왕>
09.09.23 10:44 ㅣ최종 업데이트 09.09.23 10:44 김종성 (qqqkim2000)
  
유신(엄태웅 분)과 미실(고현정 분).
ⓒ MBC
김유신

 

우여곡절과 천신만고 끝에 제15세 풍월주 경합에서 최다승을 거둔 김유신(엄태웅 분). 그런데 여러 날 푹 쉰 뒤에 풍월주 추인을 받으러 회의장에 들어갔더니, 설원(전노민 분)이 느닷없이 유신의 비리 의혹을 제기하는 바람에 '추인식'은 '인준 청문회'로 바뀌고 말았다. 그 때문에 유신의 풍월주 추인은 일단 보류되고 말았다.

 

평소 점잖고 순박해 보일 뿐만 아니라 백성 지향적인 경세학(經世學)을 열심히 하길래 '저런 사람이라면 별 문제 없겠거니' 하며 좋게만 봤는데, 웬걸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런 유신에게서도 비리가 터져 나오는 게 아닌가. 가야의 부흥을 꾀하는 복야회와 연계된 가야 유민들에게 무상으로 땅을 내준 사실이 들통 나고 말았으니, 유신은 반역죄로 처단되어도 할 말이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미실(고현정 분)에게 완전히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안 그런 척 하면서 그 정도의 죄를 저지를 정도의 인물이라면, 좀 더 털어보면 상인들로부터 뇌물을 받은 정황이라든가 혹은 고구려·백제·신라 '3중 국적'을 가진 정황이 혹 나올지도 모르는데, 웬일인지 미실은 수사를 중단시키고 유신에게 손을 내민다. 나의 편이 되면 살려주겠노라고. 미실은 유신을 자기 품으로 끌어안고 싶었던 것이다.

 

곧고 강직하기로 소문난 유신. 그런 유신이 "내가 들어가면 가야 유민들을 살릴 수 있다"며 미실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을 선언한다. "이제 새주님의 품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그런 유신(당시 18세)에게 미실(당시 64~67세)은 대답한다. "내가 나이가 늙어 직접 품을 수 없으니 내 손녀 영모랑 혼인을 하시지요!" 천명·덕만 편에 서서 미실과 대립하던 유신이 '미실의 남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21일과 22일의 드라마 <선덕여왕> 제35부 및 제36부에 방영된 위의 내용은 실제 역사와는 무관한 픽션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진짜다. 유신과 미실이 한 편이 되었다는 이야기만큼은 분명히 기록상의 근거를 갖고 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유신은 미실의 도움을 받아 화랑도 부제(2인자) 및 풍월주에 올랐고 또 미실의 손녀인 영모와 혼인을 했다.

 

이 같은 유신과 미실의 정치적 제휴는 신문 지면의 가십거리에 불과한 정도의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이것은 6세기 후반 이래의 세계적 위기에 직면한 신라가 가야세력을 적극 포용하여 국내의 정치적 역량을 총결집한 뒤에 이를 기반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대동강 이남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중대 연결고리였다.

 

김유신은 신라의 대동강 이남 확보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런 김유신에게 출세길을 활짝 열어준 유신과 미실의 제휴는 '역사적 커넥션'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 같은 커넥션이 어떤 배경에 의해, 어떤 과정을 거쳐 전개되었으며, 또 그것은 어떤 영향을 산출했을까? <삼국사기>나 필사본 <화랑세기>는 물론이고 당시의 세계정세를 종합하여 유신-미실 커넥션의 전모를 파헤치기로 한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독자들이 혹시 갖고 있을지 모르는 의문을 먼저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유신이 풍월주가 될 때만 해도 유신 집안의 정치적 대표자는 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이었는데, 서현-미실 커넥션이라고 하지 않고 유신-미실 커넥션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점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들보다 더 유명해지지 못한 아버지는 역사 속에서 '아무개의 아버지'로 기억되어야 하는 '비운'(실제로는 영광)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1> 유신-미실 커넥션의 배경

 

첫째, 거시적 배경. 서기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중반까지 동아시아 세계에는 한바탕의 소용돌이가 크게 휘몰아쳤다. 근 4백년 동안 혼란상태에 있던 중국을 수나라가 통일(589년)하고, 이 수나라가 한무제 때의 영광 즉 팍스 시니카(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재현하기 위해 대외팽창을 시도하고, 그런 수나라를 대체(618년)한 당나라 역시 팍스 시니카 재건에 나섬에 따라 동아시아 전체가 일대 폭풍에 휩싸이고 만 것이다. 웬만한 나라들은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서바이벌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신라가 선택한 카드 중 하나는 가야세력 같은 비주류들을 적극 포용하여 나라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신라 정부는 화랑도라는 관변조직을 통해 제도권 밖의 인재들을 제도권 안으로 흡수했고, 그 결과로서 문노나 유신을 비롯한 가야세력이 화랑도 내부에서 입지를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실의 후원 하에 유신이 풍월주가 되고 또 미실의 손녀사위까지 된 것은 가야세력을 향한 신라 지배층의 적극적인 '러브콜'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새로운 피'의 수혈을 통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자 한 미실의 정치적 고뇌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일은 기본적으로 당시의 세상이 급변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둘째, 미시적 배경. 유신의 어머니는 진골정통(왕비족)으로서 진평왕의 어머니인 만호태후의 딸이었다. 이 점은, 진골정통의 라이벌인 대원신통(또 다른 왕비족)에 속한 미실이 만호태후의 손자인 유신에게 관심을 갖도록 만드는 요인이었다.

 

진흥왕·진지왕 때만 해도 미실과 같은 편인 사도태후(대원신통, 진흥왕의 부인)가 왕실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미실로서는 진골정통에게 굳이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진평왕의 즉위 이후 진골정통인 만호태후가 왕실의 어른이 됨에 따라 미실로서는 만호태후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도 유신의 출세를 적극 돕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 유신-미실 커넥션의 과정

 

제1단계. 609년의 화랑도 부제 추천. 만노군에서 서라벌로 갓 올라온 15세의 유신에게 미실은 큰 선물을 선뜻 안겨주었다. 화랑도 부제인 자기 아들 보종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유신을 적극 추천한 것이다. 부제가 되면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풍월주에 취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신을 부제에 앉힌다는 것은 그에게 풍월주를 약속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2단계. 612년의 풍월주 임명 및 정략결혼. 부제에 오른 지 3년 만인 18세 때에 유신은 풍월주 호림의 양보를 받아 손쉽게 풍월주에 오르는 한편, 미실의 손자인 영모와의 혼인에도 성공했다. 금관가야 왕실의 후예인 18세 소년이 금관가야를 흡수한 '원수의 나라' 신라의 최대 관변조직을 장악하는 순간이었다.

 

위와 같이 '졸지에' 부제에 오른 뒤에 다시 풍월주에 오르고 또 정략결혼을 하는 과정에서 유신은 미실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으며, 이로써 권력의 핵심부에 다가설 수 있는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3> 유신-미실 커넥션의 영향

 

첫째, 신라 정계에 끼친 영향. 유신-미실 커넥션은 신라 정계의 비주류인 가야세력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신라 지배층이 가야세력의 협력을 토대로 고구려·백제에 대한 대항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기여했다. 이전에는 삼국 중 최약체였던 신라가, 비록 나당동맹에 힘입기는 했지만, 고구려·백제를 능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내부적 역량을 결집하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화랑도 조직에 끼친 영향. 유신-미실 커넥션은 화랑도 조직 내부에서 가야세력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제8세 풍월주인 문노 이후로 화랑도 내부에서 기반을 잡은 가야세력이 제15세 풍월주 김유신 시대에 세력을 훨씬 더 크게 늘렸다는 점은, 유신이 풍월주에서 물러난 지 얼마 안 되는 620년대부터 가야세력이 화랑도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미실 계통의 대원신통파를 약화시키는 데에 성공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유신-미실 커넥션이 이처럼 신라 정계나 화랑도 내부에서 가야세력의 입지를 키우는 한편 화랑도 안에서 미실 계통의 대원신통파를 약화시키는 데에 기여한 점을 볼 때에, 이 커넥션의 진정한 승자는 유신이었다는 결론을 내려도 별다른 무리가 없을 것이다.

 

드라마 속의 유신은 미실에게 무릎을 꿇으며 "새주님의 품으로 들어가려 합니다"라며 항복을 선언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유신이 폭탄을 안고 미실의 품에 뛰어들었고 그로 인해 미실 쪽만 손상을 입은 셈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런 점을 본다면, 김유신이 미실을 죽이는 '사주'를 갖고 태어났다고 해석해도 별다른 무리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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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의 최후, 실제론 어땠을까 | - 신라 시대 2009-09-30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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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의 최후, 실제론 어땠을까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선덕여왕>
09.09.29 11:49 ㅣ최종 업데이트 09.09.29 14:22 김종성 (qqqkim2000)
김유신(엄태웅 분)은 미실(고현정 분)의 지원 하에 풍월주에 오르고 김춘추(유승호 분)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서책을 뜯어 종이 주사위나 만들고 있는 가운데,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생뚱맞은 암살사건이 발생했다. 국선이자 풍월주였던 문노(정호빈 분)가 염종(엄효섭 분)이 보낸 자객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문노의 피살은, 유신을 '왕보다 더 큰 자'로 만들려는 문노와 이를 어떻게든 저지하려는 비담(김남길 분)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던 와중에 발생한 사고였다. 문노가 자신이 아닌 유신에게 <삼한지세>라는 서책을 물려주려 한다는 사실에 분노한 비담의 도발로 인해 사제 간에 검투가 벌어졌고, 그 틈에 자객이 등 뒤에서 칼을 날려 문노를 쓰러뜨린 뒤에 서책을 훔쳐 달아난 것이다.

 

문노 암살의 몸통, 염종인가 춘추인가

 

  
ⓒ iMBC
선덕여왕

평소 같았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을 문노가 그 정도의 공격을 막지 못해 자기 목덜미를 움켜잡고 쓰러지다니, 정말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의 이치는 오로지 조물주만이 알 수 있듯이, 드라마의 이치는 오로지 작가만이 알 수 있는 것일까. 그런 불가사의에 의해 문노는 사망 아니 '하차' 하고 말았다.

 

문노가 쓰러진 뒤에야 잘못을 깨달은 듯 눈물을 흘린 비담은, 스승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삼한지세>를 되찾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피를 잔뜩 묻힌 칼을 들고 염종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삼한지세>로 종이 주사위를 만들어 노는 주인공은 다름 아닌 춘추였다. 이 사실에 비담은 크게 놀란다. 대체 문노 암살의 몸통은 염종인가 춘추인가?

 

28일 <선덕여왕> 제37부에 방영된 위의 내용은, 대단히 그럴싸하기는 하지만, 모두 다 픽션에 불과하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문노(538~606년)가 사망한 것은 유신이 풍월주에 오르기 6년 전인 606년이었다. 따라서 기록대로라면 문노는 진작 죽었어야 마땅했다.

 

문노가 사망한 시점은 606년, 그의 나이는 69세였고 유신과 춘추는 각각 12세 및 5세였으므로, 그들이 역사무대에서 서로 뒤엉킬 여지는 전혀 없었다. 비담 역시 이 시기에는 어렸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가 문노의 죽음에 대해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 속 이러저러한 픽션은 그렇다 치더라도, 무엇보다 <선덕여왕>에서 묘사된 문노의 최후가 실제의 최후와 판이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냥 판이한 정도가 아니라 '너무' 판이했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문노의 실제 최후는 어떠했을까?

 

역사 속 문노는 '풍월주 유신랑' 못 봤다

 

  
ⓒ iMBC
문노

문노의 실제 최후가 어떠했는가를 이해하려면, 그가 생의 최후에 이르기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머니가 가야 출신이라는 이유로, 또 제23대 법흥왕(재위 514~540년) 말년에 병권을 장악한 아버지가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년)의 즉위 이후로 정치적 왕따였다는 이유로 청소년 시절의 문노는 비주류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다.

 

고구려·백제를 상대로 아무리 군공을 세워도 신라 정부에서는 '출신성분'을 이유로 문노에게 그 흔한 '훈장' 하나 달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문노는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했다. 그는 검을 잘 다루었고 기개가 대단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잘 조직했다. 필사본 <화랑세기> 제7세 설원랑 편 및 제8세 문노 편에 따르면, 그는 탁월한 조직력의 소유자였다.

 

문노가 찾은 돌파구는, 기존의 화랑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제2의 화랑도를 독자적으로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문노는 가야세력과 서민세력을 규합하여 572~576년의 어느 시점에 풍월주 설원랑에 맞서 제2의 화랑도를 건설했다. 화랑도가 2개의 파로 갈리는 순간이었다. 진흥왕 사망(576년) 얼마 전의 일이었다.

 

문노가 이끄는 제2의 화랑도가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하자, 신라 정부에서는 이를 없애기보다는 제도권 안으로 흡수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제25대 진지왕(재위 576~579년)은 집권 초기에 제2의 화랑도를 승인하는 한편 문노를 국선에 임명했다. 이로써 신라에는 풍월주 설원랑이 이끄는 기존의 화랑도와 국선 문노가 이끄는 제2의 화랑도가 합법적으로 병존하게 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복수 노조가 합법적으로 공존하는 것과 같았다고 할 수 있다.

 

미실과 손잡은 뒤 세속의 즐거움 알아버린 문노

 

  
ⓒ iMBC
선덕여왕

제도권 내부로 흡수되기는 했지만 문노가 이끄는 조직은 신라 왕실에게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가야 출신들로 구성된 데에다가 서민들이 대거 가담한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진지왕 폐위를 계획하던 사도태후-미실 정권은 문노 세력이 거사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막는 한편 이들의 역량을 거사에 활용하기 위해 국선 문노에게 통합을 제의했다. 이는 양대 조직을 통합하자고 제의한 것인 동시에 진지왕 폐위에 동참하라고 제의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2개의 화랑도가 통합되고 뒤이어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년) 즉위 후에 문노가 설원랑에 이어 제8세 풍월주를 차지하게 되었다. 문노를 국선이라고도 부르고 풍월주라고도 부르는 것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정상적인 코스를 밟았더라면 화랑도 안에서 출세하기 힘들었을 문노는 이처럼 제2의 화랑도를 건설한 뒤에 이를 기반으로 기존 화랑도와 통합하는 방법으로 화랑도의 수장에 오르게 되었다.

 

이처럼 비주류의 한계를 뚫고 주류사회를 향해 과감히 압박해 들어오는 문노의 존재에 대해 특별히 주목한 한 여인이 있었다. 그는 바로 미실이었다. 가야인들과 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 특히 비판적인 문노를 어떻게든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것이 미실의 판단이었다.

 

미실이 문노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사용한 계책은 소위 '미인계'였다. 자신의 사촌 자매인 윤궁을 문노에게 소개해준 것이다. 문노가 제2의 화랑도를 바탕으로 국선의 자리에 오른 576년 이후의 일이었다. 이때만 해도 문노의 신분이 낮아서인지, 골품이 없는 문노와 진골 골품의 윤궁은 정식 혼인을 치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정식 부부가 된 것은, 문노가 진평왕 옹립 때에 세운 공을 발판으로 골품을 얻음으로써 양쪽의 신분이 대등해진 이후의 일이었다.

 

사촌 자매인 윤궁을 이용해서 문노를 자기편으로 만들겠다는 미실의 전략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화랑도 정신을 내세우며 미실의 정치개입을 비판하던 문노가 윤궁과의 사이에서 첫아들 대강을 얻은 뒤로는 미실에 대한 태도가 서서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종전 같았으면 철저하게 미실을 비판했을 문노가 첫아들 대강을 낳은 뒤로는 미실에 대해 말 그대로 '대강 대강' 대처한 것이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문노의 태도가 바뀐 데에는 윤궁의 끊임없는 설득이 주효했다고 한다. "미실에게 잘해야만 우리 자식들이 잘살 수 있다"며 윤궁이 계속해서 남편을 설득했던 것이다. 

 

자신을 두고 "초년의 기상이 없어졌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이에 대한 문노의 반응은 아주 명쾌했다고 한다. "너희도 살아보면 안다!" 미실 앞에서 핏발을 세우던 드라마 속의 문노와는 너무나 딴판의 모습이었다. 부인 윤궁의 집요한 설득 속에 문노는 미실의 '순한 양'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청년 문노'의 극대화

 

'작은 것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묘미'를 알기 시작한 문노는 582년에 45세의 나이로 풍월주에서 퇴임한 후 그런 묘미에 더욱 더 빠져버렸다고 한다. <화랑세기> 문노 편에 따르면, 풍월주에서 물러난 이후로 문노는 아내와 함께 수레를 타고 야외로 소풍 나가는 것을 즐겼다고. 드라마 속 문노는 서라벌에서 잠적한 뒤로 농촌에서 의료봉사를 했다고 했지만, 실제의 문노는 이처럼 안락하고 여유로운 말년을 보냈던 것이다.

 

부인과 함께 세상을 즐기는 한편, 문노는 퇴임 이후에 두 가지를 더 배웠다. 하나는 술이고 하나는 여자였다. 40대 중반에 들어 처음으로 술을 배우고 또 처음으로 첩을 들인 것이다. 술과 여자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새 사람이 되었다. 시시비비 가리기를 좋아하던 사람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늦게 배운 도둑이 더 무섭다고 했던가. 검술과 화랑도 기개를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조직력을 보유했던 '청년 문노'는 어느새 술과 여자와 화목을 우선시하는 '중년 문노'로 변하고 말았다.

 

그것을 '변절'이라고 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변절'의 삶을 살던 문노, 그는 606년에 별 탈 없이 최후를 마쳤다. 정의에 불타던 청년 시절과 달리 이미 현실에 타협해버린 늙은 문노는 인생을 맘껏 즐기다가 편안하게 인생을 마감했다. 수나라의 중국통일 이후로 당시의 동아시아를 휩쓸던 정치적 격변이니 신라의 위기 하는 것들은 이미 문노의 관심 밖에 있었다.

 

비담 같은 부담스러운 제자가 "내 책 내놓으라!"며 칼 들고 설칠 일이 전혀 없는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실제의 문노'는 술과 여자와 화목을 맘껏 향유하다가 편안히 눈을 감았다. 유신에게 비법을 전수하려다가 불의의 피살을 당해 목덜미를 움켜잡고 쓰러진 '드라마 속 문노'의 최후는 실제의 최후와 비교한다면 정말로 멋진 최후라고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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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가 만들어낸 최고 걸작, '무' | 나의 서재에는 어떤 책이? 2009-09-30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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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가 만들어낸 최고 걸작, '무'
[서평] 우주의 구멍
09.09.28 21:21 ㅣ최종 업데이트 09.09.29 08:42 정부흥 (bhchung)

터무니 없는 무(無)

 

누구나 컴퓨터 프로그램 '엑셀'을 별 생각 없이 다양한 업무에 사용한다. 그러나 7년 전 아들이 군에 갈 때만 해도 실탄의 재고량 파악을 계산기에 의존했다. 3명의 행정병들이 2~3일씩 진을 빼는 모양이었다. 행정병이 된 아들은 엑셀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혼자서 5~10분 동안에 그 일을 처리하였다.

 

시간, 하루, 온도, 거리, 자, 우주 등 실존하는 모든 것은 공간 상의 위치와 시간의 출발점을 갖는다. 무(無)는 모든 실체의 원점과 목표점, 회전축과 기준틀을 제공한다. 우리에게서 '진공', '허공', '공간', '0'으로 표현되는 무(無)를 빼앗아간다면 수학체계며 현대과학체계, 심지어 상업체계까지 한 순간에 무너진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사는 사람들은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

 

무(無)는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며 잠재적인 힘이다. 무(無)가 가시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면 '물질', 물리학적 표현은 시공간의 '마당(Field)', 수학에서는 '0'이며, 천문학 용어로는 '우주', 불교용어로는 '공(空)'이다.  한가지 개념인 무(無)가 여러 가지로 표현되는 것은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무(無)는 우주가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어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태이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이러한 상태를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는 고요 또는 적막의 상태로 느낀다. 어떤 이유로든 국지적으로 우주의 대칭이 깨어지면 다시 대칭을 이루기 위한 에너지의 흐름이 발생하고 '에너지와 질량은 등가이다'라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일치한 질량을 갖는 물질이 생성되는 되는 것이다.

 

현대 과학에 의해 알려진 우주의 구성 물질과 힘은 전체의 4% 정도이다. 나머지 대부분인 96%는 존재한다는 사실만 알 뿐 구체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과학 칼럼니스트인 K.C. 콜(Cole)은 미지의 96% 물질이 무한대의 중력을 갖는 우주의 구멍(Black Hole)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론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를 그녀의 저서 제목인 <우주의 구멍(The Hole in the Universe)>에서 설명하기 위해 무(無)에서 출발하여 우주에 이르는 여정을 통해 일반인도 이해하도록 쉽게 설명하였다.

 

숫자 0

 

  
▲ 우주의 구멍 로스앤젤레스 타임지의 과학칼럼니스트인 K.C. Cole이 무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위하여 쓴 책
ⓒ 해냄
불랙홀

로마숫자에 숫자 0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몇 십만 명에 이르는 '카이사르' 원정군의 야전행정병을 해본 경험이 없으니, 병참물자의 입고 및 반출, 전출 또는 전입자 현황, 부상자 및 전사자 파악의 업무가 얼마나 힘들고 복잡한 일이었는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없다', '공'이다, '꽝'이다, 등 재수없고 기분 나쁜 이미지인 무(無)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무한대인가 싶다가 어느덧 다시 0이 된다. 붙잡을 수 없이 날 뛰면서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들을 괴롭히던 골치 아픈 문제아였다. 이러한 0의 성질 때문에 0은 언급 자체가 금지된 신성모독의 대상이었다.

 

수천, 수백만 같은 큰 숫자를 자주 사용해야 하는 1세기경 마야와 인도의 천문학자들은 숫자 0을 발명하였다. 9세기경 아랍세계로 건너갔지만 일반적인 숫자로 취급할 수 없는 여러 가지 특성 때문에 냉대를 받고 이탈리아 사람 피사노의 1202년에 발간된 <주판의 책>에 의해 우리에게 익숙한 수 체계로 소개될 때까지 무관심 속에 묻혀 잊혀졌다.

 

그러나 이 때에도 '이교도'라는 비난을 면치 못한 0은 숫자가 되지 못하고 플러스(+)나 마이너스(-)같은 부호로 사용되었다.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산술과 기하에 0이 사용된 것은 그로부터 수 백 년이 지난 후이다. 양, 부피, 길이, 폭, 변, 각의 의미를 갖지 못한 0은 대수학에 뿌리를 내릴 때까지 모든 실체의 가운데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무(無)가 뉴턴과 라이프니치에 의해 발명된 미분에 붙잡혀 실체가 드러나면서 모범생이 되고 아인슈타인이 펴 놓은 중력장 위에 자리하면서 존재하는 실체가 되어 현세를 떠받치는 대들보가 되었다.

 

모든 주파수의 빛을 합치면 무색인 태양광선이 되듯이 어떤 수라도 0과 곱하면 0이 되고 0으로 나누면 폭발해 버린다. 0(없다)과 그의 대칭적인 1(있다)은 자기 자신과 나누면 자기 자신이 되는 아주 특이한 수이다. 0과 1의 조합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2진법으로 작동하는 컴퓨터의 능력을 감안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0으로 표시하는 무(無)는 잠재적이긴 하지만 유(有)이고 실체이며 모든 것이다.

 

과학은 뒷받침할 증거가 있어야 한다

 

해질녘 고즈넉한 해변가를 따라 걷다 보면 누구나 한번쯤 도도히 밀려오는 밀물과 마주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현상을 연인과 사랑을 속삭이기 위한 분위기와 배경음악으로 간주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갯벌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에 풍부한 영양을 실어 나르는 생태계의 조화로 볼 수도 있고, 또, 지구와 달의 질량에 의한 중력작용과 이로 인한 시공간의 휨으로 연결되는 일반상대성이론의 마당(Field)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크고 작은 사건은 보는 이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 발생원인은 복합적이고 복잡할 수 있으나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대칭을 이루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무(無)가 된다. 가능성이라고 볼 수 있는 무(無)는 현상으로 나타나기까지는 우리의 육감으로 인식할 수 없는 그 무엇인 것이다.

 

1929년 허블은 은하들이 서로 멀어져 가는 팽창하는 우주를 관찰했다. 이러한 사실은 '최초의 우주는 시간과 공간이 없는 점이었다'라는 상상하기 어렵고 믿기는 더 어려운 사실을 사실로 만들었다. 이 점은 형태도 없고 크기도 없으면서 무한대의 질량을 갖는 그 무엇으로 모든 것을 끌어당겨 형태와 크기를 없애버리는 우주의 구멍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65년 두 전파천문학자 월슨과 펜지어스는 우주의 대폭발 때 발생하여 지금까지 우주에 떠도는 빛의 파장을 기록했다. 이로부터 초신성이 된 우주 구멍의 무한대 질량이 또 무한대의 질량을 합치는 상태를 계속하다 보면 초무한대의 질량이 되고 이를 지탱하지 못하는 우주의 구멍은 순간적으로 폭발하여 우주를 지배하는 힘들이 형성된 사실의 증거가 되었다. 대폭발의 잔류물들이 다시 모여 태양계를 이뤘다.

 

최근까지 하나의 학설에 불과한 우주의 대폭발론은 2003년 이후 정밀과학분야가 되었다. 현대과학은 우주의 역사를 대폭발 후 10억 분의 1초의 정확도로 구별하게 되었다.

 

거시적 우주론인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과 미시적 규모의 양자역학 사이의 상반된 모순된 현상인 양자의 요동과 에너지보존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양자의 생멸을 주관하는 진공의 역할에 있다. 즉, 무(無)는 거시적이며 동시에 미시적인 세계가 되는 것이다.

 

무(無)를 보는 방법

 

"부처는 허공을 본 유일한 사람이다"라고 말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통해 우주의 본질을 파헤치지는 못했지만 과학적으로 공(空)의 실체를 규명한 사람이다. 우주는 무(無)고 공(空)이지만 실체이기 때문에 곳곳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우주를 느끼고 못 느끼는 것은 개개인의 소양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각의 신경을 통해 의식할 수 있는 것만 믿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필요하지 않는 것은 지우고 필요하면 없는 것도 만들어 낸다. 우리가 자신의 코끝을 보지 못하는 것이나 망막의 맹점을 영상의 공백대로 느끼지 않은 이유이다. 우리가 시신경을 통해 볼 수 있는 범위는 우주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테니스나 등산 같은 격한 운동 후, 찬 맥주 한잔의 맛을 즐기기 위해 따개로 맥주병 뚜껑을 젖히는 순간 맥주 속의 빈 공간에 포획된 탄산가스 분자들이 공간으로 사라진다. 보지 못하나 맥주 속에 탄산가스가 들어있던 빈 공간이나 이 빈 공간을 메우고 있던 탄산가스는 존재하는 실체이다.

 

보지 못하더라도 인식 할 수 있는 탄력적인 능력을 갖는 사람이면 좋겠다. 무(無)의 인식이 이 세상에 태어난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공(空)을 모르면 돌아갈 곳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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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연혁 | - 남한산성 2009-09-29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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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연혁

 

5C

 

백제온조왕이 처음 하남 위례성에다 도읍을 정했으나, 온조대왕  8년 춘2월  말갈3천이 위례성을 공격함에 따라 온조대왕 14년 춘정월  한산으로 천도.

663

 

신라 문무왕(文武王)3년 한산주에 속함.

672

 

문무왕 12년 당병(唐兵) 을 막기위해 한산주(漢山州) 동봉(東峰)에 토성으로  축성 주장성(晝長城) (일명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함.:

940

 

고려태조(太祖)23년, 광주라는 지명 확정.

1595

 

조선 선조(宣祖)28년, 남한산성 축성을 계획했으나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함.

1621

 

광해군(光海君) 13년, 남한산성을 경도보장지(京都保障地)로 정하고  후금(後金)의 침입을막고자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

1624

 

인조(仁祖)2년, 대대적인 국가사업으로 수축하여 인조4년(1626)4월에  준공, 이괄(李适)의 난을 치르고 후금국의 위협이 증가하자 수도의  보장지책으로, 가까운곳에 축성을 해야한다는 조정공론이 본격화 되어  총융사(摠戎使)이서(李曙)에게 축성을 명, 8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기존의  망월사,옥정사외에 7개의 군막사찰을 새로 축성하고 남한산성을 석성으로 개축.

1626

 

광주읍치를(廣州邑治)를 산성으로 이전

1636

 

인조14년, 병자호란시 인조가 산성으로 피난하여 항전.

1638

 

인조16년, 백제시조 온조대왕과산성축성당시 책임자였던 이서의  영혼을함께모신 사당이 건립, 이후 정조19년(1795)숭열(崇烈)이라 사액.

1672

 

현종(顯宗)13년, 부윤 이세화(府尹 李世華)가 지수당(地水堂)건립.

1686

 

숙종(肅宗)12년, 봉암외성(峰巖外城) 축조.

1688

 

숙종 14년, 유수 이세백(留守 李世白)에 명하여 삼학사의 충혼을  위로하기위한 사당건립, 숙종 19년(1693) 봄에 현절(顯節)이라 사액.

1719

 

숙종 45년, 신남성(新南城) 축조

1751

 

영조(英祖) 27년, 유수 이기진(留守 李箕鎭)이 왕명을 받아  서장대(西將臺)위에 2층 누각을 세우고 외편은  '수어장대(守禦將臺)'내편(內扁)은'무망루(無忘樓)' 라 함.

1788

 

정조12년, 부윤 이태영(府尹 李泰永)이 서장대를 본떠 남장대에 2층 누각  증축

1798

 

정조 22년, 유수 홍억(留守 洪憶)이 행궁 외삼문(外三門)의 문루로서  한남루(漢南樓) 건립.

1804

 

순조(純祖)4년, 유수 김재찬(留守 金載瓚)이 관어정(觀魚亭) 건립

1817

 

순조17년, 유수 심상규(留守 沈象奎)가 좌승당(坐勝堂)건립.

1894

 

산성 승번제도 폐지로 산성관리가 소홀해짐.

1895

 

갑오개혁으로 모든제도가 개혁되면서 광주군으로 개편.

1905

 

남한산성에서 일제의 무기화학 수거령거부.

1907

 

일본군에 의한 무기화약 폭파로 남한산성의 문화재훼손

1963

 

님한산성의 성곽을 중심으로 산성리 산 일원을 국가사적 제 57호로 지정.

1972

 

수어장대를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호로,숭열전을 제2호로, 청량당을  제3호로, 현절사를 제4호로, 침괘정을 제 5호로,연무관을 제6호로 각각지정.

1983

 

경기도 문화재자료 지정: 지수당을 제14호로, 장경사를 제15호로 각각지정.

1989

 

망월사지를 경기도 지정 기념물 제111호로, 개원사지를 경기도 지정 기념물  제119호로 각각 지정.

1997

 

행궁지를 경기도 지정기념물 제164호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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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가는 길 | - 남한산성 2009-09-29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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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가는 길

 

버스(성남쪽노선 9번 ) [산성역에서 정시에서 5분사이와 매 30분에서 35분사이]

 

모란-중원구청-태평동-산성역-은행시장-서울보건대-스포랜드-남문 -산성로타리

 

버스 (광지원노선 15-1번)[광지원출발 매정시에서10분사이]

 

광지원리-오전리-불당리(후원)-검복리-동문(장경사입구)-산성로타리

 

지하철8호선이용

산성역에서 하차 - 산성역2번 출구에서 9번 승차

 

승용차이용

남문 쪽진입

1) 잠실 - 가락동 - 복정 사거리 - 약진로 - 산성역 - 남문 - 산성 로타리

2) 강남 - 양재 - 헌인릉 앞 - 세곡동 - 복정사거리 - 약진로 - 산성역 - 남문 - 산성 로타리

3) 분당 - 모란 - 태평사거리 - 시청앞 - 산성역 (신흥주공) - 남문 - 산성 로타리

4) 수원 - 신갈 - 분당 - 모란 - 태평사거리 - 시청앞 - 산성역 (신흥주공) - 남문 - 산성 로타리

5) 안양 - 의왕시 - 판교JC - 성남 - 복정IC - 약진로 - 산성역 - 남문 - 산성 로타리

동문쪽 진입

1) 워커힐 - 천호대교 - 길동 - 중부고속도로 상일동 IC - 황산 삼거리(국도 43번) - 엄미리(은고개) - 광지원 - 오전리 -

    불당리 - 검복리 - 동문(장경사입구) - 산성 로타리

2) 중부고속도로 경안IC(서울, 하남시 국도 43번) - 광지원 - 오전리 -

    불당리 - 검복리 - 동문(장경사입구)- 동문 - 산성 로타리

입장요금표
구분 어른 청소년 및 군인 어린이
개인 1,000 원 600 원 300 원
단체 700 원 300 원 200 원

※ 2004년 1월 1일부터 음식점에서 확인도장 받으시면 입장료 환불 받습니다.

시설사용요금표

구분 차종 요금 (단위:원)
시설사용료 1. 이륜차 500
2. 승용차

 

영업용(일반승객탑승택시) - 면제
자가용 - 1,000

3. 버스

12인승 미만 - 1,000
12인승 이상 - 2,000
영업용(노선버스) - 면제

4. 화물차

4.5톤 미만 - 1,000
4.5톤 이상 - 2,000

 

.

남한산성의 주요 전화번호

 

남한산성 관광안내 자동응답 (02) 134-1031~2

관리사무소 (031) 743-6610

중부 파출소 (031) 743-0003

의용 소방대 (031) 74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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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대화] 맹자, 청와대를 방문하다 | - 孔 孟子 2009-09-28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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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대화] 맹자, 청와대를 방문하다
이 대통령 "어찌 의(義)를 말하십니까?"
09.09.28 16:04 ㅣ최종 업데이트 09.09.28 16:04 김시열 (banzzok)

맹자가 청와대로 이명박 대통령을 방문하고 물었다.

 

"대통령께서 청와대에 들어온 지 2년이 다 되어가니 장차 이 나라를 의롭게 할 방도를 가지고 계시겠지요?"

 

이 대통령이 길게 답한다.

 

맹자께서는 어찌 의를 말씀하십니까? 오직 이(利)와 사(私)가 있을 따름입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내 나라에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나는 스스로 일어서려는 서민들에게 낮은 금리로 자금을 대출해줘서 자활의지를 뒷받침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중도실용 서민정책의 핵심임을 이미 밝혔습니다.  이만한 이(利)로움이 따로 없습니다.

 

서민에게는 보금자리주택을 지어 월세, 전세주고 대학생들에게는 학자금을 저리로 대출합니다. 영세상공인들에게는 대기업들이 출연해서 만든 자금으로 직접 금융지원을 하지요. 어떤 이는 전 국민을 빚쟁이로 만드는 정책이라고 이야기합니다만, 온 국민이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이로운 나라가 내가 추구하는 나라입니다.

 

위 아래 서로 다투어 이(利)를 추구하면 나라는 절로 부강

 

내가 이(利)를 앞세우니 국무총리 될 분도 사리를 추구하는 것이 남다릅니다. 배우자위장전입, 병역기피, 다운계약서 작성, 소득세 탈루, 논문중복게재, 사기업체고문겸직 등 아직까지는 의혹수준이라고 합니다만 국무총리를 맡으실 분이라면 이 정도 사리는 챙겨야 합니다. 사리(私利)는 경쟁력이니까요.

 

이 분이 국무총리가 되시면, 고급 공무원에서 서민들까지도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벌써 공직자 가운데 쌀직불금 부당수령 신청한 사람이 2988명에 이릅니다. 더 나와야겠지요. 모름지기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위 아래가 서로 다투어 이(利)를 추구하게 되면 나라가 절로 부강해질 겁니다. 개인의 사사로운 이가 모이면, 결국 나라의 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맹자 말씀처럼 '의'를 존중하고, '이'를 경시한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앞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발전할 수 없을뿐더러, 나라도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전국칠웅이 다투던 전국시대나 지금이나 세상은 '총성 없는 전쟁'입니다.

 

오로지 이(利)로써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둘러보세요! 어진자로 가난하지 않는 자가 없고, 의로운 자로 관직에 오르거나 국회에 들어간 자가 없습니다.

 

맹자께서는 오직 이(利)와 사(私)를 말씀하실 일이지, 어찌 의를 말씀하십니까?

덧붙이는 글 | 한겨레신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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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대형화 현상은 교회 문제의 핵심" | 이 책 꼭 읽자 - 기독교 2009-09-27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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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대형화 현상은 교회 문제의 핵심"
[연합뉴스] 2009년 09월 27일(일) 오전 09:00 
 
 
신광은 목사 '메가처치 논박' 출간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 "'메가처치(Mega church)' 현상은 무능력, 부패, 타락 등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모든 문제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교인수 3천명이 넘는 대형 교회를 가리키는 '메가처치'. 거대한 예배당이나 광장에 수천, 수만명의 교인을 운집시키는 메가처치는 미국에서 탄생했지만, 본격적으로 위세를 떨치는 무대는 한국이다.

소장파 신학자 신광은(43)목사가 내놓은 책 '메가처치 논박-나의 교회여, 크기에서 자유하라!'(도서출판 정연 펴냄)는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숱한 책들 가운데 보기 드물게 교회의 대형화 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신 목사는 "한국 교회의 위기는 메가처치 현상에서 출발한다"며 "교회의 크기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한국 교회가 앓고 있는 질병을 제대로 진단해 치료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교회의 성장주의나 영웅주의, 세속적 경영 등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많지만 교회의 크기 자체는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대형화는 여러 문제점 중 하나로 언급만 되거나, 대형 교회에도 좋은 점이 있다거나 훌륭한 목사님이 많다는 정도의 이야기들이었지요. 하지만, 교회의 대형화는 신학적으로도 교회가 하느님의 말씀과 멀어지게 하는 가장 본질적인 원인이 되고 있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는 "교회의 대형화는 목사의 생계와 교회의 운명이 결합하면서 시작됐지만 1-2세기까지 초기 교회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복음을 전하는 소규모 가정교회 형태였고, 이런 형태가 성서의 근본정신과 가장 부합한다"고 지적했다.

교회가 이렇게 덩치가 커진 것은 마르틴 루터-장 칼뱅으로 이어지는 종교개혁자들이 중세 가톨릭의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과를 냈으나 교회 자체의 문제에 대해 소홀히 해 개별교회주의로 가는 물꼬를 터준 데서 비롯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특히 '자유와 기회의 땅'으로 불리던 자본주의 사회인 미국에서 개별 교회들이 성장 경쟁을 했고 이런 흐름이 한국으로도 수입돼 1970년대부터 교단의 힘이 약화하면서 개별 교회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자본주의라는 세속의 흐름과 교회 내 신학적 왜곡이 결합하면서 메가 처치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된 것입니다"

그는 "'메가처치도 건강한 것이 있다,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메가처치 현상에 면죄부를 주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 현상은 구조적 역사적 흐름인 만큼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진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1만명, 2만명의 교인을 모아달라거나, 몇백만평의 부지를 갖게 해달라는 기도들이 신학생들 사이에서나 개척교회 신자들 사이에서도 흔해졌습니다. 기독교인의 역할모델이 메가처치가 된 것입니다. 대형 경기장에 몇만명 모아놓은 부흥회 사진을 자랑스럽게 홍보하는 것들이 원래 하나님의 뜻이었을까요."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지금이라도 당장 메가처치들을 쪼개서 해체하자는 이야기일까.

그는 "단순히 교인 숫자를 줄이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라며 "우선 메가처치 현상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냉정하게 짚어보고 진짜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핵심을 피하지 말고 연구하려는 흐름을 만들어나가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끼리 연합하거나 심지어 가톨릭과도 연합할 수 있는 에큐메니칼(교회일치ㆍ연합)한 대화가 시작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신 목사가 지난해 4-12월 진보적 인터넷 기독교언론인 뉴스엔조이에 17회에 걸쳐 게재한 '메가처치 논박'은 10만회가 넘는 조회건수를 기록했다. 이번 책은 당시 글에 상당 부분을 추가해 엮은 것이다.

모태신앙인 신 목사는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지만,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학과 신학을 전공하고서 프랑스의 기독교사상가 자크 엘륄을 다룬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대전 유성구의 자택에서 소수 교인이 모이는 가정교회인 열음터교회를 이끄는 그는 "인터넷에 글을 게재할 당시 '가정교회는 이단이다'라는 댓글을 보고 한국 사회에서는 이미 최소한 몇백명이 모여야 하고 목사와 강연대가 있는 회중교회가 참교회라는 인식이 굳어진 것 같아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chaeh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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