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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츠와나(bostwana) | 세계 - 어찌 돌아가고 있나 2010-01-31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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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츠와나(bostwana)

 

보츠와나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성공한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영국의 보호령을 오랫동안 무시하면서 보츠와나는 1966년에 독립을 하게 되며 그 후 바로 세계에서 가장 매장량이 많은 다이아몬드 광산 중에 3곳을 발견함으로써 뜻밖에 엄청난 행운을 얻게 된다. 오늘날 보츠와나는 비교적 개화된 정부가 있으며 의료, 교육, 경제수준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남아프리카와 경쟁하고 있는 곳이다.

대부분의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좁다란 동부지역을 제외하고 보츠와나는 대개 길이 없는 황량한 사반나, 사막, 습지대, 염전으로 되어 있다. 보츠와나의 천연자원을 확실하게 보존하기 위해 보츠와나 정부는 높은 비용, 낮은 효과에 기초한 관광수입만 끌어들이는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지독한구두쇠와 유약한 사람이라면 보츠와나가 대담하고 부유한 여행자를 위한 여행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보츠와나지도(12K)

통계 자료

국명: 보츠와나 연방공화국
면적: 581,700 sq km (226,900 sq mi)
인구: 1백40만명
수도: 가보로네(Gaborone) (인구 15만명)
인종: 츠와나 60%, 칼랑가, 산, 음부쿠쉬, 예이, 헤레로
언어: 세츠와나, 세칼랑가, 영어
종교: 조상 숭배, 기독교
정체: 입헌 민주제
대통령: 페추스 모가에(Festus Mogae)

지리 및 기후

아프리카 남부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육지로 둘러싸인 보츠와나는 프랑스와 같은 크기나 텍사스보다 약간 작은 지역을 차지하면서 남북으로 1100킬로미터(680마일), 동서로 960킬로미터(595마일)에 이른다. 림포포(Limpopo)강과 몰로포(Molopo)강이 흐르는 남쪽으로는 남아프리카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북동쪽으로는 짐바브웨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한편 나미비아가 보츠와나의 서쪽과 북쪽국경을 형성하고 있다. 보츠와나의 북쪽 끝에 있는 카춘굴라(Kazungula)에서는 보츠와나, 짐바브웨, 잠비아, 나미비아가 잠베지강(Zambezi River) 중류의 한 지점에서 모두 접하고있다.

보츠와나의 지형은 거의 한결같이 평지로 반건조지대인 칼라하리(Kalahari)사막이 중부와 남서부지역을 포함하여 국토의 거의 85%를 뒤덮고 있다. 북서부는 오카방고강(Okavango River)이 나미비아에서부터 흘러오며 1만5천 평방킬로미터(5850평방마일)의 복잡한 수로와 오카방고 삼각주를 형성한 섬들을 만들면서 모래사막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보츠와나의 건조한 지역에는 독을 내뿜는 3종류의 코브라를 포함하여 70종 이상의 뱀이 서식하고 있다. 독이 있는 붐스랭(나무뱀을 뜻하는 네델란드어)과  덩굴뱀이 오카방고에 흔히 있지만 대개 사람을 괴롭히지는 않는다. 아프리카 남부의 보츠와나가 풍부한 LBJ('작은 갈색뱀들')의 견본장이기도 하지만 일련의 화려하고 이국적인 조류가 서식하고 있기도 하다. 그 중에는 멋진 왕관모양을 한 학, 샐죽하여 '고-어웨이(go-away)'를 외쳐대는 회색 로우리, 엷은자색 가슴털이 있는 아름다운 롤러카나리아, 깃펜을 꽂은 서기를 닮은 새로 뱀을 잡고 위아래로 펄쩍이면서 뱀을 실컷 혼내주는 뚱한 뱀잡이수리 등이 있다.

보츠와나의 멋진 자연공원과 보호구역은 코끼리, 치타, 사냥개, 표범, 하이에나, 기린, 하마, 얼룩말을 포함하여 놀랄 만큼 다양한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보츠와나의 대부분은 아카시아나 가시가 많은 키 작은 관목들이 자라는 사반나로 덮여있다. 보츠와나에서 유일하게 낙엽성 모파인(mopane)숲이 북동부에 있으며 산족의 주요 식량이었던 식용 나무열매가 열리는 몬공가(mongonga)나 마룰라(marula)나무뿐만 아니라 상업용 목재로 쓰이는 나무도 있다. 마룰라나무의 부드러운 목재는 현지공예품으로도 사용되며 그 열매는 현지인의 맥주로 가공되기도 한다.

남회귀선에 걸쳐있지만 보츠와나에서는 기온이 양극을 달린다. 낮에는 보통 맑고 따뜻하고 해가 나지만 밤에는 시원한 정도부터 혹독하게 추운 정도까지 다양하다. 6, 7월에 칼라하리사막에서는 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것이 보통이며 높은 습도와 서리내리는 추위가 일반적이다. 보츠와나는 대부분 건조하지만 여름의 우기는 대략 11월부터 3월까지 계속된다. 5월말부터 8월까지는 보츠와나의 어느 지역에서나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

역사

산(San)족(부쉬맨)이 적어도 3만년동안 보츠와나에 거주한 것으로 여겨진다. 산족에 뒤이어 목축생활을 하는 코이코이(Khoi-Khoi)(호텐토트)족이 나타나고 그 다음에는 AD1,2세기경에 아프리카의 북서부와 동부지역에서 이주해와 코베강(Chobe River)을 따라 정착한 반투(Bantu)족이 나타나게 된다. 츠와나(Tswana)족을 포함하여 또 다른 반투족이 18세기까지 칼라하리 사막에 걸쳐 소규모로 비교적 평화롭게 살았다. 분쟁은 분열을 통해 해결되었으며 불만족스런 집단은 간단히 같이 모여 떠돌아다니다 다른 곳에 다른 영토를 세우면 그만이었다.

1800년까지 칼라하리 사막주변에 목초지로 적당한 모든 땅에는 목축민들이 정착을 하게 되고 평화로운 분열은 더 이상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유럽인이 케이프에 도착하여 북쪽으로 팽창하고 있었으며 1818년 남아프리카에 사는 줄루(Zulu)족이 합쳐진후 감행한 공격으로 츠와나족의 마을이 아주 취약하게 된다. 이에 대응하여 츠와나족은 재집결하여 사회를 고도로 조직화하게 된다. 각 츠와나국은 세습군주가 통치했으며 왕의 백성들은 중심에 집중된 마을과 인접마을에 살게 된다.

마을에 기초한 츠와니족 사회의 규율과 조직은 1800년대 초에 도착하기 시작한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인상적인 것이었다. 누구도 수많은 츠와니족을 개종시키지 못했으며 가끔 뒤이어 도착한 유럽인과의 거래에서 현지인에게 불리하게 조언하기도 했다. 한편 보어인(Boers(네델란드 이주민))들이 츠와나족과 줄루족의 영역을 지나고 거주민에게 백인의 규율을 강요하면서 바알(Vaal)을 넘어 대여행을 시작한다. 많은 츠와나인들이 보어인의 농장에서 일하게 되지만 그러한 협동은 거의 불행한 것이었으며 가끔 폭동과 폭력으로 얼룩지게 된다. 1877년까지 그러한 반감은 영국이 마침내 트랜스바알(Transvaal)을 합병하기 위해 개입하고 첫 번째 보어전이 터지는 정도까지 치솟게 된다. 보어인은 1881년 프레토리아 협약에 따라 빈둥거리다 1882년 츠와나영토로 다시 이주해 옴에 따라 츠와나족이 다시 영국의 보호를 요청하도록 촉구하게 된다.

영국이 개입했지만 츠와나족의 뜻에 따라 움직이지는 않았다. 몰로포강(Molopo River) 남쪽지역은 베추아나랜드(Bechuanaland) 영국 직할식민지가 되었으며 강 북쪽지역은 베추아나랜드(지금의 보츠와나) 영국보호령이 되었다. 몇 년 후 베추아나랜드의 통치권을 세실 로데스(Cecil Rhodes)의 영국 남아프리카회사(British South Africa Company)에 양도할 것처럼 보이던 때를 제외하고 영국이 1966년까지 베추아나랜드를 계속해서 통치하게 된다.1950년대와 60년대에 민족주의가 형성되고 1955년 영국은 베추아나랜드의 지배권을 포기할 것을 준비하게 된다. 1960년의 샤프빌 대학살(Sharpeville Massacre)에 뒤이어, 베추아나랜드 인민당(Bechuanaland People's Party)이 독립을 목표로 하면서 형성된다. 1965년 보통선거가 치뤄지고 세레체 카마(Seretse Khama)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1966년 9월 30일에 보츠와나 공화국은 독립을 하게 된다.

보츠와나는 1967년 오라파(Orapa)부근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됨에 따라 경제적으로 변화를 겪게 된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저임금층이지만 이 광산으로 인해 생긴 부유함으로 보츠와나는 막대한 외환을 보유하고 풀라(pula)화(보츠와나 화폐단위)를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한 통화로 만들게 된다. 보츠와나의 군사비용이 늘어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지만 보츠와나 정부는 실질적이고 서방에 우호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에 보츠와나의 가장 큰 문제는 실업, 도시집중, 폭발적인 인구증가이다.

경제

국민 총생산: US$43억
일인당 국민 총생산: US$3,130
인플레이션: 10%
주요 생산품: 광업(다이아몬드, 구리, 니켈), 농업, 임업
주요 교역국: 스위스, 영국, 남아프리카

문화

보츠와나의 초기 부족종교는 주로 조상들이 지하세계에서 가족문제를 지배하고 가족의 우두머리를 통해서만 접촉할 수 있는 제례 의식이었다. 종교의식에는 남녀 성인식과 비를 내리게 하는 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일부다처제가 관습이었으며 남자의 부동산은 그의 첫째부인의 아이에게 세습되었다.산족의 민속은 착한 소년인 은오디마(N!odima)와 장난을 좋아하는 트릭스터(원시민족의 신화에 나와 주술, 장난등으로 질서를 문란시키는 신화적 형상)인 그카와마(Gcawama)가 잘 혼합된 자연현상에 대한 초자연적인 설명으로 가득하다. 선교단은 거의 모든 전통관습을 몰아냈으며 기독교가 현재 보츠나와에서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영어가 보츠와나의 공식어이지만 가장 일반적인 언어는 인구의 90%이상이 이해하는 반투족의 언어인 세트와나(Setswana)어이다.

원래 보츠와나의 예술가들은 개인적인 미학을 도자기, 직물, 연장같은 실용적인 도구에 주입한 평범한 공예가들이었다. 보츠와나의 바구니는 기린의 눈물, 황소의 소변자국, 얼룩말의 이마같이 상상력을 불러내는 이름으로 된 도안을 사용하여 아주 정교하다.기독교 선교사들이 도착한 이후에야 토착언어가 글로 쓰여졌기 때문에 보츠와나에는 문학전통이 그리 많지는 않다. 전승된 모든 고대 신화와 토착민의 찬양시는 구전되었으며 최근에와서야 문자로 기록되고 있다. 보츠와나에서 가장 유명한 현대 문학가는 남아프리카 출신의 베시 헤드(Bessie Head)이며 그는 세로웨(Serowe)에 정착하여 마을생활의 어려움과 아름다움을 기록했다.

역사적으로 남자들은 가축을 돌보고 주로 고기와 우유를 공급하는데 책임이 있는 반면 여자들은 야생과일과 야채를 모아서 먹게 된다. 요즘에는 기장과 사탕수수 포리지(오트밀에 우유 또는 물을 넣어 만든 죽)가 대부분의 보츠와나식사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지만 이것도 수입된 옥수수로 급속하게 대체되고 있다. 외진 곳에 사는 사람들은 커다란 땅속식물인 모라마(morama), 칼라하리 송진으로 알려진 식용버섯으로 식사를 조달한다. 여행자는 뜨거운 재속에서 익히거나 소금물에 끓이거나 말리거나 튀길 수 있는 유충같은 굼벵이인 모파인(mopane)벌레가 섞인 요리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전통음료로는 합법은 아니지만 아주 많이 들이킬 수 있는 팜와인, 증류한 흑설탕이나 버섯류로 만든 크가디(kgadi)가 있다. 합법적인 가정 양조술로는 싹을 낸 사탕수수로 만든 저렴한 맥주인 보잘롸(bojalwa)가 있다.

축제 및 행사

보츠와나사람들은 새해(New Year's Day)와 그 다음날이 공휴일이며 부활절에 있는 예수승천일(Ascension Day)(4월이나 5월)이 공휴일이다. 7월에 있는 대통령의 날(President's Day)경에는 이틀동안 잠을 자기도 한다. 독립기념일은 9월 30일에 있으며 그날과 그 다음날이 공휴일이다. 크리스마스경에도 공휴일이 있으며 12월 25일이 크리스마스, 26, 27일이 복싱의 날(Boxing Day)과 그 다음날로 공휴일이다.

여행자 정보

비자: 대부분의 아프리카 연방국(Commonwealth countries)과 유럽국, 이스라엘, 남아프리카, 미국 국민은 90일의 체류까지 비자가 필요없다.
보건위생: 말라리아
시간대: GMT/UTC + 2 시간
전압: 220V, 50Hz
도량형: 미터법(변환표 참고)
관광객: 연간 약 72만 8천명

경비 및 환전

통화: 풀라(pula)
일반경비:
저렴한 숙박지: US$15-40
중급 호텔: US$40-60
고급 호텔: US$60-120
저렴한 식사: US$2-5
중급 식당: US$5-10
고급 식당: US$10이상

보츠와나의 천연자원을 보존하고 관광수입을 얻으려는 희망으로 보츠와나 정부는 단지 높은 비용으로 적은 수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저렴한 숙박시설과 교통수을 찾기가 너무 어려워서 실제로 주머니가 넉넉치않은 배낭여행자는 보츠와나의 가장 좋은 곳은 갈 수도 없다. 심지어 중간정도의 예산도 최대한 아껴써야 하는 형편이다.보츠와나에서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주요명소인 오카방고 삼각주(Okavango Delta)에 몇 곳의 비싸지 않은 캠프장과 적당한 가격의 여행지가 있다. 국립공원을 피하고(미칠 지경이 되겠지만) 스스로 음식을 해먹고 캠핑을 한다면 하루에 미화 $30정도를 쓸 것이다. 한두 차례의 야생동물 투어를 포함한 좀더 실질적인 예산은 하루에 미화 $75불부터 시작해서 더 올라갈 것이다. 고급 사파리를 즐기려면 비용을 적어도 두 배로 잡아야 한다.

주요 도시에서 완전한 은행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여행자수표를 바꾸는데도 문제가 없다. 정비된 은행이 없는 외진 도시나 마을에서는 여행자용 은행을 주별, 월별로 이용할 수 있다. 시골의 은행서비스가 외국환의 여행자수표를 바꿔줄 수도 있지만 현금은 취급하지 않는 것 같다. 이동식 은행에서 돈을 바꾸려면 일찍나가 줄을 서서 환전하기 위해 아침 한나절을 따로 비워두는 것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주요 신용카드는 대도시에 있는 여행자 호텔이나 식당에 사용할 수 있다.팁은 엄밀하게 말해서 필요없지만 많은 여행자 호텔이나 식당에서는 이제 팁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특별한 서비스를 받은 경우에만 팁을 줄 것을 권장한다. 대부분의 장소에서 서비스비가 사실상 추가되어 있으므로 팁을 좀 더 주고 싶다면 약 10%정도면 충분하다. 택시 운전사에게는 대개 팁을 주지 않는다.

여행 시기

날씨가 대부분 쾌적하고 야생동물이 물가에서 멀리 떠나지 않는 여름(5월부터 8월)이 보츠와나를 여행하기에 좋은 시기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유럽, 북미, 남아프리카의 방학시즌으로 모든 곳에 사람들로 붐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대개 6월과 7월초, 9월 중순부터 말까지가 여행하기에 사람들이 가장 덜 붐비는시기이다. 오래 계속되는 비로 인해 모래땅의 도로를 지날 수 없게 하고 동물들이 물이 풍부한 곳으로 분산되기 때문에 여름이 여행을 떠나 야생동물을 보거나오카방고를 탐험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아니다.

주의 사항

주요 여행지

가보로네(Gaborone)

가보로네를 주요여행지로 분류하기는 하지만 여행자는 아마 다른 좀 더 멋진 곳을 가는 도중에 가보로네를 통과해 가야 하기 때문에 보츠와나의 수도인 가보로네에 대해 약간정도만 알면 된다. 알아야 할 첫 번째는 가보로네에는 여행자가 머물고 싶을만한 곳이 없다는 것이다. 가보로네의 거리는 멀고 재미없으며 교통은 막히고 보도도 없고 도시는 교외지역과 고층건물이 뒤죽박죽으로 섞여있다. 또한 도심의 상업지역이 없기 때문에 경제활동은 교외의 상점가로 몰리는 경향이 있다. 화려함이 빠진 로스앤젤레스가 한잔의 차처럼 정겹게 들린다면, 카보로네를 들러보기 바란다.가보로네에서 최고의 명소는 국립박물관과 미술관(National Museum & Art Gallery)으로 역사 유물과 박제된 동물같이 평범한 것들이 수집되어 있다. 산(San)족의 문화에 대해 박물관에 전시된 것에는은 사막 거주민들의 것이 완전히 포함되어 있는 반면 다른 민족적인 전시물은 보츠와나의 다양한 부족에 대한 배경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작은 국립미술관에는 산족의 예술품을 포함하여 아프리카와 유럽의 전통적인 작품과 현대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가보로네 야생동물 보호구역(Gaborone Game Reserve)은 사파리를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설계된 곳이다. 가보로네에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보호구역에는 사실 우리안에 한 무리의 영양과 흰 코뿔소가 있을 뿐이다. 여행자가 진짜 자연적인 곳을 돌아다니고 싶다면 가보로네의 북서쪽에 있는 잡목이 무성한 관목지대로 승마사파리를 갈 수도 있다. 가보로네에 숙박할 곳이 몇 군데 있지만 비용이 싸지는 않다. 가보로네는 남아프리카와 보츠와나의 북동쪽 국경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오카방고 삼각주(Okavango Delta)

'바다를 결코 찾을 수 없는 강'으로 묘사된 것처럼 오카방고는 보츠와나의 북서쪽에서 미로같은 1만5천 평방킬로미터(5850평방마일)의 늪, 수로, 섬으로 이어지며 사라지는 곳이다. 오카방고 삼각주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내륙 삼각주로 야생동물이 많은 곳이다. 가장 눈에 많이 띄는 것이 수많은 새들이지만 코끼리, 얼룩말, 들소, 야생 영양, 기린, 하마, 얼룩영양 등도 있다. 삼각주 중심에 있는 모레미 야생동물 보호구역(Moremi Wildlife Reserve)은 약 3천 평방킬로미터(1170평방마일)에 이르며 야생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공식으로 교통도 차단되어 있다. 모레미 보호구역 외부에서는 많은 야생동물을 볼 수 없을 것이지만 관광객도 거의 없으며 풍경도 역시 아름답다.

모레미 보호구역에서 남동쪽으로 약 60킬로미터(40마일) 떨어진 마운(Maun)은 오카방고 삼각주의 행정 줌심지로 주요 활주로도 있다. 운영자가 통제를 많이 하지 않고 대부분의 가이드와 보트 키잡이가 면허가 없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여행하기에 가장 저렴한 지역은 동부 삼각주(Eastern Delta)이다.

야생동물이 있는 곳에서 묵고 싶다면 여러 곳의 캠핑장을 모레미 보호구역에서 이용할 수 있다. 그외의 지역에서는 캠핑하지 말아야 하며 캠핑을 한다면 사자의 야식거리로 끝이 날수도 있을 것이다.삼각주와 마운에도 캠프장과 숙박시설이 많이 있다. 이러한 곳에 예약을 했다면 오카방고까지의 교통은 대부분 캠프장이 잘 편성해준다. 그렇지 않으면 여행자가 마운에서 남동쪽으로 약 600킬로미터(400마일) 떨어진 카보로네에서 비행기나 버스를 타고 가서 사파리에 참여해야 한다. 삼각주를 둘러보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모코로(mokoro)(나무속을 파낸 카누)를 타는 것으로 대개 경험많은 가이드가 물길을 따라 장대로 저어가게 된다.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수위가 높고 날씨가 건조한 7월부터 9월까지이다.

쵸베 국립공원(Chobe National Park)

쵸베 국립공원은 1만1천 평방킬로미터(4300평방마일)에 걸쳐 있으며 보츠와나에서 다른 어느곳보다도 많은 다양한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는 곳이다. 국립공원의 북쪽 끝에 있는 카사네(Kasane)가 공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행정중심지이다. 시내 자체는 볼거리가 별로 없지만 쵸베 국립공원을 신속하게 방문하기 위한 준비를 하기에 좋은 곳이며 비행기를 타고 쵸베에 간다면 바로 이곳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급하게 서두러야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레크리에이션은 대부분의 동물들이 모여드는 물가를 따라 운전을 하거나 배를 타는 것이다. 약 7만3천여 마리의 코끼리가 500여마리까지 무리를 지어 다니는 코끼리가 가장 큰 볼거리이며 물가를 따라 가는 여행중에서 가장 기억할만한 것은 그러한 코끼리떼가 얼마나 많은 손상을 입힐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코끼리떼가 손상시킨 장소는 마치 폭격을 맞은 것처럼 보인다. 또한 사자, 치타, 하마, 들소, 기린, 영양, 자칼, 흑멧돼지, 하이에나, 악어, 수달, 얼룩말, 수많은 새를 발견하는 아주 좋은 기회를 가질수도 있다.

옛날에 보츠나와의 북부지역에 덮여있던 커다란 호수가 남아있는 지역인 마바베 침하지역(Mababe Depression)에는 쵸베 국립공원에서 두 번째로 큰 명소인 사부티 습지(Savuti Marshes)가 있다. 사부티는 아주 평평하고 거친 풍경을 나타내고 있지만 여행자들은 엄청나게 많은 야생동물, 특히 코끼리에 압도되고 말 것이다. 사자와, 야생개, 하이에나가 수많은 임팔라, 야생영양, 들소, 얼룩말 무리속을 어슬렁거리는 동안 영양무리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엄청난 수로 나타나기도 한다. 은궤줌바(Ngwezumba)에는 사부티나 물가에서 볼 수 있는 동물떼가 많지는 않지만 이곳의 진흙 웅덩이와 모파인숲은 희귀한 오리비를 포함하여 들소, 코끼리, 일부 영양무리의 터전이기도 하다. 쵸베 국립공원의 위쪽 끝에 있는 카사네는 보츠와나의 최북단 끝으로 가보로네에서 북쪽으로 약 800킬로미터(500마일) 떨어진 곳이다. 카사네에서 마운, 가보로네, 빅토리아 폭포(Victoria Falls) 등으로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으며 남쪽으로 약 250킬로미터(150마일)떨어진 곳에 있는 나타(Nata)에서 카사네까지 버스가 운행되기도 한다. 일단 이곳에 도착하면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고강도 4륜구동 자동차가 필요하다. 공원곳곳에 캠프장과 숙박시설이 있다.

세로웨(Serowe)

보츠나와의 동부에 있는 불규칙하게 뻗어나간 세로웨는 약 9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보츠와나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카마왕(King Khama)이 1902년 이곳으로 이주해 온 이후로 은과토(Ngwato)족의 수도이기도 하다. 세로웨에는 또한 1965년 이후로 보츠와나에서 가장 외진 곳의 하나인 이곳에 직업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조직인 보츠와나단체(Botswana Brigades)가 있기도 하다. 카마 3세 기념 박물관은 은과토족의 추장인 카마가문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곳이다. 레아페츠웨 카마(Leapeetswe Khama)는 박물관 부지로 사용하기 위해 자신의 집인 레드 하우스(Red House)를 기증하기도 했다. 전시품에는 카마 3세와 그의 후예들의 개인 소장품과 세로웨의 역사를 나타내는 공예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아프리카의 곤충을 수집해 놓은 것과 세로웨지역의 뱀을 전시해 놓은 자연사 전시물도 늘어나고 있다.카마가문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싶다면 마을의 중심에 있는 언덕위의 로얄묘지(Royal Cemetery)를 둘러보기 바란다. 카마 3세와 그의 가족들의 묘지뿐만 아니라 11세기 마을의 유적도 볼 수 있다. 세로웨에서 북서쪽으로 약 20킬로미터(13마일) 떨어진 카마 코뿔소 보호구역(Khama Rhino Sanctuary)에는 보츠와나에 남아있는 16종의 코뿔소중에 7종이 안전하게 서식하고 있다. 세로웨에는 몇 곳의 깔끔한 호텔이 있다. 대중 교통으로 세로웨에 가기 위해서는 팔라폐(Palapye)(가보로네에서 버스와 기차가 있음)까지 가서 세로웨로 가는지역버스를 타야 한다. 세로웨는 가보로네에서 약 250킬로미터(150마일)떨어져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

초딜로 언덕(Tsodilo Hills)

호주의 울루루(Uluru)처럼 이 고즈넉한 암벽 덩어리가 모래물결이 일어나는 바다같이 넓은 사막에 우뚝 솟아있다. 초딜로 언덕은 그 자체를 천지창조의 현장으로 여기는 모코코(Makoko)와 드주콰 산(Dzucwa San)족의 신화, 전설속에 스며들어 있으며 영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로렌스 반 데어 포스트(Laurens van der Post)는 이곳을 방문했을 때 알 수 없는 언덕(Slippery Hills)이라고 이름붙이면서 불후의 명성을 부여하게 되며 그가 틀림없이 초딜로의 영령을 성나게 했기 때문에 그의 카메라가 고장나고 녹음기가 작동되지 않고 벌떼의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초딜로에는 3만5천년 전까지 산족의 조상들이 거주했으며 3500개 이상의 암벽화가 있기도 하다. 이렇게 동물, 사람, 지형적인 도안으로 된 미니멀 표현양식(최소한의 조형수단을 써서 표현하는 회화나 조각)은 거의 낙서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고대 미켈란젤로의 후예가 역작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도 아주 황홀한 것이다. 대부분이 황토색이나 흰색으로 그려져 있으며 산족과 그 후에는 반투(Bantu)족이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가장 흥미로운 벽화중에는 얼룩말, 고래, 펭귄, 코뿔소 가족, 성적으로 흥분하여 춤추는 남자들이 그려져 있다.산족이나 음부쿠쉬(Mbukushu)족의 마을에는 상점이나 서비스시설이 없지만 여행자는 언덕기슭 주변에 캠핑을 할 수 있으며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사용할 수도 있다. 설비를 갖춘 여행자 센터와 캠프장이 건설되고 있다. 초딜로 언덕은 보츠와나의 북서부에 있으며 가보로네에서 약 800킬로미터(500마일)떨어져 있다. 이곳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거나 운전을 해서 갈 수 있으며 도로는 견딜 수 없이 괴로운 것이지만 잊을 수도 없을 것이다.

맥가딕가디 & 은사이 웅덩이 국립공원(Makgadikgadi & Nxai Pan National Park)

동시에 지정되었으며 마운에서 동쪽으로 100킬로미터(60마일)떨어진 곳에 있는 맥가딕가디와 은사이 웅덩이, 두 지역은 하나의 국립공원으로 효과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남쪽 지역의 맥가딕가디 야생동물 보호구역은 4000평방킬로미터(1600평방마일)넓이로 웅덩이의 흔적, 초원, 아름다운 사반나가 펼쳐져 있다. 야생동물도 쵸베 국립공원만큼 조밀하게 많지는 않지만 풍부한 편이다. 영양, 사자, 하이에나, 치타, 하마, 멋드러진 새무리도 있지만 코끼리와 들소는 없다. 공원에는 화장실, 찬물 샤워, 마실 물이 갖춰져 있는 캠프장이 있으며 이곳에 가려면 4륜구동 자동차가 필요하다.공원의 북쪽 지역에는 은사이 웅덩이가 다시 4000평방킬로미터(1600평방마일)에 걸쳐 펼쳐져 있다. 은사이 웅덩이의 남쪽지역은 작은 천연 염전이 모여있다. 이곳은 보츠와나에서 우기동안에 더 흥미로운 몇 곳의 하나로 우기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은사이의 푸른 웅덩이지역으로 몰려들며 그 수는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어마어마한 영양, 기린떼와 함께 야생 영양, 얼룩말, 겜스복이 수천 마리씩 떼를 지어 나타나기도 한다.사자, 하이에나, 야생개는 이렇게 엄청나게 늘어난 사냥감을 잡으러 이 지역으로 오며 박쥐모양의 귀가 있는 여우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의 하나이다. 은사이 웅덩이의 남쪽에는 1862년 리빙스톤의 탐험대의 일원이자 화가인 토마스 바이네스(Thomas Baines)가 그림으로 영원하게 남긴 바이네스의  바오밥나무가 강건하고 거대한 바오밥 나무숲을 형성하고 있다. 바이네스의 그림 사본을 본적이 있다면 지난 100년의 세월동안 단지 하나의 가지만이 떨어졌 나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은사이 웅덩이의 캠프장에는 제반시설이 없으며 그곳에 가려면 4륜구동 자동차가 필요하다. 공원은 가보로네에서 북쪽으로 약 500킬로미터(310마일)떨어진 곳에 있다.

그취하바 동굴(Gcwihaba Caverns)

드로츠키의 동굴(Drotsky's Cave)로 잘 알려진 그취하바 동굴과 동굴속의 높이와 길이가 10미터(33피트)에 이르는 석순과 종유석은 백운석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와 용해되어 형성된 것이다. 떨어지는 물이 광물질을 침전시키고 천장과 바닥에서부터 동굴에 장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1930년대 중반에 쿵(Kung)족이 처음으로 이 동굴을 유럽인인 마르티누스 드로츠키(Martinus Drotsky)에게 보여주게 된다.19세기말부터 동굴 어딘가에 묻힌 보물이 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동굴에는 2곳의 입구가 있지만 가이드도 조명도 길을 나타낸 표시도 없다. 은근히 스며드는 자연광이 전혀 없으면 동굴탐험가들은 여러 개의 횃불(손전등)과 비상용 전등배터리도 가지고 가야 한다. 기어 내려가야 하는 가파른 절벽을 포함하여 루트를 따라 아주 무서운 돌출부분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루트는 넓은 공간과 여러 곳에 마음을 끄는 옆길이 있는 통로로 되어 있어 걸어가기에 아주 쉽다.동굴에는 또한 커다란 코머슨의 잎모양같은 코가 있는 박쥐를 포함하여 수많은 박쥐들이 서식하고 있다. 동굴주변 지역에는 캠핑하기에 좋은 장소가 있지만 다른 설비는 없다. 그취하바까지 가는 대중 교통수단은 없으며 장거리용 기름탱크와 물탱크가 있는 4륜구동 자동차가 필요하다.그취하바는 가보로네에서 북서쪽으로 약 650킬로미터(400마일) 떨어져 있으며 나미비아와의 북부 국경에 가깝다.

겜스복 국립공원(Gemsbok National Park)

보츠와나에서 외진 남서쪽 코너에는 1만1천 평방킬로미터(4300평방마일)의 광대한 겜스복 국립공원이 있다. 서쪽에는 남아프리카의 칼라하리 겜스복 국립공원(Kalahari Gemsbok National Park)이 인접해 있으며 이 두 곳이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자연 그대로의 야생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겜스복 국립공원은 보츠와나에서 여행자가 연판인쇄처럼 변화무쌍한 칼라하리의 모래언덕을 볼 수 있는 곳이다.공원의 이름에 있는 겜스복(영양의 일종)은 3월부터 5월초까지 비가 내려 푸른 초원이 어쩔 수 없이 붉은 황토풍경으로 바뀌는 때에 가장 잘 볼 수 있다. 이 때에는 스프링복, 영양, 붉은 영양, 푸른 영양이 떼로 몰려다니는 것을 볼 수도 있다. 그 외의 기간에는 운이 좋아야만 이들 영양무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겜스복 국립공원은 남아프리카에서만 갈 수 있으며 보츠와나의 남서쪽 끝 코너에 있는 복스피츠(Bokspits)에서 남아프리카로 입국해야 하며 그후 말라붙은 노솝강(Nossob River)을 건너 보츠와나로 되돌아와야 한다. 복스피츠는 가보로네에서 남서쪽으로 약 600킬로미터(375마일) 떨어져 있으며 4륜구동 자동차로 가는 것이 가장 좋다. 강의 남아프리카와 보츠와나측에 캠프장이 있다.

레저스포츠

사파리는 스와힐리어로 '우리는 간다'라는 뜻으로 아프리카 남부지역을 여행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지역의 장관인 야생동물을 경험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에 적어도 한번씩은 이 '가기'를 계획한다. 일반적으로 여행자들은 멋진 4륜구동 자동차에서 야생동물들을 찾아 나서지만 말을 타고 가는 것도 가능하다. 오카방고 삼각주를 통과하는 대부분의 여행에는 야자나무숲에서의 하이킹도 포함되어 있으며 초딜로 언덕은 특히 오지여행자에게 멋진 곳이다. 오카방고에서는 또한 낚시도 할 수 있다.

보츠와나로 가는 길

여러 아프리카 항공사와 브리티쉬 에어라인(British airlines)의 국제항공편이 가보로네에 도착하지만 하라레(짐바브웨), 빈트획(나미비아), 요하네스버그(남아프리카)까지 장거리 비행기를 타고 가서 육로로 여행하는 것이 대개 더 저렴하다. 보츠와나의 이웃국가 어디에서나 육로로 입국할 수 있지만 입국하기 전에 여행자가 운전해온 자동차의 타이어와 신발을 소독해야(음식과 입을 통해 병이 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한다. 나미브 횡단 버스가 간지(Ghanzi)와 고바비스(Gobabis)(나미비아)간에 운행된다. 미니버스가 가보로네와 요하네스버그간에 운행된다. 짐바브웨로 가는 버스는 가보로네에서 프란시스타운(Francistown), 불라와요(Bulawayo), 하라레로 연결되며 카사네에서 빅토리아폭포로 연결되기도 한다. 리빙스톤(잠비아), 빅토리아폭포와 빈트획간의 버스노선은 카사네를 통과한다. 잠비아에 다른 방법으로 가려면 잠베지강을 건너는 카준굴라(Kazungula)여객선을 타야 한다.

국내 교통편

비행기가 거의 대부분의 도시간에 정기적으로 운항하지만 요금이 비싸다. 보츠와나에는 6개의 주요 버스노선이 있으며 프란시스타운, 가보로네, 로바체(Lobatse)를 연결하는 믿을만하며 저렴한 기차도 운행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츠와나의 대중 교통수단은 우스운 상황이 많으며 결코 안전하지 않으므로 실제로는 히치하이킹을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히치하이킹을 하는 것이 너무 알려져 있어서 10킬로미터(6마일)마다 미화 약 $0.05씩 비용을 내야하기도 한다. 포장도 안된 시골길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려면 며칠동안 기다리기 위해 캠핑장비, 충분한 음식과 물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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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츠와나 | 세계 - 어찌 돌아가고 있나 2010-01-31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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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966년 9월 30일, 보츠와나 공화국이라는 명명 하에 영국령 베추아날란드로부터 독립을 달성하였다. 이 나라의 대통령은 경제 관리를 잘 하고 있어서 국민들의 1인당 소득은 약 3천 달러 정도 된다고 하며 가봉처럼 도시인들은 윤택하게 생활하고 있다.

지리

국토의 남부 약 3분의 1은 남회귀선 이남에 있고 북단은 남위 18°부근에 위치한다.

높은 산은 없으나 평균 해발고도 약 1,000m에 이르는 내륙국으로 남부의 지형은 동쪽이 구릉 지대로 높고, 서쪽을 향하여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낮아진다.

북부에서는 서단부의 고도가 다소 높다. 남서부는 칼라하리 사막으로 건조 지대이지만, 우계에는 풀이 무성해지는 소림 지대를 이루고, 비가 내린 후에는 큰 염호도 생긴다.

북동쪽에 맥가딕가디 염호, 북서쪽에 엔가미 호오카방고 습지대가 전개된다. 그러나 북부의 오카방고 강초베 강, 남동쪽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국경을 이루는 림포포 강마리코 강 외에는 일년 내내 물이 흐르는 강은 없다(아주 가끔씩 가뭄도 발생한다).

행정 구역

수도가보로네이다. 지방 행정은 9군과 3개 시로 나누어 실시하고 있다.

기후

기후는 아열대 기후를 이루나 내륙의 고원에 위치하므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기온이 몹시 낮아져서 서리도 내리며, 밤낮의 기온차가 크다.

연평균 강수량은 약 450mm이다. 비는 주로 12월에서 4월에 내리고 지역적으로도 큰 차이를 보인다.

북부에서는 연강수량 650mm에 이르며 서쪽의 칼라하리 사막에서는 225mm 이하가 된다. 강우량은 변동이 심하며 아주 가끔씩 가뭄이 발생하기도 한다.

정치

이 나라의 정치는 아프리카에서는 가장 민주주의적이며 이 나라 영내에 있는 종족들은 모두 협조적이다.

1998년 4월부터 대통령이 된 페스투스 모가에가 대통령에 취임하고부터 이 나라는 확 바뀌었다.

군대

이 나라 헌법에 따르면 지원제를 실시하며 총 1만 명이 육군이고 공군은 없다.

주민

선주 민족은 코이산족이었지만, 17세기 중반 남부에서 이주한 츠와나족이 지배했다. 코이산족은 인구는 적지만 현재도 보츠와나 각지에 살고 있다. 원래 수렵, 방목으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보츠와나 정부에 의한 정주 정책이 꽤 진행되어 이전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적다. 현재 이 나라의 인구의 약 95%를 츠와나족이 차지하고 그 밖의 카랑가족, 산족, 외국인(일부 러시아인세르비아인 등) 등이 살고 있다.

인구

2000년 인구 증가율은 0.76%, 출생률은 1,000명당 29.63명, 사망률은 22.08명이고, 영아 사망률은 61.68명으로 매우 높다. 평균수명은 39.27세로 낮은데 남자는 38.63세, 여자는 39.93세이다. 15세 미만 인구는 41%이다.

보츠와나는 2006년 현재 전체인구 중 36%가 에이즈에 감염되어 높은 감염률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로 인한 사망자가 급증하여 평균수명이 곧 29세로 떨어지고 있다. 더군다나 노동 인구가 급격히 줄어 빈곤층의 빈곤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언어

영어세츠와나어1966년 헌법에서 공용어로 지정했다. 국민의 절대 다수는 일상에서 세츠와나어를 사용하고 있다.

종교

종교는 현지 고유의 종교와 기독교가 각각 반 정도이다. 이슬람교힌두교는 아주 조금 존재한다.

교육

초등학교를 비롯하여 중학교, 교원 양성 학교, 전문 교육 기관이 있고, 고등 교육 기관으로는 수도 가보로네에 있는 국립 보츠와나 대학교보츠와나 농업 대학교가 있다. 문맹률은 중간 이상이며 HDI도 중간 이상이다.

사회

츠와나족반투계에 속한다.

이 지방의 순수 원주민인 부시먼족은 인구가 희박한 지역에서 아직도 원시 수렵생활을 하고 있으며, 백인과 반투계 여러 종족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쇠퇴하였다.

언론은 그리 자유롭지는 않는 편이다. 신문은 일간지인 보츠와나 데일리뉴스 월간지인 애그리뉴스가 있고 방송은 보츠와나 텔레비전 연합라디오 보츠와나가 존재한다.

경제

경제는 예로부터 농업목축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광업 개발과 더불어 경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농업

주요 농산물은 사료용의 수수류이다. 옥수수는 남서부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으나 보다 더 내건성인 카피르콘(수수의 일종)을 더 많이 재배한다. 생산량은 수요에 미치지 못하여 일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곡류를 수입한다.

기후가 건조하여 목화나 땅콩의 재배는 어렵다. 하지만 관개가 가능한 지역은 과실 재배와 귤의 재배가 이루어지며 해바라기 씨도 산출한다.

농업은 지금도 주요 경제로서, 1999년 통계에 따르면 국내 총생산의 4%를 차지하였다.

목축업

목축업은 축산, 소의 사육으로 고기·우유·가죽을 산출하며 쇠고기와 가죽은 대표적인 수출품이다. 목초가 별로 많지 않은 내륙부에서는 산양과 양의 사육이 활발하다.

북부에서는 삼림도 개발되어 목재를 생산한다.

광업

지하 자원의 개발은 어려웠으나 1971년에는 오라파다이아몬드 광이, 1974년에는 셀레비피크웨광과 니켈광이 개발되었다.

광업은 새로운 광산이 개발됨에 따라 크게 진전하여 경제의 급성장을 보이고 있으며 이와 함께 남아프리카 공화국미국, 영국 등의 자본이 진출하였다.

망간석, 석탄 외에 구리니켈도 채굴되는데, 광산 개발에는 정부도 15%의 자본참가를 하고 있다.

다이아몬드의 광상도 풍부하나 많은 투자를 요구하기에 개발은 다른 광물에 비하여 뒤떨어진다. 광업은 1980년 국내 총생산의 25%를 차지하였으나 1998년에는 38%로 뛰어오른 것으로 본다.

공업

공업의 발달은 후진성이 잇따르며, 2차 산업은 국내 총생산의 46%를 차지한다. 무역면에서는 1999년 수출이 23억 6000만 달러, 수입이 20억 5000만 달러였다고 한다.

주요 수출품은 다이아몬드(72%), 구리, 니켈, 육류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공산품, 식료품, 기계류, 교통 장비, 직물, 석유 등이다.

주요 수출국은 유럽 국가(74%), 남아프리카 국가, 짐바브웨 등이고 수입국은 남아프리카 국가(78%), 유럽 국가, 짐바브웨 등이다.

교통

이 나라의 교통망은 1960년대 당시의 우리나라의 교통망을 짐작하게 한다. 경제의 중심인 동부 지역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연결하는 철도가 유일한 통과점일 뿐이다.

철도 총연장은 971km이고, 도로 총연장은 1만 8482km(1996년 통계)로 포장률은 23%에 불과하다. 바다가 없고 항구도 없어 주요 수출입 루트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거쳐야 하므로 무역도 어렵다.

공항프랜시스타운가보로네에 있다(1999년 통계).

문화

츠와나족의 예술가들은 일상 용품인 항아리, 섬유 등에 아름다운 감각을 넣는다는 말이 있다.

이 나라에서 만들어진 바구니는 '기린의 눈물', '황소의 오줌자국'과 '얼룩말의 이마'와 같은 이름을 환기시킬 수 있는 디자인을 아주 절묘하게 한다.

세츠와나어기독교 성경에 쓰여진 뒤로는 전통 문학은 쇠퇴해졌다.

고대 전설과 같은 풀레나족의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현대에 이르러서 세츠와나어로 쓰여졌다. 1986년간염으로 사망했던 남아공 태생의 이 나라 출신의 작가인 베시 헤드는 시골 생활의 미와 잔혹에 대해 작품을 썼다고 한다.

대외 관계

국제 연합, 아프리카 통일기구, 영국연방에 적극적으로 가입하였다.

이 나라는 원래 중립 외교를 하였으나 1973년 10월 소비에트 연방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계기로 1974년 3월에는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 해 12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했다. 1977년에는 쿠바와 국교 수립을 하였다.

2006년 현재 유럽, 아프리카, 아랍 세계 국가들과의 관계도 긴밀하다.

대남아프리카 관계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관계는 우호적이다.

대한 관계

이 나라는 원래 대한민국1968년 4월 외교 관계를 수립한 남한 단독 수교국이었다. 그러나 소련과의 수교를 계기로 1974년 12월북한과의 외교 관계도 수립했다.

2000년 당시 대한 수입은 398만 달러, 수출은 2만 2천 달러였다고 한다. 한국인 교민 107명이 이 나라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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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죽번죽 | 국어 공부 합시다 2010-01-31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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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죽번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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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옷자락 | 기독교 자료 2010-01-30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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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어머니 헬레나 이야기

트리어는 콘스탄티누스가 황제가 되기 전에 한 때 살았던 도시라서 그가 살았던 궁전이 있었습니다. 황제가 된 후 자신의 궁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어머니인 헬레나를 위한 새로운 궁전을 지었죠.
헬레나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아 혼자 살아온 과부였고 아들 콘스탄티누스는 어머니에게 효도를 다하기로 다짐한 효자였습니다.
연로한 헬레나는 성지 예루살렘 순례를 강행하여 예수를 매 단 십자가, 십자가에 매달 때 사용한 못, 가시 면류관, 예수가 입었던 옷 등을 발견하고 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가져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런 어머니를 위해 트리어에 새로 대성당을 짓고 어머니가 성지에서 가져온 성물 일부를 대성당에 보내 간직토록 했습니다.
예수가 입었다는 성의는 1512년 중앙제단을 보수할 때에 그 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천년 동안 제단 탁자에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생명되신 그리스도가 필요하지(골 3:4) 그리스도에 관계된 것이 필요한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옷이 어릴때부터 1두벌이 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입었던 누가 입었던 옷은 옷이고 다 사라질것입니다.

문제는 옷의 주인이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옷이 우리를 구원할수 없습니다. 주님을 더사랑하는 믿는이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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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 수의 | 기독교 자료 2010-01-3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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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 수의
l    2005-06-29 15:40 작성     

트리노의 수의는 이탈리아의 가톨릭 성당인 트리노 성당에 보관되어 있는 유물로써 기독교 고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의냐, 아니냐로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그 이유는 1898년 수의를 사진촬영 후 인화했는데, 중년 남성의 얼굴이 입체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즉, 그 중년 남성이 그리스도냐, 아니냐로 논쟁이 붙은 거지요. 트리노의 수의는 1978년 성물로써 공개되었는데,

 

그리스도의 수의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고 있습니다.

1. 수의에 지중해 연안에서 나는 식물의 화분(꽃가루)가 있다.

2. 손못에 못 자국이 있고(십자가형 집행시 손목과 발목에 못을 박았다는게 1968년 발견된 유골을 통해 밝혀졌음), 머리, 옆구리, 등에도 상처가 있다. ==> 이는 신약성서중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한 4복음서의 기록과 일치함.

3. 중년 남성의 알몸 자국이 발견되었는데, 머리가 길고 턱수염을 길렀으며 180cm 였다고 분석될 정도로 인체모양을 정확히 나타내고 있다.

4. 피의 방향과 피에 섞인 효소가 십자가형으로 죽은 남성임을 입증한다. ==> 피에 섞인 효소가 장시간 동안 고통받은 증거라는 것.

 

트리노의 수의가 그리스도의 수의가 아니라고 보는 학자들은 다음의 근거를 들고 있습니다.

1. 1988년 옥스포드, 버클리, 아리조나 대학과 취리히의 한 물리학 연구소 등 모두 네 군데의 실험실에 의뢰한 탄소동위원소 연대측정(모든 생명체는 죽으면 동위원소가 빠져나가는데, 연대측정은 이 동위원소가 빠져나간 정도를 측정하여 물질의 생성연도를 측정하는 것이다..)의 결과, 14세기에 만들어졌다는 분석결과가 나왔고, 이는 로마 교황청에서도 '의미있는 중세 성화'라는 평가로 인정했다.

2. 중세 로마 가톨릭의 성물숭배로 인해 그리스도의 수의로 신성시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땀을 닦아 드렸다는 베로니카 여인의 수건만도 30개가 넘는다.

3. 1389년 당시 교황 클레멘트 7세는 수의를 공개할 때, 수의가 가짜임을 밝히게 했다.

4. 트리노의 수의는 그리사예라는 기법으로 그린 그림이다.

출처 : 국민일보에 연재된 성서고고학 강의기사인' 新 성서의 향기', 두란노의 기독교 월간지 '빛과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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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The Robe (1953) | 기독교 자료 2010-01-30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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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The Robe (1953)

 

진 시몬즈, 리차드 버튼, 빅터 메이처

 

예수를 처형 집행을 담당한 로마 귀족 청년이 예수가 입었던 옷 "성의 聖衣"를 찾아나서 마침내 기독교도로 귀화하게 되는 내용.

 

서기 33년 로마 제국 호민관 마르셀러스는 귀족 청년이다.

그는 노예 시장에서 노예 디미트리우스를 사기 위해 황제의 조카 칼리귤라와 무모하게 경쟁을 벌인다. 결국 원하는 노예를 얻기는 했지만, 칼리귤라의 미움을 사서 불모지 유대의 예루살렘으로 축출당한다. 사랑하는 여인 다이아나의 도움으로 마르셀러스는 로마로 돌아올 기약을 받게 된다. 한편, 그가 담당했던 일은 사형수들의 십자가형 집행의 감독이었다. 마침 그때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당하는 한 사내가 있었으니,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예수 그리스도. 형을 집행하자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린다.

디미트리우스는 예수가 입었던 옷을 집어들고 공포와 죄책감에 절규한다. 마르셀러스는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죄를 용서하는 예수에게 큰 감명을 받고 기독교인이 된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황제가 된 칼리큘라에 의해 단죄받지만, 다이아나와 함께 스스로 순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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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성의(聖衣) 연대 측정 재검토…논란 예고 | 기독교 자료 2010-01-30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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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성의() 연대 측정 재검토…논란 예고

 

2008-02-25 16:15 2008-02-25 16:12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나서 부활하기 전까지 그의 시신을 감쌌던 것으로 알려진 '토리노 성의()'는 1988년 탄소연대 측정 결과 가짜로 밝혀졌다.

이 측정이 잘못됐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수의에 대한 신비감은 전같지 않다.

그런데 영국 BBC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20년전 탄소 연대 측정의 오류 여부를 다시 검토하고 있다고 텔레그래프가 24일 인터넷판에서 전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방사성탄소가속기학과 크리스토퍼 램지 교수는 20년전 탄소연대 측정 때 오염으로 인해 결과가 왜곡됐다는 가설을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램지 교수가 문제의 성의가 실제보다 훨씬 뒤에 제작된 것으로 측정될 수 있음을 설명해 줄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실험 결과는 BBC2 채널이 부활절에 방영할 다큐멘터리를 통해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다큐 제작을 맡고 있는 데이비드 롤페 국장은 "고고학 연구의 탄소연대 측정 분야에서 손꼽히는 전문가들 가운데 한 명인 램지 교수가 연대 측정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한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전 BBC 기자인 라게 오마르가 연출을 맡은 이번 다큐에서는 토리노 성의가 실제로 예수가 생존했던 시기에 제작됐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두 가지 고고학적 증거가 새로 제시될 것이라고 롤페 국장은 설명했다.

이 다큐는 또 1204년 십자군이 훔친 것으로 알려진 콘스탄티노플 성의와 예수의 시신을 감쌌다는 또다른 성의인 예루살렘 성의 등에 대해서도 집중 조명할 예정이다.

롤페 국장은 이들 성의가 토리노 성의와 동일한 것으로 모두 예수가 생존했던 시기에 제작됐음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영국과 미국, 스위스 등 3국 과학자들은 1988년 각각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을 실시한 뒤 아마포 천으로 만들어진 토리노 성의가 중세시대인 1260년에서 139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정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 성의는 약 3천년 전 제작됐던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후 일각에서는 연대측정에 사용된 표본은 화재로 훼손된 부분을 손질하기 위해 성의에 덧댄 중세 시대 천 조각이라는 주장도 있었고 2005년에는 중세 시대 기술로 토리노 성의를 만들 수 있었음을 입증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토리노 수의는 중세 시대인 1357년에 프랑스 동부 리레 성당에서 처음 전시됐다는 기록이 있으며 당시에는 고가의 유물 거래가 성행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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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십자가[ ─ 十字架, True Cross ] | 기독교 자료 2010-01-30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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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십자가[ ─ 十字架, True Cross ]

 

그리스도교 성유물.

예수 그리스도가 매달려 죽은 십자가라고 하며, 전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성 헬레나가 326년경 성지를 순례할 때 발견했다고 한다.

 

예수의 십자가 숭배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인 언급은 4세기 중엽에 나타난다.

8세기에 이르러 이 이야기는 이 십자가가 십자가 처형에 쓰이기 전까지의 내력을 묘사하는 전설들로 살이 많이 붙었다.

 

예수의 십자가를 숭배하게 되자 그 조각들을 성유물로 판매하는 일이 생겼다.

장 칼뱅은 만일 그 조각들을 한데 다 모으면 큰 배에 가득 찰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몇몇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피가 그 십자가에 스며들어 그 나무는 파괴될 수 없는 물질이 되었으며, 따라서 그것은 줄어들지 않고 무한정 나눌 수 있다고 반박했다.

 

이같은 신앙으로 인해 중세에는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곳마다 예수의 십자가 성유물들이 증가했으며, 큰 도시들과 대수도원들은 그 조각들을 모두 보관했다.

 

이와 같이 늘어난 조각들을 보관하는 성유물 함과 이런 용도로 만든 몇몇 귀중한 물건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예수의 십자가를 되찾거나 얻겠다는 것을 명분으로 군사원정을 했었는데, 비잔틴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페르시아를 공격한 것(622~628)과 1204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것이 그 예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5월 3일을 예수의 십자가를 발견한 날로 기념해왔는데, 1960년 교황 요한네스 23세가 그 축일을 교회력에서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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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마지막 담긴 '바티칸 십자가' 복원 | 기독교 자료 2010-01-30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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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마지막 담긴 '바티칸 십자가' 복원

 

입력 : 2009.11.20 17:09

 

로마 교황청은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힌 십자가의 일부가 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비잔틴 시대의 황금십자가 성물함을 복원해 18일 공개했다.

진주와 에메랄드, 사파이어 등으로 장식된 화려한 황금십자가 성물함은 초기 기독교 예술품이자 흔치 않은 황제의 선물이라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다.

교황청은 이날 비잔틴 황제 유스티누스 2세(520~578)가 로마에 선물한 것으로 알려진 ’바티칸의 십자가(Crux Vaticana)’을 공개했다.

십자가의 네 날개에는 라틴어로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적을 정복한 그 나무조각과 함께 유스티누스 황제는 로마를 돕고, 소피아 황후는 장식품을 선사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예수의 십자가 파편이 들어 있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나 이탈리아의 성 십자가 바실리카 등 예수 십자가의 파편을 소장하고 있다고 알려진 교회들은 곳곳에 있으나, 현존하는 십자가 성물함 중에서는 최고(最古)인 것으로 추정된다.

복원가인 상테 귀도는 “주님이 못 박히신 진짜 십자가(the True Cross)가 담긴 가장 중요한 성물함”이라면서 “황제가 선사한 유일한 성물함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며, 많은 종교적,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유스티누스 황제가 왜 로마 교황과 로마인들에게 이 십자가를 선물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476년)에도 로마는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와 바울이 묻힌 ’순교자의 도시’라는 점 때문에 오랫동안 종교적 수도로 남아 있었던 사실이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상테 귀도는 추정했다.

성물함 내부에 담긴 유물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 예술을 전해주는 십자가 자체의 가치도 상당히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날 공개된 ’바티칸의 십자가’에는 12개의 진주 알이 중앙에 그려진 작은 십자가를 빙 둘러싸고 있으며, 큰 십자가의 네 날개에는 각각 4개의 진주를 비롯해 에메랄드, 사파이어 등이 수 놓여 있다.

유스티누스 당시의 모습으로 돌려놓기 위해 전문가들은 19세기께 이뤄진 조악한 복원을 바로잡고, 지난 수세기동안 더해진 밝은 색깔의 보석들 대신 비잔틴 시대 걸작품들의 상징인 크고 불완전한 진주 알들을 십자가에 박아 넣었다.

지난 수십년간 이 십자가는 로마 교황청의 크리스마스 및 부활절의 중요 의식에 사용됐으나, 1천5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양초의 왁스와 연기로 인해 그 빛과 색이 탁해져 지난 2년간 복원에 들어갔다.

십자가는 내년 4월 12일 성 베드로 바실리카 성당에서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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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사회와 농지 소유권 | 역사 속 - 이것이 궁금하다 2010-01-3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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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프레시안 www.pressian.com>

 

땅 '소유'에 대한 집착은 왜 나타났는가?

[망국 100년] 농업 사회와 농지 소유권

기사입력 2010-01-26 오후 12:23:58

 

영어의 '~ism'은 그리스어에서 동사를 명사화하는 어미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위, 관습, 상태, 원리, 신조, 특성, 지향 등을 나타내는 여러 용도로 쓰인다.

이것을 흔히 '~주의'라고 번역하는데, 이 번역은 영어에서의 용도 중 일부만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착오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말에서 '~주의'라 하면 원리, 신조, 지향 등 목적의식이 개재된 규정적(normative) 의미로만 받아들여지고 현상을 묘사하는 기술적(descriptive) 의미가 배제되기 때문이다. (criticism, barbarism 같은 말은 '~주의'로 옮기지 못하지 않는가?)

'자본주의'로 번역되는 'capitalism'은 원래 "자본을 가진 상태"라는 기술적 의미로만 쓰이다가 20세기로 넘어올 무렵부터 규정적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말이다. <자본론>(1867, 1885, 1894년)에서도 "capitalist"란 말은 수천 번 쓰이지만(물론 '자본주의자' 아닌 '자본주'의 뜻으로) "capitalism"이 쓰인 것은 총 10회도 되지 않는다.

대신 "kapitalistisches System", "kapitalistische Produktionsform" 등의 표현이 많이 쓰인 것은 이념 아닌 하나의 현상으로서, 기술적 의미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베르너 좀바르트의 <유대인과 근대 자본주의>(1902)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4)이 나올 무렵에야 'capitalism'이 하나의 이념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념으로서 자본주의는 20세기의 역사적 현상이다. 따라서 19세기 이전의 'capitalism'을 규정적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은 일종의 시대착오(anachronism)에 해당된다. 전근대 사회의 '자본주의 맹아'론은 이런 의미의 한계를 가진 것이다. '맹아'라 함은 장차 꽃 피우고 열매 맺을 잠재력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 꽃과 열매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규정적 의미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서 어느 시기에 나타난 현상을 실제로 나타나지 않은 현상의 예고로 해석하는 것은 역사적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 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자본주의 맹아'에 집착해 온 것은 자본주의의 위력이 어마어마한 세태 때문에 마치 문명 발전의 필수적 단계처럼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본주의를 문명의 궁극인 것처럼, 또는 문명 그 자체인 것처럼 받드는 유사종교 행태까지 나타나는데, 이것은 순수한 믿음이라기보다 기득권 고수를 위해 신자유주의 정책 노선을 주장하기 위한 정략적 행태가 더 많은 것 같다.

'자본주의'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이념을 가리키는 인상을 주는 것이므로 이 글에서는 19세기 이전 기술적 의미의 'capitalism'을 '자본 체제'라 부르기로 한다. "자본주의 체제"라 하면 이념으로서 자본주의를 전제로 하는 체제라는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근세 초부터 서유럽 지역에서 자라난 하나의 경제 체제가 19세기를 지나는 동안 힘을 키워 정치와 사회 방면까지 통합하는 강력한 세계 체제로 자라나고 20세기에 들어와 이 체제의 원리에 대한 깊은 믿음이 널리 일어나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이념이 세워졌다고 나는 본다.

1861년 프루동이 내린 'capitalism'의 정의를 '자본 체제'에 해당하는 것으로 봐도 될 것이다.

"노동자가 노동력으로 자본에 작용을 하여 수입의 원천이 되게 하지만 이들 노동자가 자본을 소유하지 못하는 사회경제 체제". (황런위, <자본주의 역사와 중국의 21세기>, 20쪽에서 재인용)

자본 체제의 특성을 논하는 데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사적 소유권의 강화에 초점을 맞춘다. 각 관점이 바라보는 측면들은 어차피 서로 얽혀 있는 것인데, 이념으로서 자본주의가 소유권의 절대화를 중심에 두는 것이므로 이에 맞춰 소유권 측면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소유권 개념은 문명과 함께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문명 초기에는 '원시 공산제'가 존재했으리라고 인류학자들이 추정하는 것이고, 실제로 미개사회에는 소유권 개념이 미약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왔다.

농업 문명이 발달하면서 소유권 개념도 자라나지만 농업 사회 단계에서는 그 성장에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수준의 소유권 강화를 억제하는 압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농업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재산인 농지의 경우가 명백한 예다.

농지는 경작하는 농부가 있음으로써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재산이다. 따라서 농부는 자기가 경작하는 땅의 주인이 아닐 수 없다. 대지주가 소작꾼을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있는 절대적 소유권은 인구가 늘어나 노동력이 넘쳐나게 되는 먼 후세의 일이다. 개간할 땅이 넉넉히 있는 데 비해 노동력이 아쉬운 것이 초기 농업 사회에서는 보통이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경작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춘추전국시대 중국 기록을 보면 영주들이 제일 두려워한 것이 백성이 떠나가는 것이었고, 제일 바란 것이 백성이 모여드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서 농부가 경작지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할 처지도 아니었다. 농지의 획득과 유지에 권력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권력자와 경작자가 호혜적 공생관계를 맺게 되고 토지는 공유의 대상이 된다. 이 공유는 절대적 소유권 사이의 평면적 분할이 아니라 부분적 소유권의 중층적 결합이다.

권력과 생산력의 공생관계가 농업 사회 질서의 본질이다. 권력과 생산력이 1 대 1로 만나면 공생관계의 효율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권력에는 경쟁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소유권의 배타성 문제가 제기된다. 권력 내부에서 몫을 다투는 중간 권력의 경쟁이 배타적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규모가 큰 사회에서는 최고 권력자가 말단의 문제를 모두 직접 보살피기 힘들기 때문에 중간 권력이 만들어져 권력 자체가 중층화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생산자 위에 소영주 계층, 그 위에 대영주 계층, 그리고 그 위에 왕이 자리 잡는 것이다. 권력의 중층화는 두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하나는 권력의 유통 구조가 복잡해서 비용이 많이 들게 되는 것이고, 또 하나가 중간 권력 사이의 경쟁으로 소유권의 배타성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두 가지 문제는 동전의 양면처럼 얽혀서 생산자와 최고 권력자 양쪽의 부담을 크게 만든다.

 

중국에서 기원전 10세기를 전후해 '왕토(王土)'사상이 자리 잡은 것은 중간 권력이 일으키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대응이었다. 천하의 모든 땅을 최고 권력자의 소유로 선포함으로써 중간 권력의 경쟁이 과열되지 않도록 한계를 설정한 것이다. 왕의 지배권과 농부의 경작권을 직접 결합시키면서 중간 권력의 주체적 역할을 배제하고 보조적 기능만 허용한 관념이다.

왕토사상은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오랫동안 중앙 집권 체제를 지지하는 하나의 관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물론 이 이념이 언제나 완벽하게 실현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실현을 위해 행정의 효율화 등 노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유럽 등 다른 지역에 비해 중앙 집권성과 안정성이 뛰어난 정치체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동아시아 지배층에게는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것(與民爭利)"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도덕적 전통이 있었다. 권력, 학식 등 경쟁에 유리한 조건을 가진 계층의 경제 활동을 억제함으로써 불공정 경쟁을 원천적으로 가로막은 관념인데, 또한 중간 권력층의 역할에 한계를 둔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중앙 집권적 정치체제는 중간 권력의 비용을 줄이고 토지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권력자와 생산자 양쪽을 다 이롭게 해주었다. 이런 좋은 체제를 만들어낸 것이 동아시아 사람들이 다른 곳 사람들보다 꼭 똑똑해서가 아니었다. 농업 사회가 일찍 발달하고 인구밀도가 조밀해져서 갈등을 최소화할 압박을 더 많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소유욕에 적절한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이 체제의 핵심적 요소였다.

농업 사회 후기로 넘어오면서 내부 압력이 늘어나 변화 방향이 모색된 것은 유라시아 대륙 어디에서나 일어난 일이다. 변화의 중심축이 소유권 강화에 있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제 권력자의 경쟁 못지않게 생산자 사이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최고 권력자를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적 질서가 개인을 직접 보호해 주는 힘이 약해지면서 각자가 자기 안전과 번영을 스스로 확보하기 위해 각개약진에 나서면서 들고 나온 무기가 소유권이었다.

농업 사회 안에서도 소유권 강화 현상이 일찍부터 나타난 영역이 있었다. 상업 영역이었다. 농업 사회의 생산력 발전에 따라 비생산 인구가 늘고 지역적 분업이 형성되면서 시장이 확대되고 상업의 비중이 커졌다. 상업 활동은 안정된 소유권의 발판을 필요로 했다. 같은 시대 같은 사회 안에서도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강한 소유권 의식을 가지고 활동했다.

▲ 14세기 시에나의 거리 풍경(로렌체티). 같은 시대 다른 유럽인들 눈에는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화려한 모습이 별세계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무렵까지 이슬람권의 경제적 번영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는 우중충한 유럽 한 귀퉁이에 화려하게 꽃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풍요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프레시안

그리고 상업 활동이 집중되는 지역이 생기기도 했다.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대표적인 예다. 회사 제도를 비롯해 많은 '근대적' 금융-경제 제도들이 이 지역에서 나타나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강력한 소유권을 전제로 하는 제도들이었다. 그래서 근대 자본 체제의 출발점을 베네치아, 피렌체 등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 찾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특별히 똑똑해서 안정성 높은 중앙 집권 체제를 만든 것이 아닌 것처럼 중세 말기 이탈리아에서 선진적 금융-경제 제도들이 나타난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당시의 유럽에는 중국처럼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가 없었기 때문에 이 도시국가들이 특화된 기능을 발전시키는 데 대한 권력의 통제가 약했다. 그리고 당시 유럽 지역은 생산력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선진적인 제도라 하더라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제도들이 북해-발틱해 연안의 일부 지역에 이식되는 데는 몇백 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 시기 이탈리아의 금융-경제 제도 발전의 배경에 '이슬람 자본 체제'가 어떤 작용을 했는지 밝혀져야 할 것이다. <위키피디아(Wikipedia)>의 'capitalism' 항목을 보면 이 주제에 관한 연구가 근년 활발한 것을 알아볼 수 있고, 약간의 설명 중에는 8~12세기 '이슬람 농업혁명'에 힘입은 '이슬람 황금시대'에 화폐, 회사 제도 등 선진적 금융-상업 제도들이 고도로 발전한 사실이 나타나 있다.

중세 말기에서 근세 초기에 걸쳐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교역 활동에 이슬람 지역과의 교역이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 시기에 이슬람권의 문화가 기독교권보다 높은 수준에 올라 있었다는 것은 더욱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실증적 연구 결과에 접해 보지 않았더라도 이런 정도 배경 위에서 가설을 세울 만한 길은 너무나 분명해 보인다. "이탈리아인들은 이슬람권의 선진적 제도와 문물을 가장 앞장서서 배워 온 유럽인이었다."

근대 자본체제의 뿌리를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찾는 관점은 유럽 중심주의의 인상을 준다. '세계 체제'라는 본질을 떠나 자본 체제의 존재를 논하는 의미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슬람 자본 체제'에 관해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이 이 관점의 밑바닥을 흔들고 있다. 상업 활동이 고도로 발달한 이슬람권에서 교역 활동을 벌인 여러 미개 지역 중 하나가 유럽이었고, 그 방면의 창구 역할을 맡은 이탈리아인들이 거래 과정을 통해 선진 기술을 배워 온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분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위키피디아>의 'Islamic capitalism' 항목 일부 내용을 옮겨놓는다. 나도 읽으면서 놀랐지만 독자 여러분도 놀랄 것이라 믿는다.

"11~13세기에 카리미(Karimi)라는 기업이 이슬람세계 경제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게 된다. 초기 다국적기업이라 할 수 있는 카리미를 통제하는 50명 가량의 상인들도 역시 '카리미'라고 불렸는데, 그중에는 예멘인, 이집트인, 그리고 더러 인도인도 있었다. 카리미 상인들은 상당한 재산가여서 각자 최소한 10만 디나르, 많으면 100만 디나르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이 그룹은 동방의 많은 주요 시장, 그리고 더러는 정치에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금융 활동의 고객으로 왕후(Emir), 술탄, 대신(Vizier), 외국 상인, 그리고 일반 소비자들까지 넓은 접촉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카리미 그룹은 지중해, 홍해와 인도양의 많은 교역로를 장악하고 있어서 북쪽으로는 프랑키아, 동쪽으로는 중국, 그리고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 너머까지 그 교역 범위 안에 들어갔다.

카리미 그룹이 발명한 제도 중에는 대리인 제도, 자금 동원을 위한 프로젝트 제도, 그리고 대출과 예금을 위한 은행 제도 등이 있다. 카리미 그룹이 그 당시까지의 다른 기업들과 다른 점 또 하나는 세금 징수자나 지주가 아니라 순전히 교역과 금융 거래만을 통해 구축된 자본 체제라는 것이다."


13세기 말 마르코 폴로 여행의 배경도 보다 석연해지는 설명이다. 아직 이슬람 자본주의에 관한 연구 성과에 직접 접해 보지 못했지만, 12~13세기의 이슬람권이라면 르네상스 시대의 기독교권보다는 훨씬 '세계 체제'에 근접한 현상을 보였을 수 있을 것 같다. 차후 조사로 흥미로운 내용을 얻는 것이 있다면 독자들에게 전할 방법을 찾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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