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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보낼 때에 이름 정도는... | 생각해 봅시다 2010-12-31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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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성탄 카드 또는 연하장 대신에 문자를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어찌보면 그런 것들에 비해 시간도, 노력도 많이 절약되는 것 같다.

물론 그전에 비해 보내는 사람의 정성은 많이 빈약해 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정성스럽게 그리고 받는 분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문자 한 자 한 자를 써서 보내는 마음은 같다.

 

나도 보내고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받은 문자 중에는 번호만 알 뿐, 보낸 사람의 이름을 모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모르는데, 보낸 사람은 나와 내 번호를 알고, 문자를 보낸다.

나도 알고 있을리라 생각하겠지만...

 

안타깝게도...나에게는 그런 것을 알아 내는 신통력이 없다.

그러니 누구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일이 누구냐고 되묻는 문자를 보내기도 찜찜하다.

 

그랬다가는 "아니 나를 모르느냐고" 하면서 서운해 할 수도 있기에 그렇다.

 

오늘 두건의 문자가 그런 식으로 왔다.

그저께에는 기도를 요청하는 내용인데, 보낸 사람 이름이 없다.

그저 안부 문자가 아니라, 기도를 요청하는 문자이길래

실례를 무릅쓰고 누구신지 알려주십사 했는데, 돌아온 반응은 섭섭하다는 눈치다.

그러면서도 역시 누구인지 알려 주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기도를 이렇게 하는 수밖에..

 

" 하나님...핸드폰 010- 45$$- 12** 번 주인을 위해 기도하오니...."

 

하나님은 그 주인을 아시겠지만, 앞으로 문자를 보낼 때에는 자기 이름 정도는 써써 보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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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마을에 온 고독한 킬러 '조지 클루니' | 영화 이야기 2010-12-3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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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마을에 온 고독한 킬러 '조지 클루니'
[리뷰] 고독한 인간이 느끼는 처절한 황량함 <아메리칸>
10.12.29 09:03 ㅣ최종 업데이트 10.12.29 09:03 유진경 (moviejoy)
  
▲ 아메리칸 스틸컷
ⓒ ㈜스폰지이엔티
아메리칸

<아메리칸>은 할리우드 톱스타 조지 클루니가 출연한 작품이에요. 그는 블록버스터 영화뿐만 아니라 시나리오 좋은 작품에 출연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배우죠. 전작 <인 디 에어>는 제작비 2500만 불로 북미 극장수입만 8382만 불을 기록했죠. 한국에서 개봉하지 않았지만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 역시 제작비가 2500만 불에 불과했어요. 여기에다 29일 개봉하는 최신작 <아메리칸>은 제작비 2000만 불의 작품이에요. 그는 많은 제작비가 들어가지 않은 작품에서도 자신의 매력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 배우죠.

 

<아메리칸>은 제작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아니에요. 혹시나 속도감 있는 전개를 기대한 관객들이라면 실망할 가능성이 있어요. <아메리칸>은 모든 이야기가 슬로우 스타트에요. 초반부터 마지막까지 가는 과정이 느릿하면서 진중하게 진행되고 있어요. 여기에다 이전 조지 클루니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기도 해요. 너무나 처절한 고독을 느끼는 킬러의 모습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어요. 조지 클루니가 연기한 잭이란 캐릭터는 그만큼 따뜻한 온기가 없는 인물이에요.

 

잭(조지 클루니)은 킬러로서도 유명하지만 무기 제작하는데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에요. 스웨덴에서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을 피해서 사진작가로 위장해서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 머물게 되죠. 잭이 킬러로 살아오면서 오랫동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한 가지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이에요. 바로 어떤 일이 있어도 친구를 사귀지 말란 원칙이죠.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킬러에게 인간의 정을 느낀다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겠죠.

 

하지만 그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이 원칙을 깨게 되죠. 신부 베네테토(파올로 보나첼리)와 알게 되고 클라라(비올란테 플라치도)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면서 부터죠. 이 두 사람을 통해서 예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인간적인 정을 느끼게 되는 잭이에요. 하지만 킬러에게 행복이란 쉽게 허락되는 것이 아니죠. 그에게 무기 제작 명령이 떨어지게 되고 잭이 느꼈던 작은 행복은 점점 깨져가게 되죠.

 

킬러가 나온다고 해서 액션영화를 기대했다면?

 

  
▲ 아메리칸 스틸컷
ⓒ ㈜스폰지이엔티
아메리칸

<아메리칸>은 액션영화가 아니에요. 우리가 할리우드 액션영화에서 기대하는 그런 것들은 이 작품에 없어요. 잭과 다른 킬러들이 싸우는 총 싸움 조차도 몇 방으로 끝날 정도로 미지근해요.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킬러로서의 화려한 액션 본능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잭이 자신을 죽이려는 다른 사람들을 제거하고 그런 것들을 통해 관객들에게 쾌감을 주려고 한 것이 아니란 의미에요. <본>시리즈 같은 킬러의 통쾌한 액션을 기대했다면 이 작품에서 얻어갈 것이 없어요.

 

<아메리칸>은 철저하게 한 인간에 중점을 두고 있는 작품이에요. 잭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마저도 죽일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에요. 평생을 혼자 살아왔고 고독하게 살아온 인물이에요. 하지만 그도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고 사랑도 느끼고 싶어 하죠.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그가 결코 가질 수 없는 사치에요. 잭이 클라라를 만나서 행복을 느끼고 삶에 대한 열망을 꿈꾸는 그 순간에도 영화에서 보여주는 배경은 외딴 이탈리아 마을의 황량함이에요.

 

이 작품에서 조지 클루니가 보여주는 표정은 온화하지 않아요. 그는 항상 맡은 역할마다 신사 이미지가 강했죠.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는 무미건조한 표정만 짓고 있어요. 이 표정만으로도 그의 삶의 무게와 그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줄 정도죠. 혼자 살아가야하는 킬러의 삶이 그의 연기를 통해서 관객들에게 전달되고 있어요. 따라서 <아메리칸>이 한국관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 조지 클루니가 이전에 보여주지 못했던 냉혹하면서 차가운 표정의 캐릭터 잭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의 연기가 슬로우 스타트이자 조금은 무거운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있기 때문이죠.

 

<아메리칸>은 팝콘무비용 할리우드 액션영화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작품이에요. 따라서 화끈한 화력을 기대한 관객들이라면 이 작품은 좋은 해답을 보여주지 않을 것 같아요. 단지 고독한 킬러가 보여주는 무거운 이야기가 마치 우리들의 삶 같이 느껴지는 관객들이라면 조지 클루니가 만들어낸 잭이란 인물은 상당히 마음 가는 캐릭터가 될 것이에요. 


그와 클라라가 보여주는 비극적인 운명이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관객들 마음에 확실한 각인을 남기기 때문이죠.

 

덧붙이는 글 | 국내개봉 2010년 12월 29일. 이 기사는 영화리뷰전문사이트 무비조이(http://www.moviejo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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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 썬다 싱 | 기독교 자료 2010-12-29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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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자 썬다 싱 

 

썬다 싱은 1889년 9월 3일 북인도 펀잡주 람푸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세르 싱은 부유한 대지주로서 교리에 따라 열심히 사는 시크교의 신도였다. 썬다의 어머니는 고상하고 순결하며 사랑과 동정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썬다가 위대한 성자가 되는데 아주 큰 영향을 끼친 분이었다.

 

썬다는 열 네 살 때 어머니와 형을 잃게 되면서 조용하고 온순하던 성격이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때 썬다는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 학교는 자신이 믿는 시크교가 아닌 기독교를 전파하였기 때문에 점점 반발심이 많이 생겨 불량한 학생이 되어갔다. 결국 썬다는 친구들이 보는 가운데 성경을 조각조각 찢어놓고 그 위에 기름을 부어 불에 태우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썬다는 시크교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하였으나 노력을 하면 할수록 더욱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만 생기는 것이었다. 썬다는 1904년(15세) 12월 16일부터 새벽마다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되었는데 응답을 받지 못하게 되자 결국 셋째 날 새벽 5시에 동네 앞을 지나가는 기차에 치어서 죽을 결심까지 하게 되었다. 그는 식음을 전폐하면서 참된 신이 있다면 평안을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18일 새벽 4시 30분이 되었을 때 갑자기 썬다의 방안으로 밝고 환한 빛이 강하게 비춰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 밝은 광채 가운데서 신비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찾는 길이니라. 나는 너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버린 예수 그리스도니라." 그순간 썬다는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계시구나! 이 분이 그 자신이구나" 라는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예수 그리스도 앞에 꿇어 엎드리게 되었다.

 

썬다는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하고 큰 기쁨과 평안을 얻은 날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열정적이며 적극적으로 증거하게 되었다. 시크교는 힌두교의 한 종파였는데 그 교의 신도들은 다른 종교의 신도들보다도 종교심이 강했기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된 썬다는 큰 핍박을 받게 되었다. 가족들과 친척들은 썬다를 박해할 뿐 아니라 그가 다니고 있던 학교와 살고 있던 마을의 기독교인들까지도 심하게 핍박을 하였다.

 

썬다의 숙부는 조카의 마음을 고쳐볼까 하여 그를 데리고 지하실로 들어가 금고를 열고 많은 금, 은, 보석, 화폐를 보이며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벗고 극진한 겸손으로 어린 썬다에게 빌었다. "네가 만약 그 이단의 신앙을 버리고 우리와 같이 있으면 이 모든 것이 너의 것이 될 것이다." 썬다는 숙부의 청을 거절하면 얼마나 그를 모욕하는 일인가 생각하고 두 눈에서 괴로움과 슬픔의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썬다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새 힘을 얻어 단호하게 말하였다. "숙부님! 죄송합니다. 비록 이 세상의 모든 부귀를 다 준다할지라도 내 마음속에 있는 평안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 내 몸이 불사름을 당한다 할지라도 나의 사랑하는 구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수주일 후 썬다는 시크교의 전통에 따라 태어나면서부터 한번도 잘라보지 않은 두발을 밀어버렸다. 이것은 그가 시크교도가 아니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은 썬다가 시크교도의 상징이었던 긴 머리를 잘라버리자 짐승과 같이 취급하였다. 그들은 같은 밥상에서 식사를 못하게 하였으며 짐승을 대하듯이 음식물을 던져주었다. 또한 동네 사람들은 썬다를 만나면 욕을 하며 침을 뱉었다.

 

약 여덟 달 동안 썬다는 수많은 유혹과 핍박 가운데서도 타협을 하거나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아버지는 몰래 독약을 넣은 주먹밥을 주면서 썬다를 내쫓았다. 썬다는 집을 떠나 얼마쯤 갔을 때 배가 고파서 그 주먹밥을 먹었는데 그때부터 심한 복통이 생기고 피를 토하면서 간신히 어느 미국 선교사의 집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급히 달려온 의사는 독약이 온몸에 퍼져서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하였다. 다음날 썬다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선교사의 집을 방문한 그 의사는 썬다가 하나님의 기적으로 치유된 것을 보면서 크게 놀랐다. 그일 후에 그 의사는 기적을 나타내신 하나님을 확신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여러 날 후에 썬다는 수바투라는 곳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 후 33일이 지났을 때부터 썬다는 맨발에 성경 한 권을 손에 들고 1년 동안 전국 순회 전도여행을 다녔다. 그 전도여행을 마친 후에 썬다는 그때까지 복음이 전파되지 못한 북인도에서 적극적으로 전도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는 구령에 불타는 사랑을 가지고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카시밀, 펀잡, 바니할 지방을 돌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구원과 평화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가진 것이라고는 담요 두 장과 성경 한 권 밖에 없는 그에게 가혹한 날씨와 회교도들의 박해는 너무나도 심했다. 썬다는 때때로 중상모략을 당하며 굶주리고 목마르며 인적이 없는 수풀 속으로 쫓겨나고 짐승의 굴에 들어가며 벗은 발은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썬다는 주님을 위하여 이러한 고난을 많이 받게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행복보다도 귀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정진했다.

 

썬다 싱은 고원지대였던 코드갈에서 전도하던 중에 미국인으로서 부유한 생활을 버리고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사무엘 스토크스를 만나게 되었다. 스토크스는 썬다와 함께 전도하면서 지내던 시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주님을 본받고자 하는 열정이 생겨서 아씨시의 프랜시스처럼 탁발전도를 하기 위하여 인도로 갔다. 며칠 후 나는 길에서 인도 전역을 전도해 본 경험을 가진 홍포의 소년을 만났다. 그의 전도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 그리고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직 소년인데도 그는 주님을 위해 온갖 환난과 박해 기아와 추위를 잘 견디었으며 심지어 옥에 갇히게 되는 경우에도 그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는 때때로 위궤양으로 말미암아 고생을 했다. 한번은 그가 위궤양에다 고열까지 겹쳐 도로 위에 쓰러진 일이 있었다. 날씨는 매우 춥고 해가 저물어 나는 어찌하였으면 좋을지를 몰랐다.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고열에 짓눌려 온 몸은 오한으로 떨었다. 사경을 헤매는 그에게 좀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애써 미소를 짓더니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나는 대단히 행복합니다.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기 때문에 나는 매우 감탄했다. 그의 입에서 나는 한번도 불평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는 언제나 고통 중에서도 참 기쁨을 맛보았다."

 

1908년부터 1909년까지 2년 동안 썬다는 북인도 지역과 티베트를 전도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회교도의 박해는 말할 것도 없고 말라리아와 열사병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다. 또 눈보라와 빙하에 익숙한 그였는데도 얼어죽을 뻔한 때도 있었으며 히말라야 급류에 익사할 뻔도 하였다. 

 

1909년(19세) 겨울에 성공회 주교 레프로이 박사로부터 신학교에 입학을 해서 사제서품을 받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썬다는 목회와 신학적인 훈련을 받아보고자 입학하였다. 신학교에서 그는 여전히 홍포를 입었고 늘 혼자 앉아 성경을 묵상하거나 기도를 많이 했고 또 쉬는 날이면 여전히 전도를 하였다. 썬다는 그 성공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성직자가 된 사람은 다른 교단의 교회에서는 설교를 할 수 없고 오직 성공회 안에서만 목회해야 한다는 주교의 말을 듣고 그 학교를 중퇴하고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이미 설교할 자격을 받았으나 자신의 증거사역이 제한된다는 것을 알고 주교에게 설교권을 반환하였다. 주교는 썬다가 부여받은 특별한 성격과 사역과 보다 넓은 선교영역을 인식하고서 그의 설교권을 승인해 주었다. 그리하여 교단이나 교리에 속박을 당하지 않고 전과같이 자유롭게 전도하고 설교하며 살기로 결단한 썬다는 결국 1910년(20세) 7월에 중퇴하게 되었다.

 

썬다는 신학생으로 있는 동안 여러 신비가의 서적을 읽었는데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성 프랜시스』 등을 오래 애독하였다. 그밖에도 신비가 야곱베메,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스웨덴 보르그, 마담 기욘 등의 서적을 통하여 그는 내면생활에 더욱 깊은 곳을 지향하는 동기를 얻게 되었다.

 

1911년과 1912년은 북인도 지방을 다니며 전도하였다. 이 여행 중에 썬다는 날칸다라고 하는 곳에서 곡식을 거두는 농부들을 보고 열심히 전도를 하였다.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던 농부들이 점점 반감을 일으켜 욕을 하기 시작했고, 그들 중에 한 사람은 돌을 썬다의 머리에 던져서 상처를 내었다. 얼마 후에 돌을 던진 사람은 갑자기 머리가 아프게 되었기 때문에 부득이 일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썬다는 그 농부를 대신하여 낫을 가지고 다른 농부들과 함께 곡식을 베어주었다. 이러한 썬다의 행실을 보고 농부들은 감동을 받았다. 해가 지자 농부들은 아파서 일찍 집으로 돌아간 그 농부의 집으로 썬다를 데리고 가서 그의 선한 행실에 대하여 칭찬을 하고 썬다의 전도를 받게 되었다.

 

썬다 싱은 입신체험을 매우 많이 하였는데 그가 처음으로 입신체험을 하게된 때는 1912년(22세)이다. 그해 봄 티베트로 전도여행을 떠난 썬다는 많은 눈으로 인해 몇 주간 코드갈에 머물면서 기도생활에 전심전력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기도하던 중에 썬다는 문득 이상한 세계에 들어가 천사들의 무리 가운데 있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죽어서 영혼이 하늘나라에 들어온 줄 알았다고 한다. 이것이 썬다의 첫 번째 입신체험이다.

 

훗날에 썬다는 자신의 입신체험이 그의 전도여행에 끼친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증하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사두로 생활해온 14년 동안 많은 고통과 핍박을 받았고 어느 때는 이 생활을 포기할 뻔하였던 유혹을 받았지만 이 입신체험을 생각하면 결코 전세계를 준다해도 나는 이러한 생활을 중지할 수는 없었다. … 나는 한 달에 8-10회 정도 영안이 열리어 천계에 들어간다.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동안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계의 영광 중에 다니며 천사들이나 성도들과도 대화를 한다."

 

1912년 썬다는 북인도 전도여행 중에 마하리시를 만났다. 당시 썬다의 증언을 들어본다.

"나는 카일라스산의 만소로와르 호숫가를 지날 때 발이 미끄러지면서 산 아래로 굴러가다가 한 동굴 앞에서 멈추게 되었다. 그때 나는 그 동굴 속에 매우 나이가 많은 사람이 눈을 감고 앉아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몸에는 의복이 걸쳐있지 않았으며 머리와 손톱은 몹시 길게 자라 있었다. 그는 감았던 눈을 뜨자 나에게 앉으라고 손짓하며 ... 우리가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자"라고 말했다.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끝냈을 때 나는 그가 '마하리시(大聖師)구나'하고 생각했다. 내가 그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묻자 '나는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엄격한 이슬람교도였던 부모님의 슬하에서 자랐소. 장성하여 나는 더비쉬 사원에 들어가서 수도를 하며 코란 경전을 읽었소. 30세가 되었는데도 그 회교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였는데 당시 성 프란시스 사비에르의 조카 중의 한 사람인 자르노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들렸다가 나에게 세례를 주었소. 그 후 75세가 될 때까지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전도하였소. 나는 21개 국어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오. 그러다가 내가 더 여행을 계속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 차츰 이곳까지 오게 되었고 이 카일라스 산에 거주해온 지는 209년이 되었오'라고 하였다."

 

썬다는 그의 이름을 여러 번 물었으나 그는 결코 알려주지 않고 "내 이름은 크리스천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기 때문이지요"라고만 하였다. 썬다는 이 첫 번째의 만남 이외에 1916년과 1917년에도 마하리시를 만났다. 썬다는 마하리시를 만나서 은혜받은 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여러 번 간증하였다.

 

썬다 싱은 1913년(23세) 주님을 본받아 40일 금식기도를 하게 되었다. 그와 친하게 지내던 의사 스위프트씨는 '목숨을 잃는다'고 반대하였지만 굳게 결심한 썬다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하드와와 데라둔 사이의 정글 속에 있는 참대나무가 우거진 숲을 택한 후에 금식하는 날짜를 계산하기 위해서 돌 40개를 가져다가 곁에 놓고 매일 한 개씩 던지면서 금식을 하였다. 금식을 하는 동안 그는 평소보다 더 큰 평화와 행복을 느꼈다. 그는 육체의 힘이 거의 없어졌을 때 사자와 맹수의 우는 소리를 들었다. 감각이 예민하게 되어 보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더 빠르게 되었다. 나중에는 기력이 없어서 날짜도 헤아릴 수 없게 되었으므로 며칠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침 이때 대(竹)를 베러온 나무꾼이 거의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누구인지 알 수 없었으나 성경에 쓰여있는 그의 이름을 보고 썬다인 줄 알고 친구들에게 데려다 주었다.

 

이 금식 중에 있었던 체험은 그의 생애에 한 전환점을 이루는 중대한 경험이었다. 이 체험이 그에게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가에 대해서 그 자신이 고백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금식 전에는 나에게 유혹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피곤할 때 누가 와서 질문을 하거나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나는 늘 괴롭게 생각하였다. 지금도 다소 그런 일이 있으나 정도는 다르다. 이것은 육체가 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심경에서도 해탈하기를 바란다. 또 나는 먹지 못하고 몹시 피곤할 때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돌보시지 않는가 하는 불평이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집에 가서 결혼을 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면서 좋은 신자가 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무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의 결혼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와 결혼한 내가 어찌 또 결혼할 수 있겠는가. 나의 참된 결혼은 그리스도와 맺었다."

 

금식 중에 새로운 영적 능력을 받은 썬다는 몸이 회복되자 또다시 티베트로 전도여행을 떠났다. 이 전도여행 중에 썬다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이때 있었던 최악의 박해는 큰 절들이 많은 라자르시에서 일어났다.

 

썬다가 저자 거리에서 전도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首)라마승은 격노하여 썬다를 체포하고 송장굴에 던져 사형을 시키라는 즉석공판을 내렸다. 썬다는 우물같이 생긴 송장굴까지 끌려가서 옷을 벗기운 채 던져졌다. 오른팔이 부러진 그로서는 이제 그 안에서 굶주림과 고통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 빈 우물 속에는 먼저 죽임을 당한 송장들이 많이 있었고 그 썩은 냄새로 인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 처참한 암흑의 구덩이에서 사흘 밤낮을 한번도 잠을 자지 못한 썬다는 죽음이 점점 가까워짐을 느끼게 되었다. 당시의 경험에 대한 썬다의 간증을 들어본다.

 

"내 육체의 고통은 막심하였으나 내 영혼은 행복하였다. 나는 하나님께 더욱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의 마음속에는 큰 기쁨이 흘러 들어와 내가 소름끼치는 무서운 곳에 있다는 것을 잊을 정도로 신기한 평화가 내 마음에 가득 차서 어찌 유쾌한지 나는 그것을 형언할 수가 없다. 나는 이때처럼 큰 희열을 경험한 적은 없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 지옥의 우물을 천국의 문으로 변화시켰다." 사흘째 밤 그가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 위에서 자물통 여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더니 로프를 잡으라는 소리가 들렸다. 로프가 손에 닿자 썬다는 혼신의 힘을 다해 위로 올라갔다. 밖으로 나와보니 구조자는 없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 이듬해 1914년(24세)에는 네팔전도를 하게 되었다. 6월 8일, 썬다는 네팔의 일람이라는 부락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성경을 읽어주고 설교를 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계속 전도를 하자 사람들은 나를 끌고 가서 감옥 속에 던졌다. 그들은 나의 옷을 홀랑 벗기고 착고를 채웠다. 그리고는 많은 거머리 떼와 오물을 내 앞에 쏟아놓고 욕을 하면서 나갔다. 그 거머리 떼는 전신으로 기어올라 나의 피를 빨았다. 처음 두서너 시간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나는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였다. 순간 그 고통은 가볍게 느껴지고 감옥은 천성과 같이 변했다. 내가 온전히 기쁨으로 충만해서 찬송을 계속 부르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착고에 채인 채 다시 전도를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다음날 나를 풀어주었다. 거머리가 내 피를 다 빨아먹었기 때문인지 현기증이 나서 잘 걸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지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다."

 

 1918년(28세) 1월부터 썬다는 인도 전역을 다니면서 전도집회를 하게 되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 아니면 갈 수 없는 티베트 전도, 많은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굽히지 않는 의지, 많은 기적과 신비체험 등이 점점 전인도 교계에 알려지게 되어 설교와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였던 것이다. 그가 가는 곳마다 교회는 청중들로 가득 찼다. 어떤 때는 수백 명, 수천 명씩 청중이 몰려와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썬다는 빈틈없는 전도일정으로 강행군을 하면서도 기도생활만은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일절 사람들에게 돈을 받지 않았다. 그는 돈을 넣는 전대는 물론 도시락도 가지고 다니질 않았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1918년 겨울부터는 버마, 싱가폴을 돌면서 집회를 인도했다. 그는 말레이, 페낭에 가서 전도하고 일본으로 갔다. 썬다의 전도집회는 가는 곳마다 은혜가 넘쳤다. 도꾜의 후지미 교회는 썬다가 강단에 섰을 때 마치 예수님이 선 것 같았다고 하였으며, 고베의 교회에서는 청년들이 맨발의 썬다를 따라 겨울동안 양말 안신기 운동과 교회의 부흥을 위한 특별전도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3월부터 5월까지 썬다는 중국에서 전도여행을 하였다.

 

인도로 돌아온 썬다는 티베트로 향했다. 이로써 1908년부터 넘나들기 시작한 히말라야를 열 번째 넘은 것이다. '썬다를 통과시키지 말라'는 티베트 정부의 지령으로 인해 썬다는 항상 다니던 길을 피해서 험한 길을 돌아가야만 했다. 티베트에서도 마음대로 다닐 수 없기 때문에 부락전도를 하였는데 여간 어려움이 많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추위와 굶주림으로 큰 고통을 당하였다.

 

썬다는 랑케트 쪽으로 가는 길에서 티베트인 한 사람과 동행을 하게 되었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눈보라와 발이 푹푹 빠지는 눈이 덮인 산길을 사력을 다해 전진하다가 산비탈에 웅크리고 있는 한 사람의 동사체를 발견했다. 썬다는 동행자에게 그 사람을 업고 가자고 제의하였으나 그 동행자는 '그러다가는 우리도 얼어죽어요. 나는 살아야 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냉정하게 앞으로 가는 것이었다. 썬다는 비탈을 조심스럽게 더듬으면서 내려가 그의 생사를 확인했다. 그 사람은 그때까지 살아있기는 했으나 얼어죽기 직전이었다. 썬다는 죽은 것 같은 그를 끌어올려 등에 업고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눈보라 길을 뚫고 나아갔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고갯마루에 거의 다다른 썬다의 시야에 또 하나의 동사체가 보였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는 바로 몇 시간 전에 살겠다고 먼저 가버렸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꽁꽁 얼어서 죽어 있었다. 썬다와 등에 업혀있던 사람은 서로 밀착해 있었기 때문에 체온이 내려가지 않았으므로 살게 되었는데, 목숨을 건지겠다고 먼저 가던 그는 혼자만 걸어가다가 체온이 너무 내려가 결국 얼어서 죽게 된 것이다. 썬다는 마태복음에 16장에 있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랑케트 쪽으로 전진했다.

 

1920년(30세)에 썬다는 영국과 미국의 주요도시를 방문하여 순회전도를 하였다.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썬다는 팔레스타인, 스위스, 독일, 스칸디나비아 삼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등 순회전도를 계속하였다. 썬다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스위스에서는 썬다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특별 열차를 배정해주는 일도 있었고 우체국에서는 우편배달을 위한 트럭을 가지고 사람들을 실어다주기도 하였다.

 

썬다는 많은 사람들이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기를 바랬지만 한번도 안수기도를 하지 않았다. 어느 목사님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축복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썬다는 말했다. "성경을 찢어서 불태운 이 손으로 어떻게 안수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못에 찔린 주님의 손으로만 축복을 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썬다는 두 손을 모으고 "주님,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여 주었다. 썬다 자신은 날로날로 작아지고 오직 예수님만 더욱 크게 영광받으시기를 원했다. 유럽에서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돌아온 썬다는 또다시 북인도 전도를 하였다.

 

1923년(33세) 4월, 세상을 떠난 썬다의 아버지는 거처할만한 집도 없이 떠도는 아들에게 주택을 마련하라는 유언과 함께 많은 재산을 상속하였다. 썬다는 토지문서들을 다 정리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심라힐의 나환자촌 옆에 집을 하나 사고 나머지 돈은 복음 증거자들을 위한 자선 및 장학기금으로 희사했다. 썬다는 작은 주택이지만 이곳을 나환자 병원에서 일하는 의료선교사에게 내어주고 자신은 뒷마당에 토벽을 쌓아올려 방을 하나 만들어서 거처하게 되었다. 

 

5월 23일, 썬다는 다시 티베트 전도에 나섰다. 그러나 중국과의 전쟁후유증으로 말미암아 변경을 봉쇄하고 있어서 티베트 진입이 불가능했다. 설상가상으로 여행 중에 썬다는 위궤양으로 말미암아 큰 고통을 당하였기 때문에 간신히 수바투로 돌아왔다. 유럽에서 전도할 때부터 더욱 악화된 위장이 이제는 헐대로 헐어서 치료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의사는 그에게 전도활동을 하지 말고 오직 휴양만 할 것을 당부했다. 극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절망해 본적이 없었던 썬다였지만 몸이 너무 악화되어 전도여행을 다닐 수 없다는 통보를 받게 되자 암울하고 절망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십 년 동안을 잠시도 쉬지 않고 복음전파를 위해 최선을 다 하였기 때문에 과로와 영양실조 등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던 것이다.

 

썬다는 1924년(34세) 봄 다시 티베트 전도여행을 시도해 보았는데 위궤양뿐만 아니라 폐결핵까지 걸려서 거칠고 사나운 길을 많이 걸어야하는 전도여행이었기 때문에 감당하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악화된 건강문제로 말미암아 휴양을 하면서 지낸 몇 년 동안 썬다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말 이외에는 성경말씀만 증거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가끔 나환자촌에 가서 나병환자들을 만나보기도 하였다. 건강상태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면 책을 집필하거나 문서선교에 힘을 썼다. 입으로 전도를 못한다면 문서를 통해서 한 영혼이라도 더 살려야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928년(38세) 봄, 썬다는 다시 한번 티베트 전도여행을 시도했다. 그러나 히말라야의 산길에서 피를 토하며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그를 지나가던 티베트 상인들이 발견하여 수바투로 데려다 주었다. 다음해인 1929년(39세) 4월 18일, 썬다는 또다시 티베트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날 이후로는 아무런 소식도 없으며 언제 어디서 별세하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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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다 싱의 생애가 주는 교훈(1889-1929) | 기독교 자료 2010-12-29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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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발자취> 썬다 싱의 생애가 주는 교훈(1889-1929)
백금산 목사(예수가족교회)


20세기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은 13세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18세기 임마누엘 스웨덴붉과 더불어 교회사의 3대 신비주의자로 간주된다. 또한 썬다 싱은 13세기 이탈리아의 성 프란시스와 교회사에서 가장 비슷한 삶을 살다가 간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썬다 싱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전도자로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썬다 싱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려보고 그가 우리에게 남겨진 신앙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자 한다.

시크족에서 태어남

썬다 싱은 1889년 인도 푼잡지역의 시크족의 대지주 세르 싱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크족은 15세기말 나나크가 이슬람적 요소와 힌두교적 요소가 결합된 시크교를 창설하면서 전 종족이 시크교도가 되었다. 19세기 초 시크 국가가 창설되었으나 영국과의 시크전쟁(1845-46, 1848-49)에 패배한 후 영국령 인도에 병합되었다.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시크족들은 자신들의 성씨를 가지고 있었으나 18세기 시크종교가 무굴황제에 의해 박해를 받으면서부터 평화주의자에서 호전적으로 변했다. 그래서 이들은 '사자'를 뜻하는 싱이라는 성씨를 공통으로 사용하면서 시크교도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다. 그래서 시크족들은 동일한 시크종교를 신봉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전투공동체로 변했다. 시크족들은 자신들의 부족을 지키고,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윤리적 가치가 되었다. 썬다 싱도 어릴 때 이러한 시크족의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특별히 썬다 싱의 어머니는 대단히 종교적인 여성으로 박타(bhakta, 여성 종교인)라는 칭호까지 받는 여성이었다. 그래서 썬다 싱의 어머니 아주 썬다를 아주 어릴 때부터 종교적으로 양육했다. 썬다 싱은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를 드리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인도 경전들을 공부했다. 또한 썬다 싱의 어머니는 때때로 힌두나 시크의 종사들을 집으로 모시거나 또는 숲 속에 있는 노 사두에게 데리고 가서 가르침을 받게 하기도 했다. 썬다는 이렇게 어머니의 종교적인 가르침을 받고 자라면서 조숙한 소년이 되었다. 어린 썬다의 어른스러운 언행을 지켜보던 그의 아버지는 어느 날 사원의 사제를 찾아가 아이의 장래에 대해 걱정스러운 듯 의논했다. 그러자 사제는 썬다사 자라서 사두가 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훗날 썬다 싱은 힌두의 사두가 아니라 기독교적 사두가 되어 인도의 토착적인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두적 전도자가 되었다.

회심이전의 꼬마 기독교 박해자

썬다 싱은 12살쯤 되어서 미국 장로교 선교회가 운영하는 기독교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지리적으로 공립학교는 너무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썬다가 열 네 살이 되던 해 썬다 씽이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가 죽었다. 이것은 어린 썬다 싱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썬다는 식음을 전폐하고 비애와 절망의 나날을 보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어머니가 하던 대로 새벽 일찍 목욕재계부터 하고 정좌수도에 들어갔다. 그리고 요가철학을 깊이 묵상하면서 깨침의 세계를 향해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나날이 말이 없는 소년이 되어갔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생의 허무를 일찍 경험한 그로서는 진리를 깨우치면 살고,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면 죽는다는 절박한 심정이 있었다. 그러자 기독교 학교에서 썬다는 점점 이상한 아이 취급을 받게 되고, 썬다 또한 점점 기독교 선생들과 학교와 성경과 예수님에 대해 증오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썬다는 점점 성경과목을 싫어하게 되었고, 때로는 성경과목 시간을 불참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의적으로 어려운 질문을 하여 선생을 괴롭히기가 다반사였다. 결국에는 아버지를 졸라 멀리 왕복 40리를 다녀야 하는 공립학교로 옮겨갔다. 기독교 교육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썬다는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행동했다. 악동들을 모아 공공연히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미션계 학교를 부수자. 선교사를 추방하자, 시장부근에 모여 사는 예수쟁이들을 추방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행동하기도 했다. 그런데 썬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병상에 눕게 되었다. 병으로 약해진 썬다를 위해서 아버지는 다시 장로교의 미션학교를 찾아가 썬다를 복교시켰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썬다는 친구들이 보는 가운데서 성경을 갈갈이 찢어버리고, 기름으로 조각조각 불태워버리는 행동을 했다.

사도바울을 닮은 특별한 회심

그러나 기독교에 대해서 이처럼 적대적이던 썬다 싱이 20세기 가장 위대한 전도자의 한 사람이 되는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다. 썬다 씽의 인생을 180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놀라운 회심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썬다 싱의 회심 이야기는 기독교의 수많은 급격한 회심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 중의 하나다. 또한 썬다 싱의 회심이야기는 사도 바울의 다메섹 회심이야기와 너무도 흡사하다. 회심이전의 가장 적극적인 기독교 박해자라는 점, 회심시 빛 가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점, 회심시 하신 말씀, 회심이후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가장 위대한 복음전도자가 된 점등이 너무나 닮았다. 사도 바울의 회심이 초대기독교의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듯이 썬다 싱의 회심은 인도교회의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다. 히말리야산을 해마다 오르내리면서 전설적인 전도사역을 펼쳤던 썬다 싱의 전도사역의 뿌리는 그의 회심사건의 강렬함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썬다 싱의 회심사건은 직접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좋다. 1904년 12월 18일 일어난 썬다 싱의 회심 이야기는 칸디에서 행한 썬다 싱의 강연을 받아 적은 것이라고 한다.

"대체로 전도자와 기독교인들의 저에게 찾아오곤 했으나, 저는 그들에게 저항하며 그들을 핍박하였습니다. 어느 마을에 들어갔을 때 저는 그 마을 사람들이 기독교 전도자들에게 돌을 던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서를 찢고 불태워 버리곤 하였는데, 아버지의 면전에서 저는 성경과 다른 기독교 서적들을 난도질하여 석유를 붓고 태워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이 거짓종교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박멸하는 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다 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민족의 종교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종교의 의례와 규율을 모두 수행했는데도 저에게는 만족이나 평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자살할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을 불태운 지 삼일 후에, 저는 새벽 세 시에 일언 목욕 재계하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오 신이여! 만일 당신이 계신다면 저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자살하겠습니다.' 제 생각은 만족을 얻지 못하면 5시 기차가 지나는 철로 위로 머리를 얹고 자살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다면 내세에서나 그것을 얻을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계속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으나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또 다시 평화를 얻길 바라며 30분을 더 기도하였습니다. 새벽 4시 30분, 저는 이전엔 결코 생각하지도 못하였던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불이 났는가 하여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이것은 어쩌면 신이 저에게 주시는 응답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함 빛 속을 바라보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영광과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만일 그것이 힌두교의 화신이었다면 저는 그 앞에 굴복하여 엎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며칠 전에 제가 모욕했던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저는 이런 환상이 제 상상력에서는 나올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힌두스탄어로 말하시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언제까지 네가 나를 핍박하겠느냐? 나는 너를 구원하러 왔다. 너는 올바른 길을 알고자 기도하면서 왜 그 길을 취하지 않느냐?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지 않고 살아 계시며, 이 분이 바로 그 분이심에 틀림없다.' 그래서 저는 그 분 발아래 엎드려 어느 곳에서도 맛보지 못했던 이 놀라운 평화를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제가 그처럼 원하던 기쁨 바로 그것이었으며, 천국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제가 일어났을 때 환상은 사라졌지만 그 평화와 기쁨은 지금까지 제게 남아있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달려가 제가 기독교인이 된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자거라. 네가 성경을 불태운 것이 바로 엊그제이지 않느냐. 그런데 이제는 또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구나.' 저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요, 저는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았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했어요. 오늘부터 저는 그의 제자로서 그를 섬기겠습니다."

박해하던 자가 박해받는 자로

바울의 다메섹 회심사건이 사도 바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처럼, 썬다 싱의 회심사건은 썬다 싱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썬다는 그 날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전했다. 썬다 싱의 얼굴을 너무나 기쁨으로 빛났고, 썬다 싱의 말은 너무나 힘이 있었다. 모든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썬다 싱의 변화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썬다 싱의 회심은 너무나 뚜렷한 변화를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썬다 싱의 이러한 기이한 개종 소식이 주변 일대에 금방 퍼지게 되었다. 썬다 싱의 아버지와 친척들은 썬다 싱을 돌이켜 보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매질을 하고 달래도 보았으나 썬다 싱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썬다 일가는 학교측에 거칠게 항의를 했다. 이 일로 인해서 교장 선생님이 다른 학교를 전임을 가게 되었다. 급기야 마을의 대지주인 썬다 일가의 조직적 박해로 기독교 학교까지 문을 닫게 되었다. 9개월 동안 썬다 씽은 가족들로부터 온갖 모욕과 창피 그리고 박해를 당했다. 나중에는 족장이 종족의 명예와 자존심에 호소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그래서 가족들은 썬다 싱을 완전히 의절하고 집에서 추방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독이 든 빵을 주어 떠나게 했다. 아마도 살아서 가족과 종족에 불명예를 끼치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때의 상황을 썬다 싱은 후에 이렇게 간증했다.

"제가 집에서 쫓겨나던 첫날밤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저는 구주를 만나고 나서, 그 일을 아버지와 형, 그리고 다른 친척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처음엔 가족들이 별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제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커다란 불명예가 된다고 생각하여 저를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그 추운 첫날밤, 저는 나무 아래서 지샜습니다. 저는 그러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몸을 피할 곳도 없이 그러한 곳에서 지내는 것에 익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집에서 호화롭게 살았는데, 이제는 몸을 의탁할 곳도 없고, 따뜻한 옷이나 음식도 없이 여기서 추위에 떨며 굶주리게 되었구나' 저는 그 밤을 꼬박 나무아래서 지새야 했으나 제 마음속에 있는 그 놀라운 기쁨과 평화 그리고 구주의 현존을 생각하였습니다. 제 손에는 신약성경이 들려있었습니다. 저는 그 날 밤을 천국에서의 첫날밤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집에서의 호사스럽게 생활하던 때와 그 때를 비교하게끔 하는 그 놀라운 기쁨을 생각했습니다. 사치와 안락 속에서 저는 마음의 평화를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구주의 현존으로 말미암아 고통이 평화로 바뀐 것입니다. 그 이후로 저는 항상 구주의 현존을 느껴왔습니다."

홍포 입은 인두의 사두적 전도자

썬다 싱은 주님이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8복을 체험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니라'는 바로 썬다 싱을 위해 예비된 말씀이었다. 썬다 싱은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의 부귀와 명예와 안락한 삶을 버리고 고난과 박해의 삶을 선택했다. 그러나 썬다 싱의 마음속에서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세상이 빼앗을 수도 없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 찼다. 아니 그리스도 자신이 썬다 싱의 모든 것이 되었다. 집에서 쫓겨난 후 썬다 싱은 장로교계 학교에서 두 명의 미국인 선교사의 보호 속에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1905년 9월 3일 정확히 만16세 되던 날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1905년 10월 6일 세례 받은지 33일 되던 날 썬다 싱은 크리스천 사두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일년에 걸쳐 인도전역을 전도하러 다녔다. 이후 썬다 싱은 홍포와 담요, 그리고 신약성경 한 권외에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며, 그의 설교를 듣고 감사를 느끼거나 동정하여 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며 지냈다. 아무 것도 얻어먹지 못할 때는 풀뿌리와 나무 잎사귀를 먹고 지냈다. 잠자리를 제공해 주면 받고 제공해주지 않으면 동굴이나 나무 밑에서 잠을 잤다.

이런 삶의 방식은 초대교회 사도들의 삶과 전도방식이었다. 또한 12세기 성프란시스로부터 시작된 탁발수도회의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보다 인도의 종교적인 배경 속에서 힌두교의 성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했다. 사두, 산야시, 파키르라 불리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홍포만을 걸치고 다녔다. 이러한 힌두교의 성자적인 배경 속에서 불교도 탄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성자들은 인도사회에서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썬다 싱은 힌두교의 성자 복장과 삶의 방식을 택하여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인도교회의 새로운 전도자가 탄생했다. 외국에서 온 선교사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전도가 썬다 싱으로 인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은 그동안의 인도교회에서는 하나의 혁명이었다.

썬다 싱의 영웅적인 티베트 전도

썬다 싱은 19세 때인 1908년 최초의 티베트 전도를 시작했다. 이 때부터 티베트는 썬다 싱의 주요 전도지역이 되었다. 썬다 싱이 티베트를 선교지역으로 택한 것은 아직 티베트에서는 기독교 전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티베트 선교가 인도교회에 맡겨진 선교사명이라고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썬다 싱이 티베트에 더욱 마음이 끌린 것은 티베트 전도가 엄청난 고통과 고난이 따를 것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티베트는 전도하기가 가장 어려운 지역이고, 순교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는 썬다 싱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이기도 했다. 1908년 이후 썬다 싱의 계획은 일년의 절반 이상을 티베트에서 전도하며 보내고 겨울철에는 인도에서 선교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겨울철에는 티베트에서 내리는 엄청난 눈 때문에 순회전도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썬다 싱은 20세 때 1909.12월-1910.7월까지 성공회 소속의 성 요한 신학교에서 8개월 간 신학교육 받은 적이 있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자퇴하고 말았다. 이미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생생하게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는 썬다 싱에게 신학교의 지성적인 면에 치우진 교육은 너무나 맞지 않았다. 썬다 싱은 신앙은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가슴의 문제라는 생각을 굳혔다. 그러나 짧은 기간동안의 신학교 생활이었지만 썬다 싱의 평생 사역에 도움되는 면도 있었다. 그것은 이 기간동안 성인전과 신비주의문서,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같은 책을 접한 것이었다. 성 프란시스와 신비주의자들의 삶 등은 썬다 싱이 의도적으로 모방하려고 한 적은 없었지만 자신의 신앙체험과 삶의 방식을 설정하는 데 하나의 선례를 보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썬다 싱은 자신의 사역은 전도사역임을 깨닫고 하나의 교파에 매여 교파내의 교회에서만 설교할 수 있는 관행을 포기하고 복음을 전해듣지 못하는 모든 세상을 자신의 설교단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1912년 23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티베트 전도를 했다. 이 두 번째 티베트 전도여행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하기도 했다. 24세 때인 1913년 봄 3차 티베트 전도여행 때는 최악의 박해를 당하여 시체가 뒹구는 우물 구덩이에 3일 동안 갇혔다가 기적을 통해 구출 받는 사건을 경험하기도 했다. 또한 1913년 제4차 티베트 전도여행 때는 감옥 속에서 거머리떼에 2시간 피를 뜯기는 속에서도 전도하기도 했다. 30세 때인 1919년 여름 19살 때부터 시작된 티베트 전도가 10번째 되는 해 그 유명한 눈 속의 동사사건을 경험하기도 했다.

5대양 6대주 순회설교와 그의 비밀스러운 최후

썬다 싱은 1920-22년 그의 나이 31-32세 때 유럽을 비롯한 세계나라의 초빙을 받아 순회설교를 했다. 썬다 싱은 영국, 프랑스, 스위스, 독일, 스칸디나비아 삼국, 홀랜드 그리고 미국 호주, 팔레스틴 등 5대양 6대주를 다 돌아보았다. 그리고 35세 때인 1924년 6월 위궤양과 폐결핵으로 3년 간 요양을 한 후 40세 때인 1929년 4월 편지를 남기고 티베트로 간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 사람들은 백방으로 그를 찾아보았지만 그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빙벽들이 있는 그 준령의 협로를 통과하다가 천길 절벽으로 떨어졌는지, 폐결핵과 위궤양으로 고통받던 그가 어느 산길에서 홀로 쓰려져 잠들었는지, 티베트에서 박해를 당하여 쥐도 새도 모르게 이름 모를 산골짜기에 버려졌는지 추측만 무성할 뿐 아무도 정확한 그의 행적을 알지 못한다. 이렇게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전도자는 사라졌다.

썬다 싱이 남긴 신앙의 발자취

그러나 그가 우리 후배들에게 남겨준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은 참으로 많다. 사도바울에 비교되는 그의 특이한 회심을 통해 오늘도 살아 역사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의 뇌리에 다시 한번 각인시켜주었다. 또한 사도적 삶의 양식과 중세의 성 프란시스의 삶의 양식을 닮은 사도적 순회복음전도자로서의 그의 삶은 시대를 초월하는 강력한 헌신된 제자의 삶을 보여준다. 썬다 싱의 목숨을 건 히말라야의 티베트 선교는 오늘날도 미전도 종족 선교사들의 순교를 각오한 모범이 된다. 썬다 싱은 교회사의 3대 신비주의자로 인정될 정도의 신비체험을 많이 가진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의 기도와 전도의 균형 잡힌 삶은 수도원에 파뭍혀 개인적인 영적 체험만을 추구하는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들과 격을 달리하는 모범적인 신비적 체험소유자라 할 수 있다. 썬다 싱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도전이라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과 순교를 오히려 자발적으로 짊어지기를 바라며, 고난 속에서 오히려 기뻐하며 살았던 그의 삶이다. 그리하여 썬다 싱은 회심이후 자신의 평생을 그리스도와 임재 속에서 살아갔으며, 내적인 평화와 기쁨이 사라진 적이 없었다.

한 번은 서방의 한 기자가 썬다 싱에게 영적인 어두운 침체의 시기를 경험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썬다 싱은 자신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의 임재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몇 시간이상 넘어간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주님과의 동행하는 삶이 있었기에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깊이를 가장 최고의 깊이까지 감당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썬다 싱이 좋아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바로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진 사람입니다"였다. 썬다 싱을 20세기 최고의 전도자로 만든 비결이며,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비결이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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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람치 | 국어 공부 합시다 2010-12-29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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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람-치
<명사>
 
자기의 차지(몫). 제 ~만 장만하다. 제 ~로 기른 강아지.
<동의어> 낭탁(囊橐)②.
 
낭탁
약값은 받지를 않고 가난한 제 ~을 기울여 가면서…. <채만식:탁류>.
 
아람(제 차지).
 
③ 제 차지로 하는 것. 낭탁-하다 <타동사><여불규칙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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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칫-거리다 | 국어 공부 합시다 2010-12-27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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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칫-거리다
[―칟꺼―] <자동사>
 
어린아이가 이리저리 위태롭게 걸음을 떼어 놓다.
 
<동의어> 대다.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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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편-일률 | 국어 공부 합시다 2010-12-27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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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편-일률 
 
[千篇一律] <명사>
 
① 많은 시문의 격조가 모두 비슷비슷함.
 
② ‘여러 사물이 개별적 특성이 없이 모두 비슷비슷함’의 비유.

 

 

"사물이 모두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아 새롭거나 독특한 개성이 없고 재미가 없음을 말함.
천 편이나 되는 글이 오로지 한 가지 운율로만 되어 있다는 뜻으로, 시문들이 모두 비슷한 글귀나 형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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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쓴소리에 한나라당 '붉으락푸르락' | 나라 돌아가는 모습 2010-12-27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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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쓴소리에 한나라당 '붉으락푸르락'
장 교수 "한미FTA 시기상조...무상급식이 옳다"
10.12.27 17:28 ㅣ최종 업데이트 10.12.27 17:35 선대식 (sundaisik)
  
장하준 교수가 2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새로운 자본주의와 한국경제의 미래' 초청강연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장하준

"10등인 학생이 1등 학생들이 있는 반에 가면, 공부 제대로 못 하고 기만 죽는다. 아직 미국이나 유럽연합(EU)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은 시기상조다."(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

 

"한국(의 제품)은 과연 북미와 유럽시장에 가서 선진국 제품과 경쟁했을 때 도태될 수준이 아니다.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일류 선진국가로 올라설 수 있다."(백성운 한나라당 의원)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장하준 교수와 한나라당 의원들 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장 교수는 이날 한나라당이 초청한 '새로운 자본주의와 한국경제의 미래' 강연회에서 "한나라당이 (복지 문제 등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역할을 하기 바란다"면서 한나라당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한미FTA 등 선진국과의 FTA를 반대한다", "무조건 세금 깎아준다고 투자가 되고 성장 촉진이 되지 않는다", "보편적 복지를 해야 한다"며 한나라당의 주요 정책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의원들은 강연이 끝난 후 질의응답에서 "전제와 논리가 잘못됐다", "생각을 바꿔야 한다" 등의 격한 반응을 쏟아냈다.

 

장하준 "한미FTA 시기상조" - 한나라당 의원 "전제와 논리가 잘못됐다"

 

장하준 교수는 자신의 저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인용하며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한국과 미국 등 양국 간 FTA는 진정한 자유무역이 아니다, 미국산 자동차와 쇠고기를 무관세로 수입한다고 하면 일본 차와 호주산 쇠고기에 대해서는 차별하는 것"이라며 "다 같이 협상하자고 세계무역기구(WTO)를 만들었는데, 왜 우리나라가 앞장서서 깨고 다니느냐"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수준 차이가 나는 나라들끼리 FTA를 하면 단기간에는 좋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뒤떨어진 나라가 앞선 나라를 따라잡는 데 어려움이 생긴다"며 "1960년대 FTA를 했다면 지금의 현대자동차·삼성전자·포스코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가발을 만들고 있었을 것"이라며 말했다.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이나 생산성은 미국이나 스위스 등의 50%에 불과하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4만 달러 나라가 되기 위해 고급산업을 미국이나 유럽연합과 동등하게 경쟁하면서 개발할 수 있겠느냐. 5등짜리 학생이 1등 반에 들어가면 자극이 돼 생산성 증대효과가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그 정도 실력이 아니다. 시기상조다. 또한 금융규제 완화로 큰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

 

강연이 끝난 후, 많은 한나라당 의원들은 장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정태근 한나라당 의원은 "내수시장이 한계에 봉착해 있는 상황에서, FTA를 통해 경쟁력 있는 부문에서 시장을 개척해 성장 동력을 창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장 교수는 "한미FTA의 경제적 효과는 추정 방법에 따라 다르고 불확실하다"며 "기업들이 더 연구하고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환경을 만들어 투자율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 정부가 미국처럼 더 많은 돈을 연구개발비로 지원하는 등의 방법이 더 효과적"이라고 맞받았다.

 

백성운 한나라당 의원은 "(장 교수의) 전제와 논리가 잘못됐다"며 "한국은 선진국과 경쟁에서 일류 선진국으로 올라올 수 있는 수준에 와있다"며 "FTA를 한다고 해서 금융규제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수출의존도가 90%인 국가에서 FTA는 큰 틀에서 정당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장 교수는 "금융규제 완화와 한미FTA와는 큰 관련이 있다, 한미FTA에서는 파생상품과 관련해 명시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팔 수가 있다, 우리나라가 2008년 금융위기를 다른 나라보다 잘 넘긴 것은 파생상품 규제를 많이 해서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우리나라는 닫혀 있어 문제가 아니라, 너무 열려 있어서 문제"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의원들 "무상급식은 선별적으로" - 장하준 "더 큰 보편적 복지해야"

 

감세와 복지 문제도 큰 논쟁거리였다. 장 교수는 "감세를 해주면 투자가 잘되고 경제성장이 잘 된 예가 없다"며 "미국에서도 1960~70년대 2.6%였던 성장률이 레이건 노믹스 이후인 90년대에 1.6%로 낮아졌다, 세율을 낮춰야 한다는 것보다 세금을 걷어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쓰느냐를 얘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최근 논란이 되는 복지국가 논란과 관련, "복지국가는 부자한테 돈을 뺏어서 가난한 사람한테 나눠주는 것이 아니다"라며 "모든 국민이 공평하게 세금을 내고 광범위한 복지 혜택을 주는 복지국가야말로, 사회와 경제의 역동성을 증가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가는 국민에게 기본적인 교육·의료·주거·노후에 대한 보장을 해주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할 뿐만 아니라 실업보험·재교육 지원 등을 통해 재기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며 "스웨덴과 같은 복지국가는 자유무역에 반대할 것 같은데 미국보다 반대가 적다"고 말했다. 그는 "한나라당이 그러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역할을 하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후 질의응답에서 무상급식을 중심으로 논쟁이 벌어졌다. 장 교수는 "무상급식은 보편적 복지로 해야 한다"며 "돈을 낼 수 있는 집의 아이까지 무상급식을 해주는 것은 문제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 낙인효과를 생각하면 무상급식을 하는 게 옳다"고 하자, 강명순·김금래 한나라당 의원이 "(장 교수가) 생각을 바꿔야 한다"며 발끈했다.

 

강 의원은 "아이들에 대한 복지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재정이 부족한 상황에서 무상급식에 재정을 쓰면 아이들이 더 힘들어진다"며 "무상급식은 선별적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김금래 의원은 "저소득층 아이들한테 지자체에서 돈을 넣어주기 때문에 낙인효과가 없다, 낙인효과 때문에 무상급식을 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장하준 교수는 "그런 방법이라면 낙인효과가 덜할 수 있겠다"면서도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성적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많다, 아이들에게 더 진정한 기회 균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그 부모의 삶을 최소한으로 보장하는, 더 큰 틀에서의 보편적 복지가 필요하다"고 맞받았다.

 

"경제가 좋아져서 주가가 오른 것 아니다"

 

이날 장하준 교수는 지난해 4월 첫 번째 한나라당 초청 특강(관련 기사 : "진짜 보수라면 복지국가 만들고 사회통합 해야")에 이어 이번 강연에서도 금융 규제 완화와 '금융허브국가론'을 강하게 비판했다.

 

장 교수는 "폴 보커 백악관 경제회복자문위원회 의장은 '수십 년간 금융에서 혁신을 이룬 것은 현금자동인출기밖에 없다'는 말을 했다"며 "지난 30여 년간 세계를 지배해온 금융은 실물경제와 유리된 것으로 실물경제를 망쳤다, 아직도 금융허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우리나라 주가가 오른 것은 경제가 좋아져서가 아니다, 선진국들이 이자를 낮췄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그곳에서 돈을 빼서 이자율이 높은 우리나라 등으로 몰려온 것이다, 현재 주식 시장과 부동산 시장 등에 막대한 거품이 끼었다"고 주장했다. 장 교수는 "다시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돈이 빠져나가 큰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나라는 더욱 강도 높은 자본유출입 규제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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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토류 원소(稀土類 元素) | 기타 - 잡동사니 2010-12-26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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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토류 원소(稀土類元素, 영어: rare earth elements, rare earth metals)

 

 주기율표의 17개 원소의 통칭으로 스칸듐이트륨, 그리고 란타넘족 원소를 말한다.

 

종종 악티늄족 원소를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희토류"라는 이름은 지구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 원소들이기 때문에 붙여졌다.

 

현재 최첨단 산업제품류 및 첨단 군사무기류의 필수불가결한 재료이다.

 

 

"브라운관(CRT) 및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PDP)에 들어가는 형광물질이나 연마제로 쓰이는 광물자원입니다.

전세계 희토류 매장량의 43%, 생산량의 90%를 중국이 점하고 있습니다.

IT(정보기술), BT(생명공학기술) 산업에 주력하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절대 긴요한 광물자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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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 돈처럼 세탁될 때가 있다 | 이 책 꼭 읽자 - 일반 2010-12-25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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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 돈처럼 세탁될 때가 있다
[책 속으로 떠난 역사 여행 73] <선생님이 가르쳐준 거짓말>
10.12.25 14:41 ㅣ최종 업데이트 10.12.25 14:41 이기원 (jgsu98)

미국인 헬렌 켈러는 설리반 선생과 더불어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맹인에 농아였던 헬렌 켈러가 설리반 선생의 헌신적 도움 속에 글자를 익히고 말을 배우게 되는 과정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 겉그림 <선생님이 가르쳐준 거짓말>
ⓒ 휴머니스트
역사 교과서

 

이렇게 장애를 극복하고 성장한 헬렌 켈러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한국인들은 물론이고 미국인들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왜 그럴까. 장애를 극복하고 사람들과 소통한 삶이 지극히 평범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탓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이리하여 켈러는 사회계급이 삶의 기회를 지배할 뿐 아니라 심지어 시력까지도 결정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켈러의 연구는 단지 책에서 배운 게 아니었다. "나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공장과 열악한 빈민가를 가보았다. 비록 볼 수는 없었으나 냄새는 느낄 수 있었다.(책 속에서)

 

헬렌 켈러는 대학을 졸업한 후 장애 문제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계급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을 깨닫고 급진적 사회주의자가 되어 사회운동에 앞장섰다. 사회당 대통령 후보를 지지했고 선거 유세에 동참했다. 여성운동, 정치, 경제에 관한 다양한 글도 썼다.

 

1920년대 백인으로서는 파격적 행동을 보여주었던 헬렌 켈러의 삶은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예전에는 장애를 극복한 삶에 찬사를 보내던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지향한 이후에는 맹인이고 농아인 점을 부각시키면서 비난을 퍼부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헬렌 켈러의 삶은 미국의 교과서나 각종 매체에서 외면 받아 서서히 잊혀졌다.

 

3․1운동의 배경을 설명할 때 자주 거론되는 미국인이 있다. 윌슨 대통령이다. 그가 주창했던 민족자결주의는 우리나라 3․1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설명한다. 식민지 지배를 받는 민족이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민족자결주의는 약소국들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얘기임에 틀림없었다. 이런 근거를 내세워 미국 교과서들은 윌슨을 세계 평화에 앞장선 인물로 부각시킨다.

 

실제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윌슨 재임 시절 인종차별 정책이 확대되었다. 반공주의를 구실로 흑인 신문, 단체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감시하고 탄압했다. 윌슨의 두 번째 재임 시절에는 반공주의와 반노동조합의 마녀사냥이 휩쓸고 지나갔다. 약소국들에게 냉혹한 제국주의 정책이 서슴없이 실행되었다.

 

윌슨 재임기에 일어났던 이런 사실들은 공식 교과서에는 실리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 청소년들은 윌슨이 세계 평화에 앞장선 위대한 인물로 이해하고 학교 교문을 나서게 된다. 교과서가 보여주는 역사는 애국심을 심어주기 위한 것, 진실을 낙관적으로 전해주는 것, 실패에 관해서는 도덕적 교훈으로서의 가치만 강조하고 주로 성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한정된다. 그 이외의 사실들은 세탁되어 사라진다.

 

미국 교과서의 잘못된 역사 서술 문제를 비판한 <선생님이 가르쳐준 거짓말>은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포장하거나 세탁 과정을 거쳐 삭제해버리는 사례는 많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 중국의 동북공정, 한국의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을 둘러싼 갈등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교과서가 잘못되었을 경우, 교과서 그대로 가르친다는 것은 거짓말을 가르친다는 걸 의미한다. 그래서 <선생님이 가르친 거짓말>이란 책 제목이 교사들에게 채찍처럼 아프게 날아와 감긴다.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할까. 책을 읽으며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미국 교과서에 등장하는 미국 역사 인물들의 실상과 허상을 폭로하고 인종주의 반공주의 등의 국내외 문제의 진실을 파헤친 제임스 W. 코웬이 번역판 서문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전해준 말 또한 곰곰 되새겨볼만한 가치가 있다.

 

미국은 물론 한국도 국수주의자가 아닌 애국자가 필요하다. 애국자를 배출하는 최선의 방책은 학생들이 역사 교과서의 독단적 가르침에 도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내가 <선생님이 쓴 거짓말>을 쓴 이유도 그와 똑같다. 아무쪼록 여러분이 이 책을 읽고 미국인이 저지른 잘못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이 책을 어느 나라에서나 유용하게 따를 수 있는 비판적 역사 서술의 본보기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책 속에서)

 

덧붙이는 글 | 제임스 W. 로웬/남경태 옮김/휴머니스트/2010.10/2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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